침대와 침대를 오가며 - 의학과 사랑 그리고 나
퍼트리샤 그레이홀 지음, 송섬별 옮김 / 물결점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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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취약했다.” 동성애자는 일에서도 사랑에서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편견 또는 저주를 깨뜨리고자 고군분투하는 저자의 삶이 눈부시게 그려진다. 마지막 그 한 문장까지 완벽하게 감동적인, 진솔하고 아름다운 이야기. 사랑에선 그토록 헤매는 게 더 인간적인 것 같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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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손더스의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를 읽고 얻은 뜻밖의 수확은 톨스토이다. 이 책에는 손더스가 말하고 내가 격하게 동의하는 바, ‘70년에 걸친 러시아의 믿을 수 없는 예술 르네상스(고골, 투르게네프, 체호프, 톨스토이뿐만 아니라 푸시킨, 도스토옙스키, 오스트롭스키, 튜체프, 차이콥스키, 무소륵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등 다수가 활동하던 시대) 시기’에 쓰인 러시아의 단편 7편 전문이 실려 있다. 거의 읽어본 작품들인데 한 가지, 오잉?! 내가 이걸 안 읽었다고? 읽었는데 잊었나? 이럴 수가!! 했던 작품이 있다.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의 마지막 장을 장식하는 톨스토이의 <단지 알료샤>라는 작품이다.

작품을 읽기 전, 제목만 읽었을 때는 ‘단지’를 ‘오직’, ‘오로지’란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단지(但只). ‘Only, Alyosha’와 같은 의미로. 그런데 이 작품을 읽기 시작하자마자 곧 여기서 말하는 단지란 ‘항아리(Pot)’를 뜻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짧은 단편인데도 전문을 읽다가 울컥했다. 이 작품을 내가 왜 여태 몰랐지? 안 읽었을까 싶은 충격. 이래서 내가 톨스토이를 아예 내려놓지를 못하지 싶었다. 다른 책으로 다시 읽어보고 싶어서 찾아봤더니 최근 출간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2번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항아리 알료샤>라는 제목으로, 문학동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는 <알료샤 고르쇼크 Алёша Горшок>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여기서 말하는 ‘고르쇼크горшок’가 러시아어로 단지, 항아리를 뜻한다. 열린책들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도 <알료샤 항아리>라는 단편으로 실려 있다. 

제목에 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그만하고.... 내가 왜 이 이야기에 단번에 빠져들었는가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이 글을 쓰기 전 한 번 더 읽어볼 요량으로 민음사판 <항아리 알료샤>를 펼쳤다(<밀리의 서재>에 있기에). 톨스토이의 단편이 대게 그렇듯이 이야기 자체는 참으로 단순하다. 단지 알료샤, 그러니까 항아리 알료샤라고 불리는 이 인물은 바보나 마찬가지로 톨스토이 작품에 종종 등장하는 순박한 바보의 전형이다. 그가 항아리 알료샤라고 불리게 된 이유도 꽤 단순하다. 어느 날 어머니가 우유 항아리를 마을의 부제(副祭)에게 가져다주라는 심부름을 시켰는데 알료샤가 넘어지면서 항아리를 깨뜨렸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그를 때렸고, 그때부터 아이들은 그를 ‘항아리’라며 놀리기 시작한다. 항아리 알료시카- 

작고 마른 아이로 코가 큰 알료샤는 이때부터 항아리 알료샤라 불리며 마을 아이들의 놀림의 대상이 된다. 글을 몰랐고 글을 배울 시간도 없는 알료샤. 그럼에도 그의 미덕이라면 묵묵히 일을 잘한다는 것.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도와 여섯 살에 이미 누이와 함께 방목장에서 양과 소를 지켰고, 좀 더 자란 후에는 방목장에서 밤낮으로 쉬지 않고 말들을 관리한다. 열두 살부터는 밭을 갈고 마차를 몰았다. 힘은 없지만 수완이 좋은 알료샤. 알료샤가 열아홉 살 되던 해에는 그의 형이 병사로 징집되는 바람에 형이 일하던 상인의 집에서 형을 대신해 허드렛일 하는 하인으로 보내진다. 그런데 이 상인의 집에서도 약하고 어리숙해 보이는 알료샤를 그리 탐탁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알료샤의 아버지는 이 녀석은 찍소리도 하지 않고 일을 잘한다고 장담했고, 상인은 떨떠름하지만 그의 말을 한번 믿어보기로 한다.

처음에 상인의 가족은 알료샤를 좋아하지 않는다. 교육받지 못한 티가 나고, 옷도 못 입고, 태도도 정중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너’라고 부르는 이 바보 같은 소년, 아니 청년을 좋아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곧 다들 그에게 익숙해진다. 그는 형보다 훨씬 더 쓸모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정말 찍소리 하지 않으면서 소처럼 묵묵히 일한다. 그래서 집에서처럼 상인의 집에서도 모든 일거리가 알료샤에게 주어진다. 그가 일을 많이 할수록 더 많은 일이 그에게 떨어진다. 주인의 아내도, 주인의 어머니도, 주인의 딸도, 주인의 아들도, 점원도, 여자 요리사도 모두가 그를 여기저기로 보내 이런저런 일을 하도록 만든다. 그래도 알료샤는 찍소리 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해낸다. 그리고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는다. 

이렇게 바보처럼, 묵묵히 자기에게 주어지는 일은 무엇이나 순종적으로 하는 항아리 알료샤의 생에도 무슨 일이 일어나긴 할까? 그저 이렇게 묵묵히 살다가 묵묵히 죽어가는 소시민의 일상을 보여주는 것인가? 싶은데 그에게도 무슨 일이 일어나기는 한다. 이 순간을 톨스토이는 이렇게 덤덤히 쓴다.


“알료샤는 상인의 집에서 일 년 육 개월을 그렇게 산다. 그리고 두 번째 해 하반기에 접어든 그때 그의 인생에서 가장 이상한 사건이 일어났다.” 



손더스의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에서는 이 장면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그렇게 알료샤는 1년 반을 살았는데 갑자기 두 번째 해 하반기에 그의 평생 일어난 적이 없던 일이 일어났다.”



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하지 않은가? 이 문장을 읽을 때 나는 ‘사랑이구나....’ 했다. 그의 평생 일어난 적이 없던 일, 그의 인생에서 가장 이상한 사건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을 수 있을까?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열아홉에 상인의 집에 들어와 하인처럼 일하는 청년에게 갑자기 일화천금이 주어질 리도 없고, 그가 갑자기 똑똑해지는 일은 더 불가능할 것이다. 일 년 반이 지났으면 스무 살을 갓 넘긴 나이이리라. 그런 그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이상한 사건이란 사랑, 누군가를 마음에 품는 일이 아니고서야 또 무엇이 가능하랴.

이윽고 톨스토이는 이렇게 쓴다. 

그 사건이란 그가 사람들 사이에 서로의 필요 때문에 생기는 관계 외에도 대단히 특별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 즉 부츠를 손질하거나 장에서 산 물건을 나르거나 말을 마차에 매기 위해 사람이 필요한 관계가 아니라 어떤 용무 없이도 돌봐 주고 애정을 쏟기 위해 사람이 필요한 관계도 있다는 사실, 그리고 알료샤 자신이 다름 아닌 그런 사람이 되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놀라움 속에서 알게 된 것이다. 그는 식모를 통해서 우스치니야를 알게 됐다. 우스츄샤는 고아였고 젊었고 알료샤와 마찬가지로 부지런했다. 그녀는 알료샤를 동정하게 됐고, 알료샤는 다른 사람이 그를, 그 자신을, 그의 도움이 아닌 그 자신을 필요로 하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서로의 필요 때문에 생기는 관계 외에도 대단히 특별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 “어떤 용무 없이도 돌봐 주고 애정을 쏟기 위해 사람이 필요한 관계도 있다는 사실” “그리고 알료샤 자신이 다름 아닌 그런 사람이 되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그는 “놀라움 속에서 알게”된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은 그에게 스며든다. 사랑이 스며든다는 표현은 이 우직한 항아리 알료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톨스토이는 “그가 그녀를 쳐다보면 그녀가 웃음을 터뜨리고 그도 웃음을 터뜨린다.”라고 쓸 뿐이다. 이 감정이 어찌나 새롭고 이상야릇했던지 알료샤는 처음에는 두려울 정도이다. “그래도 그는 기뻤고, 우스치니야가 꿰매 준 바지를 보았을 때는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짓는다. 일할 때나 걸어갈 때 종종 우스치니야를 떠올린다. 우스치니야는 그에게 자기 운명을, 자신의 사연을, 온갖 사연을 들려준다. 그녀는 말하기를 좋아했고, 그는 그녀의 말을 듣는 게 즐겁다. 함께 웃고 자기의 숨겨진 이야기를 털어놓고 그 이야기를 듣기를 즐기는 두 사람. 사랑이다. 소박하지만 단순하고 그래서 깨끗한 사랑.

그래서 그들의 사랑이 결실을 맺는가? 그렇다면 이 소설은 별다른 매력 없이 잊혔을 것이다. 내게 이토록 인상 깊게 다가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알료샤와 우스치니야 둘 사이에는 결혼 이야기가 오간다. 하지만 그건 둘 사이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알료샤의 아버지도, 상인도 이 항아리 단지가, 묵묵하게 일 잘하는 항아리 단지 알료샤가 하녀인 우스치니야와 결혼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알료샤의 아버지는 그래서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무 생각도 안 했다니. 결혼하고 싶어 했잖느냐. 때가 되면 내가 결혼시켜 줄 거다. 도시의 행실 나쁜 여자 말고 참한 여자를 골라 결혼을 시킬 거란 말이다.
 아버지는 많은 말을 했다. 알료샤는 서서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가 말을 마치자 알료샤는 빙그레 웃었다.
 “좋아, 그만둬도 괜찮아.”
 “아무렴, 그렇고말고.”
  아버지가 떠나고 우스치니야와 단둘이 남게 되자 그는 그녀에게 말했다.(아버지와 아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녀는 문 뒤에 서서 듣고 있었다.)
 “우리 일은 글렀어. 뜻대로 안 될 것 같아. 들었지? 아버지가 화가 나서 못 하게 해.”
 그녀는 앞치마에 얼굴을 묻고 말없이 흐느꼈다.
 알료샤는 혀를 찼다.
 “어떻게 거역하겠어. 그만둬야 할 것 같아.”


이런 바보! 멍청이! 답답이! 아버지의 단 한마디에 포기하고 마는 알료샤, 심지어 그렇게 쉽게 단념하는 알료샤의 모습을, 아무런 저항 없이 순종적으로 따르는 이야기를 문 뒤에서 우스치니야는 다 듣고 있다... 이렇게 가슴 아플 수가! 게다가 자신의 아버지가 화가 나서 결혼을 못하게 한다는 말을 전하면서 알료샤는 혀를 찰뿐이다. “어떻게 거역하겠어. 그만둬야 할 것 같아.”

정말 바보 같은 놈이로군, 쯧, 나조차도 혀를 차게 된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러나......


 저녁에 상인의 아내가 그를 불러 창의 덧문을 닫으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때, 아버지의 말을 따를 거지? 바보 같은 생각은 버린 거냐?”
 “그만둬야 할 것 같아.” 알료샤가 말했다. 그는 웃음을 터뜨리는 동시에 울기 시작했다.




-조지 손더스,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 중 <단지 알료샤>



<착가는 어떻게 읽는가>에서 이 부분을 읽던 순간, 나는 저 문장에 밑줄을 긋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웃음을 터뜨리는 동시에 울기 시작했다. 그는 웃음을 터뜨리는 동시에 울기 시작했다. 그는 웃음을 터뜨리는 동시에 울기 시작했다. 그는 웃음을 터뜨리는 동시에 울기 시작했다. 그는 웃음을 터뜨리는 동시에 울기 시작했다. 한 문장에 이토록 많은 의미를 담을 수가 있을까. 알료샤, 늘 미소를 잃지 않는 알료샤, 항아리 알료샤. 누가 하라는 대로 묵묵히 살아가는 알료샤, 그래서 결혼조차 아버지가 하지 말라면 쉽게 포기하고 그러곤 웃지만....... 결국 울지 않을 수 없는 알료샤. 저 눈물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담겨 있을까. 그러나 알료샤 자신도 그 눈물의 모든 의미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알료샤는 이제 어떻게 살아갈까? 다시 묵묵히 그들의 필요에 따라 일해주면서 살아갈까? 그 후 알료샤의 인생은 짧게 끝난다. 그는 어느 날 지붕 위에 눈을 치우다가 떨어져 다치고 며칠 앓다가 죽는다. 죽기 전 우스치니야와 나누는 말도 항아리 알료사, 그답다. 그래서 매우 함축적이다.


“어떡해, 정말로 죽는 거야?” 우스치니야가 물었다.
“그러면 어때? 우리가 언제까지나 계속 살겠어? 언젠가는 죽어야 해.” 알료샤는 늘 그랬듯이 빠르게 말했다. “날 가엾게 여겨 줘서 고마워, 우스츄샤. 아버지가 결혼을 막은 게 더 잘된 일이야. 결혼해 봤자 아무 소용도 없었을 거야. 이제 다 괜찮아.”

그는 별로 말을 하지 않았다. 물을 달라고 청했을 뿐 계속 무언가에 놀라곤 했다
그는 무언가에 놀라더니 몸을 쭉 뻗고 죽었다.


오직 한 번 사랑했으나 함께 살 수 없었던 여인, 결혼할 수 없었던 여인, 그 여인에게 언젠가는 우리 모두 죽어야 한다며, 자신을 가엾게 여겨 줘서 고맙다고, 결혼해봤자 아무 소용없었을 것이라면서 이제 다 괜찮다고 체념과 단념 속에 죽어가는 알료샤. 그는 계속 무언가에 놀라곤 한다. 무엇에 놀랐을까? 조지 손더스는 이 작품을 다 말하지 않는 것, 생략의 묘미가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 작품이라 칭송한다. 그러면서 “그는 별로 말을 하지 않았다. 물을 달라고 청했을 뿐 계속 무언가에 놀라곤 했다. 그는 무언가에 놀라더니 몸을 쭉 뻗고 죽었다.”라는 문장 뒤에 이런저런 가능한 이야기들을 이어서 써본다. 그러나 그 무엇도 저 두 문장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저 위의 문장 “그는 웃음을 터뜨리는 동시에 울기 시작했다.”에 적용해도 마찬가지이다. 이 문장 후에 알료샤의 심정을, 왜 우는지 구구절절 설명한다면 이 작품의 심오하고도 미묘한 감동이 고스란히 전해질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알료샤가 사랑을 포기한 후 웃다 눈물짓는 모습도, 체념 속에 다 죽어가면서 그럼에도 어느 순간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놀랐다가 숨을 거두는 모습도 문장으로 그 까닭을 구구절절 설명하기엔 부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심정을 이 작품을 읽는 독자는 저마다 자기의 사정과 생의 경험에 비추어 헤아리고 반추해보지 않을까? 톨스토이도 그래서 이렇다 저렇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았으리라. 인생에는 포기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다. 놓을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다. 그렇게 생에 순종하고 살았다고 해서 그가 어리석기만 한 존재는 아닐 것이다. 포기했다고 해서 그의 마음속을 비추던 한줄기 빛마저 완전히 잊고 살아갔을까? 그렇게 비천한 자기의 생에도 가끔 빛이 있던 때가 있노라고 그래서 놀라움 속에 죽어간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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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2026-03-05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가 드니 열정에 내 모든 것을 맡기는 이야기보다 이런 이야기... 결국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이야기에 더 마음이 가는 것 같아요. 용기를 내고 행동하고 내 모든 것을 거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체호프의 <애수> 라는 작품도 내 슬픔에 아무도 관심이 없어서 결국 말한테 슬픈 마음을 털어놓잖아요. 러시아 소설은 아무 것도 못하는 이야기가 많네요. 작년에 읽은 <연기>도 그렇고.
어떤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데 결국 아무 것도 못했다를 문학으로 쓰는 게 훨씬 어려울 것 같아요.
전 오늘 아침부터 들어간 회의에서 못난 모습 보여서 좀 우울하게 시작했어요.
잠자냥님은 봄기운 느끼며 무탈한 하루 보내시길.

잠자냥 2026-03-05 12:53   좋아요 0 | URL
케이 님 말씀처럼 러시아 문학 작품에서는 이렇게 결국 세계에 굴복(?)하는, 운명에 순응하는 이야기가 많은 것 같아요(<애수>도 그렇고 <연기>도 그렇고...). 그런데 역시 케이 님 말씀처럼 용기를 내서 행동하고 결국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인생이 얼마나 많이 존재하겠습니까. 해도 안 되는 일도 있고, 시도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일들이 더 많죠. 그래도 살아가는 게 인간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그걸 다 꿰뚫어 보고 깊이 있게 써 내려가는 러시아문학을 좋아할 수밖에 없고요.

점심때 맛있는 거 드시고 우울함을 날려버리셨길 바랍니다!

다락방 2026-03-08 09: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좋네요. 너무 좋습니다. 제가 읽었더라도 정말 좋았을 작품인 것 같습니다. 잠자냥 님의 인상깊은 구절 얘기에는 조용필의 노래 가사도 떠올랐어요.

아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그대 나의 사랑아...

ㅠㅠ

잠자냥 2026-03-09 12:26   좋아요 0 | URL
악 조용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6-03-09 13:17   좋아요 0 | URL
내 나이 어쩔거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세 번째 경찰관 을유세계문학전집 147
플랜 오브라이언 지음, 이정화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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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참 어려운 팬케이크군요.“ 그야말로 난해한 팬케이크 같은 작품. 오랜만에 머리 쥐어 뜯으며 읽었다. 진짜 아스트랄하다. 그런데도 참 신기한 것은 그 나름의 재미가 있다는. 그들에게 대체 자전거는 무엇인가? “인간 존재란 하나의 환각“이라는 드 셀비의 저작을 읽어보고 싶구나.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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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휴가 - 미시마 유키오 에세이
미시마 유키오 지음, 박성민 옮김 / 시와서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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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예술이란 내 자아의 타자다.’ 미시마 유키오의 문학관/예술관을 내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무엇보다 인간으로서 미시마를 더 이해하게 된다. 나약함과 감수성에 대한 극도의 혐오, 그에 대한 반동으로 열렬히 강함을 추구한 것은 결국 그가 감수성 넘치는 약한 인간임을 증명한 게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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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 - 조지 손더스의 쓰기를 위한 읽기 수업
조지 손더스 지음, 정영목 옮김 / 어크로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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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있게 읽기, 그것은 결국 깊이 있게 소설을 쓰는 법이기도 하다. “여전히 인생을 소설에 바치고 싶은가?”라는 물음에 (읽기이든 쓰기이든) “네”라고 답할 모든 이들을 위한 책. 특히 ‘러시아의 믿을 수 없는 예술 르네상스’시대에 쓰인 작품들을 또 다른 관점으로 읽은 것만으로도 흡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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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2-27 12:3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더 정직해지자. 우리 읽고 쓰는 사람은 읽고 쓰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읽고 쓰면 더 살아 있는 것 같기 때문에 읽고 쓰며, 그 전체적인 순수 효과가 제로라는 것을 누가 증명한다 해도 계속 그럴 가능성이 크며, 나 자신은 그 전체적인 순수 효과가 마이너스라는 것을 누가 증명한다 해도 계속 그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조지 손더스,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

책읽는나무 2026-02-27 16: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오래전에 읽다가 잠깐 덮어뒀었는데 이제서야 생각이 나네요.ㅋㅋㅋ

잠자냥 2026-02-27 16:49   좋아요 2 | URL
펼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