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 베 스타인의 환희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남수인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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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 잃어버림은 어떤 대상이 아주 없어지거나 사라진 것을 의미한다. 체념이나 단념, 포기 등으로 상실을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그러기 쉽지 않을 때 사람은 종종 되찾기를 행한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서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잃은 대상 그 자체를 되찾거나 그와 똑같은 또 다른 대상을 새로이 구하는 것이다. A와 똑같은 A-A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잃어버린 A가 아니기에 A라고 할 수는 없다. 잃어버린 대상이 물건이라면 그와 똑같은 물건을 다시 구함으로써 잃어버림을 대체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대상이 사람이라면 대체는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사람을 상실했을 때 많은 이들이 그토록 아파하는 것이리라. 그럼에도 생은 흐르고 사람들은 그 삶에 적응코자, 살아가고자 상실을 메꿀 무언가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한 사람을 잃고 난 후 그를 되찾지 않는 한 그와 똑같은 사람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른 형태의 복원은 가능하겠지만.

뒤라스의 <롤 베 스타인의 환희 Le ravissement de Lol V. Stein>는 사랑의 상실과 그 복원의 불가능성을 말한다. 열아홉 소녀 ‘롤 베 스타인’은 어느 아침, 테니스장에서 ‘마이클 리처드슨’을 알게 된다. 그는 스물다섯. 롤은 그에게 반해 그와 약혼한다. 이 약혼 소식을 듣고 롤의 학교 친구인 타티아나는 믿을 수 없어한다. ‘롤이 송두리째 혼을 빼앗길 만한 어떤 이를 발견하다니 그런 일이 가능한가? 롤이 자신의 관심을 송두리째 쏟게 한 사람을, 또는 결혼까지 할 만큼의 관심을 끈 사람을 발견했다니, 그게 가능한 일이랴? 그 누가 롤의 미완의 마음을 정복할 수 있었으랴.’ 이것이 롤의 가장 친한 친구의 반응이다.

어떻게 이런 반응이 나왔을까? 그도 그럴 것이 롤은 조금 남다른 소녀로 타티아나의 눈에 롤은 항상 뭔가 늘 비어있는 듯한, 뭔가가 부족한 아이로 보였기 때문이다. 한없이 부드럽지만 매사에 지극히 무관심한 롤, 사람들은 롤이 결코 괴로움이나 고통을 느끼는 적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한다. 소녀다운 눈물조차 보인 적이 없다고. 롤은 예뻤고 학교에서는 누구나 너도나도 롤과 친구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럼에도 롤은 ‘손가락 사이의 물처럼 붙잡을 수 없는 느낌’이며 ‘그녀의 일부는 주변사람들과 현재 순간으로부터 멀리 가 있는 듯’하다. 타티아나는 롤이 항상 어딘가 다른 곳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까닭은 롤의 마음이 ‘여기’에 없기 때문이라고, 그러니까 롤의 남다른 점은 바로 감정이 머무는 곳이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그렇게 무심한 아이가 누군가에게 열광적으로 반해 약혼한 사실은 그래서 가장 친한 친구조차 믿을 수 없는 대사건인 것이다. 이윽고 타티아나는 마이클 리처드슨을 알게 되고 롤이 그에 대해 지닌 광적인 열정을 목격하면서 자신이 틀렸나 보다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의구심은 남는다.

약혼한 지 6개월쯤. 결혼식은 가을로 예정된 때. 학교를 졸업하고 롤과 타티아나가 티 비치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을 즈음 시립 카지노에서 하계 대 무도회가 열린다. 그리고 이날, 이 무도회는 롤에게 결코 잊기 어려운 기억을 안겨준다. 그녀 인생 최대의 비극이 바로 이날 일어나는 것이다. 무도회장에는 롤과 타티아나, 그리고 롤의 약혼자 마이클 리처드슨이 함께한다.  약혼자와 가장 친한 친구, 셋이 함께한 자리라면 즐거워 마땅할 텐데 어떤 비극이 일어나는가? 타티아나와 마이클이 눈이라도 맞나? 차라리 그렇다면 나을까? 무도회장에 검은 드레스를 입은 한 여인이 등장한다. ‘안 마리 스트레테르’라는 이름의 여인. 그런데 마이클은 이 여자를 보는 순간 눈빛이 달라진다. 마이클은 여자와 춤을 춘다. 첫 번째 춤이 끝난 후에는 롤에게 돌아온다. 마이클은 한 번 더 여자와 춤을 춘다. 그런데 두 번째 춤이 끝난 후에는 롤에게 돌아오지 않는다. 영원히 롤에게서 떠난다. 마이클이 여자의 손을 잡고 무도회장을 떠나는 순간 롤은 기절한다. 하룻밤 무도회에서 약혼자를 다른 여인에게 빼앗긴 롤 베 스타인. 롤은 이 사건으로 말을 잃는다. 사랑을 상실하고 언어마저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제 롤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살아남는가. 롤은 결혼하다. 마이클이 아닌 다른 남자와. 그것도 우연히 만난 남자와 결혼해 고향을 떠나버린다. 10년이 흐른다. 그 10년의 세월 동안 롤은 감수성도 욕망도 잃어버린 채 무미건조한, 그저 차가운 질서만 따르며 살아간다. 롤이 모든 욕망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그녀의 결혼 생활 10년이 말해준다. 롤은 단지 타인을 모방하는 일에만 마음을 쏟는다. 차가운 기성품 취향…. 침실이나 거실 인테리어는 상점 진열장의 것을 그대로 본떴고, 롤이 가꾸는 정원은 동네의 다른 집 정원들의 복사판이다. 롤은 모방하고 또 모방한다. 다른 사람들, 다른 모든 사람, 최대한 많은 수의 다른 사람들을 모방한다. 이 텅 빔. 결핍과 구멍의 세월…. 그러나 애초부터 롤을 알지 못한 채 눈먼 결혼을 한 롤의 남편 ‘장 베드포드’는 그 10년 동안 어떤 결핍도 크게 느끼지 못한다. 

비어 있는 사람은 롤, 마이클을 잃기 전, 학창 시절에도 ‘이미 뭔가 결여된 것이 있었’던 롤이다, ‘그때 벌써 이상하리만큼 불완전’했던 롤, 어떻게 되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되지 못하는 모습을 갈구하며 소녀 시절을 보낸 롤, 우정을 지속시킬 줄 몰랐으며 심심하다고 뭔가 재미있는 걸 해 보려 한 적도 없고, 소녀다운 눈물을 보인 적조차 없었던, 그리하여 감정이 머무는 곳이 없는 것만 같았던 비어있음의 대명사와도 같은 롤 베 스타인의 공허만이 10년의 결혼 생활을 관통한다. 그런데 10년이 지나 문득 어느 날 롤은 고향에 돌아온다. 거기에서 롤은 옛 친구 타티아나와 그녀의 정부(情夫) ‘자크 홀드’를 목격한다. 롤은 자크를 보는 순간 타티아나로부터 그를 빼앗기로 결심한다. 친구의 남자를 갖기로 마음먹는다. 롤은 왜 이런 선택을 하는 것일까? 롤과 타티아나, 자크의 관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롤은 자크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그 먼 시절의 상실을, 거세된 욕망을, 잃어버린 욕망을 되찾을까? 복원하게 될까?


우리는 잃어버린 환상, 실낙원a lost paradise을 결코 되찾을 수 없지만 되찾길 추구하며 여생을 보내게 된다. 애초에 우리가 이 낙원을 소유한 적이 없다는 사실, 우리는 결코 완전한 존재였던 적이 없으며 단순하고 마음이 태평하기만 했던 적이 없다는 사실은 낙원을 되찾으려는 우리의 결심을 조금도 굽히지 못한다. 라캉은 이 실낙원을 ‘큰사물theThing’로 명명하는데, 이 대문자 T는 그것이 그저 평범한 환상의 대상이 아니라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매우 특별한 것임을 나타낸다. 우리 마음속 가장 깊은 욕망이 바로 이 큰사물이다. -마리 루티, <가치 있는 삶>, pp.94~95


<롤 베 스타인의 환희>를 읽는 동안 마리 루티의 몇몇 구절이 떠오른다.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라는 바르트의 말(<사랑의 단상>)도 떠오른다. 뒤라스가 약혼자를 납치당한ravissement 여자, 사랑을 빼앗긴 여자, 욕망을 거세당한 여자 롤을 통해 사랑과 대상, 욕망의 문제를 사유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내 욕망이며, 사랑의 대상은 단지 그 도구에 불과하다.’(<사랑의 단상>) 말한 바 있다. 학창 시절 롤은 무언가를 강렬히 욕망하는 사람이 아니다. 마음이 결핍된 사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비어 있다. 그런 그녀가 단 한번 열광했던 대상은 약혼자이다. 그런데 이 약혼자를 다른 여자에게 ‘강탈당한ravissement’ 후 ‘빼앗긴’ 이후 그녀는 말을 잃고 모든 욕망을 잃어버린 듯 기계처럼 살아간다. 마이클이라는 대상을 욕망함으로써 주체였고 또한 마이클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대상이자 욕망의 주체였던 롤은 약혼자가 내팽개침으로써 욕망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존재, 언어도 생명도 잃어버린 존재로서 자기를 인식하고 그렇게 살아간다. 그러나 그녀는 자크 홀드-가장 친한 친구의 애인을 사랑하기로, 유혹하기로, 빼앗기로 결심하면서 다시 욕망하는 주체가 되고, 바라보는 자-자크 홀드 또는 자크 홀드와 타티아나를-로서 또한 주체가 된다. 더욱이 이번에는 빼앗는 위치이다. 자기의 욕망에 불을 댕길 대상, 즉 도구를 찾은 셈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타티아나일까? 타티아나는 그 여름의 무도회장. 그러니까 롤이 상실의 가장 큰 경험을 한 그 공간에 함께 있었던, 그럼으로써 그 상실의 과정을 누구보다 생생히 지켜본 사람이다. 그렇기에 롤의 주체로서의 복원은 바로 거기, 잃어버린 공간에서부터 시작되어야만 한다. 

롤은 마이클을 잃어버렸으므로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부재에는 항상 그 사람의 부재만이 존재한다. 떠나는 것은 그 사람이며, 남아있는 것은 나 자신이다. 그러므로 부재를 말한다는 것은 곧 주체의 자리와 타자의 자리가 교환될 수 없음을 단번에 상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재는 지속되고, 나는 그것을 견디어내야만 한다. 부재는 결핍의 문형이다. 나는 동시에 욕망하며 욕구한다. 그 사람의 부재는 내 머리를 물속에 붙들고 있다. 그것은 사랑의 출발점, 내가 매혹되었던 그 순간부터 이미 치러졌던 한 장례에 대한 공포이다.’(<사랑의 단상>) 무도회장에서 마이클이 떠남으로써 영원히 교환될 수 없었던 주체와 타자의 자리. 사랑의 출발점이었지만 장례식장이기도 했던 그 무도회장에서 롤은 다른 대상과 함께 사랑을 복기함으로써 다른 형태의 복원에 이르기를 꿈꾼다. 

롤은 어딘가 비어 있었던 것 같은, 텅 빈 존재로서 살다가 한 번의 잃어버린 환상, 마이클이라는 실낙원a lost paradise을 만났으나 그것은 애초부터 잃어버린 환상이었으므로 사라짐이 마땅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의 대체물을 찾는다. 그것은 사람이 되기도 하고 열망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떠한 대상도 ‘큰사물theThing’의 환상적인 완벽함을 똑같이 복제해 낼 수 없기에 인간은 ‘큰사물theThing’의 대체물을 찾는 탐구를 끝없이 반복할 수밖에 없다. 롤은 그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그녀는 환상이 부서졌던 공간을 찾아간다. 그리고 자크와 사랑의 행위를 함으로써 잃었던 언어를 되찾는다. 그러나 자크(A-A)는 마이클(A)이 아니다. 마이클을 사랑했듯이 자크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물, 잃어버린 환상을 대체할 다른 환상을 갖기로 결심한 그 순간에, 그리고 그와 함께 그 장소-10년 전의 무도회장을 찾아감으로써 롤은 변화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성공한다. 롤은 자크를 선택함으로써 잃어버린 자기 욕망을 되찾은 것이다. 그것이 롤에게는 중요하다. “어느 날인가 그 사람을 정말로 단념해야 하는 날이 오면, 그때 나를 사로잡는 격렬한 장례는 바로 상상계의 장례이다.”(<사랑의 단상>). 이 상상계의 장례를 마침내 치를 수 있었으므로, 10년 전에는 기절해 버렸기에 종결지을 수 없었던 그 장례를 10년이 지나 복기함으로써, 롤은 욕망의 복원에 성공한다. 

롤의 환희ravissement는 예전의 약혼자, 그 사랑을 되찾아서도 아니며, 그 사랑을 지울 완벽한 환상을 맞닥뜨려서도 아니다. 대체물을 찾았기 때문이다. 결국 사랑의 대상을 욕망하는 자기 자신, 그 욕망의 복원에서, 파괴의 고통 속에서도 되살아남의 희열을 느꼈기에 환희로 나아간 것이리라. 롤이 자크와 계속 사랑할지는 알 수 없다. 연인으로 존재할지도 알 수 없다. 다만 그녀가 잃었던 자기의 욕망을 되찾음으로써 더는 모방의 삶을 살아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밖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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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5-12-11 14: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 너무 좋아요👍👍❣️

단발머리 2025-12-11 17: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 너무 좋아요! 2 👍👍

독서괭 2025-12-11 17: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 너무 좋아요! 3 👍👍 (사실 아직 안 읽음…)

잠자냥 2025-12-11 17:26   좋아요 0 | URL
🤣🤣🤣 알고 있다

독서괭 2025-12-12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을 줄 알았지만 역시나 너무 좋군요.. 가치있는 삶 나 읽었다! 큰사물 반갑다! ㅋㅋ
타티아나가 안 됐네요. 뜬금없이 나타난 옛친구가 내애인 뺏어가.. ㅠㅠ
 
코스타리카 따라주 라 파스토라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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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자 마자 사서 마셨는데… 100자평 남기는 걸 까먹고 있다가 그 맛을 잊어서 다시 사서 마셔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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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12-11 09: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 사려는데 알라딘이 잠깐 미쳤던지 연결이 끊어졌습디요. 그래서 과테말라 커피를 대신 샀습지요. 신 맛 많이 나는 걸 좋아해 꼭 마셔볼 겁니다.

잠자냥 2025-12-11 09:51   좋아요 1 | URL
그새 과테말라 어쩌고 또 나왔네요! 이것도 사야지….

건수하 2025-12-12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사려고 담아뒀는데 반가워서 왔지만 맛에 대한 평이 없군요 ㅋㅋ 그래도 안좋은 기억은 없었던 것 같네요
 
서푼짜리 오페라.남자는 남자다 을유세계문학전집 54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김길웅 옮김 / 을유문화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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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남자다’ 읽으려고 선택. 브레히트는 브레히트다.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 때문에 정체성 혼란에 이어 결국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르게 되는 남자의 이야기. 순진하고 평범하던 남자가 집단의 폭력에 의해 완전히 다른 남자가 되어버리는 장면은 전체주의의 속성을 날카롭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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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 베 스타인의 환희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남수인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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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사랑에도 봄은 오는가. 잃어버린 사랑의 복기 또는 복원에 관한 이야기. 평범하고 진부한 소재로도 완전히 다른 세계를 창조하는 뒤라스만의 매혹적인 문체, 색다른 시선, 어쩌면 해석이 불가한 독특한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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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약물 이야기 - 술, 담배, 카페인, 의약품
마쓰모토 도시히코 지음, 오시연 옮김 / 시그마북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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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카페인 의존도가 높은 나로서는 아주 흥미진진, 충격적 읽기였다. 일본에서 문제가 된 스트롱계츄하이의 폐해는 처음 알았는데, 이 술이 젊은 여성들에게 크게 인기를 끈 배경을 분석, 약물 남용이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구조상의 문제(고통, 절망, 상실 등)라는 점을 짚은 부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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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5-12-08 12: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순수하게 의학적으로 보자면 약물에는 ‘좋은 약’도 ‘나쁜 약’도 없고, 오직 ‘좋은 사용법’과 ‘나쁜 사용법’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쁜 사용법’을 쓰는 사람은 대개 무언가 해결되지 않은 문제와 고통을 안고 있다는 사실이다. -<술, 담배, 카페인, 의약품_익숙한 약물 이야기>

건수하 2025-12-08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페인 중독자로서 궁금합니다. 카페인이라 다행이긴 하지만 중독이라는 점이 좀 찜찜하긴 하거든요.

잠자냥 2025-12-09 10:55   좋아요 1 | URL
카페인은 여러 면에서 중독성 약물인데, 산업사회 및 현대사회에서 긍정적 역할(노동자 일 시켜먹기 좋고 전쟁터에서도 각성제로 혁혁한 역할ㅋㅋㅋㅋㅋㅋ)이 있어서 긍정적 약물처럼 수용되고 있지만 폐해는 분명히 있다는 게 저자의 논조입니다(커피뿐만이 아니라 에너지드링크나 이런저런 약에 카페인 성분이 포함되어 있어서 더 문제일 수 있다고....)

제가 카페인 부분에서 밑줄 쳐둔 것인데요(길지만 읽어보세요).

카페인은 약리학적으로 각성제나 코카인과 같은 중추신경계 흥분제이며, 그 약리 작용은 꽤 뚜렷하다. 아마 누구나 커피나 홍차를 마신 뒤 의욕과 주의력, 집중력이 높아지거나 졸림과 피로가 완화되는 ‘약물 효과’를 경험했을 것이다. (......) 카페인은 ‘부자연스러움’이라는 점에서 알코올보다 더 ‘약물다운’ 성질을 지닌다. 알코올은 식욕을 돋우고 졸음을 유도하는 등 생리적 욕구에 따르는 작용을 하는 반면, 카페인은 생리적 욕구에 저항하며 우리를 배고픔과 과잉 활동 상태로 몰아넣는 매우 부자연스러운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카페인 크래시
밤늦게까지 일할 때, 우리는 종종 커피의 힘을 빌린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점이다. 그 대가란 무엇일까?
카페인은 아데노신 수용체 길항제다. 아데노신이라는 물질은 뇌의 수용체와 결합하면 신경계를 억제해 졸음을 유발한다. 하루의 후반부가 되면 우리 뇌는 아데노신 농도가 점점 높아지며 수면에 대비해 중추신경계의 활동을 억제하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 결국 뇌 안에 아데노신이 충분히 차면 머리가 멍해지고 ‘이제 잠자리에 들고 싶다’라는 유혹을 느낀다. 이런 수면에 대한 내적 욕구를 ‘수면 압력’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카페인은 원래 아데노신이 결합해야 할 수용체를 선점해 그 작용을 방해한다. 그러면 아데노신이 보내는 ‘머리 스위치를 꺼라’라는 신호는 뇌에 전달되지 않는다. 덕분에 우리는 졸음을 떨쳐내고 뇌를 깨어 있게 만들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아데노신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뇌 속에 존재하며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축적된다.
앞서 언급된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의 수면 연구자 매슈 워커의 주장에 따르면, 실제로 아데노신은 축적되고 있지만 우리는 카페인에 속고 있는 상태, 혹은 카페인에 의해 아데노신의 존재가 일시적으로 가려진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데노신이 갑자기 역습을 시작한다. 즉 카페인이 완전히 대사되고 수용체에서 물러나면 그동안 축적되어 있던 아데노신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것이다. 이때는 커피를 마시기 직전에 느꼈던 졸음뿐만 아니라 카페인 효과로 각성한 동안 계속 쌓여 있던 아데노신의 졸음까지 합쳐져 엄청난 수면 압력으로 우리를 덮친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 카페인이 수용체를 점령하고 있는 동안 아데노신은 방해꾼이 사라질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가 적이 자취를 감추자마자 기습 공격을 감행해 자신의 영토를 되찾는다고. 그 결과 우리는 말 그대로 폭력적인 졸음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카페인 크래시’라는 현상이다.
이 아데노신의 맹공에 대항하기 위해 다시 카페인을 섭취한다면 악순환이 시작된다. 만성적인 피로감을 카페인으로 억누르면서도 내성으로 인해 이미 그 효과는 떨어져 아무리 카페인을 섭취해도 예전처럼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은 얻기 어렵다. 마치 빚 독촉을 피하려고 또 다른 빚을 내는 사람처럼 수렁에 빠져드는 것이다.

전 카페인 크래시 경험 종종하거든요.... -_-;;

건수하 2025-12-09 13:41   좋아요 1 | URL
전 오전 중 카페인 보충을 안하면 두통이 심하게 와요. 그때 커피 마시면 두통이 샥 사그러드는 느낌이 드는데 이런게 약 하는 느낌일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ㅁ=

카페인 크래시는 그 전에 속이 울렁거려서 그만 마시는 편이긴 한데...
가끔 진짜 피곤할 때 커피 마시고 나서 기절하듯 잠들었다가 깨면 엄청 개운하더라고요.
그 느낌도 뭔가 자연스럽고 점진적이지는 않은, 약물이 이런건가 싶은 느낌이구요.

그래서 카페인 덕분에 약물 중독이 위험하다는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잠자냥 2025-12-09 14:24   좋아요 1 | URL
ㅋㅋㅋ 커피 안 마시면 두통 있다가 마시면 사라지는 거 그게 전형적인 중독(금단) 현상이랍니다! ㅋㅋㅋㅋㅋㅋ 저는 두통을 느낄 정도로 안 마시고 버텨본 적이 없어서 정말 커피 끊으면 그런 두통이 느껴질까 궁금하기도 하네요.

이 책 카페인 다룬 장에서 ‘최음제로서의 카페인’이라는 챕터가 있는데요. 진짜 최음제로서의 역할을 한다기보다는(실망하는 다락방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렇게 사람을 유혹한다고(끊지 못하게)... 제약 회사들이 약에 카페인 성분 넣는 것도 결국 자기들 약에 중독되어서 자꾸 사게 만들려고 그러는 게 아닐까... 하고 저자는 합리적으로 의심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마약이나 마리화나처럼 불법으로 취급하는 약물보다 알코올 카페인 니코틴 등 합법적인 약물이 더 위험하다고 봅니다. 여기에는 오피오이드계열 진통제 및 수면제 항불안제 등등 포함이고요.

건수하 2025-12-09 14: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약에 왜 카페인이 들어가지? 했는데 중독시키려는 목적일 수도 있군요....
(그래서 감기약 먹을 때 잠시 커피를 안마셔도 버틸 수 있더라는... 먼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