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벨 이렌 네미롭스키 선집 6
이렌 네미롭스키 지음, 채단비 옮김 / 레모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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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 분야에서도 여남 차별이 존재하지만 사법체계에서도 이와 같은 차별은 참 공고하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다. 가해자가 여성이고 피해자가 남성일 경우 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사법 체계가 작동하는 방식이 참 어쩌면 저토록 투명하게 차별적인가 씁쓸해질 때가 많다. 같은 죄를 지어도 형량이 더 무거울 뿐만 아니라 신상 공개도 놀랍도록 신속하게 이루어진다. 게다가 피해자인 남성에게는 성실하고 착한, 미래가 창창한 청년의 서사가 덧붙여지기 일쑤이다. 그런 남자를 죽인 여자는 마녀이자 악녀가 된다. 그 개인의 사연이야 어떻든.... 

이렌 네미롭스키의 <제자벨>에도 그런 장면들이 펼쳐진다. 2026년의 대한민국 법정이나 비록 소설이긴 하지만 백여 년 전의 프랑스 법정에서나 법이 작동하는 방식은 어쩜 이토록 닮았을까, 젊은 남자, 미래가 창창한 남자, 성실한 남자를 죽인 여자는 물어볼 것도 없이 악녀이자 탕녀이자 마녀이다. <제자벨>에서 그 악녀의 이름은 ‘글라디스 아이제나흐’이다. 작품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피고석으로 여자가 들어왔다. 여자는 창백한 얼굴에 멍하고 지친 기색이 드리웠음에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눈물에 젖어 생기를 잃은 매력적인 눈꺼풀과 입꼬리가 처진 입이 눈에 띄었지만, 그래도 젊어 보였다. 머리카락은 검은 모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p.15


여자의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배심원은 물론 방청석도 소란스럽다. 예쁘긴 하구먼, 근데 나이가 몇 살이래요? 젊어 보이지는 않는데 그래도 예쁘구먼 숙덕숙덕.... 여자의 죄명은 살인이다. 사람들은 더 숙덕거린다. 저런 미모의 여자가 사람을 죽였다고? 누구를? 살해당한 대상을 알게 되자 배심원석 방청석 모두 크게 동요한다. 젊은 남자를 유인해 살해한 것이다! 심지어 귀족 애인이 있음에도 아들뻘인 남자를 호텔 방으로 끌어들여 죽인 것이다! 아니, 저 가녀린 여자가? 저렇게 부유하고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여자가? 대체 왜?! 한데 이상하다. 여자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지 않는다. 내가 죽였노라고 순순히 인정하기만 한다. 그저 법정에서 빨리 사라지기만을 바라는 것 같다. 애인도 있는 여자가 젊은 남자까지 탐하다가 죽여버렸구만! 온 세상이 여자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기 시작한다. 여자는 정말 이 남자를 죽였을까? 그게 진실이라면 왜 죽였을까? <제자벨>은 그 사연을 숨 가쁘게 펼쳐놓는다.

법정에서는 여자를 물어뜯으며 신이 난다. “피고인과 백작의 약혼은 꽤나 공식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파혼했어요.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답변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아마도 구속받지 않는 방탕한 생활과 이러한 자유가 가져다주는 이점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였겠죠.” “1930년부터 1934년 10월까지는 어떠한 연애사도 확인된 바 없습니다. 4년 동안 피고인은 몬티 백작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희생자가 될 남자를 만나게 됩니다. 베르나르 마르탱이라는 스무 살 청년이었습니다. 이 청년은 평민 출신이며 호텔 지배인의 사생아였습니다. 베르나르 마르탱은 파리 문과 대학의 학생이었습니다. 이 청년은 사교계 여성이자 미모와 부를 겸비한 매력적인 피고인의 마음을 사로잡게 됩니다. 피고인, 말해보십시오. 피고인은 정말 이상하고 터무니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베르나르 마르탱에게 빠져들었습니다. 그 청년을 타락시키고 그에게 돈을 주 다가 결국 살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운운....

그러면서도 여자의 미모를 내내 칭찬한다. “피고인은 미모가 출중합니다. 잔혹한 짓을 저질렀지만 미모만큼은 부인할 수 없죠.” 그러나 늙어가는 여자가 20대 청년의 젊음에 끌렸을 수도 있고, 낯선 남자와의 연애가 선사하는 자극에 이끌렸던 것일지도 모른다면서 소설을 쓴다. 젊은 애인의 별 볼 일 없는 조건에 끌렸을지도 모른다고, 자신과 같은 계급 안에서의 애정 관계에서 지루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청년의 유혹에 넘어갔지만 정신을 차리고 싶었던 여자는 돈을 주고 젊은 애인을 떼어내려고 했을 것이라고 부유한 여성의 오만함이 저지른 일이라고 소설을 쓴다. 그러나 술집 여자나 어린 매춘부만 만나봤던 청년은 여자의 미모와 명성을 떨쳐내기 힘들었으며 그래서 여자를 뒤따라가 협박했고, 그러자 여자는 두려움에 그를 살해한 것이라고..... 정말 이 검사의 추측은, 소설은 진실과 가까울까?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못하고 여자의 삶을 좇게 된다. 


배심원 여러분, 지금 이 법정에서 피해자를 젊은 애인이나 지속한 기둥서방으로 묘사하며 낙인찍으려 들지만, 사실 그는 얌전하고 성실한 청년이었습니다. 이 청년을 향한 추잡한 추측은 무엇으로도 용인될 수 없습니다. 피해자는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던 학생으로, 라탱 지구에서 무척 검소하게 생활했습니다. 그는 허름한 여관의 작은 방에서 살았습니다. 사망 당시 그의 방에 있던 돈은 400프랑이 전부였습니다. 가진 것도 조촐한 옷가지뿐이고 보석도 없었습니 다. 여기서 배심원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이를 부유한 여자에게 귀여움 받는 젊은 애인이자 끊임없이 협박을 일삼는 사람의 생활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오히려 이 여성이, 배심원 여러분의 앞에 있는 이 여성이 자신의 미모와 재력, 사교계 명성을 등에 업고, 젊은 피해자를 유혹해 타락시킨 다음 죽이기까지 한 것이 아닐까요? -p.36


검사는 이 여자를 부유한 백작 애인이 있음에도 젊은 남자와 놀아나다 잔혹하게 살해해버린 악녀로 만드는 동시에 피해자인 젊은 남자! 오, 그래 전도유망한 이 젊은 남자에게 너무나 안타까운 서사를 부여한다. 정말 이 젊은이는 검사의 말대로 ‘얌전하고 성실’한 청년이기만 했을까? 이런저런 증인이 등장하면서 여자의 과거 및 현재의 생활에서 속속 놀라운 점들이 밝혀진다. 그런데 참 신기하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이 살던 이 여자, 글라디스. 빼어난 외모 덕분에 온갖 남자들로부터 숭배와 욕망의 대상이 되면서 애정과 사랑을 받아온 이 여자. 사랑에 빠져 결혼도 했지만 남편을 잃고 또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청혼까지 받아 약혼을 했다가 파혼하고 그러다가 또 이런 젊은 남자와 ‘놀아나기’까지 한 이 여자… 충격적이게도 매춘업소까지 드나들었다는데....... 글라디스는 정녕 기이한 욕망을 지닌, 마음이 병든 탕녀인가? 


“나쁘게 말하고 싶지는 않아요. 신이시여, 저를 지켜주소서.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을 말씀드릴 뿐입니다. 글라디스는 지나치게 외모를 꾸몄어요. 가벼운 추파나 남자들의 칭찬을 지나치게 좋아하긴 했지만, 그게 죄는 아니잖아요.”
“그뿐이라면 죄는 아니죠.”  -p.47


가까운 친구로 지냈던 이가 증인석에 앉아 한다는 소리이다. “나쁘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면서 지나치게 외모를 꾸미고 지나치게 남자들의 칭찬을 좋아했다, 지나치게 관심을, 애정을, 숭배를, 사랑을 갈구했다 말한다. 그러나 그녀도 알고 있다. 그게 죄는 아니다. 하지만 궁금하다. 글라디스는 왜 그런 인생을 살아가기만 한 것일까. 그러나 이 법정에 있는 사람들 누구 하나 궁금하지 않은 것 같다. 어느덧 관심이 사그라들었다. “하룻밤 사이에 모든 아름다움이 글라디스를 영원히 떠나버리기라도 한 것” 같고 “영락없이 지쳐버린 늙은 여자”일 뿐이지 않은가. 글라디스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검사의 구형을 듣는다. 법원의 문이 열리고 방청객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온다. “연극이 끝나면 배우를 잊어버리듯 아무도 글라디스 아이제나흐를 기억하지 못했다. 이제 그녀의 역할은 끝났다. 결국 흔하디흔한 역할이었던 것이다. 치정 범죄와 적당한 형벌. 글라디스는 어떻게 되었을까? 글라디스의 미래와 과거를 궁금해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p.63) 

그러나 <제자벨>의 진짜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프롤로그 부분만 60여 쪽. 글라디스 아이제나흐,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어쩌다 살인자가 되었는지, 피해자는 정말 검사의 증언대로 성실하고 착하기만 한 청년이었는지 1장부터 22장까지 긴박하게 흐르는 이야기에 책장이 절로 넘어간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외모와 젊음에 집착한 이 여자 글라디스. 책장을 덮을 때쯤에도 그녀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고 이렌 네미롭스키에게 양가적인 감정이 들기도 한다. 여성이면서도 이토록 여성혐오적인 시선으로 여자를 그릴 수 있을까 불쾌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렌 네미롭스키의 이 뿌리 깊은 여성혐오는 자신의 상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부유했지만 불행했던 어린 시절, 딸에게 애정을 주기는커녕 오로지 자신의 삶에만 관심을 두었던 어머니를 향한 복수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애잔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저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글라디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 인생은 슬픈 거 아니겠어요. 다만 취기 오르고 열정 넘치는 몇몇 순간이 존재할 뿐이죠. 밤에 테라스로 나가 경쾌하고 조금은 황홀한 음악을 들을 때처럼, 아니면 춤 출 때처럼. 아, 말로 설명은 못 하겠지만 그런 게 바로 행복이에요. 우리는 그런 행복을 찾는 거고요.” -p. 103



글라디스여, 그대에게 말하노니. 꽃은 시든다. 외모도 시든다. 젊음은 간다. 인생은 진다. 사랑도 간다. 시선도 사라진다. 욕망도 사그라든다. 남는 것은 당신 자신뿐. 그렇다면 그 생을 어찌 살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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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6-04-30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휴, 리뷰를 읽는데 마치 소설 한 편 읽은 것 같아요. 그냥 뭐랄까, 세상을 다 뒤집어 엎어버리고 싶습니다... 창창한 미래는 남성들에게만 펼쳐져있으니.....

잠자냥 2026-04-30 14:26   좋아요 0 | URL
제가 리뷰에 쓴 내용은 이 책 프롤로그까지일 뿐입니다! ㅋㅋㅋㅋㅋ

다락방 2026-04-30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강뷰 아파트 사게 해줄게요. 딱 기다려..

잠자냥 2026-04-30 14:55   좋아요 0 | URL
🙆🏻‍♀️🤣🤣🤣
 
진리의 발견 (양장) - 앞서 나간 자들
마리아 포포바 지음, 지여울 옮김 / 다른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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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하다! 이렇게 재미난 책을 이제야 읽다니! 지식+정보+감동+관점+재미 모든 면에서 완벽. 인간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 책환자들이 책을 놓지 못하는 이유가 다 담겨 있다. 과학자, 시인, 퀴어… 관련 없는 듯하지만 하나같이 연결된, 그렇게 직조한 아름다움 또는 진리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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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4-29 12: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나저나 마거릿 풀러는 너어어어무 금사빠이고 연애 상대에게 좀 너무 질리게 하는 스타일 아닌가 싶기도.... 에밀리 디킨슨의 열렬한 애정의 대상이었던 수전 길버트도 좀 힘들었을 거 같기도 하고. 사랑은 참 상호적으로 흐르지 않는 한 비극이야....

유부만두 2026-04-29 12: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말했쟈나요~~~~ 어마어마 멋진 책이라고요오오~~~~ (내가 잠자냥 보다 먼저 읽은 책이라 혼자 감동 중)

잠자냥 2026-04-29 12:50   좋아요 0 | URL
크아 진짜 멋진 책입니다. 작가도 대단하고 여기 등장하는 인간들도 대단하고... 이 두꺼운 책을 먼저 읽은 분들도 대단하고..ㅋㅋㅋㅋㅋ

잠자냥 2026-04-29 12:54   좋아요 1 | URL
이 책의 마니아 1위 유부만두…. 2위 건수하… 3위 바람돌이… 앞서 나간 자들 🤣

건수하 2026-04-29 1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밌죠? ㅋㅋ 근데 사생활 (공개된 기록이지만) 을 바탕으로 한 썰이 좀 많아서... 이렇게 파헤쳐도 되나 하는 생각도 좀 드는 책이었어요 ^^

잠자냥 2026-04-29 14:15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요. 저는 호손을 향한 멜빌의 편지도 좀 멜빌이 알면 너무 싫어했을 거 같고... 디킨슨 편지도...; ㅋㅋㅋ 그 와중에 디킨슨 오빠 오스틴하고 오빠의 내연녀 메이블 사이에 섹스한 거까지... 아는 거야 그렇다 쳐도 애를 낳으려고 그 ㅋㅋㅋㅋㅋㅋㅋㅋ 아놔 진짜 아무튼 ㅠㅠ 그런 중 카슨과 도로시의 금고 안 편지는 그나마........ (아니다 이 편지 때문에 카슨 성정체성이 밝혀진 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 이것도 싫었을 듯...)

책읽는나무 2026-04-29 1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도 이 책 들고는 있는데 읽지를 못해 앞서 나간 자가 못되었구나! 분하다!ㅋㅋㅋ
이 책 평들이 넘 좋아 사다 둔지는 한참이라 까먹고 있었는데 잠자냥 님이 분하다고 하시니 응? 정말? 띠용 @.@.

잠자냥 2026-04-29 14:16   좋아요 1 | URL
뒷서 나간 자 책나무! ㅋㅋㅋㅋㅋㅋㅋ
이 책 다 읽고 나서 제 서재 친구 중 누가 읽었나 살펴보다 보니...
나무 님!! 노랑 책만 모아서 프리지아랑 같이 찍은 사진 있더라고요? ㅋㅋㅋㅋ
자 이제 읽으시죠. 하필 프리지아 꽃말이 ˝‘당신의 시작을 응원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6-04-30 14: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도 이 책 있다구!!!!! >.<

잠자냥 2026-04-30 14:28   좋아요 0 | URL
펼치라구!!!! ........... 아 아니다. 남성판타지부터.........ㅋㅋㅋㅋㅋㅋㅋㅋ
 
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4
존 밴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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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끼는 밴드의 좋아하는 노래 중 이런 가사가 있다. “Since I was born I started to decay” 태어난 이래로 내내 썩어가기 시작했다는, 부패하기 시작했다는 그런 가사… 이 노래를 처음 들었던 시절-그러니까 중2병 시절이라고 하자. 그때도 크게 공감했지만 살아갈수록 늙어갈수록 저 가사는 정말 명언이 아닌가 싶어진다. ‘Teenage Angst’라는 제목의 이 노래는 1996년에 발표되었다. 이 음악을 처음 들을 당시의 나는 사회적 기준으로는 한창 성장 중인, 자라나고 있는 나이였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인간은 사실 태어남 자체가 부패의 과정, 죽어가는 과정, 썩어가는 과정, 소멸하는 과정 그리하여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아닌가.  

<영원히 계속되다가 끝이 난다>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등 최근 읽은 책들이 유독 죽음과 상실을 다루고 있어서 저 노래가 가사가 떠오른 것 같기도 하다. 어제 읽기를 마친 존 밴빌의 <바다>마저도 그럴 줄이야. “사물들은 지속된다, 살아가는 것은 조금씩 퇴보하지만.”(p.16) 이렇게 말하는 <바다>는 죽음과 상실의 이야기 그 자체이다. <오래된 빛>을 읽고 존 밴빌의 문장에, 스타일에 흠뻑 반해 사두고 안 읽은 지 수 년째인 <바다>를 드디어 집어 들었다. 이 책은 도대체 언제 사 둔 것일까? 구매리스트를 검색해 보고 깜짝 놀랐다. 2016년 12월 13일. 무려 십 년 전에 사둔 책이다. 10년 전 나는 이 책을 어쩌다가 사두었을까? 기억은 이토록 허술하다. 망각도 잦다. <바다>는 또한 기억과 망각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반스의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가 그러했듯이… 인간에게 죽음과 상실, 소멸, 기억, 망각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림자인가보다.

<바다>에서 죽음은 이르게 찾아온다. 미술사학자인 맥스는 아내를 읽는다. 암으로 투병 중이던 아내의 곁을 지키다 아내가 떠난 후 그 슬픔을 달래고자 어린 시절 한때를 보낸 바닷가 마을을 찾는다. 죽음을 마주하고 생이 끝나갈 즈음의 인간은 과거의 장소, 특별한 기억이 머문 장소를 찾기 마련인 것일까? 맥스에게는 이 바닷가가 그러하다. 이 바다에서 그는 ‘시더스’라는 이름의 여름 별장에 머물며 프랑스 화가 피에르 보나르에 관한 책을 쓰려고 한다. 죽은 아내와 또 언젠가는 죽어갈 자신, 그리고 자기 생의 흔적으로 남겨질 책 한 권….

그런데 왜 하필이면 아내와의 추억이 깃든 곳도 아닌, 이 유년의 바다일까. 이 바다는 그 여름의 소년 맥스에게 특별한, 지울 수 없는 기억을 안겨준 곳이기 때문이다. 부유한 아내 ‘에나’를 만난 덕분에 “태어나기를 딜레탕트로 태어”난 그래서 에나를 만나기 전까지 “부족한 것이라고는 자산뿐”이라고 말하던 이 남자 맥스는 이제는 화가에 관한 책을 쓰면서 유유자적 생을 누릴 수 있는 미술사학자가 되었으나 그 시절에는 참혹하게 가난했다. 스스로 가난하다는 사실을, 자기의 낮은 계급을 누구보다 잘 인지했기에, 또 그렇기에 “내 힘으로 할 수만 있는 일이라면, 나를 망신시킨 부모를 그 자리에서 지워버렸을 것”이라고 서슴지 않고 말한다. “뚱뚱하고 작고 헐벗은 얼굴의 어머니와 돼지기름으로 만든 듯한 몸을 가진 아버지를 바다의 물보라가 일으킨 거품처럼 터뜨려버렸을 것”(p.41)이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그는 이처럼 빈곤과 계급에 민감한 아이였다. 

소년은 그래서 부를, 부의 지표를 동경한다. 이 가난을 벗어나리라, 이 계급을 벗어나리라, 높은 곳으로 날아가고 말리라 열망한다. 그런 소년 앞에 나타난 그레이스 가족. 부부와 쌍둥이 남매로 이뤄진 가족, 그들은 소년에게 마치 ‘신’처럼 보인다. 신을 동경하며 그 주변을 배회하는 작디작은 인간 맥스는 열심히 그 곁을 얼쩡댄 덕분인지 그들과 가까워진다. 신들과 가까워진다. 소년의 애정 또는 동경은 처음에는 이상한(?) 방향으로 흐른다. 소년은 그레이스 부인의 육감적인 매력, 성숙한 매력에 반해 그녀에게 속절없이 빠져든다. <오래된 빛>의 그 소년처럼…. 밴빌의 취향이, 경험이 그랬던 것일까? 아니면 저 시절의 소년들이 친구의 엄마에게 반하는 것은 흔한 일, 일종의 통과의례인가? 잠시 의문을 품어보기도 한다. 물론 소년의 애정은 이윽고 제 자신에게 어울리는 대상으로 향한다. ‘클로이 그레이스’. 그 소녀에게로. 이렇게 시더스, 이 여름 별장이 있는 그 바닷가는 소년 맥스에게 새로운 세상-신들의 세상-이자 첫 경험들-갑작스러운 격렬한 포옹, 더듬거리며 영원한 사랑을 고백한 순간, 피 맛이 나는 첫 키스, 첫 사랑의 기억과 추억을 안겨준 공간이다. 

그러나 노년의 맥스는 이 추억들을 떠올리며 말한다.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가운데 일부, 또는 전부가 실제로 일어났던 것은 분명하다. 처음 손을 잡고, 포옹을 하고, 고백한 순간이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처음들은 점차 사라져가는 겹겹의 과거 속에 묻혀 잊혀버렸”노라고….(p.134) 그는 이런 자기에게 놀라 되묻는다. “어떻게 그 애는 한순간은 나와 함께 있다가 그다음 순간에는 사라질 수 있을까? 어떻게 다른 곳에, 절대적으로 다른 곳에 있을 수 있을까? (....) 일단 내가 있는 자리에서 사라지면 그 애는 당연히 허구, 내 기억 가운데 하나, 내 꿈 가운데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증거로 보건대 클로이는 비록 나와 떨어져 있다. 해도, 늘 견고하고, 고집스럽고, 불가해하게 그녀 자신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실제로 떠난다, 실제로 사라진다. (,,,) 나 역시도 떠날 수 있다. 아, 그래, 나 역시도 당장에 떠나서는 본래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되어버릴 수 있다.”(p.133) 제아무리 아름다운 기억과 추억일지라도 망각과 소멸은 불가항력이다.

바닷가에서, 이 여름 별장에서 그는 이처럼 과거의 기억을 헤맨다. 딸인 클레어가 “과거 속에서 사시네요.” 핀잔을 줄 정도이다. 그는 왜 이토록 늦은 나이에 들어서 과거에, 그 오래된 기억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가 생각하기에 ‘삶, 진정한 삶이란 투쟁, 지칠 줄 모르는 행동과 긍정, 세상의 벽에 뭉툭한 머리를 들이대는 의지, 그런 것’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는, 적어도 어린 시절의 맥스는 그렇지 못한 사람이었다. 돌아보니 그의 ‘에너지의 많은 부분은 늘 피난처, 위안, 아늑함, 그런 것들을 찾는 단순한 일에’ 흘러들어가버렸다. 그는 ‘숨겨지고, 보호받는 것, 그것이 진정으로 원하던 것이었’노라고 털어놓는다. 그는 ‘자궁처럼 따뜻한 곳으로 파고들어 거기에 웅크리는 것, 하늘의 무심한 눈길과 거친 바람의 파괴들로부터 숨는 것’을 갈망했다. 그리고 바로 과거가 그에게 그러한 은둔처이다. 그렇기에 그는 “손을 비벼 차가운 현재와 더 차가운 미래를 털어내며 열심히 그곳”(p.62), 과거로, 기억 속으로 돌아간다. 

언제나 자기의 출신을 부끄러워했던 아이. 애초부터 훌륭해지려고 노력했던 아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던 아이. 그런 소년이 그레이스 가족에게, 클로이 그레이스에게 원했던 것은 그가 말한 대로 그 가족의 우월한 사회적 지위와 같은 수준에 올라가보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는 열심히 노력해서 그 ‘올림포스 산을 기어올라’가는 데 성공한다. 에나라는 부유한 여인을 만나 그 성공에 폭죽을 터뜨린다. 생의 불꽃을 태워 올린다. 그러나 공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일평생 살아온 나, 딜레탕트로 태어나 딜레탕트로 살아가는 자기, 노년의 맥스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그는 자기 자신을 잘 알았다. 그리고 자기가 아는 스스로가 싫었다. “내가 싫어한 것이 나라는 사람, 그러니까 독특하고 핵심적인 나였던 것이 아니라” “내가 싫어한 것은 나의 출생과 가정교육이 개성 대신 나에게 부여한 정서, 경향, 수용한 관념, 계급적 집착 등의 덩어리”였노라 고백하는 맥스. 자신은 개성이라는 것을 가져본 적이 없노라고, 다른 사람들이 가지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또는 가졌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는 가져본 적이 없노라고. 자신은 늘 독특하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으며, 가장 강렬한 소망은 독특하지 않은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이었노라고 말하는 맥스. “왜 당신 자신이 되려 하지 않아?” 에나의 이 질문은 평생 더 높은 곳을 꿈꾸었으나 진정한 자아는 망각한 한 남자의 본질을 건드리는 뼈아픈 물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너 자신을 알라” 유년의 바닷가를 찾아 과거의 기억 속을 거니는 이 늙은 남자의 사투는 그래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자기 자신을 찾는 여정일 것이다. 사별 후 슬픔에 젖은 그에게는 오직 과거만이 “견딜 수 없는 현재로부터 유일하게 가능한 시제”이자, 가장 생명력 있게 고동치는 “두 번째 심장”일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에서는 지나간 생을 다시, 또 살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불러일으킬 것이다. 기억 속에서는 아내도 살아있으며 딸 클레어도 자신이 원하지 않는 놈과 사랑에 빠지지도 않았고, 첫 사랑인 그녀들로부터도 환대받았기에 영원히 안식하며 은둔할 수 있으리라..... “인생은 많은 가능성들을 잉태하고 있다.”(p.240) 잊히고 소멸하고 사라지고 사멸하는 것들도 기억에서는 과거에서는 되살아나 찬란히 빛나기도 하며 영원히 불꽃을 태우기도 한다. 그의 말처럼 “어쩌면 삶의 모든 것이 삶을 떠나기 위한 긴 준비에 불과한 것”(p.95)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소멸의 기나긴 여정에서 인간은 기억과 추억이 있기에 살아갈 의지를 찾는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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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6-04-28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은지 4년이 지나긴 했는데 이제 거의 기억이 안 나요. 이래서 자세히 적어둬야 하나봐요... ^^
(그렇지만 별로 적고 싶지 않았다)

잠자냥 2026-04-28 14:07   좋아요 1 | URL
기억의 소멸... 망각은 인간의 숙명입니다!
(건수하 님 리뷰? 페이퍼 있던데요. 제가 하트 누름.... 이 사람 잊었네 잊었어...🤣ㅋㅋㅋㅋㅋ)

건수하 2026-04-28 14:10   좋아요 0 | URL
댓글 봤어요 ㅎㅎㅎ 그걸 읽고 잠자냥님껄 읽어봐도 기억나는게 별로 없지 뭐예요 ㅎㅎ

잠자냥 2026-04-28 14:12   좋아요 1 | URL
마지막에 반전이 있기는 했지만.... 사실 딱히 스토리가 없는 소설이긴 해요.

망고 2026-04-28 16:57   좋아요 2 | URL
저는 이 소설 번역서 제목이 이게 아니었을 때 읽었는데 전혀 기억이 안 나요🙄 근데 그땐 어려서 그랬는지 별 스토리가 없이 문장으로 음미하는 이 소설의 매력을 이해 못 하고 지루하다며 별 두개 줬더라고요ㅋㅋㅋㅋㅋ

건수하 2026-04-28 16:59   좋아요 2 | URL
오, <신들은 바다로 떠났다> 라고 나왔던 적이 있었군요. 역자는 같고...
저도 4개주면서 후하게 준다고 생각을 했었다는;

잠자냥 2026-04-28 17:20   좋아요 1 | URL
네 “신들은 바다를 떠났다”에서 그 신들이 그레이스 가족입니다. 스포일러 같은 제목이라 <바다>로 바꾼 거 같아요.

잠자냥 2026-04-28 17:22   좋아요 1 | URL
이 작픔 부커상 수상할 때 찬반 2:2로 팽팽히 갈렸다는데 반대한 2인은 이 작품 이야기도 뭣도 아니라고 했다고… 🤣

건수하 2026-04-28 17:24   좋아요 2 | URL
아하. 한국 특유의 스포일러 제목이군요 ㅋㅋㅋ 원제는 The Sea 이던데...

제가 그 2인과 같은 생각 =333

망고 2026-04-28 17:50   좋아요 0 | URL
저도 반대입니다👊ㅋㅋㅋㅋㅋ

잠자냥 2026-04-28 18:35   좋아요 1 | URL
망고 이별의 신들의 바다…..🤣

다락방 2026-04-28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멋있어... 잠자냥 님 글 멋있어.....

잠자냥 2026-04-29 12:39   좋아요 0 | URL
눈이 나빠져서 멋있어가 맛있어로 보입니다. ㅋㅋㅋㅋ

자목련 2026-04-29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리뷰를 썼으나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고 잠자냥 님의 리뷰는 정말 좋고요!

잠자냥 2026-04-29 12:39   좋아요 0 | URL
저도 책 다 읽고 자목련 님 리뷰 잘 읽었어요!
 
영원히 계속되다가 끝이 난다
앤 드 마르켄 지음, 송예슬 옮김 / 허블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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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잃어감으로써 너의 허기를 채우는 빈 소매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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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6-04-25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뱀파이어인가 떠올랐는데, 그 비슷(?)한 거였네요. 5별!

잠자냥 2026-04-27 08:46   좋아요 1 | URL
좀비 이야기인데 좀비 이야기만은 아닌…. ㅎ 취향 타는 5별입니다.
 
소금 조각
실비 재르맹 지음, 이창실 옮김 / 1984Books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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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권태에 빠진 이에게 화 있을 진저!” 스승으로부터도 사랑하는 여자로부터도 속했던 세계로부터도 달아날 수밖에 없었던 권태로운 남자의 깨달음의 여정. 현실과 환상 신화가 뒤섞인 우화 같은 이야기. 제르맹의 문장은 늘 느끼지만 압도적이다. 나를 떠난 천사들은 여전히 떠돌고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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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6-04-24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떠돌고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