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이 침대를 쓰고 있었든
레이먼드 카버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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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말한다. 정말 오랫동안, 허니, 나는 위로할 수 없는 사람이었어. 위로할 수 없었다고, 그녀가 말한다. 그 말을 수첩에 적어. 경험상 그게 영어에서 가장 슬픈 말이라고 이야기해줄 수 있어. 어쨌든 마침내 나는 극복을 했어. 시간은 신사다, 어떤 지혜로운 사람이 말했지. 아니면 시간은 지쳐버린 늙은 여자일지도 몰라. 뭐 이거 아니면 저거겠지.
그녀가 말한다. 이제 내 인생이 있어. 당신 인생하고는 다른 종류의 인생이지만 우리가 비교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 이건 내인생이고 그게 나이들어가는 내가 깨달아야 하는 중요한 거야.
어쨌든 너무 상심하지는 마, 그녀가 말한다. 그러니까, 약간 상심하는 건 괜찮다는 거야, 아마도 그런다고 다치지 않아, 그 정도야 얼마든지 예상할 수 있는 거니까. - P142

어디에나 낙엽이 있다. 심지어 배수로에도.
보는 곳 어디에나 낙엽이 쌓여 있다. 걸어가는데 가지에서 잎이 떨어진다. 낙엽 속을 딛지 않고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이건 누군가 노력을 해야 한다. 누군가 갈퀴를 들고와 이걸 처리해야 한다. - P146

수면 부족으로 붕 떠 있는 느낌이다. 자러 갈 수 있으면, 그래서 정직한 사람의 잠을 잘 수 있다면 뭐라도 대충 다 주겠다.
그런데 왜 우리는 자야만 할까? 또 왜 우리는 어떤 위기에는 잠을 덜 자고 어떤 위기에는 더 자는 경향이 있을까? 예를 들어 아버지가 뇌졸중에 걸렸을 때. 아버지는 혼수상태 뒤에-병원침대에 이레 밤낮을 누워 있다가 깨어나 병실에 있는 사람들에게 차분하게 "안녕하시오" 하고 말했다. 그러다가 그의 눈이 나를 잡아냈다. "안녕, 아들." 그가 말했다. 그리고 오 분 뒤 그는 죽었다. 그냥 그렇게 그는 죽었다. 그러나 그 위기 동안 내내 나는 옷을 한 번도 벗지 않았고 침대에도 가지 않았다. 대기실 의자에서 가끔 괭이잠을 잤지만 한 번도 침대로 가서 자지는않았다. - P155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전락했다. 그리고 이렇게 계속 갈 수밖에 없다. 운명은 없다. 그냥 다음 일이 있을 뿐이고 그것은 뭐든 그냥 우리가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충동을 따르고 실수하는 것,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 P159

그는 도로로 향하면서 경적을 울렸다. 빵, 역사학자들은 "빵"이나 "삐"나 "펑" 같은 단어를 더 자주 사용해야 한다-특히 대학살 이후의 심각한 상황이나 끔찍한 사건이 온 나라의 미래에 먹구름을 드리울 때는. 그게 "빵" 같은 단어가 필요할 때이고 그런 단어는 황동 시대의 황금이다. - P236

필체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건 곤혹스럽다. 하지만 물론 필체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편지의 결과가 나타난 마당에 그게 어떻게 중요할 수 있겠는가? 편지 자체가 아니라 편지 안에 있는 것들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래, 편지는 절대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게 아니다- 거기에는 누군가의 필체보다 훨씬 많은 것이 있다. "훨씬 많은 것"은 미묘한 것들과 관계가 있다. 가령 아내를 얻는 것은 역사를 얻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 P238

톨스토이는 양모 목도리와 곰가죽 코트를 벗고 체호프의 침대옆 의자에 앉았다. 체호프는 약물치료중이라 장시간 대화는커녕 말을 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백작이 자신의 영혼 불멸론에 관하여 담론을 시작하자 체호프는 놀란 눈으로 듣고 있어야 했다. 체호프는 나중에 그 면회에 관해 썼다. "톨스토이는 우리가 모두(인간이나 동물 모두) 하나의 원리 (예를들어 이성 또는 사랑) 속에서 계속 살 것이고 그 본질과 목표는 우리에게 수수께끼라고 가정하고 있다………… 나에게 그런 종류의 불멸은 쓸모없다. 나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레프 니콜라예비치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깜짝 놀랐다. -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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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침대 머리판을, 협탁을 보며 함께 앉아 있는다. 시계도 거기에 있고 시계 옆에는 잡지 몇 권과 보급판 책이 한 권 있다. 우리는 침대에서 잘 때 발을 두는 곳에 앉아 있다. 그곳에서 보니 누가 이 침대를 쓰고 있었든 황급히 떠난 것 같다. 이 침대를 다시 보게 될 때마다 이런 모습을 기억하게 될 것임을 나는 안다. 우리는 이제 뭔가로 들어섰는데 그게 뭔지는 모른다, 정확하게는.
"나는 그런 일이 나한테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아." 그녀가 말한다. "당신한테도." 그녀는 담요 귀퉁이로 얼굴을 닦고 깊은숨을 쉬더니 흐느낌처럼 내뱉는다. "미안해. 나도 도저히 어쩔 수가 없어." - P121

그녀는 나를 빈틈없이 살피며 내가 말을 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녀는 나중에 꼭 해야 할 때가 온다면 사용할 수 있도록 뭔가를 챙겨두기를 바라고 있다. 물론이다. 좋다.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면, 여보, 플러그를 뽑아줘, 하고 말하는 건 아주 쉽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아직 그녀를 위해 뭘 하겠다 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나와 나의 상황을 생각해봐야 한다. 무턱대고 이야기를 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느낌이다. 이건 미친 짓이다. 우리는미쳤다. 하지만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든 그게 언젠가 나에게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걸 깨닫는다. 이건 중요하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말하고 있는 건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다. - P123

내 두 손이 떨리고 있다. 내 목소리가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내가 그 여자한테 그 모든 말을 하려고 하는 동안, 내가 내 의사를 분명히 밝히는 동안, 아내가 빠르게 움직여 허리를 굽히고, 그걸로 끝이다. 전화 연결이 끊겼고,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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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2-11-17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 님, 벌써 읽기시작하셨나요?

프레이야 2022-11-17 10:56   좋아요 0 | URL
네. 자목련 님 반 정도 읽었어요.
쨍한 연두색 표지도 마음에 드는데다 역시 레이먼드 참 좋습니다. 쿵하고 무너지네요.

바람돌이 2022-11-17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책 나왔다 다음번 주문에 사야지 하고 있으면 프레이야님은 이미 읽고 계시다는..... 알려지지 않은 알라딘의 대주주가 아닐까싶네요. ㅎㅎ

프레이야 2022-11-17 19:04   좋아요 1 | URL
ㅎㅎ 냉큼 샀어요 요건. 쟁여 놓은 양식 언제 다 먹나요. 냉장고 정리하듯 좀 해야할 것 같은데 말이죠 이 해가 가기 전에. 냉동실도 비우고요.

체로키 2022-11-17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어요?

프레이야 2022-11-17 23:06   좋아요 0 | URL
네. 체로키님 저는 재미있게 읽었어요.
연령대가 젊다면 공감이 덜 될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실낙원 홍신 세계문학 11
존 밀턴 지음, 안덕주 옮김 / 홍신문화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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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의 미친 여자, 6장 ‘밀턴의 악령’ 편에 나온 내용과 엮어서 보니 새롭다. 그 열매를 먹기 전부터 원래 영민하고 힘센 이브!
제9편에서 사탄이 구체적으로 간계를 실행에 옮긴다. 이브와 아담이 아침에 일을 나가는데 다른 장소로 헤어져 나가자고 이브가 제의하고 아담은 미리 주의받은 바가 있어 유혹의 위험성 때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브는 “조심성이 없다든지 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싫고 오히려 자기 힘을 시험하고 싶기도 해서, 따로 갈 것을 주장한다(385).”

실낙원,에서 악령이라고 규정된 뱀은 이브의 또다른 자아로, 숨어서 지혜의 과감한 목소리를 낸다. 신이 금지한 열매를 따먹은 이브는 언어도 갖는다. 여자는 뱀의 머리를 무서워하고 뱀은 여자의 발뒤꿈치를 노리게 되는 벌을 신은 내렸지만 요즘 여성들은 그 모양새를 다리에 타투로도 간직한다. 벌이라고? 그렇담 멋지게 받겠다!

나의 엄마는 첫생명을 잉태하고 꿈에서 예쁘고 작은 뱀 한 무리를 봤고 진통이 와서 병원으로 가는 도중엔 거의 정신을 잃을 뻔한 상황에서 한 무리의 잔별을 치마폭에 안았다고 말했다. 어느 해인가 꽤 오래전 시외 작은 숲으로 들어가는 오솔길 한가운데서 마주친, 잊을 수 없이 화려한 문양의 꽃뱀을 떠올리며…


영국 신흥 중산계급 부유한 공증인의 아들로 런던에서 태어난 존 밀턴(1608-1674)
실낙원,을 구상한 건 청년시절이었으나 실제로 쓰기 시작은 50세, 56세에 완성한다. 당시의 타락한 양심과 부패한 종교계에 경종을 울려 구원의 목소리로 작용했다는 평을 듣는다. 밀턴은 불행한 결혼 생활을 계기로 최초의 이혼론 ‘이혼에 관한 교리와 규율’을, 윤리적 자유를 주장한 논문들을 집필했다. 1652년 과로와 지나친 독서로 완전히 실명하고 겸허하게 은퇴한 후 재혼한 아내가 병사한 무렵 ‘실낙원’ 집필에 전념했다. 남성적 권위를 상징하는 라틴어에도 능통해 크롬웰의 라틴어 비서로 채용되었다. 국왕 처형에 대한 유럽 각국의 비난에 대해 ‘영국 국민을 위한 변명서’ 등을 라틴어로 써서 국왕 처형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12편 중 9편은 사탄의 유혹이 적극적으로 펼쳐지고 이브가 이성을 잃지 않은 채 조금은 망설이는 듯하나 그 유혹에 적극적으로 따라가는 장면이다. 주체적으로 유혹을 선택하여 지적 열망을 따른다.


#
최선의 안내자여, 널 따르지 않았으면
무지 속에 있었으리라 너는 지혜의 길을 열어
접근하게 한다 그것이 숨어 있을 지라도.
그리고 어쩌면 나도 숨은 것 하늘은 높다
아득하다 그리고 아마 다른 걱정 때문에
우리의 위대한 금제자는 부단한 감시를
있을지도 모른다 주위에 많은 척 후들 두고서
마음 편히 그러나 아담에게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에게 지금까지의 나의 변화를
알려 주고 완전한 행복을 그와 함께
나눌 것인가? 아니, 그러지 말고
우월한 지식을 같이 나눌 자 없이 내 것으로만
해둘까? 그래서 여성에게 부족한 것을
보충하고 더욱 그의 사랑을 이끌고
나를 더 한층 동등한 것으로 만들어 -
바람직한 일이지만 - 언젠가는 그보다
우월하게 할까? 저열해서야 무슨 자유일까?

- 제9편 429p



이브가 먹은 후 아담도 금단의 열매를 먹고 같이 신의 심판을 받지만 아담은 이브를 사랑하여 그런 것이라며 그 허물을 이브에게 돌린다. 신은 천사장 미카엘을 시켜 아담에게 미래의 일과 ‘여인의 씨’가 누구인가 이야기한다. 아담만을 불러 심판과 예언의 언어집행을 했다. 돌아온 아담을 보고 이브는 잠자다 깨어 “어디서 돌아오셨고 어디 가셨었는지 알겠나이다”라며 예지력을 발휘한다. “나의 성약의 씨(그리스도)가 모든 것을 회복하리라는 그런 은총”을 어머니 이브는 스스로 믿고, 또 그렇게 말한다. 아담은 여전히 그런 어머니 이브도 자신의 옆구리에서 나왔다고 자만한다. 그리고 둘은 천사가 이끄는 대로 동쪽 문, 벼랑을 내려가 아래 들판에 이른다.

아담과 이브는 신의 계율을 처음으로 어긴 사탄의 자식, 즉 죄와 죽음을 공유한 공동운명체다. 쾌락의 미각을 경험하고 심판받은 후엔 서로 헐뜯었으나 둘은 사랑을 본다. 둘이 에덴을 통과해 “쓸쓸이” 손잡고 가는 그 길이 어떤 길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아래 발췌문은 결미 부분이다.

#
두 사람은 고개를 돌리고 낙원에 동쪽을
바라본다. 지금까지 저희 행복의 자리,
그 위엔 화염의 칼 휘둘리고, 문에는
무서운 얼굴과 불붙는 무기 가득하다
그들은 눈물이 저절로 흘렀으나 즉시 씻는다.
그들에게 안식의 땅을 택하도록 세계는 온통
그들 앞에 있다. 섭리는 그들의 안내자.
두 사람은 손에 손잡고 방랑의 발 무겁게
에덴을 통과해 쓸쓸이 길을 간다.

- 제12편 마지막, 589p

그때까지 그러한 쾌락을
풀밭이나 샘가에서 맛보지 못했으니.
드디어 포만해지자, 오래지 않아서 내 속에 이상한
변화를 지각할 수 있었고, 정신력에
이성이 생길 정도에 이르렀나이다. 언어도
곧 갖게 됐습니다. 비록 그 형체 그대로였지만,
그때 이래 높고 깊은 사색에 생각을
돌리고, 넓은 마음으로 하늘과 땅과
중천에 보이는 것 일체, 아름답고
좋은 것을 고찰했나이다. 그러나
아름답고 좋은 일체의 것이 그대의
거룩한 모습에, 미의 거룩한 광채 속에
결합되었음을 보았습니다. 어떤 고운 것도
그대와 동등하거나 버금가는 것 없나이다. 그래서
어쩌면 무례일 것이나, 부득이 이렇게 와서
만물의 군주, 우주의 여왕이라고 마땅히
선언된 그대를 보고 찬미하는 바이옵니다!"
악령의 교활한 뱀이 이렇게 말하니,
이브는 더욱 놀라, 별 생각하지 않고이렇게 대답한다. - P417

"뱀이여, 그대의 과찬들으니, 처음에
그대가 입증한 그 과실의 힘이 의심스럽도다.
그러나 말해라, 나무는 어디 있으며,
얼마나 멀리 있는지?
낙원 안에 자라는 하느님의 나무들 많아서
아직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도다.
우리가 선택할 것이 이렇게 풍부하기 때문에
과실의 태반은 손도 못댄 채,
썩지 않고 항상 매달려 있다. 후에 인간이
불어나서 그 공급을 즐기고, 많은 손의 도움으로
이 자연의 소산을 따 내릴 때까지."
그녀의 말에 간사한 뱀은
즐겁고 기뻐서 말한다.
"여왕이여, 쉽게 갈 수 있는 길, 멀지 않습니다.
줄지어 있는 도금양나무 저쪽, 샘 바로 옆의평지,
꽃피는 몰약과 유향을 지나 한
작은 덤불이 있는 곳. 만일 저의 인도를
수락하신다면, 곧 거기로 모시오리다."
이브가 "자, 인도하라" 한다.
뱀이 인도하면서
재빨리 굽이치며 뒹굴며 굽은 것도 곧게 보이니,
재빠르게 재난으로 향해 간다. 희망에 볏이 서고 - P418

기쁨에 빛난다. 마치 도깨비불-
밤기운에 응결하고 한기에 둘러싸인
기름기 낀 수증기로 이루어진 그 불이
흔들리는 데에 따라 불붙어 화염을 일으키고
(왕왕 악령이 여기에 따른다고 한다)
사람 속이는 빛으로 떠돌며, 불타서
당황한 밤손님을 길 잘못 들게 해
웅덩이와 늪, 또는 가끔 못이나 연못으로 이끌어
거기에 휩쓸려 들어, 구원도 없이
사라지게 하는 것같이.
그렇게 무서운 뱀은 번쩍이며, 우리의
속기 쉬운 어머니, 이브를 기만해 모든 인간의
고난의 근원인
금단의 나무로 이끈다.
그걸 보고 그녀는 안내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뱀이여, 우리가 여기에
오지 않았어야 할 것을.
여기에 열매 넘칠 정도이지만, 나에게는 열매 없는 곳.
열매의 효능 증명이 네 생각에 달린 것이지,
그런 결과의 원인이라니 참으로 기이하도다!
그러나 이 나무는 맛 보거나 손대선 안 되더라.
하나님은 그렇게 명령하시고, - P419

그 명령을 거룩한 목소리의 외딸로
하셨도다. 그 외엔 우리는
자신을 법률로 삼고, 이성이 우리의 율법이다." - P420

유혹자는 정열에 넘쳐 이렇게 시작한다.
"아, 거룩하고, 슬기롭고,
지혜 주는 나무여, 지식의 어머니여!
이제 내 내부에 그대의
힘을 분명히 느낀다. 사물의 원인을
분별할 뿐만 아니라, 아무리 현명하게 보일지라도
지고한 작용의 자취를 더듬을 수 있는 힘을.
이 우주의 여왕이여! 그 엄한
죽음의 위협을 믿지 마십시오, 그대들 죽지 않으리니.
어찌 그러리오? 열매로? 저것은 지식에다
생명까지 주나이다. - P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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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1-16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이걸 읽으셨단 말입니까? 저 도서관 가서 이 책 살펴보고 바로 집어넣었습니다. 아 내가 읽을수 있는 책이 아니구나하고 말이죠. 이번에 다락방때문에 잠시 고민했다가도 이 책은 그냥 패스하려고요. 진짜 읽다가 우울증 걸릴거같던데요. ㅠㅠ

프레이야 2022-11-16 22:46   좋아요 0 | URL
꼭 그렇지만 않을지도요^^
새로이 보이는 점이 있어요 다미여 관점으로. 서사시라 속도는 빨리 갈 수 있어요 의외로. 당시 권위를 가진 자의 펜으로 적힌 글이니 참고로요 ㅎ 근데 놀라운 건 시력을 잃고 쓴 거라.. 구술로 누가 받아 적었을까요? 결미는 열린 엔딩인데 그대로 여운이 있어요. 지금의 우리 새상을 생각해보게 되어요.

건수하 2022-11-17 09:25   좋아요 1 | URL
2권(2장)까지 읽고 다시 펴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
열매를 먹기 전부터 원래 영민하고 힘센 이브! 라는 말에 조금 위안이 되는데요?

밀턴에게 딸이 셋 있고 딸들이 받아적었다고 하더군요.
 

오래 지나 재독. 기존 밑줄과 메모에 다른 것들이 더 보인다. 오스틴의 표현대로 2인치 상아에 입힌 섬세한 세공, 부자연스러운 시작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 라는 말에 공감. 세상을 뜨기 2년 전 1815년에 초고 “엘리엇 가 사람들”로 집필 시작, 이듬해 초고를 완성하고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 1817년 언니 커샌드라와 윈체스터로 치료를 위해 거처를 옮기나 두 달 후 영면에 든다. 완성작으로는 마지막 작품.
다른 작품과 비슷하게 의외의 인물이 등장해 주인공으로 하여금 인물들의 참모습과 위선을 알아채게 하고, 남녀간 진실한 이해와 소통의 노력이 이루어내는 행복한 결말을 맺는다. 첫장면부터 구체적 연도를 내용에 기술한 점이 특이하고 섹슈얼리티와 계급, 권위를 부여받은 자의 펜으로 적히지 않은 미시사를 거론한다. 여성의 삶, 가족과 떨어진 선원으로서 가난한 가장으로서의 삶. 갈등을 종결하고 사건의 해결을 맞게 하는 여성끼리의 솔직함과 유쾌한 우정이 부각되는 점은 비슷하다. 후반부에서 하빌 대령과 나누는 앤의 낮은 목소리에 독자는 웬트워스만큼이나 귀를 쫑긋하게 된다. 오스틴이 낮추거나 숨겨서 냈던 목소리로 들린다.

"제가 말했듯이, 우리는 결코 이 문제에서 합의를 볼 수 없을 거예요. 아마 어떤 남녀든 마찬가지겠지요. 하지만 역사를 봐도 그렇고, 산문이건 운문이건 모든 이야기들도 당신에게 불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싶군요. 벤윅처럼 기억력이 좋다면 당장에라도 제 주장을 뒷받침해줄 인용구를 오십 개쯤은 댈 수 있을 텐데. 제평생 여자의 변심을 거론하지 않는 책을 본 적이 없어요. 노래도 속담도 모두 여자의 변덕을 얘기하지요. 하지만 아마 당신은 이 모든 게 남자가 쓴 거라고 하시겠지요 "
"아마도 그렇겠지요. 네, 그래요. 책에 나오는 예를 드는 일은 삼가해주셨으면 해요. 남자들은 자기들 얘기를 할 수 있어서 어느 모로 보나 우리보다 유리했던 거지요. 높은 수준의 교육도 펜도 남자들의 전유물이었어요. 책으로 뭔가를 증명하려는 건 안 될 일이지요."
"그럼 어떻게 증명해야 하나요?"
"결코 증명할 수 없을 거예요. 그런 문제에 대해 뭔가 증명할 수 있다고 기대하시면 안 되죠. 증거로 판가름할 수 없는 견해의 차이니까요. 어쩌면 남녀 모두 처음부터 각자의 성에 대해 편향된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요……." - P310

이 모든 것, 남자가 자기 삶의 보배인 존재를 위해 견뎌낼 수 있는 모든 일들, 성취해낼 수 있는 모든 위업을 당신에게 전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전 다만 심장을 가진 남자들만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는 감정에 복받쳐 자신의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아!"앤이 열렬한 목소리로 탄성을 내지르며 말했다. "당신이, 그리고 당신 같은 남자들이 느끼는 모든 것을 온당하게 대접할 수 있길 바랍니다. 다른 사람의 따뜻하고 신실한 감정을 하찮게 본다면 벌받을 일이겠지요. 제가 감히 진실한 애정과 절개는 오로지 여자들만의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경멸받아 마땅할 겁니다. - P311

"…… 저는 당신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눈을 질끈 감은 채 당신을 이해 하려고도 제대로 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누렸던 축복은 모두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것이라는 만족감에 익숙해져 있었으니까요. 명예로운 노고와 정당한 보상에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왔지요. 인생의 패배를 겪은 다른 위대한 인물들처럼."그는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저도 제 의지를 누르고 운명을 따르도록 해야겠습니다. 마땅히 받아야 할 몫 이상의 행복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하겠지요." - P328

그녀라면, 절대적으로 부유하고 완벽하게 건강하면서도 여전히 행복할 수있었을지도 모른다. 스미스 부인의 지극한 행복감이 활기찬 성격에서 비롯되었다면, 앤의 경우엔 따스한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앤의 성품은 온유함 그 자체였고 그러한 성품은 웬트워스 대령의 사랑 안에서 진가를 드러냈다. 그의 직업만 아니었다면 그녀가 그토록 온유하고 섬세하지 않았으면 하고 친구들이 바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언제있을지 모를 전쟁의 두려움만으로도 햇살 같은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져버릴 수 있었다. 앤은 선원의 아내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국가적인 중요성보다 가정적인 미덕으로 더 돋보이기도 하는 직업에 속한 탓에 그녀는 마치 세금을 지불하듯 만약의 일을 걱정하며 살아야 했던 것이다. - P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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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1-14 19: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평이 너무 좋으신거 아닌가요? 저 오스틴 이제 그만 읽으려다가 수하님이 <설득>이 제일 좋다고 해서 지금 읽으려고 줄세워놨거든요. 근데 프레이야님 이런 평 보면 진짜 기대만발하게 된다고요. ^^

프레이야 2022-11-14 19:38   좋아요 2 | URL
세 자매 중 둘째 앤 엘리엇이 주인공인데요 다른 작품처럼 구도가 비슷하지만 다르고요.
오스틴의 좁은 공간에서의, 최선의 역사의식 같은 게 분명히 보입니다. 여성의 입장만 강요하지 않고 남성의 진심도 내치지 않네요. ^^ 더 오래 살았더라면 어떤 작품을 더 썼을까 싶어요

다락방 2022-11-15 09:33   좋아요 0 | URL
바람돌이 님, 저도 제가 읽었던 오스틴 중에선 [설득]이 제일 좋았습니다!! ㅎㅎ

프레이야 2022-11-15 09:51   좋아요 0 | URL
다코타 존슨이 앤으로 나온 영화를 봤는데 역시나 그 시대 자연풍경이 저는 참 좋아요. 영화엔 스미스부인은 뺐네요. 레이디 러셀이랑 찰스 가 사람들 모두 아프리칸으로요^^

다락방 2022-11-15 10:23   좋아요 0 | URL
네 저 다코타 존슨이 좋아서 영화를 봤거든요. 오래전에 설득 처음 읽었을 때는 재미없게 읽었고 오만과 편견과 비슷한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영화 좋아서 책 다시 봐야지, 하고 보니 책이 엄청 재밌더라고요!! ㅎㅎ
그리고 다코타 존슨 너무 예쁘지 않나요. 설득에서도 너무 예뻤고요 설득은 그리고 영화음악도 엄청 좋았어요!!

프레이야 2022-11-15 10:56   좋아요 0 | URL
그랬군요 다락방님. 그죠^^ 앤을 화자로 한 점도요. 아내 잃은 벤딕 대령이 침울한 얼굴로 바이런 시를 시작하자 바로 이어서 읊으며 시만 읽어선 안 된다던 똑똑한 여자사람 ^^
 
인간의 일에 대하여 - 뤽 다르덴 에세이
뤽 다르덴 지음, 조은미 옮김 / 미행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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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와 소수자들의 삶에 관심 기울이고 특히 고통받는 아이에게 조건 없는 무한 사랑을 주는 어른들을 꾸준히 보여준 다르덴 형제. 10여 년 전 <자전거 탄 소년>을 찍으며 써내려간 뤽의 철학적 사유. 그들 영화를 보며 받게 되는 위로와 구원의 정체가 무엇인지 이해하게 된다. 반복하여 쉼표를 찍게 만든 생각들, 오래 다듬으며 고심하여 언어를 고른 흔적이 보인다. ‘어른’다운 통찰에 숙성한 시적 문장들, 온건하면서 명철하다.
저자인 동생 뤽 다르덴은 철학을 전공했고 형 장 피에르 다르덴은 리에주 예술학교에서 조연출과 실험연출을 전공했다.

타인의 절대적 사랑은 또 다른 보호막, 두 사람이 하나로 존재하는 보호막, 갓난아이가 살기를 원하게 만드는 보호막, 죽는다는 두려움을 점차 삶의 행복으로 바꾸며 죽음을 - 향한 - 존재로 만드는 시간을, 삶을 - 향한 - 존재가 되게 하는 시간으로 전환하는 역설적 보호막이 될 수 있다. - P73

그럼에도 인간이 만들어낸 "무한", 인간의, 오로지 인간적인 초월성을 생각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내 안에 떨어진 무한"이 시간의 흐름에 속하며 다른 인간으로부터 내게 온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 처음으로 타자를 향해 자신을 여는 것은 갓난아이로서 인간이 처음 겪는 트라우마이며, "그에게 떨어진 타자의 무한한 사랑, 무한한 사랑의 관계를통해서 이 트라우마를 벗어날 수 있다. 이 타자는 나중에 발생할 또 다른 타자와의 만남(두번째 트라우마)을 죽는다는 공포나 살인이 아니라 그에 대한 인정과 책임감으로 느끼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 P75

악의 소굴은 우울이라 불린다. 우울은 분리된 자의 삶보다 나아 보이는 존재 상태를 만들고 유지할 수 있는 엄청난 상상력이며, 보호막으로의, 닫힌 상태로의 회귀에서 오는 놀라운 힘이다. 이에 맞서는 것은 일시적이면서 강렬한 무한 사랑의 관계, 앞으로 다가올 모든 열림, 신뢰와 인정, 공감에 대한 모든 관계의 모태가 될 관계이다. - P99

인간이 다른 인간을 가르치는 것은 아이와 아이의 "어머니"가 주는 절대적 사랑의 관계에서 시작한다. 이때 어머니는 낳아준 엄마이거나 길러준 엄마일 수도, 여성이거나 남성일 수도 있으며, 젊었거나 늙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존재가 아이에게 절대적 사랑을 주기 위해 자신의 보호막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 P108

민주주의는 사랑이 아니라 법으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모두의 평등을 목표로 하는 이 법은 사람들을 이어주는 인간적 경험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이 법이 그의 가장 내밀한 문장으로 타자에 의해 인정받는 기쁨과 고통받는 타자를 위한 고통을 표현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을까? 두려움 없이자유롭게 인정되고 존중될 수 있을까? - P133

타인과의 관계에서 악은 공감의 부재로 나타난다. 공감이 없으면 결코 인간의 가능성은 진화하지 못할 것이다. 타인에 대한 공감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은 죽는다는 두려움의 포로가 되어 힘과 지배, 파괴의 욕구에 갇혀 있는 인간이거나, 제대로 된 사랑이나 인정을 받지 못한 인간이다. - P142

우리는 나이와 상관없이 언제나 아이로 깨어난다. 이때 우리는 사랑으로 인해 잊어버리고 사그라진 두려움의 순간을 다시 겪고, 마르셀 프루스트의『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처럼 "밀크 커피 한잔, 빗소리, 몰아치는 바람 소리 같은 아주 소소한것들"에 미소 지으며, 새로운 하루가 "미지의 행복에 대한 바람"을 가져오리라 느낀다. 새로운 행복, 미지의 행복은 항상 다시 만나는 행복이다. 어린시절 경험한 무한한 사랑의 행복을 다시 만나는 것이다. 이 행복은 늘 우리 안에 머물면서 어떤 새로운 행복이든 모두 받아들이고, 새로운 행복이 되어 다시 찾아오지만, 새 행복의 새로운 것, 미지의 것은 늘 간직하고 있다. 확실히,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다. - P159

예술은 인간의 고통을 표현한다. 표현하지 않고는 달리 방법이 없어 보인다. 예술 작품을 볼 때마다 우리는 놀라운 공감의 능력을 되찾거나, 우리의 연약한 모습을 함께 나누거나, 인간적인, 그토록 인간적인 공통의 무기력을 발견한다. 죽는다는 두려움, 타자의 무한한 사랑, 타인을 위한 고통을 느끼기 때문이다.

예술은 고통을 표현하는 동시에, 이 고통에서 벗어날 출구에 대해 이야기한다. 또한 이곳에, 이 세상에 있는 기쁨,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기쁨, 삶 속에 있는 기쁨을 표현한다.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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