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편의 장편소설과 160여 편의 단편소설을 남긴 

F. Scott Fitzgerald의 미출간 단편 18편을 수록한 책!









당신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아요 

I'd die for you.



젤다와의 이야기도 그렇고 은 루머가 따르는 작가이지만 그들만의 진실은 또 모르는 것이지 않을까.

프린스턴 대학 기록 보관소와 1930년대 잡지 등에서 찾아낸 작품 18편이 고스란히 모였다.

'차용증'만 데뷔 초 1920년 작이고 나머지는 1930년대, 특히 '사랑은 아프다'는 1939-40, 거의 말년 작이다. 

'커플'은 연대 미상. 표제작 '당신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아요'는 1935/36년 작. 

피츠제럴드가 타이프라이터로 쓴 원고 첫 장이 작품마다 실려 있고 실제 사진도 간간이 실려 있다. 

역시 핸섬한데 욕망에서 나오는 음울한 눈빛... 


각 작품 앞에 먼저 작가의 배경 설명이 있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아요' 앞에 있는 작품 배경 소개글 중, 


그는 이 단편이 판매되기를 몹시 바랐는데, 돈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언급하면서 "만약 <당신을 위해 죽어도 좋아요>가 판매된다면, 상황이 전면적으로 달라질 겁니다."라고 썼다. 피츠제럴드에게서 '자살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는 건 뜻밖이었는데, 특히나 1920년대 그의 경쾌한 작품들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더욱 그랬다. 그의 초기 단편소설들이 지닌 젊은이들의 로맨틱한 이야기에서 벗어나 복잡하게 구성하는 것은 사려 깊은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노스캐롤라이나 산군의 자연미 안에서 펼쳐지는 이 단편은 사실 어둡다. 뭔지 모르게 위험스럽고 암울한 분위기의 남자 주인공 칼리 딜래넉스만이 아니라 풍부한 색감과 묘사에는 <위대한 개츠비>의 수많은 울림이 있다. '깨어 있을 때조차 풍겨 나오는 썩은 내' 같은 표현은 

<위대한 개츠비>를 떠올리지 않고는 정확히 읽어낼 수 없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아요, 현대문학, 207쪽)




2021년도 다사다난하게 저물고 있다. 조금씩 정리해 보려고 한다.


















6월 중반부터 5차시로 장애인 대상으로 했던 문학수업 강의계획서이다. 위의 두 책을 텍스트로 했다. 갖고 계신 분도 있었다. 시각장애인 분은 녹음도서로 읽어 오시고 다른 분들은 종이책으로 읽어 오셨다. 동시대 미국을 살았지만 다른 작품 세계를 썼고 다른 삶을 살았던 작가의 단편을 비교하여 읽고 이야기 나누었다. 피츠제럴드보다 20년을 더 살다 간 윌리엄 포크너 작품이야 워낙 유명하지만 피츠제럴드의 단편 중 의외로 좋은 작품이 있다는 걸 알고 반가워하셨다. 대체로 포크너의 작품은 처음엔 어려운 듯했지만 수업하고 나니 참 마음에 남는다고 하셨고 피츠제럴드는 재발견이었고 신선했지만 비슷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고들 하셨다. 원래 같은 이야기를 여러 방식으로 하는 게 작가이다. 

 

 '서재의 향기'라는 이름으로 모여서 공부하는 이분들은 시와 소설과 영화 등 다양한 읽을거리에 관심이 많고 대단한 열정을 지닌 분들이다. 몸이 불편하신대도 나보다 먼저 와서 기다려 주시고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셔서 감사했다. 마지막 시간에는 소감도 나누었는데 또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참고가 되었다. 같은 텍스트도 역시 다 다르게 받아들이게 되고 자신의 한계 안에서 이해하게 된다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외연을 확장하고 사유를 넓혀갈 수 있으니 서로 참 좋은 시간이었다. 강의실이 있던 그 건물에 외부인 주차가 불편해 집에서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그길이 또한 참 좋았다. 전철역도 있지만 버스정류장 바로 앞이라, 물론 마스크를 하고 시내버스에 앉아 30분 정도 오고가는 길이 왜 그렇게 좋던지. 장마철이 될 거라 비가 자주 오면 오시기 불편할거라 걱정했지만 비는 한 번도 오지 않았다. 늘 그렇듯 몸이 아파 더 못 나온 분을 생각하면 안타깝다. 건강하시길...



포크너와 피츠제럴드 단편소설 읽기와 감상

에밀리에게 바치는 한 송이 장미 vs 오월제

 

 

포크너와 피츠제럴드 단편소설 읽기와 감상

헛간, 타오르다 vs 부잣집 아이

 

 

포크너와 피츠제럴드 단편소설 읽기와 감상

그날의 저녁놀 vs 분별 있는 일

 

 

포크너와 피츠제럴드 단편소설 읽기와 감상

붉은 나뭇잎 vs 광란의 일요일

 

 

포크너와 피츠제럴드 단편소설 읽기와 감상

여왕이 있었네 vs 컷글라스 그릇

 



# 피츠제럴드 단편소설의 세 가지 주제

_ 물질적 풍요와 성공에 대한 야망

_ 잃어버린 젊음과 아름다움에 대한 실망과 환멸

_ 삶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낭만적인 꿈과 환상. 구원적 환상. 낭만주의적 이상주의

 

# 피츠제럴드 단편소설의 특징

평생에 걸쳐 160개의 단편을 썼고 그중 1920년대와 30년대에 가장 많은 집필을 했다. 당시 미국이라는 구체성과 특수성이 비교적 강하게 드러나는 미국적 작가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그 시대를 초월하여 특수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조화와 균형을 이룬다. 피츠제럴드 작품 속 인물은 그만의 특징을 지닌다. 물질적 성공과 젊음과 아름다움을 얻으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좌절을 겪으며 깊은 절망에 빠진다. 이런 좌절과 절망에서 비롯하는 삶에 대한 우수와 비애, 비극적 상실감이 짙게 배어 있다. 1920년대 재즈 시대의 미국의 꿈은 시끄러운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감 나게 보여준다. 한마디로, 가난한 소년이 대도시의 휘황찬란한 쇼윈도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으로 비유된다.

 

# F.S.피츠제럴드가 사망하기 일 년 전 사랑하는 딸 스코티에게 보낸 편지 중

뮤지컬 작가들처럼 글을 썼으면 할 때가 있었지만 그러기에는 나는 실제로는 너무나 도덕가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독자들을 즐겁게 해 주기보다는 오히려 어떤 용인할 수 있는 형식으로 그들을 가르치고 싶어 한다.”


#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가면서도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     다. - 묘비명

 

# 명언_ 한 차례의 패배를 최후의 패배로 혼동하지 말라.

(비교)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어도 패배당하지 않는다.- 헤밍웨이



아들이 이블린과 이 차갑고 악의에 찬 아름다운 물건 - 즉 오래전에 얼굴도 잊어버린 남자로부터 받은 이 원한 담긴 선물 - 사이에서 갑작스럽게 시작되어 오랫동안 맥 빠진 막간으로 계속되어 온 음흉한 시합에서 점수를 기록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생각에 잠긴 듯 육중하고 수동적인 모습으로 그 그릇은 오랜 세월에 걸쳐 그랬듯이 그녀 집 안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전 개나 되는 눈으로 얼음처럼 차가운 빛을 내뿜고, 그 사악한 빛은 늙지도 않고 변하는 일도 없이 서로서로 하나로 합쳐지면서 말이다. 

- 피츠제럴드 단편선1 <컷글라스 그릇> 182-183쪽, 민음사



서재의 향기 1차에는 두 작가에 대한 배경과 소개를 이야기했고

아래는 2차시에 이야기 나누기 전 감상에 도움이 되도록 짚어 드렸던 키워드.


1. 에밀리를 위한 장미 한 송이 / 윌리엄 포크너

- 쇠퇴, 상실, 몰락해 가는 것들을 바라보는 관점(요염한 몰락)

- 과거, 현재, 미래 시간의 영속성 안에서 지켜야 할 숭고한 가치.

- 가부장적 권위와 폭력, 사랑의 왜곡된 이름

- (주체적) 여성주의 관점으로 본 에밀리의 선택

- 물리적 시간에 따라 서술하지 않고 서술자의 마음에 떠오르는 의식의 흐름에

   따라 구성한 플롯의 효과. 복수1인칭 관찰자 시점(우리 마을사람들)

-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면서 옛것을 지키는 의미

- 미국 남부의 보수적 가치와 북부의 자유로운 정치, 사회적 연대 및 연합

  

2. 오월제 / F.S. 피츠제럴드

- 재미있으면서도 진지하고 대중적이면서도 예술적인 피츠제럴드의 단편소설 중 하나.

- 시끄러운 세상에서 무언가 찾으려는 젊은이들의 방황, 혼란, 사랑의 실종.

- 1920년대 미국 재즈시대, Lost Generation

- 물질이 우리 삶에 줄 수 있는 것.

- 물질과 정신의 상관관계.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러려면 어떻게?

- 결국 우리가 추구해야할 가치가 있다면...

 

3. 헛간 타오르다 / 윌리엄 포크너

- 절제된 언어와 치밀한 구성, 강렬하면서도 서정적인 시각적인 언어.

- 남북전쟁 후 재편성되어가는 남부 사회에서 실존의 자리를 상실한 가장의 비애

- 소년이 바라보는 비애와 절망과 공포가 어떻게 변해가는지.

- 불가해하고 모순적인 아버지라는 세계와 소년이 속한 사회 밑바닥 혹은 가장자리의 삶

- 그 세계를 탈출해 어두운 숲으로 향하는 어렴풋한 희망의 빛

- 헛간은 시대를 초월해 냉담한 현대의 사회 변두리에서 소외된 이웃(의 공간)

- 불은 아버지에게 자기 안에 깊이 내재한 주요한 요소를 지켜내는 무기’, 자기존재의 확인

 

4. 부잣집 아이 / 피츠제럴드

- 사람을 어느 유형으로 바라본다면 생길 수 있는 오류

- ‘’ 3인칭 관찰자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앤슨에게 들은 이야기)

- 인간성의 모순 혹은 다양성.

- 1920년대 미국의 잃어버린 세대의 삶

- 풍요 이면의 허무와 상실감.

- 천박하지도 고상하지도 않은 균형감을 지니고 적절히 리듬을 타는 대사와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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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11-11 23: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문학텍스트로 진행되는 수업, 따뜻한 분위기에서 대화로 진행되는 수업, 굉장히 궁금하고 멋질 것 같습니다. 강의계획서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프레이야 2021-11-11 23:36   좋아요 3 | URL
독서모임에서도 괜찮을 것 같아서 올려 보았어요.
고맙습니다, 북사랑님^^

얄라알라 2021-11-11 23: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문학모임에 껴보고 싶어도, 용기가 나지 않은데 너무너무 궁금한 이 호기심.....언젠가 우연한 기회가 오면 꼭 참여해봐야겠어요 프레이야님의 강의를 직접 들을 기회가 혹시라도 온다면 더욱 좋겠고요. ^^

프레이야 2021-11-12 00:02   좋아요 3 | URL
텍스트를 집에서 읽고 오는 게 우선이지만 혹시 바빠서 못 읽고 오시는 경우들도 있으니
처음부터 아예 같이 읽어나가는 강독 형식의 독서수업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요.
작가의 배경도 이해할 필요가 있구요.
수업이라기보다 모임 식으로 편하게 찾아보시면 어디든 있을 것 같아요^^

scott 2021-11-12 00: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책으로 사랑의 온기를 전하시는 분!

프레이야 2021-11-12 01:12   좋아요 2 | URL
스캇님 😊 감사해요 좋게 봐 주셔서요

다락방 2021-11-12 07: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컷 글라스 보울은 핏츠 제럴드 단편들 중에서도 압권이죠. 제가 정말 좋아하는 단편이에요. 피츠제럴드 소설을 읽은 후 나누는 이야기 들이라니 참 좋네요.

프레이야 2021-11-12 10:09   좋아요 2 | URL
그죠. 단편이 더 좋은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비행기 타기 세 시간 전, 도요. ^^

새파랑 2021-11-12 07: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강의계획서도 하시고 멋지세요~!! 저도 피츠제럴드 단편 좋아하는데 안읽어본 단편도 몇개 보이네요 ㅋ 저 책으로 읽어봐야 겠어요 ^^

프레이야 2021-11-12 10:09   좋아요 3 | URL
저 미출간집 좋아요.
돈 벌기 위해 많이 썼고 편차도 있지만 그중 닥품성 있는 것들이 민음사 편에 담겨 있구요. 사람을 속단하면 안 되는데 피츠제럴드에게도 사람들이 오해나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으니. ^^

stella.K 2021-11-12 14: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못 뵙는 동안 열심히 사셨군요.
부럽고 존경스럽네요.^^

프레이야 2021-11-12 17:58   좋아요 3 | URL
에구 뭘요 ^^
늘 힘 되는 말씀 감사합니다 😊

mini74 2021-11-12 18: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 읽고 이야기하고 수업도 하시고. 글도 쓰시고. 대단하세요. 👍. 날이 차요 항상 건강조심하세요 프레이야님 *^^*

프레이야 2021-11-12 18:38   좋아요 2 | URL
고맙습니다 미니님~^^
감기 걸리기 좋은 날씨에요. 일교차도 심하고요. 오늘은 계속 뜨끈한 음식 먹고 있어요.
생강차 한 잔 하세요^^

붕붕툐툐 2021-11-12 23: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딥니까? 여기가~
저 진정 가고 싶어요~ 물리적 거리가 허락된다면 참여해도 되나용??
아.. 끝난건가요?? 다시 또 하시면 진짜 참여하고 싶어요~ 강의 공지 해주세요!!!👍😄

프레이야 2021-11-13 00:03   좋아요 2 | URL
ㅎㅎ 귀여우신 울붕붕님 오시면 좋겠지만 넘 멀지요. 끝났어요. 알라딘에서 우린 늘 책 이야기 작가 이야기를 하잖아요^^ 명상과 등산 이야기도요.

희선 2021-11-13 0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 사람 소설을 함께 보고 이야기를 나누었군요 둘 다 이름만 알고 소설은 예전에 《위대한 개츠비》밖에 못 봤습니다 보기는 했지만 잘 모르고 봤네요 다음에 또 강의하시겠네요 그때도 즐겁게 하시기 바랍니다 프레이야 님 건강 잘 챙기세요


희선

프레이야 2021-11-13 07:49   좋아요 2 | URL
다음엔 어떤 주제로 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기회가 오면 좋겠지요.
피츠제럴드는 단편이 상당히 많지만 수준에는 편차가 좀 있어요.
책에 실린 단편은 모두 세련된 문장과 못지않은 통찰이 꽤 매력적입니다.
늘 물질과 젊음을 갈망하고 욕망이 많았던 사람이었네요.
유년의 배경이 한 인간에 미치는 영향은 참 큰 것 같아요.
희선님 따뜻한 말씀 고맙습니다.^^

서니데이 2021-11-13 1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으로 문학수업 하시는군요.
감기는 좀 어떠세요. 빨리 좋아지시면 좋겠습니다.
프레이야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프레이야 2021-11-13 20:30   좋아요 1 | URL
이제 정말 겨울이네요. 마음음 아직 겨울이라고 인정이 안 되는데 말이죠. 오늘은 많이 좋아지네요. 항상 감기 조심하세요. 따뜻한 차 많이 드세요. 전 이번에 생강차랑 뱅쇼가 한몫한 거 같아요. ^^
 

드디어 감기몸살이 오고 말았다. 매년 이맘때면 그런다. 밤샘도 몇 날 하고 몰아붙여서 마무리한 몇 가지 일들이 후유증을 남기는 것 같다. 병원에 갈까 하다 귀차니즘도 발동하고 좀 꺼려져서 생강차 진하게 마시고 좀 누웠다가 일어났다. 며칠전 고교 동기의 아버지가 향년 87세로 돌아가셨는데 골절로 입원 중 코로나 감염이 되었던 게 원인이라고 해서 너무 놀랐다. 접견도 못했고 빈소도 채 차리기 전에 화장부터 하고 있다고 연락이 왔다. 날도 흐린데 옛생각도 나고 황망하여 마음이 무척 안 좋았다. 하던 일을 어느 정도 마무리해 놓고 토요일 저녁에 장례식장을 찾아갔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친구 빼고 나머지 유가족들은 별로 침통해 하지 않고 의외로 얼굴들이 좋아서 또 놀랐다. 싱글거리는 것까진 좀 아닌 것 같아 이상하다고 여기며 나왔는데, 그 아버지가 병석에 오래 있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재혼하여 가족들 사이가 별로였다는 말이 들렸다. 꼭 그래서만은 아닐테지만 그래도 좀 납득이 안 되고... 한 사람, 한 집의 비하인드 스토리야 어찌 말로 다할까. 아무튼 나라는 인간, 어서 낫고 힘내야 하는데 에고... 연말까지 해야 할 일들이 몇 가지 남았는데...


8월 말부터 10주간 점자도서관에서 성인 시각장애인 대상으로 '테마가 있는 시 감상' 수업을 했다. 원래 상하반기 나누어 하는데 코로나 이후 줄여서 이루어졌다. 개근상 드려야 할 분이 다섯 분 있고 외워서 낭송도 잘 하시고 시를 쓰는 일에도 관심을 보여 쓰시고, 모두 삶에 시가 들어오면서 느끼는 게 많아지신 것 같아 나 또한 감사했다. 매 시간 다른 테마로 시를 골라 소개해 드렸는데 4차시에는 '관계, 타인이라는 의미'를 테마로 했다. 그중 김언의 시 두 가지. 

김언은 1973년 부산 출생이다. 운전중에 들은 EBS라디오 윤고은 시인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에서 김언의 시 '미학'을 듣게 되어 시인을 알게 되었다. 














 김언 시집 <모두가 움직인다>







미학 / 김언



나는 혼자서 쉽게 놀지 않는다. 어딘가에 타인을 만들고 있다.

고요하고 거침없이 적을 만든다. 그를 사랑해도 좋다.

그와 무엇으로 대화하겠는가.

 

적당한 간격을 두고 위험에 대해

아름다움을 말하고 있다.

 

나는 혼자서는 쉽게 취하지 않는다.

어딘가에 항상 손님을 만든다. 분노를 만들기 위해 그를 쫓아가도 좋다. 꼭 그만큼의 간격으로

 

누군가를 방문하고 멱살을 잡는다.

나는 혼자서는 쉽게 풀지 않는다. 어딘가에 꼭 오해를 만들고 있다

 

 

 


사람을 만나러 간다 / 김언

 

 

사람을 만나러 간다.

사람을 만난다는 게 전혀 시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도 나의 만남은 지속적이고 끈질기다.

나는 조바심이 많은 문학이다. 징그러울 정도로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다. 사람을 만나러 간다.

둘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고 가겠는가.

우리는 시적으로 충분히 지쳤다. 둘 사이에

어떤 시도 오고 가지 않지만 우리는 충분히

괴로워하고 있다. 그 얼굴이 모여서

시를 얘기하고 충분히 억울해하고 짜증을 부리고

돌아왔다. 사람을 만나러 간다.

더 만날 것도 없는 사람이 더 만날 것도 없는

사람을 만나러 간다. 시를 얘기하려고

오늘은 내 주머니 사정을 들먹이고

내일은 내 자존심의 밑바닥을 꽝꽝 두드리고

망치나 해머 뭐 이런 것들로 내 얼굴을 때리고 싶은

상황을 설명하고 그럼에도 꺼지지 않는 불씨를 들먹이는

너를 만나러 간다. 사람을 만나러 간다.

너 또한 내일은 사람을 만나러 간다. 꺼지지 않는 불씨를

확인하려고 네가 만나는 사람과 내가 만나는 사람.

거기서 시가 오는가? 거기서 시를 배우는가?

우리의 만남이 전혀 시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도 시에 대한 얘기는 끝이 없다. 억울할 정도로

길고 오래간다. 꺼지지 않는 이 불씨가

시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아니다. 사람을 만나러 간다.




쟝 폴 사르트르(1905-1980)가 말한 즉자존재(사물)와 대자존재(인간)를 떠올려 보면, 인간은 사물과 달리 고정화하지 않는 존재이므로 나를 사물화하고 대상화하여 나의 자유를 제한하는 타인은 내게 지옥이다. 타인이 지옥이라는 말을 오해하면 안 된다. 관계가 왜곡될 때 타인은 지옥이 되는 것이다1943년 카뮈와 교유를 시작했고 이 무렵부터 저항운동을 하는 지하잡지에 기고했다.  1964년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었지만 거절했고 1980년 사망하여 몽파르나스 묘지에 안장되었다. 

태어나서 1년 후 아버지를 잃고 10년 동안 외가에서 살게 되었는데 이때의 기억을 <말Les Mots>에 자전적으로 담아 1963년 발간했다. 사르트르 자신은 <말>이 문학에 대한 고별이었다는 뜻의 말을 여러 번 하였지만 그것은 소설이나 희곡을 쓰는 작품 활동의 중단을 의미하는 것이지 문학적 관심 그 자체를 포기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미 1954년부터 쓰기 시작한 이 자서전에 거듭 수정을 가해 다른 어떤 문학작품보다 더 문학적인 문체를 이루어 놓았다는 평을 받는다. 사르트르는 평생 시력이 좋지 않았고 1973년부터는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고 한다. 





나는 천직을 포기했다. 그러나 환속한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글을 쓰고 있다. 달리 무슨 할 일이 있겠는가? 

"한 줄이라도 쓰지 않는 날은 없도다."

 이것이 내 습성이요 또 내 본업이다. 오랫동안 나는 펜을 검으로 여겨 왔다. 그러나 지금 나는 우리들의 무력함을 알고 있다 그런들 어떠하랴. 나는 책을 쓰고 또 앞으로도 쓸 것이다. 슬 필요가 있다. 그래도 무슨 소용이 될 터이니까 말이다. 교양은 아무것도, 또 그 누구도 구출하지 못한다. 그것은 아무것도 정당화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산물이다. 인간은 그 곳에 자기를 투사하고, 거기서 제 모습을 알아본다. 오직 이 비판적 거울만이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뿐 아니라 그 쓰러져 가는 낡은 대궐, 즉 나의 속임수는 나의 성격이기도 하다. 사람이란 신경병을 떨어 버릴 수는 있지만, 자기 자신이라는 고질병에서 치유될 수는 없는 법이다. 아무리 닳고 지워지고 모욕당하고 따돌림당하고 묵살당한다 하더라도, 어린 시절의 온갖 특징은 50대 인간에게 그대로 남아 있다. 대개의 경우 그것들은 어둠 속에 납작 엎드려서 기회를 노리고 있다. 그리고 방심하기만 하면 당장 다시 고개를 들고 변장을 하고는 백일하에 뚫고 나온다. 나는 오직 나의 시대를 위해서만 글을 쓴다고 진심으로 주장하지만, 현재의 내 명성이 짜증스럽다. 내가 지금 살아 있는 이상 그런 명성은 영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족히 과거의 미몽은 보정된 셈이다. 그러나 혹시 내가 아직도 남몰래 그 미몽을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내 생각에는 꿈을 변형한 것 같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죽는 기회를 놓쳤기 때문에, 때때로 남의 오해를 받으며 사는 것이 신나는 것이다. (270-271쪽)




 

(첫문장) 1850년 무렵, 알자스 지방에 살고 있던 한 초등학교 선생이 아이들에게 들볶이다 못해 식료품상으로 직업을 바꾸고 말았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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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1-11-10 15: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에공~감기 빨리 낳으시길요^^
부모님 부고 소식이 잦네요?
시간도 그러할 것이고,계절도 그러한 것일까요?
......저희 동창들도 부모님의 부고 소식을 종종 전해주곤 하더라구요.ㅜㅜ
날이 갑자기 추워졌습니다.
건강관리 잘 하시길요♡

프레이야 2021-11-10 15:53   좋아요 3 | URL
그렇죠. 우리 나이가 ^^
결국 병원 갔다 왔어요. 주사 맞고 약 받고 ㅎㅎ
좀 빨리 나으려구요.
날이 차요. 책읽는나무 님도 감기조심!!

mini74 2021-11-10 17: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엔 결혼식 돌잔치, 지금은 장례식 갈 일이 더 많아지네요. 프레이야님 시 수업 저도 둗고싶네요 *^^*감기 얼릉 나으세요 ~

프레이야 2021-11-10 17:40   좋아요 2 | URL
고맙습니다 미니 님 ^^
주사 맞고 왔으니 언능 나아지겠지요 에구.
시 낭송도 해 드리고 시인 이야기도 하고요 ~

2021-11-10 18: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1-10 18: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파랑 2021-11-10 19: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날씨도 추운데 밤샘까지 하셔서 감기 몸살이 걸리셨군요 ㅜㅜ 빨리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프레이야 2021-11-10 19:34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새파랑 님. 으샤!!
감기 조심하세요 ~^^

붕붕툐툐 2021-11-10 23: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성인 시각장애인을 위한 시수업이라니, 너무 멋지세요~~
서로에게 풍성한 시간일 듯 하네요~
프레이야님, 얼른 쾌차하시길 빌게용!!🙏
(밑줄친 첫문장 완전 공감이요~ㅎㅎ)

프레이야 2021-11-10 23:17   좋아요 2 | URL
신나게 ~ 붕붕님 고마워요 ^^
시를 좋아히시고 수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마음에 들어하셔서 저도 감사한 일이죠.
좋은 시간이었어요. 마지막 시간에 시 낭송하고 소감도 듣고 울컥하더라구용. 아이들한테 들볶이다 직업 바꾸실라요 ㅎㅎ 계속 국어샘 붕붕님으로 계셔주세요.

희선 2021-11-13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감기몸살 좀 나아지셨는지... 감기몸살은 잘 쉬어야 낫는 듯합니다 그동안 밤새우셔서 몸이 쉬라고 아픈가 봅니다 사르트르 나중에 눈이 안 보였군요 사르트르 이름만 알고 잘 모르지만, 다른 것보다 눈은 중요한데... 눈이 보이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읽어주는 책을 듣고 글을 쓴 사람도 있군요 그런 사람 대단합니다


희선

프레이야 2021-11-13 07:51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아직 헤롱거리고 있어요.ㅜㅜ
어제는 뱅쇼를 만들어 두 잔 벌컥이고 오늘도 계속 생강차 흡입중입니다.
육체적 고통과 한계를 이겨내며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연구하고 예술활동을 하는
위대한 인간들의 업적, 참 존경스럽습니다.

2021-11-13 2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1-13 2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1-14 0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1-14 0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1-14 1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 책이 새로 나왔네요. 표지 바꾸고 저자 이름에도 한 분이 더 합류되었어요. 원래 저자 김새별 님은 제가 이 책을 부산점자도서관에서 낭독녹음할 때만 해도 유품정리사로서 생경한 직업에 사회적으로도 덜 알려져 선입견과 편견에 상처도 입고 힘들게 작업하셨던 분인데 얼마전 티비 모 프로그램에서 나온 걸 보고 무척 반가웠습니다. 한 길을 꾸준히 오래 한눈팔지 않고 정진하며 자신의 일에 자부심과 보람을 느낀다는 게 보였고 여러모로 성장한 모습도 보였어요. 이제 업체도 커진 것 같고 직원도 여럿이겠지요. 제 목소리를 담은 녹음도서가 부산점자도서관에 있고 그걸 들은 한 분이 참 좋았다고 피드백 해 주셔서 또 기뻤던 기억이 납니다. 이 책 권해 드리고 싶어요. 삶의 의미를 돌아보고 지금의 삶에 좀 충실할 수 있는 현실적인 생각도 드는 책입니다. 현장에서 보고 느낀 걸 소박한 문장으로 쓴 책이에요. 새로 나온 책은 표지가 좀 더 강렬합니다.



아래는 예전에 어느 책 소개 코너에 썼던 글


현재 초등학생들이 성인이 되어 사회에 진출할 즈음이면 기존의 직업이 많이 사라져 새로운 직업군에 종사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인공지능이라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기계가 인간의 머리를 대체하여 손과 발이 되어줄 가능성도 더욱 커집니다. 그에 맞게 지금부터 새로운 교육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평생교육 또한 필요하다고 합니다. 성인도 40세 이후, 50세 이후가 되면 재교육을 받아야 하는 새로운 사회 교육 시스템이 정립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인간만의 능력이 분명 있을 테지요. 감성이라든지 창의성, 소통과 감사의 영역에서 기계가 일정 부분 대신한다 해도 그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특히 사람이 진정한 마음으로 섬세한 손을 놀려서 하는 작업에 기계가 들어서기엔 한계가 있지요. 이 책의 저자, 김새별은 이름만 보고 여자인 줄 알았는데 남자입니다. 유품정리사라는 직업이 있는 줄도 처음 알았습니다. 이 책의 부제는 ‘유품정리사가 떠난 이들의 뒷모습에서 배운 삶의 의미‘입니다.

​김명민, 하지원이 나왔던 영화 <내 사랑 내 곁에>가 생각납니다. 하지원이 장례지도사로 나왔지요. 저자 김새별은 대학시절 친구의 갑작스런 죽음을 목도하고 장례지도사가 되었습니다. 이후 유품정리사가 되어 죽은 사람의 집을 청소하고 유품들을 정리하여 유가족의 손에 넘겨주는 일을 합니다. 장례지도사도 생소한 직업이었지만, 유품정리사는 더욱 낯선 직업입니다. 열악한 직업환경이라는 점은 시작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지금은 직원도 있고 등록도 되어 있는 전문적인 직업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매일 죽음의 현장으로 출근합니다. 범죄로 사망한 경우와는 달리 고독사나 자살인 경우, 주검은 꽤 시간이 지나 발견됩니다. 그 현장을 몸소 치우는 일은 상상 이상으로 힘든 일일 것입다. 시체가 부패하여 악취가 진동하고 구더기가 들끓고 강아지나 고양이 같은 애완동물까지 죽었거나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현장을 청소, 소독, 정리하는 일이니 말입니다. 떠난 사람의 흔적을 치우고 남겨진 물건을 정리합니다. 전기장판 아래 깔려 눌어붙은 지폐도 있고 집안 구석구석 오줌이 꽉 찬 소주병도 있습니다.

놀랍게도 고독사는 비단 독거노인들의 일만이 아닙니다. 청년실업자, 지방출신 일류 대학생, 히키코모리 등 사회적 마이너리티들의 목숨 또한 사각지대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의 무관심만 탓할 수는 없습니다. 유품정리사는 마을 사람들의 편견도 심하게 받습니다. 집주인은 집값이 떨어질까 쉬쉬하고, 유가족은 값나가는 것을 혹여나 놓칠까 전전긍긍하고, 이웃은 장비를 실은 커다란 차가 골목에 들어서는 것부터 꺼립니다. 저자는 몸도 마음도 너무나 고된 일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정적으로도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될 것 같으니 감정노동이 가장 심한 직업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유품정리사라는 직업을 특별히 여겨 보수 면에서 기대를 갖고 문의해 오는 젊은이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직업만큼 투철한 사명감과 냉정한 감성 그리고 참된 인간애를 필요로 하는 일은 없을 듯합니다.

문장이 아름답다거나 특별하지는 않습니다. 철학적 사유를 그럴듯하게 풀지도 않습니다. 그저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오며 보고 느끼고 깨닫게 된 사실을 담담하게 적어냈습니다. 꾸밈 없이 차분한 시선으로 일관합니다. 딸 하나와 아내가 있는 저자 자신의 삶을 비춰보며 가신 자들과 남은 자들의 뒷모습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의미 있는 삶이었다 할 수 있을까 고민합니다.

저자 나름의 결론은, 마지막 순간에 우리에게 정말로 남는 건 사랑을 주고 받았던 추억이라는 진리입니다. 자살이나 범죄로 고인이 된 사람들은 주로 혼자 살고 있는 경우가 많았지만, 가족과 함께 거주하고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홀로 살았습니다. 특히 딸가족과 함께 살면서도 고독사한 어느 할머니의 경우는 정말 놀랍습니다. 외로움을 물질적인 사치로 달래고 살았던 것입니다. 떨어져 있는 자식에게 걱정 끼치지 않으려고 지병을 숨기고 홀로 살면서 술병이나 도벽으로 고독을 달랜 아버지들도 있었습니다. 현실적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자신의 꿈으로 고민하다 자살한 청춘들, 사랑이라는 열병으로 죽임을 당한 경우 등 안타까운 사연들. 이들이 떠난 후에 남겨진 것들을 수습하며 저자가 느낀 점들이 우리에게 거꾸로 삶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해 걸어갑니다. 그 걸음은 별을 향해 걸어가는 한 발 한 발입니다. 별은 손에 잡힐 듯 떠있습니다. 아주 멀리 있는 별은 사실 가까이 있지요. 늘 우리를 바라보며 낮이든 밤이든 우리의 머리를 밝혀줍니다. 별은 천상에 떠 있는 무덤입니다. 결코 애닯아 할 무엇이 아니라 열심히 뚜벅뚜벅 걸어가야 할 본향입니다. ​그래서 천상병 시인은 ‘하늘로 돌아가리‘라고 노래했을까요.

저자는 에필로그 뒤에 부록으로 유품정리사가 알려주는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7계명‘을 적어둡니다.
정리해봅니다.

1. 삶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 정리를 습관화하세요.
쓸모없는 물건은 과감히 버리거나 주변사람들에게 나눠주라는 말입니다.
사는 공간을 단순하고 청결하게 유지하라는 말입니다.

2. 직접하기 힘든 말이 있다면 글로 적어보세요.
당신이 떠나고 난 뒤 상실의 고통에 빠져 힘들어할 사람들을 위한 작은 배려가 됩니다.

3. 중요한 물건은 찾기 쉬운 곳에 보관하세요.
유품 정리 시 모르고 버려질 수 있다는 사실. 가족들에게 미리 알려두는 방법도 좋습니다.

4. 가족들에게 병을 숨기지 마세요.
모르고 있었던 자식이 죄책감에 시달려 마음의 병을 얻고 괴로운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5. 가진 것들은 충분히 사용하세요.
아낀다고 모으기만 하고 자신은 누리지 못하는 건 어리석은 일입니다.
가진 물건은 잘 사용하고 필요 없는 물건은 과감히 버리며 삽시다.

6. 누구 때문이 아닌 자신을 위한 삶을 사세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겪는 것이 다른 사람에 대한 원망이라고 합니다.
그럴 바엔 이기적이더라도 자신을 위한 삶을 사는 게 낫습니다. 내가 잘 살아야 남도 도울 수 있습니다.

7.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사랑했던 사람과의 추억입니다.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남기세요.
당신의 마지막 순간을 따듯하게 감싸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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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11-07 16: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7계명은 인상적이네요. 캡쳐해놨습니다 ^^
5번 6번 7번이 너무 좋네요~!!

프레이야 2021-11-07 17:44   좋아요 3 | URL
그죠 새파랑 님. 1,2,3,4번도 현실적으로 아주 중요한 팁 같아요. 평소 정리하는 생활. 실제로 유품 정리하다가 장판 아래나 액자 뒤에 숨겨둔 걸 발견했다고 해요. 얼마전 뉴스 생각 나네요. 중고 냉장고 아래에 거금을 숨겨둔 사연요. 가족들에겐 어떤 식으로든 숨기지 않고 뭐든 알려두는 게 좋겠습니다. 글로 마음도 적어두고요.

북다이제스터 2021-11-07 19: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생각보다 유품정리사가 주변에 많더라구요.
집을 깨끗하게 정리해 주시는 분들이 유품정리를 겸하는 경우가 많은 걸 주변을 보며 알았습니다.
그만큼 우리에겐 정리해야 될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프레이야 2021-11-07 19:47   좋아요 2 | URL
그동안 많이 생겼나 봐요. ^^
그리고 필요한 직업인 것 같다는 생각 들더라구요. 의외로 유가족이 유품을 거부하는 일도 많고 그걸로 분쟁이 되는 경우도 있나 봐요. 한 가지 일에 꾸준히 매진한 분이 새삼 존경스럽더군요. 험한 경우도 많이 겪어야 해서 엄청 에너지 빼앗기는 일일건데 말이죠.
정말 수시로 정리하며 살아야겠어요.

mini74 2021-11-07 2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번부타 7번까지 모두 마음에 와닿아요.
저는 하나 더 욕심내자면 예쁜 속옷입고 가고 싶어요 ㅎㅎㅎ

프레이야 2021-11-07 22:15   좋아요 2 | URL
ㅎㅎ 그럼요. 그러자구요 우리.
누가 그러더라구요. 항상 이쁜 속옷 입고 나간다구요. 길에서 어떻게 사고 날 수도 있고 그럼 병원 응급실 가면 옷이 드러날건데 그러면서요.

hnine 2021-11-08 04: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디에 적어놓아야겠어요.
마지막이 언제가 될지 미리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오늘이 더 소중해지네요.
그 ‘오늘‘을 많이 웃으며, 속 끓이지 않으며 살기로해요.

프레이야 2021-11-08 04:37   좋아요 1 | URL
앗 안 주무시고. 일찍 일어나신 건가요. 오늘을 하루하루 즐겁게 쌓으면 일주일 한달 일년이 되겠어요 ^^

happiness 2023-10-25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독서평 읽고 후기는 처음 남겨봅니다. 아빠와 작별한지 1년. 아직도 유품정리를 못했고 못하겠고 그저 슬프고 아프기만 합니다. 책 꼭 읽어볼께요. 혹시 독서동아리 하시면 같은 회원 하고 싶네요. 후기글 감사합니다!🙏

2023-10-25 0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진 세버그>



2019년 작인데 우리나라엔 11월 4일 개봉 예정 영화 <세버그Seberg> 

두근두근 기다리는 중. 진 세버그는 마릴린 먼로와 동시대 활동했다. 한 사람의 일생을 돌아보는 일은 내가 선 자리를 돌아보는 일이기도 하고 사람을 이해해 보고자 하는, 어떤 페이소스가 솟는 다감한 일이기도 해서 실제 인물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나 책을 좋아하는 편이다.


이 영화 이전에 세버그를 다룬 영화가 한 편 있지만 '현대적인' 세버그를 현대의 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거의 싱크로율 100%로 재생했다. 포스터 속 저 줄무늬 원피스는 <네 멋대로 해라>에서 입고 나온 옷을 재현한 것이다. 크리스틴에게 잘 모르고 가지고 있던 약간의 편견이 깨어진 건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에서 였다. 줄리엣 비노쉬와 같이 나오는데 너무나 좋은 영화로 기억한다. <세버그>에서도 연기력 제대로 살 것 같다. 이미 너무 많은 이야기가 재생산된 진 세버그와 로맹 가리. 불행한 삶이었을까 행복한 삶이었을까, 이건 두 사람만이 내릴 수 있는 생각일 듯. 타인의 삶을 타인이 판단하는 건 불필요한 생각이지.  진 세버그가 죽고 일 년 후 스스로 생을 마감한 로맹 가리는  이제 나를 다 표현했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고 한다.  나를 다 쓰고 표현하고 떠날 수 있다면 행복한 삶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생각이 든다.



<로맹 가리 집필 모습>


젊은 시절 로맹 가리와 어머니와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영화 <새벽의 약속>도 추천.

아들이 대작을 써내려가도록 헌신하는 강인한 어머니로 샤를로트 갱스부르가 나온다.  

















진은 미래가 그녀의 인생을 위해 마련해 둔 불길한 징조처럼 들리는 제목의 영화 <내 비문을 누구도 쓰지 못하게 하라Let No Man Write My Epitaph>에 출연했다. 흑인 가족의 삶과 마약 문제를 다룬 영화였다. 엘라 피츠제럴드가 이 영화에서 멋진 노래를 불렀다. 게다가 이해 1960년에는 <네 멋대로 해라>가 파리 극장의 관객을 열광시켰고, <새벽의 약속>은 책방과 독자들을 매혹했다. 모든 것을 원하는 진과 아무것도 놓지 않으려는 레슬리 사이에서 로맹은 사랑하는 여인과 파리의 생루이 섬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 은신하면서 조심스런 태도를 취했다. 세상이 생겨난 이후로 속수무책인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흔히 선택해 온 방식, 즉 시간을 벌려는 것이었다. 

 

가리의 그늘 아래에서 진은 위대한 러시아 작가들과 프랑스 작가들을 발견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한 번에 두 입씩 삼키듯 성급하게 덤벼들었고, 교양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루브르의 수업을 들었다. 가리와 그가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면 그녀는 이 공백 때문에 괴로워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그녀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발언하기를 꺼렸다. 유럽 문화도 그녀에게 낯설었지만 고국에서 끓어오르던 이념들을 접할 때도, 문학을 접할 때도 결코 편치 않았다. (중략) 


그녀는 예민한 감수성 덕에 상세한 설명 없이도 잘 느꼈다. 고통과 불의를 그녀는 완벽하게 지각했지만 사태를 따지거나 상대화할, 세상을 더 잘 이해하도록 단순화할 도구가 그녀에겐 없었다.


어쩌면 그 때문에 그녀는 자기 균형을 크게 무너뜨릴 투쟁에 가담하며 극단적인 태도를 취했는지 모른다. 그녀의 삶의 고뇌에는 '타인', 연인, 사상가, 선동가, 극빈자, 약자와(누구인들 어떠리!) 함께 살 필요가 덧붙었다. 채울 수 없는 사랑의 갈증에 양분을 댈 수 있을 무언가와 함께 살 필요 말이다.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 가쁜 사랑 111p-11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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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1-11-01 14:0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어머, 진세버그 영화가 나오는군요.
그렇지 않아도 책은 읽겠다고 사 놓고 여태 안 읽고 있었는데
이 기회에 한 번 읽어야겠네요.ㅋ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나오는군요. 그래도 형만한 아우 없다고 진짜 세버그만 할까요?
방금 확인하고 왔는데 역시 미쿡스럽네요.
진 세버그는 뭔가 약간의 동양적 이미지도 함께 있는데...
전 <보헤미안 랩소디>의 라미 멜렉 뭐 나름 연기는 잘 하긴 했지만
프레디 머큐리의 강한 인상을 대체하기엔 좀 버겁잖나 싶더군요.
그래서 그냥 한 번 보는 걸로 만족하기로.ㅋ
그래도 기대는 되네요.^^

프레이야 2021-11-01 14:13   좋아요 3 | URL
세버그가 미국 배우이니 미국스럽긴 해요^^
세버그는 진짜 왜 그렇게 마음이 가는 애틋한 배우인지ㅠ
라미 멜렉은 진짜 너무 깨더라구요. 뻐드렁니도 너무 강조해가지고 ㅎㅎ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생각보다 괜찮은 배우더라구요.
영화 <세버그>는 기대가 되는데 그만큼 실망도 있을 거 같다는 예감이 스물거리긴 해요.
원래 기대가 크면 실망이 ㅎㅎ 아무튼 11월 첫날입니다^^

stella.K 2021-11-01 14:33   좋아요 3 | URL
아, 진세버그가 미쿡 배우던가요?ㅎㅎㅎ
근데 왜 저는 자꾸 프랑스라고 생각하는 건지...
이게 다 <내 멋대로 해라> 때문인 것 같다능.ㅠ

라미 멜렉은 저만 그러는 게 아니군요.
글쎄 말이어요. 그 뻐드렁니도 프레디가 그 정도로 뻐드렁은 아닌데
넘 도드라져서 거부감이 들더군요.
음악만 좋았어요. 옛날 생각이 유난히 많이나서 극장을 쉽게 떠나질 못하겠더군요.
예전에 커피숍에서 DJ한테 음악 신청 할 수 있었잖아요.
제가 퀸 음악 신청했더니 그 DJ가 음악을 좀 아시는 분 같다고 해서 붕 떴었는데.ㅋㅋ

프레이야 2021-11-01 14:43   좋아요 4 | URL
이렇게 또 연식이 드러납니다 ㅎㅎ
리퀘스트 용지에 제목 적어서 디제이 옵바한테 전하고 뭐 그랬죠.
아~ 옛날이여 ㅎㅎ
세버그는 미국 출생인데 프랑스로 가서 유명해졌어요.
결국 미국이 사람을 그리 만들었으니 참 불행했던 거 같고 안타깝고
미모가 넘 좋잖아요. 마릴린보다 개성있고 지적으로 보이고용

stella.K 2021-11-01 14:55   좋아요 2 | URL
뭐 굳이 연식꺼정...ㅎㅎ
그게 아날로그 갬성이잖아요.
어딘가 지금도 그렇게 하는데가 있지 않을까요?
몇년 전에 종로 어느 찻집에 갔더니 옛 모습 그대로 하는데가
있어 놀랐는데 말입니다.ㅋ

프레이야 2021-11-01 14:57   좋아요 3 | URL
글쵸. 돌고돌아 옛날 갬성이 상품이 되었죠.
우린 좋고 신세대는 더 좋고 ㅎㅎ
디제이다방 가 보고 싶네요 문득!

새파랑 2021-11-01 14:1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와 이 영화는 무조건 관람해야 겠네요. 진 세버그와 로맹가리 영화라니~!! 포스터부터가 매력적입니다 ^^

프레이야 2021-11-01 17:20   좋아요 3 | URL
로맹가리는 나올지 어떨지 모르겠어요. 포스터 멋지죠^^
제가 진 세버그를 좀 좋아하다 보니 기대되는데 어떨지 모르겠어요^^

붕붕툐툐 2021-11-01 19: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진 세버그 예전에 스콧님이 올려주셨던가? 한 번 보고 완전 반했잖아요~ 저 쇼컷 머리가 어쩜 저리도 잘 어울릴까요? 저도 관심 있게 보고 있다가 재밌다는 얘기 들리면 얼른 영화관으로 달려가야겠어요!!ㅎㅎ

프레이야 2021-11-02 02:47   좋아요 2 | URL
호호 제가 먼저 보고 와서 속닥속닥해드리죠^^ 숏컷과 줄무늬가 저래 잘 어울리다뇨. 우아하기도 하고 스마트하기도 하고.

희선 2021-11-02 00: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전에 scott 님이 쓰신 글 보고 진 세버그 조금 알았습니다 영화는 2019년에 만들고 한국에서는 곧 하는군요 scott 님은 꼭 보러 가실 것 같네요 책에 나온 글을 보니 진 세버그도 글, 그냥 일기라도 썼다면 좀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 거 썼는지 안 썼는지 잘 모르지만, 글을 써도 자기 마음을 어찌할 수 없기도 하지만...

그렇죠 두 사람 삶을 남이 뭐라 말할 수 없겠지요


희선

프레이야 2021-11-02 05:38   좋아요 2 | URL
스캇님 쓰신 건 못 봤네요 ㅎ 뒤져봐야겠어요. 언제 쓰신 걸까요 울스캇님. 넘사벽 페이퍼를. 희선 님 말씀대로 진 세버그도 글쓰기로 좀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 들어요. 글이나 그림 뭐 그런. 그런데 그거도 재능이나 관심이 좀 있어야 되니 아마 그쪽은 아니었나 봅니다. 그러니 다른 활동으로 기운 게 아닌가 싶어요. 로맹 가리 덕분에 작가모임이나 그쪽 관심을 많이 가진 거 같은데 잘 어울리지 못하고 패배감을 가진 듯해요. 안타깝게도 불운하게 끝난 삶이라 불쌍하죠.

mini74 2021-11-02 18: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진 세버그, 넘 좋아해요. 그 이미지며 세련된 모습. 영화 나온다는 소식이 반갑네요 *^^*

프레이야 2021-11-02 18:59   좋아요 2 | URL
그죠. 우리 영화 같이 봐요 미니님^^
 

지난 토요일 오랜만, 아니 몇 년만인 거 같은데 

글벗들이랑 하동 북천과 평사리를 다녀왔다.

날씨가 어찌나 좋은지 한껏 파란 하늘에  무심히 떠 있는 흰 구름, 마냥 좋았다.

북천역을 먼저 갔는데 예전의 그 간이역이 사라진 거다. 이럴 수가. 너무 아쉬웠다.

그런 건 좀 그대로 두면 안 되나. 코스모스도 예전처럼 그렇게 많이 안 보이고 

라라북천,이라는 카페가 새로 생겨서는 루프탑 공사진행 중이고 이젠 어딜 가나

그렇게 풍경이 변해가고 있다. 



이병주문학관에는 우리 말고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2008년 개관한 이후 세월이 많이 흘러 동판 지붕이 그동안 더 멋스러워졌다.

정면 양쪽에 펜대와 문학비는 새로 한 거 같은데 펜대은 없는 게 나을 뻔.

건물 자체의 멋스러움이 반감되었다. 아쉽다 ㅠㅠ 

건물 주변의 고즈넉한 정취가 말할 수 없이 좋은 거다.

공기가 참 맑았다.





하동에서 출생한 나림 이병주 소설가는 1921년 태어나 1992년 세상을 떴다. 와세다대학 불문과 재학 중 학병으로 끌려갔고 광복 후 귀국했다. 40중반에 등단하여 27년 동안 장편과 작품집만도 60권이 넘게 발간하고 한국 현대문학사의 중요한 성과를 이룬 작가로 평가받는다.  1970년대 '지리산', '산하'를 비롯해 가장 정력적으로 창작하였는데 1965년 등단 소설 <소설 알렉산드리아> 부터 여러 책이 한길사에 요렇게 때깔좋게 나와 있다. 드라마 '지리산'은 기대보다 흡입력이 별로라 첫 회를 보면서 일단은 접기로 했고(일단 계속 깔리는 음향이 어마무지 거슬렸다) 이병주의 '지리산' 한길사편을 찜하며... 서체도 마음에 드네.


















오래전에 이병주문학관을 다녀와서 쓴 글을 그대로 옮겨둔다. 




나폴레옹 앞에는 알프스가 있고 내 앞에는 발자크가 있다.’

 

  나림(那林) 이병주(李炳注1921~1992)가 문학수업을 받던 대학시절 책상 앞에 써놓았던 글귀다. 전 생애를 통해 정복해야 할 산()으로 발자크를 세운 점에서 소설가로서 그의 충천한 기대와 야심을 엿볼 수 있다.


  발자크(Honore de Balzac, 1799~1850)19세기 프랑스 문호로 사실주의 소설의 창시자다. 프랑스 혁명 이후 전쟁과 산업혁명, 자본주의가 진행되던 격동의 시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그는, 냉혹하고 천박한 욕구로 들끓는 등장인물을 내세워 인간 내면의 욕구와 시대의 본질을 총체적으로 그려낸 최초의 작가로도 손꼽힌다. 작가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 리얼리스트로서의 작가적 내면, 거대한 상상력으로 시대와 문학의 연()을 작품 속에 풀어낸 점에서 발자크는 이병주의 롤모델이었다. 발자크는 하루 50잔의 커피를 마시며 상당한 량의 원고를 써내려간 작가로도 유명하다. 이에 못지않게 이병주는 하루에 원고지 이백여 장, 한 달 평균 일천여 매의 원고지를 집필한 다작(多作)의 작가다.


하늘도 청명한 구월의 어느 하루, 한적한 고속도로를 타고 남강휴게소를 지나는 동안 가을 풍경이 느리게 이어졌다. 황금물결로 일렁이는 벼가 농부의 손길을 기다리고 사천천을 지나 서포 위로 달리는 해발 4백 미터의 길에는 노랗게 물든 모과가 정겨운 얼굴로 매달려 있었다. 나지막한 산이 한아름에 안길 듯 덤벼들었다. 오래 전에 북천초등학교를 졸업한 선후배간 시인 두 분의 재미있는 이야기에 웃음 지으며 곤양인터체인지로 내렸다. 사천 국도에는 코스모스가 가녀린 몸매로 꽃무리를 짓고 억새가 찬연한 햇살 아래 출렁였다. 길가에 아무렇게나 자라 있는 옥수수가 그리 크지 않은 키에 강단 있어 보였다. 가을은 이렇게 바람에 흔들리는 것들로 무르익는다.


  다솔사로 가는 길이 보이고 곤양천을 지나 이병주문학관 7km’라는 이정표가 반가웠다. 원전마을 신해사 이정표를 지나면서부터 허수아비와 장승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정면에 보이는 산자락 세 개 중, 두 번째 자락의 구곡산 아래에 이병주 작가가 살던 마을이 있다고 한다. 고향 시인이 곁들여준 말씀이다.


  북천초등학교 앞 들판에는 누렇게 익어가는 벼 대신 코스모스가 흐드러졌다. 코스모스는 그리스어 kosmos에서 유래하여 조화, 아름다움, 장식을 뜻한다. 학명(Cosmos Bipinnatus)을 풀이하면 날개를 겹치고 있는 꽃이다. 여덟 장의 여린 꽃잎들을 동글게 모으고 춤을 추듯 바람에 몸을 맡기고 서 있는 코스모스의 꽃말은 소녀의 순정, 애정이다. 신이 가장 먼저 만들었다는 꽃! 순정이 그렇듯, 불완전하고 미완성의, 그래서 더 보듬어줘야 할 것 같은 꽃, 애잔하다. 이병주 작가와는 어울리지 않을 듯한 꽃이 지천으로 피었다.


  문학관에 들르기 전, 북천 코스모스 역을 지나 3회 하동 북천 코스모스 메밀꽃 축제단지(2009. 9.18~10.4)’에 먼저 들르기로 했다. 뽀얗게 부푼 메밀꽃밭이 코스모스꽃밭과 어우러져 화사하고 부드러운 풍경을 자아냈다. 행사장에는 흥겨운 음악이 울리고 여러 군데 천막이 쳐 있고 홍보 부스가 마련되어 있었다. 한 곳에 들어가 메밀묵과 메밀국수를 주문했다. 잣나무가 심긴 이명산 자락이 포근하게 감싸주는 북천마을은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이었다.


  마음도 배도 부른 우리는 꽃단지와 안녕하고 가까운 문학관으로 차를 돌렸다. ‘이병주문학관 2km’ 이정표가 장승처럼 우뚝한 곳에서부터 야트막한 오르막길. 길가에 벚나무 초록 잎이 갈색으로 하나 둘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는 잎사귀들이 허망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화사했던 봄날은 시간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회생의 시간을 꿈꾸며 굳건히 서 있는 나무, 생명력의 진리를 믿고 지난한 생을 견뎌온 사람들이 그 곁에서 함께 살고 있음이다. 조금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이명마을회관이 수령이 많아 보이는 벚나무를 앞세우고, 그 옆으로는 돌담 위에 황토담을 쌓아올린 시골 옛집 담장에 샛노란 호박꽃이 시들시들 피어 있었다.

 

  억새들이 바람을 조용히 일으키는 길을 따라 올라갔다. 곤북로 1035, 파란 철대문 옆에 나림정이라는 조금만 쉼터가 있다. 20078월 세워진 것. 이병주의 호를 따서 이름 지은 것만 봐도 고향 문학인, 이병주에 대한 마을사람들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하동군 북천면 직전리 이명골길에 자리한 이병주문학관은 20084월에 개관했다. 나림정 맞은편, 문학관 들머리에서 우스꽝스럽게 입혀놓은 허수아비들이 길게 열을 지어 우리를 맞이한다. 시골 아주머니, 수줍은 새댁, 댕기머리 숫처녀, 넥타이를 맨 신사, 군복 입은 사내까지.


  이명산 산기슭에 호젓이 서 있는 문학관은 한눈에 보아도 세련된 젠 스타일이다. (Zen)()’으로 번역되는데 청명함, 여유, 여백의 미를 강조하며 정신적, 명상적, 자연주의적 경향을 추구하는 스타일이다. 왼쪽으로 좁지 않은 주차장, 오른쪽으로 2층의 문학관 건물이 앉아 있다. 현판을 중심으로 잿빛 커다란 피라미드형 동판 지붕이 원목 벽의 건물을 아늑하게 덮고 있다. 동판은 빛에 바래면 더 멋들어진다고 한다. 나무 바닥 테라스에는 나무 벤치와 탁자를 내어놓아 환담을 나눌 수 있게 해두었고 그 앞의 빨간 가림막이 악센트로 산뜻하다. 자연 그대로의 재료에 현대미를 가미하여 절제된 건축 미학이 돋보이는 건물이 마음에 쏙 들었다. 1층과 2층에 각각 창작실을 두어 일반인과 학생들을 위한 문학수업과 다양한 체험학습을 돕고 있다고 한다.

 

  앞마당엔 몇 개의 비석이 낮게 서 있고 작가의 유명한 글귀들이 새겨져 있었다. 문학관으로 들어서자 왼편에 전시관이 있고 그 앞에서 주최 측 사람들이 다과와 차를 대접하며 방문객을 맞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강당, 그 앞에 있는 화장실에 들어가자 벽에 붙어있는 작가의 글귀를 또 만날 수 있었다.

 

     우리에겐 청춘은 없었다. 청춘엔 광택이 있어야 하는 거다.

    진리에 대한 정열로써, 포부를 가진 사람의 자부로써,

    뭐든 하면 된다는 자신으로써 빛나야 하는 건데,

    우리에겐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내겐 그런 것이 없었어. - 산하

 

  올라오면서 본, 바람에 가벼이 흩날리던 황갈색 벚나무 잎이 떠올랐다. 역설적 의미의 허무주의를 감지하며 어떠한 이데올로기보다 앞서야 하는, ‘인간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애정과 저변에 흐르는 낭만적 상상력의 도저한 강물이 연상되었다.

 

  ‘정치란, 그리고 혁명이란 슬픔을 감소시키기 위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3공화국의 부당성을 비판하며 한국 현대사를 재구성한 1982년도 작품 그해 5의 글귀다. 어떠한 주의도 사람의 행복에 우선해서는 안 된다는 휴머니즘을 읽을 수 있다. 실제로 그가 말년에 지병으로 고통 받으면서도 효성을 발휘하려는 아들에게 베푼 자상함과 의연함은 그의 부성애가 얼마나 깊고 그윽한지 보여주는 것이다


  사단법인 이병주기념사업회가 주최하는 이병주하동국제문학제는 올해로 3회째다. 2007년 시작한 이래 2008년부터는 이병주국제문학상을 포함하여 시행함으로써 명성 있는 국제문학제로 정착하고자 한다. 문학도시 하동의 자긍심을 고양하고 지역적 특성을 홍보하는 계기도 되는 이 문학제는 이병주 작가의 시대사적 가치를 통해 역사와 문학의 필연에 대해 되짚어보며 지성적 전통과 문학적 가치를 되짚어보는 기회가 되는 것이 목적이다.

 

  오후 3시에 시작하는 개회식 및 문학강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강당으로 들어갔다. 삼각형으로 높이 솟은 천정은 나무의 결과 색을 그대로 살려 시원한 느낌을 주고 여러 개의 작은 창들이 자연 채광으로 밝고 온화한 실내 분위기를 살려주었다. 유족대표 경성대 일어일문학과 이권기 교수의 소박한 인사말을 뒤로 문학강연회가 열리는 동안 나눠받은 책자들을 훑어보고 그의 데뷔작 소설ㆍ알렉산드리아를 읽어볼 생각에 부풀었다. (집에 돌아와 단숨에 읽었다.)


  마흔에 데뷔한 박완서보다 더 늦게, 이병주는 마흔넷에 등단한 늦깎이 소설가다. 하지만 그의 글쓰기는 자칭 저널리즘의 노동으로서 이미 그 이전에 출발하였다. 일찍이 내일 없는 그날(1954)로 부산일보에 최초의 연재소설을 내보였고, 그것이 처녀작이다. 당시 국제신보의 논설주간으로 칼럼 등 왕성한 집필 활동을 하던 그가 소설(小說)로 쓴 이 연재소설이 갖는 의미는 크다. 일제강점기 학병의 트라우마를 훗날 스스로 노예사상으로 불렀던 그가 자신의 주인화 과정 중 제3단계를 가능하게 한 숨겨진 무기로 해석된다. 이 작품은 거듭 실패한 저널리즘 노동의 유일한 탈출구가 되어 이병주 글쓰기 노동의 원점이자 회귀점이라고 평가 받는다.

 

  어떻든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된다는 사상엔 구원이 있다.’

 

  등단작소설ㆍ알렉산드리아(1965)는 당시 소설계에서도 그랬지만 내게도 하나의 이변이었다. 이국의 정취와 구원의식, 편지글을 통한 액자 구성, 성격이 치밀하게 묘사되기보다 전형으로 보이는 피상적 인물들, 일인칭 화자의 보조적 존재감, 관념적 서술, 역사와 인간과 이데올로기 자체가 주인공으로 내세워진 것 같은 작가적 사명감에의 충만함. 이는 이후의 작품들에 원형으로 역할, 주제와 형식면에서 그 특징이 반복하여 제시된다. 나는 작품 속 화자 형의 말을 빌려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설명하는 대목에 주목했다.

 

     사실적 수법으로 에센스를 묘사할 수 없지 않아요? 사실 이상의 사실,

    상상 이상의 상징, 게르니카를 비롯한 인간악적 사건 전체에 통하는 심오한

    의미가 나타나 있지 않습니까. (중략) 이건 게르니카의 의미를 그린 것이

    아니라 바로 의미 그것이라고……. - 소설ㆍ알렉산드리아, 바이북스, 71

 

 

  소설 속 화자의 형은 다소 모순에 차 있는 작가 자신의 분신이다. 필화사건으로 감옥에 갇힌 그는 비루한 세계에 정신적 황제로서 고고하고자 했던 작가를 대변한다. 1961년 작가의 논설 조국은 없고 산하만 있다에 대해 혁명재판소가 그 책임을 물어 10년형을 선고 받지만 다행히도 27개월의 복역을 마치고 출감하게 된다. 19631216일의 일이다.


  감옥에 있는 동안 그는 사마천의 사기를 정독하고 역사의 올바른 기록자가 되고자 다짐했다. 훗날 정사(正史)의 모범이 된 이 책은 다른 정사와는 달리, 객관적인 역사의 구성보다 오히려 서술하고 있는 역사상의 인물들에게 도덕적인 평가를 내리고 특징에 따라 유형화해 어떤 인물의 본보기가 될 만한 행동을 한 장()에서 기록했다. 그가 역사에서 이끌어낸 교훈은 다양한 것이었는데, 때로는 서로 모순되는 것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이병주가 출감 후 쓴 이 작품에 소설이라는 전제를 붙인 것은 올바른 기록으로서의 문학을 강조하며 명제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올바른 기록이란 아래와 같은 문학관에 중심을 둔다.

 

    기록이 문학으로서 가능하자면 시심(詩心) 또는 시정(詩情)이 기록의 밑바닥에

    지하수처럼 스며있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문학이론이다. 그래야만 설득력과

    감정이입이 함께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 겨울밤

 

역사는 산맥을 기록하고 나의 문학은 골짜기를 기록한다.’

  

  그의 역사관과 문학관을 대변하는 인상적인 문장이다. 역사의 그물로 포획할 수 없는 삶과 인간의 진실을 문학이 표현한다는 확고한 시각은, 1992년 지병인 폐암으로 타계할 때까지, 역설적 모순과 생경한 매혹, 범속과 탁발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80여 권의 작품을 남기는 초인적인 정열을 태우게 했다. 그의 정열은 좌우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무정부주의적 자유정신과 회색인의 허망함에 속하는 듯하다.

 

 1979년 발표한 지리산에서 그는 정열을 이렇게 울부짖고 있다.

 

아무튼 불행한 나라야. 민족의 수재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는 사람들이 허망한 정열에

  불타서 죽고, 죽어가고 있고, 계속 죽어야 하니까 말이다. 아아, 허망한 정열!

  (중략) 분노도 또한 정열이다. 사람은 분노만으로도 역경을 견딜 수 있다.

  - 나는 죽을 수 없으니까 죽는다. -지리산

 

  문학평론가 김종회는  ‘운명... 그 이름 아래서만이 사람은 죽을 수 있는 것이다. - 관부연락선

(1968)’고 한 이병주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고 술회했다. “역사적 기록의 신빙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 그때 그는 서슴없이 역사는 믿을 수 없는 것이라는 답변을 내놓았다. 표면상의 기록으로 나타난 사실과 통계수치로는 시대적 삶의 노정한 질곡과 그 가운데 스며있는 사람들의 뼈아픈 사연들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현실을 냉정하게 인식하려는 욕망과 세계를 낭만적으로 감각하려는 욕망의 교차가 이병주 문학을 매혹적이게 하는 지점이라면 역사가 생명을 얻자면 소설의 힘, 문학의 힘을 빌려야 한다. -바람과 구름과 비()(1978)’는 말에 나는 많은 부분 공감한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서서 재평가되어야 하고 미래를 향해 부활되어야 함이다.

  

  태양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이병주 아포리즘의 백미(白眉). 하동군 북천면은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한 섬진강물을 끼고 굽이굽이 근현대사의 질곡이 아로새겨진 지리산의 품속에 자리한다. 골짜기마다 역사의 마디마디 못이 박인 이 고장은 어쩌면 광활한 이야기의 탄생이 숙명처럼 예정된 곳인지도 모른다. 역사는 퇴색할 수 있어도 결코 끝나지 않는다. 작가의 혼으로, 이야기의 혼으로 새겨진 역사는 재해석과 재구성으로 부활하여 영원한 신화가 된다. 비로소 진실이 된다.

 

    아아, 이 산하(山河)! 이 땅에 생을 받은 사람이면 좋거나 나쁘거나 잘났거나

    못났거나 모두 이 산하로 화하는 것이다. - 산하(1985)

 

 

  알면 사랑하게 된다는 말은 일부만 맞다. 사랑하면 알고 싶어진다는 말이 더욱 맞다. ‘안다이해한다와 동의어다. 이날 행사에서는 방문객이 많아 전시실을 꼼꼼히 둘러보지 못해 아쉬웠다. 소설ㆍ알렉산드리아에 매료된 나는 시월 조용한 때에 홀로 전시실을 다시 찾게 되었다. 고난의 세월을 호활한 문필로 승화한 걸출한 작가, 그에 대한 연민에 발길이 당겼다는 말이 더 옳다. 그새 코스모스는 많이 졌고 벚나무 잎사귀들은 색이 더욱 바랬지만 눈부신 가을 하늘 아래 정겨운 허수아비들이 여전히 반색하며 맞아 주었다.


  전에는 보이지 않더니 이제야 보이는 것들, 그런 것들이 살갑다. 마음의 눈을 뜨면 세상은 넓고 사람은 밝게 보인다. 전시실 지붕 추녀 끝에 물고기 모양의 작은 풍경(風磬)이 달려있다. 손끝으로 두어 번 튕겨보니 명징한 소리가 난다. 아담한 전시실 안은 전체적으로 둥근 모양을 하고 연대순으로 네 구역으로 이어져 방대한 작품을 남긴 작가를 총체적 시각으로 만나볼 수 있게 배려하고 있다. 입구에서 방명록에 이름을 쓰고 들어서면 작가의 분신 같은 몽블랑 만년필이 탑처럼 우뚝 서 있다. 한가운데에는 지리산의 한 장면을 디오라마로 만들어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다. 그 위로는 세로쓰기 한 친필 원고지들이 원을 그리며 붙어 있다.

 

  1구역은 1921년에서 1963년까지로, 고뇌하는 학병시절을 겪은 노예로서의 자유에 대한 절망감을 냉전시대의 자유인, 황제로서의 비자유인으로서 벗고자 한다. 그의 세계관과 역사관의 기저를 엿볼 수 있었다. 2구역은 1963년부터 1978년까지로 본격적으로 소설 집필에 매달린 시기다. 민족적 거대한 좌절의 기록인 관부연락선, 광복 후의 빨치산과 사회주의 운동을 조명한 대하소설 지리산을 비롯하여 매혹적인 초기 단편들 겨울밤, 예낭풍물지, 마술사등도 이때 탄생한다. 3구역은 1979년에서 타계할 때까지의 기간으로 서재에 이만오천 권의 책을 두고 괴력의 집필을 한 시기다. 한국현대사를 재구성한 그해 5산하, 소설로 쓴 세태풍속사 행복어사전이 등장한다. 서재에 앉아 만년필로 원고지에 글을 쓰고 있는 디오라마가 제4구역과의 사이에 자리하는데 책상 위에 쌓여있는 책들 중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책이 눈에 띄었다.


  그를 두고 흔히 박학다식박람강기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방대한 독서세계와 함께 동서양의 해박한 지식과 철학, 다양한 언어에 대한 이해가 유려하면서도 중후한 문장력과 더불어 이야기 전반에 녹아있다.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지식과 남성적 역사관이라는 줄기에 낭만적 통찰력이 빛을 발하는 문장으로 독자층이 두터운 이야기꾼. 최근작도가니로 호평을 받는 공지영 작가는 이미 20대에 이병주 문학에 매료되어 밤을 새워 그의 책을 탐독했다고 한다.


  한길사에서 30권으로 대표작을 모은 이병주문학전집이 새로 나와 있다. ‘행복에 기여하지 않는 이데올로기가 무슨 쓸모인가라고 회의적 질문을 던지는 기막힌 현실인식과 무엇보다 앞서는 절대적 인간애, 노예의 자유보다 황제의 자발적 비()자유를 선택한 진정한 자유정신을 읽고 싶다면, 골짜기마다 스며들어 신화의 역사를 쓴 월광의 펜촉을 느껴보고 싶다면 이 전집을 새로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구월이 꼬리를 감추어가던 그날, 문학관에서 나온 우리 일행은 해거름 섬진강가에 앉았다. 사위가 회색으로 물들어갈 때면 세상도 사람도 순해짐을 느낀다. 어둠이 야금야금 빛을 덮더니 정박해 있던 고기잡이 작은 배마저 한순간에 보듬어버렸다. 비로소 세상이 잠들고 이야기가 깨어난다, 상현달빛 아래 강물 위로 스멀스멀.


  회색! 이병주는 역사적 허무주의와 댄디한 망명의식으로 회색이라는 질타를 일부 받기도 했다. 하지만 회색의 고뇌, 강인함과 관대함, 내적 생명력을 아는가. 회색은 평화를 옹호하고 인간을 미치도록 사랑한다. 빛보다 어둠이, 드러냄보다 은근한 감춤이 진실에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일광보다 월광이 미더운 것은 그런 연유일 테다. 불현듯 질박한 고고함을 감추는 듯 드러내는 조선의 투박한 달항아리가 가슴속 거대한 빛으로 떠 올랐다. @

 

 

- 계간 <여기> 2009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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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1-10-27 14:4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유, 언제 또 이런 글을 쓰셨습니까?
사실 이병주 선생은 정말 대단한 문학인이신데 그동안
박경리, 이청준, 박완서 선생 보다 덜 알려진 것 같아 좀 아쉬움이 남더군요.
이 많은 책을 언제 다 읽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오늘 프레이야님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풍성한 느낌입니다.

드라마는 첫회에 확 사로잡는 게 있어야 하는데 <지리산>은 좀 그런 게 약하긴 하죠?
주춤하는 사이 시청자로 하여금 잡생각을 하게 만들면 좀 그런데 말입니다.
전 전지현과 주지훈이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조금 더 지켜 본 후에 더 볼 건지 말건지 결정하겠슴다.ㅋㅋ

프레이야 2021-10-27 18:21   좋아요 3 | URL
그런 거 같아요 ^^ 이병주 선생도 박완서 선생처럼 늦게 40 중반에 첫 소설을 썼어요.
그리곤 완전 불타는 창작열로 많은 글을 쓰고 가셨더군요. 그 열정을 어찌 쫓아갈까요.
일제징용에다 박정권 시절 감옥에도 갔었고 파란만장한 삶.
하동 안 가보셨지요? 경남이라 좀 멀지요. 깡촌에 사신다구 ㅎㅎ

지현 지훈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지켜보신대서 잔뜩 쫄겠어요.
잘해야 될 건데 모쪼록 ㅎㅎ

서니데이 2021-10-27 2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늘이 파랗고 예쁘네요. 강이 흘러가는 순간도 반짝반짝 빛나서 예쁘고요.
프레이야님, 요즘 날씨가 일교차가 크다고 합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프레이야 2021-10-27 21:05   좋아요 2 | URL
저 날 날씨가 어찌 좋은지 섬진강 강물이 반짝반짝했어요. 강물에 손도 담그고 참방참방. 몸 어서 나아지길요 서니님

희선 2021-10-28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가 보신 곳이 예전과 달라졌군요 간이역은 빨리 사라지기도 하죠 가끔 그런 곳을 남겨두기도 하지만... 하늘이 참 맑고 빛나는 강물도 예쁩니다

하루에 원고지 이백여장이라니... 대단하네요 저는 잘 몰랐던 분이네요 소설 제목은 들어본 적 있었을 것 같기도 한데... 프레이야 님 글 보고 아주아주 조금 알았습니다


희선

프레이야 2021-10-28 15:11   좋아요 2 | URL
풍경이 그렇게 변해가는 게 꼭 좋지만은 않은데 트랜드라
어쩔 수 없나봐요. 간이역은 제가 참 좋아하는 정경인데 아쉽구요.
대단한 작가인데 덜 알려진 거 같은 이병주 작품을 좀 더 읽어봐야겠어요.
좋은 날 보내세요 희선님.

hnine 2021-10-28 05: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난 주말 날씨 정말 좋았어요.
이병주의 <바람과 구름과 비>는 아주 옛날, 신문에 한참 연재되었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나고, 대학교때 도서관에 가면 장편으로 주욱 꽂혀 있는 <지리산>을 늘 보면서도 한번도 읽어볼 생각을 못했어요. <허상과 장미>라는 소설을 읽었던 것 같고 그 외 다른 작품들은 읽었던가 가물가물하네요.
섬진강 저도 몇년 전에 가본적이 있는데 옆에 끼고 살던 한강과 느낌이 아주 많이 다르더군요.

프레이야 2021-10-28 15:13   좋아요 1 | URL
강도 제 느낌을 갖고 있다는 게 참 신기하죠. 주변 풍경과 그 풍경이 담는 역사와
함께 가는 것 같아요. 이병주 작가를 일찍 아셨군요 나인 님 역시!!
전 학생 땐 전혀 몰랐어요. 작품은 좀 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레이스 2021-10-28 14: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병주 <행복어사전> 재밌게 읽었어요.

프레이야 2021-10-28 15:15   좋아요 2 | URL
오모나 그레이스 님 읽으셨군요.
<행복어사전>부터 좀 여러가지 찾아읽어봐야겠어요.^^

페크pek0501 2021-11-03 11: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흥미와 유익함이 느껴지는 글, 잘 읽었습니다. 발자크와 이병주 작가 님의 책들, 다 열독하고 싶네요.
저로 하여금 새로운 학구열이 불타게 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프레이야 2021-11-03 12:46   좋아요 1 | URL
꼼꼼히 진지하게 읽는 페크 님의 독서생활 중 이병주와 발자크 추가인가요 ^^ 기대합니다. 오늘 날씨 너무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