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비켜라 고구려가 나가신다 : 광개토대왕 공부가 되는 위인전 1
김남석 지음, 장선환 그림 / 해와나무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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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에 대한 어린이 책은 여럿 있지만, 이 책은 고구려사 전체를 통사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광개토대왕의 동북아대제국 건설의 꿈과 그 성과에 대한 것에 촛점을 두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고구려에 대한 책이면서 전쟁사 쪽으로 보아지는 면이 강하다.

삽화가 사실적이며 실제 사진 몇몇도 실어두었다. 예를 들어 광개토대왕이 태자로 있을 때 아버지와의 약속을 하였던 백두산의 사진 같은 것이 그렇다. 천지의 물이 닿는 곳은 모두 고구려의 땅이며 그 땅을 되찾으면 다시 이곳에 오리라던 마음의 약속을 지키려 광개토대왕은 훗날(동부여와 연해주를 정복한 후) 천지를 찾는다.

갑옷과 칼, 관미성을 오를 때 유용하게 썼던 운제 같은 것을 보면 그 당시의 기술이 놀랍다. 일종의 2단 사다리차 같은 운제에는 바퀴가 여섯 개 달려있다. 바퀴를 그렇게 정교하고 튼튼하게 만들었던 것으로도 그들의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된다. 돌무덤이라는 특색을 가진 고구려의 무덤과 그 안에 그려놓은 수많은 벽화들에서도 고구려의 발달된 기술과 생활양식을 엿볼 수 있게 참고자료를 넣어 두었다. 

광개토대왕은 뛰어난 용병술과 지혜를 겸비한 전략가였다. 먼저 민심을 살피고 백성의 생활을 편하게 한 뒤 남변정책에 이어 북벌정책을 본격적으로 펼친다. 선대왕들이 닦아놓은 기반에 세력을 북으로 또 남으로 확장하였던 이 왕은 39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등진다. 그리고 앞으로 200여년 태평성대의 길을 열어둔 셈이다.

이 책의 뒷장에는 2002년 시작되었던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그것이 가지는 중국측의 의미와 우리측의 반박을 생각해보면 좋겠다. 먼저 고구려사를 우리 어린이들이 먼저 알고 하나하나 반박해보면 의미가 있겠다. 인터넷에서 동북공정반대서명운동에 참가해도 좋겠다.

이 책은 광개토대왕의 정복전쟁을 간단히 순서대로 엮어내고 있는 점에서 자부심을 가지고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왜구를 물리치는 장면에서는 약간 과장된 어투로 재미를 주려하고 있지만 좀 어색한 점이 없지 않다. 인물이야기라고 하면 너무 한 쪽 면에 치우쳐있다는 단점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고구려사라고 하기엔 아주 미흡하다. 인물이야기책이라고 보아야하겠지만, 그러기엔 정복의 과정에서 보이는 그 인물의 강점만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걸린다. 조금의 망설임이나 고뇌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기엔 책의 두께가 부족하였나싶을 정도이다. 집필을 너무 촉박하게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중국의 동북공정프로젝트에 대한 우리의 입장과 역사를 보는 정확한 눈, 그리고 우리 역사에 대한 긍지를 가질 수 있는 것에 시선을 맞춘다면 광개토대왕의 동북아대제국건설의 꿈에 동참해보는 것도 좋겠다. 광개토대왕이 오늘날 되살아난다면... , 이런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후련해질 것이다. 광개토대왕과 고구려사에 대한 다른 도서를 함께 접한다면 괜찮은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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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형제 - 비행의 선구자들 - 어제의 과학자 오늘의 과학
엘리자베스 매클라우드 지음, 미세기 편집부 옮김 / 미세기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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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학년 쯤의 초등학생 이상이면 권하고 싶은 괜찮은 인물이야기 책을 만났다. 아주 얇은 두께에 실제로 손으로 들어보아도 가벼운 책이다. 크기는 프린트용지 정도이다.  '어제의 과학자, 오늘의 과학' 시리즈인데, 과학과 인물을 동시에 무겁지 않은 마음으로 만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책의 무게만큼 내용이나 문체도 간결하며 가볍다. 거의 절반의 내용은 소액자에 담긴 사진들과 큰 판형의 사진이고 이해를 돕기 위해 과학원리에 대한 설명을 그림과 함께 알기 쉽게 설명을 곁들여 놓았다. 

인물의 이름이 책의 제목으로 나와있지만, 보통의 인물이야기처럼 인물을 여러각도로 보여주면서 그 인물의 삶을 조명하기보다는, 그 인물의 과학적 업적과 그것의 진화과정에 촛점을 둔다. 빠른 서술방식으로 지루함은 찾아볼 수 없고 내용의 전개도 일목요연하다. '라이트 형제는 누구인가'에서 '한계는 없다' 까지를 목차로 하는데 과거의 인물이 자신의 열정만으로 이룬 업적이 오늘날을 거쳐 미래에까지 어떻게 상상치도 못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놀랍다.

이 책은 실제의 인물 사진과 당시 시행착오를 겪으며 실험을 거듭한 글라이더를 담은 사진 그외 보충자료가 될 만한 사진까지 적절히 배치해서 보여준다. 기존의 과학인물이야기보다 어렵지 않고 군더더기가 없어서 줄기를 놓치지 않고 이해할 수 있다. 

형 윌버는 추진력이 있고 동생 오빌은 발명에 타고난 재능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의 꿈꾸는 듯,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인상적이다. 한 눈에도 멋쟁이로 보이는 수트를 입고 있는 이들은 쌍둥이처럼 생각하는 것이 비슷했다고 한다. 비행장치를 함께 만들면서도 동시에 같은 곡을 흥얼거리기도 했다고 적어놓은 작은 글자가 딱딱하기 쉬운 본문의 내용에 긴장을 풀어주는 역할을 한다. 군데군데에 있는 만화의 말주머니도 그렇다.

오빌이 한 말 중에 '나는 하늘을 날 때보다 그 이전에 침대에 누워 비행에 대한 상상을 할 때 더 짜릿함을 느낀다' 라는 말이 있다. 오빌은 상상력이 무척 풍부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인간의 상상력이 해  낼 수 있는 것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경지가 아닐까.

1903년 라이트 형제가 동력과 조종장치를 단 최초의 비행에 성공한 직후, 사람들은 이들이 지금 이뤄낸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파악하지 못했다고 한다. 윌버와 오빌은 재능뿐만이 아니라, 불굴의 의지와 끈기, 남다른 상상력으로 인류 문명의 발전을 가져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발명품이 전쟁의 무서운 살상무기가 되었을 때 가장 큰 슬픔을 느꼈다고 오빌은 술회하고 있다.

이 책은 단지 라이트 형제의 이야기만을 하고 있지 않다. 그 이전의 궤적과 그 이후, 앞으로의 우주시대까지 살짝 짚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비행기 모양의 장치를 스케치한 후로 베르누이의 정리, 몽골피에 형제의 열기구, 조지 케일리 경의 글라이더를 거쳐 결정적으로 라이트형제에게 자극이 되었던 오토 릴리엔탈까지를 비행의 선구자들이라 부를 수 있겠다. 1997년 미국이 발사한 카시니 호는 2004년 토성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한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진보를 해온 비행의 역사가 미래에는 어떤 발전을 가져올지, 아이들의 상상력에 기대어봄직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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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집의 모팻 가족 웅진책마을 11
엘레노어 에스테스 지음, 루이스 슬로보드킨 그림, 고정아 옮김 / 웅진주니어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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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살이나 터울이 나는데도 늘상 말로 토닥거리는 우리집 두 딸 때문에 어떨 땐 내가 무얼 잘 못 보이고 있나, 하고 기분이 가라앉는다. 서로 양보하고  예쁜 말 쓰며 사이좋게 지내라고 해도 그 때 뿐이다. 넉넉함은 조금 모자람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모팻가족의 알콩달콩한 이야기를 만나며 내 마음이 이리 따스하고 가벼워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가족의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는 동화는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란 집의 모팻가족>에는 특별함이 있다. 옮긴이의 글에서처럼 일상의 이야기 하나하나가 보석처럼 빛을 발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작가 엘레노어 에스테스는 미국인이다. 1941년에 나왔다는 이 동화는 공간적 배경이 우리 독자들에게는 낯설다. 시간적으로도 타임머신을 타고 약간 날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호기심이 인다. 

세월을 살아오다보면 누구나 몇가지쯤 작은 사물 하나에도 정겨운 기억이 서려있기 마련이다. 여기 첫장부터 사소하지만 주의를 끄는 것은 노란 집 앞의 쇠말뚝이다. 말고삐를 매두는 쇠말뚝은 주인공 제인이 잘 앉아 있는 전망대 같은 곳이다. 이 쇠말뚝은 마치 노란 집이 모팻가족의 집이란 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게 하는 마력을 가진 증표와도 같다. 적어도 제인에게는 그렇다. 나중에 노란 집에 눈독을 들이며 제인의 그 쇠말뚝에 턱하니 앉아 밉상을 떠는 머독씨의 딸을 사이비(?) 최면술로 쫒아버리는 제인과 루퍼스의 합작공연은 배꼽을 잡게 만든다.

뒤로 갈수록 미국사회의 변화하는 모습도 조금씩 볼 수 있다. 가령, 옷을 마추어 입던 시대에 싸고 좋은 기성복이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재봉일로 생계를 책임지는 제인 엄마의 일손이 줄어든다. 이 대목만으로도 4남매가 엄마의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얼마나 어루만져주고 싶어하는지 느껴지는 문체다. 행간마다 이상한 기운으로 따스한 노란 색이 스며있는 것 같다. 그냥 감상적이거나 피상적인 따스함이 아니라 힘 있고 여유로운 유머가 느껴지기 때문에 웃음이 절로 나온다. 전차가 새로 생겨 길을 가로 질러 다니기 시작하면서 충돌할 뻔하는 장면은, 아이들과 함께 함성을 지르며 '전차 모험'을 하는 것 같이 유쾌하다.

이외에도, 집안의 벽난로를 피울 석탄을 사러 추운 겨울날 썰매를 끌고 심부름을 두번이나 갔다오는 조와 제인, 집안의 어둠을 밝힐 램프의 유리보호막을 닦고 새로 불을 피우는 제인, 성홍열이 난 막내 루퍼스를 위해 온 가족이 하는 일들을 보면 가정이라는 보금자리에서 각자 필요한 몫이 무엇인가, 새삼 생각하게한다. 그리고 일상의 작은 일을 무슨 의식처럼 충만한 감정으로 해내는 이들 남매와 넉넉한 눈과 가슴으로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는 엄마는 노란집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생활을 시작하여도 변함없는 기쁨으로 생을 엮을 사람들이란 믿음을 준다.

이야기는 모두 열두 장으로 나뉘어있다. 뉴달러 거리의 노란집에 "팝니다"라는 표지판이 걸리는 날로부터 그 집이 머독씨에게 팔려서 모팻가족이 이사를 가는 날까지의 이야기이다. 한 장의 이야기에는 각각 하나의 에피소드가 소개되는데, 이것들을 엮으면 서로 잘 어울리는 하나의 보석목걸이가 된다. 하나의 장을 아무 곳에서부터 봐도 그리 어색하지 않다. 에피소드 하나 하나가 참 재미나다. 특히 '세일러스 혼파이프 춤'에서 강아지 슈가와 조의 멋드러진 콤비네이션이란!  독자에게 예측불허의 기쁨과 놀라움을 이런 식으로 주다니!  

<노란 집의 모팻가족>은 아이들의 순진무구함과 장난기, 아이다운 두려움, 그리고 아이다운 자존심을 살려주는 대목들, 이런 것들이 씨실과 날실처럼 엮여서 하루하루를 보람되게 살아가는데 조금 가난한 것은 아무런 걸림이 되지 못하게 한다. 이들은 가난 때문에 비탄에 잠기지도, 우울해하지도 않는다.

이 동화는  장점이 생각보다 많다. 인물들의 성격묘사뿐만 아니라 풍경이나 장면, 상황의 묘사가 세심하다. 부드럽게 안기는 문체로 인물도 풍경도 참 매력적으로 그려보인다.  밝고 선명한 인상의 삽화도 이야기를 더 활기차게 한다.  무엇보다 모팻남매의 건강함이 읽는 이를 무조건 기쁘고 뿌듯하게 한다. 끝부분에서는 죽은 아빠를 그리워하는 엄마와 제인의 심리가 '울먹울먹'하며 그려진다. 그러다 제인은 나중엔 돌아오지 못할 유년시절의 소중함을 어렴풋이 느낀다. 이 부분은 아홉살 제인이 그럼직하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성인이 된 작가의 그리움이 묻어나면서 잔잔한 울림을 준다.

- 제인은 자기도 나이가 들어서 길을 뛰어다니지도 못하고 전차를 따라 달음박질도 못하게 되는 날을 생각해 보았다. ...... 그러자 오늘 식구들이 노란 집을 떠나는 것만큼이나 분명하게, 시간이 흐르면 자신은 많은 즐거움을 빼앗기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2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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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없는 이 안 2004-06-10 0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장 읽고 싶어지는 책이네요. 그런데 님의 리뷰를 읽으면서
어렸을 적 작은아씨들을 읽으면서 행복했던 시간이 그리워지네요.
이 책 읽으면 그때 그 작은아이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벽 속의 유령
멜빈 버지스 지음, 유동환 옮김, 전기윤 그림 / 푸른나무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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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독특한 동화를 만났다. 추리소설 같기도 하고 유령소설 같기도 한 <벽 속의 유령>의 원제는 GHOST BEHIND THE WALL이다. 이 유령을 만나려면 낡은 마호가니 빌라의 집들로 연결되어있는 환기구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좁은 통로를 지나가야 하므로 덩치가 큰 사람은 어림 없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별명이 반토막이나, 꼬맹이로 불리는 데이빗은 키가 120센티미터를 겨우 넘을 정도라서 그 일이 가능하다.  처음엔 장난이나 모험으로 시작한 일이다.

약간 거칠고 난폭한 성격에 친구들에게 놀림을 자주 당하고 엄마는 없이 수줍음을 잘 타는 안경사 아빠와 단둘이 사는 데이빗은 아빠가 늦게 오시는 화요일과 목요일이면 더욱 무료하고 외롭다. 데이빗의 불안정한 마음은 자꾸 환기구 안으로  들어가보라고 부추긴다. 그곳을 통해 다른 사람의 집에 몰래 들어가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놓고 무언가 물건을 집어내 오기도 하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몰래 엿들으며 악마적인 짓을 취미처럼 일삼는다.

그러던 어느 날 4년 후면 100살이 될 로버트 할아버지의 집을 엿보게 되고 노망기가 있는 할아버지의 혼잣말을 엿듣다 난데없이 유령을 만난다. 환기구에서 외롭게 지내는 유령은 데이빗과 또래로 보이는 얼굴이다. 로버트 할아버지를 유독 싫어하는 유령은 날마다 데이빗을 유혹한다. 자원봉사자가 와서 깨끗이 청소를 해 둔 할아버지의 집을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고 소중한 추억이 스며있는 할아버지의 물건들을 깨어부순다. 데이빗이 정신을 차리고 숨어있던 양심에 후회를 한 때는 이미 늦었다. 유령은 나쁜 짓을 멈추지 않고 오히려 데이빗에게 같이 하지 않는다고 화를 낸다.

이 일로 데이빗은 경찰의 수사를 받고 요주의 소년이 된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아들이 이웃의 불쌍한 노인에게 그런 악한 일을 저질렀다는 걸 알고 아빠는 실망을 감추지 못한다. 데이빗은 아빠의 눈물을 보았고 자신에 대한 절제와 로버트 할아버지에 대한 조금은 다른 생각을 하게된다. 어느 날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다가 뜻밖의 반가움을 느끼게 되고 때로는 날카로움이 번득이는 할아버지와의 대화를 즐거워한다.

유령의 정체에 대하여, 사람의 기억이란 것에 대하여, 사람이 늙어가면서 되돌아보는 추억의 힘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듣는 동안, 아주 많은 세대차이가 나는 이 두사람의 대화는 그동안 혼자서 추억을 주절대며 고독하게 살았던 로버트 할아버지에게 어떤 빛이 된다. 유령의 정체를 캐내려는 데이빗에게는 어떤 실마리가 된다. 또한 '적절한 대화'를 시도한 아들에게 그의 아빠는 약간의 질투가 섞인 대견함을 표시한다.

유령은 대개 죽은 자의 영혼이라 생각하지만, 산 자에 속한 것이란게 할아버지의 말이다. ' 사람은 특별한 뜻 없이 자신들의 기억을 되살려 보기도 하고, 혹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또한 기억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게 저장된다. 삶의 어느 순간 '떠오르는 기억을 보게 된다면, 그게 바로 유령이'다. 사람 저마다의 상상 속에, 소망 속에 유령이 있다는 얘기가 된다.

우리에게 '삶'의 방법을 가르쳐주는 사람이나 프로그램이 없듯이 '죽음'의 방법을 가르쳐주는 곳도 없다. 로버트 할아버지는 더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지만 내심 더 살고 싶은 게다. 죽음을 찾아가는 편안한 방법을 모르고 에둘러가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것 같다.

유령으로 떠돌던 잃어버렸던 추억 속의 소년(자신의 유년시절)은 할아버지를 싫어한다. 단지 모든게 '낡아간다는 것' 외에 소년과 할아버지는 다른 점이 없다. 늙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나이듦이 젊음의 파릇한 본성을 엎어버리진 않는다는 점이 할아버지의 마음을 괴롭힌다. 죽음을 앞둔 나이에 그 죽음을 어떻게 맞이해야할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생각해보기라도 했을까. 마음은 데이빗과 같은 소년인데 말이다. 그렇게 많은 친분을 맺고 살았던 사람들이 지금은 할아버지 곁에 아무도 없는데 어떻게 온전한 정신으로 하루를 살까.

그 쓸쓸한 가슴에 이제 데이빗이 다가가 평화로운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한다. 상실했던 소년시절의 기억을 찾아주고 할아버지 곁에 누워 조용히 죽음에게 손 내밀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데이빗이다. 극과 극은 정점에서 만난다고 했다. 죽음은 곧 삶이고 삶은 곧 죽음이다. 소년의 유령은 데이빗에게서 새로 태어나고 할아버지는 새로운 생명의 줄을 잇는 것이나 다름없다. 로버트 알베스턴은 이제야 집착의 줄을 고요하게 놓는다.

이 동화는 초등 고학년이 읽기에  얼른 이해하기 어렵거나 아직은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는 대목이 여럿 나온다. 좀 철학적인 성향이 있는 아이라면 썩 재미있어할 것이다. 가령, 이런 대목이다.  - 사람이 자기 자신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존재인지 스스로 알 수 없을 때, 그 느낌이란 정말 이상한 것이다. ...... 그는 자기가 아무 존재도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결국, 자신과 주위의 존재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자기를 이렇게 독립된 자기 자신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런 데이빗의 상념은 이야기의 결말 부분에서 데이빗이 흘리는 근원 모를 눈물에서 잘 나타난다. 조용히, 편안하게 죽음을 찾아간 할아버지의 침대 옆에 서서 데이빗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그 눈물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 소년과 알베스턴 씨를 위한 것인지 그 자신도 알지 못한'다.

이야기의 길이가 짧지 않은 <벽 속의 유령>은 독특한 소재와 흥미진진한 구성으로 독자로 하여금 단숨에 읽어내려가게 한다. 이 세상의 어느 것도, 누구도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나의 영혼은 너에게, 너의 영혼은 나에게, 진원지를 알 수 없는 영혼의 버팀목으로 오늘도 우리는 살아가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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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05-30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스토리를 보아하니, 제가 읽어도 재미있다 할 듯 싶군요.^^

다연엉가 2004-05-30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보니 제가 읽으면 되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불한당들의 모험 2004-06-17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화책이었군요.저는 단순히 문고판 추리소설인줄 알았거던요. 도서관 반납대에 누군가가 실수로 올려놓았었나 봅니다. 그림이 예뻐서 서가에 선채로 내쳐 읽었었는데. 재밌기도 하고 꽤 잔상이 오래 남는 책이었습니다.
 
미미 안에 또다른 미미 문원아이 18
소중애 지음, 장지선 그림 / 도서출판 문원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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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름은 여러번 접했던 소중애 작가를 이 책의 책날개에서 처음 얼굴을 보았다. 짧은 컷트머리에 덩치도 있어뵈고 크고 둥근 알의 안경을 쓰고, 씨익 웃고 서 있는 뒤로 낡고 작은 배 한 척이 묶여있다. 바다도 조금 보인다. 현재 아산의 모 초등학교에서 열한 명의 1학년 아이들과 사랑을 나누고 있다고 적혀있다. 바다처럼 품이 참 넉넉해보이는 인상이다. 

글쓴이의 말처럼, 겉똑똑이들이 많이 사는 세상에 속똑똑이 미미를 만나러 얼른 가고 싶어진다. 할머니와 함께 사는 미미는 올해 입학을 해야한다. 눈이 이상하고 발육도 늦어 제대로 뛰지도 못하는 미미는 먹는 것에 지나치게 집착한다. 점심을 급식으로 먹을 수 있어 학교가 더없이 좋은 건 할머니도 미미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입학식 날부터 미미는 사고뭉치에 모자라는 아이로 낙인된다. 이런 아이들에 대한 선생님들의 대화가 솔직하게 나온다. 교사라는 입장에서 두던하는 게 아니라 여과없이 내보내주니 오히려 작가에게 믿음이 간다. 

이렇게 현실을 직시하여 내보여준다는 점은 결말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부정적인 현실을 교정해보려는 의도나 희망 쪽으로 가지않고 그냥 현실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맺는다. 어찌보면 약자가 오히려 도피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어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미미와 할머니간의 '징글징글맞은' 옥신각신 장면은 웃음이 나오려다가 들어간다. 마음이 아파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두사람 사이에 흐르는 깊은 속정을 느낄 수 있어, 독자는 울다가 웃는 꼴이 된다. 위기 부분에서 드러나는 할머니의 슬픈 인생의 곡절과 미미의 엇갈린 운명에 대한 이야기는 기가 막히다. 둘은 떨어져서는 못 살 사람들이다. 좋은 옷에 깨끗한 음식이 아니라, 걸레세수에 빨지도 않은 양말, 매일 먹는 시래기국이라도 미미는 할머니의 마늘냄새가 그립다.

할머니를 찾아 시장을 헤매다 만난 두사람은 한번도 살아보지 않은 유일한 곳, 아무도 모르는 강원도로 가서 살자고 약조한다. 이 부분에서 난 가슴이 황량해졌다. 이런 식으로 약자가 더 다치지 않으려고 피하는 게 현실이라 생각하니, 작가의 의도는 독자에게 역작용을 바라는게 아닌가싶다. 이 부분에서 어린이독자와 어른은 생각나누기를 잘 해야할 것 같다. 자칫하면 이 책의 결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 이런 현실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버리고 개선이나 고민의 여지를 남기지 않을까 우려된다.

책을 덮고 생각해보니 할머니의 이 말은 그냥 해보는 소리인줄도 모르겠다. 워낙 자존심도 세고 강인한 사람이니 미미도 할머니도 상처 입은 기억을 되살려줄 이 동네에서 '도망'가고 싶을 수도 있겠지만, 속정이 깊다는 걸 생각하면 그래도 개복엄마가 있는 이 동네를 떠나지 않고 잘 살 것 같기 때문이다. 이건 단지 내 바람일지 모른다.  "도망갈라문 힘이 있어야 한다. 순대 많이 시켜 먹자." 라고 말하는 할머니의 억세지만 누그러진 말투에서 "절대 도망가지 않을거야" 라고 다짐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초등 4, 5학년 정도에서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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