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1. 피터 드러커의 한 마디

<내가 현재 하고 있는 일을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이 일을 시작할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무조건 예스가 아니라면, 당장 그 일을 중단하던가 아니면 비중을 대폭 줄여라.

언젠가 나는 Why라는 질문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가에 대한 글을 썼던 적이 있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하여 ‘왜 그 일을 하는가?’, ‘왜 지금과 같은 방법으로 그 일을 처리하는가?’와 같은 질문은 새로운 창의적인 아이디어뿐만 아니라, 조직의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게 한다.
꼬마 아이에게 <휴지를 버리지마!>와 같이 다그치는 것보다는 왜 휴지를 버리면 안 되는지를 차분하게 이야기해주는 것이 엄마, 아빠의 역할이다. <공부해!>와 같이 다그치기보다는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를 자녀와 공감하는 것이 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
물론, ‘왜?’라는 질문은 나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다. 당신에게도 질문 해보라.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

그런데, 어떤 독자에게 다음과 같은 피드백을 받았다. 그 분의 말을 요약하면, why라는 질문은 약하다는 것이다. 그는 앞의 피터 드러커의 말을 나에게 전해줬다. 나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했다. 그분이 나에게 준 피드백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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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라는 질문은 동기유발이 약합니다. 현재 직종에서 "왜 이 일을 하지?"라는 질문에 "돈 벌어야 되니까" ,"그냥",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 혹은 "전공이어서"라는 식의 대답들이 나올 수 밖에 없는 형편의 사람들도 부지기수입니다. 자기가 원해서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적은 수입니다. 피터 드러커는 모든 경영자에게 한가지 질문을 던져보라고 권합니다. 박종하님의 "왜"와 일맥상통하나 더 단순한 대답을 유도하는 질문이면서도 보다 강한 동기유발을 가진 질문으로, 사실 우리 모두 던져도 좋은 질문인 것 같습니다.

"현재 하고 있는 일(사업)을 만약 하지 않고 있었다면, 지금이라도 그 일(사업)을 시작하겠는가?"

잭 웰치는 이 질문을 책에서 읽고, GE의 사업부분을 대거 정리하기 시작했다고 하는군요. 만일 잭 웰치가 "자신이 하는 일에 항상 `왜`라고 묻고 답하세요"라는 문구를 읽었다면 그럴 수 있었을까 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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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드러커의 질문은 분명 <왜>라는 단순한 질문보다 더 구체적이고 강력한 도구임에 틀림이 없다. <왜>라는 질문은 우리를 냉정하게 이끌지는 못하는 것 같다. 사실 <왜 이 일을 하는가?>라는 질문으로는 그 일을 좀더 잘 되게 하겠다는 의지만이 있을 뿐, 그 일에 대한 근본적인 냉정한 평가는 어려운 것 같다. 피터 드러커의 질문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일을 되돌아보게 한다.
피터 드러커의 효과적인 질문을 당신의 삶 속에서도 적용해보라. 당신에게 질문 해보라.

<내가 현재 하고 있는 일을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이 일을 시작할까?>

당신도 피터 드러커의 현명한 충고를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잭 웰치처럼 말이다. 선택이란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변화의 순간, 주저하는 이유는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해서다. 구차스런 미련 때문에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해서 일을 더 망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그러다 보면 언제나 새로운 것을 얻지 못한다.

피터 드러커의 질문을 당신 삶의 여러 곳에 적용해보라. 약간씩 변형하여 적용하는 것도 때로는 효과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적당하지 않은 변형도 있겠지만 말이다.
가령, 이 질문을 결혼한 사람에게
<현재 내가 결혼한 여자와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결혼하겠나?>
라는 질문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질문의 대답에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다면 몰라도 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은 질문은 꼭 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내가 사귀고 있는 여자친구와 아직 사귀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사귈 것인가?>
만약, 이 질문에 무조건 예스(yes)가 아니라면, 당신은 그녀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피터 드러커의 결론을 따라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결혼 상담에 대해 기억 나는 인상적인 대화 하나를 소개한다.
어떤 여자가 자신이 새로 사귀는 남자와 결혼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카운셀러에게 물었다. 그녀는 자신의 상황과 처지 그리고 고민거리들을 한참동안 이야기했다. 한 시간 가까이 혼자서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은 그녀에게 카운셀러는 단 한마디를 했다.
<아직도 고민이 남았다면, 결혼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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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은 곧 에너지를 절약하는 일 - 오래 살려면 게으름을 피워라


우리끼리 하는 말이 있다. “난 조울증 같애. 지금은 울증이 우세야. 아 우울해. 할 일도 많은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진짜 조울증으로 고생하고 있으냐 하면 또 아니다. 누구 못지 않은 일처리 능력을 과시하며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다. 농담 삼아 이야기한 거라고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내 몸과 마음이 분명한 증상을 보이고 있으니 아무런 근거 없이 괜히 그런게 아니다. 《오래 살려면 게으름을 피워라》(이영희 옮김, 나무생각)를 읽어보면 그러한 상태가 내 몸이 보내는 구조신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은 배터리? - 주어진 에너지만큼만 살다 간다
   알다시피 삶은 유한하다. 저자 잉에 호프만은 삶의 유한성이야말로 인간 육체에 주어진 에너지의 양이 정해 있다는데 대한 좋은 보기라고 파악한다. 삶이 유한한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에너지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며 에너지의 소비 속도에 비례해 인간 수명과 건강은 결정 난다는 것이다. 모든 생명은 체중 1그램당 2,500킬로줄(Joule, 에너지 측정단위)의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다. 이 절대 에너지를 다 쓰면 충전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생명은 끝난다. 사고나 질병으로 죽는 경우를 예외로 하면 심장이 몇 번 뛰고, 호흡을 몇 번 하고 나면 우리가 쓸 수 있는 에너지는 바닥이 난다는 것이다.

  예전에 걷기 운동을 권장하는 한 다큐멘터리에서 마라토너의 평균 수명을 조사한 적이 있다. 놀랍게도 그들의 평균 수명은 50대 쯤에 불과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과도한 운동이 육체를 혹사시켜 오히려 수명을 단축하게 만든다는 것이 요지였다. 마라토너가 아니더라도 현대인들은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로 이미 자신을 마모시키고 있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일을 완수하는 방법을 위한 ‘시간 경영’은 사실 부질없는 욕심이다는 것. 정해진 시간은 안에서 그것들을 하려면 삶은 빠른 속도를 낼 수밖에 없다. 그 속도에는 대가가 요구된다. 문제는 시간이 아니라 나를 어떻게 쓰느냐이다.

  잉에 호프만의 말에 따르면 인간 활동의 사이클은 대개 90∼120분이며 이때 몸과 마음을 제어하는 전달물질, 즉 성호르몬, 에너지 요인, 스트레스 호르몬 등이 방출된다. 우리는 이 사이클이 끝나면 20분간 휴식을 취해 몸과 마음을 치료하고 재생해야 한다. 하지만 쌍코피 터지게 일하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있는 사회에서, 이제 좀 쉬자는 몸의 신호를 수용하기가 그리 쉬운가. 이때 의도적인 게으름 피우기가 꼭 필요한 것이다. 잉에 호프만은 단순히 천천히 살자, 즐기며 살자는 의미에서 게으름을 선전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생물학적으로 게으르게 사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바이오 힌트’를 싣고 있다.

   잉어는 느릿느릿 게으르다. 때문에 잉어의 에너지는 70∼100년이 될 때까지 사용할 수가 있고 심해에 사는 철갑상어는 150년 동안이나 살 수 있다. 장수동물로 이름난 거북이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같은 종이라해도 겨울잠을 자느냐, 한대나 온대에서 사느냐에 따라 수명은 극적인 차이를 보인다. 일반적으로 남성보다 오래 사는 여성을 보자. 남성은 허파 용량도 여성보다 30%가 더 크고 피가 더 많고 산소 운반력도 더 크다. 신진대사도 여성보다 10%정도 빠르다. 이 차이는 테스토스테론이라는 호르몬의 차이 때문인데 이 호르몬이 남성을 빨리 가열시킨다. 여성에게는 이 호르몬이 남성의 10분의 1밖에 없다. 여성은 남성보다 육체적 힘과 속력에 있어 뒤떨어지지만 덕분에 생체 에너지를 조금씩 천천히 씀으로써 오래 살 수 있는 것이다.

게으름이 곧 절약? - 유한한 에너지를 아껴써라
  몽골에서는 자고 있는 사람을 큰 소리로 불러 깨우는 것을 금한다. 놀라서 미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제보니 ‘놀라서 미칠 수 있다’고 하는 몽골의 금기담이 독특한 것이 아니라 지당한 말씀이었나 보다. 우리 사회는 어떤가. 낮잠을 나태함, 허약함, 노인의 활동이라 평각하고 있지 않은가. 실제 우리는 시간이 부족할 때 잠부터 줄인다. 그러나 잠이야말로 우리 몸과 정신을 쉬게 해주는 최적의 처방이다. 생명 템포를 조정하는 잠보다 중요한 것은 호흡법이다. 이완되고 깊은 호흡을 통해 에너지를 조절하고 또 일부는 쓰지 않고 몸을 통해 그냥 사라지게 할 수도 있다. 자세를 곧게 하고 야외에서 신선한 공기를 많이 마시며 가능하면 코로만 숨쉬고 잔기침과 재채기를 참지 말 것 등등. 일과를 마무리하고 신음을 내뱉는 연습을 하는 좋다고 한다.

  작년 여름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라는 카피가 유행을 일으켰다. 우리가 이 카피에 그토록 공감했던 것은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놀러 간다는 꿈에 부풀어서가 아니라 ‘쉴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 아니었을까. 일이 부과하는 압력과 불규칙한 생활 습관 등으로 찌들어 늘 탈출을 꿈꾸게 만드는 현실에서 우리는 수명 연장만을 원하고 있지는 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논다는 것으로 꾸며진 휴식에 있다. 이처럼 잉에 호프만은 누구나 오래 사는 것을 원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자신도 게으름의 원칙에 따른 한 가지 부작용을 ‘세월을 얻는 것’이라고 하니. 짧고 굵게, 혹은 길고 가늘게 그 어느쪽을 원한다 할지라도 건강하고 즐겁게 살기는 빠질 수 없는 항목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기적으로 내 에너지를 아끼며 게을러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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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07-29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전 무지 오래 살겠군요...
 


 

독자들에게 허황된 꿈을 심어주지 않는 작가, 하라 히데노리의 초기걸작 ‘겨울 이야기’가 나의 1000번째 리뷰다.

작품의 완성도는 비슷한 이야기를 그린 취업재수생의 이야기 ‘섬데이’가 더 낫지만, 이 작품의 여운이 더 길다. 개인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읽었기 때문인 것 같다.


리뷰를 쓰던 초창기에는 적립금을 목적으로, 중반기에는 글솜씨 향상을 위해, 지금은 그저 습관적으로 쓰고 있지만, 앞으로는 한번 더 마음을 가다듬고 더욱 간결하고 좋은 리뷰를 쓰려고 노력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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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07-22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축하드려요. 드뎌 꿈의 천 리뷰군요... 전 언제 달성할런지... 저도 부지런히 써야겠네요...

sayonara 2004-07-22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이제야 저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양보다는 질이 아닐까요!?"하고..

sayonara 2004-07-23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 Kel님, 새벽별님, 그리고 나보다 먼저 리뷰 1000개를 알려주신 예진님 등 모두 감사합니다.
누가 "왜 리뷰 1000개의 고지에 올랐냐?"고 물으신다면,
"그냥 거기 책이 있었기 때문에"라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너무 거만한가...!? -_-;;;)

박예진 2004-08-13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저도 그 엄청난 추억이 담긴 책을 읽어보고 싶네요!

조선인 2004-08-13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번째 리뷰? 그게 달성 가능한 고지라니... @.@

sayonara 2004-08-15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2년 사이에 되는 건 아니지만, 꾸준히, 하나씩 쓰다보면 그렇게 되더라구요. ^_^
 

1.에드워드 존 스미스 선장 [단서를 안고 사라진 장본인]

타이타닉 침몰 몇 개월 전만 하더라도 뉴욕의 상류층은 당시 "억만장자들의 선장"으로 알려진 스미스 선장에게 경의를 표하는 만찬을 개최하였다. 그는 당시 대서양 회단항로에 있어서 가장 경험이 많고 인간관계에 재치가 있는 선장으로 손꼽혔다. 그런데 왜 이러한 스미스 선장이 한밤에 거대한 타이타닉호를 빙하더미의 바다사이로 고속질주시켰을까?

스미스는 1850년에 영국 '스테포드쉬어'에서 태어나, 어릴적부터 형이 조정하는 배로 세계일주를 하곤 하였다. 1880년에는 타이타닉의 제조사인 '화이트 스타 라인'에 입사한 후, 타이타닉의 자매선인 '올림픽'을 포함한 많은 신규선박의 처녀운항을 관담해온 경력을 지니고 있다.

항해기록에 의하면, '올림픽'호의 처녀 운항을 출범할 당시 신비롭게도 배가 무언가에 부딛혀 근교 벨파스트 항구에서 프로펠러의 수리를 한 적이있다.

목격자들에 의하면 스미스 선장은 영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조종실에서 유유히 배와 함께 가라앉지는 안은 것으로 추종된다. 배가 침목하기 직전에 바다에 뛰어 들어, 주위에 헤엄치는 생존자들을 구명보트로 인도하였으나, 자신은 보트에 올라타지 안았다는 시나리오가 가장 가능성이 많다.

당시 부인사이에 딸 하나를 두고 있던 스미스는 타이타닉 항해이후 곧바로 은퇴할 예정이었다. 이때문에 한 친척은 "어떻게 생각하면 차라리, 역사적인 배와 함께 가라앉은 것이 더 나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언급하였다.

2.프레데릭 플리트 선원 [빙하를 처음으로 목격한 사나이]

선원 플리트는 1912년 4월 14일 저녁에, 타이타닉호 선상 15미터위에 위치한 전망타워에서 항해 망을 보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망원경은 출발항인 사우스햄톤에서 실리지안은 상태였다.

자신의 교대시간의 마지막 한시간을 남겨두고, 선체 500미터 정면에 대형 빙하를 목격하였다. 곧바로 조정실에 알린결과 선박은 급턴을 하여 작은 진동과 함께 소량의 얼음이 갑판위에 흩어질뿐, 큰 고비를 면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는 2시간 이후에 플리스 선원은 구명보트를 지으며 여성들을 구조하여야만 했다. 플리트는 참변이후 1936년까지 배를 탔으며, 마지막 순간까지는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신문배달을, 저녁에는 맥주를 마시며 보냈다. 무척 외로운 성격으로 1965년에 부인이 사망하자, 얼마안되어 마당 빨래줄에 목매달아 자살하였다.

3.벤자민 구겐하임 [멋지게 간 억만장자]

스위스에서 이민온 철강사업의 억만장자 메여 그겐하임의 7남중 6번째인 벤자민은 최신 현지처인 프랑스 가수 레오틴 오바와 쉐르브르그에서 타이타닉호에 탑승하였다. 구겐하임은 타이타닉호의 운명이 확인되자, 하인과 자기방으로 향한뒤 턱시도로 갈아입는다. "뉴욕의 부인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전해달라"며 선원에게 구명조끼를 거부한 구겐하임은 그 자리에서 현지처와 하인이 무사히 구명보트에 탄것을 확인한뒤, "우리는 가장 어울리는 예복을 입고, 신사답게 갈것이다"라고 선언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시가와 브랜디를 즐겼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구겐하임 부인은 남편없이 몇개월씩 보내는데에 익숙해져 있었으며, 호화생활도중에 투자실패때 거액을 날린것으로 알려진다. 구겐하임의 명예로운 죽음은 일가에게 도움도 됐겠지만, 3자녀에게 소액의 재산만을 남기어, 나중에 딸이 불평할 정도였다고한다.

4.왈레스 하틀리 [마지막 바이올린의 연주가]

어느 기록을 보더라도 타이타닉호의 마지막 순간까지 바이올리니스트 하틀리가 이끄는 8인조밴드의 음악이 같이했음은 확실하다. 배가 물속으로 들어가는 순간에 그들이 과연 무슨곡을 연주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안으나, 당시 선호곡은 이브닝풍의 왈츠와 교회힘이었으며, 평상시 하틀리는 "만약에 우리가 탄 배가 가라앉는다면 '신 그대 가까이' 혹은 '지난시절의 구세주인 신이여'를 연주할 것"이라고 자랑하곤 하였다.

하틀리는 1878년 영국 콜른에서 보험판매원인 아버지곁에 태어나, 학교에서 바올린을 전공한 뒤, 무려 70개 호화선박의 항해에서 음악을 맡아왔다. 당시 보스톤 스파의 마리아 로빈손과의 약혼으로 그녀곁을 따나지 안으려 했지만, 역사적인 선박의 항해에 마지막으로 가담해볼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진정한 에드워디안 전통마냥 개인 이전에 임무를 우선으로 한, 타이타닉이 낳은 영웅이다. 고향인 콜른에는 3미터 높이의 동상이 세워졌으며, 장례식에는 4만명의 인파가 몰려왔다.

5.존 제이콥 & 마델렌 아스토 [타이타닉 최고의 부자]

이동하는 부자촌이었던 타이타닉호 내에서도'죤 제이콥 아스토-4세'는 어느 누구보다도 부자였다. 아스토 부부는 하인단과 함께 '쉐르브르그'에서 선상 하였다. 이들이 탄 특실은 당시 4천불 [현재 7만불] 로 화롯가를 비롯하여 실제 호화주택같이 마련되었다. 아스토는 부동산과 가족이 이어온 모피사업으로 번 8,700만불의 재산 외에, 터바인 엔진과 자전거 브레이키등 하버드 대학 졸업이후 등록한 갖가지 발명, 그리고 토성과 목성에서의 인간의 생활을 그린 공상과학물의 수입이 쏟아져 들어왔다. 심지어 스페인/미전쟁때 자신 고유의 대대에 자금지원을 하기도 했다.

그는 필라델피아의 아바 윌링과 10년 이어진 첫 결혼에서 2명의 아이를 나았다. 하지만 그가 46세에 달하던 1911년에 18살난 마델렌 포스 와의 결혼은 스캔달을 나았다. 살피는 눈을 피하기 위하여 둘은 유럽과 이집트 여행으로 떠났었다. 그리고 이때 5개월 임신 중이었던 마델렌은 아기를 미국에서 낳기 위하여 타이타닉호에 승선한 것이다. 참사직후에 구명보트에 대피시, 아스토는 이 특별한 상황을 설명하면서 담당선원에게 구명보트에 태워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거절당하자 노숙히 시가를 피웠다고. 아스토 부인은 1912년 8월14일에 태어난 아기에게 '죤 제이콥 아스토-5세'의 이름을 지었다. 그리고 그후 2번 결혼하고 1940년에 사망하였다.

6.제이 블루스 이즈메이 [참사의 장본인]

타이타닉호 소유회사 이사인 이즈메이가 실제 영화에서 디너 테이블의 내프킨에 항해의 첫 지시계획을 그린 것처럼, 과연 진짜로 홍보효과를 위해 배를 전속시키도록 명령했는지는 알수가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49세의 그가 배에 가득찬 승객과 하인과 비서와 그의 명예를 놔둔체, 마지막 구명보트로 탈출했다는 사실이다.

"갑판위에 남은 사람이 더이상 없었다"고 변명한 그는, 구명선 '카파시아'호의 남은 항해에서 계속 고립되어 있었다. 차후 범죄혐의는 벗어났지만, 언론에서는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고, 당시의 상류층 남성들이 가입해있던 존엄한 런던회에서도 심한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1913년에는 아버지에게서 상속받은 '화이트 스타 라인'의 회장직을 내논후, 미국부인 쥴리아 프로렌스와 함께 아일랜드 서부에서 요양하다 1937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7.이시도&스트라우스 [같이 가기로 선택한 부부]

유명한 자선가이자 뉴욕 맨하탄 한복판의 메이시 백화점을 소유한 스트라우스 부인은 구명보트에 탈 권유를 두번이나 뿌리치고 남편과 마지막 순간을 같이하였다. 이사실은 알게된 6명의 자녀와 친지들도 이 선택에 대해 놀라지 않았다. 둘은 서로 생일잔치도 항상 같이 치루는가 하면, 헤어져있을 때에도 매일 편지를 교환할 정도였기에. 타이타닉이 가라앉기 시작할 때 선원들이 구명보트에 탈 것을 권유하자, 이다는 대신 하인을 태우고는, "이제 이것도 필요없을 것이라며 입고 있던 모피코트마저 건네주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두번째 보트에 강제로 태워진후 남편이 물러서자, 이또한 뿌리치고 나와 67세의 남편과 마지막으로 포옹하는 장면을 보았다는 목격자의 증언. 뉴욕 브론크스 묘지의 돌담에는 "물은 사랑을 채울수 없는 반면, 사랑을 죽이지도 못한다"는 문구가 새겨져있다.

R.M.S.=>Royal Mail Steamer)
타이타닉은 세상에서 가장 큰 배였다. 46328톤 (46328000킬로 그램) 이상이였고 타이타닉의 길이는 1912년에 세상에서 가장 높은 빌딩보다도 길었다. 길이가 약 882.5 피트(약268 미터) 가 되었다고 한다. 또 최고 속도는 23노트(knot) 였다. 그리고 타이타닉호의 폭은 92피트 (약 28미터 -> 테니스 코트의 길이), 굴뚝의 길이는 75피트 (22미터)나 되었다 또 타이타닉의 9개의 갑판은 11층 빌딩 높이와 비슷했고 풍차 크기의 3개의 프로팰러를 돌리는 엔진은 4층 빌딩 높이와 맞먹었다. 또 타이타닉의 창고가 있는 밑부분에는 더블 바틈(Double Bottom)과 16개의 워터 타이트 도어스 컴파트맨트(watertight doors compartments - 물이 새지 안도록 막아주는 두꺼운 문) 가 있는데 그 중 4개 까지 물이 들어와도 타이타닉은 침몰하지 않는다. 그래서 타이타닉은 절대로 침몰이 불가능(“unsinkable”)한 여객선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타이타닉은 승객과 선원들을 합쳐서 약 3000명이 넘게 탈수있다. 그리고 타이타닉은 고급 음식점, 도서관, 라운지, 수영장, 체육관, 호화로운 객실 등 없는 것이 없어서 사람들은 타이타닉을 떠다니는 궁전이(floating palace)라고 불렀다.

올림픽호는 1910년에 타이타닉호는 1911에 HARLAND & WOLFF란 회사에서 만들어졌다. 타이타닉의 디자인은 HARLAND & WOLFF 의 감독관인 토머스 앤드루(Thomas Andrews)가 했다. 첫번째 배 올림픽호는 1910년 10월 20일날 진수되었고, 그 뒤를 이어 타이타닉호는 1911년 5월 31일날 진수되었다.
같은 회사에서 만들어 졌으므로 두 배의 크기는 똑같았다. 프로팰러는 3개, 굴뚝은 4개지만 그 중 하나는 배의 디자인을 멋지게 하려고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구명보트는(lifeboat) 14개 비상 보트(emergency lifeboats) 2개 접는 식의 보트가 (collapsible boat) 4개가 있었다. 구명보트는(life boat) 최대 65명, 비상 보트는(emergency lifeboats) 최대 40명, 접는 식의 보트는 (collapsible boat) 최대47명을 태울수있었다. 그래서 총 1178 명을 태울수있다. 이렇게 타이타닉에는 20개의 구명보트가 있었는데 원래 16개의 보트를 더 놓을 수 있었으나 타이타닉의 주인인 토머스 앤드루씨(Thomas Andrew)가 외관상 보기 안좋아 그것을 무시해 버린 것이다. 올림픽호의 1911년 6월의 처녀 항해는 성공적으로 끝났으나 타이타닉의 처녀 항해는 실패를 하고 말았다. 화이트 스타라인의 사령관인 존 에드워드 스미스(Edward John Smith) 선장이 지휘하는 타이타닉은 1912년 4월 10일 12시 15분에 사우샘프턴(Southampton)항을 떠나 11일 목요일에 아일랜드의 퀸스타운 (Queens Town)을 지나 2206여명을 태우고 뉴욕으로 처녀 항해를 하였다. 처음이자 마지막의 항해를 하였던 것이다. 타이타닉 선장 스미스는 타이타닉의 처녀 향해가 끝나면 은퇴를 할 계획이었다. 선장인 스미스(Smith) 와 1등 항해사인 물덕(Murdoch) 그리고 우두머리 항해사 와일드(Wilde), 2등 항해사 라이톨러(Lightoller), 3등 항해사 피트맨(Pitman), 4등 항해사 박스헐(Boxhall), 5등 항해사 로우(Lowe), 그리고 6등 항해사 무디(Moody) 등 타이타닉의 선원은 타이타닉을 잘 지시하였다.

13일 밤(토요일)에는 22노트로 향해를 했으나 14일 밤(일요일)에는 23노트(43km/h)로 전속 향해를 하였다. 14일날 아침에는 라이프보트 드릴(lifeboat drill-> 사고가 날 것을 대비하여 구명보트 타는 걸 미리 연습하는 것)이 스케쥴로 짜져 있었으나 선장 스미스가 취소시켰다. 또한 빙산 경고도 6~7번을 받았다. 타이타닉은 스케쥴로 는 1912년 4월 17일 수요일에 미국 뉴욕 항에로 도착 예정이었으나 1912년 16일 화요일 일에 하루 일찍 도착하여 사람들을 놀려주고 싶다는 마음에 23노트로 전속 향해를 한것이다. 타이타닉은 3일 밤동안 편안히 항해를 했다. 그러나 14일 에는 공포의 빙원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고도 23노트라는 속도를 유지한 것이다. 14일 밤인 9시 20분 쯤에는 위험을 보는 두 사람이 망루에 올랐다. 그 중 한명 프래드릭 풀릿(Frederik Fleet)이 빙산이 전방에 있는걸 발견을 했다. 그리고 종을 3번 울리고는 전화를 들어 '거기 누구 없어요?' 하고 외쳤다.

"Fleet-Is there anybody there?
6th Officer Moody-Yes what did you see?
Fleet-Ice berg right ahead
-Thank you-"

그리고 부선장 물덕도 선교루에서 자신이 직접 빙산을 발견해 "hard a-starboard" 와 "full astern"을 외쳤다.
그러나 타이타닉은 전속향해를 하고 있었고 빙산이 너무 가깝고 배가 너무 커서 11:40분 뉴 펀드랜드(Newfoundland)에서 빙산과 충돌하였다(빙산 크기-> 50~100피트). 타이타닉 밑부분에 있는 컴파트맨트 4개까지의 컴파트맨트(compartment) 에는 물이 차도 침몰하지 않지만 5개의 컴파트맨트(compartment)까지 물이 들어오면 침몰한다. 그러나 운이 나쁘게도 5개의 컴파트맨트(compartment)에 물이차서 침몰하기 시작했다. 비상사태여서 타이타닉의 오퍼레이터(operator) 필립스 (Phillips)와 브라이드 (Bride)는 10 마일이 떨어저있는 배 캘리포니안 (Californian)호한테 비상 요청을 하였다. (DISTRESS CALL) '씨큐디 에스 오 에스 타이타닉 (C Q D S.O.S. TITANIC )' 캘리포니안 호는 타이타닉하고 가까워서 배가 다 침몰하기 전에 와서 모두를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캘리포니안 호의 오퍼레이터(operator)가 응답을 하지 않았다. 너무 늦은 밤이여서 응답장치를 꺼놓았던 겄이다. 그래서 불꽃놀이로 위험한 상황이라고 싸인을 보냈다. 캘리포니안 호의 선원들은 이 불꽃놀이 싸인을 봤지만 타이타닉이 위험한 상황 이란걸 모르고 구하러 가지 않았다. 그래서 타이타닉의 오퍼레이터(operator)는 58 마일이 떨어저있는 큔아드(Cunard) 회사가 제작한 카파시아(Carpathia) 호한테 비상 요청을 했다. 카파시아 호의 오퍼레이터(operator)는 이것을 응답하여 선장한테 즉시 보고 하여 전속력 (보통은 14노트로 달린다) 17노트를 달렸으나 타이타닉이 침몰하기전에 도착을 못하고 말았다. 또한 타이타닉의 자매 배인 올림픽호도 연락을 받았지만 너무나 먼 거리에 있어서 구하러 오지 못했다. 타이타닉은 구명 조끼는 승객과 타이타닉의 선원들에게 넉넉했지만 구명보트는 넉넉하지 못했다.

타이타닉은 2시 18분에 정전이 되고 3번째 굴뚝과 4번째 굴뚝 사이가 반으로 갈라져서 15일 월요일 새벽 2시 20분에 2시간40분 만에 사라졌다. 결국 1503여명의 희생자를 낸 영국 호화 여객선이었다. 그리고 선장 스미스는 어떤 생존자의 말로는 타이타닉의 선교루에서 죽었거나 총으로 자기 자신을 쐈거나 마지막에 물에서 얼어 죽었다는 말이 있고, 화이트 스타 라인 화장 부루스 이즈매이는 몰래 보트를 탔다는 말이 있고 타이타닉을 디자인을 한 토머스 앤드루는 마지막에 1등석 흡연실에서 홀로 서 있었다는 말이있다. 그리고 빙산을 처음으로 목격한 사람 프레드릭 플릿은 구조 되었다고 한다.

*타이타닉 의 생존자 명단*
1등석, 남자=> 생존자-58 사망-115
여자=> 생존자-139 사망-5
어린이=> 생존자-5 사망-0
2등석, 남자=> 생존자-13 사망-147
여자=> 생존자-78 사망-15
어린이=> 생존자-24 사망-0
3등석, 남자=> 생존자-55 사망-399
여자=> 생존자-98 사망-81
어린이=> 생존자-23 사망-53
총승객, 남자=> 생존자-126 사망-661
여자=> 생존자-315 사망-101
어린이=> 생존자-52 사망-53
선원, 남자=> 생존자-189 사망-686
여자=> 생존자-21 사망-2
총 승객, 선원, 남자=> 생존자-315 사망-1348
여자=> 생존자-336 사망-103
어린이=> 생존자-52 사망-53

*총 2206명중 1503명 사망 703명 구조

타이타닉이 사라진 후 703명의 생존자는 타이타닉을 구출하려고 오고 있던 카파시아 호를 만나 구조 되었다. 그리고 카파시아 승객은 타이타닉 생존자에게 이불과 필요용품 등을 나누어 주었다. 구명보트가 모자라고 65명이다 탈 수 있는 구명보트에 20~30명을 태운 다음 구명보트를 내려서 703명 밖에 살지 못하여 타이타닉이 침몰한 이후로 많은 법이 바뀌었다. 우선 모든 배에는 구명보트를 충분히 준비하여야 했다. 그리하여 타이타닉호와 비슷한 올림픽호도 타이타닉이 침몰한 이후 다시 제조되었다. 몰론 구명보트도 더 만들어 놓았다. 또 늦은 밤이라도 라디오 응답장치는 꺼놓으면 안된다고 법이 바뀌였다. 참고로 타이타닉 일등석 한사람의 티켓값은 타이타닉의 선원들이 18년을 일해서 번 돈보다도 훨신더 비싸다고 한다. 지금 현재 화이트 스타 라인은 사라졌다. 그리고 옛날에 화이트 스타 라인의 라이벌 이였던 큔아드 라인은 퀸 매리호(Queen Mary, 지금 미국에 켈리포니안주의 바다에서 호텔로 활용되고 잇다), 퀸 애리자배스 1호(Queen Elizabeth 1). 퀸 애리자배스 2호(Queen Elizabeth 2) 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2004년에는 퀸 매리 2호(Queen Mary 2)가 완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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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07-16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잭 푸트랠의 죽음이 젤 안타까워요. 사고 기계 벤 두젠 교수의 창조자인 추리 소설가요...

sayonara 2004-07-16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오~ 그분도 여기 있었던 거군요. 그래도 신사답게 가셨을 거라고 믿습니다.

LAYLA 2004-07-17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듣던대로 여자와 아이들은 확실히 많이 살았군요.
1등석 여자 사망자가 5명 뿐이란 사실에 많이 놀랐습니다.
과연 그 당시 한국이었다면...- _ -;;
여자들이 더많이 죽었으면 죽었지 더 많이 살수 있었을거 같진 않은데..;;

sayonara 2004-07-22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양인의 '신사도(기사도)'라는 것이 그런 것인가 봅니다.
우리나라도 옛부터 '선비의 도'라는 것이 있었다고 하던데..
어쩌다 퇴색됐는지...
 

[YTN 2004-07-09 08:09]
 
[최영주 기자]

[앵커멘트]
하루 아침에 뒤바뀌어 버린 행정.
그로인해 한 젊은 사업가가 부채 40억을 짊어진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주먹구구식 탁상행정으로 애꿎은 사람만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
최영주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24살에 학원 경영에 뛰어들어 학원 전문빌딩을 운영하겠다는 일념으로 사업에 매진해온 이석진 씨.
수년간 차곡차곡 모은 돈과 신용으로 10층짜리 건물까지 지어 올렸습니다.
하지만 학원 개강을 눈 앞에 두고 이씨의 꿈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습니다.
건축허가를 잘못 내준 관할 행정기관의 어이없는 실수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여러 층(4층~10층)에서 학원을 운영할 수 있는 교육연구시설로 건물 허가를 내주고는 일반 근린생활시설로 용도를 변경하라고 급작스레 말을 바꾼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단 한 개 층에서만 교육 시설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관할 기관에서는 법률 해석에 문제가 있었다며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녹취:시청직원 후임자] "내가 후임자이긴 한데.. 교육연구및복지시설 학원이 가능한 것처럼 해석을 할 수 있게끔 돼 있었다는거에요.그때 당시에.. 꼼꼼하게 들여다보면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었는데.."
건물 완공을 이제 겨우 1주일 정도 남겨둔 시점, 일곱개층 학원 입점도 모두 끝낸 상태라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용도변경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기 때문에 공사를 계속 진행했던 것입니다.

[녹취:시청직원 전임자] "허가 난 것 취소할 수도 없는거에요 그거..." "교육연구시설로 돼있잖아요? 준공시점에 가서?" "관계없어요.준공시점에 나간거 준공안해주고 그러지는 않아요."
하지만 끝내 준공을 안내주겠다는 행정기관의 엄포에 이씨는 결국 사업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이로인해 대출금과 어마어마한 공사비용까지 무려 40억원의 빚더미 안게 됐습니다.

[피해자:이석진] "하루아침에 신용불량자로 전락되고.. 이렇게 한번에 무너질지는 생각도 못했고 처음에 일 닥쳤을 때는 막막도 아니고 거의 죽고싶은 심정이었어요."
시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려해도 소송비용이 없어 자포자기 상태라는 이씨.
이랬다 저랬다, 하루아침에 바뀌어 버린 관할 기관의 탁상행정이 한 젊은이의 부푼 꿈을 앗아가 버렸습니다.

YTN 최영주[yjchoi@ytn.co.kr]입니다.

[저작권자(c) YTN & Digital YTN.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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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우리나라의 실정을 잘 모르는 철없는 사업가의 실수같다.

40억짜리 공사면 관계공무원들 명단 만들어서 봉투 하나씩 찔러주던가, 아니면 불러다가 여자 안겨주고 진탕 술퍼마시게 했어야지.

농담같은가!? 나도 물론 청렴하고 성실한 공무원도 많이 있다고 믿지만...

경험상 우리나라는 그렇게 안하면 될 일도 안된다.

우리나라 공무원들 비위도 못맞출거였으면 사업을 하지 말던가, 다른 나라 가서 사업을 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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