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hear the approaching thender that, one day, will destroy us too, I feel the suffering of millions. And yet, when I look up at the sky, I somehow feel that everything will change for the better, that this cruelty too shall end, that peace and transquility will return once more." Anne Frank, July 15, 1944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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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명계 >

자즌닭이 울어서 술국을 끓이는 듯한 추탕 집의 부엌은 뜨스할 것같이 불이 뿌연히 밝다

초롱이 희근하니 물지게꾼이 우물로 가며
별 사이에 바라보는 그믐달은 눈물이 어리었다

행길에는 선장 대어가는 장꾼들의 종이 등에 나귀 눈이 빛났다
어데서 서러웁게 목탁을 뚜드리는 집이 있다

->

새벽부터 삶을 일찍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의 명복을 빌기 위해 목탁을 두드려야 하는 상황이 있다.

20년도 전 종로의 피맛골을 자주 갔던 기억이 있다. 그 때만 해도 개발이 되기 전이라 구불구불한 골목길에 국밥집이며 술집이며 그런 것들이 수두룩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 때는 호기심이 많았거나 열정이 넘쳤는지 마음 맞는 사람들과 밤을 새면서 술을 먹고 이른 아침 전철을 타고 다시 귀가를 하곤 했다. 취기가 가득한 상태에서 걷고 있을 때 새벽녘 거리의 모습은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려고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과, 한편으로는 취해서 비틀거리는 사람들과, 멍한 표정의 공허한 사람들 등 참 다양했다. 솔직히 취한 상태라 별 생각이 없이 걸었을 텐데도 희한하게 그 시절 그 때의 기억이 떠오를 때가 있다. 물론 그 전의 피맛골에서 사람들과 정겹게 술잔을 기울이던 기억도 있고.
이 시를 읽으면서 비슷한 시간이라도 누군가는 삶을 준비하고 다른 누군가는 삶을 마감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 광원 >

흙꽃 이는 이른 봄의 무연한 벌을
경편철도가 노새의 맘을 먹고 지나간다

멀리 바다가 보이는
가정거장도 없는 벌판에서
차는 머물고
젊은 새악시 둘이 내린다

->
우수와 쓸쓸함이 느껴진다.

'곰스크로 가는 기차'라는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2000년대 초반 MBC 베스트극장에서 방영을 해준 적이 있다. 시에서는 두 명의 여성이 정거장에 내렸다는 표현만 있는데 오래전 이 작품이 떠올랐다. 도중에 내린 남녀. 곰스크행 기차가 언제 올 지 모르지만 남자는 끊임없이 기차를 기다리고 여자는 이 생활도 만족하여 굳이 떠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 남행시초 4: 삼천포 >

졸레졸레 도야지 새끼들이 간다
귀밑이 재릿재릿하니 볕이 담복 따사로운 거리다

잿더미에 까치 오르고 아이 오르고 아지랑이 오르고

해바라기 좋을 볏곡간 마당에
볏짚같이 누우런 사람들이 둘러서서
어느 눈 오신 날 눈을 치고 생긴 듯한 말다툼 소리도 누우러니

소는 기르매 지고 조은다

아 모두들 따사로이 가난하니

->

평화로운 농촌의 정경.

봄이 다가올 무렵 볏짚을 쌓아둔 마당에 햇살이 따스하게 비치는데 사람들이 모여 얘기를 나누다가 말다툼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다.
실제로는 가난했을 사람들이지만 마지막에 '가난'이라는 글자를 넣으면서도 '따사로이 가난'이라고 표현해서 우울하게 느껴지지는 않는 것이 좋았다.


< 북관 >

명태 창난젓에 고추무거리에 막칼질한 무이를 비벼 익힌 것을
이 투박한 북관을 한없이 끼밀고 있노라면
쓸쓸하니 무릎은 꿇어진다

시큼한 배척한 퀴퀴한 이 내음새 속에
나는 가느슥히 여진女眞의 살내음새를 맡는다

얼근한 비릿한 구릿한 이 맛 속에선
까마득히 신라 백성의 향수도 맛본다

->

시인이 함흥에서 영어 교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 지은 시라고 한다.
그의 화려한 외모와 이력과 시의 표현이나 내용이 달라서 놀랄 때가 많은데 특히 이 시가 그렇다.

토속 음식을 느끼고 시큼하고 퀴퀴한 내음새 속에서 그 옛 시절 여진인들과 신라인의 향수를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여진인들은 실제로 함경도 지역에서 많이 살았고 신라인은 전성기 때 함경남도 지방까지 올라온 적이 있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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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need to have something besides a husband and childeren to devote myself to..."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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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가 쿠빌라이 이전에는 몽골군에게 국토를 유린당하고, 쿠빌라이이후에는 그런 일이 없었던 것은 태자 시절의 원종이 쿠빌라이와 양양에서 만나 교우관계를 맺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쿠빌라이 자신의 정치철학이 유목적인 직접 침략을 피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유사시에는 무력을 사용하지만 회유책을 우선하게 되었다. 한족 문명 본위의 사관에서 본다면 쿠빌라이가 한 문화를 접하면서 차츰 개화한 것이 된다.
고려국왕 원종은 몽골의 이와 같은 변화를 틈타 친몽골정책을 취하여무인 권신으로부터 실권을 되찾으려고 했다. 쿠빌라이 지원 원년(1264)에아릭 부케 평정을 축하하는 행사가 열렸는데, 고려의 원종은 권신 김준의 반대를 물리치고 직접 그 행사에 참가했다.
고려는 건국 이래 346년, 24대왕으로 이어지는 동안 외국의 책봉을받은 일은 있었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왕이 직접 외국에 입조한 일은 없었다. 이때 원종의 입조가 처음이었다.
몽골 제국도 성격이 바뀌었지만 고려도 바뀌었다. 그때까지 고려의국왕은 권신의 강한 반대를 거스를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원종은 김준의 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대도(大都, 북경)로 갔고, 그리고 무사히 돌아왔다. 몽골의 힘을 등에 업고 있으면 권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몽골의 힘에 의지하면서 고려의 속국화는 진행속도가 빨라졌다. - P300

두 번에 걸친 원정 실패에도 쿠빌라이는 일본 원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두 번 모두 전쟁에 진 것이 아니라 태풍으로 함대가 궤멸했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전선을 건조하고 병대를 파견한 고려와 남송이 떠안았을 뿐 원나라는 그다지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일본 원정으로 고려와 남송이 피폐해지는 것을 어쩌면 원나라는 바랐는지도 모른다. 피폐해질수록 반항할 기력도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안일한 생각이었다. 강남 지방에서 반란이 잇따라 일어났다.
제2차 원정에 실패한 이듬해 쿠빌라이는 다시 고려에 전함 건조를 명령하고 일단 폐지한 정동행성을 부활했다. 충렬왕은 좌승상으로 임명되었다. 그러한 때에 강남에서 반란이 잇따라 일어나 일본 원정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쿠빌라이는 여러 번 일본 원정을 계획했으나, 그때마다 사고가 일어나실행으로 옮기지 못했다. - P324

두드러지게 이념이 빠진 문화 활동의 소산을 ‘속(俗)‘이라고 한다면, 그 반대는 초속(超俗)이다.
원대의 문화는 매우 속된 것과 극히 초속된 것, 양극단으로 나뉜다.
문인의 기행은 어쩌면 생활이라는 면만이라도 초속이고 싶다는 간절한바람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속과 초속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양유정이 민요풍의 시를지었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을 속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고답적인 시문을 지었다고 해서 그 전부를 초속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대부분 공허하기 때문이다.
원대에는 수많은 희곡이 지어졌다. 이전과는 달리 재능 있는 문인이집필했는데, 일반 관객을 상대로 하므로 관객의 수준을 생각해서 써야했다. 그렇다면 원곡(元曲)은 모두 속이냐 하면 그렇다고 한정할 수는 없 - P358

다. 가슴속에 강한 이념을 간직한 작자는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해도 그것을 작품 안에 살린다. 평범하고 속된 형식 안에 민중이 거부감을 갖지않게 초속을 담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 P359

원나라는 모든 면에서 ‘변‘을 일으켰다. 하지만 어떠한 야수적인 폭력으로도 오랫동안 배양된 전통을 없애 버릴 수는 없었다. 오히려 침체를깨뜨렸고, 그런 의미에서 중국의 전통 속에 융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 P368

토록 동화되기를 두려워했으면서 다른 형태로 중국 문화를 유지하는 데공헌한 셈이다. 전통의 계열 속에 들어선 원나라가 다음 시대로 이어진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 P369

몽골 정권은 중국 전체를 지배하에 두었기 때문에 한지(漢地, 강남을 기준으로 화북)와 한인의 제휴를 강화해야만 했다.
원나라의 국도는 둘이다. 오늘날 북경과 원래의 개평부(開平府)로, 전자를 대도(大都) 후자를 상도(上都)라고 불렀다. 여름이 되자 정부 기관은 대거 대도에서 상도로 옮겨갔다. 이 이도제(二都)는 몽골 정권의 성격을상징한다. 원나라 왕조를 세운 쿠빌라이는 몽골 세계 제국의 한지 총독이었다. 쿠빌라이 정권은 출신지인 막북과 지배지인 한지의 이원적인 성격을 띠었다. 이도제로 상징되듯이, 원 왕조는 막북과 한지의 균형을 잡았다. 그런데 남정(南征)으로 강남을 손에 넣으면서 일이 복잡해졌다. 강남을 장악하기 위해 한인의 힘을 빌리면서 균형이 크게 깨져 버렸다.
원 왕조는 남송을 멸망시킨 뒤 한지 쪽으로 무게 중심을 옮겼고, 이것이 막북에 있는 몽골족의 불만을 초래했다. 막북은 국가 발상지인 만큼원나라 황족도 적잖이 살고 있었다. 이것이 황위계승투쟁을 더욱 복잡하게 한 원인이기도 했다. - P394

국도가 개봉이나 낙양, 아니면 장안에 있던 시대는 남쪽 물자 수송은 - P396

주로 운하에 의존했다. 원나라는 북경을 국도로 삼았기 때문에 운하 외에 바닷길을 이용할 수 있었다. 겨울철 결빙기를 제외하면, 천진의 백하(白河) 하구가 북경의 주요 항구가 되었다. 해상 수송의 이점은 운하 수송보다 큰 배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해안의 염전 단지에서는 편리하다는 이유로 해상 수송을 많이 이용했다. - P397

장사성이 고우에서 남하한 것은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기아(餓) 지대에서 탈출하기 위해서지 특별히 장래를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에 비해주원장의 남하는 이선장의 의견에 따른 것으로, 이것은 확실히 장래를염두에 둔 포석이었다.
더구나 이 남하군은 매우 숙연했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 주민을 학대하지 말라는 명령은 말단까지 철저했다. 이것은 홍건군의 전통이기도 했지만 이선장의 헌책이기도 했다. - P464

그렇지 않아도 홍무제는 소주에 감정이 좋지 않아 주민을 남경으로강제 이주시키기도 했다. 소주 사람들도 당연히 남경 정부에 반감이 있었을 것이다. 장사성 시대가 훨씬 좋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을 터이다. - P498

홍무제도 소주의 시민 감정을 알고 있었고 이를 손볼 기회를 엿보고있었다. 가혹한 탄압으로 반항의 기운을 꺾으려는 것이 홍무제의 방식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위관은 정치에 힘을 쏟아 건국 후의 부홍은 소주가 제일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치적을 올렸다. 유능하다는 것을확실히 보인 것이 위관의 불행이었다. 이만큼 치적을 올렸으니 정청 신축쯤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 문제가 되리라는 것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상량식 행사 때, 지사의 친구로서, 또 소주인으로서 고계는 상량문을썼고 또 상량을 축하하는 시를 지었다. 이 일이 고계를 죽음으로 몰았다. - P499

호유용과 남옥의 옥(獄)에 관해서는 다음에 인용하는 조익의 의견이 정확할 것이다.
명조(明祖, 홍무제)에 이르러 옥사를 일으킨 것이 빨랐다 해도 천하가 평정되었을 때는 그의 나이 이미 60세였다. 의문태자(懿文太子, 주표)는 온화하고 인자했다. 의문이 죽고 손자는 더욱 나약했다. 마침내 앞날을 염려치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또다시 대옥을 일으켜 일망타진했다. 이것으로 그의 심사를 추측할 수 있다. 호유용이 죽은 것은 홍무 13년으로, 함께 주살된 자는 진녕, 도절 등 몇 명에 지나지않는다. 호당(胡黨)의 옥에 이른 것은 23년의 일이다. 호유용의 죽음에서 10여 년이 지났는데, 어찌 죽은 역적의 공모자라 하여 10여 년이지난 지금 새삼스레 문죄할 수 있으랴. 이는 호유용을 빙자하여 죄목을 만들어 여러 사람을 견제하고 이들을 올가미에 얽으려는 계책일뿐이다. 호당을 이미 주살하고도 여전히 미진하여 26년에 다시 남당의 옥을 일으켰다. 이로써 모든 공신과 숙장이 사라졌다. - P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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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 칸 제국의 약점은 쿠릴타이의구성과 기능이 명확하지 않아 후계자 선출에 불안 요소가 많다는 점이다. 이 정권은 세계 제국이 된 뒤에도 여전히 부족공동체 분위기에 머물러 있었다. 오는 강 유역에서 유목하던 시기에는 그것이 소박하고 평화롭게 보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중국과 이슬람, 유럽의 문명지역까지 뻗어나간 나라가 된 이상, 이제는 그것이 통하지 않는다. - P189

삼경요패(三京撓敗, 삼경, 즉 개봉, 낙양, 귀덕 등에서 크게 패한 것-옮긴이)의 전쟁은 하지 않을 수도 있었던 전쟁이었다. 남송군이 출병만 하지 않았어도몽골군은 남하할 의사가 없었다. 원호문의 ‘불수과채주공(不須誇說蔡州功, 채주의 공적을 자랑하지 마라)‘이 사실로 나타났다. 다만 이 경우에는 몽골군이 춘추의 진나라가 되어 곡과 우를 집어삼킨 것이 아니라 남송 쪽에서 먼저 싸움을 건 것이다.
사가들은 범규의 출병론을 ‘부인(婦人)의 모사(事)‘, 전자재의 행동을
‘어린애의 장난‘이라고 평하고 있다. 현대 여성이 들으면 화를 낼지도 모르나 당시 사람들은 부녀자나 할 짓이라고 어이없어 했다.
이듬해 몽골군은 남하를 개시했다. 맹약을 어기고 개봉과 낙양으로군사를 진격시킨 남송을 힐책하는 출병이었다. 그 후 수년에 걸쳐 남송과 몽골의 싸움이 계속되었다. - P207

이미 원(元)이라 칭한 몽골이 남송을 공격하는데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양양(襄陽)이었다. 남송이 양양을 확보하고 있는 한, 원은
‘함부로 군대를 진격시킬 수 없었다. 뭉케의 명령으로 쿠빌라이가 남하했을 때도 양양을 공략하지 않고 악주까지 진출했기 때문에 몽골군은 살얼음을 밟는 느낌이었다.
쿠빌라이는 이번에는 양양을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대원이라는 국호를 세운 지 2년 뒤인 지원 10년(1273) 정월, 원군은 마침내 번성(樊城)을 함락했다. 이로써 양양의 운명은 다했다고 할 수 있다.
양양성은 고립되어 쉴새 없이 긴급사태을 알렸으나, 재상 가사도는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수장 여문환(呂文煥)은 성내를 돌 때마다 남쪽을향해 통곡했다고 한다. 더는 손 쓸 방법이 없었다. 마침내 쿠빌라이의 항복 권고문이 도착했다.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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