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언어 가운데 사분의 일에는 젠더와 젠더 고정관념이 문법 체계 속에 녹아 있다. 영어는 아니지만, 프랑스어, 스페인어와 같은 언어들은 모든 명사를 남성 혹은 여성형으로 분류하고, 이 분류는 접두사, 접미사에 영향을 준다. ('중성' 명사가 있는 언어도 있다.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 이성적이냐 비이성적이냐, 생물이냐 무생물이냐 등 스무 개도 넘는 범주를 가진 언어들도 있다.) 


언어학자인 수잰 로메인은 모든 언어에는 문법적 젠더와 실제 삶에서의 인간 젠더를 인식하는 방식 사이에 부인할 수 없는 '누수'가 발생한다는 이론을 만들어냈다. 요점은 남성과 여성을 분류하는 언어(스페인어부터 산스크리트어까지)에서 단어에 담긴 젠더가 이 단어가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한 화자의 인식에 조금씩 스며들 수 있다는 것이다. - P170~171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가 독일어였다. 지금은 문법이고 뭐고 다 잊어버려서 기억나는 것이 없지만 남성,여성형이 구분되어 있었던 것은 분명히 기억난다. 세계의 언어 중 1/4이나 문법에 젠더 관념이 포함된다니 생각보다 너무 많은 듯해서 놀랐다. 


왜 어떤 언어들은 문법적 젠더를 갖게 됐을까? 영어 단어인 '젠더'는 라틴어 '제누스genus'에서 왔다. 이 단어는 '종류'나 '유형'을 말하던 단어로, 원래 사람에게는 전혀 쓰이지 않았다. 고대 영어에서는 명사를 남성, 여성, 중성으로 나누었다. 이 체계는 오늘날의 러시아어, 그리스어, 독일어와 같은 인도유럽어족 언어에 여전히 남아 있다. 1066년 정복자 윌리엄이 영어권에 고대 노르만 불어를 유입시키면서, 3젠더 체계는 사망하게 된다. 젠더를 표기하는 접미사도 그때 거의 사라진다. '젠더'가 사람을 묘사하는 데로 뻗어 나가게 된 건 몇백 년 전이다. 모든 단어를 남성 혹은 여성으로 나누는 것은 너무 복잡하게 보일 수 있지만, 우리의 자연적 젠더 시스템도 이게 없는 언어가 보기엔 마찬가지로 복잡하다. 헝가리어, 핀란드어, 한국어, 스와힐리어, 터키어는 젠더화된 대명사가 없는 몇 안 되는 언어이다. 이런 언어들은 맥락을 통해서 대상을 알아낸다. 어떤 언어는 젠더 중립적 방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북미의 토착 알곤킨어에는 젠더를 지칭하지 않는 삼인칭대명사가 두 개 있다. 이는 어떤 사람이 대화의 중심에 와 있느냐에 따라서 결정되고 대명사는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문법적 젠더를 가진 언어에서, 여성과 남성에 대한 말은 '규범 문법'을 가지고는 '문법적으로 올바른' 방식으로 소통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프랑스어에서는 선망받는 직업 대다수가 남성이다. 경찰, 의사, 교수, 엔지니어, 정치학자, 변호사, 외과의사 등 수많은 직업이 남성 성별이다(간호사, 돌봄노동 종사자, 하인에 대한 단어는 모두 여성). 따라서 '그 의사가 용감하다'고 말하고 싶은데 의사가 여성이라면 운이 없는 상황에 처하는 셈이다. 


현실에서 여성을 자연, 영토, 기술에 비유하는 행위는 여성이라는 성별을 '타자'라는 범주로 묶는다. 로메인에 따르면, 바다와 해양과 같은 자연에 여성을 비유하는 행위는 "여성은 자연과 문명 간의 갈등, 아름다움으로 남성을 유혹하고, 끌어당기지만, 위험하기 때문에 정복해야 하는 무언가"라는 뜻을 지닌다. 여성은 식민화해야 하는 대륙이고 포위해야 하는 성채이다. - P181


문법을 지적하는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정치적 신념이 무엇이든 간에, 발화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교정하거나 멈추고자 하는 깊은 열망이 있다는 것이다. 언어가 변화하면 삶에서 어떤 것이 변화할 때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귀찮아진다. 언어의 변화는 더 큰 사회적 변화의 신호이기 때문에 이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 P196


사람들은 규범 문법-국어 선생님이 배우라고 하는 그것-이 막강하고, 영원히 작용하는, 그러니까 중력이나 해와 같이 변치 않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문법이 인간의 발명품이며, 그렇기 때문에 꾸준히 진화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 P167~168


누군가 하는 말의 도덕적 중요성은 내용에 있지 문법에 있지는 않다. - P194


저자의 말에 공감가는 부분이 위 두 문장(문단)들이었다. 

언어는 생각보다 빠르게 변화한다는 생각을 했다. 불과 몇 십년전에 유행했던 문장들이 지금은 전혀 쓰이지 않기도 하고 어떤 문법은 사장되기도 했다. 언어에 포함된 젠더 표현들도 이렇게 바꾸어갈 수 있지 않을까.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모국어와 분리되어 살 수 없다. 내가 프랑스에 태어났다면 프랑스어를 해야 하고 독일에 태어났다면 독일어를 해야 한다. 결국 말하는 사람의 생각이 담기는 것이 언어라면 문법보다는 내용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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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9-14 17: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고등학교시절 제2외국어가 일어였거든요. 여동생은 불어였는데, 여성 명사 남성 명사 구분이 되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너무나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그 사람들은 그러면 그걸 다 외우고 다니는거야?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저 태국에 여행갈 때 간단한 인삿말이라도 외우고 가려고 검색했는데, 거기는 화자가 여성인지 남성인지에 따라서 말이 달라지더라고요. 도대체 그게 달라야 하는 이유가 뭔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저는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이 해야 하는 인사를 외워서 갔습니다.

컵쿤카. 사와디카.

왜 인사를 하는데 제가 여자인지 남자인지에 따라 달라져야 할까요?

거리의화가 2023-09-14 17:47   좋아요 1 | URL
저도 젠더 구분을 하는 언어는 왜 그런가 궁금했는데 위에 적혀 있듯 고대 영어에서는 남성, 여성, 중성이 모두 있었다고, 그 흔적이 남은 언어들이 있는 거더라구요. 한국어가 젠더구분까지 해야 하는 언어였으면 무척 버거웠겠죠? 생각보다 외국인들이 한국어 어렵다고ㅎㅎㅎ 이건 반대말과 존대말 탓도 있는 것 같지만요^^

책읽는나무 2023-09-14 17: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독일어가 아닌 일본어 수업을 받긴 했었어서 독일어를 잘 모릅니다만...독일어에 남성형, 여성형 명사를 따로 외워야 한다는 것이 있는 걸 보구선 왜 굳이 이렇게 분류해 놓았을까? 그게 참 궁금했었고 좀 짜증이 났었어요. 안그래도 암기가 힘든데 성의 분류까지 들어가니 암기하기 정말 힘들겠구나! 싶더군요. 저런 암기들은 넘 싫어하는지라...ㅜㅜ

거리의화가 2023-09-14 17:49   좋아요 2 | URL
나무님도 일어 수업을 받으셨군요ㅎㅎ 저도 궁금했는데 이 책에서 알려줘서 해결이 되었네요. 암기도 암기인데 문제는 직업적 구분에서 애매해지는 듯 해요. 저자가 예를 들기도 했는데 남성 명사인 직업을 여성이 하게 된 경우 관련 언어를 쓸 때 좀 이상해져버리는~?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결국 젠더 문법을 당장 바꾸지 못한다면 그 내용에 중점을 두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희선 2023-09-16 0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러시아에서 여성과 남성 성을 다르게 쓰는 게 생각나네요 그건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지금 생각하니 러시아만 그런 게 아닐지도 모르겠군요 문법보다 어떤 말을 하느냐가 중요하겠습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3-09-16 21:30   좋아요 0 | URL
인도 유럽어과에 속하는 언어들 중 성을 구별해서 쓰는 언어들이 많다고 합니다^^; 독일어도 그 중 하나인데 전 세계의 1/4 정도가 이렇게 구분되어 있는 언어라는게 놀라웠습니다.
결국은 내용이 중요한 것 같아요^^
 



Hammurabi's Code

BC/BCE 1792년쯤 Hammurabi가 Babylon의 왕위를 계승했다. Babylon은 Kish 근처에 있는 도시였다. 그는 메소포타미아 남부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는데 이 지역을 Babylonia(after the city of Babylon)라고 한다. 함무라비는 자신의 제국이 법대로 통치되길 원했다. 

그는 법을 기록하여 돌에 새기고 sun-god(태양신)으로부터 온 법을 받아들이도록 했다. 이 법이 the Code of Hammurabi(함무라비 법)이다. 


함무라비 중 일부를 적어 보면

-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땅에서 나무를 잘라내면 벌금을 문다.

- 어떤 사람이 자신의 땅에 물주는 것에 무신경해서 홍수가 났을 때 다른 사람의 땅에 문제를 일으키면 망친 곡물만큼 벌금을 문다.

- 한 사람이 자기 아들을 집에서 내보내고 싶다면 재판관에게 가서 말한다. "나는 더 이상 아들과 살고 싶지 않아요." 재판관은 이유를 찾아내고 이유가 합당하지 않으면 그 남자는 자기 아들을 내보낼 수 없다.

- 아들이 아버지에게 죄를 지으면 아버지는 처음엔 그를 용서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2번째 그러면 아버지는 그를 내칠 수 있다.

- 도둑이 소, 양, 당나귀, 돼지, 염소를 훔치면 그 가치에 10배를 물어주어야 한다. 그가 만약 돈이 없으면 죽음으로 내놓아야 한다.

- 눈에는 눈, 이에는 이.

- 의사가 환자를 진료하다가 사망하면 의사의 손을 잘라버린다.

- 건축가가 집을 지었는데 집이 무너져 소유주가 죽으면 건축가는 죽음으로 내놓아야 한다.


함무라비는 독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신을 믿고 함무라비 법을 믿었다. 그는 전쟁으로 무너진 사원과 지구라트를 재건했다. 그 무렵 Babylon 사람들은 행성과 별의 움직임을 알아낼 수 있다고 믿었고 많은 시간을 들여 하늘을 연구했다. 그리고 모든 별자리를 알아내고 별과 행성 간의 차이를 알아냈다. 하늘을 본 Babylonians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지구가 태양을 한 번 도는 데 1년 걸리는 것도 알아냈다. 그들은 1년이 12달로 나뉘고 하루가 24시간, 1시간이 60분인 것을 알아낸 최초의 사람들이다. 


* wick

He says that his job as king is "to make justice appear in the land, to destroy the evil and the wicked so that the strong might not oppress the weak."


* An eye for an eye, and a tooth for a too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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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3-09-14 12: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버지, 아들 이야기는 좀 뜬금없다 싶은데 당시에 그런 문제가 많았었나 봅니다.
읽을 수록 익숙해지는 어휘들이 있어서 너무 좋아요!

거리의화가 2023-09-14 12:54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당시 아버지와 아들의 분쟁(?)이 많았나봅니다ㅋㅋㅋ
자주 나오는 단어들이 익숙해지도록 만드는 것이야말로 효과적인 교육법이란 생각이 들어요^^ 함달달 첫 책인데 재미없어하실까봐 걱정했는데 다들 쑥쑥 읽으시는 것 같아 좋습니다!ㅎㅎ

책읽는나무 2023-09-14 17: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함무라비가 무시무시한 왕이었다고 하던데...과연 그렇군요.
전문직종은 목을 내놓고 일을 했겠습니다.

거리의화가 2023-09-14 17:56   좋아요 1 | URL
살벌하죠?ㅎㅎ 옛날 한반도 고대 시절 ‘8조법‘이란 게 있었어요. 근데 거기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긴 있어요. 다른 사람 죽이면 목숨 내놔야 하고, 다른 사람에게 상해를 입히면 곡물로 배상한다던지 그치만 그 내용보다 함무라비 법이 더 자극적이긴 합니다!ㅎㅎ
 

신자유주의와 정체성 정치를 넘어 - <자유주의와 그 불만>_프랜시스 후쿠야마


이 책은 오늘날 우파 포퓰리즘과 좌파 급진주의의 도전으로 위기에 처한 자유주의를 진전시킬 방도는 없는가에 관해 담겨 있다.
자유주의는 현실에서 ‘법의 지배‘ 아래 정부의 힘을 제한하는 규칙들을 둔다. 그러나 그 자체만으로는 불완전하여 북유럽식 사회주의를 적용하여 자유민주주의로 보완하였다.
현 자유주의의 폐해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후쿠야마는 중용? 절제를 내세운다. 뻔한 말인 것 같지만 극단을 치닫고 있는 요즘 정치를 보면 새겨둘 만한 메시지가 아닌가 싶다.


니체는 "사실은 존재하지 않고 오직 해석만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결국 "아무것도 사실이 아니고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인식의 황무지‘를 열어놓는다. 더 나아가 니체는 인간의 ‘권력의지‘를 모든 가치를재는 척도로 제시했는데, 이런 상대주의적 태도가 극단화하면 권력 투쟁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결론에 이르고 만다. 그런 사태의 결과 하나가 극우파 정체성 정치의 부상이다. 백인 국가주의자들은 급진 좌파 - P137

의 인식론적 상대주의를 모방해 과학적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모든 것을 음모론으로 몰아가며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만 사실로 받아들인다.
이런 잘못된 인식 위에서 백인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유색인들이 빼앗을것이라는 공포 속에 자유주의 사회를 거부한다. 객관적 기준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권력의지‘의 싸움이 되는 전쟁 상태로 내달리는 것이다.
자유주의가 낳은 좌우의 극단주의는 자유주의의 기반 자체를 무너뜨리는 자기파멸적인 성격을 지녔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후쿠야마는자유주의가 지켜야 할 마지막 원칙으로 고대 그리스 금언 ‘메덴 아간(meden agan) 곧 ‘무슨 일이든 도를 넘지 말라‘를 제시한다.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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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9-14 10: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절제 못하는 권력의 폭주를 진행형
으로 보고 있으려니 참으로 갑갑합
니다.

신자유주의의 시조새 양반이 하시는
말씀은 굳이 들으려고 하지 않으시겠
죠.

거리의화가 2023-09-14 11:25   좋아요 2 | URL
이 책에 많은 인물과 책들이 소개되는데 오늘 읽은 부분 중에는 사실 딱히 와 닿는 책들은 없었어요. 어쨌든 지금 이 현실에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이 너무 심각해서 고민이 큽니다. 권력의 폭주를 막을 장치가 없는가 여러 모로 머리가 아픈 시점이네요.
 

[ 머리털 이야기 ]
조선 말 ‘단발령’을 생각했다. 머리털을 고수해야 한다는 유교적 신념을 가진 사회에서 머리털을 자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당연히 이는 반발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이는 을미의병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개혁’이란 그런 면에서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생각해보게 된다. 비단 이는 머리 자르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닐 것이며 근본적인 사회적 이념을 흔들어놓는다는 생각으로 비쳤을 것이다.

[ 풍파 ]
아이의 무게를 달아 이름을 짓다니… 이것도 노동력 때문인걸까. 가벼우면 그만큼 힘을 못쓰니 덜 취급했던 것처럼. 나는 갑자기 이 에피소드를 보면서 어릴 적 남자를 낫기 위해 여자들 이름에 남자 이름을 갖다 붙이던 게 생각났다. ‘일남이, 이남이, 삼남이…’ 이런 식으로, 이런 연속극도 있었지.
구근 할머니의 계속된 불평은 나이는 들고 주변은 본인 마음처럼 안 되는 것에서의 서운함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역시 할머니의 불평을 들어야 하는 상대의 답답함과 짜증이 먼저 생각나는 것 같다.

[ 고향 ]
어릴 때 함께 생활했던 친구를 나중에 만나 계급의 차이로 멀어지게 되었다. 이게 어디 근대 중국의 일 뿐일까. 현대에도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계급은 만들어지고 보이지 않는 차이가 존재한다. 상위 계급은 아래를 내려다보고 무시하며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기 가지를 쳐낸다. 오늘 당장 먹을 것이 있었으면 하는 희망을 하진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편 다른 한 쪽에서는 거대한 꿈이 희망일 수도 있다. 이런 이들이 길 위에 존재한다.

"지금 자네들, 이상주의자들은 어디서고 여자도 머리를 잘라야 한다‘느니 하고 떠들지만, 한 푼의 소득도 없이 괴로움을 당하는 많은 사람들만 만들어 냈어!
지금 이미 머리털을 잘라 버린 여자는 그것 때문에 학교에 진학할 수도 없거나, 혹은 학교에서 제적당하기도 하지 않았는가!
개혁을 한다고? 무기는 어디 있지? 일하며 배운다고? 공장이어디에 있어?
조용히 지내다 시집가서 며느리 노릇이나 하는 거야. 모든 것을 잊는 게 바로 행복일세. 만약 그녀들이 평등이니 자유니 하는 말들을 기억하고 있으면 평생 고통스러울 뿐이야!

아아, 조물주의 채찍이 중국의 등판 위에 내려쳐지지 않는 한,
중국은 영원히 이런 식의 중국이지, 결코 스스로는 머리카락 한올조차 바꾸려 하지 않을 걸세.
자네들의 입안에 독을 뿜는 이빨이 없는데도 어쩌자고 이마 위에 ‘독사‘ 라는 두 큰 글자를 써 붙이고 거지들을 끌어들여 맞아죽으려 하는가?" - [머리털 이야기] - P82

이 마을의 관습은 좀 별난 데가 있었다.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저울에 아이 무게를 달아서 그 근수로 아이의 이름 짓기를 좋아하였다. 구근 할머니는 쉰 살을 경축하는 생일잔치를 치르고 난 후부터는 점점 불평객으로 변했다. 그녀가 젊었을 때에는 날씨가 지금처럼 이렇게 덥지 않았다느니, 콩도 지금처럼 이렇게 딱딱하지않았다느니, 아무튼 지금 세상은 틀려먹었다고 하면서 언제나 투덜거렸다. 하물며 육근은 그녀의 증조할아버지보다 세 근이나 모자라고, 또 그녀의 아버지 칠근보다도 한 근이 덜 나가니 이것은 정말 움질일 수 없는 실례인 것이다. 그래서 할머니는 힘주어서 말하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대대로 못해져 간다니까!" [풍파] - P85

얼굴에는 숱한 주름살이 새겨져 있었지만, 마치 석상처럼 전혀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아마도 그저 괴롭기만 한데, 그것을 말로표현하려 해도 표현할 수가 없는 듯,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더니, 담뱃대를 집어 들고 묵묵히 담배를 피웠다.
어머니가 그에게 물어서 그가 집안일이 바빠 내일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또 점심도 먹지 않았다고 하여 부엌에 가서 손수 밥을 볶아 먹도록 일렀다.
그가 나간 뒤, 어머니와 나는 탄식을 하며 그가 사는 형편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많은 아이들, 흉작, 가혹한 세금, 군인, 도적, 관리, 향신(鄕神) 그런 것들이 한데 어울려 그를 괴롭혀 마치 장승처럼 만들어 버린 것이다. - [고향] - P109

나는 희망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무서워졌다. 룬투가 향로와 촛대를 달라고 했을 때, 나는 마음속으로 몰래 그를 비웃었다. 그는 줄곧 우상을 숭배하고, 언제라도 잊지 못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말하는 희망 역시 내 스스로의손으로 만들어낸 우상이 아닌가? 단지 그의 소망이 현실에 아주가까운 것이라면, 나의 소망은 막연하고 아득하다는 것뿐이다.
몽롱한 나의 눈앞에 바닷가의 파아란 모래사장이 떠올라 왔다.
위로는 짙은 쪽빛 하늘에 황금빛 보름달이 걸려 있다. - [고향] - P112

나는 생각했다. 희망이란 것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사실 땅위에는 본래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곧 길이된 것이다. - [고향]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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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9-14 1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머리는 자르면 안되고 수염은 됐을까요?
엉뚱하지만,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에서는 계급의 존재를 부
인하고 있지만, 어느 아파트에 그리고
어느 동네에 사느냐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있는 캐피탈스리틱한 클래스
제도가 내뿜는 현실감에 망연해집니다.

거리의화가 2023-09-14 11:15   좋아요 0 | URL
수염도 사실 털과인데 좀 다르게 취급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청나라 사람도 수염은 내버려둔 걸 보면!

맞습니다. 동네도 그렇고 아파트가 자가냐 임대냐에 따라도 다르게 취급하잖아요. 돈이 최고인 세상이 되어서인지 오히려 계급 불평등은 더 심화된 것 같습니다.
 

20세기 중반 유럽 대륙의 중앙부에서, 나치 독일과 소비에트 러시아는 약 1400만 명의 사람을 살육했다. 그 희생자들이 쓰러져간 땅, 블러드랜드bloodlands는 폴란드 중부에서 러시아 서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 연안국들에 이른다. 스탈린주의와 국가사회주의가 세력을 굳히던 시기(1933~1938), 독소의 합동 폴란드 침공(1939~1941), 독소전쟁(1941~1945) 동안, 사상 초유의 대학살이 이들 지역을 덮쳤다. 희생자들은 주로 유대인,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 폴란드인, 러시아인, 발트 연안국인들로, 그 땅에 살고 있던 주민들이었다.

20세기의 공포는 집단수용소에 도사리고 있다고 여겨져왔다. 그러나 국가사회주의와 스탈린주의의 희생자 대다수를 낳은 곳은 집단수용소가 아니다. 대량학살의 장소와 방식에 대한 이런 잘못된 이해는 우리가 20세기의 공포를 보는 시각을 오도한다.

이 연구는 나치와 소련 체제를 하나로, 유대인사와 유럽사를 하나로, 각 국민의 역사를 하나로 묶는다. 희생자와 집행자의 참모습을 드러낸다. 그 만행에 개입된 이데올로기와 실행 계획을 따지고, 그런 만행이 벌어지게 만든 체제와 사회를 분석한다. 이것은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지도자들이 내린 명령으로 살육당한 사람들의 역사다. 희생자들의 고향 땅은 베를린과 모스크바 사이에 있었고, 그 땅은 히틀러와 스탈린이 집권한 다음 온통 피로 얼룩지고 말았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제1차 세계대전이 서부 전선에서의 독일의 패배를, 그리고 독일 내에서의 노동자 혁명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중부와 서부 유럽의 좀더 산업화된 땅에서 곧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리라는 생각으로 그들과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러시아 혁명을 정당화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농민과 유목민이 섞여 있는 다문화적 국가에서는 프로그램상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마르크스는 혁명이 산업화된 곳에서 먼저 일어날 것이라고 여겼으며, 농민 문제와 민족 문제에는 관심을 띄엄띄엄 기울였을 뿐이다. 이제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농민과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은 러시아어를 말하는 도시민들이 대부분인 노동계급을 위해 어떻게든 사회주의를 건설할 것을 요구받았다. 볼셰비키는 그들이 물려받은 전산업사회를 산업사회로 뒤바꿔놓는다는, 사상 유례없는 과업을 짊어졌다. 일단 산업사회가 되고 나서야 그들의 신조대로 노동계급을 옹호할 수 있을 테니까.

레닌의 국가는 아직 스스로 이르지 않고 있던 경제 혁명을 위한 정치적 수단을 제공했다. 그의 소비에트 정치는 마르크스 주의가 민족을 부정함에도 불구하고 민족들을 인정했으며, 소비에트 경제는 공산주의가 집단 소유권을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장을 용인했다. 1924년 1월에 레닌이 죽었을 때, 이 임시적인 타협을 언제 어떻게 끝내야 2차 혁명을 추동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란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대공황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에서 비롯된 정치적 변화들(자유 시장, 의회 정치, 민족 국가)에 불신을 심어주는 듯했다. 시장은 재난을 불러왔고, 의회는 아무런 해답을 주지 못했으며, 민족국가는 국민을 재앙에서 지킬 힘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나치와 소련은 누가 이 대공황의 주범인가에 대한 설득력 있는 주장을 폈고(유대인 자본가들 또는 그냥 자본가들), 정치 경제에 대해 완전히 급진적인 해법도 있었다. 나치와 소련은 전후 질서를 법적, 정치적 형태로 거부했을 뿐 아니라 그 사회경제적 토대에도 의문을 품었다. 그들은 전후 유럽의 사회경제적 뿌리에 손을 뻗고, 토지를 일구는 남녀의 삶과 역할을 재고했다.

서로 그토록 다른 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와 스탈린은 문제의 핵심 중 하나가 농업 부문에 있으며 그 해결책은 과감한 국가 개입에 있다는 데서 의견이 일치했다.

누구 못지않게 정치를 사적으로 풀었던 스탈린은 우크라이나 기근 또한 사적인 차원에서 접근했다. 그가 먼저 보인 충동적 행동이면서 그 뒤로도 바꾸지 않았던 방침은 우크라이나 농민의 굶주림을 우크라이나 공산당 당원의 배신으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그탈린은 자신의 집단화 정책이 비난받을 가능성은 허용할 수가 없었다.

징발이 실패했다는 보고가 크렘린에 전달되자, 스탈린의 아내는 자살을 결심한다. 그녀는 10월 혁명 15주년 기념식 이튿날인 1932년 11월 8일 심장에 총을 쏘았다. 이 일이 스탈린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정확하게 알 순 없지만, 충격을 받은 것만은 확실하다. 그 역시 자살하겠다고 부르짖었기 때문이다.

굶주림 때문에 부풀어 오른 배를 정치적 저항으로 해석해야 했던 그들은 반체제 분자들이 사회주의를 몹시 싫어한 나머지 가족을 고의로 죽게 한다는 끔찍한 결론을 내렸다. 그들의 아들딸, 아버지와 어머니의 뒤틀린 시체는 사회주의 붕괴 음모를 감추는 허울인 것이었다. 그들은 심지어 스스로를 굶주리게 함으로써 사회주의를 해치려는 음모를 수행하기도 했다. 도시의 젊은 우크라이나 공산주의자들은 굶주리는 자들, 그들은 "목숨을 바쳐 우리의 낙관주의를 망치려 드는" 인민의 적이라고 교육받았다.

가족을 파탄 내고 신세대가 기성세대와 적대시하도록 한 것은 굶주림만큼이나 정치였다. 공산당청년회의 회원들은 수색단에 참여해 식량을 징발했다. 그리고 개척 농가에서 살던 더 어린 아이들은 "당이 가족 안에 심어놓은 당의 눈과 귀" 노릇을 했다. 더 건강한 농민의 자제들은 굶주림에 못 이긴 곡물 ‘도둑질’을 막기 위해 파수를 봤다. 50여 만 명의 미성년자 및 십대 청소년들이 감시탑에 서서 어른들을 감시하는 모습이 1933년 여름 소련령 우크라이나의 광경이었다. 모든 아이는 자기 부모에 대해 보고를 올려야 했다.

굶주림은 식인 행위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목구멍으로 넘길 곡식 낟알이 거의 없거나 아예 없어지자, 우크라이나에도 식인 행위가 찾아왔다. 입에 댈 수 있는 게 사람의 살코기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인육을 사고 파는 블랙마켓이 열렸다. 인육은 심지어 공식 경제로도 편입되었다. 경찰은 인육 판매자를 사찰했고, 국가 기구는 사람을 죽여서 고기를 잘라 파는 장사치들을 밀착 감시하고 있었다.

소련 러시아에서 온 재정착민들이 그들의 집과 마을을 차지했는데, 그들이 처음 해야 했던 일들은 이전 주민들의 시체를 내다 버리는 것이었다. 대개는 이미 썩을 대로 썩어버린 시체들이 그들의 손안에서 흐물흐물 허물어져내렸다. 어떤 때에는 새로 입주하러 온 사람들이 아무리 박박 닦아내고 칠을 해봐도 집에 배어든 악취를 없앨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었지만, 눌러앉는 사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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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9-14 1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 빌려서 읽어 보려고
하다가 번역투가 너무 낯설고
이물감이 들어서 포기한 기억
이 납니다.

거리의화가 2023-09-14 11:18   좋아요 1 | URL
번역투가 확실히 있어요. 그래서 문장이 부드럽게 읽히지 않아서 반복해서 읽는 경우도 생깁니다. 저는 이북으로 읽고 있는데 긴 책이라 다 읽을지 조금 더 고민해보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