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스 칸의 사망을 둘러싼 여러 가지 이야기와는 달리, 그가 유목민의 게르에서 죽었다는 사실, 즉 그가 태어난 곳과 크게 다르지 않은환경에서 죽었다는 사실은 칭기스칸이 자신의 민족의 전통적 생활방식을 보존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음을 보여준다. 자기 민족의 전통적 생활방식을 보존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인간사회 전체를 오히려 바꾸어 - P18

놓았으니, 이것이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칭기스칸의 병사들은 죽은 칸의 주검을 몽골 고향으로 옮겨 비밀리에 묻었다. 그를 묻은 자리에는 능(陵)도 없고 사원이나 피라미드는커녕 그가 누워 있다는 사실을알려주는 작은 묘비조차 세우지 않았다. 몽골인의 믿음에 따르면 죽은자의 몸은 평화롭게 놓아두면 그만이었으며 굳이 기념비를 세울 필요가없었다. 영혼이 이미 몸을 떠났기 때문이다. 영혼은 여기에 머물며 살게된다. 칭기스칸은 매장되어 자신이 나왔던 몽골의 광대한 풍경 속으로조용히 사라졌다. - P19

『몽골 비사』에 따르면 테무진은 자신의 작은 씨족의 지도자로 평생을 보내고 싶어했던 것 같지만, 부족들의 공격과 반격이 이어지는 주변의 어지러운 세계는 그런 목가적인 삶을 허락하지 않았다.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초원의 부족들은 서로 무자비하게 물어뜯고 있었다. 과거의 행동에 대한 기억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부족 내의 어느 한 가족이 피해를입으면 그것이 복수의 근거가 되었고,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상대를 습격할 수 있는 구실이 되었다. 테무진의 집단이 아무리 조용히 있고 싶어도, 이 소란스러운 세계에서 아무런 접촉 없이 눈에 띄지 않고 살아갈수가 없었다. - P76

몽골 부족 전체는 군대라는 수단에 의해 통일되었다. 이런 새로운체제에서는 부족의 모든 구성원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어느 정도 공적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군인으로 복무할 수 없으면 일주일 중 하루 정도에 해당하는 시간을 공적인 일이나 칸을 섬기는 일에 바쳐야 했다. 여기에는 전사의 가축을 돌보고, 연료로 쓸 똥을 모으고, 조리를 하고, 모전을 만들고, 무기를 수리하는 일, 심지어 군대를 위해 노래를 하거나 연예활동을 하는 일도 포함되었다. 새로운 조직에서는 모든 사람이 같은뼈에 속했다. 어린 시절 낮은 출신 성분 때문에 여러 차례 벽에 부딪혔던 테무진이 검은 뼈와 흰 뼈 사이의 구별을 폐지해버린 것이다. 이제그의 무리는 모두 하나의 통일된 민족 구성원이 되었다.
테무진이 십진법에 따른 조직을 채택한 경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역사적 추측이 있다. 이전의 투르크 부족들 가운데도 십진법에 기초한비슷한 군사조직을 갖춘 예가 있었다. 어쩌면 테무진은 그들에게서 이체제를 빌려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테무진은 이 체제를 전쟁을 위한군사전술로 이용했을 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영구적인 구조로 채택했다. - P106

테무진은 군대를 재조직한 뒤 언뜻 작아 보이는 개혁을 한 가지 더시행했다. 본영은 케룰렌 강변의 아바르가에 둔 채 성산 부르칸 칼둔 주위의 오논, 케룰렌, 툴라 강들의 원류에 자리잡은 몽골 부족의 고향-테무진이 메르키트로부터 피신해 있던 곳이기도 하다 ㅡ을 폐쇄 구역으로 설정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아무도 세 강의 원류에는 설영을 하지 못하게 하라." 테무진은 그렇게 명령했다. 그 명령으로 몽골족의고향은 왕실 바깥의 외부인들은 접근할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왕실 구성원들은 200년 동안 이곳에 죽은 자들을 묻고, 가족 행사를 열고, 외부인들을 배제한 채 가족회의를 했다. 몽골족은 그 전에도 세 강의 발원지에있는 이 산을 그들의 고향으로 여겼지만, 새로운 법이 나오면서 이곳은훗날 몽골 제국의 은밀한 의식이 열리는 중심이 되었다. 부르칸칼둔 주위의 땅은 이제 몽골족의 우주에서 공식적으로 신성한 장소의 자리를차지하여, 땅의 중심을 넘어서서 우주의 중심이 되었다. - P107

몽골의 공적인 행사는 방문객이나 연대기 기록자에게 뚜렷한 인상을 남겼으며, 그들은 이것을 자세하게 묘사하기도 했다. 현존하는 가장충실한 이야기는 17세기 프랑스 전기작가 프랑수아 프티 드 라 크루아가 작성한 것이다. 그는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페르시아와 투르크의 문건들을 참고할 수 있었다. 프티에 따르면 칭기스칸의 부하들은 "그를땅에 펼쳐놓은 검은 모전 양탄자 위에 올려놓았다. 백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은 칭기스칸에게 큰 소리로 백성의 기쁨을 알렸다." 이 사람은 "칭기스칸에게 어떤 권력이든 그것은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며, 정의롭게 백성을 잘 다스린다면 신이 그의 계획을 축복하고 성사시킬 것이지만, 반대로 권력을 남용하면 비참해질 것"이라고 훈계했다. - P123

칭기스칸은 시베리아 부족과 위구르인에게까지 친족 관계를 확대했다. 이것은 단순한 통치자 집안 사이의 동맹이 아니었다. 칭기스칸전체 부족이나 민족을 통째로 가족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제국에 받아들였다. 부족들의 정치적 언어로 볼 때, 이민족 칸에게 친족 관계를 허락한다는 것은 그 민족 전체와 가족적 유대를 맺겠다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친족이라는 용어는 일종의 시민권을 가리키는 말로 확장되었다. 칭기스칸이 그 뒤로도 이 용어를 계속 이용하고확대하면서, 실제로 이것은 일종의 보편적 시민권을 가리키게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나 무슬림에 속한 민족의 경우처럼 공동의 종교에 바탕을둔 것도 아니었고, 전통적인 부족 문화의 경우처럼 생물학적 관계에 바탕을 둔 것도 아니었다. 몽골의 시민권은 단순히 신종(臣從)의 의무, 승인, 의리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몽골 제국 내의 모든비몽골 왕국들은 ‘카리‘ 라고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검다는 말에서 - P136

나온 것으로 혼인으로 맺어진 관계를 뜻하는 말이었다. 위구르와 고려같은 특별한 민족이나 투르크족 가운데 특별한 무리는 몽골족과 인척이되는 영광을 누렸지만, 몽골인이 ‘검은 친족‘ 이외의 사람들과 혼인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 P137

초원지대를 다스리는 주르첸의 권력은 군사적인 힘에서 나온다기보다는 중국 전역의 작업장과 도시로부터 목자들에게 흘러드는 물자의확고한 통제에서 나왔다. 초원지대의 칸의 지위는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교역 물자를 꾸준하게 공급하는 능력에 달려 있었다. 전장의 승리는 곧 패자의 재물을 약탈할 기회였기 때문에 이 두 가지 능력은 보통 - P141

일치했다. 그러나 칭기스 칸이 모든 부족을 이기고 통일을 해내는 전례없는 업적을 이룩해내자 그의 의도와 관계없이 약탈은 끝이 났고 더불어 물자의 흐름도 막히게 되었다. 모든 제조품은 남부에서 나왔기 때문에 칭기스칸은 남부의 통치자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신종의 의무를 약속하고 봉신으로서 물자를 받거나 아니면 그들을 공격하여 물자를 빼앗아야 했다. - P142

현대의 아프가니스탄의 산맥으로부터 흑해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은 투르크족 술탄 무함마드 2세가 통치하고 있었으며, 그의 제국은 호라즘이라고 불렀다. 칭기스칸은 이곳에서 나는 이국적인 상품들을 원했으며, 그 목적을 이루기위해 이 머나먼 땅의 술탄과 교역 상대로서 동반자 관계를 맺을 수 있기를 바랐다. - P171

칭기스칸은 주민 살육자라기보다는 도시 파괴자라고 묘사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는 복수를 하거나 공포심을 자아내는 목적 외에전략적인 목적에서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 P186

그는 자식들에게 나라를 정복하는 것은 군대를 정복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의 가장 중요한 교훈으로 꼽힌다. 군대는 전술과 전력만 우월하면 정복할 수 있다. 그러나 나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야만 정복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약간 이상적인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 뒤에 훨씬 더 실용적인 조언이 나온다. 몽골 제국은 하나지만 그 신민이 하나로 통일되는 것은 결코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호수 - P195

건너편에서 정복한 사람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통치해야 한다." 그러나 그의 아들과 후계자들은 그의 다른 많은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이 가르침도 무시해버렸다. - P196

칭기스 칸의 죽음을 가장 훌륭하게 묘사한 사람으로는 로마인을 연구하면서 제국과 정복의 역사를 파헤쳤던 18세기 영국의 위대한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간결하게 말했다. 칭기스칸은 "천수를 누리고 영광이 최고에 이른 상태에서 죽었으 - P202

며, 마지막 숨을 내쉬면서 자식들에게 중국 제국 정복을 완수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몽골인이 칭기스 칸의 바람과 명령을 이루려면 할일이 아직 많았다. - P203

그들은 중앙아시아, 러시아, 우크라이나, 폴란드, 헝가리의 초원지대를 따라 이동했다. 초원이 끝나자 몽골군도 발을 멈추었다. 전사 한 명당 말이 다섯 마리였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쓸 만한목초지가 필요했다. 숲, 강, 작물과 도랑, 산울타리와 나무 방책이 있는경작지에서 장애물을 헤치며 느릿느릿 나아가야 하는 경우에는 속도,
기동성, 기습 능력이라는 그들의 장점이 모두 사라졌다. 부드러운 고랑은 말에게는 불안정한 바닥이었다. 밭이 시작되는 곳에서 초원지대의건조한 기후는 해안지대의 습한 기후로 바뀌었다. 이곳에서는 습기 때문에 몽골 활의 힘과 정확성이 사라졌다. - P238

뭉케는 대칸 선출을 축하하여 이날 하루 모든 사람이 일을 쉬고 짐승도 일을 시키거나 짐을 지우지 말라고 명령했다. 땅에는 천막을 칠말뚝을 박지 말고, 물은 더럽히지 말아야 했다. 야생짐승을 잡아도 안되고, 잔치를 위해 짐승을 잡을 때도 성스러운 땅에 피를 떨어뜨리지말아야 했다. 성스러운 날이 지나자 일주일 동안 잔치가 열렸다. 매일모인 손님들은 말이나 소 300마리, 양 3000마리, 수레 2000대를 채울만한 아이라크 - 암말 젖을 발효시켜 만든, 몽골인이 좋아하는 알코올음료(마유주馬乳酒)를 먹어치웠다.
이 행사는 소르칵타니의 필생의 사업의 절정으로, 어떤 의미에서는뭉케보다 그녀를 위한 것이었다. 칭기스칸자신은 비교적 약하고, 술을좋아하고, 자기중심적인 아들들만 낳았지만, 소르칵타니가 낳아서 훈련시킨 네 아들은 모두 역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기게 된다. 그녀의 아들들은 모두 칸이었다. 또 뭉케에 이어 아릭 부케, 쿠빌라이가 대한 자리에오르며, 나머지 아들 훌레구는 페르시아의 일칸이 되어 그곳에서 독자적인 왕조를 창건한다. 그녀의 아들들은 페르시아, 바그다드, 시리아, 터키를 모두 정복하여 제국의 규모를 최대로 키운다. 그들은 남쪽으로는 송나라를 정복하고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까지 밀고 들어간다. 또두려움을 불러일으키던 아사신(Assassins)" 일파를 없애고 무슬림의 칼리파를 처형한다. - P249

몽골 제국은 뭉케 칸 치세에 가장 넓은 땅을 차지했다. 뭉케는 칭기스 칸의 후손 가운데 몽골 제국 전체로부터 대칸으로 인정받은 마지막칸이었다. 뭉케 이후에도 많은 칸들이 제국의 여러 지역을 다스렸고 그들 가운데 다수가 칭기스칸의 상속자로서 대한 칭호를 차지하겠다고 - P276

나섰다. 그러나 다른 분파나 가문 전체가 인정한 대칸은 한 사람도 없었다. 뭉케 칸은 제2차 몽골 세계대전을 시작했지만 마무리하지는 못했다. 이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남기지 않고 그냥 제풀에 사그라졌다. - P277

몽골 제국은 이제 별도의 정부를 갖춘 네 개의 주요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쿠빌라이는 중국, 티베트, 만주, 고려, 몽골 동부를 다스렸지만, 몽골과 만주에서는 늘 문제가발생했다. 킵착칸국(황금 오르도에 세운 나라)은 동유럽의 슬라브 국가들을 다스렸으며, 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쿠빌라이를 대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터키에 이르기까지 훌레구와 그의 후손이다스리는 땅은 ‘봉신의 제국‘을 뜻하는 일 칸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수백 년간 아랍의 지배를 통해 페르시아 문화가 다시 나타나면서 근대 이란의 기초가 놓이게 되었다. 가장 전통적인 몽골인은 중앙의 초원지대를 차지했다. 이곳은 모굴리스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으며, 지금으로 치자면 북쪽의 카자흐스탄과 시베리아로부터 중앙아시아의 투르키스탄을 가로질러 남쪽의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지역을 포말했다. 이 지역은 한동안 우구데이와 투레게네의 손자 카이두 밑에서통일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부하라에서 통치하면서 쿠빌라이 칸의 권력과 대등하게 맞섰다. 그러나 이 지역은 이후 수백 년 동안 여러 차례분할되었다. - P280

몽골은 제국을 정복하면서 전쟁 방법에서 혁명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보편적 문화와 세계체제의 핵을 만들어냈다. 이 새로운 지구문화는몽골 제국의 종언 이후에도 오랫동안 발전을 거듭했으며, 이후 수백 년동안 근대세계체제의 기반이 되었다. 이 문화에는 원래 몽골이 강조했던 자유교역, 자유로운 교통, 지식 공유, 세속 정치, 여러 종교의 공존,
국제법, 치외법권 등이 고스란히 살아 있었다.
유럽은 몽골의 직접 지배를 받은 적은 없지만 여러 면에서 몽골의세계체제로부터 가장 많은 이득을 얻었다. 유럽인은 몽골 정복이라는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교역, 기술 이전, ‘세계 인식의 대전환‘에 따른모든 혜택을 입었다. 몽골은 헝가리와 독일에서 기사를 죽였지만 도시를 파괴하거나 점령하지는 않았다. 로마 멸망 이후 문명의 주류와 차단되었던 유럽인은 열심히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고, 새 옷을 입고, 새 음악을 듣고, 새 음식을 먹었다. 그들의 생활수준은 거의 모든 면에서 급속하게 높아졌다. - P333

페스트, 상업체제의 붕괴, 반란 이후 몽골 제국은 무장해제되었음에도, 반역자들조차 옛 제국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바라지 않았던 것 같다. 새로운 통치자들은 구체제의 장식과 환상에 매달려 자신들의 새로운 통치를 정당화했다. 내부구조가 무너지고 몽골인이 모두 사라지고난 뒤에도 몽골 제국의 외관은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 P355

르네상스와 몽골 제국의 시대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칭기스칸은 인간 역사에서 가장 낮은 수준으로까지 격하되었다. 근대 유럽은 새로 발견한 식민지 정복의 힘과 스스로 내세운 세계 지배의 임무 때문에 아시아의 정복자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기독교 식민주의자나 공산주의 인민위원을 가릴 것 없이 유럽인은 아시아인을 칭기스칸과 몽골의 무리가 남긴 유산, 즉 야만적 독재와 처참한 미개 상태로부터 구해내려 했다. 몽골을 아시아 문제의 원천으로 간주하고 이것을 일본에서부터 인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몽골인을 정복해야 할 근거로 삼는 태도는유럽의 정복과 식민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칭기스칸과 몽골의 잔혹성은 문명화된 잉글랜드, 러시아, 프랑스의식민주의자들이 아시아를 통치할 수밖에 없는 구실이 되었던 것이다. - P365

20세기 대부분의 기간 내내 러시아와 중국은 칭기스칸의 고향을 나누어 갖는 협정을 유지해왔다. 중국은 고비 사막의 남부인 내몽골을 차지하고, 소련은 나머지 반, 즉 고비 사막 북쪽의 외몽골을 차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소련은 몽골을 그들과 중국 사이의 완충지대로 삼아 비워두었다. 영국이 19세기 인도의 마지막 무굴 황제의 아들과 손자들을 처형했듯이, 소련은 20세기 몽골에 남아 있던 칭기스칸의 후손을 숙청했다. - P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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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을 보기 시작했다. 1부는 긴가 민가했는데 2부는 '어라?'했고 이후는 좀 나아지고 있는 것 같다. 다만 총 32부작이여서 전개가 빠른지라 마치 영상의 skip 버튼을 누른 듯하여서 내용상의 풍성함은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아 아쉽다. 그러고 보면 미디어 환경이 많이 바뀌어서 예전의 사극 200부작 같은 것은 기대할 수가 없겠지. 

의외로 거란 황제인 야율융서나 소배압 장군을 영상으로 보니 앞으로 나올 분량에서 당시의 거란 내부 사정을 조금은 엿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감이 커졌다.




이미 4부까지 방영이 되었으나 나는 아직 3부까지만 본 관계로 본 내용을 바탕으로 고려와 거란 사이의 전쟁이 일어나는 배경을 기록을 통해서 찾아보기로 했다. 


1, 2부에서는 목종과 천추태후의 갈등, 목종과 김치양(이때는 ‘우복야’ 관직에 올라 있었다)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다. 극 배경은 목종 12년 상황이므로 그가 내려올 날이 머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목종의 재위 기간은 총 13년이다).


1부에는 목종이 유행간과 유충정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천추태후의 섭정을 떠나 이미 친정을 하고 있었음에도 중요한 결정은 대신들에게 알아서 하라고 미루는 등 정사와는 거리를 둔 모습을 보인다. 


국경 지대에는 계속 긴장이 감돌았지만 궁중에서는 나태와 방탕과 음모가 판을 쳤다. 목종은 성종의 아우로 왕위에 올랐으나 성격이 매우 나약했다. 그는 태후 황보씨(경종의 후비)와 신하들에게 끌려다니면서 스스로는 아무 일도 처리하지 못했다. 그런 탓인지 근시(近侍)를 총애하여 터무니없이 요직을 주기도 하고 이들을 침실로 끌어들여 남색을 즐기기도 하였다. <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5권 P169 >


김치양은 중의 신분으로 궁중에 출입하며 과부 황보씨를 범하여서 귀양을 갔다 목종의 즉위 후 천추태후의 명으로 궁중에 복귀하였고 ‘우복야’라는 고위 관직에 오른다. 그는 뇌물 등 각종 수단을 통해 재물을 불려 집이 300여 칸이나 되었고 집안에 누각과 연못, 정자, 동산을 지어 화려하기가 궁궐과 같았다. 3부에서 김치양과 목종의 극단으로 치닫는 모습이 나오는데 나는 배경에 눈이 갈 수 밖에 없었는데 세트장이여서 단지 좁은 범위를 보여줄 뿐이었지만 300 칸이 넘는 집은 대체 얼마나 넓고 번쩍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었다. 


1009년(목종 12년) 목종과 천추태후의 갈등은 극에 달해 있었다. 특히 태후가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태자를 세우려 하며 문제가 커진다. 드라마 상에서 태조의 핏줄인 대량원군(훗날 현종)을 둘러싸고 태후는 죽이려 하고 목종은 보호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두 사람은 열두 살짜리 대량원군의 머리를 강제로 깎게 하고 출가를 시켰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되어 태후는 사람을 보내 절에서 외롭게 사는 대량원군을 죽이려고 하였다. 이 사실을 눈치챈 그 절의 중이 밀실을 만들어 끝까지 대량원군을 보호했다. <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5권 P171 >


이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는 관련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긴 김치양에 대한 기록도 거의 없는 마당에 이런 내용이 적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고려사는 조선 시대에 편찬된 역사서이므로 조선 건립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했을테니 감안하고 봐야할 것이다. 

다행히 다른 책에서 관련 내용이 있었는데 밀실 내용을 드라마에서도 보여줘서 깜짝 놀랐다. 


2부를 보면서 흥미로웠던 장면이 있었는데 관련 기록이 고려사에 있었다. 목종은 스스로 자초한 것도 있지만 그럼에도 정치력이나 인품 등에서 왜곡되거나 과장, 축소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임신 왕이 상정전(詳政殿)에 임어(臨御)하여 관등(觀燈)을 하고 있는데, 대부(大府)의 기름 창고에 불이 나고 번져서 천추전(千秋殿)을 태웠다. 왕이 궁궐 건물과 창고가 잿더미가 된 것을 보고 비탄해 하다가 병이 나서 정무(政務)를 보지 않았다. < 고려사 1009년 1월 16일(음) 임신(壬申) , 1009년 2월 13일(양) >


극에서는 목종이 백성들을 모으고 관등회를 열었다가 화재가 나 도망가는 상황에서 “도망치거라!”를 외치고 백성을 일으켜 세우는 장면이 나온다. 이 불은 김치양의 주도 하에, 태후의 묵인 하에 이루어지는데 기록으로는 보다시피 지극히 건조하게 되어 있다. '비탄해 하다'라는 표현만으로는 일어난 상황만 안타까웠던 것인지 정황을 알기 쉽지 않다. 다행히 다른 책에서 발견했다. 


이즈음 태후가 거처하는 천추궁에 불이 났다. 불길은 사정 없이 다른 건물과 창고에까지 옮겨 붙었다. 심약한 임금은 불에 놀라고 슬퍼한 끝에 병이 나 드러눕고 말았다. 불길이 잡히자 조정에서는 궁문을 닫고 승려들을 불러들여 구명도량(救命道揚)을 설치하여 불에 타죽은 사람의 시체를 거두고 부상자를 가려내 구호하도록 했다. 이 화재로 궁중은 불안에 떨었고 인심은 더욱 흉흉하였다. <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5권 P171 >


극 화면상으로는 왕이 백성을 직접 구제한 것 같지는 않으나 어쨌든 후속 조치를 한 것으로 보인다. 천추태후는 김치양과 합작하여 자신의 아이를 태자로 세우려 했다가 일이 지나치게 커졌다. 과연 천추태후가 김치양과 이 일로 결별했을까. 김치양은 자신의 아이를 위해(본인의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욕심에) 태후를 압박했고 그런 그의 모습에 실망하는데 글쎄… 이는 극화를 시키기 위함이 아니였을까. 다만 둘 사이에는 둘이 있었기에 함부로 움직이기 어려웠다는 것이 더 맞아 보인다. 


목종은 김치양을 제압하기 위해 서경 도순검사인 강조에게 사람을 보냈다. (그러나) 강조는 저간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하고 5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개경으로 와 곧바로 대궐로 쳐들어갔다.  강조는 임금을 능멸하며 법왕사에 유폐시켰다. 임금은 뜻하지 않은 사태에 놀라 통곡하였다. 강조는 대량원군을 맞이하여 새 임금 자리에 앉혔다. 이어 김치양과 일당을 잡아 죽이고 나머지 세력은 귀양을 보냈다. 

그는 임금과 태후 황보씨를 충주로 쫓아냈다. 강조는 충주로 가고 있는 목종에게 독약을 보냈는데, 목종은 독약을 거부하였다. 그러자 독약을 들고 갔던 자들이 임금을 죽이고 나서 자결하였다고 떠들어댔다. 임금의 시체는 문짝으로 짠 관에 넣어져 관소(館所) 주변에 매장되었다. 태후 황보씨는 이 틈을 타서 황주로 도망쳤다. 

목종은 이렇게 어이없이 죽고, 대량원군이 왕위에 올랐다. 1009년 1월에 벌어진 일이었다. <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5권 P172 >


임금에게 충성하던 강조가 왜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을 옹립했는지 오리무중인 측면이 많았는데 화면으로 일률적으로 보니 어느 정도 이해되는 측면이 있었다. 강조는 이미 목종이 시해당했음을 알고 김치양을 처단하기 위해 일어섰으나 결국은 현 조정이 더는 유지되기 힘들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목종 옆에 유충정과 유행간이 있고 목종이 지금과 같은 정치를 계속한다면 더는 고려에 미래가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강조의 변 이전 거란의 사정을 보자. 


왕건이 북쪽 지대에서 축성 공사를 한창 벌일 때인 922년에 거란의 야율아보기가 낙타와 말과 털방석을 예물로 보내며 우호를 보였다. 이것이 거란과 고려의 첫 외교관계였다. 야율아보기는 한편으로는 중원을 도모하기 위해 후방에 있는 고려에 우호를 보인 것이다.
고려는 후백제와 싸움을 하던 중이라 거란과 굳이 분란을 일으킬 필요가 없었다. 고려는 중국 땅에서 일어나는 일에 민감한 반응을 보일 처지가 아니었다. <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5권 P54 >


고려와 거란의 첫 만남은 다음과 같았다. 이 때만 해도 고려는 거란이 위협이 될 만한 존재가 되리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왕건은 여전히 후백제와 지난한 싸움을 하고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여력이 없었고 거란도 분열되어 있던 중원 땅을 바라보고 있어 고려에 친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당시 중원 땅은 후진이 들어선 상태였다. 


거란은 후진의 황제가 새로 즉위하자 사신을 보냈으나 고려는 거란이 사신을 파견하자 무도한 자들과는 거래할 수 없다 하며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회동 5년(942) 6월 초하루 계축일에 후진 제왕 석중귀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정사일에 도도고(徒覩古)와 소살(素撒)에서 조공하였다. 을축일에 후진 황제 석경당이 붕서하고 아들 석중귀가 제위에 올랐다. 무진일에 후진에서 사신을 보내 대행황제의 상을 알리자 7일 동안 조회를 폐하였다. 경오일에 후진에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치제하게 하였다. < 요사 권4 태종 야율덕광 >


〈임인〉 25년(942) 겨울 10월 거란(契丹)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낙타 50필을 보냈다. 왕은 거란이 일찍이 발해(渤海)와 지속적으로 화목하다가 갑자기 의심을 일으켜 맹약을 어기고 멸망시켰으니, 이는 매우 무도(無道)하여 친선관계를 맺을 이웃으로 삼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드디어 교빙(交聘)을 끊고 사신 30인을 섬으로 유배 보냈으며, 낙타는 만부교(萬夫橋) 아래에 매어두니 모두 굶어죽었다. < 고려사 태조 25년 10월 미상(음) >


최광윤은 중국으로 유학길을 떠났다가 거란 정탐꾼에게 붙잡혀 관가로 끌려가고 만다(아버지 최언위는 고려 초기 조정을 확립하는데 도움을 준 인물로 당나라에 유학하여 큰 명망을 떨친 인물이었다). 다행히 재주를 엿본 거란인들이 그를 죽이지 않았고 조정에서 벼슬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최광윤은 거란이 앞으로 고려를 침략할 것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여진인을 통해 고려 조정에 이 사실을 알렸다. 고려 조정은 947년 특수군단인 광군사를 설치하였다. 


그동안 요는 후진을 무너트렸으나 한족은 후진에 이어 후주를 세워 요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조광윤이 반란을 일으켜 960년 송나라가 세워졌고 그는 탁월한 수완으로 중국 중남부를 모두 섭렵하고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요를 정복하기를 기도했다. 송의 요 정복은 뒤이은 태종 대에 실현이 되었으나 요가 송을 철저히 무너트리면서 작전은 실패했다. 고려는 송과 연대하여 요의 침략을 막고자 했고, 송은 고려의 후원을 받아 요를 제압하고자 하면서 둘의 이해 관계는 맞아 떨어졌다.  


통화 22년(1004) 9월 기축일에 남쪽[송]을 정벌하는 일을 고려에 알렸다.

윤 9월 기미일에 남쪽[송]으로 정벌을 나갔다. 

겨울 11월 갑자일에 동경유수 소배압이 송나라 위부의 관리를 사로잡아 바쳤다. 정묘일에 남원대왕 야율선보가 아뢰기를 '송나라에서 사람을 보내 왕계충의 활과 화살을 건네면서 은밀히 화친을 처앟였다.'고 하였다. 왕계충에게 조서를 내려 '사신을 만나 화친토록 하라.'고 하였다. 

12월 무자일에 송나라에서 이계창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면서, 태후를 숙모라 하고 해마다 은 10만 냥과 20만 필을 보내겠다고 하였다. 이에 화친을 허락하고, 곧바로 합문사 정진을 보내 국서를 가지고 보빙하게 하였다. 이 달에 회군하였다. < 요사 권14 성종 야율융서 >


거란은 고려와의 화약을 바탕으로 1004년 전투를 벌여 송을 굴복시킨다. 이 전투에 패함으로써 송은 거란과 이른바 '전연의 맹'을 맺게 되었다. 


10세기에 접어들면서 거란은 유목민의 방식을 더 이상 따르지 않았다. 11세기가 되면, 이들은 요새화된 성읍을 점령하여 국가의 영토를 확장했다. 982년 10월 14일, 11세의 야율융서(사후 성종으로 추존)가 요의 제6대 황제로 선출되었다. 그는 요 제국의 유능하고 균형감 있고 공정한 군주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성종의 장기간 치세 중에서 전반기는 성종의 모후 승천태후(953~10009)가 정부와 왕조를 실질적으로 지배했다. 승천태후는 심지어 송과의 전투에서 자신의 군대를 통솔하기도 했다. 요사는 성종의 통치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성종은 가장 성공적인 요 황제로 간주될 것이며 (그러나 그 성공은) 거의 그 어머니의 가르침 덕분이라고 보아야 한다. < 하버드 중국사 송 P57~58 >


전에 읽었던 <고려거란전쟁>에서도 나왔으나 성종은 어린 나이에 즉위한데다 몸이 병약했기에 승천황태후가 그를 대신해 거란을 통치하여 970년대부터 1009년까지 사실상 거란을 지배한다. 송과의 전쟁에서 직접 지휘를 했다는 기록에서 장부의 모습이 엿보인다. 극은 안타깝게도 시작하자마자 1009년의 상황이라 승천태후가 죽음을 앞두고 있어 누워 있는 상태로 나왔다.


통화 11년(993) 고려 왕 왕치(고려 성종의 이름)가 박양유를 보내 표문을 올리고 죄를 청하니, 조서를 내려 ‘여진에게서 취한 압록강 동쪽 수 백리 땅을 하사하도록 하라.’ 하였다. 

통화 12년(994) 3월 정사일에 고려에서 사신을 보내 사로잡힌 포로와 가축을 돌려줄 것을 요청하자, 조서를 내려 ‘속전을 바치고 데려가도록 하라.’고 하였다. 병인일에 사신을 보내 고려를 어루만지고 달랬다. <요사 권13 성종 야율융서 >


993년 요는 대대적으로 송을 공격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후방의 고려를 먼저 복속하고자 대군을 모아 집결했다. 고려 조정은 군사 책임자로 서희를 임명하였고 거란의 상대는 소손녕이었다. 서희의 담판 외교로 고려는 압록강의 강동 6주를 개척하는 쾌거를 일군다. 고려는 거란과 강화를 맺었으나 회유책일 뿐이었고 방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강조의 변 이후 현종이 즉위하고 거란의 2차 침입이 있기 전의 상황까지를 정리해보았다. 앞으로 드라마를 보면서 관련 내용을 읽고 기록을 찾아보게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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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11-27 0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는 역사 드라마가 아주 길었군요 32부도 긴 것 같은데, 이건 긴 게 아니었네요 오랜 시간에 걸친 전쟁이었다고 하는데, 그걸 다 보여주지는 못하겠지요 그때 사람은 그 시간이 아주 길었을 듯합니다 강감찬은 이름은 알았지만, 실제 이름이 나온 건 귀주대첩 때다 하던데... 그때 나이가 꽤 많더군요 강감찬은 기억해도 왕인 현종은 몰랐네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11-27 21:16   좋아요 1 | URL
32부작은 역사 정극 치고는 너무 짧은 느낌이에요^^; 예전에는 50부작을 넘기더니 이제는 그렇게도 하기 어려운 환경인가봅니다. 요즘은 TV로 본방사수를 안하고 동영상 등을 이용하니 시청률도 안 나오고 제작비 건지려면 쉽지 않겠죠.
맞아요. 그래서 강감찬 장군을 더 좋게 평가하는 이유가 되지 않나 싶습니다. 현종은 나름 고려에서 입지가 있는 왕인데 다만 전쟁을 겪었고 뛰어난 신하들이 많아서 상대적으로 묻히는 게 아닌가 싶네요-_-
 

왕건이 북쪽 지대에서 축성 공사를 한창 벌일 때인 922년에거란의 야율아보기가 낙타와 말과 털방석을 예물로 보내며 우호를 보였다. 이것이 거란과 고려의 첫 외교관계였다. 야율아보기는 한편으로는 중원을 도모하기 위해 후방에 있는 고려에우호를 보인 것이다.
고려는 후백제와 싸움을 하던 중이라 거란과 굳이 분란을일으킬 필요가 없었다. 고려는 중국 땅에서 일어나는 일에 민감한 반응을 보일 처지가 아니었다. - P54

거란은 926년 끝내 발해를 멸망시키고 괴뢰국인 동단국을세웠다. 거란은 발해를 병탄하면서 국력을 키워 중원을 도모 - P55

할 역량을 지니게 되었다. 이제 명실상부한 제국이 된 것이다. - P56

942년 6월, 후진의 고조가 죽고 조카 석중귀(貴)가 즉위하니 이 사람이 출제(帝)이다. 출제는 요에 대해 강경한정책으로 맞섰다. 출제는 요를 공격하는 전쟁을 서둘렀다. 멸라는 예전 고려의 제안을 출제에게 전달하였다. 출제는 동의하여 고려의 군사가 요의 동쪽 변방을 공격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요의 군사를 분산시키려는 작전이었다.
이해 10월, 요는 사신 30여 명과 함께 낙타 50필을 고려에보내 호의를 보였다. 왕건은 강경하게 거부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거란은 일찍이 발해와 서로 우호관계를 맺었는데 갑자기두 마음을 먹어 동맹을 깨고 멸망시켰다. 무도함이 지나쳐이웃으로 우호를 맺을 수 없다.
요나라를 거란이라고 호칭하여 나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뜻을 보였다. 왕건은 사신 일행을 섬으로 귀양보내고 낙타는 - P58

개경 만부교 아래에 매어놓아 굶어 죽게 하였다. - P59

광종의 의지는 확고했다. 광종의조치를 두고 정인지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나라에 노비가 있어 풍교(風敎)의 진작에 큰 도움이되었다. 내외를 엄히 하고 귀천을 매겨 예의가 행해지는 것이 여기에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다

노비가 없으면 양반이나 사대부가 체면을 차리지 못한다는말이었다. 유학자 출신인 최승로는 광종의 노비정책을 비난하면서 광종의 다음 임금인 성종에게 이렇게 건의하였다.

성상께서는 깊이 지난 일을 거울삼아 천한 자가 귀한 자를 능멸하지 못하게 하고, 노비와 주인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중도를 잡아 처리하게 하소서. 대체로 벼슬이높은 자는 이치를 알아서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저지르는경우가 적으며, 벼슬이 낮은 자일지라도 진실로 자기의 비위를 꾸밀 만한 특별한 사람이 아니면 어찌 속임수로 양민을 천민으로 만들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궁원(院)과 공경들이 더러 위세를 빌려 비법을 저지르는 자가 있긴 하지만... 지난날 판결한 것을 다시 캐고 따져 세상을 어지럽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최승로는 노비 문제로 세상이 시끄러우니 지난 일은 접어두고 노비 관계의 송사를 분명히 하라고 요구하였다. - P103

세 번째로는 차현 남쪽과 공주강 바깥은 산의 모습과 땅의형세가 거슬리게 뻗어 있으니 이곳 출신 인물을 등용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본심이 어디에 있든 왕건으로서는 역사적인과오를 범한 대목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공주 일대에 국한된지역 차별정책이라고 보기도 한다. - P138

거란의 동경에서 우리나라의 안북부까지는 생여진(生女眞: 여진의 한 갈래)이 점령했던 곳입니다. 광종이 이를 빼앗아 가주, 송성 등의 성을 쌓았습니다. 지금 거란이 침입한것은 두 성을 차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고구려의 옛 땅을빼앗는다"고 떠드는 것은 실상 우리에게 공갈을 치는 것입 - P161

니다. 그 군사의 강성함을 보고 갑자기 서경 이북의 땅을떼어 그들에게 주는 것은 계책이 될 수 없습니다. 삼각산이북의 땅 또한 고구려의 옛 땅인데 저들이 끝없이 욕심을부려 요구한다면 그대로 내줄 것입니까? 더구나 땅을 떼어적군에게 주는 것은 진실로 만세의 수치가 됩니다. 어가를도성으로 돌리시고, 신들로 하여금 한번 싸움을 해보게 한뒤에 논의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서희는 쌀에 관한 문제에서는 인간철학의 심오함을 보여주었으며, 전쟁의 원인과 사정을 따질 때는 뛰어난 전략가의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는 영토 할양에 따른 역사의식이 철저하였으며, 전술 면에서도 탁월한 견해를 피력했다.
만일 이때 서희의 주장이 없었다면 어떤 결과를 빚었을까?
서희의 동조자로 이지백이라는 벼슬아치가 있었다. 이지백은서희의 주장을 따르면서 소손녕에게 뇌물을 후하게 주어 회유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성종은 서희의 주장에 따라 강화사신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화통사(和使)로 낮은 벼슬아치인 장영을 뽑아 보낸 것을 보면 조정에서 아직도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 P162

강한찬
한은 중국조(趙)나라 서울인 한단에서 처음생겨난 글자이다. 세상의 부귀영화가 부질없음을 나타내는 ‘한단지몽‘ (邯鄲之夢)이라는 고사성어도 있다. 이를 ‘감‘으로 발음할 근거가 전혀 없다. 따라서 강감찬은 강한찬으로 고쳐불러야 한다. 이 책에서는 강한찬으로 통일하였다. - P169

강조가 통주에서 삼수채를 설치하고 있을 때 요군의선발대와 다시 맞부딪쳤다. 고려군은 칼을 꽂은 수레를 배치하여 요군을 공격하였다. 요군은 패전을 거듭하였다. 그러나강조는 지장의 자질이 모자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적을 물리친 뒤 적을 깔보며 진중에서 유유히 바둑을 두고 있었다. 반격을 시도한 요군이 삼수채를 격파하고 밀려들어왔다. 이 보고를 받은 강조는 태연하게 큰소리쳤다.
입 안의 음식은 적으면 씹기가 불편하다. 많이 들어오게내버려두어라.
요군이 물밀듯이 진중으로 쳐들어왔다. 그때서야 강조는 황급하게 일어나 싸울 채비를 차렸으나 어느새 들이닥친 요군이강조를 꽁꽁 묶어버렸다. 강조의 몸은 북방에서 나는 털담요에 둘둘 말렸다. 함께 있던 고려의 장수들도 다 잡혔다. - P177

이 일련의 전쟁에서 가장 용감하게 싸운 전사들은 천인부대에 속한 군인들이었다. 조정에서는 죄인이나 투항한 오랑캐들을 집단마을에 살게 하였다. 이들은 양수척처럼 유랑민이 되기도 하였다. 이들은 공물 수송과 도로 청소, 건축 공사 등에수시로 동원되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집단으로 부대에 편성되 - P193

어 전쟁터로 끌려갔다. 이들이 동원될 때에는 백성들이 양식을 싸서 주었다. 나라에서는 별다른 경비를 들이지 않고 병사로 써먹었다. 이들이 어찌나 용감하게 싸웠던지 "거란이 고려와 싸워서 패전한 것은 이들 무리에 힘입었다"는 말이 나돌정도였다. 이들은 머리를 깎고 구걸승(求乞僧)처럼 떠돌이 생활을 하였으나 가사를 입지 않고 계율을 지키지 않았기에 사람들이 재가화상(在家和尙)이라고 불렀다. - P194

병이 깊어진 문종은 송에 약과 명의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신종은 의원 88명과 약재 100가지를 보내주었다. 문종은감격한 나머지 『화엄경』을 외우며 중국에 태어나기를 기원하였다고 한다.
문종은 어느 날 송의 수도 개봉을 돌아보는 꿈을 꾸고 시를지었다.
악업의 인연으로 거란과 가까워1년의 조공만도 몇 번인지 모른다네.
이 몸 홀연히 개봉에 이르니한밤에 흐르는 눈물 애석하도다.
(명나라 사람이 지은 『요산당기』 (자기의 얼을 빼놓은 소중화 의식이다. 이와 같은 맹목적인사대의식이 뒷날 민족자주사상의 왜곡을 가져왔다.
이렇게 문종대에 수교를 재개한 두 나라는 우의를 돈독히하여 활발한 무역을 벌였고 요가 망하는 것을 함께 지켜보았다. 몽골이 원나라를 세울 때까지 두 나라 사람들은 활발한문화 교류와 상품 무역을 벌였다. - P211

민간인들은 역에서 숙박이나 음식 제공의 편의를 받을 수없었으므로 사찰에서 경영하는 원(院)을 많이 이용하였다. 사찰에서는 직접 장사를 하였는데, 장사를 할 때에는 많은 물건을 말에 싣고 먼 거리를 넘나들었다. 또 10만 명이 넘는 승려들이 필요에 따라 늘 이동했다. 승려들은 만행이라고 하여 세상 물정을 살피면서 고행을 하느라 이동이 잦았고, 여름과 겨울 두 차례 안거(安居)를 할 때에도 이동하는 숫자가 많았다. 따라서 이들을 위한 숙박시설로 원을 설치하게 되었다.
원은 사람의 통행이 많으나 마을과 멀리 떨어진 곳에 주로 설치하였다. 도둑이나 맹수가 출몰하는 곳을 골라 건물을 세우기도 했다.
처음에는 절일을 보는 사람들이 이 시설을 이용하여 숙박과음식 제공은 물론 말먹이나 여행에 필요한 물건을 조달하였으나 차츰 일반인도 이곳을 이용하게 되었다. 민간인들은 이곳에서 자기도 하고 밥을 사먹기도 하고 도둑이나 맹수를 피하기도 하였다. - P239

승려들은 상업 활동까지 벌여 재산을 불려나갔다. 이렇게 모은 재산으로 승려들의 수행을 돕고 사찰을 건립하였으며, 화려한 불상과 불탑을조성하고 뛰어난 불화를 만들어냈다.
승려들은 문벌귀족과 함께 대토지 소유자로 군림하면서 온갖 비리를 저지르고 사치스런 생활을 하였다. 절에서는 소유토지에 장생표(長椎標)를 세워 경계를 표시하였다. 통도사의경우, 나라의 허가를 받아 12개의 장생표를 세웠다. 지금 양 - P265

산군 하북면 백록리에 1085년(선종 2)에 세운 높이 166센티미터의 장생표가 보존되어 있다. 장생표 안에는 국가 소유나개인 토지는 없고, 절 소유의 토지와 산판만 있었다.
금강산 장안사의 경우 소유 토지가 전라도, 경기도, 황해도에 걸쳐 널려 있었다. 장안사의 승려들은 가을철이면 여러 곳을 헤집고 다니면서 도조를 거두기에 분주하였다. 승려들은여기저기에서 장사를 하느라 부산을 떨기도 하였다.
물론 모든 사찰이 이렇게 풍족했던 것은 아니다. 귀족과 연계되지 않거나 원당이 아니거나 낮은 신분의 승려가 꾸려가면서 불법에 정진하는 절은 거의 토지를 소유하지 못했다. 그래서베를 짜서 팔거나 스스로 농사일과 작은 장사를 벌여 생계를 꾸렸으며, 때로는 탁발(托鋒)로 연명하였다.
많은 승려와 신도로 이루어진 절의 자위 조직은 외침이나변란이 있을 때 군사 인력으로 동원되기도 했다. - P267

벼슬아치에게 적용한 규정은 일반 서민에게 영향을 끼쳤다.
신라에서는 불교식 화장인 다비(茶毘)가 유행하였다. 매장은주로 왕이나 귀족들의 장례였다. 그러나 신라의 문무왕이 자신을 화장하라고 명한 뒤 이를 따르는 왕들도 있었다.
고려 초기의 벼슬아치와 서민들은 죽은지 3일 만에 시체를절 근처에서 화장했다. 유골은 골호(骨壺)나 석관(石棺)에 담아 묻었다. 초기에는 주로 석관을 썼는데 판석 여섯 개를 조립하여 만들었다. 이는 불교의 장례의식이 변형된 모습이다.
불교에서는 시체를 화장한 뒤 재를 강이나 바다에 뿌리고 바 - P292

람에 날려 물고기나 새에 보시한다. - P293

제례(祭禮)도 장례와 더불어 일정한 격식을 갖추었으나 불교와 민속의 영향을 받아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고려 초기에는 기제사를 부모 중심으로 지냈는데 1390년(공양왕 2) 고관은 3대, 6품 이상은 2대, 7품 이하와 서민은 부모의 기제사만 지내게 하고, 가묘를 두어 받들게 하였다. 이때에는 유교 의식이 널리 퍼졌는데도『주자가례』의 규정을 따르지 않았다.
고려 후기에 와서 유학자들이 강력하게 유교식으로 의식을시행하자고 주장한데다 『주자가례가 널리 보급되어 예식이복잡해졌다. 양반들은 삼년상을 치렀고 차츰 기제사가 3대 이상으로 확대되었으며, 가묘를 두고 조상을 받드는 풍조가 만연하였다. 친족과 가족 묘지를 화려하게 꾸미고 묘 주위를 돌로 장식하는 따위 형식 중심의 조상숭배 풍조도 유행했다. - P297

박유(朴楡)는 몽골 침략기에 높은 관직에 있던 벼슬아치였다. 그는 고려에 남자보다 여자의 수가 많은 것을 한탄하였다. 그는 생각을 거듭한 나머지 이렇게 건의하였다.
우리나라에는 본래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신분의 높낮이를 가릴 것 없이 아내를 한 명만 두고 있습니다. 아들이 없어도 첩을 둘 수가 없습니다. 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왕래하면서 수의 제한없이 처첩을 두고 있어 사람들이 모두 북쪽으로 흘러갈까 두렵습니다. 청하옵건대 여러 벼슬아치들이 첩을 두되 품계에 따라 수를 줄이고,
서인은 아내 하나와 칩 하나를 두게 하시고 첩에게서 난 아이도 적자와 같이 벼슬길에 나오게 해주소서. 이렇게 하면원망이 사라지고 인구가 늘어날 것입니다. (『고려사 열전) - P302

이 말을 들은 여자들이 거리와 마을에서 박유를 보면 쫓아가 손가락질하였는데 "여자들의 붉은 손가락이 묶어놓은 것같았다"고 하였다. 박유는 철저하게 여성들의 지탄을 받았다.
여론에 따라 축첩 건의는 묵살되고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 P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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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수관: 고려와 조선 초기에 있었던 지방제도의 한 형태로 행정구역을 의미하는 대읍 혹은 그 곳의 수령을 지칭.

몽수: 고려시대 부녀자들이 외출할 때 쓰던 쓰개.

최치원: 고려에 적극 동참
최승우: 후백제에 적극 동참
최언위: 최언위는 신라 말기와 고려 초기의 유학자이고 문신 겸 향가 작가이자 한시 시인이며 서예가. 고려 초기 행정 개혁에 도움
최승로: 시무28조의 주인공. 고려 초기 행정 개혁에 도움
최은함: 최승로의 아들. 고려 초기 행정 개혁에 도움

허균은 ‘호민론‘ (豪民論)에서, 호민은 난세에 세상 돌아가는꼴을 엿보고 있다가 기회가 왔다고 판단되면 무리를 모아 변혁을 위해 떨쳐 일어난다고 하였다. 왕건이 바로 우리 역사에나타난 호민의 대표적인 인물일 것이다. - P29

왕건은 궁예를 대신하여 연이어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였다.
특히 세력 확충의 요지이자 교두보였던 후백제 지역의 나주공략에 여러 차례 나선 일은 그의 세력을 키우는 데 결정적인 - P30

계기가 되었다. 그는 나주를 자기 세력권으로 만들고 그곳을정치적 기반으로 삼았다. 이외에도 왕건은 많은 전공을 올려913년 시중(侍中)이라는 최고 관직에 올랐다. 궁예는 그를 전적으로 신임하고 모든 정사를 맡겼다. - P31

처음왕위에 올랐을 때 왕건은 신하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일렀다.
여러 길목의 도둑들이 짐이 즉위하였다는 말을 듣고 혹시틈을 타서 변방의 근심을 만들까 염려하였도다. 그래서 사자를 나누어 보내 예물을 후하게 건네주고 언사를 겸손하게낮추어 호의를 보였다. 과연 귀화하거나 투항하는 자들이많았는데 오직 진훤만이 교빙(交聘)하지 않았다. (『고려사』세가 권1)여기에서 말하는 도둑들은 각기 세력을 이루어 곳곳에서 또아리를 틀고 있는 농민봉기 집단일 것이다. 이와 같이 왕건은농민봉기세력을 끌어들이는 데 신경을 쓰는 한편, 일정한 토지를 확보하고 지방 권력을 쥐고 있는 성주(城主)나 장군으로이루어진 호족세력에 특히 주목하였다. 그는 호족을 무마하고 끌어들이는 일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 P36

왕건의 25명의 아들 중 왕이 되었거나 승려가 된 자를 제외하고 11명은 태자로 불리었으며, 나머지 7명은 군(君)으로 불렸다.
태자는 왕위 계승자임을 의미하므로 11명 모두 왕위 계승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호족의 외손들이 왕위 계승자가 될 수있었다는 것은 정략적인 성공을 뜻한다. 일반 왕자들에게 붙여졌던 태자라는 호칭은 965년 왕건의 손자인 경종)가 광종의 유일한 태자로 책봉된 뒤 사라지고, 그뒤부터는 왕위계승권자 한 명에게만 적용되었다. - P43

고려 초기의 토성분정과 본관제도는 우리나라 성씨제도의근본이 되었다. 귀족들은 성과 본관을 하사받아 문벌가로 행세하였으며, 가문을 빛내기 위해 조상을 잘 알 수도 없는 중국의 성씨에 혈통을 끌어내기도 했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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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을 떠날 무렵, 칭기스칸은 종교인들이 자신의 광대한 제국의 통치에서 제한적인 역할만 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유용한 기술을 지녔지만, 말만 많고 거의 행동에 나서려 하지 않았다. 칭기스칸은상식을 추구한 반면에 그들은 깨우침을 추구했다. 몽골 궁정으로 데려온사제, 수도사, 율법학자, 샤먼 들은 칭기스칸에게 좌절감만 안겨주었다.
그들은 모든 문제에 대한 대답으로 강론과 가르침을 내세웠다. 그들 말대로 모든 문제가 더 많은 생각, 더 많은 연구, 더 많은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칭기스칸은 당면한 문제가 산적한 수백만 인구의 제국을 통치해야했고, 그러려면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즉각적인 해결책이 필요했다. - P357

몽골인들은 죽음이라는 단어를 기피하여 그 대신에 완곡하게 ‘신이 되었다‘라는 표현을 쓴다. 그리하여 1227년 여름에 칭기스칸은 신이 되었다. 예수이 카툰은 칭기스칸의 시신을 펠트로 감싸는 작업을 감독했으며 친위대는 황제를 고향으로 데려가 매장할 준비를 했다. 칭기스칸은불교, 이슬람교, 기독교, 도교, 그 외의 어떤 종교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몽골인으로 죽었다. - P378

이제 외국 땅에 진출한 많은 몽골인은 칭기스 칸이 알아볼 수 있는부류의 몽골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도시인이 되어 있었다. 제국의 중심은 먼 도시로 이동했다. 훌레구는 바그다드와 타브리즈를 중시했고, 쿠빌라이는 새로운 수도 연경(오늘날의 베이징)으로 중심을 옮겼다. 몽골인들은 스텝을 버렸다. 카라코룸은 목초지로 전락했다. 한때 사절들이 칸 앞에 와서 몸을 떨고 포도주가 거대한 은빛 분수에서 흘러내리던 곳은 이제 염소와 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어 먹는 곳으로 변했다. 카라코룸의 사원, 모스크, 교회는 산산이 부서져 폐허가 되어 땅속으로 사라졌으며, 새로 자란 풀로 만들어진 카펫 밑에 묻혔다. 승려들의 염불 외는 소리, 무예진의 기도 시간 알리는 소리, 기독교인들이 찬송가 부르는 소리는 가뭇없이 사라져 울부짖는 바람 소리로 대체되었다. 유일하게 남은 기도 소리는 때때로 샤먼들이 찾아와 북을 두드리고, 밤에 빛나는 별 아래 모닥불옆에서 춤추며 노래 부를 때 나는 소리뿐이었다. - P439

토머스 제퍼슨은 당시 널리 퍼진 중국 관련 주제에 관심을 공유한 많은 지식인들 중 한 사람이었다. 1771년 8월 3일에 처남 로버트 스킵위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칭기스칸을 다룬 머피와 볼테르의 연극에는신경 쓰지 말고 당시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던 원극의 대본을 읽어보라고 권했다. 제퍼슨은 칭기스칸을 다룬 페티스 드 라 크루아의 전기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제퍼슨 역시 모든 종교에는 일부 좋은 면이있지만 그것들 중 어느 하나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과거에 그는 프랑스어로 된 칭기스 칸 전기를 여러 부 구입했다. 그중 일부는 자신이 가졌고 나머지는 자기 딸을 포함해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 P469

제퍼슨은 1777년에 종교적 자유에 관한 법안을 작성하기 시작했지만,
버지니아 식민지 의회가 1786년 1월 16일 법을 제정하기 전까지 알맞은단어를 찾는 데 고심했고 이 작업은 거의 10년이 걸렸다. 그의 제안은 치열한 논쟁·편집·수정의 대상이 되었지만, 최종 확정된 핵심적인 단어들은 칭기스 칸의 칙령에서 사용된 단어들과 유사했다. 제퍼슨의 새로운법은 이렇게 규정했다. "그 누구도 종교적 의견이나 신앙으로 고통을 겪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은 종교에 관하여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문장들은 중앙아시아에서 미국으로 전해졌 - P470

고, 몽골어에서 페르시아어로, 다시 터키어, 프랑스어를 거쳐 마침내 영어로 번역되었다. 번역된 문헌들에는 칭기스칸의 칙령에서 사용된 단어들이 사용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거기에는 신을 탐구하고자 하는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칭기스칸의 정신이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다. - P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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