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칭기스칸과 몽골 제국

840년 위구르의 몰락 이후 초원의 제국에는 실질적인 계승자가 없었다. 칭기스칸은 자신을 모전천막 안에 사는 모든 자들‘의 지고의 칸이라고선포하면서, 투르크인의 조상들(흉노), 몽골인의 조상들(유연과 에프탈), 그리고 다시 투르크인들(돌궐과 위구르)이 번갈아 소유하던 이 옛 제국이이제 영구히 몽골인들에게 돌아왔음을 선언하였다. - P320

칭기스칸 국가의 역사가 지닌 역설은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과 백성들의 행위를 건전한 상식의 격언과 잘 확립된 정의로 규제하는 현명하고 사려깊고 도덕적인 지도자의 성격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 막 원시적인 야만상태에서 나타나 공포 말고는 적들을 굴복시킬 수단을 알지 못하고 사람의 목숨에 아무런 가치도 두지 않았으며, 도시와 농경문화를 지닌 정주민족들의 생활이나 자기 고향인 초원에 없던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개념도 없는 유목민들의 야수적 반응 사이에 보이는 뚜렷한 차이이다. 현대 역사학자들의 놀라움은 라시드 웃 딘이나 『원사의 편찬자가 지도자 개인에게서 보이는 지혜나 심지어 온건함, 이에 반해서 교육과 유전적 회귀와 사회관습에서 보이는 잔인성, 이 양자가 완벽하고 자연스럽게 결합된 것을보았을 때 느꼈던 놀라움과 기본적으로 같다. - P339

보는 칭기스칸이 아랍-페르시아 문명에 대한 최악의 적처럼 행동하였을지라도 그리고 무슬림 작가들에게 낙인찍힌 대로 지옥의 망령들과 저주받은자들처럼 처신하였을지라도, 그는 이슬람 자체에 대해서는 적개심이 없었다. 그가 세정洗淨의 관행이나 무슬림 방식의 가축 도살을 금지하였지만그것은 몽골 관습이나 미신과 모순되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가 피르도시Firdawsi나 이븐 시나Ibn Sina에 의해 만들어진 동부 이란의 찬란한 도시문명을 파괴하였지만, 그것은 서남 국경 쪽으로 일종의 무인지대나 인위적인 초원을 만들어 자신의 제국에 대한 제방이나 보호벽으로 삼으려는의도 때문이었다. 그가 ‘땅을 죽인 것‘은 바로 이 목적에서였다. 그는 종교전쟁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통치감각이 있던 사람이지만, 동시에초원이 그의 생활방식에 적합하고 통치하기도 수월했기 때문에 도시문명을 파괴하고 농경을 폐지하여(동부 이란을 떠나면서 그는 곡물창고들을파괴하였다) 전답을 초원으로 바꾸려고 했을 정도로 정주생활에 대해서는불완전한 인식을 가진 유목민이기도 하였다. - P355

루브룩은 1254년 8월 18일 뭉케의 회신을 지니고 카라코룸을 떠났다.
"이것은 하늘의 계명이다. 하늘에는 신이 한 분뿐이고, 땅 위에 군주는 신아들 칭기스칸 한 사람뿐이다." 그리고 뭉케는 영원한 하늘과 지상에서의 그의 대리인인 카안의 이름으로, 프랑스 국왕이 자신의 신하임을 인정하라고 명하였다. - P406

쿠빌라이는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는 칭기스칸의 상속자인 반면, 중국에서는 19개 왕조의 충성스러운 계승자이기를 추구하였다. 다른 어떤 천자도 그만큼 자기 역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상처를 아물게 하는 그의 통치는 한 세기에 걸친 전쟁의 상처를 붕대로 감쌌다. 송이 멸망한 뒤 그는 그 왕조의 기구들과 행정요원들을 보전하였을 뿐 아니라, 그시대에 기능하던 관리들의 개인적 충성심을 확보하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땅을 정복한 다음에는 마음까지 정복했으며, 그가 명성을 주장할 만한 가장 큰 권리는 아마 그가 역사상 중국 전역을 정복한 최초의 사람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가 중국에 평화를 회복시켰다는 사실일 것이다. - P427

트란스옥시아나의 차가다이 지파가 투르크 영주들의 한낱 허수아비 - P488

임금들로 전락하고 있는 동안, ‘모굴리스탄‘, 즉 탈라스, 추강 상류, 이식쿨, 에비 노르, 그리고 마나스Manas에 있던 유목민들은 한동안의 무정부상태가 지난 뒤 차가다이의 왕통을 다시 수립하였다.

당시 모굴리스탄으로 알려진 일리의 재건된 칸국의 군주를 맞아들이기 위해, 트란스옥시아나 사람들에게 의존하지 않은 차가다이 가문의 사람을 먼저 찾기 시작한 것은 불라지였다.
네이그때 에센 부카의 아들로 알려진 투글룩 티무르라는 인물이 일련의전설적인 모험에 찬 생활을 하면서 모굴리스탄 동부에서 이름 없이 살고있었다. 그의 계보가 진짜든 가짜든 이 사람이 바로 불라지가 찾아서 불러들인 차가다이계 사람이었다. 불라지는 그를 악수에서 정식으로 맞아들한국의 초대 아미르가 되었다. - P489

라시드웃 딘이 재록한 훌레구와 칼리프 간의 서신에는 역사상 가장 거만한 구절들이 사용되었다. 칸은 압바스 가문 36인의 칼리프들의 계승자에게 요구하기를, 바그다드에서 일단 부이조의 총수들에게 주어졌다가 나중에 셀죽의강력한 술탄들에게 위임된 속세의 권력을 내놓으라고 하였다. "그대는 칭기스칸 이래 몽골군이 세상에 가져온 운명을 알았다. 영원한 하늘의 은총에 의해, 어떤 굴욕이 호레즘 샤들의, 셀죽들의, 다일Daylam 왕들의, 그리고 여러 아타벡들의 왕조를 덮쳤던가! 그러나 바그다드의 문은 이러한인종들 누구에게도 닫히지 않았고, 그들 모두 그곳에 그들의 지배를 확립하였다. 그러면 그러한 힘과 그러한 권력을 가진 우리가 이 도시에 들어가는 것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는가? 기치에 대항하여 무기를 잡지 않도록조심하라!" - P503

훌레구의 영향권 내에서 기독교도들이 누린 호의는 크게 그의 정비도쿠즈 카툰 덕이었다. 그녀는 케레이트의 공주로서 케레이트의 마지막 군주였던칸 토오릴의 조카이다. 그녀의 지혜를 매우 높이 산 뭉케는 훌레구에게 그녀와 상의하여 일을 처리하도록 충고하였다.39) 라시드 웃 딘은 "케레이트는 오래 전에 기독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도쿠즈 카툰은 기독교를 보호하기 위하여 늘 주의를 기울였고,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에 기독교도들은 번영하였다.
훌레구는 아내를 기쁘게 하려고 그들에게 호의를 듬뿍 베풀었고, 배려의 징표 - P506

를 보였다. 그의 왕국 전역에 새 교회들이 건설되었고, 도쿠즈 카툰의 오르두문앞에는 항상 예배당이 있었고 거기서는 종이 울렸다." - P507

가잔은 전적으로 무슬림적인 국내정책과 훌레구아바카·아르군에서유래된 대외정책을 결합시키는 데 성공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이슬람 개종의 성실성과 영구성에 대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은 지금까지 본 대로이며, 이에 대하여 라시드 웃 딘이 제공하는 증거도 충분하다. 그는 가족종교인 불교와 돌이킬 수 없는 결별을 하였으며, 그래서 불교 승려나 라마들은 그들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포기하거나 나라를 떠나도록 강요받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틀림없이 그의 대외정책에 적합하도록, 그는 네스토리우스 교도들에 대한 박해를 중지하고 그들의 총대주교 마르야흐발라하 3세에게 우정을 베풀었다. 1303년 6월, 가잔은 늙은 종정이마라게에 다시 지은 수도원으로 그를 방문해 그에게 명예와 선물과 자신의 배려의 정표를 듬뿍 주었다. - P540

초판의 몰락은 투르크인의 아나톨리아를 운명에 맡겨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1304년 술탄 마스우드 2세가 죽고 코나의 술탄국이 사라진 이래페르시아 조정이 임명한 몽골 총독들은 자치 왕들처럼 행세하는 경향을보였다.
우리는 초판의 아들 티무르타쉬가 어떻게 독립을 목표하고 있었는지를 이미 보았다. 그의 가문에 재앙이 없었다면 그는 아부 사이드가 죽은뒤 코냐나 카이세리에 아나톨리아의 몽골 술탄국을 세웠을 것이고, 그 술탄국은 분명 오스만 제국의 팽창에 장애물이 되었을 것이다. 1327년 티무르타쉬가 몰락하고 8년 뒤에 아부 사이드의 죽음이 뒤따랐는데, 이로써 아나톨리아는 주인 없이 남겨지고 동남의 카라만가와 서북의 오스만가의 토착 투르크 아미르들을 자유롭게 만들어주었다. 그러므로오스만 제국의 발흥은 간접적으로는 1327-1335년까지 중요한 몇 해 동안페르시아의 몽골 조정에서 일어난 분쟁의 결과인 것이다. - P547

킵착칸국의 역사는 다른 칭기스칸 칸국들의 역사와는 근본적으로다르다. 몽골인들은 정복한 다른 땅에서는 자신들을 어느 정도 주위환경에적응시켰으며 정복된 자들로부터 교훈을 얻었다. 중국에서 쿠빌라이와 그의 후손들은 중국인들이 되었고, 이란에서는 가잔·울제이투 아부 사이드로대표되는 훌레구의 후손들이 페르시아의 술탄이 되었다.
반면에 남부 러시아의 칸들인 그들의 사촌은 슬라브. 비잔티움문화에정복되고 러시아인이 되기를 거부하였다. 그들은 그 지리적인 명명이 암시하듯이 ‘킵착의 칸들‘, 즉 그 이름 그대로 투르크 유목민들의 계승자로 남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과거도 없고 과거의 것에 대한 기억도 없으며 러시아 초원에 아무 역사도 남겨놓지 않은 ‘쿠만‘ 투르크인들, 즉 폴로브츠이의단순한 계승자에 불과하였다. - P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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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에피소드들에도 여러 사건들이 있었다. 


특히 바지 사건은 Mia에게 유독 감정 이입이 되어 화도 나고 분해서 눈물도 찔끔 나왔다. 꼭 학교에 브랜드 옷을 입고 가야만 하는 걸까. 자본주의 사회라서 돈으로 외모를 꾸며야만 평가받을 수 있는 건가 싶어 기분이 나빴다. Mia 부모님 입장에서도 이 일을 들으면 얼마나 기분이 처참할 것인가. 누구는 사주고 싶지 않아서 안 사주는 것도 아닌데... 그런 면에서 Jason은 Yao씨와 마찬가지로 참 아닌 놈이다. 


수학 시험은 바지 사건에 이어 열폭을 터지게 했다. 중국인들은 계산을 잘 한다는 편견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 Mia 말처럼 누구나 같은 시간을 투자해도 좋아하는 것에 공부를 더 하길 원하는 것은 마찬가지일거라는 생각을 한다. 엄마가 Mia를 위로해주었으면 좋았을텐데 좀 마음이 아팠다. 물론 엄마의 마음도 이해는 한다. Mia를 위로하기 위해 아빠가 사준 연필 세트로 그나마 Mia의 마음은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 CH29 ]

Douglas는 Jason이 계속 아픈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학교 강당에서의 일로 찜찜해하던 Mia는 Jason이 걱정이 되었는데 막상 학교에서 보니 다른 아이들이랑 장난을 치는 것을 보곤 마음이 놓였다.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는데 내가 입은 꽃무늬 바지에 눈길을 보내는 것을 느꼈다. 그 바지는 엄마가 자선 가게에서 6.99달러에 6개짜리 들어있는 옷 중 하나였다. Jason은 빈정거리며 니 엄마가 보기 드문 눈을 가졌다며 놀렸으나 Mia는 엄마가 사 주신 옷이 좋았고 그에게 꿇릴 것도 없었다.


[ CH30 ]

Yao씨는 Hank에게 그동안 밀린 모텔비를 내지 않으면 나가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하지만 캘리포니아 법에 따르면 30일 이상 집에 거주하는 경우 임대인의 자격이 부여되어 돈을 아무리 갚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막 쫓아낼 수는 없다. Hank는 나갈 수 없다 버텼고 열이 받은 Yao씨는 그 책임을 Mia 가족에게 전담시킨다(아니 무슨). Hank가 돈을 다 지불하지 않으면 그 돈을 우리에게 떠넘기기 위함이다. 


[ CH31 ]

학교에서 Jason은 계속 Mia 옷을 가지고 놀렸다. Mia는 무시하고 넘어가려했는데 소문이 6학년생들에게까지 퍼졌고 결정적으로 화장실에서 6학년 여자 둘이 하는 이야기에 더는 안되겠다 생각해서 편지를 보냈다. "Floral cotton trousers are way more comfy than jeans." 하지만 Mia는 편지를 간직하기만 하고 끝내 전달하지 않았고 여전히 학교에서는 계속 조롱을 당했다. 

어느 날 오후 font desk에 셰보레 한 대가 들어서더니 중국인 남자가 내렸다. Mia는 직감적으로 Aunt Ling의 친구일거라 생각했다. Uncle Zhu는 체켝이 컸고 하얼빈 억양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일정 기간 잠잘 곳이 필요하다 말하여 우리 가족은 3번 방을 주었다. 

몇 주 후 부모님은 140달러가 빠진 급여를 받았다. Hank가 갚을 돈 중 일간으로 20달러를 계산한 값이다. 아빠는 싸울 태세였다. 엄마는 부엌에서 tofu paste(아무래도 초두부를 말하는 듯)를 꺼내와 입 속에 우걱우걱 넣는데 아빠와 나는 그걸 보며 냄새가 사라지길 기다렸다. 


[ CH32 ]

수학 시험이 있었다. 팀 대항전이었는데 Mia는 하필 바지로 심하게 놀려댄 Bethany와 Joanne, Paula와 같은 팀이 되었다. 그들은 중국인이 계산을 잘한다라고 여기고 내심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Mia가 막상 문제를 못 맞추자 비난했다. Mia는 자신이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사람이고 똑같은 상황이었다면 어떤 반응이 나왔을까 궁금해했다.


[ CH33 ]

Mia는 바나나를 먹은 후 껍질을 머리에 얹어 놓고 거울을 보며 "The blonde" 금발 머리의 자신을 그리고 있었다. 그 때 엄마가 들어왔고 대체 무슨 일이냐며 자초지종을 물었다. Mia는 수학 시험 이야기를 했는데 엄마는 그녀를 위로하기는 커녕 수학 시험을 틀린 일에 대해서만 질타하여 서러웠다. 엄마는 아빠에게 "당신 딸이 수학 문제를 틀렸대요." Mia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I don't even like maths. I like English." 엄마는 자전거를 가진 것과 차를 가진 것에 비유하며 현실을 직시하라 말했다.


[ CH34 ]

Mrs.Q가 엄마의 입장을 이해하라며 Mia를 위로했다. 일요일에 빈 캔을 싣고 재활용 센터에 갔다가 6달러를 번 뒤 쇼핑 센터에 갔다. 아빠가 문구점에서 5.99 달러짜리 연필 세트를 사주셨다. 아빠는 "You're a fine story writer." 라며 매일 연필로 너의 모든 것을 쓰라고 말씀해주셨다.


[ CH35 ]

또 다른 중국 이민자인 Uncle Fung이 왔다. 중국에서 회계사를 했고 미국에서는 Riverside에서 웨이터로 일했다고 한다. Hank 일로 Yao씨가 돈을 제하고 주는 바람에 엄마는 그에게 양상추, 마늘에 간장 소스를 넣은 음식을 줄 수 밖에 없었다. Fung씨는 일하던 곳에서 손님이 그를 바닥에 내치길래 "Hey! baby"라고 외치기만 했는데 뭐가 잘못된 것이냐 물었다. Mia는 "Hey! baby"는 남친/여친에게 하는 인사라고 말해주었다. 그녀는 그동안 미국에 있으면서 정리해왔던 미국식 구어 표현을 그에게 알려주었다.

Lupe와 weeklies, Mia는 미이라 복장을 하고 Meadow Lane을 돌아다니며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다.


[ CH36 ]

Mia는 엄마와 함께 쇼핑 센터에 갔다가 하필 Jason 모녀를 맞닥트렸다. Jason은 파자마 사러 왔냐며 Mia에게 빈정거리고 엄마는 Yao씨가 돈도 없는데 쇼핑 센터에 왔다고 생각할까 걱정한다. 


[ CH37 ]

Douglas 선생이 보는 앞에서 (자리를 깔고) Mia는 Jason 에게 Yao씨가 노동자 에게 행한 부당 대우에 대해서 항의했다. Jason은 그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었으면 감사해야 하는 일 아니냐며 따진다. 잘못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반성할 기회도 없는 것이겠지.


[ CH38 ]

Jason이 Mia의 연필을 가져가서는 시치미를 떼며 돌려주지 않았다. Douglas 선생님은 보다 못해 연필을 반으로 나누어 하나씩 갖는 것이 어떠냐 했다. 당연히 Mia는 반발했다.


[ CH39 ]

Mia는 Jason에게 연필을 돌려달라는 이유를 담은 편지를 쓴다. 벨이 울려 전화를 받았는데 Yao씨였다. 그는 자기 가족이 라스 베가스에 가기로 되었다고 말하는데 Mia는 들을 기분이 아니었다. 결국 자기 없는 동안 모텔에 신경 쓰란 이야기였다. Lupe와 계획을 짜면서 가정부에게는 걸 스카우트 때문에 쿠키를 팔러 가야 한다 말하고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는지 말한 다음 Lupe가 화장실에 가 있는 동안 Mia가 Jason의 방에 몰래 들어가 연필을 가져오기로 하는 것이었다.  Lupe는 자신은 끼어들기 싫다 말했지만 Mia는 5분 안에 모든 일이 끝날 거라며 안심시켰다. 그럼에도 그녀는 주저했다. "You mnever stand up for me!" 나는 그녀에게 화를 냈다. 그녀도 화로 대응했다. "You can say all this crazy stuff to Jason because he likes you." 결국 Lupe는 Yao씨 집에 가는 계획은 동참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하지만 그녀의 이유는 납득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것이었다. 자신의 아빠는 Yao씨 밑에서 일하기 때문이란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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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12-08 17: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아.. 앞으로도 마음 아픈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는군요.. 이민자의 설움 ㅜㅜ

거리의화가 2023-12-08 19:40   좋아요 1 | URL
두 부자들이 Mia 가족의 속을 뒤집어놓습니다^^; 하지만 Mia가 그냥 당하기만 하지는 않는 아이라서 좋아요. 앞으로도 재밌게 읽어나가실 수 있을 겁니다^^
 


근대 시기 조선에 예술가였던 나혜석이 있었다면 일본에는 문학가였던 하야시 후미코가 있었다. 둘은 1920년대 말~1930년대 초 세계 여행을 했고 그 여행기를 책으로 출간했다. 나혜석은 1927년 여름부터 시작하여 1929년 3월까지 1년 반 정도의 시간이 흐를 때까지 여행한 뒤 구미 여행기란 이름으로 책을 펴냈다. 하야시 후미코는 1931년 11월부터 시작하여 1932년 6월 돌아와서 삼등 여행기란 이름으로 책을 펴냈다. 그녀의 여행 기간은 나혜석에 비해서 체류 기간이 길지는 않은 편인데 여행 동선이 짧고 들른 장소가 더 적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금도 세계 여행을 하려면 시간은 물론이고 비용 문제가 만만치 않은데 둘은 그 시절 세계 여행이라니 일단 놀라웠다. 


나혜석이 어떤 인물인가를 드러내는 질문이 있었다. 


내게 늘 불안을 주는 네 가지 문제가 있었다. 즉 첫째,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나? 둘째, 남녀 간 어떻게 살아야 평화스럽게 살까? 셋째, 여자의 지위는 어떠한 것인가? 넷째, 그림의 요점은 무엇인가?


인간 실존의 문제, 여성으로서의 고민, 화가로서의 위치성이 눈에 들어온다. 


하야시 후미코는 처음 알게 된 이름이라 아는 정보가 별로 없었는데 찾아보니 "방랑기"라는 여행기가 당시 60만부까지 팔리면서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극을 했다고 한다. 


둘은 공통점이 있지만 차이점이 더 많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단 공통점부터 살펴본다면 여성 문제와 인간으로서의 고민의 문제가 있을 것이다.


나혜석은 여성 문제에 이전부터 천착해 있었고 지면이나 인터뷰 등을 통해서 소신을 밝혀왔다. 주체적인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때 자기 주장을 표현하는 것만으로 따가운 시선을 받기 쉬운 시절이었다. 하물며 그는 유명한 화가였으니 그녀의 말과 행동이 모두의 관심 대상이 되기 쉬웠다. 관심을 받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개인에게는 억압의 기제로 작용하지 않을까. 나는 그녀가 살아가면서 숨이 막힐 것 같은 순간을 여럿 경험했을거란 느낌을 받는다. 그녀의 예술 작품을 보거나 읽는 것만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부녀의 의복은 자기 손으로도 해 입지만 그보다는 상점에서 만든 것을 많이 사서 입는다. 겨울철에는 여름철 옷에 외투만 입으면 그만이다. 여름이면 다림질, 겨울이면 다듬이질로 일생을 허비하는 조선 부인이 불쌍하다.


나는 전에 경성에서 어느 극장 앞을 지나면서 동행하던 친척에게 말한 적이 있다. 극장 경영을 하려면 근본 문제 즉 조선 부녀 생활을 급선무로 개량할 필요가 있다고. 실로 여자 생활에 여유가 없는 사회에서 오락 시설은 번영할 수 없다.


내가 런던에 체류할 동안 영어를 배우기 위해 여선생 한 명을 정했다. 방금 예순 살 된 처녀로 어느 소학교 교사요, 독신생활을 해가는 가장 원기 있는 좋은 할머니였다. 팽크허스트 여사 참정권운동자연맹 회원이요, 당시 시위운동 때 간부였다. 지금도 여자의 권리 주장이 나오면 열심이다. 그는 이런 말을 한다. "여자는 좋은 의복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을 조절하여 은행에 저금을 하라. 이는 여자의 권리를 찾는 제1조가 된다." 나는 이 말이 늘 잊히지 않는다. 영국 여자들의 선각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에 보고서 여자의 힘이 강하고 약자가 아님을 확신했습니다. 여기서는 여자란 나부터도 할 수 없는 약자로만 생각되더니 거기 가서 보니 정치, 경제, 기타 모든 방면에 여자의 세력이 퍽 많습니다. 특히 외교상에 있어 남모르게 그 내면적 활동력이 굉장했습니다. 우리 조선 여자들도 그리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가 여성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면 눈여겨보지 않았을 지점이다. 나혜석의 극장 이야기를 보니 갑자기 떠오르는 일이 있다. 대학 친구들이 애를 낳고 돌보느라 극장에 가 본지 한참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들은 결혼 전까지 직장을 다니다가 아이를 갖고 경단녀가 되었다. 극장에 가는 것조차 사치가 되어야 하는 일이 되다니 그때 들으면서도 내가 더 억울한 느낌이었다. 


하야시 후미코도 여성 문제와 관련되어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파리 주택은 거의 아파트라서 일본처럼 그렇게 널찍하고 틀에 박힌 부엌을 소유한 집은 별로 없다. 게다가 집 밖 레스토랑을 이용하는 가족이 많은 탓에 굳이 엄청난 부엌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일본에서 레스토랑을 여전히 사치스러운 존재로 여기는 동안에는 가정주부가 부엌에서 해방되는 일은 아주 먼 이야기겠지. 잠시 유럽에 살다 돌아오고 나서야 깨닫고 놀란 것은, 주변 여인들이 아침부터 밤까지 부엌에서 줄곧 일한다는 사실이다.


일본 여성도 그렇지만 조선 여성도 마찬가지다. 그 때는 가정주부가 육아와 살림을 하지 않으면 비도덕적이라고 난타당할 때였다. 지금은 일하는 여성들이 있으나 결국 가사 노동의 짐은 여성이 더 많이 가져간다. 현실적으로 제도적인 뒷받침이 너무나 부족한 것 같다. 


실존에 대한 고민은 상대적으로 하야시 후미코의 입장이 더 감정 이입이 잘 되었다. 영국에 가서는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심신이 무척 불안했던 것 같다. '삼등 여행기'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나혜석은 일등 칸 기차를 타고 좋은 호텔에서 묵는 등 비교적 여유로운 여행을 했지만 하야시 후미코는 삼등 칸 기차를 타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숙소에 묵으며 여행을 했다. 때문에 막판에는 여행 경비가 떨어져 오가지도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나의 감정과 상황을 솔직히 직시하고 표현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좌절할 것 같은 순간에도 오뚝이처럼 긍정성이 발휘되기도 하는 모습이어서 인간적으로 연민이 가기도 했다.


어쨌든 어느 곳에 있더라도 죽는 건 매한가지라고


슈트케이스 안에는 차마 버리지 못한 파리의 찌꺼기들, 접시 한 장과 전골냄비, 포크와 스푼, 밥솥과 밥그릇 따위가 들어 있다. 그러니까 아직은 팔팔하다. 까짓것! 좀 낑낑거리기는 해도, 이따금 눈물이 한가득 고이긴 해도 말이다.


앞으로 사오일 후면 드디어 무일푼 신세가 된다. 물론 돈이 없다고 해서 죽어버리는 시시한 짓은 안 할 생각이다. 런던은 매일매일 안개가 자욱하다. 아, 진짜 좋은 일을 하고 싶다!


얼음 아래로 흘러내리듯 헤엄치는 물고기 냄새를 피부로 느끼며 이대로 아무렇지 않게 바다에 뛰어드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내 머릿속에는 절대로 죽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 허세를 부리고 있지만.... 이럴 때 위스키라도 갖고 있다면 한층 즐겁겠지. 나는 입술을 벌리고 진눈깨비를 혓바닥으로 받아봤다. 진눈깨비는 눈과 코, 입술과 어깨를 보슬보슬 두드리며 사라져갔다.


특히 마지막 표현은 정말 멋지다고 느꼈다. 그 풍경이 오롯이 연상됐고 나도 마치 진눈깨비를 맛보는 느낌이었다. 


여행에 대한 정보도 제법 상세하다. 나혜석이 여행 장소에 대한 묘사를 자세히 했다면 하야시 후미코는 여행 경비와 동선 등을 상세히 적어 둔 것이 눈에 띄었다. 


하얗게 내려 쌓인 눈이 천 길 골짜기에 묻혀 있고, 쳐다보니 융프라우의 맑고 깨끗한 설암이 눈앞 지척에 나타나 있다. 첩첩산중에 사계절 내내 눈이 쌓여 빙하가 되고, 빙하가 녹아 물이 되어 흘러 폭포로 떨어지고, 폭포가 시내가 되어 냇물로 흘러 곳곳에 호수가 되는 것이 스위스의 생명이다. 이것을 보러 각국 사람이 모여들고 이것을 팔아 스위스 국민이 살아간다.


스위스의 설산이 예전만큼 쌓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겨울에도 눈이 예전만큼 내리지 않고 여름이 점점 길어져만 가고 빙하는 녹고 있다. 스위스의 아름다운 자연을 볼 날도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은 것 같아 씁쓸해진다.


파리에서 유명한 것은 지하철이다. 땅 밑 사층으로 차가 놓여 있을 뿐 아니라 한 선은 센강 아래로 다닌다는 말을 들으면 누구든 곧이듣지 않을 것이다. 사기 조각으로 쌓은 원형 정류장은 깨끗도 하거니와 땅속 길은 찾을 수 없이 복잡하다.


지금은 한국 지하철도 제법 잘 되어 있지 않은가.


마드리드는 다른 도시와 같이 내놓을 만한 성당도 없고 역사적 전설도 없건만 이 도시를 찾아 세계인이 모여드는 이유는 오직 프라도미술관이 있는 까닭이다.


지금은 마드리드에 대성당이 들어섰지만 프라도미술관은 여전히 세계인을 불러 모은다.


여행 가이드북은 1~2년만 지나도 쓸모 없는 것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생각보다 놀라웠던 것은 변화하는 것만큼이나 변하지 않는 것들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이었다. 한국은 보존되어야할 가치를 등한시하고 그저 아파트, 빌딩 등을 짓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씁쓸해진다. 반면 서양은 두 사람이 방문했던 여러 장소들이 여전히 지금도 운영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빠르게 바뀌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지금의 세대들이 가고 나서 앞서 올 세대들에게 물려줄 것들이 남아 있지 않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여행기의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은 마음으로만 그리던 것을 실제로 만나는 일이다. 이상과 현실은 같지 않더라도 직접 마주한 느낌은 상상만 할 때와는 분명 다르다. 길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처음 만나는 일에는 문화적 충격을 겪기도 하는데 그런 일들이 여행에서 얻는 값진 경험이라 믿는다.


한국인들이 여행 말미가 되면 김치나 라면을 찾는다는데 나혜석도 미국의 조선 예배당에서 먹은 시래기국으로 고향 생각이 났을까 싶었다. 여행을 하고 돌아 오면 가기 전의 나와 달라진 게 무엇인지 가장 먼저 그 생각부터 드는데 그녀도 다르지 않다는 것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독일에 갔을 때 공원에서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잔디밭에 누워 일광욕을 하던 기억이 있다. 그 자유가 부럽기도 하다가 '쯔쯔가무시병' 걸리는 거 아냐 하는 생각부터 드는 것을 보니 '나도 참...' 했었다. 여행에 날씨가 좌우하는 힘이 제법 크다는 사실에 공감했고 어학을 좀 더 잘 했으면 하는 생각은 외국인이면 공통적으로 하는구나 싶어졌다.


하야시 후미코는 대도시보다는 소도시나 시골 등의 자연에서 편안함을 느꼈던 것 같다. 돈이 궁해서이기도 하겠지만 그녀는 왠만하면 교통 수단을 이용하지 않고 도보로 걸어다녔던 것 같다. 나도 걷기 예찬론자라 외국에 나가면 어디든 걷는 편이라 내적 친밀감이 생겼다. 


바르비종이여! 바르비종의 시골길이여! 너무 감미롭긴 해도 이 달콤함을 후회 없도록 다 써 없애고 싶다. 시골 공기를 잔뜩 들이마셨더니 핼쑥한 뺨에 붉은빛이 돌고 마음마저 차분하다. 런던에서 자살까지 생각했던 나도 이 신선한 풍경 앞에서는 그런 생각 따윈 "개나 줘버려"다.


나혜석은 여행에 가서 여러 사람들을 만난다. 1927년 6월부터 열린 제네바 군축회의로 인터라켄에서는 영친왕과 사이토 총독을 비롯한 각국의 대사, 공사 및 칙임관들을 만나 식사 자리를 가졌다. 관등으로는 감히 참석하지 못할 자리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외국에서 만난 것이기는 해도 그녀의 위치가 고위직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영친왕이 나혜석에게 그림을 그려달라 부탁하기도 했다는데 화가로서의 위치를 짐작하게 했다. 제네바 해군 군축회의는 1차 대전 이후 군비 축소 문제의 일환으로 1922년 열렸던 워싱턴 해군 군축 회담에서 전함과 항공모함에 대해서 합의를 본 이후 보조함에 대해서도 적용하기 위해 열린 회의다. 


미국에 가서는 장덕수와 윤홍섭, 김마리아 여사를 만나기도 했다. 장덕수와 윤홍섭은 후일 한민당의 주요 의원으로 활약하는 인물들이고 김마리아 여사는 독립 운동가, 교육가로서 많은 업적을 쌓은 분이다. 서재필을 병원에서 만났다는 것을 보니 장소가 그가 1929년 병리학 전문의를 따고 나서 개업한 병원이었던 것 같다. 그곳에서 조선 문제에 대해 의논했다는 것을 보면 여전히 고국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앞서 얘기했던 1922년 워싱턴 군축 회의에 서재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단의 한 명으로 이승만과 함께 참석하기도 했다. 귀국하는 길 일본에서 영친왕을 다시 만나고 그녀는 고국으로 돌아갔다.


헤이그에 가서는 이준의 무덤을 찾다가 결국 못 찾아서 이준의 지인들에게 그림엽서를 보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기도 했던 것을 보면 그녀도 조선인이구나 하는 생각을 가젝 한다.


나혜석은 조선인이자 식민지 백성 중 하나였지만 내부 계급적으로는 높은 위치에 있었다. 때문에 그 당시만 해도 그녀 주변에는 상류층의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을 것이며 대중들과는 교류가 많이 없었을 것이기에 어떤 한계가 엿보였다.


출발과 동시에 갑판 위에서 관현악곡이 울린다. 태양빛이 흐르는 호수 위에 둥실둥실 떠서 음악 소리에 몸이 싸였을 때, 아! 행복스러운 운명에 감사를 아니 드릴 수 없었고 살에 허덕이는 고국 동포가 불쌍했다.


파초가 널브러진 가운데 여신 동상이 곳곳에 있고 기염 차게 물을 토하는 분숫가에는 웃통 벗은 노동자, 유아들이 한참 무르녹은 멜론을 벗겨 들고 앉아 맛있게 먹는다. 아직도 원시적 기분이 많고, 도로에 흙먼지가 많아 유럽에서는 보지 못한 동양적 색채가 있다. 마차가 많고 노동자가 많으며 걸인이 많다.


그에 반해 하야시 후미코는 일본인이자 피식민지민이면서 주로 프롤레타리아와 노동자 계급에 주목하는 모습이 엿보인다. 일본인으로서 일본을 걱정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다른 나라의 영토와 백성을 짓밟으며 나아가고 있는 것에서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 눈에 띈다. 대부분의 일본인이 이와 비슷한 감정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언제나 진실한 것은 파묻혀 지나가고 다소 연극적인 것이, 으스대는 것이, 상스럽게 비하하는 자들이 어이없게도 어느 나라든 특권을 갖는구나. 프롤레타리아라는 하이칼라 언어를 쓰지 않아도 기나긴 삼등 열차 여행에서 굉장히 착하지만 가난한 사람을 수없이 봤다.


세계대전 이후 대체 어디에 평화가 왔나? 각국의 인민은 녹초가 됐다. 유럽을 걸어보면 지금도 베르됭의 피비린내가 난다. 발 없는 남자, 한 손 없는 남자, 한쪽 눈 없는 남자, 이런 베르됭의 유물이 무얼 하고 있냐면 대개 샌드위치맨이거나 걸인 또는 비올라 켜는 광대다. 과거 인기가 높던 어느 인간의 말로, 그 모습의 사람들이 유럽 각국에서 우글거리며 배출구를 찾고 있다. 파리 직업소개소도 그랬지만, 런던 직업 소개소도 시루에 콩나물 박히듯 어느 곳이나 매일 아침 실업자가 행렬을 짓고 차례를 기다린다. 전 세계가 굶주리고 있는 느낌이다. 옛날에는 일본에서도 평화박람회가 열렸는데, 대관절 누굴 위해 배를 주리고 저 긴 줄을 이루는 걸까?


런던의 일부 평화주의자는 대장 나라 일본이라고 낙인찍고 있건만, 청일전쟁부터 이노우에 장관 암살까지가 일본을 점점 대장 나라로 만드는 듯하다. 싫증 나는 이야기다. 억지 이론이 통하지 않으니 정치가도 인민도 검술을 배우나 보다.


나혜석도 분명 동양인이자 여성으로서 인종 차별을 겪었을 수도 있었을텐데 여행기에서는 그런 기록이 보이지는 않았다. 하야시 후미코는 그런 일화를 거침없이 적어 놓았다.


파리 카페에서 내게 말을 건 어떤 신사가 "마드무아젤, 당신은 인도차이나에서 왔나요? 요즘 식민지는 어떤가요?" 실크해트에 턱시도 차림의 남자는 절대 금물. 더군다나 단안경을 걸치고 내려다보는 모습이라니, 아무리 봐도 눈에 거슬렸다. "논, 논! 무슈. 나는 자포네제랍니다."


아침에는 근처 카페에 서서 커피를 마시는데 "일본이란 나라는 손톱을 30센티미터나 기른다면서?"라는 것밖에 일본 관련 지식이 없는 노인이 있었다. 그는 내 소매를 흔들며 하늘을 달리는 거야?" 하며 웃었다.


나혜석도 조선의 발전 방향에 대하여 고민을 많이 했던 것으로 보인다. 스위스가 자연을 가지고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것처럼 조선도 강원도, 금강산 등지를 잘 꾸미면 경쟁력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금강산은 이제 가볼 수도 없게 되어 버린 슬픈 땅이 됐지만.  


나혜석은 화가로서 연구를 위해 파리에 더 체류하고 싶어했으나 결국 귀국했다. 그녀가 그곳에 남아 그림을 계속 공부했다면 이후 삶이 달라졌을까. 한국 현대화가인 이성자 선생님도 파리에서 공부를 하셨는데 그녀가 먼저 그 땅을 밟아 개인전도 하고 작품 활동을 계속 해줬으면 어땠을까. 그녀는 고야와 고야의 그림에서 특히 많은 인상을 받아 유독 감정 이입을 한 글을 남겨 놓았는데 보고서 독자인 나도 슬픔에 잠겼다. 그녀도 그런 화가가 되고 싶었구나 생각했다.


그는 죽었다. 그러나 살았다. 그는 없다. 그러나 그의 걸작은 무수히 있다. 나는 이 묘를 보고 그 위에 걸작을 볼 때 이상이 커졌다. 부러웠고 나도 가능성이 있을 듯했다. 처음이요, 또 최후로 보는 내 발길은 좀처럼 돌아서지를 않았다. 내가 이같이 감응해보기는 전후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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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3-12-06 15: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천경자 화백이 그 시기에 해외여행 다닌 것을 보고 놀랐었는데 이 두 사람은 그가 태어날 때 이미 많은곳을 경험했네요. 앞선 여성들의 용기있는 발자취가 후배들에게 영감을 준다는 생각이 들어요. ^^

거리의화가 2023-12-07 09:51   좋아요 1 | URL
그러네요 천경자 선생님도^^ 나혜석은 진짜 지금 봐도 놀라움으로 보게 되는 부분이 있어요. 특히 용기와 추진력, 당당한 태도. 저도 세계 여행이 늘 꿈 리스트에 있었는데 이제는 체력적으로 힘들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그치만 요즘은 50~60세에도 세계 곳곳을 누비는 분들이 많다고 하니 아직은 꿈으로만 그쳐서는 안되겠죠?ㅎㅎ

독서괭 2023-12-08 17: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두 사람의 차이점이 흥미롭네요. 일제강점기 조선인이지만 부유한 지식인계층이었던 나혜석, 일본인이지만 부유하지 않았던 후미코. 각자 보는 것과 느끼는 것이 달랐을 것 같아요. 그래도 공통적으로 여성들이 집안일에 갇혀 있으면 안 된다고 외치는군요^^

거리의화가 2023-12-08 19:43   좋아요 1 | URL
그쵸^^ 나혜석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행기에서 생각보다 꽤나 쏠쏠한 정보를 얻었고요. 후미코란 사람도 새롭게 알았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분에게 감정 이입이 더 되었습니다. 저는 고위층이 아니니까요!?ㅋㅋ 서양인이 일본인을 바라보는 관점을 보면서 대부분의 서양인들이 동양인을 바라보는 편견이 느껴지면서 오리엔탈리즘이 자동적으로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금방 읽히고 꽤나 재밌게 읽었습니다.
 

12월은 감기로 시작했다. 주말에는 약을 먹기 위해 밥을 먹고 졸려서 자는 것을 반복했다.
께어 있는 시간에 책을 읽고 싶었으나 두통 때문에 그러지는 못했다.
주말이 지나고 두통은 이제 사라졌으나 가래와 콧물과의 전쟁이 시작됐다.
가래, 콧물이 끝나면 목소리도 돌아오고 감기가 낫겠지 생각하고 있다.

진도는 더디지만 르네 그루쎄의 유라시아 유목제국사를 읽고 있다. 서문이나 추천 글에 보면 이것이 유목사의 입문서라고 소개하는데 그러기에는 좀 문체가 딱딱하다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에 여러 책들을 읽어서 그나마 잘 읽어가고 있는 것 같다. 역시 처음부터 이 책을 접했다면 어려웠을 것 것 같다.

어제는 가볍게 <여행하는 여성, 나혜석과 후미코>를 읽기 시작했다. 아마도 오늘 다 읽을 듯하다.


지난 달에 이어 연속으로 책 선물을 받았다. 지난 달에 받은 선물 책도 못 읽었는데 또 받게 되어서 참 민망하기도 한…
선물 답신을 하기는 했으나 그래도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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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12-05 17: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 여성의 이야기,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감기 빨리 완쾌하시길...

거리의화가 2023-12-06 08:38   좋아요 0 | URL
페크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두 여성의 이야기가 서로가 처한 위치가 달라서인지 관심두는 주제도 보는 관점도 달라서 비교하며 읽는 재미가 있었어요. 감사합니다. 얼른 나아야죠^^

은오 2023-12-05 22: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프면 책 읽기도 힘듭니다...ㅠㅠ 화가님 감기 어서 물러가라!!!!! 😭
전 뽀뽀로 답신하겠습니다ㅋ 쮸아아아아아아ㅏ아압💕

거리의화가 2023-12-06 08:40   좋아요 1 | URL
은오님 오셨습니까!ㅎㅎ 이제 마지막 맞춤법 공부하러 가야겠네요.
저는 간질거리는 표현에 취약하여... 그래도 마음만은 아시죠? 감사합니다!^^

희선 2023-12-06 02: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기 빨리 낫기를 바랍니다 약을 먹어도 한두주는 갈지도 모르겠네요 약 안 먹어도 한두주 지나면 낫기는 하던데... 예전에 감기 걸렸을 때 그랬군요 거리의화가 님 다시 감기 걸리지 않게 쉴 때는 잘 쉬세요 거리의화가 님 서재 달인 북플 마니아 축하합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3-12-06 08:42   좋아요 1 | URL
희선님도 서재의 달인 축하드려요^^
감기는 좀 괜찮아졌는데 속이 또 뒤집어져서 고생중입니다. 자꾸 아픈 게 늘어나는 걸 보니 몸이 허약해졌다는 증거겠지요. 내년에는 건강 관리를 중점으로 두어야하지 않을까 싶네요ㅠㅠ 희선님 12월도 화이팅입니다!
 

동쪽에서 순수한 중국 왕조 수가 3세기 이상의 분열을재통일했던 바로 그때(589), 중앙아시아는 거대한 두 개의 투르크(돌궐)제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즉 동돌궐 제국은 만주의 변경에서 만리장성과하미 오아시스까지를 지배했고, 서돌궐제국은 하미에서 아랄 해와 페르시아까지 뻗쳐 있었으며, 페르시아와는 옥서스와 메르브 강 사이 즉, 옥서스강 남쪽을 따라가는 경계로 구분되었다. 힌두쿠시 산맥 북부의 모든 토하리스탄이 정치적으로 투르크의 판도 안에 들어왔다. - P146

한자로 골력배라骨力裴羅라고 알려진 위구르의 칸은 오르콘 상류에 있는 제국의 근거지에서 쿠틀룩 빌게Qutlugh Bilge라는 호칭으로 - P182

카간의 자리에 앉았다. 그의 등극은 당조로부터 인정을 받았고 현종은 그에게 회인懷仁이라는 칭호를 주었다. 당의 기록에는 그의 지배영역이 알타이에서 바이칼 호까지 뻗어 있었다고 되어 있다. 그는 즉위한 다음 해(745)에 죽었는데 어떤 자료에는 756년으로 되어 있지만 어쨌든 그의 업적은 죽음과 함께 사라지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위구르 제국이 동돌궐 제국을 대체했고, 약 1세기 정도지속되었다(744-840). 사실상 일어난 일이라고는 몽골리아의 패권이 한투르크 집단에서 그와 긴밀하게 연관된 다른 집단으로 바뀐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구르는 늘 중국의 위험한 이웃으로 여겨졌던 돌궐과는대조적으로 처음에는 상당히 충성스러운 추종자였고, 그 뒤에는 유용한 동맹자가 되었다가, 마지막에는 때로 부담스럽긴 했지만 당조의 귀중한 보호자였다. - P183

한자로 차비鼻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투르크인 왕 또는 타쉬켄트의 투둔(tudun)은 중국에 거듭 충성을 맹세했다(743, 747, 749). 그러나750년 그때 쿠차의 절도사였던 고선지는 변경의 방어자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투둔을 꾸짖었다. 고선지는 타쉬켄트에 도착하여투둔의 목을 베었고 그의 재산을 몰수했다. 이런 고선지의 폭력적인 행동서역에서의 반발을 초래했다. - P191

751년 7월 고선지는 연합군에게 탈라스 강가 즉 현재 아울리에 아타Aulie Ata(잠불) 근처에서 패배했다. 전하는 얘기에 따르면, 지야드 이븐 살리흐는 수천 명의 중국 포로를 사마르칸드로 데리고 갔다고 한다. 바르톨드는 이 역사적인 날이 중앙아시아의 운명을 바꾸었다고 했다.
그 전에 일어났던 사건들의 전반적인 흐름이 전조를 보여주었던 것처럼중앙아시아는 중국이 아니라 무슬림 쪽으로 방향으로 돌리게 된 것이다.
카를룩은 이 승리 이후 발하쉬 남부와 이식쿨 북방의 일리 지역 전체로영역을 확대한 것으로 보인다. 서돌궐의 옛 카간들의 본거지가 그들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그들의 수령은 분명히 위구르 카간의 공격을피하기 위해서 야구라는 하급의 칭호에 만족하였다. - P192

이렇게 거란의 도움으로 중국의 황제가 된 석경당은 감사의 표시로유주幽州 또는 연주州(현재의 북경)를 포함하는 하북 북부와 산서 최북단의 운주(현재의 대동) 등을 거란에게 할양해주었다. 이로써 야만인들은장성 이내에 자리잡을 수 있게 되었고, 북방의 변경지역에서 중국의 정책을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석경당의 배반은 오랜 전통을 지닌 제국의 통일성에 최초의 틈을 만들어, 이 틈은 점차 더 벌어져 이후 12세기에는 유목민들이 북중국 전체를 정복하고 13세기에는 전중국을 지배할 수 있게 한 것이었다. - P205

사만조의 위대한 시대는 874-875년에 칼리프 무으타미드Mu‘tamid로부터 트란스옥시아나를 봉읍으로 받고 사마르칸드를 거처로 삼은 나스르이븐 아흐마드Nasr ibn Ahmad에서부터 시작된다. 그해에 나스르는 형제인 이스마일 이븐 아흐마드Isma‘il ibn Ahmad를 부하라의 ‘왈리‘(wali) 즉,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곧 이 형제 사이에 갈등이 벌어졌는데(885, 886) 이는 트란스옥시아나의 왕조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좋지 않은 경향이었다. 892년 나스르가 죽자 이스마일이 트란스옥시아나의유일한 군주로 남게 되면서부터 그의 왕궁이 있는 부하라는 사만조의 수도가 되었다. - P220

사만조가 붕괴되자 그들의 유산을 두고 트란스옥시아나의 패자인 카라한조와 후라산의 지배자인 가즈나조가 다투고 있을 때, 셀죽 투르크인들은 근대 투르크멘 부족들이 그러했듯이 이 같은 전반적인 혼란을 이용해한 발씩 전진하여 트란스옥시아나의 심장부에 근거를 두게 되었고, 985년에는 부하라의 동북방에 운영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1025년경 그들의수령이던 아르슬란(투르크식 이름으로 ‘사자‘라는 뜻) 또는 이스라일(무슬림식 이름) 야구라는 칭호로도 알려짐 - 은 가즈나조의 마흐무드에대항하던 지방 카라한조의 알리 테긴의 보조군대를 지휘하였다. 마흐무드는 아르슬란을 포로로 잡아 가즈니로 끌고 가 엄격한 탄압조치로 나머지부족들을 제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유목민들의 생활방식에는 정주민들이 취하는 어떠한 조치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가즈나조는 알리 테긴이트란스옥시아나의 패자가 되는 것을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그가 죽자(1032) 그동안 그에게 끝까지 충성을 바쳤던 것으로 보이는셀죽인들은 그의 아들들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고 자신들 생각대로 전쟁을감행하였다. - P230

야율대석耶律大石이라는 황가 귀족의 지휘 하에 서북방으로 간 거란의 이주민들은 운이 좋았다. 그들은 오늘날 추구착 근처의 타르바가타이에있는 이밀에 근거를 두었다.38)이 당시 이식쿨의 서쪽 발라사군에서39) 군림하던 카라한조의 군주는 일리 강 하류의 카를룩족과 아랄 해 북쪽의 캉글리계 투르크인들로부터 양쪽으로 위협받고 있었는데, 거란의 수령인 야율대석에게 구원을 청하자 그가 도우러 와서 카라한 군주를 폐위시키고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이렇게 해서 발라사군은 야율대석의 도읍이 되었고, 그 자신은 ‘구르칸‘ (gtür gan) 즉 ‘사해의 군주‘라는 칭호를 취하였으며 그의 후손들도 그를 따라 그렇게 하였다.40)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구르칸은 카쉬가르와 호탄을 지배하던 지방 카라한조를 복속시켰다. 동투르키스탄에 건설된 새로운 거란 제국은 이제 무슬림 역사에서 ‘카라 키타이‘ - ‘검은 거란‘ 혹은 ‘검은 키타이‘ - 제국으로 알려지게 되고 여기서도 그렇게 불릴 것이다. - P249

소위 호레즘 제국을 구성하는 여러 부분들을결속시킨 유일한 요소는 술탄 무함마드 자신이었다. 그리고 비록 그가 동방의 어떤 군주들보다 행운의 바람을 더 오래 맞기는 했지만, 사실 그는열정 못지않게 쉽게 낙심했다. 칭기스칸이 이 제국을 정복하기 위해 출발했을 때 부하라와 사마르칸드가 호레즘인들에게 소속된 것이 8년도 채 넘지 않았고, 사마르칸드는 기습과 학살을 치른 이후에야 점령되었다는 사실· 기억할 필요가 있다. 칭기스칸의 침공이 있기 전, 아프가니스탄이 호레 - P255

즘에게 완전히 병합된 것은 4년도 채 되지 않았고(가즈니는 1216년에), 서부 페르시아가 확고하게 호레즘령이 된 기간은 3년이었다(1217). - P256

아바르 그리스어로는Abares·Abaroi, 라틴어로는 Avari Avares 가 유럽으로 들어온 것은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565년 사망)의 치세 말년 무렵이었다. 테오필락투스 시모카테스는 그들이 "훈누구르Hunnugur와 사비르Sabir와 다른 훈족 계통의 집단들"을 앞으로 내몰면서 왔다고 하였다. 비잔티움 사람들이 사로시오스Sarosios라고 불렀던 알란족 왕은 그들과 우호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들의 외모는 비잔티움 사람들에게 고대 훈족의 외모를연상시켰는데, 다만 훈족과 달리 아바르는 머리를 두 가닥으로 땋아서 등뒤로 내려뜨렸다. - P258

아바르의 쇠퇴 이후 유럽에서 투르크 몽골인의 주요한 역할은 당분간불가르인들이 담당하였다.20) 투르크계에서 기원하고 훈족의 쿠트리구르와연관된 것으로 보이는 이 민족은 7세기 2/4분기 동안에 코카서스의 서북방, 즉 쿠반 계곡과 아조프 해 사이의 지역에서 불가르의 온오군두르 부족의 지도자인 쿠브라트(642년 사망)의 영도 아래 강력한 국가를 세웠다. 쿠브라트가 죽은 뒤 불가르는 하자르족의 진입으로 둘로 나뉘었다. 쿠브라트의 아들인 바얀Bayan이 지휘한 한 집단은 그곳에 남아 하자르의 종주권을 받아들였다(이 분파의 후손들은 후일 북방의 카마 강과 카잔 쪽으로이주한 것으로 보이며, 그곳에 대불가리아를 건설했다가 13세기에 칭기스칸 몽골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들의 최후의 후예들이 오늘날의 추바쉬Chuvash인들로 여겨지고 있다). 불가르의 두 번째 집단은 쿠브라트의 또다른 아들인 칸 아스파루흐Asparukh의 주도 하에 서쪽으로 이주하여679년 다뉴브 강을 건너서 옛 모헤시아 땅에 정착하였다.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705-711)는 비잔티움 내전 중에 아스파루흐의 후계자인 칸 테르벨Tervel(701-718)의 보호를 받았고, 그들이 그 지역을 영유한 것을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 P265

17세기 초에 러시아 초원의 서남부와 다게스탄은 하자르 제국의 흥기를 목도하게 되었다. 하자르는 텡그리를 숭배하며 카간과 타르칸targan들의 지배를 받는 투르크 민족이었다. 바르톨드는 그들을 서부 투르크, 더정확하게 말해 서부 훈족 계통의 한 분파로 보았다.25) 그들은 626년 칸이었던 지에빌Ziebil이 헤라클리우스의 티플리스에서의 회견에서 한 요청에따라 비잔티움 황제가 페르시아와 전쟁을 할 수 있도록 4만 명의 인원을제공해주었을 때는 이미 강력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헤라클리우스는 이지원군을 데리고 사산조의 영역인 아제르바이잔 지구를 황폐화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비잔티움과 하자르 사이에 맺어진 연맹은 왕실혼인에 의해 여러 차례 새롭게 다져졌다. - P269

마르크와르트에 의하면 한때 서돌궐 연맹의 일부를 구성하다가 카를룩 투르크인들에 의해 시르다리아 하류와 아랄해 방면으로 밀려난 투르크 계통의 부족이었다.29) 그들은 서쪽으로의 이주를 계속하면서 우랄(야익) 강과 볼가(이틸) 강 사이에서 유목하고 있었는데, 913년경(이는 콘스탄티누스 포르피로게니투스에 의거한 것)하자르와 오구즈의 연합공격으로 그지역에서 쫓겨났다. 페체넥은 더 서쪽으로 가서 아조프 해 북쪽의 ‘레베디아’를 점령하고 그곳을 마자르인들로부터 탈취하였다. 얼마 후 페체넥은다시 서진을 재개하여 아텔쿠주, 즉 드네프르와 다뉴브 하류 사이에 있는서부 러시아 초원에서 마자르를 축출하였다. 이렇게 해서 900년경 페체넥은 드네프르 하구와 다뉴브 하구 사이의 초원을 이용하게 되었다. - P274

킵착은 1222년 칭기스칸의 부장들이 침공할 때까지러시아 초원의 패자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일부 킵착 수령들은 러시아의 영향 아래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또한 킵착은 후일 몽골 지배 하의 러시아에 자신들의 이름을 유산으로 물려주었는데, 그것은 그 지역에 건설된
"칭기스칸 일족의 영역이 킵착칸국으로 알려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 P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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