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국가와 대형 자선 재단이 국제개발 고유의 언어와 스타일, 문법을 통제하면서 여전히 담론 권력을 행사하고, 공여국으로 거듭난 후발 주자들이 근대의 성장·개발 중심성을 답습하고, 원조가 엘리트 권력의 지지 기반이 되는 관행은 사라지지 않았지만(Kumar and Brooks 2021: 324), 글로벌 빈곤레짐의 참여자들이 특정 국가, 특정 이념에 따라 구획되지 않고 다변화되면서 한편으론 새로운 마찰과 틈새가 생기기도 했다. - P210

글로벌 빈곤 레짐은 일관된 구조를 갖는다기보다지역적·상황적 실천과 개입에 열려 있다. 한국이 이 레짐과 접속 - P211

하는 과정에서 특징적인 것은 원조 수원국에서 공여국으로 전환한 나라의 위상을 널리 알리겠다는 국가주의적 사고가 팽배하다는점, 그리고 정부·대학·기업이 긴밀한 공조하에 (특히 대학생) 청년을 해외 자원봉사의 주요 주체로 구성해내면서 실업의 ‘위기‘를로벌 리더 창출이라는 ‘호기‘로 바꿔치기했다는 점이다. 저성장시대에도 경쟁력만 부르짖는 환경에서 실존의 결핍을 호소해온 청년들이 열정 노동과 창의 노동을 불태우며 글로벌 빈곤 퇴치를 위해싸우는 가장 역설적인 전사가 된 것이다. - P212

양식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빈곤 문화의 신자유주의적 생산에 주목하는데, 이는 "위기가 반복되는 신자유주의 흐름에서 하향 이동이나 삶의 격동을 경험하는 시타의 한국인 이주자들이 자신의 ‘정상성‘을 증명하고, 스스로를 ‘찌질이‘ ‘루저‘와 구분 짓기 위해 자의적인 빈곤 문화의 표식arbitrary cultural markers of poverty을 동원하고 (재)생산하는 과정"을 일컫는다.(Cho 2018: 521) 빈곤-복지 연합, 그리고 이 구도에서 파생된 빈곤 문화나 의존성의 유령은 일국의 사회보장 정책 지형을 넘어, 한국과 중국 정부의 사회적 보호 외곽에서 살아가는 이주자들 사이 - P294

에서 적극적으로 소환됐다. 초국적 연결이 급증한 시대, 나락에 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이 빈곤 감각을 증폭시키는 시대에 빈곤·복지·노동 담론이 서로 맞물리면서 ‘빈민‘을 조립했던 문화 정치가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 (이주자, 난민 등) 정치적·경제적으로 취약한지위에 놓인 다양한 범주의 사람들을 겨냥하는 낙인, 열악한 사람들이 서로를 구별 짓는 표식을 전방위적으로 확산해내는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은 특정 개인의 상태가 아닌 관점에 불과하지만(Goffman 1963: 137), 빈곤 전염의 공포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은관점을 인격화하는 데 몰입한다. - P295

프레카리아트는 Proletariat (프롤레타리아트)에 불안정한 위태로운‘이라는 뜻의 형용사 precarious가 결합된 단어다. 직장이 아닌 취업 ‘준비‘에 기약 없이 공을 들이는 청년도, 자국에서 잉여 취급을 받다 차이나 드림에 베팅한 중국의 한국인 이주자도 프레카리아트다. 이 단어는 신자유주의적 모델에 기반한 노동시장 유연화가 가속화되면서 노동조합과 사회보장 시스템의 보호 바깥에서 떠돌게 된 불안정 노동자들을 주로 지칭하지만, 여성, 청년, 노인, 소수 종족, 장애인, 범죄자, 이주민 복지 수급자 등 삶의 불안과 노동의 불안을 동시에 떠안은 다양한 집단도 포괄한다. 과거의 안정된노동계급과 달리 "사회적 기억"이 부재하고, 소외, 아노미, 불안, 분노 등에 휩싸이기 쉽다는 점에서 가이 스탠딩(2014 58-59)은 이들을 형성 중인) "새로운 위험한 계급으로 명명했다. - P310

불평등이 만인의 언어가 되고 겹겹의 불안이 다수의 피해자‘ 선언을 부추기는 시대이지만, 그럼에도 어떤 생명은 다른 생명보다 훨씬 더 취약하다. 폭우가 도시를 삼켰을 때 어떤 운전자는 물에 잠긴 승용차 때문에 골치가 아프지만, 어떤 인간은 반지하에서 속수무책으로 주검이 되고 만다. 서로 마주치고, 연결되고, 다른 불안을 들여다보려는 수고를 포기한 채 각자가 방공호를 파느라 분주한 시대에 인류학의 자리는 어디일까? - P353

발전의 꿈이 아무리 집요하고 중독성 강하다 한들 누구도 삶의 취약성과 유한성을 피해갈 수 없다면, 지금 우리한테 필요한 것은 취약성과 유한성을 개별 인간의 불행으로 남겨두기보다 지구생활자의 공통 인식과 감각으로 받아들이도록 돕는 제도, 교육, 운 - P386

동일 것이다. 기후변화와 팬데믹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위기를 논하는 공론장은 전례 없이 많아졌지만, 각자 알아서 방공호를 구축하던 사람들이 더 거대한 위기를 감지한다고 해서 곧바로 연결되는것은 아니다. - P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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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19] A New Kind of King

영국에 Ricard I세는 Richard the Lion hearted로도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Richard는 자국의 소유권을 팔아 넘기고 군대를 모아 crusade를 떠난다(???). 프랑스로 간 그는 왕과 Austria의 영주에게 함께 힘을 모으기를 요청하나 Austria의 영주는 거부하고 자기 지역으로 돌아가버린다. Richard는 자국의 군대만으로 예루살렘으로 향했으나 Saladin 군대는 예상보다 끈질겼다. 이 때 고향에서 남동생인 John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듣게 된 그는 발걸음을 돌린다(소유권 포기 아니였니?). Austria로 지나가려던 Richard를 감옥에 가두어 버린 영주, 사람들은 죽은 줄 알았으나 Blondel이 감옥을 뒤진 끝에 그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알린다. Austria 영주가 요청한 막대한 배상금을 내고 Ricard는 돌아온다. 그러나 돌아온지 얼마 안 되어 프랑스가 쳐들오는 바람에 사망한다. 그렇게 John이 영국의 왕위를 이었다.

John은 프랑스 전투에 막대한 돈을 썼기 때문에 세금을 늘려야 했는데 이를 귀족들에게서 받아낼 생각을 한다. 이에 귀족들은 반란을 일으키고 이렇게 civil war가 발발했다. 1215년 여름 Runnymede에서 Magna Carta 서약이 발표되는데 이는 지휘권자가 어떠한 행위를 하기 전에도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것에 기초했다. 오늘날의 의회민주주의에 의회, 상원/하원도 이 법률의 기본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

영국왕 John은 귀족들에게 세금을 걷어갔지만 귀족들은 소작농과 농노들에게 돈을 뜯어갔기 때문에 점점 사람들의 삶은 팍팍해졌다. 이 때 로빈훗의 전설이 시작된다. 로빈훗은 부자들의 돈을 뺏어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우리 역사에서 보면 홍길동이나 임꺽정 같은 의적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존재다. 로빈훗이라는 캐릭터가 지금까지 살아남고 이야기가 존재하는 것은 그만큼 그 시절이 살기 힘들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CH20] The Diaspora

한 유대인 학자가 있었다. 이름은 Yohanan ben Zakkai. 그는 예루살렘이 운명에 처했음을 느끼고 관을 사들여 그 속에 들어간 다음에 죽은 척 한다. 그는 자신의 제자들을 예루살렘 바깥으로 피신시킨다. 수백년 간 유대인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도 유대 회당에서 예배를 하고 토라를 읽는다. 유대인들은 스페인에 정착을 많이 했는데 상대적으로 이슬람 교도들이 유대인들에게 좀 더 친절했기 때문이다. 랍비와 토라 때문에 유대인들은 존속할 수 있었다.

Cordova의 똑똑한 랍비 이야기. Cordova의 수장은 주위의 경계의 말을 듣고 유대인들을 내쫓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는 테스트로 가장한 자신의 명령을 전한다. "유대인들은 3개의 테스트를 통과해야 한다." 첫 번째는 "하늘에 별이 얼마나 많이 떠 있을까?" 두 번째는 "진실과 거짓 사이의 거리는?" 세 번째는 "종이 한 면에는 'Stay'라고 적혀 있고 다른 쪽 면에 'Go'라고 적혀 있다. 어느 것을 선택하든 그대로 행해야 한다."

랍비의 첫 번째 대답은 "Five million, four hundred thousand, three hundred and two." 세워봤다며 당당하게 이야기하는!ㅋㅋ 못 믿어도 할 수 없음. 어차피 못 세워볼 것 아닌가.

두 번째 대답은 "The truth is what you see with your own eyes. A lie is what another tells you to be true, but which you canno see. The distance between your eyes and your ears is the width of one hand."

세 번째 대답은 랍비도 바로 대답하지 않고 좀 뜸을 들이더니 종이를 씹어 먹어버린다. "내가 선택한 종이는 없어졌지만 그 반대쪽은 아직 있다. 어느 쪽이든 나는 반대 쪽을 선택할 것이다." 결국 랍비의 대답이 인정되어 테스트를 통과했다는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두 번째 대답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CH21] The Mongles Devastate the East

세계 서쪽에서 기독교와 이슬람교 사람들이 싸우는 동안 동쪽에서는 다른 전투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몽골인들이 먹을 게 떨어지면 말의 혈관을 통해 피를 섭취하고 다하면 봉합한 뒤 말을 다시 탄다는 것이 신기했다(몽골족이 그런다기보다는 유목민들의 생활 방식이 맞을 것이다). 아무튼 칭기스칸은 1167년에 태어나 우여곡절 끝에 부족의 리더가 되지만 몽골은 여러 부족이 존재했으므로 이를 또 통합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고 드디어 "텡그리(하늘 신)가 나를 선택했다!" 선언한 뒤 대칸의 자리에 오른다. 그는 서쪽을 먼저 정벌하는데 특히 이슬람 세력에게는 테러에 가까웠다(이슬람인에게는 공포에 가까웠을듯). 1227년 칭기스칸이 병을 얻어 죽고 추종자들에 의해 시신이 옮겨졌으나 현재까지도 무덤의 위치는 정확히 밝혀진 바 없다. 칭기스칸의 손자인 쿠빌라이 칸이 1260년 중국 정복을 완성한다. 중국군이 화약을 쓰는 바람에 당황했으나 결국 중국을 굴복시키고 원 왕조를 세운다. 몽골이 정복하지 못한 것은 일본이었다. 두 차례나 호기롭게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향하려 했으나 바람(신풍 = 가미카제)의 방해로 실패로 끝났다. 이 때 일본으로 가기 위해 고려의 노동력과 기술력이 사용되었다-_-


[CH22] Exploring the Mysterious East

유럽 사람들은 중국을 다른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중국으로 통하는 실크 로드를 이용하여 상인들이 중국에 있는 상품들을 바깥으로 실어 나르면서 유럽 사람들도 중국의 문물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쿠빌라이 칸은 유럽과의 무역이 중국에 이득이 됨을 알고 있었다. 마르코 폴로는 이탈리아 상인인 니콜로의 아들이다. 마르코가 태어나기 전 아버지는 중국으로 이미 떠나 그가 15살이 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대칸은 그에게 로마의 성유(holy oil)을 가져다달라고 부탁했다. 드디어 그는 아들과 함께 중국으로 떠나고 마르코 폴로가 여행 중간에 병이 드는 바람에 쉬었다가 두 부자는 베이징에 도착한다. 두 사람은 칸을 만나고 그들은 20년간을 중국 곳곳을 여행하게 된다. 마르코 폴로가 남긴 여행 기록은 책으로 남아 당시의 상황을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 여정을 마치고 이탈리아에 돌아간 두 부자는 남루한 옷 때문에 거지라 오해받고 쫓겨날 뻔했으나 옷 속에 감춰둔 온갖 보석류들을 꺼내놓자 그제서야 받아들여졌다고.

쿠빌라이 칸 이후에 몽골은 분할되어 힘이 쇠약해진다. 중국에는 명 왕조가 들어서고 강력한 황제인 Yongle(영락제)가 즉위한다. 그는 1421년 베이징에 수도를 대표하는 궁전을 지으라 주문하고 14년간 작업이 이어진다. 무거운 돌을 수도까지 옮기는데 무척 힘들었다고 한다. 궁전을 둘러싼 석벽은 30 피트 높이로 지어지고 석벽 안에는 9999개의 건물들이 만들어진다. 이 건물들은 돌로만 만들어지지 않고 쌀과 라임으로 붉은 벽돌을 이어붙이게 함으로써 몇 백년을 끄떡 없이 유지할 수 있게끔 했다. 황색은 중국 황실의 상징색이며 건물들은 황금 용과 노란 벽화, 지붕도 온통 황색 타일로 칠해졌다. 이 영역은 외부에서 전혀 들어올 수 없었기 때문에 Forbidden City라고 불려진다. 


[CH23] The First Russians

The Rus(루스족=Rurik)는 콘스탄티노플 북부에 살았다. 원래는 슬라브족이 살던 곳인데 루스족이 들어오게 되었고 이들은 결혼을 하며 자연스레 인종 간 결합이 되었다. 그들은 항해술이 뛰어나서(바이킹의 후예) 배를 타고 나가 콘스탄티노플에 몇 주에서 몇 달을 오가며 항해했다. 루스족의 지도자는 그곳을 오가는 것보다 공격해 무너뜨리는 것이 싸게 먹힌다 판단하고 콘스탄티노플을 공격을 감행한다. 그러나 비잔틴 군대에는 Sea fire(oil that kept on burning even when it was spread out on water)라는 비밀 무기가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는 결국 공격에 실패한다. 러시아 왕자 블라디미르는 콘스탄티노플에게 화해의 선물로 6천명의 러시아 병사를 선물한다. 블라디미르는 비잔틴의 공주와 결혼을 하고 정교회로 개종을 한다. 오늘날 러시아 국명은 이 Rus에서 온 것이다.

원래 러시아는 하나의 부족이 아닌 여러 부족이 결합된 곳이었다. 이반(Ivan)은 모스크바의 왕자였는데 그 대에 몽골로부터 자유를 얻고 다른 러시아 지역도 통합하면서 이반 대제(Ivan the Great) 명칭을 얻게 되었다. 그는 훌륭한 왕이었으나 손자는 그러질 못했던 것 같다.(Ivan the Terrible) 그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자신을 차르(tsar)라고 부르고 러시아를 더 부강하게 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아내가 죽은 후 정신 이상이 된 후에 비밀 경찰을 만들어 무고한 자들 포함하여 배반자들을 처형하는 등의 행동을 한다. 러시아 귀족들은 그의 아들이 얼른 성장해서 왕위를 잇기를 바랐다. 어느 날 이반과 아들이 싸우다 화가 난 이반이 그를 살해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후 그는 급 정신을 차리고 속죄의 삶을 살았다고…


[CH24] The Ottoman Turks Attack

투르크인(the Turks)은 몽골군의 추격을 피해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마을을 공격하고 음식을 약탈했다. 그러나 그들은 무슬림 상인들과 교역하면서 무슬림이 되었고 비잔틴 제국 변경 지역에 정착했다. 투르크 왕국은 점점 커져 왕을 술탄으로 부르고 비잔틴 제국을 넘보기 시작한다. 1444년 메흐메드(Mehmed) 술탄은 콘스탄티노플 공격을 명하고 군대는 유일하게 육지에 닿아 있는 서쪽으로 이동하여 대포를 이용하여 공격했지만 그럼에도 성벽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들은 방법을 바꾸어 북쪽 성벽을 확보하기 위해 북쪽 항구(The Golden Horn)에서 서쪽 벽까지 육지 길을 만들어내 결국은 모든 방향에서 공격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때 하필 일식이 발생하는데 비잔틴 제국이든 오스만 터키든 이 현상을 전쟁의 끝을 의미한다고 인식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은 마침내 열렸고 내부의 것들은 사라졌다. 하기아 소피아 교회는 모스크로 변했고 콘스탄티노플은 이스탄불로 바뀌었다.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이 사라진 날이자 로마의 치세의 종언을 고하는 날이었다. 

술레이만은 1520년 오토만 제국의 술탄이 되었다. 그는 솔로몬왕의 이름을 따라 이름을 지은 것이다. 그는 터키 사람들에게 적용할 법을 만들려 했다. 비잔틴제국의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가 모든 사람들에게 같은 법률을 적용하지 않았던 것을 따르고 거기에 새 법을 따르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감독을 했다. 스파이 체계를 갖추고 변장을 한 뒤 잠행을 나가 자신에 대해 뭐라고 하는지, 법은 잘 따르고 있는지 확인하였다. 그는 술탄에서 나아가 칼리프(종교 지도자)까지 된다. 다행히 사람들은 이를 따랐다. 꿈에서 황금 사자가 자신에게 달려들어 물어 뜯히고 깨어나 예루살렘을 보호하지 않아 발생한 일임을 느끼고 the Lion Gate를 예루살렘에 세운다. 이는 지금도 있다. 비록 로마 밑으로 내려가지 못했지만 술레이만은 자신의 치세 때 오스만 터키를 가장 강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가 죽고 즉위한 아들이 정사를 잘 돌보지 않아 점점 국력이 약해졌다. 이후 300년 간 유지된 터키는 더 이상 술레이만 때만큼은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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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4-01-28 13: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원서읽기, 응원하는 1인입니당~~~
그리고 부럽습니다.(히죽~~)

거리의화가 2024-01-29 16:31   좋아요 2 | URL
페크님 감사합니다^^ (히죽~~)이 이모티콘인 줄 알았어요!ㅎㅎ 응원 받았으니 더 열심히 읽어야겠네요^^

희선 2024-01-29 0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어 공부도 하고 세계사를 다시 살펴보기도 하겠습니다 저는 세계사 다 모르는군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4-01-29 16:32   좋아요 1 | URL
저도 세계사는 잘 모르는 부분이 많아요. 빈 구멍들이 많다는 걸 읽으면서 느낍니다. 희선님 감사합니다^^
 

1부

수급이 빈곤네트워크의 의무통과점이 되었다고 내가 생각하는 까닭은, 정부 정책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자기 서사, 그리고 이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의 움직임 모두 수급(기초법)을 경유해 그 존재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이 공공부조의 수급자로 구획되면서 가난은 특정한 양식과 문법 안에 고이고 말았다. 빈곤을 우리 시대의 정치적 핵심 의제로 삼는 일은 그렇게 점차 요원해졌다. 빈곤이 ‘우리의 삶‘에서 ‘저들의 문제‘로고립되면서 취약계층에 대한 관심을 호소하는 메시지가 빈곤을 끝 - P27

장내자는 결의를 압도해버렸다. - P28

의존성 논의가 복지 영역에서 특히 만연한 것은 사회복지야말로 후술할 사회적 빈곤‘ 의제와 조응하여 등장한 지식과 기술의복합체이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 사회복지학 발전의 주요 참조국인 미국에서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발전해온 사회공학과 개척 서 - P66

사를 중심에 둔 선별적 역사 서술이 결합하면서 자율적 개인과 독립을 이상으로 삼는 정치 이데올로기가 단단히 뿌리를 내렸다. ‘자립‘을 숭배하고 ‘복지 의존welfare dependency‘을 경멸하는 정치 이데올로기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특정한 시선을 부과하는 담론 권력으로자리 잡고, 이들의 사회 안전망을 최소화하는 정치 전략으로 작동해왔다.(O‘Connor 2001; Fineman 2004)이러한 흐름에 맞서, 진보적 사회복지학자들은 의존의 보편성을환기하며 복지 의존에 씌우는 혐의를 거둘 것을 호소하기도 한다.
하지만 복지 의존을 "인간의 상호의존성을 증진할 수 있는 기초"
로 재정의하는 움직임(김병인 2017 88)이나 돌봄 윤리의 선언만으로 의존이 문제가 된 현실에 균열을 내기란 불가능하다. 복지가 직업화·제도화·산업화를 거치며 ‘성장한 역사란 뒤집어보자면 사회복지 체제 구축에 관여해온 종사자들이 가난한 사람들한테 ‘의존해온 역사다. - P67

자본주의의 불안정성이 심화되고, 금융의 일상화로 투자가 주업이 된 사람들이 허다하고, 기술이 인간 노동을 대체하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임금노동의 비중은 계속 줄고 있지만, 빈곤 통치에서 임금노동이 갖는 위상은 여전히 견고하다. 노동이라는 기준이야말로 근대 빈곤 통치의 기본적인 작동 원리이기 때문이다. 강제노역에서 근로연계복지에 이르기까지, 빈곤 통치의 역사는 인간에게 노동을 강제하기 위한 일련의 지식과 제도를 구축해온 과정이다. 여기엔 멀쩡한 노동자라면 수급을 신청할 이유가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빈곤 통치와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노동운동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계급은 물적 관계이지만 ‘노동자‘는 수많은 정체성 가운데 하나로 탈구된 지 오래이다 보니(신현우2022: 71) 이상적인 노동자의 ‘자격‘에 대한 암묵지를 발견하기도 어렵지 않다. - P105

인류학자들은 집home 을 건조물이나 자산에 국한하지 않고 일종의 희망이자 미래로, 세계에서 자기 자리place를 확보하려는 지속적노력과 꿈의 표현으로 봤다. 사람들은 집에 관한 각자의 생각을
"물질성, 감정, 사회적 관계, 거주 실천의 교차 속에서 부단히 만들고, 이 실천 속에서 소속, 안전, 가치의 감각을 조율한다.(Samananiand Lenhard 2019 7) 이는 홈리스, 이주자, 난민에게 분명 더 위태롭고 고된 노동이다. 이 장에서 나는 가난한정으로서의 집‘이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인식과 달리에서끼쳤는가를 살핀다. 집이 수많은 행위자의 실천이 매개된 결과라면, 과정으로서의 집을 기술하는 작업이란 이들의 실천이 더 너른공간과 더 긴 시간대에 걸쳐 어떤 방식으로 수행되었는가를 살피는 일이다.(Brun and Fábos 2015)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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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동남아시아사 1권을 읽고 현재 2권을 읽고 있는 중이다. 1권과는 다른 느낌이어서 흥미롭게 읽어내려가고 있다.


오늘은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와 미얀마의 만달레이 부분을 읽었는데 '스투파'가 나오길래 검색을 했다.

그러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인도 미술 관련 전시(<스투파의 숲, 신비로운 인도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공동기획으로 하는 전시이고 흔치 않은 주제의 전시인 것 같아서 호기심이 갔다.

작년 12월에 오픈을 해서 올해 4월 중순까지 한다. 아쉽게도 얼리버드 기간이 끝나 이제는 매달 마지막주 수요일이 아니면 정가지만 착한 가격이라 상관 없다. 


미리 다녀온 사람의 후기를 찾아 보면서 구성도 흥미롭지만 내용에 집중할 수 있도록 신경 쓴 조명이나 배치도 눈에 들어왔다. 

만약 검색을 하지 않았다면 전시를 지나치고 놓쳤을 것이다. 

예전에는 주기적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가서 전시를 보고 강연을 듣기도 했는데 이제는... 


이번에 가게 된다면 몇 년만에 가게 되는 것이라 여행하는 느낌으로 가게 될 것 같다. 




인도 미술을 아예 모르기 때문에 가기 전에 인도 미술 관련 책을 읽어보고 가는 것이 관람을 더 즐겁게 하는 방법이겠지.


이 시리즈는 진작 찜해둔 것인데 우선 순위에 밀려 아직도 한 권도 읽지 못했다.

1권을 읽고 마음에 들면 이어서 읽어봐야지.










이번 주 내내 춥더니 그나마 오늘 낮에는 햇빛 때문에 살 것 같구나.

햋빛 쬐며 구름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을 보고 어제 발매 된 곽진언 음반을 들었다. 




그리고 오늘은 금요일! 금요일은 어쨌든 금요일이다. 


얼마 전 도서관에서 대출을 3권 빌렸는데 1권만 완독하고 1권은 진행중이고 1권은 아직 시작도 못했다. 

일주일 연장했는데 대출 기간이 또 임박...! 역시 도서관 대출은 2권까지가 적당한 것 같다. 3권 넘어가면 힘들군...


이 책들 포함해서 주말에는 열독하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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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4-01-26 14: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곽진언의 앨범이 새로 나왔군요!
전시회 소식도 솔깃합니다. 정말 찾아보지 않으면 놓치는 전시, 공연들 많지요. 알고싶지 않은 광고는 넘치는데ㅎㅎ화가님 좋은정보 공유해 주셔서 감사해요.

거리의화가 2024-01-27 20:50   좋아요 1 | URL
네^^ 싱글은 몇 번 나왔는데 이렇게 모아서 내는 것은 오랜만이어서 반가웠네요^^
전시회 가본지가 어느새 1년이 다되어가서(서울 나가기가 왜 이리 힘든지ㅋㅋ) 아무튼 이번에 마음 먹고 가보려고 합니다.

페넬로페 2024-01-26 15: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시회 다녀와야 겠어요.
4월까지이니 날씨 따뜻해질때요~~
곽진언의 노래도 좋고요.
생각 같아서는 도서관에서 책 한 권만 빌려다 읽고 바로 반납하는 것이 젤 좋을 것 같은데 가면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주말 독서 화이팅입니다^^

거리의화가 2024-01-27 20:56   좋아요 2 | URL
날씨 따뜻할 때 전시회 좋겠어요^^ 저도 또 전시회 가본지가 좀 되어서 나들이 하는 기분이 될 것 같습니다.
도서관에 갈 때마다 1권은 이상하게 안 빌리게 되더라구요. 최소 2권 이상을 빌리게 되는데 가끔 함께 읽는 책들이 많을 때 버거울 때가 있습니다^^; 이번에 반납할 때는 정말 안 빌려야할 것 같아요. 집에 쌓인 책을 좀 치우려면!ㅋㅋㅋ

건수하 2024-01-26 20: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공포의 권력>을 다 읽은 분의 여유가 느껴집니다...

스투파가 뭔지 몰라서 찾아봤어요. 인도네시아에서 ‘보로부두르‘ 라는 사원에 갔던 적이 있는데 거기 한 가운데 있던 게 스투파였나봅니다.
괜히 반가워서 댓글답니다 ㅎㅎ

거리의화가 2024-01-27 20:55   좋아요 1 | URL
스투파가 끝이 뾰족한 불탑이라고 하더라구요ㅎㅎ 인도네시아 가보신 적이 있으시군요. 부럽습니다! 굉장히 넓은 나라라 갈 곳이 많더라구요.
주말에 <공포의 권력>을 읽기는 힘들 것 같았습니다. 완독을 했다기에도 찜찜함이 남지만ㅠㅠ 어쨌든 감사합니다 수하님!^^
 

계미 23

정월에 漢나라 군대가 宛물을 포위하였다. 春陵 戴侯의 曾孫 劉玄이 平林의 군중에 있으면서 이름을 更始將軍이라 하니, 이때 漢나라 군대가 이미10여 만이었다. 劉氏를 세워 사람들의 기대를 따르고자 하였는데, 南陽의호걸들과 王常 등은 모두 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新市와 林의 장수들은 방종한 것을 좋아하여, 의 위엄과 명철함을 두려워하고 劉玄의 나약함을 탐해서 먼저 함께 계책을 정하여 劉玄을 세웠다. 劉玄이 황제에 즉위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조회 받을 때에 부끄러워 땀이 흘렀으며 손을 들어올리고 말을 하지 못하니, 이로 말미암아 호걸들이 실망하여 대부분 복종하지 않았다. - ≪後漢書 齊武王傳≫에 나옴-3월에 偏將軍 등이定陵,
순행하여 모두 항복시켰다. 王은 물과 尋을 보내서 군대를 징발하여지방을 평정하게 하고, 또여러 맹수인 호랑이. 표범무소 · 코끼리 등속을 몰고 가서 군대의 威武를.
돕게 하고는 이름을 百大軍이라 하여 군대를 풀어 昆陽을 포위하였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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