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주권의 이상은 일단 개념이 적립되자마자 곧바로 모든 정치체제가 어떻게든 지켜야 할 표준이 되었다. 이것은 19세기의 진정한 신생 사물이었으며, 정치적 기대의 혁명이자 정치적 공포의 혁명이었다. 정치제도를 둘러싼 투쟁은 새로운 동력을 얻었다. 통치자의 ‘정당성‘과 그가 속한 신분집단의 오래된 권리를 어떻게 지켜낼지는 더 이상 정치의 핵심문제가 아니었다. 이제는 공동선에 관한 의사결정에 누가 참여할 수 있으며 참여해야 하는지가 정치의 핵심문제가 되었다. - P1624

영국의 법치개념은 제국이란 통로를 통해 모든 대륙으로 전파되었다. 비유럽인의 시각에서는 영국의 법치제도는 식민주의의 색채가 강하기는 했지만 현지인 통치자가 통치하는 이웃나라의 법치 상황보다 못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유권자의 범위는 단계적으로 확대되어왔다. 유권자범위의 확대는 부분적으로는 혁명투쟁의 전리품이었고 부분적으로는 위로부터의 타협의 결과물이었다. - P1635

‘잭슨 민주주의‘와 함께 미국은 1776년 이후로 다시 한번 세계 역사상 누구도 가본 적이 없는 길로 들어섰다. 19세기의 마지막 1/3시기 이전에 유럽 어디에서도 이처럼 경쟁적이며 때로는 폭력적일만큼 자유로운 논조가 가득한 ‘대중민주주의‘를 찾아볼 수 없었다. 여 여러 차례 정권교체를 경험했고 보편적 남성 투표권이 실현된 후에도각 주의 지사가 지니고 있던 권력이 아직 약화되지 않은 프랑스에도이런 형식의 민주주의는 없었다. - P1639

정치운동과 시민조직은 신분에 대한 고려에 얽매이지 않는 내부기능을 통해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학교가 되었다. 이것은 미국과 영국만의 상황은 아니었다. 평등에 대한 요구는 흔히 사람들이 평등하게 모이는 소집단, 단체, 조직을 통해 표출되며 상호 제약 없는 소통을 통해 실현된다. 더 큰 규모의, 충돌이 빈번한 정치무대에서 평등에 대한 요구는 남김없이 표현된다. 이것이 사회주의와 그것과 연관된 풀뿌리 운동의 핵심이다. 예컨대, 많은 증거가 증명하고 있듯이초기의 독일 사회민주당은 오늘날의 정당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연합된 운동이었다. - P1642

19세기의 마지막 1/3시기 이후로 민간경제 부분에서 점차로 국가관료제도를 대규모로 복제하기 시작했다. 관료제도는 프로이센과나폴레옹시대 프랑스의 흔적이 분명하게 남아 있는 유럽의 발명품이었다. 그러나 유럽 이외에 중국, 오스만제국, 일본에도 관료제도의전통이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으며 이들의 관료제도는 ‘전근대적‘ 이라거나 ‘세습적‘ 이었다고 서둘러 평가절하해서도 안 된다.
19세기에 이들의 전통은 서방의 영향과 충돌하면서 다양한 결과를낳았다. - P1649

영국의 (인도) 식민지 관료제도는 국가기없는 정치지평에서 어느 날 갑자기 솟아오르지 않았다. 무굴제국과그것을 계승한 역대 정부의 핵심은 중국과 베트남 같은 관료조직이아니었다. 그들은 문관의 다양한 위계와 성숙한 문서제도를 갖추고있었지만 엄격하고 세밀한 공무원 관리체계를 갖지 못했다. 인도문관제도(ICS)는 그러므로 당시에 존재하던 기반 위에서 제한적으로수립될 수밖에 없었다. 인도문관제도는 동인도회사의 관리체계를직접 이어받았다. 동인도회사는 18세기에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조직구조 가운데 하나였지만 여러 면에서 현대적인 특징을 갖추고 있었다. 직위의 분배는 객관적인 업적평가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 여전히 후견제도(Patronage)를 지키고 있었다. - P1651

중국(또한 베트남)의 관료제도는 완전히 ‘전현대적‘ 이지는 않았다. 중국의 관료제도는 두 가지 측면을 결합한 것이었다. 하나의 측면은 가족관계 또는 후견관계를 초월한 비인격적 원칙을 지킴으로써 고도의능력위주 인재선발방식을 실현했다는 것이다. 조선의 경우는 더 나아가 이런 원칙과 세습귀족의 지속적인 고위 행정직 점거 현상이 상호 용납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 P1655

오스만제국에서 (유럽이나 중국과 마찬가지로) 수백 년 동안 통용되었던 후견관습이 하루아침에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을 따르는 인사정책으로 대체되지 않았다. 두 가지 조류와 관념은 충돌하면서 동시에 서로 영향을 주었다. 1839년 이후의 탄지마트(Tanzimat) 개혁은 새로운 관료계층을 제국의 핵심적인 엘리트계층으로 만들어 놓았다.
1890년, 이 직업 공무원 집단의 숫자는 최소 3만 5,000명이었다. 백
년 전에 수천 명의 필사원은 모두 수도 이스탄불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1890년이 되자 이스탄불에서 일하는 공무원은 소수의 신식 고급관원뿐이었다. 오스만 관료체제의 지방화는 19세기 후반에야 중국이 수백 년 전에 걸어간 길을 따라갔다. - P1656

일본은 독특한 관료제도의 현대적 형식을 찾아냈다. 그러나그것은 절반의 현대성이었다. 메이지시대의 정치질서에서 개인의자유와 인민주권은 낮선 사상이었다. 일본에서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계약관계라는 유럽적 관념은 존재한 적이 없었다. 이리하여 군주가부장제는 합리적 관료체제의 시대에도 지속될 수 있었다. 일본의1889년 헌법은 천황은 만세일계(萬世一系)이며 ‘신성불가침‘의 존재로서 통치권을 독점한다고 규정함으로써 유럽 모형을 이탈했다. - P1658

19세기와 20세기에 각양각색의 경찰제도가 전파되면서 세계적인 범위에서 경찰력이 확대되었다. 경찰제도는 종주국의 수도에서 식민지로, 때로는 샴과 일본 같은 국가의 도입에 의해, 나아가 각 제국 내부에서도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 P1672

역설적이게도 (파가론 연구에서 이론화가 부족했던) 권력의 집적이 다른 영역 —— 민족주의 강령 —— 에서는 긍정적으로 수용되었다. 아무리 반동적인 군주라도 이제는 ‘짐이 곧 국가‘라고 말 할 수는 없었지만 국가가 곧 민족이란 관념은 널리 퍼졌다. 국가에 유익한 것이라면 민족에게도 유용했다. 이렇게 국가권력 합법성의 기반 개념이 바뀌었다. 민족국가는자기 고유의 존재이유를 갖게 되었다. 그 존재이유는 역사에 깊이 뿌리내린 왕조의 합법성이나 정치적 실체로서의 유기적 조화가 아니라 ‘민족이익‘ 이었다. 누가 민족의 이익을 정의할 것이며 나아가 그것을 정치로 전환시킬 것인지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 P1691

달리 말하자면 국가의 강성은 결코 인류 진화의 결과가 아니라 세계적 재배치의 불균형한 결과였다. 다른 국가 보다 약하거나 낙후한국가는 쉽게 공격을 받았다. 약한 국가는 잠식당하거나 정복당할 위험을 안고 있었다. 근대 초기 유럽인의 상상 속에서 ‘동방‘국가는 모두 백성을 지푸라기로 아는 ‘폭정‘의 국가였다. 물론 사실은 전혀 달랐다. 방대한 관료기구를 가진 중국도 그렇지 않았다. 역설적이게도19세기에 아시아의 통치자들은 유럽 민족국가가 강력한 관료기구와중앙집권제를 건설한 방식을 빌려와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려 했다. - P1692

제도 설계의 기본 의도는 정치 메커니즘의 단순화였다. 영국의 계몽사상가이자 공리주의 (功利主義) 학설의 창시자 제레미 벤덤(JeremyBentham)은 민주주의 이념에 관해 말하면서 현대사회에서 책임통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중간권력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가장 명쾌하면서 모든 민주정치의 강령이되는 기본 사상이다. 인민과 통치자는 가능한 한 중간 고리를 줄이고 직접 대면해야 한다. 그들을 연결시키는 것은 대의제도라야 한다. 대의제도는 선거와 대표 파견의 과정일 수도 있고, ‘신비한 연합‘ (unio mystica) — 군주 또는 독재자가 국가를 대표한다고 주장할 때 ‘인민‘이 박수를 치든지아니면 ‘사실상의‘ 의사표시를 통해 지지를 보내는 방식을 통해구현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 민족국가의 정치제도는 민족적 동질성과 헌법구조의 단순성을 기반으로 한다. - P1694

최소한의 기대치는 있었다. 모범시민은 개인이익의 추구와 민족 전체를 위한 희생 사이에서 훌륭한 균형감각을 가진 사람이어야 했다.
세기가 바뀔 무렵 많은 국가의 공적영역에서 사람들이 생각한 문제는 시대와 함께 나아가는 문제였다. - P1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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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거친 투쟁‘에서 생겨난 주정주의, 즉각성이 정치를 감염할 것이라는 베버의 두려움은 인구의 다수에게서 정치적 시민권을 박탈해야 한다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식화와 공명한다. 그리고 이 두려움은 한편에 있는 욕구, 감정과 다른 한편에 있는 자유, 합리성의 대립 관계를 다시금 보여 준다. 정치에 적절하게 접근하려면 정치를 오염하는 생존 행위에서의 여유와 충분한 거리를 유지해야만 한다.
그러나 경제적 이해관계를 오염할 가능성이 거의 없으며, 강력한 권력 본능이라는 긍정적 자질을 갖춘 정치적 지배층을 불러내면서 베버는 권력, 명망, 나라의 영광, 영웅적 리더십 같은 정치적 미학을 찾아 분투한다. 이 미학은 윤리, 사회, 문화, 경제 등 그 어떤 것이든 ‘공공선‘을 지도 목적으로 삼을 법한 정치적 실천의 반대편에 존재한다.

베버는 정치란 오직 정치적 연합과 지배에 활용되는 수단으로만 제한할 수 있는 개념이라고 말한다. "정치 연합이 특히 연합 행동이 모든 가치를 품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통제 수단의 과감성 때문"이다.

베버에게 적법성은 충성, 준수, 복종 따위를 얻는 것과 관련된다. 그것이 지배 구조를 ‘올바르게‘ 보이도록 만들지만, 실제로 지배 구조가 그런지 여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적법성은 힘 있는 이들에게 도구로 필요하고, 힘없는 이들에게만 가치의 차원에서 소중히 여겨진다.

국가를 독특하면서 자율적이게 만드는 것은 그 국가의 권력에 대한 전면적 개입 그리고 권력을 추구하는 이들의 점유다. 힘 있는 이들의 관점에서 볼 때 민족은 그 밖의 모든 것, 즉 기껏해야 권력에 간접적으로 관심을 보이는 행동과 사람을 포괄한다. 그러나 민족과 국가는 상호의존적이다. 국가는 민족문화의 ‘명망‘을 보호하고 증진하며, 민족은 국가의 위업을 위한 근본적 토대가 된다.

도구적 합리성은 어떤 목표든 그리로 가는 가장 명확한 길을 보여 주고, 그 목표로 가는 길에 있는 모든 대상의 활용이나 지배를 수반하며, 자연 습관 종교 전통 등에서 풀려나게 하는 최고의 해방자다. 따라서 도구 합리적 행동의 자유는 특정 목표를 이루기 위한 권력의 외적 제약에서의 자유다.

그가 근대 세계 합리화의 원인이자 결과로 본 두 가지 근대 ‘체계‘는 자본주의와 관료제 국가다.

경제 사회 조직의 한 양상인 자본주의에는 상호 연관된 두 가지 차원의 합리화가 뒤따른다. 하나는 생산자를 생산수단에서 분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산수단을 생산 목표에서 분리하는 것이다. 베버의 시각으로 볼 때 자본주의는 바로 이 분리 덕분에 가장 효율적인 생산양식이다.

노동자가 생산수단에서 분리되고 그들 자신이 생산수단이 되어 감에 따라 생산의 목표와 수단은 사회에서 구별되는 두 부류로 나뉜다. 기술적 차원에서 자본주의의 합리화는 생산양식의 합리화와 노동자를 그들의 생존 수단에서 분리하는 작업을 수반한다. 사회적 차원에서 자본주의의 합리화는 대중을 이윤 추구를 위한 수단으로 바꾸는 작업을 통해 이윤 추구가 합리화됨으로써 발생한다.대중은 그렇게 수단이 되면서, 순전히 도구 합리적인 행동을 하도록 강제된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수자==반된 다른 분리처럼 행정 수단(국가권력)에서 관료를 분리해 낸 것은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이고 안정적이고 정확하게 믿을 수 있으며, 따라서 가장 강력한 조직 형태다.

"관료주의적 행정은 근본적으로 지식을 통한 지배를 뜻한다." 관료주의는 특화된 훈련과 특권적인 정보 접근 양쪽 모두에 내재하는 권력을 키워 낸다. 그리고 이 함양의 목적은 관료주의 자체의 권력을 개발하는 것이다.

(도구적 합리성을 활용하여 구현된) 특정 권력과 자유에 대한 추구는 삶 자체를 위한 투쟁에서 자율적이며, 자본주의와 관료제 국가야말로 오히려 생존경쟁을 강화해 왔다.

권력과 통제는 도구적 합리성을 통해 특히 경제와 국가의 영역에서 극대화된다. 그러나 도구적 합리성에는 목표와 수단이 잠재적으로 불일치하기 때문에, 이런 행동에서 목표 자체는 상대적으로 약해진다.

합리화 과정에 나타나는 지배 의지, 이것이 정점에 이르면 마침내 ‘여성적인 것‘이 무너져 내리는 무게가 된다. 이때 베버가 개념화한 여성적인 것을 위협하는 것이 바로 도구적 합리성의 출현이라는 기술이다. 남성성의 외적 세계를 구현하는 자유 통제 지배 권력에의 의지는 자본주의와 관료제 국가라는 총체적 지배 체제를 만들었지만 그것이 완전히 실현되려는 찰나에 남성됨 자체가 통째로 으스러져 버린다.

정치적 ‘시실주의‘와 ‘책임 윤리‘에 베버가 헌신했을지라도 그것이 국가권력에, 국제정치에서 패권을 얻기 위한 권력 행사에, 자본주의 생산성에, 자본주의를 추동하는 무자비한 기업가 정신에 그가 전념한 것을 정당화해 주지는 않는다. 그는 이런 제도와 실천이 사회와 개인에게 무엇을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목적이 되어 버린 수단임을 통찰력 있게 인식하고도 그런 제도와 실천을 옹호하고 변호했다. 하지만 가장 깊은 역설은 베버의 방법론에 있다. 왜냐하면 베버는 이 방법론을 통해 인간 존재, 문화, 연합, 행동에 대한 연구를 합리화했기 때문이다.

베버가 고안해 낸 정치 영웅은 고전적 남성됨의 망토를 두른 채 근대 남성됨의 피조물, 즉 막강한 국민국가의 힘을 행사한다. 이 영웅은 남성의 통제와 지배 추구에서 비롯한 합리화된 정치적 경제적 삶이라는 기구를 해체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정치적 목표에 따라 그것을 동원하려고 한다.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 정치가는 제도화된 남성됨의 힘, 즉 관료제 국가를 휘두르는 남성 전사다. 그는 모든 남성적 정치 가치, 즉 사적 권력, 영웅주의, 폭력, 지배, 뛰어난 것에 대한 헌신, 일상적 존재를 비롯해 이 모든 것이 한데 녹아든 도구적 합리성에 대한 반감 등을 한데 구현한다. 베버는 진정한 정치가라면 반드시 책임 윤리에 복종해야 한다고 고집하는데, 도구적 합리성만으로도 그가 좇는 수준의 정치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 그리고 도구적 합리성은 책임 윤리와 전혀 공존할 수 없다. 베버의 지도자 개념과 정치 자체에 대한 개념은 권력 수단에 대한 도구적 관계에 기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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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대추세가 지역에따라 표출되는 강도가 달라지고 정치형태에 투영되는 방식도 또한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서유럽 국가가 역사적 표준이 아니라고 한다면 문제는 명쾌해진다. - P1586

물리력의 독점은 ‘현대’ 국가를 정의하는 자연스러운 속성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시도하여 획득한 역사발전의 예외적 상황일 뿐이다. 혁명의 시대에 폭력의 독점은 빠르게 와해되었다. - P1587

독재자에게 자신의 통치하에서 우대받는 군대와 경찰을 장악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일생의 분투를 통해 올라온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독재자는 자신이 통치자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특수한 상황을 어떤 방법을 쓰든—쿠데타이건 박수와 환호 속의 표결이건— 확고한 제도로 변환시켜야만 한다.

-> 한국사에도 독재자의 모습은 여럿 있었다. 특히 현대사에서 이승만은 경찰을 수시로 동원했던 모습이 있다. 박정희는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했다. - P1590

정치가가 권력을 위임받기 위해 유권자나 추종자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의견을 듣는 일은 19세기에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었다. 이런 정치형식은 미국의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 임기 중에 처음 생겨났다. 그 후 앤드루 잭슨 대통령의 이름을 딴 잭슨 혁명과 함께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건국의 아버지들의 엘리트주의를 배격하는 대중주의적 또는 ‘풀뿌리’ 정치 관념이 생겨나 ‘분파주의’라 비난받던 정당 간의 경쟁을 지지하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었다. 선출직 공직이 급격히 늘어났고 어떤 지역에서는 법관까지도 선거로 뽑았다. 유럽에서 민주주의의 실천은 오랜 시간이 걸렸을 뿐만 아니라 과두정치적 색채가 짙었다. 영국에서도 이런 상황이 1867년까지 지속되었다. 영국의 선거법은 미국에 비해 여러 가지 제한이 많았다. - P1595

겨우 수천 명을 다스리는 통치자가 있었는가 하면 수억의 신민을다스리는 통치자도 있었다. 어떤 전제군주는 직접 통치했고 의례적인 통치자의 지위에 만족할 수밖에 없는 군주도 있었다. 히말라야 산속과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의 왕이건, 아니면 런던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면류관을 쓴 국가원수이건 그들에게는 두 가지 공통점이있었다. 하나는 국왕 또는 황제의 계승권을 보장해주는 왕조의 합법성이고 다른 하나는 군주의 개인적인 품성과는 관계없이 기본적인 존경과 숭배를 요구할 수 있는 왕관의 권위였다. - P1597

군주제 자체는 어떤 비판도 초월한 것이었지만 왕위에 있는 자는 반드시 통치능력을 증명해야 했다. 군주제는 백성의 다양한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각양각색의 책임과 사명을 완수해야 했다. 그러므로 식민혁명에 의해 군주제가 폐지되었을 때 아시아사회를 긴밀하게 교직(交織)해온 사상의그물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과거와의 연결을 상징하는 군주제가완전히 사라진 곳에서, 식민통치가 끝난 뒤 그나마 남아 있는 국가통합의 도구가 군대와 공산당뿐인 곳에서 과도기는 특히 험난했다. - P1603

19세기에 –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 의회가 의원들 가운데서 정부의 수뇌를 선발했고 정부 수뇌는 의회 다수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자신 있게 군주를 대면할 수있었다. 동시에 내각 구성원 전체는 의회에 대해 책임을 졌다. 군주는 의회를 제치고 수상이나 내각 구성원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해임할 수 없었다. 내각은 의회에 대해 집단 책임을 져야 하고 의회의 다수결은 모두에게 구속력이 있었다. 각료는 동료의 의견에 동의하지않을 때 내각 회의에서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지만 공적인상황에서는 내각 기율의 제약을 받았다. 이렇게 내각은 가장 중요한권력과 직능을 장악한 국가기구가 되었다. 유럽대륙 국가들의 헌법발전과정에서 등장한 전형적인 의회-군주 ‘이원제‘ 문제는 내각제라고 하는 상상력이 풍부한 방안을 통해 해결되었다. 내각제 정부는19세기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혁신 가운데 하나였다. 20세기에 들어와 이 혁신은 영국 문화권 밖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 P1607

영국제국의 속국에서 군주제의 응집력은 본국만큼 강하지는 않았으나 영연방의 지속적인 존재는 지금까지도 영국 왕실에대한 호감을 바탕으로 하여 유지되고 있다 — 군주정체의 사상이 국경을 초월하는 안정성(과 적응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식민제국 프랑스의 제3공화국은 영연방처럼이전의 식민지가 자발적으로 ‘모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가도록만드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중략)
각자의 방식은 달랐지만 나폴레옹 3세는 메이지 천황처럼 혁명의 수51혜자였다. 메이지 천황이 유신의 엘리트들과 동맹을 맺었다고 한다면 나폴레옹 3세는 개인적인 노력을 통해 정권을 탈취했다. 나폴레옹 3세는 먼저 1848년 12월에 선거를 통해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고 3년 뒤에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다시 1년 뒤에 세습 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므로 나폴레옹 3세는 맨손으로 일어난 자수성가형 황제였던 반면에 16년 후의 무쓰히토 천황제라는 제도의 연속성에 의존하여 자신의 지위를 확보했다. - P1616

유럽의 궁정에서는 (동방의 궁정생활과 가장 큰 차이점이기도 하지만) 황실 또는 왕실의 공식적인행사에 군주 부부가 같이 출현했다. 일본이 이러한 서방을 상징하는의식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현대 세계로 진입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61) 중국의 최고 통치계층은 이처럼 시범적인 부르주아 생활방식을 수용하려는 의지가 없었고, 이것은 중국 군주제의 부패와 무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했다. 중국의 궁정에서는환관과 후궁제도가 왕조가 끝나는 날까지 유지되었다. - P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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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도 세상은 어지럽게 돌아간다.

너무 많은 일들이 있어서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다행인 건 개인적으로는 별 일 없는 일상이라는 것이다.)


광주 아파트 붕괴 사고에서 2명의 실종자 흔적을 찾았다는 것은 다행스럽지만

구조는 더딜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얼른 차갑고 무거운 그 통곡의 바닥에서 가족들 품으로 귀환해야 할텐데...


우크라이나 사태도 일촉즉발이다.

나와 먼 세계의 이야기가 아니다.

코로나로 알게 되었지 않나. 세계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확진자가 연이어 치솟고 있어서 연휴 때 이동을 자제하려고 한다.

이 암담한 시기가 무사히 지나가길 빌 뿐이다.



더불어 이주에 읽고 싶은 책을 몇 권 골랐다.



1. 배틀그라운드


미국은 여전히 세계 패권국의 지위를 두고 물러나려 하지 않지만
여러 국가의 도전들 속에 위기감과 경계를 보이고 있다.
더군다나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러시아와 NATO 연합국간의 기싸움에 발을 담그고 있고
언제라도 전쟁이 촉발될 수 있는 이 때에 위기감은 더욱 크다.
저자는 맥매스터로 트럼프 행정부 때 13개월간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냈고 아버지가 6.25 전쟁에도 참전한 군인이었으며
본인은 걸프전, 이라크전, 아프간전까지 참전한 군인으로 현장감을 키워낸 군사 전문 역사학자다.
책의 목차를 보아하니 결코 우리와 무관하지 않은 북한을 따로 챕터로 두고 있어서 이목을 끈다.
러시아, 중국, 남아시아, 중동, 이란, 북한까지 미국과 힘 겨루기를 하는 모든 나라들이 담겨있다고 보면 되겠다.

2. 우리가 서로를 잊지 않는다면


이 책은 제주4.3평화문학상 8회 논픽션 수상작으로
보광동의 한국전쟁 이후 기억을 담은 르포르타주를 담고 있다.
보광동의 많은 이들이 떠나갔지만 그곳에 남은 토박이 어르신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어르신들의 증언과 용산 미군 기지를 등진 곳에서 살아야 했던 많은 이들을 보듬은 기록들이 담겼다.
보광동은 용산 일대에 일제가 일본군 기지를 짓고 마을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면서 비극의 역사의 공간이 되버린다.
차별의 공간이 된 이곳과 그곳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갔을지 궁금해져서 읽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문장이 떠오르지 않을까하는 생각만 짐작할 뿐이다.

3. 아인슈타인의 냉장고


평소 과학은 관심이 없고 과학 관련 서적은 어려워서 잘 안 읽는다.
그럼에도 아인슈타인은 워낙 유명하기에 눈길이 갔고 아인슈타인과 냉장고가 무슨 관련이 있지 호기심이 일어 보게 되었다.
알고 보니 아인슈타인이 냉장고 사업을 했단다. 지금의 프레온 냉매가 아닌 메탄올로 냉매를 만들었다는데. 이게 상용화가 됐다면 지구 파괴 속도가 좀 더뎌졌을까.
저자는 열역학 과학자들의 삶을 돌아보며 열역학이 세상을 구성하는 핵심 개념들을 소개하였다.
아인슈타인의 냉장고의 이야기처럼 나처럼 과학에 관심이 없고 어려운 사람들도 재미나게 읽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열 운동, 엔트로피 등 물리학의 핵심개념들이 담겨져 있어 책을 읽으면 물리학의 다른 책들도 읽을 용기가 나지 않을까.

4. 미국인 이야기


이 책은 옥스퍼드 미국사 시리즈로 나왔다.
옥스퍼드 미국사 시리즈는 미국의 정치, 사회, 문화, 역사를 알기 쉽게 이야기체로 소개하고있다.
미국 독립 전쟁부터 현대 미국 역사 전반을 다루는데
1권부터 3권까지는 미국 독립 혁명기의 역사로 미국이라는 국가가 하나가 되어 가는 과정을 이야기체로 그려내 흥미를 자아낸다.
여러 매체에서 이미 최고의 책이라는 찬사를 보내고 있는데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 등의 책과 비교하며 읽는 재미도 있을 것 같다.

참고로 이 시리즈는 총 12권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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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2-01-28 12:5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요즘 들리는 소식들은 죄다 암울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북플에 들어오면 제가 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책을 만날 수 있어 좋아요^^
미국인 이야기, 찜합니다~~

거리의화가 2022-01-28 13:06   좋아요 3 | URL
네. 북플 들어오면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것 같긴 합니다...^^; 덕분에 사고 싶은 책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지만ㅋㅋ 미국인 이야기 저도 조만간 구매하려고요. 설 연휴 무탈하게 즐겁게 보내세요!

stella.K 2022-01-28 13: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 저 미국민인 이야기 벽돌책인데요?
12권까지 모으시려면 돈 많이 버셔야겠어요.ㅋㅋ

거리의화가 2022-01-28 14:14   좋아요 3 | URL
ㅎㅎ 벽돌책은 익숙한 편입니다^^; 책값은 늘 언제나 많이 들어가고요. 옆지기가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리네요...ㅋㅋ
돈은 많이 벌지 못하지만 그래도 지출하는 것들 중 책값이 가장 덜 아까운 것 같아요.

바람돌이 2022-01-28 15: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미국인 이야기 관심갖고 보다가 12권이라는 말에 살포시 접습니다. ㅎㅎ 이거 다 보려면 얼마나 많은 읽고싶은 다른 책을 포기해야할까싶어서요. 그러니까 제 미국에 대한 관심이 12권만큼은 안된다는
...ㅠㅠ

거리의화가 2022-01-28 15:46   좋아요 3 | URL
이제 3권 나왔으니 야금야금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도 읽는 노력과 시간이 들어가니 충분히 드실 수 있는 생각이죠^^ㅋ

mini74 2022-01-28 18: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헉 저도 미국인 이야기애 관심이 ㅠㅠ 12권이라니 ㅎㅎ 그저 윳지요. 정말 이 암담한 시기가 지나가고 그 끝에 빛이 좀 있길 바라봅니다. ㅠ

거리의화가 2022-01-28 19:09   좋아요 1 | URL
미국이 우리나라와 관련이 깊으니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죠. 공부하면 할수록 공부거리가 늘어요ㅎㅎ 이래저래 우울한 시기이지만 빛을 기다려봐야죠 미니님 명절 즐겁게 잘보내세요!
 

베버에게 정치의 가치는 집단의 욕구를 고심하거나 집단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있지 않다. 국가에는 그런 경제 사회 문제보다 훨씬 더 크고 가치 있는 잠재력과 목적이 있었다. 그에게는 근대적 국가 이성이 국민국가의 명망이자 영광이었다.

그는 자신이 활동하던 시대의 논란과 마르크스주의 연구를 통해 19세기 사회주의자들의 성패가 달린 다른 가치와 정치적 주장이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생산을 사적 통제에서 국가 통제로 전환하는 것이 과학적 사회주의의 최종 목표는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했을 것이다. 그러나 베버는 고집스럽게 ‘사회주의 기획’을 이런 볼품없는 옷가지로 묘사했다.

매우 일반적인 의미에서 지배는 사회적 행위의 가장 중요한 요소다. 무정형의 사회적 행위에서 합리적 연합이 출현하는 것은 지배 때문이자 그 지배를 행사하는 방식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지배의 구조와 전개는 사회적 행위의 방식과 목표를 향한 방향을 결정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베버에게 정치의 본질은 조직된 지배의 목적을 위해 쓰일 권력이다.

"‘민족’은 보통 그 집단의 특성을 배양해야만 보존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문화 가치의 우월성 또는 적어도 대체 불가능성 때문에 중요하다." 따라서 베버는 정치권력이 있는 이들이 ‘민족 관념’을 고취하는 한편 문화 지도자(지식인)들은 반드시 ‘민족 관념’을 환기하고 고취해야 한다고 이어 말한다.

정치적 삶의 자율성에 대한 베버의 관심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예는 그가 이상적 정치가의 특징으로 꼽은 내용에 있다. 정치에 ‘의지해’ 살아가기보다 정치를 ‘위해’ 살아갈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베버의 청원은 이중적 설명이 필요하다. 첫째, 진정 정치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내적 의미에서 자신의 삶’인 사적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정치를 만들어갈 것이다. 둘째, 재정적 수단이 충분해서 정치적 지위에서 얻는 보수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은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다. 다음으로 베버는 다음 내용을 인정한다. 정치가가 ‘정치로 벌 수 있는 수입에 경제적으로 독립적’이고 ‘경제적으로 일할 필요가 없는’ 존재여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하는 것, 즉 ‘완전한 불로소득자’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정치에서의 금권 선거와 금리 생활자 부유한 변호사로 이루어진 정부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사유재산 없는 대중은 비록 자신의 일상을 이어가기 위해 거친 투쟁을 벌이지만, 그런 걱정에서 자유로운 자산가의 ‘더 차가운 머리’에 비해 정치에서 일련의 감성적 동기, 감정적 특성에서 나오는 충동과 순간적인 인상에 휩쓸리기가 훨씬 쉽다. 베버에게 경제와 정치 조직은 별개고 그래야만 한다. 정치의 관심사는 삶과 생계의 관심사와 다르고, 이러한 사안들이 국가 권력과 관련되지 않은 국가적 관심을 얻게 되는 것은 위태로운 일이다. 경제적 삶은 오직 국가에 권한을 주는 역할을 할 때만 정치적이다. 국가의 관점에서 경제는 목적이 아닌 도구인 것이다. 단순한 생존은 선한 삶, 힘의 정치를 위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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