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허무함이 존재의 의미를 파괴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겪은 모든 시간과 경험은 과거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안전하게 보관되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 무엇도 그것을 훼손하거나 없앨 수 없습니다. - P18

철학적인 사색보다 환경이 중요하죠. 다섯 살 무렵, 피서지 하인펠트에서의 기억을 잊지 못해요. 눈부신 아침이었는데, 햇살이 눈꺼풀을 간질거릴 때 나는 눈을 감고 있으면서도 무언가 따뜻한 기운이 나를 행복하고 안전하게 감싸고 있는 느낌을 받았어요. 눈을 떠보니 아버지가 미소 띤 얼굴로 잠든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 P19

수용소에서는 틈만 나면 한 줄이라도 책을 쓰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니까요. 일분일초를 아껴서 의미 있게 쓰는 법을 그 시절에 몸에 익혔습니다. - P24

나는 회복탄력성이 좋은 사람입니다. 마음이 괴로울 때도 빨리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낙천적이고 삶을 즐기는 기질을 타고 난 것 같기도 해요. - P27

미래를 기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과거를 의미 있게 기억하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 P28

나는 정신과 의사, 심리치료사로서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 의미 없어 보이는 고통도 가치 있는 업적으로 바꾸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의미가 있다고 확신합니다. 로고테라피는 바로 이런 확신의 토대 위에서 체계화된 이론입니다. - P53

사람들이 ‘비정상이다, 미쳤다, 바보다’라고 규정하는 그들의 말을 잘 들어보면 진실인 경우가 많아요. 나는 이것을 ‘로고 이론’이라고 부릅니다. 로고테라피는 모든 것을 병리학적인 것으로 환원시키는 것과 맞서서 환자의 편에 설 것을 선포합니다. - P84

내가 그 상황에 처해 있지 않으면서 쉽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 P9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그 순간 나는 결심했습니다. 이 땅에서 부모님과 함께 있어야겠다고. - P100

프랭클의 아내로서 잘할 것 같은 여자가 아니라, ‘틸리’라는 존재 자체가 참 멋진 사람이었습니다. - P10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연휴는 왜 이리도 빨리 흘러가는지.

그래도 많이 읽고 놀았다고 위안을 삼아본다.


주말엔 개인 시간을 보냈고

월요일에는 시댁 사촌동생이 집에 놀러와서 점심을 먹었다.

집은 어제 가려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건너뛰고 낮에 해떴길래 다녀왔다.

쉬는 동안 많이 먹어서 며칠은 좀 덜 먹고 움직여야겠다 생각했다.



1월 북 결산을 올려본다.


총 9권을 읽었다.

대체적으로 읽은 책들이 좋았어서 기분이 좋다.


1. 그 중 가장 재미났던 책은? 버치문서와 해방정국

버치 중위를 통해 해방 후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미군정의 또 다른 시선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2. 도움이 된 책은? 남성됨과 정치

어려웠지만 얼마 남지 않은 대선 때문인지 시의적절했다는 생각이 든다. 여성들의 목소리가 더 커지길 바란다.

















이번 달은 대변혁 시리즈를 마무리하고 대한계년사 7권과

지난 달에 구매해둔 책들을 읽으려고 생각하고 있다.










p.s) 

민음사 일력을 샀는데 지나치는 경우가 많아서 공유해본다.

늘 슬픔을 참았던 경우가 많았어서 지나칠 수 없는 문구였다.


슬픈데도 슬퍼할 줄 모르면서

능히 도모하고 나아갈 수 있는 자는 없다.


정인보 「나라 잃은 백성의 슬픈 시」



그리고 검정치마의 Everything. 멜로디도 분위기도 좋아서 가끔 듣곤 한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2-02-02 21:4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화가님이 읽으신 책들은 다 어려워 보이지만 재미있을거 같아요~!! 책들이 좋아서 기분이 좋으셨다니 다행입니다~~!
검정치마 저도 완전 좋아하는데, 전 Hollywood를 젤 좋아합니다 ^^

거리의화가 2022-02-03 08:11   좋아요 3 | URL
네 다 좋았던 책이에요. 책을 고를 때 여러 번 읽어도 괜찮을 책들을 사려고 하는 편이거든요. 가볍게 읽을 용도는 이북으로 읽구요.
검정치마 노래들이 다 좋아요. 저도 할리우드 좋아합니다^^

얄라알라 2022-02-03 07: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일력이 지난지 4~5일 되는 경우가 자주있는 저로서는, 이렇게 일력의 문구까지 공유해주시는 부지런함에 리스펙트를~~. 거리의 화가님, 1월에 읽으신 9권 중 소프트 아이스크림 같은 책은 없어보이는데 1월에 무려 9권이라니 독서 스타트가 좋으시네요^^

거리의화가 2022-02-03 08:42   좋아요 3 | URL
ㅎㅎ 일력 사놓고 1월 중 쌓인 경우가 많아요ㅠ 그래서 공유하는 겸 저도 챙겨보자 생각해서 올렸답니다.
소프트아이스크림. 찰떡 비유에 빙그레 미소가~ㅎㅎ 1월은 제가 생각해도 많이 읽은 달입니다. 제 기준에서 4~5권 정도 읽어야 정상인데 부지런히 읽고 쓴 것 같습니다. 이달은 짧은 달이라 어떨지 걱정이 되네요. 계획한 책들 읽으려면 헛둘헛둘해야할 것 같습니다. 북사랑님도 2월 독서 화이팅입니다!

책읽는나무 2022-02-03 12: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제 차에서 검정치마 투데이즈 찾아 들으려다가 에브리씽 들었어요^^
오호~~음악적 교감이 하나 통했습니다ㅋㅋ
2월의 읽을 책들도 심오하군요!
암튼 화이팅입니다.^^

거리의화가 2022-02-03 13:02   좋아요 3 | URL
ㅎㅎ 검정치마 좋아하시는 분이 많네요.
저는 음색하고 독특하고 묘한 분위기의 멜로디가 좋아서 종종 듣곤 합니다.
투데이즈는 몰랐던 곡인데 들어보겠습니다^^ㅎㅎ
읽을 책이 좀 딱딱한 게 많지요. 그래도 이번달은 제 기준에선 말랑말랑한 책들을 넣는다고 넣었지만...ㅋㅋ
나무님이야말로 아이들 밥 해먹이고 교육시키고 쉬운 게 아니잖아요. 시간 쪼개서 책을 읽으시는건데 정말 대단하신거죠! 2월도 힘내서. 화이팅!

mini74 2022-02-03 18: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버치문서와 해방정국 거리의 화가님 리뷰 재미있게 봤어요. 좀 참았다 사야합니다 ㅎㅎㅎ 남성됨과 정치도 다들 평이 좋으신데 어려울 거 같아요 ㅠㅠ

거리의화가 2022-02-03 22:16   좋아요 1 | URL
ㅎㅎ 북플에는 책사랑 지기님들이 많아서 구매력들이 다들 월등하시죠. 저도 지난달 너무 많은 구매로 이번달은 아직 자제중입니다…ㅋㅋ 남성됨과 정치는 대선을 앞두고 있어서 그동안 배제된 여성들의 정치적 권리에 대해 생각해보실 기회가 될 겁니다.
 

19세기 네트워크의 형성 과정
철도, 선박부터 전보, 금융에 이르기까지.

19세기 중반부터 1차 대전이 일어나기까지 60년 동안은 전례없는 네트워크 형성의 시기였다. 이것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1차 대전 중에 많은 네트워크가 해체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후 수십년 동안 자기중심주의의 힘이 더 강해졌기 때문이다. 세계를 뒤덮는 네트워크의 형성을 ‘세계화‘라고 부른다면(화려한 색깔의 모호한정의이긴 하지만) 1860-1914년은 세계화가 뚜렷하게 진행된 시기였다. 우리는 두 가지 사례 - 대륙 사이의 인구이동과 식민제국의장——에 대해서는 이미 논한 바 있다. - P1910

식민지 인도와 반(半)식민지 중국은 하나의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두 나라는 자체적인 역량으로는 (민영이든 국영이든) 원양선단을 건설할 수 없었다. 이 방면에서 일본은 또 다시 아시아- 아프리카의 특수한 예외였다. 아무리 늦어도 1918년 이전에 일본의 군용과 민용 조선업은 다 같이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했다. 일본은 상업해운과 해상군사력에서 세계의 선도국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것은 일본민족 성공의 표지이자 동시에 성공의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 P1916

교통의 역사에서 세계화로 나아가는 강한 흐름은 2차 대전 이후, 특히 비행기를 이용한 장거리 여행이 더 이상 정치인, 기업가, 부호의 전유물이 아니게 된 20세기 60년대부터 형성되었다. 이런 발전의 기술적 기초는 항공 여객운송에 적용된 분사식 추진력이었다. 1958년 보잉 707 모델이 취항하면서 우리는 제트여객기의 시대로 진입했다. 19세기의 가장 대담한 환상으로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한실이 되었다. - P1919

철도의 건설과 운행에는 강철기술, 기계제조, 채광, 통신, 지질, 교량건설, 터널건설, 기차역 설계, 공사현장 조직관리, 자금조달, 인사관리,
운행시간 조정 등 대량의 전문지식이 필요했다. 특히 철도사업이 아직 과학으로 자리 잡지 못한 초기에는 임시변통으로 해결책을 찾아내야 했다. 기술문제는 해결책을 찾아낸다 해도 토지를 징발하고 보상해야 하는 법률문제가 동시에 등장했다. 이 밖에도 철도는 항상 중요한 전략적 의미를 지니는 정치적 화제였다. - P1921

이제 개별 시장 상호 간의 반응은 빨라졌고 가격 수준은 근접했다.
주문이 신속하게 이루어지면서 많은 업종이 대량의 재고를 가질 필요가 없어졌다. 이것은 소기업에게 특히 유리한 환경변화였다. - P1931

얼마 되지 않아 사람들은네트워크 접근권을 세밀하게 규정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식을갖게 되었다. 이 매체가 처음으로 사용된 크리미아전쟁에서 영국과프랑스의 지휘관들은 군사지식이 별로 없는 민간정치가들이 함부로보내오는 모순된 내용의 전보더미에 파묻혔다. 전보는 공정한 무대가 아니라 새로운 계층질서를 만들어 냈고 고위 관료들만 그것에접근할 수 있었다. 국외에서의 협상은 당연히 수도의 본부로부터접 내려오는 지시의 압력을 받게 되었다. 전권을 부여받은 노련한 외교관이 큰 틀의 외교를 연출하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 P1932

노동력으로서 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은 유럽화된 새로운 세계경제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에 이들은 상인으로서도 시대의 흐름을 놓치지않고 변화에 적응해나가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들에게 더 힘든 일은 공업과 금융업에서 종속적인 지위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1차 대전이 시작되었을 때 오직 일본만 이 분야에서성공했다. 일본의 공업은 아시아 시장에서 유럽/미국에 맞서 점차로경쟁력을 갖추었고 일본의 무역과 해운회사는 일본열도를 벗어나먼 곳까지 활동범위를 넓혔다. - P1941

19세기의 국제 화폐체계는 처음으로 몇몇 국가가 협력하여1540년대 이후로 전 세계에서 유통되어오던 귀금속의 흐름을 통제하려는 시도였다. 경제(와 기타) 방면에서 대외관계를 엄격하게 제한하던 국가 일본 그리고 특히 중국도 이런 화폐의 유통을 수용했고, (원인을 알지 못한 채) 화폐와 금속의 세계적 유통이 가져온통화팽창 또는 통화긴축의 피해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 P1951

19세기 70년대 초 이전에는 세계에서 영국이 유일하게 이런 통화체계를 채택하고 있었다. 영국에 대응하는 라틴화폐동맹이란 통화체계가 얼마가지 않아요절하자 금·은복본위제는 사라지고 유럽 각 국가는 앞다퉈 금본위제를 실시했다. 독일은 1873년에, 덴마크와 스웨덴은 같은 해에, 노르웨이는 2년 뒤에, 프랑스와 기타 라틴화폐동맹 가입국은 80년대에금본위제를 실시했다. - P1955

금본위제는 역설적이게도 자유주의가 같은 정도로 경제 메커니즘의 철칙‘에 굴복한 자본과 노동의 손을 잡은 경제질서의 규칙이자 상징이었다. - P1960

본질적으로 자본수출은 19세기 후반에 일어난 혁신이었다. 1820년무렵, 해외 직접투자는 아주 소액이었을 뿐만 아니라 전부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가 장악했다. 그러나 1850년 이후로 필요한 조건들이 점진적으로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차입국과 대출국 모두에서특수한 금융기구가 세워졌고, 신흥 중산층의 저축이 축적되었고, 해외투자 기회에 대한 인식이 생겨났다. 무엇보다도 유동자산과 그것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역사에 유례가 없는 혼합체가 사람들이 런던금융가라고 부르는 곳에 등장했다. - P1961

절대규모를 보면 지금은 백 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그러나 지리적 분포는 넓어지지 않고 서유럽과 북아메리카에 극도로 집중되어 있다. 세계의 자본네트워크는 무역네트워크나(1950년 이후의) 항공운수 네트워크처럼 고르게 두터워지지 않았다.
오늘날 라틴아메리카는 상당히 높은 정도로, 아프리카는 거의 완전히 자본의 흐름과 단절되어 있다. 이에 반해 거대한 규모의 자본이1913년에는 세계 금융체계의 주변부였던 지역(아랍산유국, 중국)으로부터 북아메리카와 서유럽의 중심도시로 유입되고 있다.
20세기는 국제금융의 탈세계화를 목격했다. 가난한 국가는 1차 대전 전과 비교해서 외국자본 도입 경로에 접근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좋은 소식이라고 한다면 정치적 식민주의가 몰락했다는 것이고, 나쁜 소식은 외국자본이 전혀 참여하지 않는 경제발전은 더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 P1967

1825년 이후 라틴아메리카 국가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한 새로운유형의 위기(국가채무위기)는 아무리 늦어도 19세기 70년대부터종의 지역적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 위기는 대부분 라틴아메리카국가 정부와 유럽 민간 채권자 사이의 충돌이었지만 정치적 또는 외교적 문제를 남기지 않고 해결된 적은 거의 없었다. 채권자는 돈을 돌려받고 싶었지만 쌍방 정부가 담판해야만 해결할 수 있었다. 따라서 금융제국주의가 국제금융시장에 강력하게 개입하는 경향이 있었다. - P197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동자의 처우가 개선되고 노동 환경이 좋아진 것이 불과 얼마되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1960, 70년대 아동과 여성 노동자들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생산 압박에 쫓겨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던 때가 얼마 되지 않았다.

① 마을은 행정단위다. 예컨대 마을은 정부의 징세 단위이며 심지어 법률적으로는 독립된 법인이 될 수 있다.
② 마을은 공동체가 공유하는 토지를 갖고 있으며 이 토지는 (러시아의 농촌 공동체 옵쉬나Obshchina처럼) 공동체의 결정에 의해서만분배되거나 재분배될 수 있다.

중국 남부지역에서 반드시는 아니지만 대체로 폐쇄적인 주민 거주지역과 맞물리는 (북부의 마을보다 좀더 확장된) 문중조직이 통합과조정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런 문중조직을 역사발전의 시각에서 본질적으로 낙후되었거나 나아가 ‘원시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문중조직은 고도로 효율적인 농업을 창조하는 조건이었다. 유사한 기능을 공유재산을 보유한 사원(寺院) 공동체가 담당했다. 이런 상황은 중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 P1827

서술하는 과정에 삽입되어 있는 중국과 인도의 대비에서 알 수 있듯이 세계의 양대 농업사회는 여러 면에서 유사했다. 농민은 원칙적으로 법률상 자유인이었다. 그들이 생산한 것은 일부는 시장에서 팔려나갔다. 경영의 가장 중요한 단위이자 원시 생산단위는 (때로는 소수의 하인과 고용 노동자의 도움을 받는) 가정이었다. 이 세 가지 특징은 인도/중국과 서유럽 —— 최소한 프랑스와 엘베강 서쪽의 독일의 공통점이면서 동시에 인도/중국이 19세기에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노예를 사용하거나 예속적인 노동에 의존하는 플랜테이션, 라티푼티움, 대형 농업기업과 대비되는 점이다. 그러므로 자유로운 서방과 노예노동에 의존하는 동방이란 이분법적 구분은 착오다. - P1832

19세기를 통틀어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농업노동은 육체노동이었다. 유럽의 대부분 지역과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26) 계층상황도 문화에 따른 차이는 없었다.
포메라니아(Pomerania)* 또는 폴란드 장원의 고용 농업노동자와 인도의 고용 농업노동자는 (각자 특유의 위계질서와 문화적 환경 안에놓여 있었지만)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었다. 물질적인 불안정 때문에 일거리를 찾아 사방을 떠돌아야 한다는 것은 그들의 생활환경과경험의 기본적인 유사성이었다. - P1834

자유주의 경제학은 국제교역이 ‘봉건적 제도를 해체함으로사람들을 낡은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노동의욕과 창의력을북돋울 것으로 예상했다.
예상은 실제로 현실이 되었다. 특히 외부의 이해관계가 개입되지않은 곳에서는 소농 경영자는 해외 판매망을 이용해 생산품의 판매처를 찾아냈다. 그러나 자국 정부(예컨대 일본)가 명확하게 수출을지지하고 이를 위한 법률제도와 필요한 사회기반시설을 건설했을때에만, 또는 식민정부가(정치적 안정을 위해 식민지 농민을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외국 플랜테이션 기업을 억제하는 상황에서만 장기적인 성공을 기대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이런 조건이 갖춰지지않았고 그 결과 외부의 이해관계가 우위를 차지했다. - P1835

식민지 플랜테이션은 전혀 새로운 형태가 아니라 구시대 노예제 플랜테이션이진화한 산물이었다. 플랜테이션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도구였으며하나의 예외도 없이 열대지역 국가에서 등장했다. 공업과는 달리 플랜테이션 경제는 국민경제 발전의 과정에 포함되지 않았다. - P1836

전체적으로 볼 때 19세기 라틴아메리카의 아시엔다는 폐쇄된 왕국이었다. 아시엔다 내부에서 농장주가 모든 일을 독단했다. 법률제도는 매우 선진적이었으나 경찰과 법원이 채무고용농의 이익을 보호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그들의 생존을 보장해주던 마을 공동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 P1839

19세기에 작업 장소는 새로운 모습을 갖추었다. 공장과 달리 조선소는 몇몇 문명에서 수천 년 동안 수공업노동 협업의 장소로서 알려져 왔다. 근대 초기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에서 조선업은 대기업 조직형식을 갖춘 가장 중요한 경제부문의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 시절조선업은 목수들의 세계였고 그 뒤로 공업화를 주도하는 부문이 되었다. - P1843

19세기의 공장은 새로운 특성 - 이중성 - 을 지녔다. 공장은 대의 은형 생산 장소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행위의 장소였다. 각종 협력의형태와 권력의 등급이 공장에서 먼저 나타난 후 사회의 다른 부문에확산되었다. 공장은 가정과는 완전히 분리된 순수한 생산의 장소였다. 공장에서는 새로운 작업 습관과 리듬이 필요했고, ‘자유로운 임금노동의 이념이 제한적으로만 적용되는 새로운 규범이 필요했다. 공장노동은 분업과 협력 - 노동자의 능력에 따라 분배되고 조정되는 이었다. 공장노동은 시발점에서부터 작업의 효율을 높이는 방식을 시험해왔고 마침내 1911년에 뛰어난 관리자문가 프레드릭 테일러(Frederick Winslow Taylor, 1856-1915)가 작업과정의 속도를이고 보다 과학적으로 작업과정을 통제하는 심리물리학적 최적화이론 — 이른바 ‘테일러주의‘(Taylorism) —을 창안해냈다. - P1844

공장에서 어린 여성노동자를 맞이한 것은 공포스러운 작업조건이었다. 그들은 감시받는 대형 숙사에 기거하면서 한 가지 채소 반찬만곁들인 쉰밥을 먹어가며 하루 15-17시간을 일했다. 중간 휴식시간은매우 짧았고 성폭력은 빈번했다. 작업은 단조로웠으나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누에고치를 삶는 솥 주변에서는 수시로 사고가 발생했다. 이런 환경은 무서운 폐결핵의 온상이었다.
같은 시기에 번성기에 들어간 면방공업의 작업조건도 이보다 나을게 없었다. 일본의 면방공업은 머지않아 견사공업보다 더 중요한 고용주가 되었다. 면방공업의 특징은 작업자를 극도로 피곤에 빠트리는 야간작업이었다. 1916년 이전까지는 하루 14시간 노동이 보편적이었다. 귀가 멀 정도의 소음 속에서 섬유조각이 떠다니는 공기를 호흡하며 아무런 방호장치도 없이 기계 옆에서 작업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기계에 말려들어가 목숨을 잃는 사고는 끊임없이 일어났다. - P1846

운하공사는 노동의 세계가 직면한 새롭고도 가혹한 경험이었다. 수공업 공방에서 공장으로 가는 길이 19세기의 유일한 길이 아니었다. 매우 다양한 배경의 비숙련 노동자 군단이 미국의 운하 건설공사장에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이들은 농촌에서 일거리를 찾아 나선 사람들, 새로운 이민자, 노예, 자유인 신분의 흑인, 여성과 아동이었다. 이들은 권력도 지위도 갖지 못했고 작업조건을 선택할 힘도 없었다. 이들이 연대하고 상호 부조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운하건설 작업에서는 조직적인 노동운동이 형성될 수 없었다. 지리적인 분포만 보더라도 운하건설 노동자의 작업 장소는 변방이었다. 그들의 세계는 공사 현장과 임시 숙소가 전부였다. - P1849

모든 대륙에서 철도건설 공사가 벌어지는 곳이면 지역의 경계를넘어선(흔히 국제적인) 새로운 노동시장이 형성되었다. 많은 대형 공사가 아시아 농촌사회라고 하는 거대한 노동력 비축기지로부터 비숙련 노동력을 조달했다. 반면 철도 운영에는 높은 수준의 기술인력 기관사, 열차장, 철도 순시원, 철도 수리공 등 ㅡ 이 필요했다. 가변적이기는 하지만 결코 사라진 적이 없는 인종차별의 벽 앞에서 멈추어야 했던 식민지 주민들에게 새로운 신분상승의 기회가 찾아왔다. 이 기회는 민족주의가 촉발한 권리요구와 관련성이 있었을것이다. 예컨대, 멕시코에서는 1910년의 혁명이 시작되기 전에 현지 노동자들이 미국이 출자한 철도회사에서 고위 기술직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을 벌였다. 전 세계에서 철도종사자 특유의 행태가 형성되었다. 철도가 국유인 곳에서 철도인의 행태는 더 뚜렷했고 ‘철도인은 공공의 권위를 대표했다. - P1857

선박은 군대와 플랜테이션을 제외하면 가장 폭력적인 작업 장소였다. 미국은 1850년이 되어서야 선상에서 행해지는 채찍 형벌을 폐지했다. 19세기 70년대까지도 영국 해군은 아주 잔혹한 형벌 도구인 끝부분이 ‘아홉 갈래로 갈라진 채찍을 사용하고 있었다. 장교가 수병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현상은 상선에서도 모방하는 완고한 관습이었다. - P1858

‘자유로운‘ 노동은 형식상으로나 법률상으로 어느 정도 모호하게정의될 수밖에 없다. 자유로운 노동이란 직접적인 외부의 압력이 없는 상태에서 맺어진 계약관계이며, 이 계약을 근거로 고용인이 자기노동력의 사용권을 고용주에게 제공하고 그 반대급부로서 금전적보상을 받는다. 원칙적으로 이 관계는 쌍방 모두에 의해 해제될 수 있으며 고용주에게는 고용인을 지배할 수 있는 어떤 권리도 주어지지 않는다. - P1866

노예는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자신을 정의할 수 없고, 노예제 덕분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치스러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노예주 역시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자신을 정의할 수 없다. 본질적으로 대서양 세계의 노예제는 일종의 노동착취 관계였고, 논의는 그런관점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 P1869

노예해방의 경험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자유란 전부가 아니면 전무의 문제도 아니라는 점이다. 자유는 다양한 모습과 다양한정도로 찾아왔다. 한 사람이 자유로운지의 여부는 학술상의 질문이고 한 사람이 얼마나 자유로운가, 무엇을 할 수 있을 만큼 자유로운가, 지금까지 어떤 권리를 박탈당해왔는가, 최근에 또 어떤 권리를박탈당했는가 하는 것은 현실적인 문제이다. 브라질처럼 물질적 생존을 위한 사전조처도 전혀 없이 ‘노예에게 자유를 주는 것’과 노예에 대한 사심 없는 배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해방노예는 사회와 자연스런 유대를 형성하지 못한 취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존재였다. 그들이 시장경제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초기의 완충장치가 있어야 했다. - P1871

1861년의 농노해방은 문화적 혁명이 아니었다. 전혀 목가적이지않은 농촌 상황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거칠고 저속한 농촌사회의 기풍은 개선되지 않았으며, 농촌의 교육수준을 높이고 보드카 소비량을 줄이겠다는 계획도 별 성과를 내지 못했다. 해방‘은(서유럽 계몽주의의 관점을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일어난 일들의 실상을 묘사하기에는 지나치게 과장된 용어이다. 미국 남부에서 해방노예는 ‘재건‘ 이후에도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어떤 도움도 받지 못했다. - P1875

미국법원이 1821년에 처음으로 노동의 의무는 자발성을 바탕으로해야 하며, 노동자가 작업장을 떠나기로 결정했을 때 물리적인 제재를 받는다면 자유로운 노동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이런 해석은 노예제를 둘러싼 논쟁에도 영향을 미쳤다. 미국 북부의 주가 남부의 연방탈퇴를 반대하는 전쟁에서 ‘자유로운 노동‘은 전투구호가 되었다.
이와 함께 노동자에 대한 신체적 폭력의 사용은 본질적으로 불법으로 규정되었다. 미국 법원의 판례는 독자적인 가정을 가진 노동자와주인으로부터 부양받는 예속노동자·하녀 하인 사이의 구분을 없앴다는 점에서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이 방면의 법운용에서 미국이 영국보다 앞섰다. - P1882

노예제와 (특히 러시아의) 농노제가 그랬듯이 일종의 과도적 단계가 있었다. 영국에서도 비금전적 강제에 의한 노동은 하룻밤 사이에 사라지지 않았다. 성문법과 실제 사법판결 모두 기업주와 농업 고용주에게 노동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각종의 강제적인 수단 - 오늘날 우리가 ‘강제구류‘라 부르는 법절차와 유사한 —을 인정해 주었다. 수십 년 동안 강제노동의 잔재가 자유로운 임금노동의 관계 속에 은폐되어 있었다. - P1883

세기 말에 등장한 새로운 요소는 조직적인 노동운동이었다. 집단으로서의 노동자가 강대한 자본소유자에게 도전할 수 있는 조건이점차 형성되어갔을 때 노동시장의 불균형이 교정되었다. 그러나 국가입법으로 노동자와 자본가의 담판(단체교섭, Collective bargaining)이 가능해졌을 때 노동운동은 비로소 돌파구를 찾았다. 여기서여러 장애를 넘어온 자유로운 노동의 발전은 하나의 역설과 마주쳤다. 노동자 쪽에서 담판을 독점하는 조직을 형성하여 시장의 자유를제한해야만 노동자 개인은 노동력을 구매하는 쪽이 갖고 있는 통제수단 - 일자리를 찾는 노동자를 서로 경쟁시키고 언제든지 해고할수 있는 힘 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 P188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각국이 언제 도약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시점을 확정하려는 시도는 처음부터 잘못 설정된 문제이다. 어떤 국가의 공업화는 갑자기 시작되었고 어떤 국가의 공업화는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시작되었다. 어떤 경제는 돌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고 어떤 경제는 몇 차례나 도움닫기 과정이 필요했다. - P1745

19세기 중반이 되자 거의 모든 지역에서 공업화는 정부의 지지를 받았다. 상업적 교류와 국제협약(자유무역을 포함하여)은 전체 유럽시장의 통합을 촉진했다. 유럽대륙의 문화적 동질성이 과학기술의 교류를 더욱 쉽게 만들었다. - P1746

19세기의 마지막 사반세기에 선도 업종의 전환이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 밖에도 많은 새로운 상황이 출현했다. 경제적으로 가장 선진적인 국가에서 생산방식의 전반적인 기계화가 실현되어 공업화 이전의 소규모 공방‘ 이사라졌다. 자영 소기업주를 대체하여 고용된 직업적 경영자가 사회와 문화의 주류를 형성했다. 이와 함께 주식시장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는 유한책임회사가 흥기하기 시작했고 민간기업의 관리가 관료화되면서 화이트칼라‘라는 직업계층이 두각을 나타냈다. 생산이 집중되고 카르텔이 형성되면서 전통적인 경쟁 메커니즘이 제약을 받게되었고, 다국적 콘체른이 등장했으며, 상표가 마케팅의 주도적인 요소가 되었다. 따라서 이런 목적으로 각지의 협력자와 손잡고 만든 전지구적 판매 네트워크가 등장했다. - P1748

아시아의 근대 초기에 대한 적극적인 재평가는 "왜 유럽인가?" 라는 오랫동안 거의 모든 분석이 다 끝난 화제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러므로 유럽의 장점과 업적(로마법, 기독교, 인쇄술, 정확한 자연과학, 합리적인 경제관념, 경쟁적인 국제체제, ‘유럽인의 개인주의‘ 등)을 하나씩 열거한뒤 유럽 이외에는 이런 조건을 갖춘 지역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두리뭉실한 결론을 내려서는 설득력이 없다. 근대 초기의 유럽과 아시아는 상호 접근이 늘어갈수록 그들 사이의 질적·양적 차이는 좁혀졌고 (19세기 중반에 출현한) 세계를 성공자와 실패자로 나누는 이분법은 더욱 지지를 받기 어려워졌다. - P1750

에너지원은 19세기라는 음악의 주선율이었다. 그전까지 사람들에게 익숙한 에너지원은 (주로 불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자연의 힘이었지만 이제는 보이지 않으면서도 효능을 발휘하는 힘, 사람들이 상상도 못한 여러 가지 기능과 작용을 하는 힘이 되었다. 19세기에 자연과학의 이상은 더는 근대 초기의 기계장치가 아니라 역동적인 에너지원과의 상호관계에 있었다. 그 밖의 과학 분야도 모두 이런 경로를 따라갔다. - P1755

19세기의 공업문명은 화석연료에 의존했고 에너지의 보다 효율적인 기술적 · 기계적 전환이 꾸준히 일어났다. 석탄을 연료로 하는증기기관의 사용은 그 자체의 나선형 발전과정을 열었다. - P1758

에너지가 풍부한 유럽은 비서방세계와 마주할 때 "에너지가 넘쳤다." 이 시대의 문화 영웅들은 무위도식하는 명상가, 고행승, 과묵한학자가 아니라 정력이 넘치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vita activa) 실천가, 피로를 모르는 정복자, 두려움을 모르는 여행가, 지칠 줄 모르는 탐색자, 독재적이고 오만한 기업 경영자였다. 이들은 가는 곳마다 개인적인 패기와 활력을 통해 서방세계 힘의 본질을 보여줌으로써 찬탄과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서방의 현실적인 우위는 태생적인 속성처럼 비쳤고 나아가 인종적 우위를 보여주는 표지로 인식되었다. - P1764

수출주도형 경제의 거시경제적 성공 여부는첫째, 생산이 노동집약적 가족기업에서 이루어짐으로써 수출에서발생한 수익이 국내에 남아 사회 내부에 비교적 균등하게 배분되는지, 둘째, 수출상품 생산의 주력 형태가 다량의 저임금노동으로 생산하고 소유권이 외국기업의 수중에 있는 플랜테이션 또는 광산이어서 대부분의 수익이 국외로 흘러나가는지에 따라 결정되었다. 일반적으로 첫 번째 유형의 구조가 두 번째 유형의 구조보다 국민경제와사회 전체의 발전에 유리했다. 두 번째 유형의 구조에서도 경제성장은 일어났지만 고립된 지역에 국한되어서 다른 경제 영역에 자극효과를 주지 못했다. 이 법칙의 중요한 예외는 남아프리카뿐이었다. - P1769

1912-20년, 중국 공업의 성장률은 세계에서 가장 높았다.88) 1920년 무렵, 중국은 취약하기는 하지만 발전 잠재력이 있는 공업화 경제의 기초를 갖추었다. 군벌의 혼전으로 인한 내정의 혼란, 경제발전 정책을 추진할 강력한 정부의 부재, 일본의 제국주의정책은 중국 경제의 도약단계가 반세기나 늦춰진 주요 원인이었다.
1980년 이후 위대한 도약이 시작되었다. 그 전의 중국 공업화 역사의특징은 제국 말기의 정부 지지를 거의 받지 못한 지체된 발전과정이아니라 이미 시작되었다가 저지된 1920년대의 도약이었다. - P1773

‘낙후‘란 상대적인 개념이다. 이 개념을 사용할 때는적용 대상이 누구인지 밝혀야 한다. 어떤 시점에서는, 특히 19세기말에는 유럽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낙후한 지역은 분명히 인도나 중국의 비교적 발달한 지역보다 앞서 있지 않았다. 경제적 성취를 판정하는 잣대는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소수의 대형 성장 지역이었다. 인도에서는 정부의 정책 때문이 아니라 민간 기업가의 결심의 결과로1910년 또는 1920년 무렵 몇몇 영역에서 대규모 공장생산이 등장했고, 이로부터 자기이익을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낼 줄 아는 공업 프로레타리아 계급이 형성되었으며, 인도의 도시지역에서 ‘현대화’를 기치로 내건 공업화와 기타 발전과정이 나타났다. 식민통치를 받지 않았더라면 인도 경제는 ‘좀더’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인가? - P1776

메이지정부는 지속적으로 국영경제를 건설할 생각이 없었다. 초기 단계의 자극을 제공한 후 정부는 점차로 대다수 공업 분야에서 빠져나왔다. 이것은 정부의 예산부담을 줄이기 위한 조치였다. 기업계의 선두주자들도 공업화를 전체 일본을 위한 애국사업으로 생각했다. 사업의 동기는 개인이익의 최대화가 아니라 조국을 위한 봉사였고 미국식의 놀라운 사치성 소비(사회학자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Veblen이 말한 과시성 소비)를 비난했다. 이런 국가관의 결과로 기업은 짧은 시간 안에 습득한 세계시장에서의 귀중한 경험을 서로 나누어 가졌을 뿐만 아니라 신속하게 사회로 전파했다. 관료와 자본가들은 다양한 공업구조를 구상하고 또 실현했다. 이로써 일본은 수입의존성을 최대한 탈피할 수 있었다. 이런 정책은 국가의 안보를 고려한것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메이지 과두체제는 물질적 발전의 약속과 실현을 통해 자신의 취약한 대중적 지지기반 — 어쨌든 그들은 전통적인 정치질서를 파괴했다 을 개선하고 넓히려는 생각을 갖고있었다. 이와 더불어 적극적으로 투자하려는 민간 기업인들도 충분했다. - P1780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미국 공업화의빠른 속도를 지나치게 극적으로 서술해서는 안 되며 미국 공업화의장기 연속성을 주목해야 한다. 그 밖에도 미국의 공업화는 주로 자본주의 시장역량의 자유로운 발전이란 법칙을 따랐지만 그것이 성공요인의 전부는 아니었다. 1862-1913년 사이의 (중간에 두 명의 민주당 대통령이 집권한 시기를 제외한) 공화당 집권기에 연방정부는 공업화를 정책적 사업으로서 추진하면서 전국 시장의 통합, 보호관세, 금본위 화폐제도 등 중요한 제도를 실시했다. 정부의 지원이 전혀 없는 공업화는 - 일부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이것이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고 실현가능하다고 주장하지만 ㅡ 역사적으로 예외에속한다. 서방의 자유주의 공업화와 동방의 국가계획 공업화란 양대모형이 선명하게 대립한 상황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았다. - P1781

1913년 무렵에 몇몇 국가에서는 이미 전 지구적 범위에서 활동하는 국가자본주의가 등장했다. 공업화,구체적으로 말해 현지 에너지원을 이용하여 발전한 기계화된 생산은 모든 사례가 지역적 특성에 기반한 발전과정이었다. 반면에 19세기의 자본주의는 점진적으로 지역적 기업 활동을 전 지구적 범위의활동으로 확장시킴으로써 더 많은 가능성을 창조한 활동이자 경제제도였다. - P179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