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이 이 사회의 비참 또는 관계의 한계를 증거한다는 점을 당연히, 여전히 생각한다. 죽음이 아니라면 산 자들은 삶을 근본적으로 성찰해낼 방법이 별로 없는데, 죽음이 만연해 있어 무감해져가는 듯하다. - P6

거대한 패배는 역사의 거시적인 변화와 주체의 한계(또는 오류), 대중의 이반 같은 것들과 함께 온다. 또는 그렇게 반추된다. 그러나 실제로 현실에서 그 모든 것은, 패배는, 매우 느닷없이 닥쳐온 것 같았다. 그것이 남긴 의미를 되살려 패배 속에서도 무언가를 발견하려 누군가들은 애썼지만 설득력이 없었다. 그것은 확실한, 재앙 같은, 돌이킬 수 없는 패배였다. - P20

20대는 ‘삶/죽음’을 피상적으로만 느낄 뿐 사유하지는 못하는 것 아닐까, 그것은 그들의 삶을 이루는 젊은 몸뚱이와 마음 속 불길 때문이다. 그 사정은 스스로 죽은 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삶/죽음’의 의미를 늙은이의 방법으로 찬찬히 숙고해보지 않은채 죽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그들의 타나토스(죽음-본능)는 너무 뜨거운 에로스(삶-본능)가 순간 전화한 것이다. - P21

젊어 죽은 자들의 삶/죽음 자체를 재구성하고 그 비극을살펴보는 것은 윤리적이고 실존적인 작업이다. 그것은 어쩌면그렇게 젊어 죽은 자 자신도 알지 못하던 삶의 비의(悲意), 우리의 삶과 죽음 전체 또는 삶과 죽음의 변증법에 대한 것이다. 또한 ‘전체로서의 삶‘에 배어 있는 영성과 초월성을 생각해야 하는인간적 의무에 관계된 것이다. 익히 알려져 ‘열사‘라 불리는 이들뿐 아니라 때로 심지어 기타 열사들이라고 불린 그런 범칭(凡稱) 속에 개별의 삶/죽음을 가두지 않기 위한 것이다. 이른바 ’명문대생이 아니어서, 또는 언론의 관심을 받지 못해서 아예이름이 불리지도 못한 죽음들에 대해 말하고 쓴다는 것은 일종의 초혼(招魂)이며 애도다. - P26

나는 무덤가에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여기 거대한 공동묘지가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에 있는사이버 묘소다. 여기에는 민주화운동의 과정에서 세상을 떠난열사·희생자의 이름들과 삶/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수집·망라돼 있다. 대부분 청춘남녀인 그들의 꽃 같은 얼굴 사진도 있다. 이 사이버 무덤은 세계에서 드문, 가장 큰 정치적 공동묘지인지모른다. - P34

‘열사‘라는 요절한 사람의 도덕적 헤게모니는 살아남은자의 슬픔‘을 구성한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1980-1990년대 운동권의 집단적 심성을 가장 적절히 시화(詩化)하여 표현한키워드였다. 이 같은 집단심리적 과정이 곧 운동을 위한 윤리적동원의 기제로 오래 기능했다. 그리고 이는 한국 운동정치 특유의 ‘열사의 정치‘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진정성의 레짐과 정치가 이제 불가능해졌다는 주장이 맞다. 죽음의 권위와 도덕적 헤게모니가 모두 소실되어 과거의 것이 돼버렸다는 것이다. - P39

자결‘이냐 ‘자살‘이냐 하는 양자 선택에서 어느 하나가 정답일 수 없다. 그러나 어떤 경우는 ‘자결‘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들은, ‘열사‘에 대해 ‘자살‘이라는 부정적 뉘앙스의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뭔가 불경하거나 무례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도 전태일 열사‘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가리켜 ‘자살‘이라 하면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 P45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 조직에 속해 있지 않았으면서도민주화에 대한 뜨거운 열망으로 자기 목숨을 버린, 그야말로 ‘독립적이고 자생적인 사회적 죽음‘도 많았다는 것은 반드시 기억할 만하다. 말 그대로 무명(無名)‘인 이런 시민들에 의해 ‘민주화는 가능했을 것이다. - P46

열사의 죽음이라는 비극은 그것을 직접 목도하거나 (추)체험하는 자들에게 가장 극적인 도덕적 고양을 이루게 할 뿐 아니라, 아예 도덕적인 퇴로를 차단하는 공포와 숭고의 기획이다. - P55

전태일의 이름과 그 이야기가 계속 호출되고 만들어지는 이유는, 단지 전태일이 박정희 식 축적체제의 피해자이고 여전히 한국 사회가 약자에 대한 착취와 ‘근로기준’을 무시한 노동체제로써 ‘부’를 축적하며 희생자들을 만들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리고 또 어떤 이들이 비판적으로 말하듯 전태일이 의례화된 ‘열사 정치’의 어떤 시조 같은 존재여서도 아니다. 전태일은 가장 낮은 바닥에서 일어난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저항자이며 실천가였다. 자신보다 더 여리고 힘든 타인을 늘 돕고자 했고, 친구들과 함께 조직을 만들어 국가와 지배에 저항했던 것이다. - P59

지금 우리 사회에는 ‘강성 노조가 이른바 국민경제와 노사관계에 해악을 끼쳐왔다는 선동의 목소리가 높다. 이러한 비난은 아마 전노협과 민주노총으로 이어진 노동운동의 비타협성‘에 대한 비난의 맥락 안에 있는 것일 테다. 여기에는 보수언론은 물론 중간층적인 시민사회나 일부 지식인들도 동참해왔다. 최후(?)의 수단이어야 할 파업이 마치 민주노조운동의지표라도 되는 양 ‘투쟁 만능주의‘와 ‘비타협주의‘가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키며, 나아가 대중성의 상실‘과 노동자들 사이의 분열로 귀착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 P72

노조의 전투성은 "기업별 노조체계 속의 노동자들이 연대성을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자연스럽고 또 의식적으로 추구해야 했던 것"이며, "민주노조운동은 바로 연대투쟁"이라는 자각도 포함한 것이었다.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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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플 앱의 문제인건지 내 손가락의 문제인건지 모르겠지만

분명 어제 책 읽었어요를 눌렀건만

오늘 아침에 확인해보니 읽는중이다 라고 나오는 것이다.

이게 한두번이 아니라 몇 차례는 겪은 일이다.

이거 나만 겪는 일인가요?^^;


어쨌든 주말에는 대변혁3을 읽음으로써 시리즈 읽기를 마무리했다.








독자들은 19세기 세계사를 에릭 홉스봄, 베일리와 오스터 함멜 저작을 통해 다양한 시각으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다만 베일리는 번역서가 없다는 것이 아쉽지만.(알라딘에서는 검색해도 없군;;;)









주말 저녁 시간에는 중드를 보았다.

40부작 정도 되는데 계속 미루다보니 너무 오래 걸려 시간을 내서 봤더니 이제 거의 다 봐간다.

제목은 설중한도행이다.

간만에 무협물로 괜찮은 듯 싶다.

처음엔 진도가 안나가서 그랬는데 그걸 넘기고 나니 순행하고 있다.


이번주부터 휴일도 없으니 정말 정상 출근하는 느낌이다!

오미크론 폭풍으로 하루가 다르게 확진자가 늘고 있다.

출근 예약버스를 타는데 사람들이 꽉꽉 차 있어서 불안할 때가 있는데 KF94 마스크를 방패삼아 다니고 있다.

다들 모두 건강하시길.


다시 열독. 열걷기 들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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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2-07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카는 팀장확진으로 재택이라고. ㅠㅠ 쬐금 좋아하더군요. ㅠㅠ 거리의 화가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 ~~

거리의화가 2022-02-07 14:47   좋아요 1 | URL
언제 확진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같습니다. 저는 지금껏 PCR 검사 자체를 한번도 받은 적이 없는데 운이 참 좋은 케이스인듯해요. 미니님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보통 책 주문을 할 때 몇 권 이상 주문해서 거의 박스로 받는데

오랫만에 한 권의 책을 받았고 그것은 이번 달 여성주의 책이다.

지퍼백에 포장되어 온 책이 생경했다.



제법 두꺼워서 열심히 읽어야할 것 같다^^;



이틀 전 놀라운 일이 있었다.


지난 주 내가 읽고 싶은 책이라고 소개했던 책인 '우리가 서로를 잊지 않는다면'



책을 쓴 저자 분께서 내 이야기에 응답을 해주신 거다.

지나가다 아마도 내 글을 보신 모양이다.

리뷰를 쓴 것도 아니고 소개글이였을 뿐인데 큰 인사를 받은 것 같아서 민망스럽기도 했다.


좋은 책은 독자들의 시선을 받아야 하고

더 많은 독자가 읽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이달 말쯤 책을 구입해 읽어볼 참이다^^


오늘 저녁은 옆지기가 버터문어구이를 해주어서 이것만으로 배부르게 먹었다.

문어, 오징어 이런 류를 워낙 좋아해서 금방 뚝딱 했다.



이제 역사저널 그날 보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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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05 21: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2-05 2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식

19세기 중반 과학자들 사회에서 과학의 엄격한 보편성, 무조건적 필요성, 절대적인 진리성을 버리고 지식의 자성적 특징, 유효조건, 상호주관성, 독립성을 강조하는 과학의 새로운 개념이 확산되었다. - P2080

중국에는 언어훈련을 받은 인재가 전혀 없었고, 이것이 중국과 서방의 불균형한 관계에서 중국 측 열세의 한 요소였다. 황실은 오랫동안 왕조의 전통을 지키느라 ‘오랑캐’가 중국어를 배우는 것을 강력히 막아왔다. - P2088

메이지 시기에 보다 집약적으로 서방 지식의 수입이 가능했던 이유는 서방의 전문가를 초빙했을 뿐 아니라 번역인재를 체계적으로 양성하는 제도가 수립되었기 때문이다. - P2089

유럽 각 민족은 언어공동체로 간주되고 또 그렇게 선전되었다. 고상한 문어는 모든 민족의 핵심적인 성취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여러 지역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말하는 언어는 그 지역의 풍속과 강고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 P2093

19세기의 가장 중요한 문화적 진보 가운데 하나는 문해력의 대규모 확산이었다. 대중적인 문해력의 보급은 하나의 과정이었다. - P2095

엘리트들이 문해력 보급에 대해 보인 반응은 이율배반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이성적인 읽기와 모범적인 문화생활을 통해 ‘보통사람’을 계몽시켜 미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한편으로 읽고 쓰는 능력의 대중화는 일반적으로 명예와 권력의 등급질서의 변혁을 유발하거나 현존질서를 건드릴 수 있었다. - P2099

현대 이전 사회에서 기타 국가와 비교할 때 중국의 읽고 쓰기 교육은 높은 수준이었으나 19세기에 들어와 중국의 읽고 쓰기 교육은 거의 정체되었다. - P2104

국가가 청년의 공식교육을 독점적으로 통제한다는 구상은 19세기의 혁명적인 혁신이었다. - P2109

몇몇 국가에서는 대학생들의 정치적 행동이 관심을 불러일으킬 때라야 대학과 관계없는 사람들이 대학의 존재를 의식하게 된다. 19세기 초가 되자 ‘대학생-청년-저항’이란 연상의 고리가 형성되었다. - P2117

19세기 말이 되자 새로운 연구기관 이 생겨났지만 독일 개혁가들의 기본 구상은 연구 기능을 연구기관으로부터 대학으로 옮기고 독립적인 연구기관을 대학의 깃발 아래로 결집시키는 것이었다. - P2125

1880년부터 미국의 부는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대학을 설립하여 자신의 이름을 영원히 후세에 알리려는 부호들이 속출했다. - P2130

일본인들은 독일 역사학파가 제시한 사료비판과 실증주의를 흡수했으나 독일 역사학의 철학적 방법론과 문학적 서술 기교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 P2132

개별적인 지식의 이동성은 차이가 많았다. 어떤 지식은 다른 지식보다 쉽고 빠르게 움직였다. 유럽 지식은 내재적 우월성 때문에 자연스럽게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는 오래된 관념은 전혀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단순한 평가였다. 이런 평가는 지식의 접촉과 전파 과정이 일어난 특수한 문화적 정치적 상황을 무시한다. - P2136

언어의 관점에서 번역은 거대한 도전이었다. - P2138

일본의 회화는 유럽의 아방가르드가 당면하고 있던 문제에 해답을 제시해 주었다. 모더니즘 예술운동의 선봉에 서 있던 유럽 예술가들은 유럽의 영향을 받지 않은 일본의 예술작품에서 자신들의 노력과 일맥상통하는 방향을 발견했다. 바로 이 시기에 유럽의 일본예술에 대한 열광과 일본의 유럽예술에 대한 열광이 동시에 정점에 도달했다. - P2141

서방의 조성음악이 이국의 성소를 흡수하여 불안정해진 곳에서 아시아 음악이 깊은 영향을 미쳤다. - P2142

아무런 구분 없이 구원종교의 발생지로 인식되던 ‘아시아’는 비이성주의의 상징이 되어 서방의 이성주의와 논쟁적으로 맞서게 되었다. - P2143

과학의 제도적 확장은 자연과학과 의학 영역뿐만 아니라 인문학과 사회과학 영역에서도 일어났다. 이런 개념은 19세기 말에 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미 있어왔지만 이 시기에 과학계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 P2145

유럽에서만 동방학이 형성되었을 뿐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는 20세기 말이 되어서야 서방학의 싹이 나왔다. - P2151

당시에 문자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자위능력을 갖춘 국가를 형성하지 못했으며, 도시생활이 극히 일부이거나 아예 없는 유럽 이외 지역의 사회에 대해서는 동방학의 어문학 연구방법을 적용하여 연구할 수가 없었다. 이른바 ‘미개민족’ 또는 독일어로 ‘원시민족’에 대해서는 19세기 60년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새로운 과학인 민족학이 주도하여 연구했다. - P2153

19세기 서방의 타자 연구의 학문적 발전은 그 속의 불쾌한 교만에도 불구하고 비유럽 문화의 역동적인 학문 활동에 대한 제국주의의 파괴적인 침입이면서도 동시에 그 시대의 세계화된 인문학의 기초를 놓은 동력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 P2156

모든 학과 가운데 지리학은 서방의 제국주의적 확장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 P2157

미슐레와 릴은 같은 시기에 현재와 과거의 사회 저층의 생활을 묘사했다. 그들의 작품에서 흘러나오는 사회 저층에 대한 동정심과 극히 사실적인 기술 방식은 당시로서는 보기 힘든 것이었다. 릴은 독일에서 ‘민속학’이라 불렀던 학문분야를 창시했다. - P2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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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급제도

그 시대의 대부분의 이론은 ‘유럽 중심적’이었지만 최소한 메인, 뒤르켐, 베버의 이론에는 비유럽 지역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원칙적으로 비유럽 문명세계의 후발민족은 피부색과 신앙에 관계없이 사회진보의 보편적 모형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믿었다. - P1991

초기의 상황이 지역마다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등급에서 계급으로’의 모형은 유럽사회의 변화를 불완전하게 묘사할 수 있을 뿐이다. 19세기가 시작되었을 때 ‘등급’은 모든 유럽사회에 적용될 수 있는 주요 구분원칙은 아니었다. 1800년 무렵 ‘등급사회’는 세계 기타 지역에서는 흔치 않았다. - P1993

족내혼, 기생계층, 정결금기를 기반으로 한 힌두교 카스트제도는 전 현대사회의 인도에서의 등급 구분에서 유럽의 전통적 계층사회와는 다른 규칙이 적용되고 있었다. 이 규칙을 식민주의가 자기목적에 맞게 강화했다. - P1994

19세기의 세계사회사는 대부분 이민사와 중복되며 디아스포라와 그 결과로서 형성된 새로운 프런티어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 P1995

가톨릭 고위 성직자나 유대인 거물 금융가를 제외한다면 19세기의 귀족은 유럽사회에서 가장 국제화된 집단이었다. 그들은 서로 알고 있었고, 서로의 등급을 평가할 수 있었다. 행동규범과 문화적 이상을 공유하고 있었고, 필요할 때는 프랑스어로 대화할 수 있었다. 또한, 국제 혼인시장에 참여했다. 등급이 높을수록 재산이 많았고 국제적인 교제 네트워크에 접촉하는 면도 넓었다. - P1999

빅토리아시대에 궁정귀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몇몇 사회영역에서 지도자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반대급부로서 사람들의 감사와 복종을 누렸다. - P2003

벵골과 인도의 기타 지역에서 20세기 초에 농촌의 주도 계층이 된 집단은 자민다르가 아니라 토지를 소유한 중간 규모의 농민이었다. - P2007

1869년 이후 일본은 단계적으로 사무라이 신분을 폐지했다. 가장 치명적인 경제적 타격은 연봉제도의 폐지였고 가장 심각한 신분적 굴욕은 1876년에 시행된 칼을 찰 수 있는 특권의 폐지였다. 이제 사무라이는 개별적으로 활로를 찾아나서야 했다. - P2009

신사는 통치자와의 접근성, 국가를 유지하는 역할, 고전에 통달한 지적 능력을 바탕으로 한 세계관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귀족과 유사했다. 이 밖에도 두 가지 공통요소는 토지에 대한 통제권과 육체노동으로부터의 이탈이었다. 여러 면에서 신사의 기능은 유럽 귀족과 대응했다. - P2014

‘부르주아계층’이란 개념의 기만성은 부르주아계층의 생활방식에서 나왔다. 부르주아는 (계층)’상승’을 추구하면서 그 반대의 경우를 가장 두려워한다. 귀족은 몰락해도 귀족이지만 몰락한 부르주아는 사회적 지위를 완전히 상실한 낙오자일 뿐이다. - P2018

프티 부르주아는 19세기에 예외적으로 지역화된 존재였다. 그들의 경제활동 반경은 상시 접촉하는 이웃의 범위를 넘어가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 P2022

진정한 부르주아는 프티 부르주아보다 사고의 지평이 넓고 자본을 소유하고 있으며 육체노동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 P2024

농업과 전원생활과 정통문화보다는 상업이나 비정통적 지식과 관련된, 나아가 시야가 ‘교회의 첨탑’을 넘어서는 직업과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이 지난 어떤 시대와 비교하더라도 중요해졌다. 이런 직업, 생활방식, 사고방식의 주체는 흔히 전통을 버린 새로운 형태의 사회세력, 준 부르주아였다. - P2029

유럽과의 상업적 접촉이 시작되면서부터 비유럽 준 부르주아는 중간에서 거래를 알선해주는 ‘매판’의 기능을 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현지 교역 네트워크와 접촉하는 경험을 넓히고 이 네트워크를 세계경제와 연결시켰다. - P2032

세계 어디에서나 ‘중산계급’은 현대적이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19세기 말에 드러난 현대성은 아시아의 준 부르주아 계급 엘리트에게는 양날의 칼과 같은 선물이었다. 현대성은 보편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권위를 갖추기 위해서는 문화 중립적이고 초국가적이어야 했다. - P2036

캐나다와 뉴질랜드 같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유럽사회는 식민지에서 파편화되고 균열된 상태로 복제되었다. - P2041

19세기의 새로운 사건은 새로운 코스모폴리탄 부르주아계급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서방의 부유한 국가에서 원거리 자본이익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집단이 형성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부르주아 코스모폴리타니즘의 실패한 유토피아가 등장했다. - P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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