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괴물.

저자인 크리스테바는 페미니즘 관점으로 대중문화를 분석해왔다고 한다.
이 책은 공포영화에 등장하는 여성괴물에 대한 이야기가 주제이다.

공포영화 리스트 중 아는 것이라곤 아주 어렸을 적 본 에일리언 빼곤 없다.
잔혹영화를 싫어하며 공포영화도 거의 보질 않는다.

과연 이 책을 다 읽을 때까지 리스트에 있는 영화 중 하나라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1. 아브젝션이란? 경계와 위치, 규칙을 존중하지 않으며 정체성과 체계, 질서를 교란하는 것. 한마디로 모호함이이다.

2. 공포영화에서 묘사하는 아브젝션
- 공포영화를 관람하면서 토하거나 배설하고자 하는 욕망
- 괴물은 상징계적 질서와 안정성을 위협하는 것 사이에 충돌을 일으키는 존재
- 한 개인이 어머니로부터 벗어나려는 최초의 시도


그런데… 비체라는 개념이 와닿지가 않는다.
읽다 보면 나아지려나.

모든 괴물들은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에 존재하는 무의식적인 두려움들에 직접적으로 말을 겁니다. 여성괴물은 의심의여지없이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여성들의 그들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여자의 재생산성, 월경혈, 그녀들의 숨겨진
질과 자궁, 그리고 새로운 생명체를 창조하는 놀라운 힘에 대한 두려움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P10

괴물은 혐오감을 줌과 동시에 매력적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일반적으로 터부시되는 것들과 대면할 수 있도록 해주기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괴물의 본질은, 터부의 내용이 상대적이고 사회마다 다르기 때문에 문화마다 달라집니다. 괴물들은 종종 사회가 차이를 부정하고 일치를 강조하기 위해 부과한 터부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제공하면서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예를 들어 <킹콩>은 소위 문명화된 사회의 비인간성과 야만성을 폭로합니다. - P12

나는 ‘여성괴물monstrous-feminine‘이라는 표현을 남자괴물male monste의 단순한 반대말인 ‘여자괴물remale monsite의 의미로 사용해 왔다. 여성괴물이 관객을 공포로 몰아넣는 방식은 남성괴물이 관객을 공포에 떨게하는 방식과는 매우 다르다. 이 차이점을 밝히기 위해 새로운 표현이필요하다. 처녀에서 창녀에 이르기까지, 여성성에 대한 다른 모든 정형과 마찬가지로 여성괴물 역시 그녀의 섹슈얼리티를 바탕으로 정의되었다. 여성괴물이라는 표현은 그녀의 괴물성 형성에 있어 젠더의 역할이핵심적이었음을 강조한다. - P24

남성괴물과 완전히 분리된 존재로서 여성괴물성을 정의할 수 있게 만드는 여성 자체의 그 무엇은 정확히 어떤 것인가?
윌리암스의 논의를 제외하고 위에서 논의된 거의 대부분의 논문이여성을 공포영화의 희생자로 다루고 있다. 그 주된 이유는 그들이 대부분 여성이 거세되었기 때문에 공포를 유발한다는 프로이트의 이론, 즉이미 여성을 희생자로 구성해 놓은 이론을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은 여성은 원래부터 희생자라고 말하는 본질주의적 관점을대변하고 또 지지하는 가부장적 정의를 강화할 뿐이다. 나는 공포영화에서의 여성 재현을 분석하고 여성이 다수의 공포영화에서 괴물로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을 주장하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단순히 여성괴물이수동적이 아니라 적극적인 형태로 재현되었다고 해서 이것이 페미니스트적‘이라거나 해방된 것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대중적인 공포영화에 등장하는 여성괴물은 여자의 욕망이나 여성 주체성에 대해서이야기하기 보다는 남성의 공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재현은 확실히 남성 관객은 대체로 적극적이고 가학적인 위치에 있고 여성 관객은 언제나 수동적이고 피학적인 위치에 있다는 관점에 도전한다. 이런 특징에 대한 분석은 또한 프로이트 이론의 중심 내용을 재독해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 P31

비체의 장소는 ‘의미가 붕괴되는 장소’이며 ‘내’가 존재하지 않는 장소이다. 비체는 삶을 위협한다. 비체는 살아 있는 주체가 존재하는 장소로부터 급박하게 추방되어야만 하며 (크리스테바, 1982, 2) 육체로부터 내쫓겨서 자기the self를 위협하는 것으로부터 자기를 분리시키는상상계적 경계 반대편에 놓여야만 한다. 주체는 비체를 추방해야 하지만, 동시에 비체는 묵인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삶을 위협하는 것이곧 삶을 규정함에 일조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추방의 행위는 주체가가
상징계 안에서 적절한 위치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기 위해필요하다. - P35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모든 불결제의를 집행하는 과정에서 오염시키는 것들은 두 개의 범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외부로부터 주체성을 위협하는 배설이고, 다른 하나는 안으로부터 위협하는 월경이다. 오염시키는 것의 두 범주 모두 어머니와 연결되어 있다.
월경혈과의 관계는 그 자체로 분명하다. 어머니와 배설과의 관계는 배변 훈련에서 어머니가 수행하는 역할로부터 비롯된다. 이 지점에서 크리스테바는 주체가 최초로 대면하는 ‘권위‘는 아이가 어머니와의 상호작용 안에서 몸의 형태, 깨끗함과 더러움, 몸의 적절한 부분과 적절하지않은 부분 등 자신의 몸에 대해 배워가는 과정에서 대면하게 되는 어머니의 권위라고 주장한다. 내가 공포영화에서 여성괴물에 대해 분석할때 거세를 이야기하면서 상징계까지 확장해 들어갈 것이 바로 이 ‘어머니의 권위‘라는 개념이다. - P41

비체를 상징계적 구조의 토대로 전락시킴으로써정화하는 것이 대중 공포영화의 핵심적인 이데올로기적 기획이다. 공포영화는 결과적으로 비체를 제거하고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를 다시그리기 위해 비체(시체, 신체적 배설물, 여성괴물)와 대면하도록 한다.
현대의 불결제의로서, 공포영화는 상징계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모든것, 그 중에서도 특히 어머니와 어머니의 세계가 의미하는 모든 것을 상징계적 질서로부터 분리한다. 그런 의미에서 주목할 만한 공포는 어머니 육체의 재현과 그와의 화해를 포함한다. - P44

크리스테바의 아브젝션에대한 이론에서 우리는 공포영화 속 여성괴물 재현을 여성의 재생산성및 어머니로서의 역할과의 관계 안에서 분석할 수 있는 이론적 틀을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아브젝션의 본질 자체는 매우 모호하다. 그것은혐오스러움과 동시에 매혹적이다. 어머니와 어머니의 우주를 상징계적질서로부터 분리해 내는 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혹은 결국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괴물과 같은 어머니의 본질에 대해 깊이연구하다보면 그 어머니 역시 거세와 더불어 아이가 상징계적 질서로편입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있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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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으며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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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 루스 공국은 10~12세기 당시 유럽의 대국으로 군림했고 훗날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기반을 형성했다. 이러한측면에서 보면 우크라이나는 동슬라브의 종가宗家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 몽골의 침략 등으로 키예프는 쇠퇴하고 말았고, 소위 분가에 해당되는 모스크바가 대두하여 슬라브의 중심은 여기로 옮겨졌다. 루스(러시아)라는 이름까지 모스크바에 빼앗겼다. 그래서 그들은자기 나라를 나타내기 위해 우크라이나라는 이름을 새롭게 만들어야 했다. 심지어 역사상으로도 키예프 루스 공국은 우크라이나인의 나라가 아닌,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하는 러시아 발상의 나라로 받아들이게 됐다. - P6

헤로도토스는 스키타이인이 아시아 최초의 유목민이었으며,
아랄해 주변에 살던 마사게타이인에게 쫓겨나 키메리아인이 살던 현재의 땅으로 이주했다는 제3의 설을 가장 신뢰했다. - P22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한때 부크강 어귀의 올비아에 살았다. 초원의 민족인 스키타이인과 바다의 민족인 그리스인 사이에는 교역을 통한 보완관계가 성립되어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스키타이의 땅은 비옥했고 스키타이의 지배층은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지배하에 뒀다. 한편 그리스인의 주식은 빵이었지만 정작 그리스 본토에 밀이 부족했다. 이러한 이유에서 스키타이의 땅은 그리스 본토의 ‘빵 바구니‘가 됐다. 기원전4세기에는 아테네의 수입 곡물의 절반이 아조프해 연안에서 들어온것이었다. 곡물 외에도 생선, 가축, 가죽, 벌꿀, 노예까지 그리스에팔렸다. 그 대신 스키타이는 그리스인에게 항아리 같은 가재도구,
물, 장식품, 포도주, 올리브유 등을 샀다. 스키타이의 지배층은 그리스와의 무역으로 상당히 풍족한 삶을 누리게 됐다. 앞서 언급한 스키타이의 대규모 고분과 그곳에 보관된, 세련된 황금 부장품들이 그 결과물이다. - P35

공국公國 혹은 대공국이라 하면 왕국이 되기에는 부족한 소국의 이미지를 연상하기 쉽다. 그러나 2장의 주제인 키예프 루스 공국은 중세 유럽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대국이었다. 전성기였던 볼로디미르성공聖公 시대에는 유럽 최대의 판도를 과시했고, 그의 아들인 야로슬라프 현공賢公은 자신의 딸들을 프랑스, 노르웨이, 헝가리의 왕에게 시집보낼 만큼 권력을 장악하여 유럽의 장인‘으로 불릴 정도였다.
키예프 공국의 군주는 크냐지knya 라고 불렀다. 크냐지의 어원은영어로 ‘킹‘, 독일어로 쾨니히knig, 스웨덴어로 ‘코눙그Konung‘에 해당되는 단어지만, 세월이 지남에 따라 크냐지의 아들과 자손을 모두크냐지라 부르면서 그 가치는 왕자나 공작 수준으로 하락했다. 후세에 와서는 크냐지가 다스리는 국가라는 뜻으로, 키예프국도 한 단계 아래 등긎인 공국이라는 단어가 붙게 됐다. - P42

키예프를 구성하던 모스크바 공국은 단절되지 않고 존속하여 키예프 루스 공국의 제도와 문화를 계승했으며 훗날 러시아 제국으로 발전했다. 이것만 보더라도 러시아가키예프 루스 공국의 정통 계승자임은 새삼스럽게 논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키예프 루스 공국의 정통 계승자여부에 따라, 자기 나라가 1000년 전부터 이어온 영광의 역사를 가진 나라인지, 아니면 지금까지 러시아의 한 지방에 불과했던 단순한 신흥국인지를 가늠하는 국격에 관련된 중요한 문제가 된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의 논리는 이렇다. 모스크바를 포함한 당시 키예프 루스 공국의 동북 지방은 민족도, 언어도 달랐고 16세기가 되어서야 핀어 대신에 슬라브어가 사용됐을 정도였다. 15세기의 모스크바는 키예프 루스 공국의 지배 아래에 있었던 비非슬라브 부족의 연합체이지, 키예프 루스 공국의 후계자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또한 가혹한 전제 중앙집권 체제인 러시아 · 소련의 체제와 키예프 루스공국의 체제는 전혀 다르므로 별개의 국가다. 키예프 루스 공국의 정치·사회·문화는 몽골에 의한 키예프의 파괴 (1240) 이후에도 1세기에걸쳐 현재 서우크라이나 지역에 번성한 할리치나 볼린 공국으로 계승됐다. - P44

통설로는 슬라브인이원래 살던 곳이 남쪽으로 카르파티아산맥, 서쪽으로 오데르강, 북쪽으로 프리파티강, 동쪽으로 드네프르강에 둘러싸인 지역, 즉 현재의우크라이나 서부와 폴란드 동부로 추정한다. 슬라브인은 7세기 초의평화로운 시기부터 이 지역에서 서서히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게다가 그들은 여타 민족이 살던 곳을 떠나 이동한 것과 달리 고향을 떠나지 않고 세력을 확장했다. 여기에는 슬라브인이 유목과 수렵의 민족이 아닌 농경 중심의 민족이었던 요인이 크다.
슬라브인 중에서도 키예프 루스를 형성한 것은 동슬라브인이며 이들이 현재 현재의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의 선조가 된다. - P45

키예프 루스 공국의 계승 방식은 키예프 공(대공)이 아들들을 지방의 공(지사)으로 각지에 배속하고, 대공이 죽으면 장남이 아니라 대공의 다음 동생이 계승하는 형제 상속이 원칙이었다. 한편 동시에 부자 상속도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불완전한 계승 방식은 대가 바뀔 때마다 형제간, 친족 간의 싸움을 일으켰고 결국 이것이 키예프 루스 공국의 혼란과 쇠퇴를 초래하는 큰 원인이 됐다. - P55

몽골의 정복으로 그때까지 명목상 남아 있던 키예프 루스 대공국은 종언을 맞이하고 기나긴 몽골 지배의 시대로 접어들었지만, 그렇다고 공국들이 곧바로 소멸한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공국은 몽골의지배에 복종하여 세금을 바치는 대가로 존속을 인정받았다. 몽골의지배 아래 비교적 평화로운 시대를 보냈다. - P69

할리치나 볼린 공국은 키예프 루스 공국의 서남부에 있는 할리치나(러시아어로 갈리치‘, 영어로 갈리샤‘ 또는 갈리치아) 공국과 볼린(러시아어로 ‘볼린‘, 영어로 ‘볼리니아‘) 공국이 병합하여 형성된 공국으로1240년 키예프 함락 후에도 한 세기 가까이 존속했다. 할리치나 볼린 공국에 대해서는 기존에 거의 회고된 적이 없지만 우크라이나에는 더없이 중요한 존재다. 이 장의 서두에서 서술했듯 우크라이나는키예프 루스 공국의 직계라고 주장하고 있다. 키예프 루스 공국이 멸망한 후, 우크라이나 땅에는 계승할 국가가 없었다는 러시아의 논리에 대항하기 위한 근거가 되는 것이 바로 할리치나-볼린 공국이다.
우크라이나의 역사가인 토마셰프스키는 현재 우크라이나의 인구 90퍼센트가 거주하는 지역을 지배했던 최전성기의 할리치나 볼린 공국을 최초의 우크라이나 국가‘로 평가했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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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운동은 가문과 지역의 영광이었고, 그에 따른 회고와 조사가 이뤄졌다. 또 천도교와 기독교의 입장에서 그 영향력과 역할을 강조하는 연구가 이뤄졌다. 폭력시위‘를 강조하는 연구는 주로 피의자나 판결문이 인정하지 않았던 ‘최대치의 폭력‘을 인용했다. 저마다의 진실을 감안하면, 모든 역사 연구가 그렇듯 사실을 온전히 복원한다는 것은 애초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자료나 기존 기억과 연구를 검토하면서 발견한 사각지대‘를 말해보는 것, 그 사각지대를 시야에 넣고 전후 맥락에서 이 만세시위를 다시 생각해보는 것, 이것이 필자가 할 수 있는 일이다. - P152

‘협박‘과 ‘동원‘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근세 일본민중사를 연구한 고故 야스마루 요시오安丸良夫는 잇키一接, 민중 봉기에서 보이는 ‘강제 동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참가 강제는 잇키가 그 지역의 ‘대세‘가 되어, 지역공동체적 결속 차원에서 참가가 당연한 일이 되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잇키에 참가했던 대다수 사람은 그 참가 책임을 첫째 강제된 사실에, 둘째 참가가 ‘대세‘ 였다는 사실에, 셋째촌락공동체에 돌릴 수 있었다. 따라서 참가 강제는 사람들이 쉽게 잇키에 참가하기 위한 방식이었다. ‘강제‘는 사람들의 봉기에 대한 의욕을 돋우는 역할을 했다. 이런 ‘동원‘을 자주성이나 주체성 결여로 보는 사람이있다면, 그것은 근대인의 기묘한 편견이다. 근세 민중의 능동성이나 수동성의 압도적 부분은 공동체적 규제와 관계의 매개 속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강제‘에 매개되는 것이 저들의 능동성과 활동성의 구체적인 존재형태일 것이다.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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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운동은 민중이 부화뇌동附和雷同하지 않았다면 ‘33인 사건‘에 그쳤을 것이다. ‘부화뇌동‘ 이란 자기 생각 없이 남의 의견에 따라 움직인다는 뜻으로, 당시 식민권력이 만세 부른 민중과 삼일운동을 깎아내리기위해 종종 썼던 말이다. 뒤집어 보면 부화뇌동‘은 공감하고 연대할 줄아는 민중의 능력을 의미하며, 이것이 없었다면 우리가 아는 삼일운동은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공감하고 연대했던 민중이 주인공인 삼일운동의 역사를 써보자, 애초 이 책의 의도였다.‘ - P6

삼일운동의 주인공으로 볼 때 이런 질문이 살아난다. 민중이 ‘독립‘을 통해 바라던 바는 무엇이었을까? 저항 엘리트는 그 바람을 ‘민족‘이나 ‘혁명‘에 담고자 했으며, 어느 쪽이든 그 그릇은 공화정이었다. 매년 3월 1일이 돌아오면 우리는 공화정이 오래되었음을 자랑한다. 그런데 공화정은 민중의 바람을 제대로 담아냈는가, 지금은 어떠한가? 어디까지나 엘리트 편향을 넘어서자는 것이지 반反엘리트를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엘리트가 자기 이해관계에 갇히면 그가 속한 공동체 전체가 위험에 빠진다. 이 점은 조선왕조의 말로가 잘 보여준다. 엘리트야말로 엘리트 편향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의 이해와 바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더욱이민중은 자주 엘리트를 매개로 능동성을 발휘하니, 엘리트는 중요하다. - P8

최재형의 갈등과 선택을 곱씹어볼 때마다 이주사 전문가 디르크 회르,
더(Dirk Hoerder)의 글이 생각난다. "도착지의 이주민들도 언어, 음식, 습관 그 밖의 일상적인 행위는 태생지 관례를 따랐지만, 황제 숭배, 계급적 위계, 그리고 여성일 경우에는 성별 위계에 대한 태생지 관례는 폐기처분했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지난날의 생활방식에 대해서는 문화적 친근감을 드러내고, 용납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노골적인 반감을 나타냈다. 그들이 태생지에서 가져온 것은 국가 정체성이 아닌 문화적 경험과 ‘본국’에서는 실현 불가능했던 인생의 목표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후 활동을 보건대 최재형에겐 회르더가 설명하는 것 이상으로 ‘국가 정체성’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국가가 여전히 신분제가 작동하는 나라는 아니었다. - P18

이주는 근대국가를 만들기도 하지만 의심하게도 한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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