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어제 쓰려고 했던 글이었는데 글을 쓰다가 일에 붙잡혀 타이밍을 놓쳤다. 


주말에는 읽고 있던 책을 마무리하고 이후에는 쌓아두었던 학술지를 읽었다.


역사문제연구 52호는 이전과 출판사가 달라진 탓인지 알라딘에 검색해봐도 나오지 않는다. 이전 호들은 그래도 나왔는데 이제는 아쉽지만 글로만 언급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호 특집에서는 냉전사 중 미국에 의해 이루어진 대반란전에 대해서 다루었다.


대반란전은 냉전 시기 미국에서 저개발국가의 정부가 전복되지 않도록 한 다양한 조치와 작전을 일컫는다. 


냉전시기 미국은 소련과의 대결에서 승리하는 것이 중요했다. 미국은 제3세계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면서 공산군의 게릴라전에 어떻게 맞서야 하는지 경험할 수 있었다. 1954년 미국의 사회학자인 밀리칸과 로스토우는 CIA 국장 덜레스(Allen Dulles)에게 ‘공산주의에 대응하기 위해 군사적 개입이 단기적으로 필요하지만, 장기간에 걸친 개발과 협력이 궁극적인 대응책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근대화론이다. 대반란전은 앞선 군사작전과 개발에 의한 ‘재건’ 프레임을 결합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1960년대 케네디 정부는 제3세계에 적극적인 개발정책을 대외정책으로 삼고, 베트남에서는 대게릴라 작전을 전투에 적용하였다.


1961년 4월의 쿠바 침공은 아이젠하워의 후임자인 존 F. 케네디 대통령 아래에서 수행되었다. CIA는 1400명의 망명 쿠바인을 무장시키고 훈련시켰지만, 그들은 과테말라에서와는 달리 성공하지 못했다. 카스트로는 이미 쿠바군을 전면적으로 재건했고, 10만 명의 반정부 인사를 미리 구금했다. 게다가 기대했던 민중 봉기도 일어나지 않았다. 침략자들은 사흘 만에 비참하게 항복했다. 미국은 카스트로를 무너뜨리기는 커녕 오히려 그의 입지를 강화했다. 여러 남미 국가에서는 쿠바 혁명을 본받아 혁명 투사들이 게릴라 투쟁으로 넘어갔다. 미국의 대게릴라 작전 전문가에게 배우고 미국의 군사 지원금에서 재정 지원을 받기도 한 경찰과 군부대들이 게릴라들을 패퇴시켰다. 미국은 유럽 제국주의가 몰락한 후 그것을 대신해 제국주의 세계열강이 되었다는 비난을 들었다. [ 하버드 C.H.베크 세계사 1945 이후 - P81 ]


대반란전은 대한민국에도 영향을 주었다. 박정희는 1.21사태(김신조 청와대 습격 사건) 후 북한에 강력한 보복조치를 취하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 군사력 증강을 요청했으나 미국은 이 요청은 들어주지 않고 대신 간첩 작전을 진행할 조직을 지원했다. 그 결과 특전사와 전투경찰대 등의 대간첩작전 부대들이 전폭적으로 확대되었다. 이후 북의 남한 공격이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신체제가 선포되고 나서 이 부대는 시위 진압 부대로 변모했다. 미국은 북한에 대한 공격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부대를 지원함으로써 오히려 정부가 시민들을 무차별하게 잡아들이는 근거를 만들었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다.


앞서 읽었던 역사비평 145호에서는 새로운 냉전사의 유형의 글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 중 미국의 기독교들인이 냉전을 이용해 국가를 강력하게 결집시키면서 지금의 기독교 보수주의적 흐름이 만들어졌다고 했다. 그들은 정부를 압박하기도 했지만 자신들의 이익을 채우기도 했다. 


얼마 전 정부의 필수의료 정책과 의과대학 정원 증원 발표 이후 의료계가 반발하며 들고 일어섰다. 사실 필수의료 정책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보는데 의대 정원 규모의 문제가 더 부각되는 측면도 없지 않아 있는 것 같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22513060001797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4022715511158723


과거 1971년에도 인턴과 레지던트의 파업 사태가 있었다. 당시 파업은 의료인력을 ‘해외여행 제한’으로 강력히 묶어두려는 국가의 통제에 대한 인력들의 전면적인 반발로 전국적인 연대 파업을 야기했다. 정부는 국가 인력 유출을 걱정했던 것이다. 해방 후 의학교육의 급진적인 변화와 졸업 후 교육 제도의 정착은 단기간에 이루어졌지만 양성된 전문 인력이 활동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는 부족했다고 볼 수 있다. 


과거와는 파업의 이유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지만 고령화되는 한국 사회를 생각하면 이 문제는 잘 정리되어야할텐데… 걱정이 크다. 


오늘 아침에는 '한국형 귀신고래'에 대한 기사를 보고 불과 이틀 전 읽은 내용이었음을 확인했다. 오래 전이었다면 놓치고 넘어갔겠지만 아니어서 놓치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귀신고래는 우리 학명이 붙은 전 세계 유일한 고래다. 1977년 한반도 바다에서 더 이상 볼 수 없어졌는데 여전히 이 고래를 수소문해서 찾고 계시는 분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22611130004818


100여 년 전에 고래를 한반도에서 발견하고 전신뼈를 미국에 가져간 이가 있다. 뉴욕의 미국자연사박물관(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 AMNH) 소속 보조 큐레이터(assistant curator)였던 로이 채프먼 앤드류스(Roy Chapman Andrews, 1884~1960)다. 그는 1912년 1월 한국의 울산 장생포에 있는 동양포경주식회사의 포경기지를 방문했다. 그는 이곳에서 약 7주 간 머물며 캘리포니아 연안에서는 자취를 감추어버린 회색고래가 있는지 조사했다. 앤드류스는 이 연구를 바탕으로 1914년에 “캘리포니아 회색고래(THECALIFORNIA GRAY WHALE)”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한국 해역의 회색고래가 캘리포니아 회색고래와 같은 종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논문상에는 '한국계 귀신고래'와 직접 연결될만한 표현이나 내용이 등장하지 않는다고 한다. 

2011년 5월에 울산 남구청은 장생포에 앤드류스 흉상을 설치한다. 비문에는 그가 회색고래를 ‘한국계 귀신고래(Korean Stock of gray whales)’라 명명하고 그 존재를 전 세계로 알렸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했듯 이는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책을 읽고 공부를 하다가 연결되는 지점을 찾을 때 반갑다. 같지는 않더라도 비슷한 상황이 과거에 있었다는 것, 여기에서 어떤 단서들을 발견할 때 위안이 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이것이 후속 공부로 이어진다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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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2-28 0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귀신고래라는 말을 보니 예전에 나온 우표가 생각났습니다 두 가지나 나왔군요 두번째는 기억나는데 첫번째는 예전에 썼는지 안 썼는지 생각나지 않네요 위에 건 전지고 밑에 건 낱장으로 된 거예요


희선



http://image.epost.go.kr/stamp/data_img/sg/up20161028160612315.jpg
http://image.epost.go.kr/stamp/data_img/sg/up20120112094507252.gif

https://img.khan.co.kr/newsmaker/961/20110906_961_46a.jpg

거리의화가 2024-02-28 08:58   좋아요 1 | URL
희선님 예전에 우표 모으신다고 했던 것 기억합니다. 올려주신 이미지를 확인해보니 굉장하네요! 우표 3가지 디자인이 저마다 특징이 있습니다. 덕분에 더 잘 기억할 수 있겠어요. 감사합니다.
 

황제는 제군(諸軍) 가운데서 용사 수백 명을 선발하여 검무(劍舞)를 가르쳤는데 모두 공중에 칼을 던질 줄 알았고 그 몸을 솟구치며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이를 이어받게 하니 보는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마침 거란이 사자를 파견하여 공물을 바쳤는데, 편전에서 연회를 베풀어 주면서 이어서 검사(劍士)들을 나오게 하여 이를 보여 주었다. 수백 명이 웃통을 벗고 북을 치며 시끄럽게 하면서 칼을 휘두르며 들어오면서 뛰고 던지는 것이 이어졌는데 그 미묘함이 다 표출되니 사자는 감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였다.
이에 이르러 성을 순시하면서 반드시 검사들로 하여금 춤을 추면서 앞에서 인도하게 하였는데, 각기 그 기량을 드러내자 성 위에 있는 사람들은 이를 바라보면서 간담이 깨졌다.

갑신일(6일) 새벽에 유계원(劉繼元, ? ~992)이 그의 평장사(平章事)인 이운(李?) 등을 인솔하고 흰 옷에 사모(紗帽)를 쓰고 대(臺) 아래에서 죄받기를 기다렸는데, 조서를 내려서 그를 풀어주고 불러서 대(臺)에 오르게 하고 위문하였다. 유계원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신은 거가가 친히 왕림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몸을 묶어 명령에 귀의하려고 하였는데, 대개 망명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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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죽을까 두려워하며 신에게 겁을 주어 항복할 수 없었을 뿐입니다."
황제는 망명한 사람들을 적어 오게 하여 모두 그들을 목 베었다. 회해국왕(淮海國王) 전숙(錢?)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경은 한 지역을 보존하여 나에게 귀부할 수 있었고,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기에 이르렀으니 깊이 아름답다 할 것이요."

유계원이 항복하자 사람들마다 상 받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황제는 장차 끝내는 요(遼)를 치고 유·계(幽·?, 幽州와 ?州)를 빼앗고자 하였다.
제장들도 모두 가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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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전전도우후(殿前都虞候)인 최한(崔翰, 928~992)만이 홀도 상주하여 말하였다.
"이 한 번의 일은 다시 거병하는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이번의 파죽지세(破竹之勢)를 타고서 이를 빼앗는 것이 아주 쉬우며 시기란 잃을 수 없는 것입니다."
황제는 기뻐하여 바로 추밀사(樞密使)인 조빈(曹彬)에게 명령하여 둔병(屯兵)을 움직여 발동하는 문제를 논의하게 하였다.

요(遼)의 남경권유수(南京權留守)인 한덕양(韓德讓, 941~1011)은 두려움이 심하였지만 지삼사사(知三司事)인 유홍(劉弘)과 더불어 성에 올라가서 밤낮으로 수어(守禦)하였으나 성 밖에서는 항복하라고 부르고 협박하는 것이 아주 급하자 사람들은 두 마음을 품었다. 마침 적리도(迪里都, 鐵林都)도지휘사인 이찰륵찬(李?勒燦, 盧存)이 나와서 항복하니 성 안에서는 더욱 두려워하였다.
요(遼)의 어잔랑군(御盞?君)인 야율학고(耶律學古)가 남경이 포위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이를 구하였는데, 포위한 군사가 바야흐로 엄하여 마침내 땅에 굴을 파고 나아가서 한덕양 등과 함께 기계를 가지런히 하고 불안한 것을 안정시키며 적당하게 대비하고 막으니 투지(鬪志)가 조금도 해이되지 아니하였다.

"경 등은 정찰하는 일을 엄히 하지 않았고, 군사를 사용하는 것이 법도가 없어서 적(敵)을 만나자 바로 패배 하였으니 어찌 장수라 하겠는가!"
특리곤(特里袞, ?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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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야율휴격(耶律休格, 休哥, ? ~998)은 일이 급한 것을 알고 스스로 가서 원조하게 해달라고 청하니 요주는 마침내 야율휴격으로 야율희달(耶律希達)을 대신하게 하고 오원(五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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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란히 출발하게 하였다.

계주(桂州)관찰사인 조한(曹翰)·조주(?州, 甘肅省 臨潭縣)관찰사인 미신(米信, 926~992)이 성의 동남쪽 귀퉁이에 주둔하였는데, 군사들이 땅을 굴착하다가 해(蟹, 게)를 얻자, 조한이 제장들에게 말하였다.
"게란 물에 사는 물건인데 육지에 살다니 그 사는 곳을 잃은 것이다. 또한 발이 많으니 적(敵)의 구원병이 곧 도착할 상(象, 상징)이다. 또 해(蟹)라는 것은 해(解, 해산)라고 풀 수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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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군사를 돌릴 것이다."

정월 초하루 병자일에 요(遼)에서는 황제의 아들인 야율융서(耶律隆緖, 972~1031)를 책봉하여 양왕(梁王)으로 하고 야율융경(耶律隆慶, 973~1016)을 항왕(恒王)으로 하였다. 야율융서는 어려서부터 서한(書翰)을 좋아하여 10세에는 시(詩)를 지을 수 있었으니 요주(遼主)는 위촉(委囑)하려는 뜻을 품었다.

겨울, 10월 초하루 신미일에 요주는 무사(巫師)에게 명령하여 천지(天地)와 병신(兵神)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하였다. 신사일(11일)에 곧 남침(南侵)하려고 하여 기고(旗鼓)에 제사를 지냈다. 계미일(13일)에 요주가 남경(南京, 북경)에 다다랐다.

황제가 장차 북변을 순행하려고 하였다. 기축일(19일)에 조서를 내렸다.
"경사(京師)에서 웅주(雄州, 河北省 雄縣)에까지 백성들을 징발하여 도로를 닦고 장애물을 제거하라."

무신일(9일)에 남쪽의 군사들이 물의 남쪽에 진을 치고 싸우려 하자 요주는 야율휴격의 말에만 홀로 황색을 입히어 적이 알아보게 하였다가 재빨리 검은 갑옷에 흰말로 바꾸도록 명령하였다.
야율휴격이 드디어 정예의 기병을 인솔하고 물을 건너서 분발하여 치니 남쪽의 군대는 크게 패배하였고, 뒤쫓아서 막주(莫州)에 이르렀는데 가로 누운 시체가 들에 널려 있었고 산채로 몇 명의 장수를 잡아 가지고 돌아왔다.
요주는 어마(御馬, 황제의 말)와 금잔(金盞, 금으로 된 술잔)을 가지고 그를 위로하고 말하였다.
"경의 용감함은 명성을 뛰어넘는데, 만약에 사람들마다 경과 같다면 어찌 이기지 못할까 걱정하겠는가?"

요(遼)에서는 야율희곤(耶律喜袞)이 이미 갇혔는데, 병오일(10일)에 요의 상경한군(上京漢軍)이 반란을 일으켜서 겁탈하여 야율희곤을 세우려고 하였지만 조주(祖州, 內蒙古 巴林左旗 西南 石房子村)의 성이 견고하여 들어갈 수가 없자 그 아들인 야율유례수(耶律留禮壽)를 세웠다. 상경유수인 제실(除室)이 그들을 붙잡으니 야율유례수는 돌아오자 바로 복주(伏誅)되었다. 한 해가 넘어서야 비로소 야율희곤에게 죽음을 내렸다.

가을 7월 병오일(11일)에 황제는 장차 크게 거병하여 요(遼)를 치려고 하여 사자를 파견하여 발해왕(渤海王)에게 조서를 하사하고 군사를 발동하여 호응하게 하면서 요(遼)를 멸망시키는 날 유·계(幽·?)의 영역은 다시 중조(中朝)로 귀납하겠지만 삭막(朔漠, 북방 사막지대) 밖의 것은 모두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발해는 끝내 도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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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37] The New Universe

코페르니쿠스(Copernicus)는 지금의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태어나 천문학을 공부했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Ptolemy)가 주장한 천동설을 반박하고 지동설을 주장했다. 사실 그가 주장한 개념은 과거 그리스의 천문학자였던 아리스타르코스(Aristarchus)가 설파한 것이었으나 이론화하여 책으로 출판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천동설과 지동설은 상반된 개념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그의 학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가톨릭 교인이었는데 가톨릭계에서 지동설을 부정하고 나섰다고. 

갈릴레이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고, 기울어져 있는 피사의 탑을 보면서 의문을 품고 '중력'이란 개념을 생각해 낸다. 그는 세계를 구성하는 개념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최초의 근대 과학자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어서 사물을 확대하는 기능을 가진 망원경을 개발하기도 했다. 그는 Two Sciences를 출판하고 얼마 안 되 사망했다. 거기에는 오늘날 물리학 연구의 기반이 되는 근본 개념이 들어 있었다. 때문에 그는 근대 물리학의 아버지로 명명되었다.


[CH38] England’s Greatest Queen

에드워드 왕자가 헨리 8세에 이어 불과 9살 때 영국 왕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았고 16살이 되자 몸져눕게 되었다. 의사는 온갖 치료법을 강구했으나(과학적으로 검증이 전혀 안 된 방법들) 효과를 보지 못했다. 에드워드에게는 여자 형제들이 있었는데 메리와 엘리자베스였다. 둘은 왕위를 놓고 경쟁한 끝에 메리가 승리했다. 메리는 엘리자베스를 런던탑에 가두었고 가톨릭으로 국교를 회귀하면서 프로테스탄트를 강력하게 탄압해서 원성을 쌓았다(300명이 넘는 사람을 화형에 처했다고). 엘리자베스는 몇 달간 런던탑에 갇혀 있다가 메리가 사망하면서 영국 여왕으로 등극한다. 그는 원래대로 프로테스탄트로 국교를 복귀시켰으나 종교를 가지고 탄압하지는 않았다. 의회는 그녀에게 결혼을 종용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메리가 스페인 왕자와 결혼해서 영국군이 스페인을 위한 전쟁에 투입되어야 해서 문제가 된 점을 생각했고 결혼을 하게 되면 그에게 권력이 주어질 것을 생각하여 하지 않기로 한다. 엘리자베스의 치세는 태평 성세였다. 때문에 그녀의 별명은 Good Queen Bess였다고.


[CH39] England’s Greatest Playwright

엘리자베스 여왕은 예술도 사랑했던 모양이다. 특히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무척 좋아했다고. 셰익스피어는 엘리자베스가 왕이 된 뒤 6년 뒤에 태어났다. 그는 40개가 넘는 극을 썼고 450년 넘게 공연되었다. 대부분의 언어로 번역이 되고 영화화되었으며 책, 학교 교재로 나오기도 했다. 

멕베스는 3명의 여성으로부터 왕의 아버지가 된다는 예언을 듣는다. 왕은 던컨이었으니 예언대로라면 자신이 던컨을 죽이고 반역자가 된다는 의미였기 때문에 애써 부인했다. 그러나 레이디 멕베스는 당신이 왕위를 받을 운명이라며 종용한다. 멕베스는 던컨을 죽이고 죽이지 않은 척 연기한다. 그러나 멕베스 부부는 이후 죄책감에 들어 악몽에 쫓긴다. 둘은 다시 예언자들을 찾아가지만 레이디 멕베스는 죽고 던컨의 사람들이 그를 공격하기 위해 오면서 자신의 종말이 왔음을 깨닫는다. 멕베스는 반역의 종말은 좋지 않음을 보여주는 연극이다.


[CH40] New Ventures to the Americas

스페인 제국은 미국 땅으로 판도를 넓혀가려 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영국보다 스페인이 더 영향력이 있는 국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영국 해적이 스페인 배들을 공격하는 것을 묵인했다. 영국인 월터 롤리는 미국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107명의 사람들과 함께 탐험을 나선다. 도착한 땅에 그는 버지니아라는 이름을 붙인다. 다만 버지니아는 무척 추운 곳이라 비옥한 땅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곳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그 시도도 실패했다.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하녀 중 하나인 Bess Throckmorton과 사랑에 빠진다. Bess가 아이를 가지면서 분노한 여왕은 그들을 런던탑에 가둔다. 엘리자베스의 뒤를 이은 영국왕이 그들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남아메리카에서 금을 찾아오라 했지만 빈손으로 오자 롤리는 참수형에 처해졌다.

버지니아를 발견한 영국인들은 Roanoke Island(로어노크 섬)에 정착하려했는데 현지인들의 위협으로 영국으로 돌아가고 15명의 사람이 남았다. 롤리의 두 번째 버지니아행은 the Chesapeake Bay(체사피크만)으로 결정되었으나 갑작스런 돌풍으로 배에 있던 15명의 사람은 사라진다. 선장인 John White는 로어노크 섬을 떠나 영국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열악한 환경을 타개하기 위해 현지인들과 친해지며 고기를 잡고 곡식을 기르는 법을 전수받고 그곳에 정착하여 마침내 그들은 살아남는다. 그러나 John White는 자손들이 그곳에서 정착하기를 원치 않아 1587년 출발하여 3달 만에 런던에 도착한다. 하지만 영국과 스페인에 전쟁이 벌어지는 바람에 롤리는 남아메리카로 출발하여 어느 무인도에 도착한다. 나무에 새겨진 표식인 “Croatoan”이라는 단서를 보고 섬을 찾아 나서려했으나 허리케인으로 배에 있던 모든 이가 사망한다. 롤리는 영국으로 돌아왔고 그 이후에도 수많은 영국인들이 그곳을 향했으나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다. 


[CH41] Explorations in the North

상인 John Cabot이 영국에서 출발하여 Newfoundland(뉴펀들랜드)에 도착한다. “I claim this land for England!” 그는 아시아로 가는 가장 짧은 항로를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영국 어부들은 Cabot이 뉴펀들랜드에 대해 한 이야기를 기반으로 그곳에 오두막을 짓고 여름 내내 머물렀다. 소식을 들은 미국인 세인트 존스는 봄과 여름에만 뉴펀들랜드에 머무르며 고기를 잡고 생활했는데 겨울이 되면 물이 얼기 때문이다. 

프랑스 왕은 자크 카르티에에게 새로운 섬을 찾아내라는 명을 내린다. 그는 중국으로 바로 향하는 항로를 알고 싶어 했다. 현재 the Gulf of St.Lawrence(세인트 로렌스 만)이라고 불리는 곳에 갔고 현지인 Micmacs를 비롯한 친구들을 만난다. 이곳을 뭐라 부르냐는 말에 “cthe village”라는 대답을 들었고 이것은 캐나다라는 소리였다. 그래서 오늘날 이곳이 캐나다가 되었다. 카르티에는 원하던 중국에는 가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캐나다를 발견했고 70년 뒤가 되면 프랑스는 캐나다를 년 안에 왕복할 수 있게 된다. 오늘날 캐나다에서 프랑스어를 말하는 이가 많은 이유도 정착 인구들이 이 때문이다.


[CH42] Empires Colide

스페인 왕 필립은 영국 함선들이 스페인을 향하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영국에 선전 포고를 하려 했다. 평화를 원한 엘리자베스 여왕은 협상으로 무마했으나 필립은 이것이 눈속임인 것을 알아차린다. 필립은 마침내 130척의 함선에 Spanish Armada 군을 대동하고 전투에 나선다. 엘리자베스는 사촌인 Lord Howard을 해군 사령관으로, Sir Francis Drake를 부사령관으로 하여 영국군을 플리모스에 정박시킨 채 스페인 배를 기다린다. 스페인 배는 대규모 함선이라 컸지만 영국 배는 작지만 빨랐고 이동하며 총으로 공격하자 스페인 배는 구멍이 나기 시작한다. 영국군의 2배 규모였던 스페인군은 패배했고 이 전투 이후 영국은 스페인에 패권을 서서히 내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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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무원년(을유 25)

돌아와 中山郡에 이르니 여러 장수들이 尊號를 올릴 것을 청하였으나 왕이따르지 않았고, 행군하여 南平棘에 이르러서 여러 장수들이 굳이 청하였으나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耿純이 나아가 아뢰기를 "천하의 士大夫(勇士와 大夫)들이 친척을 버리고 土壤(고향)을 떠나 화살과 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大王을 따르는 것은 그 계책(목적)이 진실로 용의 비늘을 붙잡고 봉황의날개에 붙어서 그 뜻을 이루기를 바라서인데, 지금 大王께서 시일을 지체하고 무리들의 마음을 거슬려 황제의 칭호와 지위를 바로잡지 않으시니, 저는천하의 들이 희망이 끊어지고 계책이 궁해지면 고향으로 돌아가려는생각을 두어 오랫동안 스스로 괴로워하지 않을까 두려우니, 큰 무리가 한 번흩어지면 다시 모으기가 어렵습니다." 하였다. 왕이 깊이 감동하여 말하기를
"내 장차 생각하겠다." 하였다.
행군하여 물에 이르러서 馮異를 불러 사방의 동정을 묻자, 馮異가 대답하기를 "更始(劉玄)는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宗廟社稷의 우려가 대왕에게있으니, 마땅히 여러 사람의 의논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 ≪後漢書≫〈耿純傳〉과 〈馮異傳〉에 나옴
이때 마침 儒生 張華가 關中에서 赤伏符를 받들고 왕에게 찾아오니, 여기에이르기를 "劉秀가 군대를 내어 無道한 자를 토벌하니, 사방 오랑캐들이 구름처럼 모여 龍이 들에서 싸우는데 四七의 즈음에 화가 주인이 된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이로 인하여 다시 주청하자, 6월에 왕이 물의 남쪽에서 황제의지위에 오르고 연호를 바꾸고 大赦하였다. - ≪後漢書 光武帝에 나옴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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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이 얼마나 철저하게 가부장주의와 주종관계를 임금관계로 대체했든, 몇몇 개인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사회적 장벽을 뛰어넘어계층의 사닥다리 위로 올라섰든, 성공한 자들이 자신의 발 밑에서 해체되는 기준과 구별에 대해 얼마나 깊이 고민을 했든, 명초의 중국사회를 묶어놓은 가부장주의와 주종관계에 기초한 계급체계는 그 마지막까지도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것들은 상업에 의해 많이 변용되었다. 상인들은 엘리트층으로 가는 길을 찾아냈고, 신사층은 수입을늘리기 위해 상업에 의존했다. 하지만 토대는 무너지지 않았다. 교통·통신과 상업이 명조 사회 내에 유도한 그 모든 유동성에도 불구하고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구조적 경계는 약해지지 않았다. 각 개인은1644년의 위기를 고통스럽게 지나갔지만 사회제도는 의연히 살아남았다. 실은 더 강해졌을 것이다. 가을의 족장들은 겨울의 족장들이 형성되었던 환경과는 전혀 다른 조건하에서 백성을 다스렸으나, 그들의지배에는 변함이 없었고 다음 왕조에 들어서도 그들의 지배는 계속될것이었다. - P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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