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더 늘어나기는 했어도 2월은 설 연휴도 끼어 있어서인지 빨리 흘러갔다.


결산 페이퍼를 간단하게 올린다.

이번 달 읽은 책 중에는 집사 시리즈 중 <칸의 후예들>과 도스토옙스키의 중단편 <백야>, <가난한 사람들>이 좋았다. 


<칸의 후예들>은 칭기스칸 이후 아들과 손자 대 계보와 대칸 경쟁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칭기스칸보다 후대의 뭉케, 쿠빌라이가 우리와 관련이 더 있다보니 더 흥미롭게 읽을 수가 있었다. 


<백야>와 <가난한 사람들>은 같은 사람이 쓴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른 느낌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특히 인물에 대한 묘사가 뛰어나다는 생각을 했다. 게다가 자칫 무거울 수도 있는 이야기를 풍자와 해학으로 그려내는 것이 놀라웠다. 앞으로도 남은 전집을 읽어보려고 한다. 




3월 읽을 예정인 책들은 다음과 같다. 





내일부터 거의 4~5년 만에 해외로 여행을 떠난다. 이번 여행은 정말 준비를 거의 하지 않았다. 장소 몇 개만 적어둔 상태인데 너무 준비 없이 가나 싶지만 구글맵이 되는 곳이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옆사람 컨디션 봐 가면서 놀멍 쉬멍하고 오려고 한다. 


댓글(16)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4-02-28 1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다녀오세요~! 맛난 거 많이 드시고!

거리의화가 2024-02-28 14:07   좋아요 0 | URL
미식가가 있어서 잘 먹고 다닐 것 같아요!ㅎㅎ

새파랑 2024-02-28 12: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정말 좋습니다 ㅋ 읽다보면 웃음이 난다는 ㅋㅋ

해외여행 부럽습니다 ㅜㅜ 잘 다녀오세요~!!

거리의화가 2024-02-28 14:09   좋아요 1 | URL
도스토옙스키 작품 아직 세 개밖에 안 읽었는데도 참 좋더라구요. 남은 장편들도 기대가 됩니다.

해외여행은 너무 오랜만이라 아직 감이 안오네요. 잘 다녀오겠습니다^^

자목련 2024-02-28 15: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찬 책읽기, 즐거운 여행!!
재미있게 보내시고 편안하게 다녀오세요^^

거리의화가 2024-02-28 17:27   좋아요 0 | URL
즐거운 여행하고 올게요.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4-02-28 16: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행 행복한 기억 많이 안고 오세요~~~

거리의화가 2024-02-28 17:28   좋아요 1 | URL
오랜만에 나가니 떨리기도 합니다. 내일 공항에 사람이 좀 덜해야 할텐데ㅎㅎ 감사합니다.

다락방 2024-02-29 1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 여행 잘 다녀오세요, 거리의화가 님! 여행 이야기도 들려주시고요!!

거리의화가 2024-02-29 12:3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비행기 기다리는 중이에요. 잘 다녀오겠습니다.

얄라알라 2024-02-29 2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단 2월에 읽으신 책의 양과 장르 다양함에 입이 떡 벌어지고요

오랜만에 나가시는 거니, 먼 해외이실거 같아요.

행복한 여행 다녀오시어요 거리의 화가님^^

거리의화가 2024-03-04 09:44   좋아요 1 | URL
지난 달은 다양하게 읽었습니다^^ 멀리 가고 싶지만 직장인이라 아주 먼 곳은 가기가 어렵네요^^; 그래도 즐겁게 잘 다녀왔습니다. 감사합니다.

희선 2024-03-01 01: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다른 나라겠습니다 거리의화가 님 즐거운 시간 보내시고 오시기 바랍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4-03-04 09:44   좋아요 0 | URL
희선님 잘 다녀왔어요. 감사합니다^^

독서괭 2024-03-01 1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화가님 오랜만에 나가는 해외여행 마음껏 즐기고 오세요!!^^

거리의화가 2024-03-04 09:4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괭님 즐겁게 다녀왔지만 역시 너무 피곤합니다!ㅎㅎㅎ
 

백성이 일찍이 部(屬縣)의 亭長이 자신이 뇌물로 준 쌀과 고기를 받아먹었다고 말하자,卓가 말하기를 "長이 너에게 요구하였느냐? 아니면 네가일이 있어서 청탁하였는데 받았느냐? 아니면 평소에 은혜로운 뜻으로 주었느냐?" 하니, 백성이 말하기를 "가서 그냥 주었습니다." 하였다. 茂가 말하기를 "주어서 받았는데, 무슨 이유로 나에게 말하는가?" 하니, 백성이 말하기를 "삼가 듣건대 ‘현명한 군주는 백성들로 하여금 관리를 두려워하지 않게 하고, 관리가 백성들에게서 취하지 않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제가 관리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물건을 준 것인데, 관리가 끝내 받았기 때문에 와서말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茂가 말하기를 "너는 <예의를> 파괴하는 백성이다. 무릇 사람이 여럿이함께 살면서도 어지럽지 않아서 금수와 다른 까닭은 仁와 禮와 사랑이 있어서 서로 공경하고 섬길 줄 알기 때문인데 너만 홀로 이것을 닦으려 하지 - P230

않으니, 어찌 높이 날고 멀리 달아나서 인간에 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관리는 다만 위엄과 힘을 이용하여 억지로 요구하거나 청하지 않을 뿐이니, 亭長은 평소 선량한 관리이고 歲時에 선물을 주는 것은 禮이다." 하였다.
백성이 말하기를 "만일 이와 같다면 법률에 무슨 연고로 이것을 금합니까?" 하니, 卓茂가 웃으며 말하기를 "법률은 큰 法(강령) 을 베풀어 놓은 것이고 禮는 人情을 따르는 것이니, 지금 내가 로써 너를 가르치면 네가 반드시 원망과 미움이 없겠지만 법률로써 너를 다스리면 네가 어디에 수족을 두겠느냐. 한 廳舍(동일한 종류의 일) 안에서 작은 잘못은 죄를 논할 수 있고큰 잘못은 죽일 수 있으니, 우선 돌아가 생각하라." 하였다. - P23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컨대 지금부터 외현(外縣)에 사는 죄인은 5일에 한 번 구금하고 방면하는 숫자를 갖추어 주(州)에 보고하고 주옥(州獄)에는 별도로 장부를 두고 장리(長吏)가 검사하고 살펴서 3일이고 5일에 한 번씩 이끌어다가 심리하고 매월 형부(刑部)에서 열람하도록 갖추어 올리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구금한 사람이 많은 곳에는 조관(朝官)에게 명령하여 말을 달려가서 결정하여 보내도록 하십시오. 만약에 사건이 억울하고 무고한 것에 연관되어 지체되었다면 그 본주의 관리를 강등시키거나 내쫓으십시오. 혹은 한 해가 끝나서 감옥에 억울하게 지체되는 사람이 없다면 형부에서는 첩지(牒紙)를 발급하여 대체할 날짜를 얻게 하여 그 결과를 비교하여 이를 장려하고 상 주십시오."
장제현은 부지런하게 백성들을 피폐하는 것을 구휼하고 힘써 관대하게 처리하여 순행하는 부서에서 호소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거나 혹은 전사(傳舍)로 불러서 도착하면 탑전(榻前, 걸상)에서 더불어 말하여 대부분 그 진실과 거짓을 찾아내니 강남 사람들은 오래도록 그를 생각하였다.

이달에 요주는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남침(南侵)하여서 만성(滿城)에서 싸웠는데, 패전한 것이 쌓이고 수태위(守太尉)인 희달리(希達里, 奚底里)가 떠도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통군사(統軍使)인 야율선포(耶律善布, 善補)는 복병에게 포위되었는데, 추밀사인 야율색진(耶律色珍, 斜軫, ?~999)이 이를 구원하여 죽음을 면하였다. 요주는 야율선포가 대비하는 일에 실패하였다고 하여 그에게 곤장을 때렸다.

임자일(24일)에 요주(遼主)가 초산(焦山)에 이르렀다가 행재(行在)에서 죽었는데 나이는 35세였다. 시호를 효성황제(孝成皇帝)로 하고 묘호를 경종(景宗)으로 하였다. 한덕양과 야율색진(耶律色珍)이 유조(遺詔)를 이어받아서 장자인 양왕(梁王) 야율융서(耶律隆緖, 972~1031)로 자리를 잇게 하였는데 나이가 겨우 12세여서 황후가 칭제하고 국정을 결정하였다. 황후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어미는 과부이고 아들은 어린데 친족의 무리들은 크고 장대하며 변방은 아직 편안하지 아니한데 어찌할꼬?"
한덕양과 야율색진이 나아가서 말하였다.
"신(臣)들을 신임하시면 어찌 염려할 것이 있겠습니까?"
한덕양이 숙위(宿衛)하는 일을 총괄하니 황후는 더욱 그를 총애하며 일을 맡겼다.

계축일(25일)에 권지고려국왕(權知高麗國王)인 왕치(王治, 960~997)가 사자를 파견하여 와서 방물(方物)을 진공(進貢)하였으며, 또한 그의 형인 왕주(王?, 955~981)가 죽었으니 자리를 세습하기를 요구하니 얼마 안 있다가 이를 허락하였다.

황제는 일찍이 가까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짐이 매번 《노자(老子)》를 읽다가 ‘가병(佳兵)이라는 것은 상서롭지 않은 기물(器物)이어서 성인은 부득이 하여야 이를 사용한다.’
라는 곳에 이르게 되면 일찍이 재삼 중복하여 규범(規範)과 경계(儆戒)로 삼지 않은 일이 없다. 제왕(帝王)이라는 사람은 비록 무공(武功)을 가지고 평정을 하지만 끝내는 반드시 문덕(文德)을 사용하여 치세(治世)에 이른다. 짐은 매번 조회에서 물러나서는 책 보기를 그만 두지 아니하며 속으로 전 시대의 성공과 실패를 짐작(斟酌)해 보고 이를 시행하며 덜어내고 덧붙이기를 다한다."

마침 감찰어사인 이광원(李匡源)을 파견하여 고려(高麗)에 사신으로 가게 되자 선이경을 부사(副使)로 삼았더니 선이경이 어머니가 늙었다는 것으로 사양하여 마침내 국자박사인 옹구(雍丘, 河南省 杞縣) 사람 공유(孔維)로 이를 대신하게 하였다.
고려왕인 왕치(王治, 성종)가 공유에게 예(禮)에 관하여 묻자 공유는 군신(君臣)과 부자(父子)의 도리와 오르고 내리는 등 위엄 있는 순서를 가지고 대답하니 왕치는 기뻐하며 말하였다.
"오늘에 다시 중국의 부자(夫子)를 보게 되었구나!"

임오일(25일)에 요에서는 탁주(?州, 河北省 保定市)자사인 안길(安吉)이 송(宋)에서 황하 북쪽에 성을 쌓았다고 상주하자 유수인 유열(裕悅, 관직명) 야율휴격에게 이를 어지럽히어 공사를 성취할 수 없게 하라고 명령하였다.

갑오일(10일)에 요주(遼主)는 여러 신하를 인솔하고 태후에게 존호(尊號)를 올려서 승천황태후(承天皇太后)로 하였으며, 여러 신하들은 요주에게 존호를 올려서 천보황제(天輔皇帝)로 하였는데, 크게 사면하고, 기원을 고쳐서 통화(統和)로 하였다. 국호(國號)를 바꾸어 대거란(大契丹)으로 하였다. 정미일(23일)에 요(遼)에서는 백관들에게 각기 작위를 1급씩 올리고 추밀부사(樞密副使)인 야율색진(耶律色珍)을 수사도(守司徒)로 하였다.

을묘일(2일)에는 요주(遼主)가 친히 죄수들을 심리하였다. 태후는 기민한 꾀를 가지고 있어서 좌우에 있는 사람들을 잘 어거하였다. 이보다 먼저 요인(遼人)이 한인을 구타하여 죽인 사람이 있으면 소나 말로 배상하였으며 한인(漢人)의 경우에는 그를 목 베고 이어서 그 친속들을 노비(奴婢)로 삼았다. 태후는 일률적으로 한인의 법으로 판결하니 연(燕)지역의 백성들이 모두 복종하였다.

"백성들이 수재나 한재가 있었던 것을 호소하면 바로 사실을 조사하는데 즉각 파견하여 길을 나서게 하되 오히려 시간에 뒤쳐질까 걱정하라. 자못 듣기로는 사자가 〔간혹〕 미적거리며 출발하지 않는다 하니, 주현에서는 부세를 거두는 것에서 기한을 어길 것을 염려하여 날로 채찍질하게 되고, 백성들 역시 사실을 검사하여 다시 씨 뿌릴 것을 기다린다. 만약에 이처럼 머물고 늦어지게 된다면 이 어찌 짐이 부지런히 정치를 하면서 백성들을 구휼하려는 뜻이겠는가! 지금부터 사자를 파견하여 재한(災旱)을 사실대로 조사하는 데는 그 지역의 멀고 가까운 것과 업무의 크고 작은 것을 헤아려서 기한을 정하여 이를 파견하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원래 어제 쓰려고 했던 글이었는데 글을 쓰다가 일에 붙잡혀 타이밍을 놓쳤다. 


주말에는 읽고 있던 책을 마무리하고 이후에는 쌓아두었던 학술지를 읽었다.


역사문제연구 52호는 이전과 출판사가 달라진 탓인지 알라딘에 검색해봐도 나오지 않는다. 이전 호들은 그래도 나왔는데 이제는 아쉽지만 글로만 언급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호 특집에서는 냉전사 중 미국에 의해 이루어진 대반란전에 대해서 다루었다.


대반란전은 냉전 시기 미국에서 저개발국가의 정부가 전복되지 않도록 한 다양한 조치와 작전을 일컫는다. 


냉전시기 미국은 소련과의 대결에서 승리하는 것이 중요했다. 미국은 제3세계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면서 공산군의 게릴라전에 어떻게 맞서야 하는지 경험할 수 있었다. 1954년 미국의 사회학자인 밀리칸과 로스토우는 CIA 국장 덜레스(Allen Dulles)에게 ‘공산주의에 대응하기 위해 군사적 개입이 단기적으로 필요하지만, 장기간에 걸친 개발과 협력이 궁극적인 대응책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근대화론이다. 대반란전은 앞선 군사작전과 개발에 의한 ‘재건’ 프레임을 결합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1960년대 케네디 정부는 제3세계에 적극적인 개발정책을 대외정책으로 삼고, 베트남에서는 대게릴라 작전을 전투에 적용하였다.


1961년 4월의 쿠바 침공은 아이젠하워의 후임자인 존 F. 케네디 대통령 아래에서 수행되었다. CIA는 1400명의 망명 쿠바인을 무장시키고 훈련시켰지만, 그들은 과테말라에서와는 달리 성공하지 못했다. 카스트로는 이미 쿠바군을 전면적으로 재건했고, 10만 명의 반정부 인사를 미리 구금했다. 게다가 기대했던 민중 봉기도 일어나지 않았다. 침략자들은 사흘 만에 비참하게 항복했다. 미국은 카스트로를 무너뜨리기는 커녕 오히려 그의 입지를 강화했다. 여러 남미 국가에서는 쿠바 혁명을 본받아 혁명 투사들이 게릴라 투쟁으로 넘어갔다. 미국의 대게릴라 작전 전문가에게 배우고 미국의 군사 지원금에서 재정 지원을 받기도 한 경찰과 군부대들이 게릴라들을 패퇴시켰다. 미국은 유럽 제국주의가 몰락한 후 그것을 대신해 제국주의 세계열강이 되었다는 비난을 들었다. [ 하버드 C.H.베크 세계사 1945 이후 - P81 ]


대반란전은 대한민국에도 영향을 주었다. 박정희는 1.21사태(김신조 청와대 습격 사건) 후 북한에 강력한 보복조치를 취하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 군사력 증강을 요청했으나 미국은 이 요청은 들어주지 않고 대신 간첩 작전을 진행할 조직을 지원했다. 그 결과 특전사와 전투경찰대 등의 대간첩작전 부대들이 전폭적으로 확대되었다. 이후 북의 남한 공격이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신체제가 선포되고 나서 이 부대는 시위 진압 부대로 변모했다. 미국은 북한에 대한 공격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부대를 지원함으로써 오히려 정부가 시민들을 무차별하게 잡아들이는 근거를 만들었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다.


앞서 읽었던 역사비평 145호에서는 새로운 냉전사의 유형의 글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 중 미국의 기독교들인이 냉전을 이용해 국가를 강력하게 결집시키면서 지금의 기독교 보수주의적 흐름이 만들어졌다고 했다. 그들은 정부를 압박하기도 했지만 자신들의 이익을 채우기도 했다. 


얼마 전 정부의 필수의료 정책과 의과대학 정원 증원 발표 이후 의료계가 반발하며 들고 일어섰다. 사실 필수의료 정책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보는데 의대 정원 규모의 문제가 더 부각되는 측면도 없지 않아 있는 것 같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22513060001797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4022715511158723


과거 1971년에도 인턴과 레지던트의 파업 사태가 있었다. 당시 파업은 의료인력을 ‘해외여행 제한’으로 강력히 묶어두려는 국가의 통제에 대한 인력들의 전면적인 반발로 전국적인 연대 파업을 야기했다. 정부는 국가 인력 유출을 걱정했던 것이다. 해방 후 의학교육의 급진적인 변화와 졸업 후 교육 제도의 정착은 단기간에 이루어졌지만 양성된 전문 인력이 활동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는 부족했다고 볼 수 있다. 


과거와는 파업의 이유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지만 고령화되는 한국 사회를 생각하면 이 문제는 잘 정리되어야할텐데… 걱정이 크다. 


오늘 아침에는 '한국형 귀신고래'에 대한 기사를 보고 불과 이틀 전 읽은 내용이었음을 확인했다. 오래 전이었다면 놓치고 넘어갔겠지만 아니어서 놓치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귀신고래는 우리 학명이 붙은 전 세계 유일한 고래다. 1977년 한반도 바다에서 더 이상 볼 수 없어졌는데 여전히 이 고래를 수소문해서 찾고 계시는 분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22611130004818


100여 년 전에 고래를 한반도에서 발견하고 전신뼈를 미국에 가져간 이가 있다. 뉴욕의 미국자연사박물관(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 AMNH) 소속 보조 큐레이터(assistant curator)였던 로이 채프먼 앤드류스(Roy Chapman Andrews, 1884~1960)다. 그는 1912년 1월 한국의 울산 장생포에 있는 동양포경주식회사의 포경기지를 방문했다. 그는 이곳에서 약 7주 간 머물며 캘리포니아 연안에서는 자취를 감추어버린 회색고래가 있는지 조사했다. 앤드류스는 이 연구를 바탕으로 1914년에 “캘리포니아 회색고래(THECALIFORNIA GRAY WHALE)”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한국 해역의 회색고래가 캘리포니아 회색고래와 같은 종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논문상에는 '한국계 귀신고래'와 직접 연결될만한 표현이나 내용이 등장하지 않는다고 한다. 

2011년 5월에 울산 남구청은 장생포에 앤드류스 흉상을 설치한다. 비문에는 그가 회색고래를 ‘한국계 귀신고래(Korean Stock of gray whales)’라 명명하고 그 존재를 전 세계로 알렸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했듯 이는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책을 읽고 공부를 하다가 연결되는 지점을 찾을 때 반갑다. 같지는 않더라도 비슷한 상황이 과거에 있었다는 것, 여기에서 어떤 단서들을 발견할 때 위안이 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이것이 후속 공부로 이어진다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24-02-28 0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귀신고래라는 말을 보니 예전에 나온 우표가 생각났습니다 두 가지나 나왔군요 두번째는 기억나는데 첫번째는 예전에 썼는지 안 썼는지 생각나지 않네요 위에 건 전지고 밑에 건 낱장으로 된 거예요


희선



http://image.epost.go.kr/stamp/data_img/sg/up20161028160612315.jpg
http://image.epost.go.kr/stamp/data_img/sg/up20120112094507252.gif

https://img.khan.co.kr/newsmaker/961/20110906_961_46a.jpg

거리의화가 2024-02-28 08:58   좋아요 1 | URL
희선님 예전에 우표 모으신다고 했던 것 기억합니다. 올려주신 이미지를 확인해보니 굉장하네요! 우표 3가지 디자인이 저마다 특징이 있습니다. 덕분에 더 잘 기억할 수 있겠어요. 감사합니다.
 

황제는 제군(諸軍) 가운데서 용사 수백 명을 선발하여 검무(劍舞)를 가르쳤는데 모두 공중에 칼을 던질 줄 알았고 그 몸을 솟구치며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이를 이어받게 하니 보는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마침 거란이 사자를 파견하여 공물을 바쳤는데, 편전에서 연회를 베풀어 주면서 이어서 검사(劍士)들을 나오게 하여 이를 보여 주었다. 수백 명이 웃통을 벗고 북을 치며 시끄럽게 하면서 칼을 휘두르며 들어오면서 뛰고 던지는 것이 이어졌는데 그 미묘함이 다 표출되니 사자는 감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였다.
이에 이르러 성을 순시하면서 반드시 검사들로 하여금 춤을 추면서 앞에서 인도하게 하였는데, 각기 그 기량을 드러내자 성 위에 있는 사람들은 이를 바라보면서 간담이 깨졌다.

갑신일(6일) 새벽에 유계원(劉繼元, ? ~992)이 그의 평장사(平章事)인 이운(李?) 등을 인솔하고 흰 옷에 사모(紗帽)를 쓰고 대(臺) 아래에서 죄받기를 기다렸는데, 조서를 내려서 그를 풀어주고 불러서 대(臺)에 오르게 하고 위문하였다. 유계원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신은 거가가 친히 왕림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몸을 묶어 명령에 귀의하려고 하였는데, 대개 망명한 사람
12
들이 죽을까 두려워하며 신에게 겁을 주어 항복할 수 없었을 뿐입니다."
황제는 망명한 사람들을 적어 오게 하여 모두 그들을 목 베었다. 회해국왕(淮海國王) 전숙(錢?)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경은 한 지역을 보존하여 나에게 귀부할 수 있었고,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기에 이르렀으니 깊이 아름답다 할 것이요."

유계원이 항복하자 사람들마다 상 받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황제는 장차 끝내는 요(遼)를 치고 유·계(幽·?, 幽州와 ?州)를 빼앗고자 하였다.
제장들도 모두 가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21
그러나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전전도우후(殿前都虞候)인 최한(崔翰, 928~992)만이 홀도 상주하여 말하였다.
"이 한 번의 일은 다시 거병하는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이번의 파죽지세(破竹之勢)를 타고서 이를 빼앗는 것이 아주 쉬우며 시기란 잃을 수 없는 것입니다."
황제는 기뻐하여 바로 추밀사(樞密使)인 조빈(曹彬)에게 명령하여 둔병(屯兵)을 움직여 발동하는 문제를 논의하게 하였다.

요(遼)의 남경권유수(南京權留守)인 한덕양(韓德讓, 941~1011)은 두려움이 심하였지만 지삼사사(知三司事)인 유홍(劉弘)과 더불어 성에 올라가서 밤낮으로 수어(守禦)하였으나 성 밖에서는 항복하라고 부르고 협박하는 것이 아주 급하자 사람들은 두 마음을 품었다. 마침 적리도(迪里都, 鐵林都)도지휘사인 이찰륵찬(李?勒燦, 盧存)이 나와서 항복하니 성 안에서는 더욱 두려워하였다.
요(遼)의 어잔랑군(御盞?君)인 야율학고(耶律學古)가 남경이 포위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이를 구하였는데, 포위한 군사가 바야흐로 엄하여 마침내 땅에 굴을 파고 나아가서 한덕양 등과 함께 기계를 가지런히 하고 불안한 것을 안정시키며 적당하게 대비하고 막으니 투지(鬪志)가 조금도 해이되지 아니하였다.

"경 등은 정찰하는 일을 엄히 하지 않았고, 군사를 사용하는 것이 법도가 없어서 적(敵)을 만나자 바로 패배 하였으니 어찌 장수라 하겠는가!"
특리곤(特里袞, ?隱)
26
인 야율휴격(耶律休格, 休哥, ? ~998)은 일이 급한 것을 알고 스스로 가서 원조하게 해달라고 청하니 요주는 마침내 야율휴격으로 야율희달(耶律希達)을 대신하게 하고 오원(五院)
27
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란히 출발하게 하였다.

계주(桂州)관찰사인 조한(曹翰)·조주(?州, 甘肅省 臨潭縣)관찰사인 미신(米信, 926~992)이 성의 동남쪽 귀퉁이에 주둔하였는데, 군사들이 땅을 굴착하다가 해(蟹, 게)를 얻자, 조한이 제장들에게 말하였다.
"게란 물에 사는 물건인데 육지에 살다니 그 사는 곳을 잃은 것이다. 또한 발이 많으니 적(敵)의 구원병이 곧 도착할 상(象, 상징)이다. 또 해(蟹)라는 것은 해(解, 해산)라고 풀 수 있고,
28
그러니 군사를 돌릴 것이다."

정월 초하루 병자일에 요(遼)에서는 황제의 아들인 야율융서(耶律隆緖, 972~1031)를 책봉하여 양왕(梁王)으로 하고 야율융경(耶律隆慶, 973~1016)을 항왕(恒王)으로 하였다. 야율융서는 어려서부터 서한(書翰)을 좋아하여 10세에는 시(詩)를 지을 수 있었으니 요주(遼主)는 위촉(委囑)하려는 뜻을 품었다.

겨울, 10월 초하루 신미일에 요주는 무사(巫師)에게 명령하여 천지(天地)와 병신(兵神)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하였다. 신사일(11일)에 곧 남침(南侵)하려고 하여 기고(旗鼓)에 제사를 지냈다. 계미일(13일)에 요주가 남경(南京, 북경)에 다다랐다.

황제가 장차 북변을 순행하려고 하였다. 기축일(19일)에 조서를 내렸다.
"경사(京師)에서 웅주(雄州, 河北省 雄縣)에까지 백성들을 징발하여 도로를 닦고 장애물을 제거하라."

무신일(9일)에 남쪽의 군사들이 물의 남쪽에 진을 치고 싸우려 하자 요주는 야율휴격의 말에만 홀로 황색을 입히어 적이 알아보게 하였다가 재빨리 검은 갑옷에 흰말로 바꾸도록 명령하였다.
야율휴격이 드디어 정예의 기병을 인솔하고 물을 건너서 분발하여 치니 남쪽의 군대는 크게 패배하였고, 뒤쫓아서 막주(莫州)에 이르렀는데 가로 누운 시체가 들에 널려 있었고 산채로 몇 명의 장수를 잡아 가지고 돌아왔다.
요주는 어마(御馬, 황제의 말)와 금잔(金盞, 금으로 된 술잔)을 가지고 그를 위로하고 말하였다.
"경의 용감함은 명성을 뛰어넘는데, 만약에 사람들마다 경과 같다면 어찌 이기지 못할까 걱정하겠는가?"

요(遼)에서는 야율희곤(耶律喜袞)이 이미 갇혔는데, 병오일(10일)에 요의 상경한군(上京漢軍)이 반란을 일으켜서 겁탈하여 야율희곤을 세우려고 하였지만 조주(祖州, 內蒙古 巴林左旗 西南 石房子村)의 성이 견고하여 들어갈 수가 없자 그 아들인 야율유례수(耶律留禮壽)를 세웠다. 상경유수인 제실(除室)이 그들을 붙잡으니 야율유례수는 돌아오자 바로 복주(伏誅)되었다. 한 해가 넘어서야 비로소 야율희곤에게 죽음을 내렸다.

가을 7월 병오일(11일)에 황제는 장차 크게 거병하여 요(遼)를 치려고 하여 사자를 파견하여 발해왕(渤海王)에게 조서를 하사하고 군사를 발동하여 호응하게 하면서 요(遼)를 멸망시키는 날 유·계(幽·?)의 영역은 다시 중조(中朝)로 귀납하겠지만 삭막(朔漠, 북방 사막지대) 밖의 것은 모두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발해는 끝내 도착하지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