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모피 판매에 가장 좋은 시장으로 보였지만 서유럽과 특히 미국 상인들이 경쟁력에서 우위를 점하고있었다. 미국 상인들은 약 5개월 내에 미국 북서부에서 광둥으로 모피를 운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모피를 캬흐타까지 운반하는 비용은 턱없이 높았으며 시간도 많이 걸렸다(모피를 알래스카에서 운반해오는 데 보통 2년 이상 걸렸다). 또한 알래스카와 캄차카에 있는 러시아의 전초 기지에 대한 물자 공급이 심각하 - P569

게 부족했기 때문에 외국 경쟁자들은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전초기지에 물건을 팔고 그에 대한 대금으로 모피를 받아 광둥에 판매하는 식으로 이들 전초 기지의 핵심 기능 자체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아메리카 회사가 성공하려면, 좀더 심하게 표현해, 살아남으려면 유럽과 미국처럼 러시아도 해로를 통한 교역 허가권을 청조에서 얻어내야만 했다. - P570

러시아정부는 예카테리나 2세(1762~1796년 재위)의 통치 때부터 줄곧 ‘카슈가르와 정치적·상업적 관계를 확립하는 데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고 한다. 그러나 알티샤르는 반란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고청은 러시아의 영향력이 이 지역에서 더이상 확대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1854년 크림 전쟁의 발발은 카슈가르와의 교역 접촉을바라는 러시아의 열망을 한층 더 부추겼다. 왜냐하면 이 전쟁이 영국과 러시아의 적대 관계를 악화시켰기 때문이다. 영국의 해상 교역, 특히차 교역이 성장하는 것을 보면서 러시아는 내지 교역에서 경쟁력의 우위를 점할 수 있기를 한층 더 갈망하게 되었다. 러시아 정부는 영국의 교역이 육로로 인도를 출발해 신장을 거쳐 중국 본토의 심장부로 침투할까 두려워했다. 1854년 러시아는 러시아-청의 접경 지역에위치한 카자흐와 키르기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중국 변경을 탐사하는 한편 카슈가르로 가는 대상 노선에 주의를 기울였다. - P585

1824년과 1825년 러시아가영국 및 미국과 각각 맺은 조약들의 결과로 러시아는 북아메리카에서더이상의 남부 진출을 포기해야 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 정부는 아무르 강 북쪽의 청 영토에 보다 큰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1832년에디젠스키M. V. Ladyzhenskii 대령이 고르비차Gorbitsa 강 하류의 변경 표지.
치를 정확히 확정짓기 위해 파견되었다. 1840년에 러시아 외무부는베이징 주재 선교단을 통해 청조와 아무르강 문제를 논의하려 했으나 베이징 당국은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그 문제는 일단락되었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지린성과 헤이룽장 성 군정 장관들은 만주의 변경 지역에 대한개발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청의 정책도 여전히 한족의 이주를 저지하는 쪽을 겨냥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만주 지역은 관심 밖의 무방비 지역으로 방치되고 있었다. - P588

청은 특히 만주에서는 만주인이나 몽골인만이 만주 변경 지역의군정장관이 될 수 있다는 규정을 파기하고 1853년에는 한족 기인을지린성 군정장관으로 임명했다. 또한 지린성과 헤이룽장 성의 지방재정을 재편성했다. 이 조치 이전에는 중앙 정부가 지린성 행정비의약 4/5와 헤이룽장 성의 행정비의 거의 전부를 부담했다. 중앙 정부는이런 관행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호부는 지린성과 헤이룽장성에 대한 행정 보조금을 여러 다른 성에 분담시켰다. 이러한 조치는 책임을 맡은 성들이 종종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에그리 성공적이지는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 결과 만주 변경의 각성은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새로운 항목의 세금을 제정하고, 관전과군전을 개척하며 팔기군의 연간 수입을 보충하기 위한 특별 ‘수결지‘를 새로 만드는 등 자체 수입원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 P598

청 제국은 그곳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또 한족을 중국본토에만 가두어두려는 시대착오적인 정책에 계속 집착함으로써 극동아시아 북부의 넓은 귀중한 영토를 잃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유익한 교훈이었다. 점점 더 한족 지향적으로 변한 조정은 이 교훈에서 깨달은 바에 따라 제국의 다른 변경 지역에 대한 한족의 이민을 허락했•다. 중국령 내륙아시아의 이후의 역사는 한족의 정주, 한족화 그리고 - P610

전에 비중국적이었던 사회의 보다 큰 중국으로의 통합 등으로 특징지어졌다.
이런 손실을 입기는 했지만 청조가 이룩한 것도 부인해서는 안 될것이다. 내부 반란과 유럽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왕조는 살아남았고청의 질서는 최소한의 변화만을 허용한 채 계속 유지되었다. 청조가처해 있던 상황을 고려해볼 때 청이 이보다 더 많은 일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 P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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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는 ‘철학‘사이자 철학사‘이다. 철학사는 철학을 다루지만 어디까지나 역사적 지평에서 다루며, 역사에 속하지만 어디까지나 철학의 역사이다. 때문에 철학사의 서술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역사와 철학을 어떠헤 배치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 P13

역사와 철학은 논의 대상의 성격에 따라서 유연하게 달리 배치되어야 하며, 어느 하나의 극으로 기울어질 때 철학사상 고유의 높이를 해치거나 철학을 역사와 괴리시키는 결과가 초래된다. - P15

해양 문명의 발달은 그리스인들로 하여금 전반적으로 강한 모험심을 가지게 해주었고, 농사짓기 어려운 척박한 땅은 무역이 발달하도록 만들었다. 우직하게 땅만 파면 되는 농사와는 달리 장사를 하려면 말을 잘하고 계산이 빨라야 한다. 그래서 말, 계산, 화폐가발달하고 합리적으로 사리를 따지는 문화가 성립했다. 지중해 특유의 부드러운 날씨는 사람들을 집 바깥으로 끌어내었고, 이 때문에 그리스인들은대개 개방적 · 사교적. 외향적인 성품을 보이게 된다. 그리스문명의 이런 특징들은 ‘logos‘라는 말에 단적으로 압축되었다. 때로 하나의 단어가 잘 찍은 사진처럼 한 문명 전체를 드러내 보여주기도 한다. 말, 계산, 비례 등을 뜻하고, 더 고급한 맥락에서는 이성, 추론 등을 뜻하는 ‘로고스‘라는 말만큼 그리스 문명의 성격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말도 없다. - P30

현실 역사와 그에 맞물려 진행된 담론사는 그리스의 역사가 바로 이렇게 정의 개념이 확립되고 실현되는 역사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과정이 그리스 민주정의 핵심을 이룬다. 여성, 노예, 외국인은 배제된 불완전한 민주정이었지만, 다른 지역의 고대사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이런 민주정의 개화(開花)를 바탕으로 헬라스의 문화가 꽃피게 된다. - P44

허무의 시대를 배경으로 해서 철학이 탄생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탄생설화가 지중해세계에서의 ‘철학‘이라는 담론의 성격을오랫동안 특징지어왔기 때문이다. 허무하다는 것은 참된 것, 영원한 것, 필연적인 것, 보편적인 것이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뜻한다. 달리 말해, 우리가 삶에서 기댈 수 있는 것, 의지해서 살아갈 수 있는 것, 우리의삶을 근거 지어주는 것, 그런 것(들)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절실하게 음미하면서 철학이 탄생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 P46

자연철학의 ‘탄생‘은 밀레토스 지방에서 이루어진 부분적인 ‘인식론적 단절‘을 통해서 가능했다. 흔히 밀레토스의 철학자들은 사물의 ‘질료‘를 찾았다고 한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규정이다. - P57

탈레스가 발견한 세계는 이전의 신화적 세계와는 판이한 세계였다. 그것은 더 이상 제우스가 번개를 던지고 포세이돈이 폭풍우를 일으키는세계가 아니었다. 자연은 자연 자체로서 이해되기 시작했으며, 또 수학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탈레스는 신들과 영혼들의 존재를믿었고 세계가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사유는신화와 구분되는 자연과학적 사유를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종교적 세계관과 단절되지 않은 세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 P67

아낙시만드로스에게서 우리는 거의 완벽하게 탈신화화(脫神話化)된 세계를 만나게 된다. 나아가 추상적 사유, 이론적 사유가 분명하게 나타났음을 감지하게 된다. 또, 지각을 통한 경험보다는 논리를 더 숭상하는, 논리에 굴복하는 태도도 만나게 된다. 요컨대 우리는 아낙시만드로스에게서 최초의 ‘과학적 세계관‘을 만난다고 할 수 있다. 아낙시만드로스는담론사의 핵심적인 한 지도리를 만들었다. - P75

퓌타고라스학파는 추상성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수 역시 어떤 사물이었다. (말하자면 남자가 3이고 여자가 4라면 결혼은 7이라는 식으로) 게다가 이들은 수를 신비화했다. 수비학(數學)의 원조인셈이다. 퓌타고라스학파는 특히 10을 ‘완전수‘라고 불렀다. ‘1+2+3+4" - P88

가 정삼각형을 형성한다는 이유에서이다. 여기에서도 대수적 맥락과 기하적 또는 물리적 맥락이 혼동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정 수에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이런 수비학은 지금까지도 우리의 삶 곳곳에널려 있다.
결국 ①밀레토스학파는 질료를 탐구했고 퓌타고라스학파는 형상을탐구했다고 도식적으로 말하는 것은 일정 정도 수긍할 수 있지만 조심스럽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것, ② 퓌타고라스학파의 수론에는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깃들어 있고 바로 이 점에서도 이 학파가 과학과 종교를, 합리와 신비를 기묘하게 뒤섞어놓은 학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P89

철학은 분명 민주주의풍토 위에서 자란다. 그러나 자연철학자들이 전통적인 믿음들을 무너뜨렸을 때 그리스의 대중은 철학자들을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았으며, 특히 아테네 몰락의 원인들 중 중요한 한 가지가 (대부분 이방인들이었던) 소피스트들에게 있다는 의혹이 불거졌을 때 철학과 민주주의는알력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자연철학의 경우에는 민주주의가 철학을 못따라왔다고 해야겠지만, 소피스트들의 경우에는 이중적이다. 소피스트들이 한편으로 계몽적/비판적 역할도 수행했지만, 동시에 파괴적인 형태의 허무주의, 회의주의, 상대주의 사조들을 퍼트림으로써 아테네 몰락 - P90

의 한 원인을 제공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철학과 민주주의의 상생(相生)이 그리스 문명의 영광을 가져온 한 요인이었듯이, 이번에는 철학과 민주주의의 알력이 그리스 문명의 쇠퇴를 가져온 한 요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철학은 늘 이렇게 시대와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를 맺어왔다. - P91

아페이론은 어떤 x이다. 물로도 불로도 공기로도 흙으로도 아직 규정되지 않은 무규정의, 비한정적인 무엇, 그러나 그 네 가지로 규정될 수있는 후대의 개념을 쓴다면 ‘분화(分化/différenciation)‘ 될 수 있는무엇이다. 이 점에서 아페이론은 곧 ‘페라스(peras)가 없는 것‘, 즉 경계선, 극한(limit), 가름, 한정, 규정이 없는 것이다. 미규정의 (undetermined)무엇이 규정됨으로써 (determined) 일정한 사물이 된다는 것, 이것은 그리스 철학, 나아가 사유 일반의 기초 요소들-철학소(哲學素)들-중 하나이다.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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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契丹)의 주군은 나이가 어리어서 나라의 일을 그 어머니에게서 결정하며 한덕양(韓德讓, 941~1011)이 총애를 받아서 가까이 가서 용사(用事, 권력을 쥠)하고 있어서 그 나라 사람들이 이를 괴로워하고 있으니 청컨대 그 틈을 타고서 유·계(幽·?)를 뺏으십시오."
황제는 비로소 속으로 북벌(北伐)할 뜻을 가졌다.
조서를 내려서 친정(親征)을 논의하게 하였는데, 참지정사인 이지(李至, 947~1001)가 말씀을 올렸다.
"유주(幽州, 河北 北部와 遼? 일대)는 거란의 오른쪽 팔인데 왕의 군사가 가서 치게 되면 저들은 반드시 항거할 것입니다. 성을 공격하는 사람은 수만 명 밑으로 가지 않을 것이며 병사는 많고 비용은 많이 들며 형세는 반드시 널리 후량(?糧, 말린 음식으로 군량)을 준비해야 합니다.

조빈 등은 나머지 군사를 거두어 밤중에 거마하(巨馬河)를 건너서 역수(易水)의 남쪽에 영채를 만들었고, 이계선(李繼宣, 950~1013)이 힘껏 거마하에서 싸우자 요의 군사들은 비로소 물러났는데 추가로 도망하여 고산에 도착하였다.

바야흐로 거마하를 건너면서 사람과 가축이 서로 짓밟으니 죽은 사람이 계산할 수 없었다. 지유주행부사(知幽州行府事)인 유보훈(劉保勳, 925~986)의 말이 진흙탕 속에 빠졌고, 그 아들인 유리섭(劉利涉)이 이를 구하려고 하였지만 꺼낼 수가 없어서 드디어 함께 죽었다. 유보훈의 성품은 순수하고 삼갔으며 관리의 업무를 처리하는데 정예여서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명령을 받고서 아직 일찍이 피하는 말씀을 드리지 아니 하였고, 동료들을 맞이하면서 아직 일찍이 실의(失意)하지 않게 하였으며 집에 재물을 쌓아서 아직 천금(千金)에 이르지는 않았다."
죽기에 이르자 듣는 사람들이 모두 이를 아파하고 애석해 하였다.

전중승(殿中丞)인 공의(孔宜, 941~986) 역시 거마하에 빠졌다. 나머지 무리들은 고양(高陽, 河北省 保定市 高陽縣)으로 달아나다가 요의 군사에게 충격을 받아서 죽은 사람이 수만 명이었는데 사하(沙河)는 이 때문에 흐르지 않았고, 창과 갑옷을 버린 것이 언덕처럼 되었다. 야율휴격은 송의 군사 시체를 수습하여 경관(京觀)을 만들었다.

"짐이 지난번에 군사를 일으키면서 장수를 선발하였는데, 단지 조빈 등이 웅·패에 주둔하면서 양식을 싸고 갑옷을 갈고 앉아서 군대의 성세(聲勢)를 넓히면서 한 달여 동안에 산의 뒤가 평정되기를 기다렸다가 반미·전중진 등과 군사를 모아서 나아가서 직접 유주(幽州)에 맞닥뜨려 힘을 함께하여 몰고 가서 물리쳐서 옛 강토를 회복하고자 하였던 것이 짐의 뜻이었소.
어찌하여 장수들이 이루어진 계획을 준수하지 않고 각기 소견(所見)으로 달려가서 10만 명의 갑옷 입은 군사를 관장하여 요새를 멀리까지 나가서 다투어 속히 그 군현(郡縣)을 빼앗고자 하였고 또한 군사를 돌리어서 치중(輜重)을 도움 받고자 하여 왕복하면서 수고롭게 하는 폐단이 생겼다가 적이 올라타는 바가 되었소. 이 책임은 주장(主將)에게 있는 것이요.

요주(遼主)가 남경(南京)에 갔다. 정유일(5일)에 요주(遼主)가 백관들을 인솔하고 태후에게 존호(尊號)를 책서(冊書)하여 올려서 예덕신략응운계화승천황태후(睿德神略應運啓化承天皇太后)라고 하니 여러 신하들은 요주의 존호를 올려서 지덕광효소성천보황제(至德廣孝昭聖天輔皇帝)라고 하였다.

예전에는 관부에서 배를 만들고 이미 완성하면 한 척에 세 호구(戶口)를 징조(徵調)하여 이를 지켰는데 황하의 흐름이 여울지고 급하여 그것이 표류(漂流)하여 잃어버리는 것을 대비하면 1년에 부역(負役)하는 백성이 수천 명이었다. 장평은 마침내 연못을 뚫어서 물을 끌어들이고 그 사이에 배를 묶어두니 다시는 백성들을 징조(徵調)하지 않았다.
도적의 우두머리인 양발췌(楊拔萃)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관중(關中)과 삼보(三輔) 사이에서 왕래하며 도적질하자 조정에서는 여러 주(州)의 병사를 파견하여 이를 쳤지만 이기지 못하였는데 장평이 사람을 파견하여 유세하여 그들을 항복시켰다. 업무를 관장하고서 무릇 9년이 되자 관부(官府)의 돈을 아낀 것을 계산하니 80만 민(緡)이었다.
염철사를 맡기에 이르렀는데 겨우 몇 달 만에 섬서전운사(陝西轉運使)인 이안(李安)이 그[장평]가 옛날에 간사한 일을 한 것을 들추어내니 장평은 걱정하고 화를 내다가 병이 되어 죽었다. 황제는 오히려 조회를 하루 동안 열지 아니하고 우천우위상장군을 증직하고 장사 지내는 일을 관부에서 공급하게 하였다.

조서를 내려서 안변책(安邊策, 변방을 안정시키는 대책)을 물으니 전중시어사인 조부(趙孚)가 주문으로 논의하였다. 대략적으로 마땅히 안에서 전비를 잘 닦고 밖으로 기쁘게 결맹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황제는 칭찬하고 이를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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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賈復이 남쪽으로 陵과 息을 공격하여 평정하였다. 賈復의 部將이 에서 사람을 죽이자,川太守 寇恂이 체포하여 옥에 가두어 두었다.
이때는 아직 초창기여서 軍營에서 법을 범한 자들을 대부분 서로 용납해 주었으나 그 部將을 시장에서 죽였다.賈復은 이를 수치로 여겨 潁川지날 때에 좌우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恂과 똑같이 장수의 대열에 있는데 그에게 모욕을 당하였으니, 이제 寇恂을 보면 반드시 내 손으로 劍을사용하여 직접 그를 죽이겠다." 하였다.恂이 이 계책을 알고는 서로 만나보려 하지 않자, 누이의 아들 谷이 말하기를 "저는 장수입니다. 검을 차고곁에서 모시다가 갑작스럽게 변고가 생기면 충분히 당해낼 수 있습니다." 하였다. 寇恂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옛날 藺相가 秦王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廉에게 굽혔던 것은 국가를 위해서였다." 하였다.
마침내 屬에 명하여 군사들에게 먹일 음식을 성대히 장만하고 술과 막걸리를 준비해 두었다가 執金吾(賈復)의 군대가 경내에 들어오거든 한 사람마다 모두 두 사람 분의 음식을 겸하여 주라고 하고는, 寇恂이 나가 길에서 맞 - P241

이하다가 병을 칭탁하고 돌아왔다. 賈復이 군대를 무장하고 추격하려 하였으나 관리와 군사들이 모두 취했으므로 마침내 그대로 지나갔다.
이 谷을 보내어 이 사실을 보고하였는데 황제가 마침내 寇恂을 부르니, 寇恂이 조정에 이르러 인견할 때에 賈復이 먼저 와서 자리에 있다가 일어나서 서로 피하려고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는데 두 마리 범이 어찌 사사로이 싸운단 말인가. 금일에 朕이 이것을 풀어주겠다." 하고는 이에 함께 앉아서 지극히 즐거워하고 마침내 함께 수레를타고 나와서 친구를 맺고 떠났다. - ≪後漢書 寇恂傳≫에 나옴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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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서 미아 가족은 야오씨로부터 모텔을 인수받으면서 흐뭇한 결말로 끝을 맺었다. 2권도 역시 시작부터 재밌다. 불법 이민과 미 국경을 둘러싼 묵직한 이야기가 핵심이 될 것 같다.





[CH1] 

미아는 야오씨로부터 모텔을 인수받았다는 것을 여전히 실감하지 못하여 꿈을 꾸는 것 같다. 현실 주인이 되었음에도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느끼는 것이다. 아빠는 여전히 화장실 휴지로 코를 풀고 크리넥스 화장지를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16번 방에 있는 밀러씨가 립을 먹다가 불법인들이 오면 우리들이 남아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미아는 이를 듣고 최근 TV에서 입후보자 Kathleen Brown이 미국과 멕시코 간 국경에 그들이 오고 있다며 목소리를 낸다. Hank는 그들이 캘리포니아의 문제를 이민자들에게 전가하고 있다고 약점을 가지고 책임을 지우긴 쉽다고 말한다. 

그래도 부모님은 더 이상 좀비처럼 걸어다니지 않고 Lupe는 프론트 데스트에서 등록하는 업무를 맡게 되어 미아는 참으로 기쁘다. 


[CH2]

중국계 전용 채널이 만들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후 가족들은 무척 기뻐했다. Hank는 호텔의 sign에 새로움을 불어넣겠다며 “AS SEEN ON TV”라는 문구를 추가해 넣었다.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다음 날 아침 호텔에 사람들이 체크인을 한다며 줄을 서 있었다. 벤츠 한 대가 들어서더니 Jason이 안에 있었다. Mia가 호텔의 손님이 들었다는 이야기를 하니 Jason은 궁금해 했다. 그 때 Lupe가 끼어 들더니 Mia의 손을 잡아채가서 대화는 중단되었다. 홀에 들어가니 아이들은 마치 해를 보듯 경외심에 찬 눈빛으로 그들을 오래 바라보았다. 루페와 나는 Welch’s 선생님 수업을 같이 듣게 되었고 Jason은 같은 반이 아니었다. 그는 반을 바꿀 수 있는지 물어보았지만 거부당했다. 미아는 Jason에게 여전히 우리는 수업이 아니라도 쉴 때 얼굴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위로한다.


[CH3]

6학년 시작이 좋지 않다. 담임 선생님인 Mrs.Welch는 이민에 대한 주제로 글을 쓰라 이야기한다. 규율을 지켜야 한다며 말하는 도중 끊지 말라 했는데 5학년 때 미아를 비웃었던 Bethany Brett은 끼어들어 말을 하고 칭찬을 받는 반면 미아는 끼어들지 말라고 주의를 당한다. 이 불평등함. 

제이슨은 미아와 루페가 있을 때 자신의 집에 놀러오라 이야기하는데 루페는 아빠를 도와야 한다며 거절한다. 미아는 루페 때문에 눈치가 보이기도 하고 어떨까 고민하다 결국 승낙한다. 

미아가 학교에서 돌아오자 부모님은 학교가 어떤지 좋았는지 물어보셨다. 미아는 좋았어라고 대답하고 만다. 포크로 밥을 먹는 미아를 보며 수저로 먹어야 한다고 아빠는 주의를 준다. 어렸을 때 나도 수저, 젓가락 사용에 익숙하지 않아서 처음 배울 때 무척 고되었던 기억이 난다. 특히 젓가락은 지금도 사용이 어려울 때가 있다^^;


[CH4] 

다음날 루페는 미아에게 제이슨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아니라 대답했는데 갑자기 그 때 화장실에서 크게 이야기하는 여자 아이들의 소리가 들렸다.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우리 반에 불법자들이 꽤나 있다네.” 그 중 한 명은 우리 반 아이가 아닌 글로리아였다. 글로리아의 친구가 말했다. “걔네들을 어떻게 구분해?” “간단해. 영어 발음 악센트를 보면 되지.” 둘은 키득거렸다. 우리는 그들이 나갈 때까지 미아와 루페는 잠자코 지켜 보았다. 방과 후 우리는 모텔에 가서 중국인 이민자들과 스페인 계열의 이민자 아이들에게 문장을 쓰는 법과 계좌 개설하는 법, 대중 교통 이용하는 법 등을 알려주었다. 행크가 돌아오더니 TV 광고 후 호텔 매출이 2배 올랐다는 기쁜 소식을 접했다. 엄마가 청소를 하고 와 미아는 근육을 풀어준다고 참깨 오일 롤링 마사지를 해주었다. 아빠에게도 마사지를 해 주었는데 그는 맛있는 전병이 생각난다고 했다. 미아는 “전병이 뭐예요?” 아빠는 전병이 기억이 나지 않느냐면서 미국에 오기는 했지만 이런 기억은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이야기했다. 미아와 Lupe는 호텔 이민자 아이들 중 Jalisco가 국경을 넘어오다가 친구와 헤어진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훔치는 상황을 마주한다. Lupe는 자신도 과거에 경험한 일이기에 속상해한다.


[CH5]

엄마는 머리를 자르겠다며 가위를 들고 미아 방에 들어왔다. 미용실에 가면 돈이 들기 때문에 엄마가 주기적으로 잘라주고 있는 것이다. “Can we just skip this year?” 엄마는 고개를 저었다. “Long hair wastes shampoo.” 

그날 밤 미아는 아빠의 친구들과 함께 파라다이스 뷔페 집에 갔다. “Remembember, when we get there, don’t fill up on a bread or rice.” 입이 짧거나 가리는 것이 많거나, 아니면 많은 양을 먹지 못하는 사람은 뷔페 집에 가는 것이 손해다. 아빠는 매달 모텔의 이익금을 친구들과 이렇게 나누는데, 이 때 그의 표정은 세상 행복해 보인다. Uncle Zhang은 중국에서 엔지니어를 했었다. 그래서 그는 “I was gonna try to take the electrical technician exam.” 엄마도 과거 과학자였기에 함께 준비하자 권하지만 “Too busy cleaning rooms.”라 대답한다. Prop 187 법률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분위기는 어두워진다. 그것은 이주 증명서를 가지지 않은 아이들은 캘리포니아 학교에서 내보낸다는 이야기였다. “We immigrants are all in the same boat.” 미아는 아빠가 게 다리 갯수보다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한 것이 자부심을 느낀다.


[CH6]

차를 타고 가던 미아 가족들. 이 때 second car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신용카드가 있으면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미아가 했는데 “좋네.”라고 이야기하는 엄마. 아빠는 그럴 여력은 안 된다고 냉정하게 말한다. 호텔에 도착한 뒤 미아는 행크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그는 과거에 신용 카드로 공짜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고 말한다(그만큼 카드를 많이 썼다). 미아는 어제 자신의 발음에 대해서 들었던 이야기를 엄마에게 한다. 엄마는 발음은 네 고유의 시그니처라며 마치 여권에 찍힌 인장 같은 것이라고 말해준다. 엄마는 고민 끝에 처음으로 신용카드 신청서를 작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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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4-03-10 2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 👍 저도 분발하겠습니다!

거리의화가 2024-03-11 09:03   좋아요 1 | URL
미미 님도 시작하셨군요^^ 화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