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제국은 개방된 ‘야만의 프런티어’가 없는 유일한 제국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제국에는 이민형 식민지도 없었다. - P1181

프랑스의 제국주의는 정치 방면에서 놀라울 정도로 보잘것없는 번식능력을 보여주었다. ‘시민’의 나라가 민주주의를 수출한 적이 없었다. 프랑스의 식민정권은 대부분 극단적으로 독재적인 정권이었다. 훗날 탈식민화 과정에서 서아프리카만 상대적으로 평온을 유지하며 많은 폭력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다. 초기 프랑스 확장사에서 프랑스가 겪은 실책의 사례는 영국보다 훨씬 더 많았다. 1882년, 영국은 프랑스인의 코앞에서 이집트를 빼앗아감으로써 프랑스에게 치욕의 일격을 날렸다. 프랑스의 확장이 낳은 최대의 문화적 효과는 프랑스어의 전파였다. 이 밖에도 식민지에서 새롭게 등장한 교육받은 소수 계층에게는 ‘동화’의 문이 열려 있었다. 종주국 프랑스는 이들 식민지 지식인을 통해 식민지의 급진적인 문화적 변혁을 기대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는 진정한 의미에서 응집력이 있는 제국문화를 만들어 낼 수 없었다. - P1192

독립 주권국이 최종적으로 지배권을 장악하고, 주로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권력이 방사됨으로써 작동하는 제국 형성의 모형을 ‘초보적’ 제국건설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유형의 제국건설은 장기적인 전략의 배경을 가진 경우가 거의 없었다. 역사학자 존 실리는 1883년—영국이 치밀한 계획 끝에 이집트를 점령한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에 "영국의 정복은 ‘얼빠진 상태’에서 이루어졌다"는 유명한 논평을 내놓았다. 장기적인 계획이란 관점에서 본다면 실리의 평가는 결코 설득력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며 다른 유럽제국에도 같은 평가가 적용될 수 있다. - P1198

‘자발적인’ 복속은—삼각관계의 압박이든 종속관계의 직접적인 인정이든—제국의 확장 방식 가운데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보편적인 방식이었다. 심지어 2차 대전 뒤의 미국 패권체계 가운데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현대 노르웨이의 역사학자 게이르 룬데스타트의 말을 빌리자면 이것은 일종의 "초청받은 제국"이다. - P1199

대형 플랜테이션과 특허 회사의 활동 지역은 통상적으로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는 공간이었다. 이 지역에서는 엘베강 동쪽의 융커의 장원이 그랬던 것처럼 국가의 법률은 간접적으로만 작용했다. 선교사들의 영향력은 매우 커서 심지어 법률로 보호받는 영지를 세울 수 있는 권력을 갖고 있었다. 특허회사가 아시아에서 철저하게 몰락한 뒤로 아시아에는 새로운 반관영 식민 대리기구가 생겨났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남만주철도주식회사였다. - P1201

메이니그의 관점에 따르면 19세기 중엽의 미국은 네 가지 형태—지역사회의 집합체, 연방, 민족, 제국—를 한 몸에 갖춘 국가였다. - P1210

미국의 백인과 흑인은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가 ‘외래인’이자 ‘신참자’였다. 문화의 ‘용광로’란 신화는 현실과는 거리가 멀었고 민족 전체의 기본인식도 아니었다. 그러나 유럽 민족주의의 ‘우리’와 ‘그들’이란 이분법적 인식도 미국에서는 주류가 될 수 없었다. ‘우리’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통일된 목소리가 없었다. 19세기 미국인은 사회적 차이는 정밀한 계급제도에 의해 결정되면, 인종은 질서의 표준으로서 불가결하나 동시에 불안정하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전형적인 제국주의적 세계관의 장벽이었으며 현실세계에서 각종 격리제도로 구체화되었다. - P12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국과 민족국가는 19세기에 인류가 모여 살았던 양대 정치단위다. 1900년 전후로 전 지구적 영향력을 가진 오직 두 개의 정치실체였다. 거의 모든 사람이 제국이나 민족국가 가운데 어느 하나의 권위 아래서 살았고 이른바 세계정부 또는 초국가기구는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 열대우림, 대초원 혹은 극지방 같은 격리된 곳에 사는 소수의 인종집단만이 더 높은 권력기구에 공물을 바쳐야 하는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P1097

1881-1912년 사이에 유럽(과 미국)이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정복과 권력을 탈취한 전체 과정은 일종의 이념적인 논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그들이 내세운 인종주의적 색채가 짙은 ‘강자의 정의론’은 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은 자치의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유럽과의 경쟁에서 자신의 이익을 지켜낼 능력도 없다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 P1114

19세기 유럽사에 관한 적지 않은 통사적 저작에서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는 각주 정도로 간단하게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이 때문에 유럽의 확장은 유럽사의 핵심이 아니라 유럽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몇몇 나라에서 발생한 부산물이란 인상을 준다.
결론적으로 외교사와 식민사 이 두 맥락은 연결된 적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우리는 외교사와 식민사에 의존해 세계사를 관찰할 수 없다. 세계사를 관찰하는 시각을 찾으려면 유럽 중심론과 아시아 또는 아프리카 중심론 사이에 교량을 놓아야 하며, 그 밖에도 두 가지 매우 도전적인 난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19세기 말에 전 세계로 확장된 유럽 국제체제의 발전사를 식민과 제국주의 확장사와 연결해야 한다. 다음으로 우리는 목적론에서 출발해서 19세기 세계사를 1914년 발발한 전쟁과 자동적으로 연결시켜서는 안 된다. - P1115

19세기가 ‘민족국가의 시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두 가지는 분명하다. 하나는 19세기에 하나의 새로운 사유체계와 정치적 신화로서 민족주의가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민족주의는 강령과 정책으로서 받들어졌고 민중의 정서를 자극해 동원하는 도구로서 작용했다. 민족주의는 시발점에서부터 강력한 반제국주의의 색채를 드러냈다. - P1123

19세기에 민족국가는 다음 세 가지 경로 가운데 하나를 통해 등장했다. 1.식민지와 혁명적인 결별 2.패권형 통합 3.점진적 자치, 이 세 가지 경로 각각에 대응하는 민족주의의 형태가 반식민 민족주의, 통합 민족주의, 분리 민족주의였다. - P1126

세계의 현존하는 민족국가 가운데서 어느 국가가 1800-1914년 동안에 수립되었을까? 1804-32년의 첫 번째 물결가운데서 출현한 국가는 아이티, 브라질제국, 라틴아메리카 공화국들, 그리스, 벨기에다. 19세기 60,70년대의 두 번째 물결 가운데서 패권형 통일 방식을 통해 독일제국과 이탈리아 왕국이 태어났다. 1878년, 베를린회의에서 열강은 원래 오스만제국이 통치하던 발칸반도에 몇 개의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1910년에 성립된 남아프리카 연방은 ‘사실상의’ 독립국가였다. 수십 년이 걸린 남아프리카연방의 평화적인 독립 과정은 1차 대전 기간 중에 끝이 났다.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는 병력과 경제적인 지원을 통해 협상국이 승리하는 데 크게 기여했고 이 때문에 영국은 1918년 이후로는 더 이상 이들 국가를 식민지로 대우할 수 없었다. 1차 대전 이전에 태어난 신생 민족국가는 모두가 ‘철혈정책’을 통해 수립되지는 않았다. 독일, 이탈리아, 미국은 이 경로를 통해 태어난 것이 분명하지만 일본,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은 그렇지 않았다. - P1148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견뎌낸 유럽의 식민제국을 돌아보면서 우리는 이들 제국의 취약성이 아니라 강인성과 재생능력임을 분명하게 알게 된다. 제국 형성기에서부터 살펴보면 15세기(오스만제국), 16세기(포르투갈과 러시아), 17세기(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청 왕조를 종점으로 하는 기원전 3세기까지 올라가는 최초의 중화제국)가 남겨놓은 역사의 ‘잔해’는 무수한 풍운을 거친 뒤 현대세계로 곧바로 뛰어들었다. 제국이 강력한 응집력과 변화에 적응하는 능력이 없었더라면 이토록 오래 유지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 P1154

제국은 광활한 공간에서 다민족으로 구성된 통치연맹이며, 일종의 비대칭적이며 사실상 전제적인 중심-주변부 구조를 가진 실체다. 제국은 강제적인 기구와 정치적 상징주의, 제국정부와 그 엘리트가 찬양하는 보편주의 이념을 이용하여 국가의 통일을 유지한다. 제국의 엘리트 계층 이하에서는 어떤 형태의 사회적 무노하적 통합도 형성되어 있지 않다. 또한 동질적인 제국사회와 통일적인 제국문화도 존재하지 않는다. 국제관계에서는 제국의 중심부는 절대로 주변부가 독립적인 외교관계를 발전시키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제국은 내부 문제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는 끊임없이 거래하고 타협해야 한다. 상황이 좋다면 모든 사회계층의 사람들이 제국 안에서 평안하게 살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제국은 본질적으로 강제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제국은 자치를 누리는 파트너들이 제1인자를 중심으로 뭉친 패권적 연합이다. - P1166

19세기에 모든 제국이 적극적으로 활약하지는 않았다. 그 차이는 대륙제국과 해양제국의 구분과는 무관했다. 19세기 유럽 국제체제에서 줄곧 능동적이었던 3대 제국은 영국, 러시아, 프랑스였다. 독일은 1994년 이후로 식민제국의 대열에 참여했으나 비스마르크 집권 기간 동안에는 의도적으로 ‘세계정치’의 추진을 피했다. 항상 호전적이며 활력에 넘치던 중국제국과 오스만제국은 점차로 줄어드는 제국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지만 유럽의 확장 앞에서 방어적 지위로 떨어졌다. 1895년부터 일본은 매우 적극적인 제국주의 ‘참여자’가 되었다. 19세기의 제국은 제국주의의 강도에 차이가 있었다. 표면적으로 볼 때, 또는 추상적인 이론의 시각으로 볼 때 한 가지만 드러나는 제국주의 체제는 좀 더 깊이 관찰했을 때 다양한 제국주의로 분화한다. - P117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클레어 특유의 속내를 알 수 없는, 어둡고 깊은 눈동자와 마주치자 한순간 아주 낯설고 외로운 어떤 피조물의 눈을 들여다보는 느낌이 들었다. 희미한 두려움이 차가운 안개의 숨결처럼 그녀의 몸을 훓고 지나갔다. - P55

클레어의 문제는 자기 케이크를 차지하고 먹겠다는 것을 넘어, 다른 사람들의 케이크에까지 손을 댄다는 데 있었다. - P70

그녀는 그가 행복하기만을 바랐지만, 그가 주어진 것들과 더불어 그렇지 못하다는 것에 분개했다. 그리고 그의 행복을 바라면서도 단지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만, 자기가 그를 위해 세워놓은 계획에 따라서만 그렇게 되길 원한다는 점은 결코 인정하지 못했다. 그녀는 또 아들들을 위해, 그리고 그만큼은 아니지만 스스로를 위해 자신이 고집하는 삶의 터전과 안전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이는 그 어떤 계획도, 그 어떤 방식도 인정하지 않았다. - P83

그녀는 자신과 클레어에게 화가 났다. 그러나 스스로에 대한 분노가 더 컸다. 클레어 켄드리의 성화에 못 이겨 브라이언이 확실하게 하지 말라고 한 일을 허락해버렸다. 그녀는 그가 흔들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그가 까닭 모를 불안증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런 일에 동의한 것도 짜증이 났다. 댄스파티로 끝난다면 모를까, 앞으로 온갖 사소하고 귀찮은 일들과 애매한 상황에 말려들 것이 뻔했다. 클레어가 그들과 그들 사이에 들어와 일어날 수 있는 불쾌한 일들이 그녀의 눈앞에 끝없이 떠올랐다. - P100

그녀는 생각했다. ‘뭐가 됐든 뭔지 알 수만 있다면, 어떻게 해볼 수 있을 텐데.‘
다시 브라이언. 그는 불행했고, 불안했고, 자기 안에 틀어박혔다. 그의 상태를, 그 이유와 치유책을 안다고 그토록 자부했던 그녀는 이전의 발작적인 불안 증세와 너무나 비슷하면서도 너무나 다른 이번 경우를 이해할 수도, 규정할 수도 없었다. - P116

"내 생각에." 거울 속의 모습을 보며 그녀가 말했다. "너는 어딘지--아, 아주 몹시--지독한 바보였어." - P122

"그 잔 봤죠? 운이 좋았어요. 그건 당신의 친애하는 조상들인 남부군이 소유했던 것 중에서 가장 볼품없는 것 중 하나였어요. 브라이언의 몇천 년 전 증-증-종조부 것이었는지 생각도 안 나네요. 유구한 역사가 담긴 거죠. 아니 담겨 있었죠. 지하철도로 운반된 거예요. 아, 그래요! 원한다면 영국 언더그라운드라고 하죠. 아무튼 난 오 분 전까지만 해도 그걸 없앨 방법을 알지 못했어요. 이제 영감을 얻었네요. 그냥 깨버리면 되는 거였어요. 그러면 영원히 없앨 수 있는 거죠. 그렇게 간단하게! 그 생각은 못해봤네요." - P128

아이린은 그들 옆에 서서 하얗게 눈이 내린 안뜰 사이로 난 좁은 시멘트 길을 걸었다. 그녀는 공기 중에서, 그들 둘 사이에 일어났고 다시 일어날 뭔가를 느꼈다. 살아 있는 실체가 그녀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흘낏 돌아보니 클레어가 브라이언의 다른 팔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녀는 도발적인 눈길로 그를 올려다보았고, 그의 눈은 애타는 열망을 드러내며 클레어의 얼굴에 못박혀 있는 듯 보였다. - P149

사라졌다! 부드럽고 하얀 얼굴, 밝게 빛나는 머리카락, 불온한 주홍색 입, 꿈꾸는 눈동자, 어루만지는 듯한 미소, 견디기 힘든 사랑스러움, 클레어 켄드리였던 것들이, 아이린의 평온한 삶을 뒤흔든 그 아름다움이, 사라졌다! 조롱기 섞인 대담함, 그녀의 농염한 자세, 종이 울리는 듯한 웃음소리. - P15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런티어라는 개념은 19세기 사회에서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었다.


인종과 계급의 출발점, 인디언의 역사, 이민의 역사, 그리고 나아가 개척과 개발 논리에 밀린 자연과 동물의 부르짖음까지.

19세기에 들어온 이후로 도시에 대칭되는 극단은 더는 ‘농촌’이 아니라 ‘프런티어’이다. 프런티어는 공간적으로 끊임없이 외부를 향해 확산된다. 프런티어는 확장자가 스스로에게나 타인에게 말하듯 그렇게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다. 이동영역이 자기 쪽으로 접근하여 오는 모양을 지켜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프런티어는 침략자의 창끝이다. 창끝이 다가왔을 때 모든 것은 옛 모습을 잃고 만다. - P945

2차 대전 이후, 특히 탈식민화가 시작되면서 백인이 이 세계에 선을 전파했다는 주장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었다. 역사학자들이 민족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식민 확장 과정의 피해자들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아메리카 원주민, 브라질 인디언,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이 받았던 부당한 대우가 학계와 대중의 시야에 들어왔다. 초기 역사서에서 영웅으로 추앙받던 개척자들이 한 순간에 잔인하고 음험한 제국주의자로 변했다. 이렇게 시작된 것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 P947

가장 놀랍고도 가장 성공적인 프런티어 개발은 대서양 해안에서부터 시작된 유럽인의 북아메리카 정착이었다. 전통적인 미국 역사학계는 ‘서부획득’이라 부른다. 이 거대한 과정의 이름 자체가 미국에서 나왔다. 젊은 역사학자 프레더릭 잭슨 터너가 1893년 한 강연에서 이 용어를 만들어냈다. 터너는 이때의 강연에서 ‘프런티어’란 개념을 처음 제시했다. 그가 상정한 프런티어란 동쪽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종결’상태에 도달할 때까지 끊임없이 옮겨가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문명과 야만이 세력과 역사적 권리의 비대칭적 배분 속에서 만났다. - P950

침략자는 상황에 따라 다음 세 가지 논리를 들고 나와 자기행위를 변호했다.
1. 정복자의 특권. 기존 토지소유권을 무효화할 수 있는 권리다.
2. 17세기 청교도의 ‘무주지’ 원칙. 수렵자, 채집자, 목축자가 거주하는 토지는 ‘주인이 없는 땅’으로 간주하며 경작할 필요가 있을 때는 망음대로 차지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3. ‘야만인’에게 문명을 전파한다는 종교적 사명. 이 논리는 소유권의 강제적 탈취를 합법화하는 이념으로 변신한다. - P954

프런티어에서 ‘국가’는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제국의 경계가 전형적인 프런티어이다. 제국이 확장을 멈추는 순간 프런티어도 더 이상 잠재적인 병합의 대상이 아니라 외부 위협을 막아내는 노출된 측면으로 바뀐다. 프런티어는 제국의 방어선 바깥에 있는 통제되지 않는 공간, 마지막 초소 넘어 저쪽의 게릴라와 비적이 수시로 출몰하는 위협적인 공간이 된다. - P955

1800년 무렵에 제퍼슨은 미국의 미래는 서부대륙이 결정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제퍼슨의 예언 말고도 19세기 40년대에는 ‘명백한 운명’이란 논리가 등장했다. 이 표현은 훗날 미국의 침략적 외교정책을 미화하는 상투어가 되었다. 바로 이 논리를 바탕으로 일부 역사학자들은 미국의 태평양 진출을 두고 프런티어가 해양으로 확장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과거에는 물론이고 현재도 서부개발은 북아메리카 특유의 민족형성 방식으로 인식되고 있다. - P965

인디언 종족들 사이에는 접촉이 거의 없었다. 그들 사이에는 동류의식이나 연대감, 침입에 대항하는 통일된 전선이 없었다. 심지어 혈연관계가 있는 이웃부락 사이에 잔혹한 전쟁이 흔하게 벌어졌다. 백인들이 인디언을 동맹으로서 필요로 하는 동안에는 인디언은 때때로 백인들 사이의 갈등을 이용해 어부지리를 취했다. 그러나 1812년의 영 미 전쟁 이후로 이런 수법은 통하지 않게 되었다. 미래의 모든 인디언전쟁에서 변절한 인디언들이 유럽계 아메리카인 편에 서서 후방 보급지원을 담당했다. - P968

들소를 사냥할 때 부락 전체의 남녀노소가 동원되어 사냥감을 깊은 계속으로 몰아넣는 방식은 말을 탄 민첩한 청년들의 작은 무리가 들소를 사살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 P970

말-들소 문화는 인디언과 외부세계 시장과의 연결을 강화시켰다. 인디언은 갈수록 더 많은 일상의 수요를 교환을 통해 충족했다. - P971

서부로의 이동은 자기 주도적으로 결심한 수백만의 개인들이 만들어낸 운동이었지만 총체적으로 보자면 원대한 정치적 구상의 결과이기도 했다. 건국세대는 서부를 위대한 공간적 유토피아로 들어가는 대문으로 인식했다. 이런 꿈을 가졌던 사람들의 대변인이 토마스 제퍼슨이었다. 그는 시간이 아니라 공간적인 발전을 통해 지치고 부패한 유럽사회와 같은 몰락을 피할 수 있는 기회가 미국에 주어졌다고 생각했다. 이런 인식은, 공간은 반드시 전체의 이익 뿐 아니라 동시에 개인의 치부를 위해서도 사용되어야 한다는 이념으로 발전했다. 제퍼슨은 농민이 소규모 경영자로서 자족적 공동체 안에서 가족과 함께 살아가면서 국가사무의 민주적 관리에 참여하는 나라를 꿈꾸었다. - P974

전쟁과 폭력의 경계는 모호했다. 교전 쌍방의 살육행위와 방어수단이 없는 평민 거주구역에 대한 공격과 학살은 구분되지 않았다. 쌍방은 무장하고 있었고 폭력은 프런티어의 일상생활의 한 부분이었다. - P980

서부의 중요한 특징은 자경단주의였다. 법의 권능이 미치지 못할 때 혁명적인 무력으로서 자경단이 등장하여 국가의 역할을 대신했다. 이런 현상의 배경에는 거칠게 해석된 자위권 사상과 인민주권의 원칙이 자리 잡고 있었다. - P981

1829년 취임한 미국의 제7대 대통령 앤드류 잭슨 장군은 영국, 스페인, 인디언과의 전쟁에서 맹활약한 전쟁영웅이었다. 잭슨 대통령은 인디언 부족과 맺은 평화조약을 파기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인디언 축출 정책을 실시했으며 이 정책은 대중적인 지지를 받았고 그 효과는 강력했다.
잭슨이 보기에 재퍼슨 세대의 인디언 문명화 사명은 실패작이었다. 잭슨은 ‘팩스턴 무리‘의 정신을 숭배했다. 팩스턴 무리는 1760년대에 펜실베이니아에서 인디언을 상대로 잔인한 학살극을 벌였다. 그는 인디언 영토를 용인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목표는 오늘날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인종청소‘의 방식을 동원하여 인디언을 미시시피강 이서지역으로 몰아내는 것이었다. - P983

인디언이 새로운 땅에 머물 수 있다는 확고한 보장을 받았더라면 잭슨의 무자비한 정책은 인디언 프런티어 개발의 마지막 단계가 되었을 것이다. 백인 개척민과 철도회사의 끝을 모르는 토지 욕심과 거친 광산노동자의 난입이 안정된 인디언공동체의 형성을 방해했다. 내전이 끝나자 전쟁 때문에 형성된 미국사회의 폭력성은 인디언에 대한 새로운 공격으로 이어졌고 인디언을 철저하게 멸종시켜야한다는 여론이 한 세기만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 P985

북아메리카 프런티어의 역사는 인디언이 끊임없이, 불가역적으로 토지를 상실해간 역사로 서술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북아메리카 원주민은 점차로 자연적인 생산방식으로부터 단절되었다. 인디언은 토지의 소유자로서도 인정될 수 없었고 노동의 원천으로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밎이 주류를 형성한 사회에서 그들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자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황야는 차례차례 국립공원으로 바뀌어 갔고 그들의 마을은 인적이 없거나 민속공예품으로 장식된 자연보호구역으로 변했다. - P991

아르헨티나인의 프런티어 관념 속에는 ‘문명화된‘ 도시와 ‘야만적인‘ 농촌의 선명한 대립이 자리잡았다. 소농민을 대상으로 한 신용체계의 부재, 토지 등기제도의 미비는 소형 농업기업의 발전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아르헨티나에는 개척민 프런티어는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았고, 정치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거나 신화를 창조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프런티어 사회‘는 없었다. - P994

브라질의 프런티어는 근본적으로 커피 단일품목 경작지대였고 경작지는 대기업이 노예노동을 이용하거나 노예노동 없이 운영했다. 그곳에는 터너가 말한 독립심이 강한 개척자의 개성과 순박한 중산층의 분위기가 넘치는 마을, 민주주의의 야외실습장으로서의 프런티어는 없었다. - P998

남아프리카의 반투어를 사용하는 아프리카인은 전면적인 패배를 경험하지 않았다. 인구 비율로 보면 그들은 여전히 다수를 차지했고, 문화적으로는 최소한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는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했다. - P1004

새로운 부의 기회를 최대한 이용하려는 열망에 휩싸인 보어인은 정치적으로 자신의 지배적 지위가 침해되지 않는 한 영국 자본가의 자유로운 활동을 허용했다. 이제 흑인 하층계급뿐만 아니라 백인 심참자도 보어인의 프런티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요소가 되었다. 1899~1902년의 남아프리카전쟁(또는 보어전쟁)은 이런 복잡한 정세하에서 폭발했다. 이 전쟁은 최종적으로 영국제국의 군사적 승리로 끝을 맺었으나 군사적으로 만만치 않은 적수인 보어인을 꺾기 위해 지불해야 했던 대가는 매우 컸다. 보어인 10퍼센트가 이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다. 장기적인 점령을 기반으로 하는 정권은 애초부터 계획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은 패배한 보어인과 담판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1910년에 쌍방의 희망을 반영한 남아프리카연방이 성립되었다. 이후로 남아프리카는 철저한 인종주의 국가가 되었다. - P1008

유목사회는 사회분화가 진척될수록 외부세계와의 교류와 접촉을 주도적으로 확대시켜나갔다. - P1013

세계사를 해석할 때, 13세기 초 몽고인의 정복행위가 전대미문의 상호작용과 교류의 공간을 열어놓았다는 것이 오랫동안 유지된 인식이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몽고인이 ‘중세기의 세계체제‘를 창조했다고 평가한다. 이런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본다면 아시아 국가와 문명은 몽고인이 세운 제국이 붕괴된 후 고립된 자기영역으로 되돌아가고 유라시아대륙의 중세기적 ‘세계성‘은 종결되었다. 그런데 최근의 연구는 교류통로의 개방성과 프런티어를 관통하는 관계의 다양성은 19세기가 시작되는 무렵까지 유지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유라시아대륙은 역사적 연속성을 잃지 않았다고 보아야 마땅하다. - P1015

유라시아대륙 프런티어의 특징은 이곳이 제국의 판도였다는 것이다. 미국이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와는 달리 유라시아대륙에서는 중앙집권적이고 계층제 구조의 제국이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정치체제였다. 제국은 크게 보아 두 가지 형식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기마 유목민이 통치하며 주변의 정주형 농업사회에 기생적인 초원 제국이다. 다른 하나는 자국 농민으로부터 직접 징세를 주요 재원으로 하는 제국이다. 우 유형 사이에 전환이 일어날 수 있다. - P1015

러시아 사학계에서는 터너보다 훨씬 앞서 세르게이 솔로비요프가 유사한 프런티어 이론을 제시했다. 19세기 치에 러시아에서는 러시아가 아시아를 향해 진보적인 유럽의 대변인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주장이 유행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북극해에서부터 카프카스에 이르는 지역은 계몽된 러시아 상층사회가 유럽문명의 전파자로서의 역할을 증명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정복하고 식민화했으며 나아가 자랑스러운 눈길로 서방을 자라보았다. 한편으로 그들은 러시아를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악명으로부터 떼어놓으려 했다. 이것은 미국인이 자신의 대륙확장에는 제국주의 일면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것과 같은 심리다. - P1030

프런티어는 전통의 방해를 받지 않고 ‘새로운 인류‘와 새로운 형태의 사회를 창조할 수 있는 실험장이었다. 만주의 이상적인 군사질서와 ‘아리아인종‘이 지배하는 동유럽 점령지가 그래서 나왔다. 독일의 ‘피와 대지‘란 이념은 이런 사상의 극단적인 표현이었으며 대규모 인종청소와 대학살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개척민은 이런 잔혹한 계획의 집행자로서 선발되지는 않았으나 그들이 개별적인 사례에서 맡은 역할은 국가정책의 도구와 같았다. 국가는 그들을 중대한 민족적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고 믿도록 세뇌했고, 일상생활에서 겪는 여러 가지 고통은 ‘민족 전체‘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극복하라고 강요했다. 그들에게는 터너가 말한 개척자의 핵심적 특징인 자유와 자립이 결핍되어 잇었다. - P1034

이민 식민지는 프런티어 식민화의 특수형태이며 고대 그리스(와 그보다 앞서 페니키아)에서 처음 등장했다. 지중해의 맞은편 해안에 군사력을 동원하기 어렵거나 군사력을 동원해 통치할 필요가 없는 지역에 ‘식민도시‘가 세워졌다. 고대뿐만 아니라 근대 초기에도 ‘식민도시‘와 기타 프런티어 식민화 사이의 핵심적인 차이는 여전히 지리와 교통이었다. 바로 이런 조건 때문에 진정한 식민지가 등장할 수 있었다. 이때의 식민지는 프런티어 개척지일 뿐 아니라 독자적인 정치구조를 가진 정착민 사회였다. - P1037

프런티어는 상호작용한다. 한곳에서 일어난 특정한 경험은 유사한 환경조건을 갖춘 다른 곳으로 전파될 수 있다. - P1047

최소한 오언 래티모어의 저서가 나온 뒤로 프런티어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기존의 인구, 민족, 경제, 정치의 영역을 넘어 생태영역까지 확장되었다. 그리하여 환경사의 큰 부분이 프런티어 확장사로 채워지게 되었다. 조방식 개발의 가장 중요하고도 최후의 단계인 19세기가 이런 프런티어 확장사의 중심지였다. - P1048

19세기에 삼림벌채의 속도는 크게 빨라졌다. 1850~1920년에 전세계 원시삼림의 손실면적은 기간으로는 두 배가 되는 1700~1859년의 삼림감소 면적과 거의 비슷했다. 가장 많이 훼손된 지역으로서 미국의 멀찌감치 첫 번째 자리를 차지했고 러시아가 다음이며 남아시아가 그 다음이었다.
1920년 무렵, 전 세계 온대지역에서 대규모 삼림훼손 행위는 거의 멈췄다. 이것은 세계 환경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 뒤로 많은 지역에서 삼림자원이 점차 안정을 찾거나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이 출현하게 된 원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삼림을 희생시키는 조방식 개발이 이미 완결되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북방의 목재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열대산 목재가 도입되었기 때문이었다. - P1050

식민주의는 단기적인 이윤을 위해 남벌을 실행할 수도 있었고, 삼림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장기적인 계획을 세울 수도 있었다. - P1054

삼림파괴에서 목재 수요는 부차적인 목적이었고 경지를 끊임없이 확대하려는 자본주의의 원시적인 욕구가 주요했다. - P1056

19세기에 사람들이 야생동물을 마음대로 살육했고, 그런 후에 동물보호 인식이 완만하게 생겨났다.
인류역사에서 20세기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폭력의 세기‘다. 그러나 호랑이, 표범, 코끼리, 독수리의 입장에서 보면 20세기는 오히려 위험이 적어진 세기였다. 20세기에 들어와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인류와 동등한 기회를 누리며 살아온 이런 동물들과 ‘타협‘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 P1067

19세기에 프런티어는 다중적인 의미를 가졌다. 프런티어는 토지 개간과 생산 증가의 공간, 이민을 끌어들이는 자석, 제국들 사이의 분란 많은 접촉 구역, 계급형성의 중심지, 종족분쟁과 폭력의 공간, 정착민 민주주의와 인종주의 정권의 탄생지, 환상과 이념의 발상지였다.
한동안 프런티어는 역사적 역동성의 주요 근원이었다. 역사적 역동성의 결과를 논하자면 하나의 중요한 차이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유럽, 미국, 일본의 공업노동자들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대변해주고 자신의 물질적 지분을 증가시켜 줄 조직을 만들어감으로써 점진적으로 사회에 통합되었다. 그러나 프런티어 확장의 피해자들은 배척당하고, 재산을 몰수당하고, 권리를 박탈당했다. 최근에 와서야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캐나다 그리고 소수의 국가에서 법정이 이들 피해자 집단의 합법적 요구를 인정하기 시작했고 정부도 도덕적 책임을 받아들이고 과거의 부당행위에 대해 사과했다. - P107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9세기 유럽에서는 도시란 유기체와 같다는 얘기가 많았다. 이런 관점이 도시사회학의 초기 사상 가운데 하나였다. ‘현대성’을 도시의 외재적 기준으로 삼는 건 문제가 있다. 역사학자가 이런 기준을 추종한다면 어떤 상업도시 또는 공업도시가 흥기할 때 역사학자는 새로운 ‘도시인’의 열정과 옛 엘리트(토지귀족 또는 고위관료)의 혐오 가운데서 어느 한쪽에 쉽게 동조하게 된다.
‘낙후성’의 의미는 복잡하다. 한 도시를 두고 ‘큰 마을’이라고 한다면 궁극적으로 무슨 의미일까. 모스크바나 베이징에 온 서유럽인은 그 사회의 구조가 자신들의 사회와는 다르다는 것 때문에 도시경관이 촌스럽다고 경멸하기 쉽다. - P895

조셉 컨비츠의 이론에 따르면 도시계획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개발형 계획’은 도시의 윤곽과 포괄적인 심미적 이미지를 중시한다. ‘관리형 계획’은 도시를 끊임없는 기술적 사회적 관리가 필요한 공간으로 본다. 둘의 공통점은 도시계획 전문가 집단의 필요성을 인정한다는 것이며 이 집단이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관리형 도시계획은 19세기 80년대에 유럽과 북아메라카에서 등장했다. 도시 엘리트들은 도시 위생을 위한 초기적 조치가 필요하며, 도시 전체의 환경문제를 상시적으로 살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술적 문제와 사회적 정책을 체계적 통합적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관점이 조정되지 않은 개별적인 경제적 이해관계의 논리를 압도했다.
개발형 도시계획은 유럽의 최근 발명품이 아니라 고대로부터 내려온 방식이었다. 획일적인 공간배치가 개발형 계획의 간단하고도 효과 높은 방식이었다. 소소의 예외를 제외하고 이 방식은 직사각형 세포의 증식분열 논리를 따랐다. - P902

개발형 도시계획이 다시 흐름을 형성했다. 형식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첫째는 도심지역에 대한 외과수술식 개입을 통해 원대한 미학적 구상을 실현하려는 오스망 방식. - P904

수년동안 오스망의 목표와 방식은 논쟁의 중심이었다. 최종적인 결과가 증명하듯 그의 방식은 정확했고 그가 제시한 도시계획ㅇ 이념은 유럽 전체가 모방하는 표본이 되었다. - P905

도시개조에 대한 오스망의 열정은 세 분야에서—기하학 특히 직선에 대한 집착, 실용과 쾌적성을 겸비한 공간에 대한 꿈(마차의 흐름이 완만하고 행인이 천천히 걸을 수 있는 가로수길), 파리를 세계 최고의 도시로 만들려는 야심—구체화되었다.
오스망과 동료들은 도시 전체의 개조를 위해 쏟은 기술적 노력에 못지 않게 미학적 세부 요소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들은 17, 18세기 파리 고전주의의 면모를 현대적 대도시 환경에 훌륭하게 접합시켰다.

도시계획의 두 번째 형식에서는 독일적 특성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독일에서는 계획을 중시하는 전통과 지방정부의 강한 권위가 하나로 합쳐졌다.
독일형 도시계획은 도심지의 대규모 개조보다는 외곽의 성장에 중점을 두었다. 본질적으로 독일의 도시계획은 확장에 대비한 계획이었다. - P907

독일식 도시계획은 사회적 공간, 운송체계, 미학적 조화, 사유 부동산의 기부 등 모든 분야가 총체적인 조화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 P908

뉴델리에서 건축가 에드윈 루티엔스와 허버트 베이커는 현지의 계획부서 인원과 인도 노동자 3만 명의 도움을 받아 식민종주국인 영국은 물론 대영제국의 판도 안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조건하에서 도시의 거대한 미래상을 현실 속에서 구현해냈다.
루티엔스와 베이커의 뉴델리는 여러 양식의 통합체였다. 도시는 현지인들이 수용하는 외국의 건축언어와 인도의 고유한 요소를 성공적으로 결합시켰다. - P909

근대 이전 시기에 이미 ‘유럽’ ‘중국’ ‘이슬람’ 도시의 구분이 선명성을 잃어가는 경향을 보였다. 도시의 기능적 유사성은 문화적 특수성에 못지않게 분명해졌다. 그러나 이런 평가를 극단으로 확대시켜 전 세계의 모든 도시가 ‘융합체’ 또는 ‘혼성체’라고 주장하는 것은 경박한 인식이다. 유럽의 인구이동과 군사적 경제적 확장을 배경으로 하여 많은 경향이 전 세계의 도시로 퍼져나갔지만 이런 현상이 모두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부산물은 아니었다. 유럽 이외의 비식민지(아르헨티나, 멕시코, 일본, 오스만제국) 국가의 도시로 눈길을 돌려보면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미래 도시의 청사진은 대서양권, 지중해권, 태평양권, 유라시아권 등 갈수록 넓은 지역적 맥락으로 그려져 왔다. ‘식민도시’는 더 이상 도시유형을 분류하는 정의로서 유효하지 않고 ‘서방’과 ‘동방’이란 과감한 이분법은 이제 논거를 상실했다. 오직 서방의 시각에서 볼 때만 이런 구분이 가능하다. - P9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