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 과정 - 빈곤의 배치와 취약한 삶들의 인류학
조문영 지음 / 글항아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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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빈자'란 누구인가. '빈자'라는 개념 정의는 누구를 포함시키고 제외시킬 것이냐, 범위의 문제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마저도 그 기준이 모호하다 느꼈다. 기초법 제도 하에 있는 사람 아니면 그 언저리에 걸쳐 있는 사람, 그도 아니면 아예 법의 사각 지대에 있는 사람? 돈이 없어서 밥을 못 먹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 대한민국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집이 없는데 이는 어떻게 보아야 하나. 각자가 생각하는 부의 기준이 달라서 자신이 중산층이고 고소득자임에도 스스로를 부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를 꽤나 많이 보았다. 저자는 인류학자이자 동종 업계의 교수로 이 책을 쓰게 된 경위를 이렇게 밝힌다. "우리가 어떤 빈곤을 어떤 방식으로 쟁점화하거나 외면했는지 톺아보면서' 빈곤을 어디로 가게 할 것인가'를 부단히 질문하려했다." 경제학자나 사회학자가 아닌 인류학자가 생각하는 빈곤의 개념 정의와 범주화, 빈곤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 등을 눈여겨보며 읽어내려갔다.


나는 1부 중 3, 4장을 먼저 읽고 다음 1, 2장을 읽은 후 나머지 2부, 3부를 마저 읽었다. 1, 2장은 이론적인 설명을 다루고 3, 4장은 구체성을 띤 사례를 들고 있어서다. 


3장은 우리가 하는 '노동'을 어떤 것으로 볼 수 있을지 고민하게 한다. 임금 노동, 비공식 경제 활동, 가사 돌봄노동, 자원 확보를 위한 분배 노동 등 노동의 형태는 아주 다양하다. 그러나 우리는 돈을 받고 하는 노동만이 가치 있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그 밖의 노동은 도외시하며 가볍게 본다. 내가 당장 노동을 하지 않게 되었을 때 누가 나를 돌보는 사람도 없고 가진 돈도 없다면 무엇을 가지고 살아갈 것인가. 빈곤해지지 않기 위해서, 불평등한 대우를 받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분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4장은 홈리스, 이주자, 난민들에게 '집'이란 무엇을 뜻하며 '자격'을 증명하는 일은 무엇인가 생각해보게 한다. 자격을 의심 받고 자격이 없다는 것을 끊임없이 증명해내야 하는 과정은 자아를 분리 및 박탈시키며 사회에서 개인을 고립시키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어 섬뜩했다. 이주자(난민), 기초법 대상자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서류를 제출하고 증명해내는 일 말이다.


자본주의의 불안정성이 심화되고, 금융의 일상화로 투자가 주업이 된 사람들이 허다하고, 기술이 인간 노동을 대체하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임금노동의 비중은 계속 줄고 있지만, 빈곤 통치에서 임금노동이 갖는 위상은 여전히 견고하다. 노동이라는 기준이야말로 근대 빈곤 통치의 기본적인 작동 원리이기 때문이다. 강제노역에서 근로연계복지에 이르기까지, 빈곤 통치의 역사는 인간에게 노동을 강제하기 위한 일련의 지식과 제도를 구축해온 과정이다. 여기엔 멀쩡한 노동자라면 수급을 신청할 이유가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빈곤 통치와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노동운동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계급은 물적 관계이지만 ‘노동자‘는 수많은 정체성 가운데 하나로 탈구된 지 오래이다 보니(신현우2022: 71) 이상적인 노동자의 ‘자격‘에 대한 암묵지를 발견하기도 어렵지 않다. - P105


인류학자들은 집home 을 건조물이나 자산에 국한하지 않고 일종의 희망이자 미래로, 세계에서 자기 자리place를 확보하려는 지속적 노력과 꿈의 표현으로 봤다. 사람들은 집에 관한 각자의 생각을 "물질성, 감정, 사회적 관계, 거주 실천의 교차 속에서 부단히 만들고, 이 실천 속에서 소속, 안전, 가치의 감각을 조율한다.(Samananiand Lenhard 2019 7) 이는 홈리스, 이주자, 난민에게 분명 더 위태롭고 고된 노동이다. - P151


1부는 가난을 우리는 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가 배경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기초법(국민기초생활 보장법)은 1999년 9월 공포되고 2000년 10월 시행되어 지금까지 사회 공공부조의 대표적인 법으로 기능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법이 빈자를 다 품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고 혜택이 충분한가도 의문이 든다. 게다가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기초법 대상자가 되는 것을 증명하는 것에서부터 스스로 박탈감을 느끼는 과정인데다 대상자가 이를 타인에게 알리는 것을 두려워함으로써 사회로부터 고립을 자초하게 하는 측면이 있다. 학교에서의 왕따 문제 등(임대 아파트에 사는 것으로도 타인을 차별하고 괄시하는 경향이 있으니 말이다). 


2부는 대한민국에서 개인이 사회에 '의존'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생각해보게 한다. 대한민국은 미국식 자본주의를 도입하여 급격한 발전을 이루었고 신자유주의가 도래한 이후에는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일명 '각자도생'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인식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나와 너의 일은 무관하며 나의 일만 신경쓸 뿐이라는 이런 사회에서 자립은 당연한 숙제가 되었지 않나. 사회에서 도태되어 빈자가 되면 부정적 인간으로 낙인 찍는 상황에 복지 혜택에 대한 논의가 순수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지 개인적으로는 회의적인 것 같다. 보편적 복지를 하기에는 충분한 자금이 있는가의 문제가 있고, 선별적 복지라고 하면 혜택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를 않을테니 말이다.


수급이 빈곤네트워크의 의무통과점이 되었다고 내가 생각하는 까닭은, 정부 정책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자기 서사, 그리고 이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의 움직임 모두 수급(기초법)을 경유해 그 존재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이 공공부조의 수급자로 구획되면서 가난은 특정한 양식과 문법 안에 고이고 말았다. 빈곤을 우리 시대의 정치적 핵심 의제로 삼는 일은 그렇게 점차 요원해졌다. 빈곤이 ‘우리의 삶‘에서 ‘저들의 문제‘로 고립되면서 취약계층에 대한 관심을 호소하는 메시지가 빈곤을 끝장내자는 결의를 압도해버렸다. - P28~29


의존성 논의가 복지 영역에서 특히 만연한 것은 사회복지야말로 후술할 사회적 빈곤 의제와 조응하여 등장한 지식과 기술의 복합체이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 사회 복지학 발전의 주요 참조국인 미국에서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발전해온 사회공학과 개척 서사를 중심에 둔 선별적 역사 서술이 결합하면서 자율적 개인과 독립을 이상으로 삼는 정치 이데올로기가 단단히 뿌리를 내렸다. ‘자립‘을 숭배하고 ‘복지 의존welfare dependency‘을 경멸하는 정치 이데올로기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특정한 시선을 부과하는 담론 권력으로 자리 잡고, 이들의 사회 안전망을 최소화하는 정치 전략으로 작동해왔다.(O‘Connor 2001; Fineman 2004) 이러한 흐름에 맞서, 진보적 사회복지학자들은 의존의 보편성을 환기하며 복지 의존에 씌우는 혐의를 거둘 것을 호소하기도 한다. 하지만 복지 의존을 "인간의 상호의존성을 증진할 수 있는 기초"로 재정의하는 움직임(김병인 2017 88)이나 돌봄 윤리의 선언만으로 의존이 문제가 된 현실에 균열을 내기란 불가능하다. 복지가 직업화·제도화·산업화를 거치며 ‘성장한 역사란 뒤집어보자면 사회복지 체제 구축에 관여해온 종사자들이 가난한 사람들한테 ‘의존해온 역사다. - P66~67


2부는 빈곤 현장에 현장 실습, 자원봉사 등을 떠난 청년들의 실태와 빈곤의 취약성에 따른 전염과 공포를 확인할 수 있다. 


글로벌 빈곤 레짐은 일관된 구조를 갖는다기보다 지역적·상황적 실천과 개입에 열려 있다. 한국이 이 레짐과 접속하는 과정에서 특징적인 것은 원조 수원국에서 공여국으로 전환한 나라의 위상을 널리 알리겠다는 국가주의적 사고가 팽배하다는점, 그리고 정부·대학·기업이 긴밀한 공조하에 (특히 대학생) 청년을 해외 자원봉사의 주요 주체로 구성해내면서 실업의 ‘위기‘를로벌 리더 창출이라는 ‘호기‘로 바꿔치기했다는 점이다. 저성장 시대에도 경쟁력만 부르짖는 환경에서 실존의 결핍을 호소해온 청년들이 열정 노동과 창의 노동을 불태우며 글로벌 빈곤 퇴치를 위해싸우는 가장 역설적인 전사가 된 것이다. - P211~212


이렇게 신자유주의 시대에 맞닥뜨린 개인으로서의 실존은 빈곤을 보듬는 치유 기제가 되었다. 끊임없이 자신을 보여주기 위해 에피소드를 찾아 나서는 활동은 일시적으로 기쁨(만족)을 줄 뿐 시간이 지나면 더 나은 에피소드를 찾아 나서는 과정이 이어진다. 이런 과정은 스스로를 자괴감에 빠지게 하고 나락에 빠지는 다름 아니다. 


빈곤은 특정 세대나 집단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무엇하다 중요한 것 같다. 빈곤은 안전한 집이어도 들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초국적 연결이 급증한 시대, 나락에 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이 빈곤 감각을 증폭시키는 시대에 빈곤·복지·노동 담론이 서로 맞물리면서 ‘빈민‘을 조립했던 문화 정치가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 (이주자, 난민 등) 정치적·경제적으로 취약한 지위에 놓인 다양한 범주의 사람들을 겨냥하는 낙인, 열악한 사람들이 서로를 구별 짓는 표식을 전방위적으로 확산해낸다. 정상과 비정상은 특정 개인의 상태가 아닌 관점에 불과하지만(Goffman 1963: 137), 빈곤 전염의 공포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관점을 인격화하는 데 몰입한다. - P294~295


프레카리아트는 Proletariat (프롤레타리아트)에 불안정한 위태로운‘이라는 뜻의 형용사 precarious가 결합된 단어다. 이 단어는 신자유주의적 모델에 기반한 노동시장 유연화가 가속화되면서 노동조합과 사회보장 시스템의 보호 바깥에서 떠돌게 된 불안정 노동자들을 주로 지칭하지만, 여성, 청년, 노인, 소수 종족, 장애인, 범죄자, 이주민 복지 수급자 등 삶의 불안과 노동의 불안을 동시에 떠안은 다양한 집단도 포괄한다. 과거의 안정된 노동계급과 달리 "사회적 기억"이 부재하고, 소외, 아노미, 불안, 분노 등에 휩싸이기 쉽다는 점에서 가이 스탠딩(2014 58-59)은 이들을 형성 중인) "새로운 위험한 계급으로 명명했다. - P310


프레카리아트는 위계적인 질서 하에 만들어졌다. 그래서 불안정한 이들은 더 불안정해지기 쉬우며, 위험에 빠지기 쉽고, 망가지거나 전망이 없는 사람들이다. 


3부는 인류가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취해야 할 자세와 태도는 무엇인지 나눈다.


우리는 흔히 인류세에 살고 있다고 말을 한다. 이 개념은 파울 크리천이 제시한 것으로 현재의 지구가 인류의 생태-존재론적 위급 상황을 맞이한 것에 대한 핵심 표지로서의 설명이다. 현재가 인류세인지 단언하기는 어려우나 지구의 환경이 오염 및 파괴되고 전쟁으로 난민이 생겨나며 빈자들이 새롭게 생성되는 상황은 앞으로 갈수록 늘어날 것은 확실해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각자도생하자라고 결론을 낼 수는 없다. 난민, 빈자, 이주자, 소수자 등은 기본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서 있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내가 어느 날 사업이 망해서, 몸이 아파서 일을 할 수 없고 누군가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절망적인 상황이 될 것이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고 늙고 병드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그렇기에 이런 상황을 개별 인간에게만 맡겨서는 지구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비단 남의 일이라 생각하지 말고 공통의 인식과 감각을 가져야 한다는 결론을 내놓는데 뻔한 구호기는 하지만 사실 결국 명확한 해법을 제시하기는 누구도 어려울 것이다. 결국 구체적인 해결은 사회적 제도, 교육, 운동 등으로 메워나가야하지 않을까 싶다.


발전의 꿈이 아무리 집요하고 중독성 강하다 한들 누구도 삶의 취약성과 유한성을 피해갈 수 없다면, 지금 우리한테 필요한 것은 취약성과 유한성을 개별 인간의 불행으로 남겨두기보다 지구생활자의 공통 인식과 감각으로 받아들이도록 돕는 제도, 교육, 운동일 것이다. 기후변화와 팬데믹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위기를 논하는 공론장은 전례 없이 많아졌지만, 각자 알아서 방공호를 구축하던 사람들이 더 거대한 위기를 감지한다고 해서 곧바로 연결되는것은 아니다. - P386~387


이 책은 학술서 성격이라 다양한 이론의 인용 및 사례(논문 등)가 등장한다. 대중들이 읽기에는 약간 어려운 듯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책을 이해하는 데 무리는 없다. 저자가 직접 체험한 현장의 목소리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나도 인류학, 사회학, 경제학 등 낯선 용어와 이론 등은 사례를 통해서 이해했다. 2022년 말 발간된 책으로 당시에도 눈여겨보았던 책이었지만 바로 읽지는 못하다가 작년 말 신문사에서 뽑은 2023년 올해의 책 중 한 권이길래 읽게 되었다. 앞으로도 사회에 환기를 주는 이런 책들이 많이 나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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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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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삶을 내 경험에 따라 재단하는 것은 위험하다. 특히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일은 고 황현산 선생님의 책 제목처럼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고 자기 경험치의 한계를 인정하는 데에서 시작해야 한다. 전선은 하나가 아니다. 


타인을 모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다고 착각하여 상처를 주거나 아예 물러서서 뒷걸음질치기도 한다. 갈수록 나는 후자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렇다 해도 타인, 특히 소수자들의 고통을 외면한다면 그들의 절박함을 들어줄 이는 어디 있을까. 


합리성은 종종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얼마만큼 있는가로 결정되기에, 기득권은 사회의 모든 갈등에서 더 ‘합리적인’ 주장을 하기 쉽습니다. 근거는 지식의 형태로 존재하고, 지식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자원과 시간이 투여되기 때문입니다. 

정치인들은 선심성 공약을 남발하지만 선거철이 지나면 자기 밥그릇 챙기기 바쁠 뿐 공약을 이행하려고 노력하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차별 금지법도 몇 년째 지지부진하지 않은가. 


개인적으로 가장 뜨끔했던 말은 '피해자는 ~~~해야 한다.'라는 고정 관념에 대한 것이었다. 나도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피해자도 일상을 유지해야 하고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다. 피해자라고 해서 주눅들어 생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을 판단하는 것은 시간(역사)적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도 재인식하게 된다. 어떤 사람도 완벽한 사람은 있을 수 없다. 선과 악으로 구분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테니 말이다. 


솔직히 천안함 사건을 제대로 들여다보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저자도 관련 책을 저술할 때 무척 두려웠음을 고백했다. 한편으로는 세월호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천안함이 있는 식으로 이분법적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닌가 싶어 반성하기도 했다. 특히나 두 사건은 정치적인 색깔이 덧입혀져 사건의 본질적인 이해에는 가닿기 어려웠던 측면이 존재했다. 가까운 시일 내 주저했던 이 책을 이제야말로 읽어보려고 한다. 


저자의 시선은 논리적이고 냉철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뜻함을 잃지 않는다.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알 수 없지만 실망하지 말자고 한다. 고통에 응답하려는 관심과 노력이 중요하다. 


고통이라고 하는 건 개인의 몸 안에서 발생하는 것이고, 그 고통은 전달되지 않아요. 그래서 누구나 외롭고 힘든 면이 있는 거잖아요.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에 무심하다는 것이 실제로는 그렇게 놀랍지 않고, 오히려 당연하다는 걸 전제로 할 필요가 있어요. 그러지 않으면 자꾸 실망하게 되고 세상을 경멸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한 개인의 몸 안에 있는 고통, 슬픔이라고 하는 것들이 사회적 고통이 되고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되는 계기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 고통에 누군가가 응답하기 시작할 때라고 생각해요. 그 응답을 잘해낼수록, 많은 사람이 함께할수록 그 고통은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된다고 생각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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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1-23 1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런 책 읽으려면 쉼호흡을 하게 되죠. 삶이 뒤따라주지 않는 제 자신을 비춰보게 되서 괴롭거든요.

거리의화가 2024-01-23 11:03   좋아요 1 | URL
피하고 외면하고 싶은 게 어쩌면 인간의 본성인지도 모르겠어요^^; 제 자신을 반성하고, 움츠렸던 기지개를 펴고 행동할 동력을 찾고 그러면서 조금씩 나아간다고 믿고 싶습니다.

잠자냥 2024-01-23 11: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퀴즈 내놓고 곳통스러워하는 사람들 보면서 낄낄대고 있던 제가 조금 ㅋㅋㅋ 반성했습니다....(아주 잠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화가 님 꼭 받으세요!!!!

거리의화가 2024-01-23 11:19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퀴즈 난이도 때문에 많은 분들이 힘들어하고 있는 듯한데! 이번에는 한 번 참여해볼까 고민중입니다. 그래도 한 두문제는 맞추겠죠?ㅎㅎ

희선 2024-01-24 03: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람은 다 어떤 경우에 소수자가 되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자신은 그런 일 없을 거다 생각할 때가 더 많을 것 같네요 자신은 장애인이 될 리 없다 생각하는 것도 비슷하군요 다 알지 못하겠지만 조금은 관심을 가지고 제대로 보기라도 하면 좋을 듯합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4-01-24 09:25   좋아요 1 | URL
그러네요. 희선님 말씀처럼 자신은 그런 일이 없을 거라 장담할 수 없지요. 내 의지로 된 것이 아닌데도 일상에 불편함을 느껴야 하고 다른 사람들 눈을 의식해야 한다면 발 붙일 곳은 어디인가 곱씹게 됩니다. 희선님 좋은 댓글 감사해요^^
 
갑골문자 - 중국의 시간을 찾아서 걸작 논픽션 27
피터 헤슬러 지음, 조성환.조재희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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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스한 봄밤이었다. 날씨는 아직 덥지 않았지만 나무가 무성해져 잎이 가로 위로 늘어졌다. 난징에는 옛 성벽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 이따금 저 멀리 어두운 윤곽이 보일락 말락 했다. 도처에 사람들이 인도를 따라 늘어서 있었다. 공안은 네거리에 서서 일정한 운율에 맞춰 조금씩 움직이는 시위대를 지켜보았다. 리더의 구호, 짧은 정적, 따라 고함치는 군중 소리. 구호, 정적, 궁중 소리. 우리는 걷다가 갑자기 빨리 뒤고 또 다시 걸었다. - P35


때는 1999년 5월 8일, 중국 도처에서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문화 대혁명 이래 가장 격렬했던 항의 행동이었다. 군중이 분노한 이유는 알바니아 종족의 역경이 빌미가 되어 발생한 나토의 폭격 행동 때문이었다. 거리에는 세 구호가 반복되어 나왔다. “미제를 타도하자, 나토를 타도하자. 켄터키를 먹지 말자.” 

한국도 5.18 이후 미국의 이중적인 행태가 드러나자 대학생들의 시위가 줄곧 이어졌다. 이는 1987년 민주 항쟁 이후에도 끊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미군의 장갑차로 여중생들이 사망하는 사건도 있었고 미국산 소고기 문제도 있었다. ‘미제’라는 단어는 지금 들으면 거부감이 이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으나 당시 한국에서도 미국 제국주의라는 용어가 쓰여진 것으로 알고 있다. 미소의 냉전기 때도, 탈냉전 때도 미국은 패권을 놓으려고 한 적이 없다. 

알바니아는 발칸 반도에 있는 국가로 사회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1991년이 되어서야 수교한 국가다. 1989년 밀로셰비치 대통령 집권 후 코소보가 세르비아인의 성지라는 이유로 자치권을 박탈한다. 이에 알바니아 계 코소보인들이 분리 독립을 주장하면서 유고슬라비아 vs 코소보 해방군 세력 간에 전쟁이 발발한다. 코소보 전쟁에 나토와 미군이 참전하면서 사태는 악화 일로를 겪었다. 


이 책은 1999~2004년 사이 집필되었다. 이 기간 중 중국에서 벌어진 몇몇 사건을 종결 지점까지 그 과정을 추적한다. 중국의 신장 지구, 타이완 등 다양한 공간을 배경으로 하였으며 시간 순으로 배치하여 중미 관계, 북중 관계 등 당시 사회적 상황을 구체적으로 엿볼 수 있다. 저자는 중국에 보도 특파원으로 근무하며 다양한 인물들을 만난 경험을 쏟아낸다. ‘폴라트’를 제외하고는 등장 인물이 모두 실존 인물이기 때문에 마치 사건을 지금 만나듯 박진감 있게 느낄 수 있다.


나는 크게 세 개의 사건에 주목했다. 첫 번째는 이미 언급했고 두 번째는 미국과 중국의 군용기 충돌 사건, 세 번째는 9.11 테러 사건이다.


2001년 4월 1일 아침 두 대의 군용기가 남중국해 해상의 국제 영공에서 서로 충돌했다. 한 대는 미국, 다른 한대는 중국의 것이다. 중국 군용기는 전투기로 심하게 부서졌다. 미국 정찰기는 부딪치자 곧바로 2.4킬로미터 추락했다가 통제를 회복한 뒤 중국의 하이난섬에 긴급 착륙할 것을 요청했다. 비행장 관제탑에서는 회신을 주지 않았으나, 미 군용기는 착륙했다. 비행기의 남녀 승무원 스물네 명은 즉각 인민해방군에 의해 구금되었다.

이 사건 중 어느 것도 독자적이고 비군사적인 관찰자에게 목격되지 않았다. - P476


당시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 미국과 중국 모두 입장을 발표했으나 서로 다른 말을 한다. 4월 9일, 당시 미 대통령인 부시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라고 말했다. 중국 외교부장은 “미국은 반드시 중국에 사과하고, 아울러 유사 사건의 재발을 방지할 조치를 취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양국의 언론은 완전히 다른 논리로 이 사건을 계속하여 이끌고 갔다. 중국은 미국 비행기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는 바람에 비행기끼리 충돌했다고 주장한 반면 미국은 중국의 소형 비행기가 먼저 도발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미국은 그 전부터 중국 비행기가 그들의 정찰기에 접근했기 때문에 도발할 의도가 있다 말한 것이다. 

추후 주중 미국 대사는 서한에서 “우리가 구두 허가를 거치지 않고 중국 영공에 들어가 착륙한 대 대해 매우 미안하게 생각하고, 승무원의 안전한 착륙에 대해 매우 위안을 느낍니다. …”라고 표현했으나 콜린 파월은 발표 후 기자에게 말하길 “사과할 만한 것은 없다. 우리가 잘못을 하지도 않았는데 사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튿날 베이징신보 1면 헤드라인 기사의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미국이 끝내 사과하다’

1999년 중국의 나토&미국 항의 시위 이후 이것이 두 번째 외교 최대 사건이었다. 그런데 중국도, 미국도 서로 다르긴 해도 결국 자국의 기호에 맞게 해석하는 모습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는 것 같아서 뒷맛이 개운하지 않았다. 중국인들은 중국의 뉴스를 보고 미국을 욕했을 것이고, 미국인들은 미국의 뉴스를 보고 중국을 욕할 것 아닌가. 언론은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을 준다. 뉴스코퍼레이션은 똑같은 화면으로 미국과 중국에서 애국주의를 판매한다. 두 곳의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사들인다. 


뉴스 보도에서 두 단어, 즉 ‘스모크’와 ‘펜타곤’을 알아들었다. 조선족이 폴라트에게 테러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들은 함께 스시 식당에서 텔레비전을 보았다. 무너지는 빌딩, 화재에 휩싸인 펜타곤. 뉴스 보도에서 공격은 이슬람교 근본주의자들의 행위이고, 더 많은 폭력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고 추측했다. 전국의 비행기가 운항을 중단했다. - P499~500

웨칭의 비디오 가게에서 테러리스트 공격의 해적판 영상을 팔았다. 가게 주인은 최초의 해적판 영상이 공격한 지 3일 만에 나왔다고 말해줬다. 9.11 비디오는 저가의 진열대에 들어본 적도 없는 미국 영화와 함께 진열되어 있었다. “인류에게 크나큰 재난을 가져다준 미세 곤충” 그 뒤에 9.11 비디오가 있었다. 모든 9.11 비디오는 할리우드 영화와 유사한 모양으로 포장되었다. 세기의 대참사란 이름의 DVD는 겉면에 오사마 빈라덴과 조지 W. 부시 사진이 붙었고, 배경은 불타는 쌍둥이빌딩이었으며, 밑에는 폭력성과 불건전성의 정도에 따라 ‘R’ 등급이 매겨졌다고 표시한 작은 아이콘이 있었다. - P504


9.11 테러는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에 충격을 가져다 준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이슬람과 무슬림인에 대한 공포로 확산되며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를 견고한 무기 체제(핵무기 등)로 방비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지금도 유효한 사건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당시 중국은 녹화 영상이 해적판 비디오로 길거리에서 팔렸다니 무어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이 다치고 건물이 파괴되는 사고였는데… 수요가 있을 거라 여기고 급히 만들었을거란 짐작 뿐이다. 얼마나 팔렸는지는 알 수 없다. 

해적판 비디오 하니 과거에는 한국에도 해적판 비디오가 많이 생산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면 보지 않았거나 봤다고 해도 인상적인 것은 없었던 것 같다. 


당시 중국은 한국의 산업화 시절의 향수를 불러오게 하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한국이 겪었던 것을 비슷하게 경험한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선전 등 경제 특구를 개발하기 시작하면서 농촌에서 도시로 많은 인구들이 유입된 것, 텔레비전 리모컨을 두고 가족 간에 기싸움을 벌이는 일, 세대 갈등, 열악한 노동자들의 상황, 미국에 대한 환상을 품고 떠난 이민자들, 영어 의무 교육 등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자유 시장 경제로 바뀌었어도 사회주의 국가임은 마찬가지였고 중국의 정치는 오히려 내부 단결의 기치로 이어졌다. 

따라서 중국 정부의 위구르 탄압과 이용(특히 신장 지역), 타이완의 정권 교체에 따른 정치외교군사적 마찰, 위구르족을 탄압하기 위한 미국 정부에 대한 로비 등이 진행되었다.


이 책이 독특한 지점은 기자의 시선에 따른 논픽션 이야기들 사이에 중국 유물들을 설명하고 파헤치는 코너다. 문자의 세계부터 성벽, 청동 두상, 책, 뼈, 글자, 말 등을 싣고 있다. 

 

그리고 지금의 중국 간자체가 만들어진 과정이 나온다. 중국의 말 문화는 세월을 거듭하여 달라졌어도 글말은 계속 하나로 고수되었기 때문에 한자는 안정적으로 오래 유지될 수 있었다. 물론 제국의 통일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도 글말의 유지는 중요했다. 그러나 중국은 서양에 거듭 패배를 경험하고 나서 지식인들 내부에 교육 혁신과 언어 현대화의 요구가 끊이지를 않았다. 이에 문언문을 폐지하고 각지의 방언에 한자를 적용하는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지금의 중국 간자체는 마오쩌둥의 지시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문화 대혁명 때 번체를 옹호하며 소신 발언을 한 이는 우파로 몰려 자살을 하고 정권에 아부한 이는 이후 하상주단 대공정(중국의 고대 역사를 앞당기는 프로젝트)의 리더를 맡으며 승승장구했다고 한다. 결정적으로 간자체를 어떻게 만들게 되었을까?


“물론 공산당은 1940년대부터 라틴화한 자모를 사용하기 시작했죠. 그들은 변혁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권력을 장악하자, 더 신중해졌습니다. 그들에게 해결해야 할 다른 일들이 많았는데, 그것이 개혁이 지체된 원인 가운데 하나이지요.

그러나 매우 중요한 다른 요소는 1949년 마오쩌둥의 첫 소련 방문입니다. 당시 마오쩌둥은 스탈린을 전 세계 공산주의의 영수로 존중했으며, 그는 중국이 문자 개혁에 착수하고 있다며 스탈린의 조언을 구했답니다. 스탈린은 그에게 ‘당신들은 대국이므로 자신의 중문 서사 방식을 가져야 하며 라틴 자모 계통을 단순히 써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지요. 그것이 바로 마오쩌둥이 전국적으로 통일한 자모 계통을 바랐던 이유입니다.” -P673


스탈린이 문자 개혁 프로젝트에도 영향을 주었다니 참으로 당황스러운 결말이 아닐 수 없다. 솔직히 중국어를 공부하고 있는 입장에서 중국어 간자체와 번자체가 나누어짐으로 인해 공부하기 더욱 복잡해진 면이 있다. 성조도 어려운데 한자가 우리가 예전에 배웠던 한자(번자체)와 달라서 이중고를 겪게 되기 때문이다. ‘간략한 한자’라고 해서 만든 간자체가 오히려 국민들을 더 피곤하게 만든 것은 아닌지 의문이다.


개인적으로 2000년대 초반까지 신장의 현대사를 간접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어서 좋았다. 신장의 역사를 공부할 때 참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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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1-23 02: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제목이 《갑골문자》여서 중국 글자 이야기인가 했어요 중국 역사군요 그것도 다른 나라 사람이, 서양 사람이라 해야겠네요 삼부작으로 썼다는 말이 있군요 한국사도 다른 나라 사람이 쓴 거 있네요 갑골문자에서 여러 글자가 생기고 간자체로 이어지는군요 중국어 배우는 데 간자체를 다시 공부해야 해서 조금 힘들겠습니다 그래도 공부 오래 하시고 여전히 하시는군요 즐거워서겠습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4-01-23 10:55   좋아요 1 | URL
유물 코너 이외에는 사실 중국의 현대사 이야기입니다. 한자의 시작인 갑골문부터 시작하여 중국의 갖가지 고대 유물을 소개하고 간자체의 탄생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맞아요^^ 중국어는 어려워도 즐거워서 계속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고독한 기쁨 - 그날 이후 열 달, 몸-책-영화의 기록
배혜경 지음 / 지식과감성#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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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진실보다 더 근사한 예술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진실이란게 어쩌면 실체가 없는 것이다. 진실하다고 생각하는 각자의 사실만 있을 뿐. 바로 그 사실만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 P139


작가의 문체는 담담한데 감정을 울려서 자주 멈추고 읽어야 했다. 책을 읽기 전에도 생각했지만 어쩜 이렇게 책 표지의 사진이며 제목이며 잘 나왔을까... '고독한 기쁨' 제목이 이보다 더 적절할 수 없다라고 생각했다. 


이 책은 작가가 뜻밖의 사고로 강제로 휴식을 취하게 되었을 때에도 멈추지 않고 몸을 단련하고, 책을 읽고, 영화를 본 기록을 담은 글이다. 2017년 즈음이었나.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어서 움직이고 싶어도 내 맘대로 되지 않는 답답함과 찌릿한 고통에 대하여 정말 동감했다. 나는 한강 변에 놀러 나갔다가 자빠져서 그리 되었던 것인데 작가는 그 와중에도 이전의 생활처럼 책과 영화로 견뎌냈다고 하는 것에 존경이 일었다. 나는 그저 다인실에서의 불편함(커튼을 저절로 치게 되는 경험)과 얼른 빨리 붕대를 풀고 나서고 싶다는 생각, 괴롭고 힘들어서 이어폰과 음악으로 단절한 채 오롯이 보냈던 기억이 난다. 움직임이 가능해져 비로소 걷기를 할 수 있었을 때 문 밖을 나설 수 있다는 것에 행복감을 느꼈었다. 비록 발목은 괴사한 흔적으로 영구히 남았지만 이제는 신경쓰지 않을 정도로 괜찮아졌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아픔의 무게가 조금은 나아진다는 것은 신기하고 놀라운 과정이다. 그 과정을 나도 함께 하면서 덩달아 위로받는다는 느낌이었다. 특히나 작가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나를 여러 번 무너지게 했다. 과거의 사진 속 아빠의 모습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했을 것이다. 작가가 아빠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따뜻함이 느껴졌다. 이제 자주 아프신 나의 아버지도 언젠가 내가 기저귀를 갈아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그 때가 충격이었다고 고백하는 솔직함에 나도 그럴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봄은 다시 오지 못한다고, 가족이 있어 힘든 날들을 다 이겨 낼 수 있었다고, 사랑한다고. 오래 전에 나는 봄은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늘 있다고 썼다. - P58


매년 오는 봄이 달리 보이는 것은 이제 어느덧 나이듦을 인식하게 되어서인지도 모른다. 매 해 무겁게 느껴지는 몸과 칙칙한 얼굴은 나를 가라앉게 한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그래서 이 계절을 오롯히 살아내고자 생각하기도 한다. '걷기'와 '여행'을 예찬하는 작가의 태도는 나도 비슷하게 공명하는 부분이 많았다. 우스갯소리로 함께 사는 사람에게 말하곤 한다. "2023년의 봄이야." 그럼 돌아오는 것은 "또 같은 봄이지." 하지만 내겐 분명 다른 봄이다. 


소개된 책은 그래도 본 것이 몇 권 있었는데 영화는 역시나 본 게 전혀 없었다. 평소 영화와는 담을 쌓고 지내는지라... 그나마 드라마는 보지만. 그래도 작가의 수려한 글솜씨와 아름다운 문체에 반해 읽어 내려가다보면 영화의 장면이 상상이 되었다. 


영화 중에서는 <완벽한 가족>이 기억에 남는다. 가족과의 이별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혼자가 아니라 가족이 있다면 나의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내 의지대로 선택하는 일에는 용기와 배려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이 영화만큼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소개된 책들 중에서 읽고 싶은 책들이 수두룩하다.


오르한 파묵의 <하얀성>에 대한 이야기인데 도무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는 문장이다. 서로 닮은 두 사람이 서로의 삶을 바꾼 이야기라고 한다. '하얀 성'이라는 것이 높고 아득하다는 것을 보면 저 멀리에 붙잡히지 않는 상상력의 공간 같게도 느껴진다. 어쨌든 직접 읽어보고 싶은 이야기다.

 

나는 무엇인가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무슨 일을 하는가이다. 행복은 높고 아득한 하얀 성에 있지 않고 바로 저 창문 밖, 살랑바람 불어 대는 나무 아래서 그네를 타며 손짓한다. - P148


<화씨 451>은 책이 사람의 인생에 왜 중요한가를 느끼게 한다. 


나는 유튜브를 정말 잘 안 보는 편에 속하는데 그 이유를 생각해봤더니 한 번에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편리함은 있지만 누가 전달하는 정보에 대한 의구심이랄까 그런 것이 있어서인 것 같다. 영상은 시청자에게 수용만을 강요하는 매체이니까 말이다. 책은 그런 면에서 상상력을 발휘하고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책의 보관에도 신경써야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쌓아둔 책이 불타거나 없어지는 상상은 정말이지 끔찍하다.


원래도 읽으려고 생각했던 책이었거나 기존에 보관함에 담아둔 책들도 많았다. 


<우리에게도 예쁜 것들이 있다>, <지옥(단테)>, <침묵>, <산해경> 등.


<우리에게도 예쁜 것들이 있다>에서는 기계로 찍어내는 공산품이 아니라 직접 손으로 한 땀 한 땀 만들어내는 수공업 제품의 가치, 장인정신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지옥>은 사유하지 않는 인간, 인간의 나약함과 허약성에 대해서 꼬집는다.

<침묵>은 사둔 것은 옛날인데 아직도 묵히고 있네. 진짜 이것부터 읽는 것으로... 신이 있다면 왜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신은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가 예전부터 궁금했다.


앞날은 알 수 없다. 때론 넘어지거나 다치더라도 '잃어버리는 삶이란 없다'는 말은 그것이 몸의 경험으로, 삶의 경험으로 이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도 작가의 삶과 사유를 녹여낸 글을 꾸준히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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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1 2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1-22 09: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4-01-22 01: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 님 다쳐서 병원에 있었던 적 있군요 여러 사람이 있는 병실... 그런 데서도 잘 지내는 사람 있는 듯해요 저는 다른 사람 때문에 병원에 갔지만...

보고 싶은 영화와 보고 싶은 책이 있기도 했군요 살면서 일어나는 일을 잘 받아들이면 좋을 텐데, 안 좋은 일은 그게 조금 어렵기도 하네요 시간이 가면 그게 좀 나아지겠지요 그때는 힘들다 해도...


희선

거리의화가 2024-01-22 09:12   좋아요 2 | URL
네. 6개월에서 1년 정도 고생했던 것 같아요. 다인실이 무척 힘들더라구요. 안 그래도 말이 많은 편이 아닌데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강제로 듣는 일은 굉장히 힘들다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_-
사실 어떤 일이 생길지 우리는 모르고 살죠. 닥치기 전에 조심하자 생각하며 살지만 살다 보면 또 그렇지가 않으니까요ㅎㅎ 희선님 맹추위가 왔네요. 건강 조심하시고 행복한 한주 보내세요^^

미미 2024-01-22 19: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병원에서 방문객들 때문에 정작 환자들이 제대로 휴식을 취할 수 없음, 시정되어야합니다. 요즘은 방문객이 1인으로 제한되었다는데 또 모르죠. 화가님 오랫동안 고생하셨군요.
오늘도 읽고싶은 책 한 아름 담아가요ㅎㅎ

거리의화가 2024-01-23 10:52   좋아요 1 | URL
듣고 싶지 않은 말도 들어야 하니까 그런 것이 좀 고달프더군요^^;
읽고 싶은 책들 많이 담으셨다니 저도 좋습니다. 서재 둘러보다보면 보관함에 책이 가득!ㅎㅎㅎ
 
홈 스위트 홈 - 2023년 제4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최진영 외 지음 / 문학사상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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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문학 수상작 작품집을 오랜만에 읽었다. 2021년 이효석 문학상 수상집에서 이서수라는 작가를 알게된 수확이 있었으나 이후 문학상 수상집은 더 읽지 않았다. 한국 소설은 거듭하여 읽으면 비슷한 서사에 상황들이 반복되어 쉬이 질리기 때문이었다. 작년에 이 책의 전반적인 수준이 괜찮다는 후기를 보고 찜해 두고 있었는데 해를 지나 읽게 되었다. 


역시 사람들의 눈은 다르지 않았는데 나도 작품들이 전반적으로 괜찮았다. 



대상작 주인공인 최진영은 이름은 익숙한데 작품을 경험해본 적은 없었다. 작가의 이력을 보니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였다는 것을 알았고 책에 실린 작가의 글 속에서도 기억의 패턴들이 나로 하여금 동질감을 느끼게 했다. 


나는 죽어가고 있다. 살아 있다는 뜻이다. 죽음을 죽음 자체로 두기 위해 오래 바라볼수록 두려움보다 슬픔이 커졌다. 두려움은 막연했으나 슬픔은 구체적이었다. 거기 나의 희망이 있었다. - P26


말기 암에 걸린 나는 보령에 폐가를 수리하여 이사를 하려고 한다. 엄마는 몸도 아픈데 왜 굳이 그런 곳에서 살려고 하는지 나의 마음을 이해를 하지 못한다. 죽어가는 지금, 나는 불안한 미래를 직시하며 바라본다. 두려움과 슬픔은 다르다. 적어도 슬프다는 것은 막연한 감정이 아니라 좀 더 구체적인 명징성을 갖고 있다. 거기에 희망을 느끼는 나의 마음이 뭔지 알 것 같아서 울컥했다.


시간은 발산한다.

과거는 사라지고 현재는 여기 있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무언가가 폭발하여 사방으로 무한히 퍼져나가는 것처럼 멀리 떨어진 채로 공존한다.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 기억하거나 기억하지 못할 뿐. 미래는 어딘가에 있다. 쉽사리 볼 수 없는 머나먼 곳에. 나는 종종 과거와 미래를 헷갈리는 것만 같다. 과거의 일이라고 기억하는 상황을 현재에 그대로 겪을 때가 있으며 미래의 일을 짐작하여 이야기하면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지 않았느냐는 대꾸를 듣는 경험들. 인류가 동시에 과거, 현재, 미래라는 개념을 망각한다면 어떻게 될까. 혼란에 빠질까? 누군가는, 아주 찰나일지라도, 평생 경험한 적 없는 엄청난 자유를 실감할지도 모른다. 출생과 죽음, 성장과 노화, 발생과 소멸을 시간이란 개념 바깥에서 이해하고 싶다. 얼음이 물이 되고 물이 수증기가 되듯 바뀌어 달라지는 것. 시간을 배제하고 변화를 말할 수 있을까. 죽음 다음이 있다면, 어쩌면, 시간에서 해방된 무엇 아닐까. - P15


그곳에 살았던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과거의 사람이 남기고 간 물건은 그 사람을 말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종종 과거와 비슷한 상황의 일을 겪으면 혼란스러울 때가 있었다. 특히나 잊어버리고 싶었던 기억을 또 마주하는 순간 지금이 과거인지, 현재인지, 미래인지 아득해진다. 그럴 때는 주저앉아 잠시 그런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미래에 또 그런 순간이 올까, 아닐까.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그 시간을 견디고 살아낸다.


우수상 작품들도 대부분 훌륭했는데 나는 그 중 특히 김기태의 <세상 모든 바다>, 이장욱의 <크로캅>이 좋았다.



<세상 모든 바다> 에서는 지금은 대세가 된 K-POP 그룹의 공연장을 찾은 팬인 자이니치 '하쿠'와 한국인 '백영록'의 교류(연대)를 보여준다. 하쿠의 부모는 자이니치 3세대이고 본인은 일본 국적을 취득했지만 유학생으로 서울에 왔다. '하쿠'는 '백'이라는 성을 일본식으로 음독한 성이라고 하니 백영록과의 만남이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필연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마도 방탄소년단이 기점이었을 것 같은데 가수 뿐 아니라 아이돌 팬들이 세계 문제에 관심을 갖고 목소리를 내며 기부를 하기도 하는 등 긍정적인 활동들을 하는 것 말이다. 세모바(SMB)의 멤버들도 그런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원전을 반대하며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는 발전해야 생존한다는 절박감으로 군청 앞에서 행인들에게 전단지를 건네며 원전 반대 무효를 이야기한다. 하쿠는 이 두 가지 상황에 부딪쳤을 때 피하고 뒷걸음질쳤다. 나는 과연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며 행동할 수 있을까 묻게 되었다.


그 사정에서 나의 몫에 대해 무언가를 생각해 내려 했으나 잘되지 않았다. 큼지막한 파도 하나가 방파제에 부딪쳤다. 하얀 물보라가 세차게 튀어 올랐다. 얼굴에 와 닿는 차가운 물방울의 감각. 실제로 닿았을까. 느낌뿐이었을까. 분명한 건 내가 뒷걸음질을 쳤다는 것이다.



<크로캅>은 결말까지 멈출 수 없는 흡인력 있는 이야기였다. 아마 재미만으로 따지면 이 작품이 최고일 것이다. 격투기 링 위에 선 두 남자가 사투에 가까운 격투를 벌인다. 나는 수비자일까, 공격자일까. 입장의 차이에 따라 나는 수비자가 되기도 하고 공격자가 되기도 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경기장 밖의 일상에서도 혼란을 겪고 있다. 


마스크를 쓴 유령을 본 적이 있는가. 유령처럼 그자는 스르르 걸어다닌다. 표정도 없이 걸어다닌다. 계단으로 걸어 다니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리고 거리를 휘적휘적 돌아다닌다. 원한을 품은 자답게, 당신을 노리는 자답게, 당신의 죽음을 기다리는 자답게, 당신의 주위를 떠나지 않는다. 하이에나가 사체 주위를 배회하듯이, 독수리가 죽어 가는 동물의 머리 위를 선회하듯이. - P201


나는 상대방을 공격자이자 침입자로 규정하고 행동한다. '그는 나를 죽일지 몰라. 그럼 어쩌지?' 루쉰의 광인일기가 오버랩되기도 했다. 나는 창문에 창살을 설치하고 보안 장치를 달며 방비를 한다. 그런데 그런다고 완벽할까? 완벽한 시스템이라는 것은 없을텐데. 마음만 먹으면 이 혼란한 세상에서 내가 온전히 버틸 수 있을 것인가. 심지어 나를 공격하는 이는 윗집이자 과거 같은 회사에 다녔던 동료였던 사람이다. 그들은 왜 철천지 원수가 되었을까. 


윗집.

적의 집.

동료였으므로 더욱 가증스러운 자의 집.

당신을 적의와 증오와 분노의 나락으로 빠뜨린 자의 집.

(...)

혼자 정의로운 척, 혼자 외로운 척, 혼자 개폼을 잡고 술잔을 비운 뒤에, 그자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 아.... 이 새끼가.... 저주받을 새끼가.... 왜 그렇게 생각이 없다.... - P221~222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작품은 박서련의 <나, 나, 마들렌>이다. 


목이 잘리는 꿈을 꾸고 일어나서 옆을 보니 내가 있었다? 어느 쪽이 원본일까? 나인가? 나를 쳐다보는 그 사람인가? 아무튼 그 때 마들렌은 옆에 없었다. 마들렌은 소설 창작 수업에서 처음 만난 친구다. "나 언니네 집에 가면 안 돼요?" 하더니 내 집에 눌러앉은 마들렌. 마들렌은 소설가에게 성추행을 당해 그를 고소했고 재판이 열렸다. 마들렌은 나에게 증언을 요청하는데...


가끔 내가 둘 이상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많은 일을 하고 싶은데 몸은 하나라서 해낼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을 때다. 그런데 내 몸이 둘 이상이라면 나는 과연 같은 생각을 지닌 인간일까? 같은 인물이 다른 장소에서 각각의 일을 한다니... 


소설가의 성추행 이야기를 보면서는 이서수의 <미조의 시대>가 생각났다. 거기서 수영이란 인물이 나오는데 그녀는 IT 회사에서 일하며 회사 오너의 요구에 따라 성인 웹툰을 그리고 있다. 가면 갈수록 가학적인 말도 안되는 스토리와 그림을 그리라는 요구에 원형탈모증까지 겪어가며 꾸역꾸역 일을 해나간다. 작품에는 육체적인 접촉이 나오지는 않지만 왠지 그게 있을 것 같아서 불쾌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돈과 권력, 지위를 이용해 상대를 누르는 행위는 너무나 흔한 일이지만 이것이 먹고 사는 문제와 연결되면 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돈이냐, 예술이냐.


나는 나를 향해 결심에 찬 눈빛을 보냈다. 나 역시 나에게 고개를 끄덕여 결의를 표했다. 이것 말고는 역시 방법이 없는 걸까. (...) 나는 싱크대 하부 장을 열어 식칼을 꺼내와 나와 나 사이에 내려놓았다. 나와 나는 식칼을 가운데 두고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곧 또 하나의 내가 집으로 돌아올 시간이었다.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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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4-01-18 10: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 님의 문학 리뷰, 제가 왜 반갑고 좋은 걸까요? ㅎ
김기태의 <세상 모든 바다>가 급 궁금해지고요!

거리의화가 2024-01-18 11:34   좋아요 0 | URL
ㅎㅎ 오랜만에 문학 읽기를 시도해봤습니다. 그래도 한국 소설은 주변의 이야기라 공감이 더 가서 읽기에 편한 것 같아요. 외국 소설은 너무 어렵습니다ㅋㅋ
김기태의 작품 좋았어요. 심지어 등단한지 얼마 안되었던데(2022년 신춘문예) 놀라웠어요!^^ 앞으로가 기대되는 작가일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