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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잊고 있던 아니, 기억 속에서 애써 지우려 했던 수많은 일들이
하나하나 선명하게 떠올라 아주 괴로웠다.
(내가 가해자였던, 혹은 피해자였던, 혹은 말도 안되는 일의 목격자였던 수많은 사례들이
굴비처럼 줄줄이 엮여져 나오는 것이다.)
제일 먼저 떠오른 건 김귀정 열사가 시위 도중 목숨을 잃었던 날이다.
그 날 나는 독서 모임 사람들과 멋모르고 시위 대열에 끼어 있다가 혼비백산했다.
뛰는 와중에 신발을 잃어버려 남의 비닐 단화를 주워 신고 엉엉 울면서 돌아다닌 건
언젠가 페이퍼에도 쓴 적 있다.
다음날인가, 며칠 후, 시신이 안치된 병원에까지 왔다갔다 하며 제법 중요한 일을 맡은 듯
폼을 잡던 한 소설가가 이렇게 말했다.
“김귀정 열사, 사진만큼 안 예뻐! 실제로 보면......”
그리고 능글능글 웃으며 우리 중 누구 하나를 가리키며 이렇게 덧붙였다.
“김xx 씨. 그날 대피했다가 딱 마주쳤을 때 머리는 산발하고 땀에 눈물에 꼬질꼬질
정말 귀신이 따로 없더라니까!”
그런 인간이 지금도 앞장서서 신문이며 잡지에 기고하고 진보세력의 선봉에 서 있다.
자기가 민중의 대변인인 것처럼 목소리를 높인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믿을 수 없고, 인간을 알 수 없다는 절망적인 생각이 든 게 아마
그 무렵부터가 아닌가 한다.
입에 올리고 나면 눈이 침침해지고 더러워지는 것 같은 나만 아는 일화가 한둘이 아니다.
이건 좀 다른 이야기지만 내가 최고로 좋아하는 한 여성 시인은 워크숍 때문에 미국에 몇 달
다녀온 후 길에서 담배를 피워도 되는 것 때문에, 그리고 연령을 뛰어넘어 모두 친구가 되는
그곳의 분위기 때문에 숨통이 트이더라고 했다.
생과 사를 들었다 놓는 듯한 시를 쓰는 분의 입에서 고작 담배와 나이 이야기라니,
오랜만의 만남에 너무 기쁘면서도 그때 나는 속으로 살짝 실망했던 것 같다.
지금이라면 문제는 달라지리라.
내가 그때의 시인 나이가 되고 보니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인종, 국가, 여성과 남성, 빈부, 직업, 나이, 장애인인가 아닌가, 장애인 중에서도 장애의
등급 정도에 따라... 이 세상에는 정말 사람들이 편의에 따라 제멋대로 갈라놓은 차별이
너무나 많다.
‘젠더와 계급’의 문제로 간단하게 정리해 보아도 그 속에는 또 얼마나 많은 차별이 층층이
다양하게 얽히고 설켜 있는지.
그리고 평소 꽤나 생각이 깊고 자유로운 인간인 척하는 나에게도 얼마나 많은 편견과 모순이
쌓여 있는가. 이 책을 읽으며 가슴이 뜨끔뜨끔했던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가령 내가 제일 놀란 건 이 대목이다.
--한국 현대사의 고통과 비극의 성별적인 두 주체, 정신대 ‘할머니’와 장기수 ‘선생님’의 존재는
이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전자는 역사의 피해자, 전쟁의 ‘부산물’이지만
후자는 역사의 치열한 주체이며, 인간의 신념과 의지를 상징한다.
전자는 불쌍한 혹은 수치스런 존재지만, 후자는 존경스럽고 경이로운 존재다.(53쪽)
오래 전 장기수후원회 활동을 하면서 많은 장기수 어른들을 가까이서 뵈었지만
빨치산 출신의 정순덕 선생님의 경우 정순덕 선생님이라고 마음속에서라도 불러본 적이 없었다.
아무 의심 없이 정순덕 ‘할머니’였다. 그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남자 장기수 어른들은 깍듯이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모르고 지나쳐서 그렇지 인생에서 내가 실례를 범한 이런 말도 안 되는 경우가 어디
한둘이었겠는가.
--한국 사회는 성폭력 피해여성의 인권에 관심이 없으며 성폭력과 성관계를 구분하지 않는다.
가장 섹시한 성관계는 성폭력이라고 믿고 있다.(83쪽)
‘여성의 전화’에서 꽤 오랜 기간 상근자로 활동한 때문인지 저자는 이 책에서 가부장적인
우리 사회에서 잘못 뿌리내린 성 역할뿐 아니라 사랑과 섹스, 가정폭력 문제까지
아주 깊고 넓게 다루고 있다.
성 판매 여성의 인권, 남성 섹슈얼리티와 군사주의까지 내처 읽다보니
내 속의, 자의였든 타의였든 꽁꽁 빗장을 걸어 닫아두고 있던 컴컴한 골방 하나가
스르르 열리는 듯한 그런 기분이 들었다.
알고 난 후의 충격이 귀찮아서, 그리고 깨닫고 난 후 그것을 생활 속에서 실천해 나갈 때
인생이 얼마나 복잡해지고 골치 아플지 미리 두려워서 나는 녹슨 자물쇠를 단 그 골방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여성이면서도 페미니즘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꽤나 많은 편견을 가지고 있었음을 고백한다.
다른 많은 사회 문제, 인생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서 잘난 척은 어지간히도 했다.
그런데 이 사실을 고백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이렇게 가벼워지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