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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다른 골목에 사는 남자 ㅣ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8
이토야마 아키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작가정신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나는 젊은 날 운이 좋았던 건지 고대광실에 사는 사람들 구경을 많이 했다.
여기서 운이 좋았다는 건 출세한 사람들, 잘사는 사람들을 가까이서 보았다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아무리 출세해도 부자로 살아도 인생이란 건 별게 없구나, 하는 기묘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의미에서 한 말이다.
사람들은 모두 막다른 골목에서 살고 있었다. 자기만의 골방에서.
나는 오래 전부터 단 한 사람의 친구를 꿈꾸었다.
내가 "아"하고 입을 벌리면 "어"하고 화답해 주는 친구.
그런데 그런 친구는 이 세상에 없었다.
내 친구인 것이 송구할 정도로 잘난 사람이 친구인 적도 있었지만 그는 내가 바라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다.
내가 아직 준비가 덜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아"하고 입을 열면 "어"라고 해야 하는데 "우"라든지 "꺽'이라든지 엉뚱한 소리만 내었다.
그러면 우리는 민망해서 서로 고개를 돌렸다. 하긴, 그런 순간도 없는 것보단 나았지만......
<막다른 골목에 사는 남자>를 읽었다.
12년 혹은 13년을 한 남자만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자기의 마음이 사랑인지 뭐인지 분간도 못하는
오타니 양의 덤덤한, 어리둥절한, 그러면서도 나름대로 애타는 연애에 마음이 이끌렸다.
사랑을 시작할 때 이번만은 진짜 일생의 사랑이라고 확신하고 몸을 떨던 수많은 그녀들은 지금 대부분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나는 그때 그녀들의 너무도 자주 찾아오는 일생의 사랑에 대한 확신과 덜 떨어진 열정이
가소롭기도 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부럽기도 했었다.
--당신은 말했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임종을 봐주고, 내가 어머니의 임종을 봐주고, 내가 떠날 때는 누가 봐줄까."
"나요."
아무런 의심도 없었다.
(...) 결혼은 하지 않았는데 장례식은 한다.
나는 당신이 남긴 뼈 중에서 작은 조각 하나를 슬쩍 할 생각이다.
반은 막자사발에 갈아 카페오레에 넣어 마실 것이다. 그러면 내 뼈가 될 것이다.
나머지 반은 주머니 속에, 작은 주머니 속에 넣어, 불안할 때나 힘들 때마다 만질 것이다.
('막다른 골목에 사는 남자' 48~49쪽)
그녀의 상대 오다기리 다카시 청년의 마음도 뭐가 뭔지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그는 고작 다른 사람들과의 약속과는 달리 늦지 않고 약속 시간을 잘 지키는 걸로 오타니 양에 대한
조금은 각별한 자신의 마음을 나타내는 정도이다.
'상대를 막다른 골목 안쪽으로 몰아세우는 짓'으로 남다른 사랑을 증명하려는 부류의 인간이 나는
오래 전부터 기피대상이었다.
'막다른 골목에 사는 남자'에 이어지는 연작 단편 '오다기리 다카시의 변명'도 들어줄 만하고,
사춘기 조카와의 편지질에 점점 자신도 모르게 마음을 열어가는 고집불통 독신 도오루 삼촌의 이야기
'알리오 올리오'도 읽고 나면 가벼운 한숨이 나오긴 마찬가지.
'사람들은 모두 막다른 골목에 산다'는 그런 희미한 확신, 혹은 비겁한 안도감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