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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들은 이렇게 묻는다 - 개정판
김점선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09년 7월
품절
한 장 한 장 편지 봉투를 열 듯 레터 나이프로 책장을 열어야만 하는 별난 책. 처음엔 귀찮아서 투덜거렸는데 무딘 칼로 새 페이지를 여는 재미에 푹 빠져 마이 도러와 서로 더 많이 하겠다고 싸웠다.
거기다 열 장의 김점선 그림엽서 세트가 따로 왔으니, 검정색 나무칼과 함께!
이렇게 조심조심 봉인된 페이지를 하나하나 열어 나갑니다.
제일 마음에 든 본문 그리고 엽서 그림.
-- 똑같은 그림만을 죽도록 그리다가 죽어야지 하고 맘먹은 적이 있었다.
그러고는 붓꽃을 그리기 시작했다. 한 일주일 그렇게 해보고는 스스로 놀랐다. 일주일 동안 그린 그림이 모두 감이 달랐다. 독자적으로 아름다웠다.(45~56쪽)
이렇게 자기 자신을 꼬셔가면서 그림을 그렸다는 화가 김점선.
이 화가의 경우는 마음 내킬 때 붓을 휘두르면 그림이 척척 나오는 줄 알고 있었는데 의지와 결단이 필요한 작업을 수행하고 있었다니 놀라웠다.
(클릭하면 큰 화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흰색 와이셔츠와 트렌치코트를 입고 앙드레 김을 인터뷰하러 갔던 달포 전 텔레비전 화면 속의 김점선은 <나, 김점선>이라는 책에서 처음 만났던 10여 년 전의 모습과 너무도 달라져 있었다. 처음엔 정말 양아치스러웠는데 지금은 뭐랄까, 너무도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 '멋을 절대 안 낸 것 같은 멋'이야말로 고도의 멋이다. 내추럴 화장이 그런 것처럼!
레터 나이프로 책장을 열었을 때 이런 그림이 짠~ 나타나면 감동을 먹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책은 거의 모든 페이지가 그림과 사진, 짧지만 통찰력 있는 화가의 글로 채워져 있다.
--나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처럼, 햇볕처럼, 화투처럼 싸구려 그림을 그리는 작가가 되고 싶다.('왜 그림을 그리는가' 중)
--나는 늘 하늘을 등지고 산다. 하늘을 등지고 앉아서 그림을 그리거나 자판을 두드린다. 이런 나를 아픈 장영희가 끌어내서 오랜만에 하늘을 한껏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병상에 누워 있는 자도 힘이 있다는 걸 아픈 사람들이 알까?('장영희! 아자아자!' 중)
피아니스트 신수정, 장영희 서강대 영문과 교수, 소설가 박완서 등과도 절친한 화가. 그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나 함께했던 어느 한때를 엿보는 재미도 크다.
--바보들은 이렇게 묻는다. 사람이 위대한 점은 가보지 않고도 안다는 것이다. 직접체험하지 않고도 알 수 있다는 것이 아주 훌륭한 점이다. 그런데 바보들은 늘 그렇게 질문한다. 직접 체험 여부를 묻는다. "가봤어?" "먹어봤어?" "해봤어?"(68쪽)
이 글에서 책의 제목을 뽑았구나!
김점선은 어느 날 오십견이 와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자 아들에게 컴퓨터를 배워 화면으로 화투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슬퍼하는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너무 슬픈 나머지 자살해 버린다. 다른 사람은 '슬프다' 하고 공책에 쓴다. 절절이 자신의 슬픔을 써나간다.
그러는 동안 슬픔이 분해된다. 그 글을 읽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정신작용이 일어난다. 읽는 사람이 오래 전에 응어리져 가슴에 박혀 있던 슬픔이 서서히 분해된다. 슬프다고 죽어버리지 않고 슬픔을 공책에 쓰는 사람이 예술가인 것이다.(117쪽)
그림 그리는 시간보다 자신의 그림을 바라보면서 자뻑하는 시간이 더 길다고 고백하는 화가. 다음은 그녀의 대갈일성.
"자뻑이라는 미친 상태가 일생을 채우는 자가 예술가다"
--도회지에서 왕창 망한 남편을 따라 시골로 갔다. 정착한 마을에 당집이 있었다. 보이는 대로 무심히 그렸다. 15년 동안 무심히 그렸다. 그러다 집이 튀어나왔다. 무심히 그리는 작업에서 유심히 자신의 그림을 사고하기 시작한 화가가 풍경 속에서 집을 딸랑 끄집어낸 것이다. (133쪽)
'보이는 대로 무심히 그렸다'라는 게 키워드인 듯한데 15년 동안 무심히 보이는 대로 묵묵히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드물 지 않을까?
정말 바르게만 살면 누구나 다 예수고 석가라고 말하는 화가.
"그래도 사소한 것에 목숨 건다. 거창한 일은 내 평생 결코 일어날 기미가 안 보이므로......"(170쪽)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녀의 말과 글이 나는 너무 유쾌하고 미더웠다. 물론 몽환적이고 유니크한 그림 감상 재미도 빠트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