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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 열차
헤미 발거시 지음, 크리스 K. 순피트 그림, 신상호 옮김 / 동산사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예전에 아버지가 6, 25 전쟁과 관련된 기억을 글로 적으시던 노트를 몰래 읽어 본 적이 있다. 그 때는 스쳐지나가듯 대충 훓고 말았었는데, 이 책을 보니 아버지의 글을 좀 더 자세히 읽어보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된다. 전쟁이 발발한 시기는 아마도 아버지가 10살 가량 되셨을 때였으리라. 대부분의 친족들이 살고 있던 포항 또한 낙동강 방어의 마지노선에 속하였던지라 치열한 전투가 진행된 곳이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을 되살려 적어 보면 마을 사람들을 비롯한 식솔들은 피난을 갈 준비를 하느라 분주히 우왕좌왕하고, 동네 '아제'들은 학도의용군에 지원한다고 나서는 모습들을 적어놓으셨던 듯하다..
전쟁으로 일반 시민들이 겪는 고통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몰려드는 사람들 속에서 손을 놓친 가족들이 생이별을 당하는 바람에 숱한 이산가족이 생겨나고, 폭격 등으로 자식과 부모를 잃고, 살뜰히 가꾸어 온 삶의 터전을 잃고 만다. . '집이며, 채소를 심어 놓은 텃밭, 어머니께 물려 받은 장롱, 이 모든 걸 다 두고 떠나려니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어.'... 수미네 외할머니가 들려주는 말 속에서 위험이 목전에 닥친 상황에서도 차마 두고 가기 아까운 소중한 것들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처음에 이 책을 볼 때 표지에 그림을 그림 사람 이름이 외국인이라 그림을 보면서 그림을 잘 그렸구나, 한국의 문화에 대해 참 많이 연구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먼저 했었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작가의 말이 실린 마지막 장에서야 그린이 <크리스 K. 순피트>가 한국에서 태어나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미국으로 입양된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작가인 <헤미 발거시> 또한 우리나라 사람으로 어릴 때 이민을 갔다고 한다. 그런 두사람이 6. 25 전쟁과 관련된 이야기를 담은 책(저자의 경험담이 녹아 있는)을 펴내 찬사를 받고, 주목을 받아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 전쟁의 참혹성을 다른나라 사람들에게 알린 점은-이 책에서 보여지는 얼마간의 단점을 덮을만큼- 높이 살만하다.
그림을 보면 한국적인 것을 담으려고 지나치게 노력한 부분들이 엿보이기도 한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가족들이 즐겁게 식사를 하고 있는 방은 화려한 화조 병풍이며, 보료, 청자와 백자, 까만 자개 농등 일반 가정의 살림살이라기 보다는 어느 양반네 사랑방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리고 밥상에 숟가락이 보이지 않는 것도 그린이가 한국의 문화에 익숙하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다만 이런 것들이 이야기의 진행을 방해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밝은 색채로 그려진, 단란한 가정은 탱크와 총을 든 군인들의 행진과 함께 초췌하고 어두워진 모습으로 변하고, 어두운 밤을 방패막이 삼아 도하하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피난 행렬... 부산으로 가는 마지막 열차...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그리고 자신보다는 다른 가족들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는 가장의 모습이 가슴을 파고 든다. 열차 지붕 위에 가족들을 올려 보내고 수미의 외할아버지는 말없이, 눈빛과 손길만으로 작별인사를 나눈다.. 그토록 맑고 아름다운 날에....
'기차'는 할머니와 수미에게는 그리운 사람을 생각나게 하는 매체이다. 할머니는 기차를 보며 '피난열차'와 기약없이 보내고 다시 만나지 못한 할아버지를 두고두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수미에게 기차는 -멀리 떠나 있는- 그리운 엄마가 자신에게로 돌아오기 위해 타고 올 매체이다. 세대가 다른 두 사람이 바라보는 그 기차는 그리운 사람들을 위해 북으로 북으로 달리고 싶다... 전쟁으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진 수많은 사람들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