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자유의 감옥 ㅣ 올 에이지 클래식
미하엘 엔데 지음, 이병서 옮김 / 보물창고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릴 땐 누구나 상상의 세계를 무궁무진하게 펼치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창조하고, 그 환상의 세계 속에서 헤엄쳐 다니길 좋아한다. 그러나 커가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녹녹치 않은 탓에 변화 무상한 만화경 같은 세계는 저 의식 너머에서 서서히 숨죽이고 근근히 연명하면서 책이나 영화같은 매체를 통해 우리에게 아름다운 세계, 환상적인 모험, 새로운 창조물을 만날 수 있게 되는 순간을 제공해 주곤 한다. 살아가는 일을 지나치게 현실적으로 조목조목 따지길 좋아하는 나는 그 반대급부로 판타지 문학을 좋아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보로메오 콜미의 통로>를 읽고 있자니 '1'이라는 숫자를 쪼개고 또 쪼개서 0으로 접근하는 동안에 발생하는 숫자는 무수히 많다는 '무한대'의 개념이 생각났다. 원근법에 의해 그려진 길처럼 보이는 통로에 들어서서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그 대상 또한 점점 줄어든다면 30m밖에 되지 않아 보이는 그 통로의 끝에 과연 도달할 수 있을까? 이 짧은 작품이 작가(예술가)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본질적인 것'에 관하여 생각하게 한다면 <조금 작지만 괜찮아>의 경우에는 공간 확장의 놀라움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코딱지만한 자동차 안에 어른 셋에 아이 다섯 명, 그리고 손님 한 명 추가요~, 이렇게 많이 탔는데, 그래도 공간이 남네! 이처럼 공간을 넓게~ 쓸 수 있는 환상적인 기술만 있다면 주차문제도, 집문제도 걱정할 필요가 없을 터이니 공간부족의 고통을 감수하고 있는 나도 이 마술사를 만나게 되면 명함을 한 장 받아 두어야겠다. ^^
그림자들에게는 유일한 현실 세계인 동굴의 바깥 세계로 나아갈 출구를 찾는 이브리와 베히모트간의 설전이 이어진 <미스라임의 동굴>을 읽을 때는 다른 그림자들처럼 과연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어느 한 쪽의 주장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이 나에게 스스로의 의지가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작가는 동굴 경계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명확히 알려주지 않음으로써 나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ㅜㅜ;) 이 작품은 자신의 의지는 사라지고 지시받은 대로 일하고, 먹고, 자고 일어나 다시 일터로 나가는 시계추 같은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과 현대사회를 투영하고 있는 듯 하다.
이 책의 표제이기도 한 <자유의 감옥>은 프로스트(R.Frost)의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를 떠올리게 했는데, 이블리스(악마)의 시험에 들게 된 남자는 111개의 문이 있는 어떤 건물에서 하나의 문을 선택해야 그 곳을 빠져 나갈 수 있는 처지에 직면한다. 문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선택에 따라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와 맞닥뜨릴 수도 있고, 부와 기쁨을 누릴 수도 있으니 그 선택은 결코 쉽지 않다. 문이 두개든, 천 개든 하나를 선택하는 것의 어려움은 똑같으며, '나'의 결정을 통해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인간의 자유 의지를 넘어서는 신의 의지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나 자신은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 신의 의지보다는 인간의 자유 의지의 본질에 관해 좀 더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현실 이외의 또 다른 세상을 꿈꾸는 일은 하나의 통로를 지나 무한한 공간 속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다. 무수히 많은 제약이 따르는 하나의 공간 속에서만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답답하고, 숨 막힐 노릇인지! 꿈속에서든, 몽상에 잠겨서든, 책이나 영화 속으로의 몰입을 통해든 현실로부터의 짧은 외도(?)를 하고, 이를 통해 사그라져 들어가는 나의 빈곤한 상상력을 숨쉬게 만들어 줄 필요가 있기에 현실의 삶에 지칠 때면 아이들의 동화를 읽고, 판타지 문학책을 읽는다. 미하엘 엔데의 말처럼 "내면의 세계로 여행", 즉 우리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상상력의 발현을 통해 또 다른 세상을 창조하고, 그 세상 속에서 존재하는 또 다른 나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를 찾아내야 하며, 그런 면에서 저자는 현실의 바깥세상으로 가는 통로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전령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