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물고기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최수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읽고 나서

 

 바다는 아름다우며 혹독하다. 하지만 채 자라지도 않은 티끌만 한 물고기에게 바다는 아름다움보다 혹독함이 훨씬 더 앞서는 곳이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포식자와 어두컴컴한 심해 속 장애물들, 홀로 그 세상을 이겨내야만 하는 나약한 물고기의 표류는 외롭고 처량하다. 하지만 그 어린 물고기는 단순하기에 용감하다.

 

 

 라일라, 한쪽 귀가 들리지 않는 작은 흑인 소녀가 등장한다. "예닐곱 살 무렵에 나는 유괴당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글은 첫판부터 그녀에게 우려 섞인 시선을 보내도록 한다. 그녀는 널따란 세상의 티끌 같은 손재지만, 그 작은 존재에게도 세상의 풍파는 빗겨가지 않는다. 아니, 빗겨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욱 세차게 분다.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은 밤에 팔려왔기 때문에 지어진 '라일라(밤)'라는 이름밖에 없다. 처음으로 팔려간 '랄라 아스마'의 집에서는 사랑과 고통을 동시에 배운다. 버팀목이 되었던 엄마이자 보호자, '랄라 아스마'가 죽고 난 뒤, 그녀는 다시 거리로 나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 화려한 거리의 여자들이 사는 여인숙에 들어간 라일라, 그녀에게 몸을 파는 여자들은 수치스럽거나 부끄럽지 않다. 오히려 자신을 다른 의미로 봐준 '공주님'들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 시기의 삶은 라일라에게 절제나 규율 따위는 없는 '욕망만을 따르는' 성향을 선물한다.

 

 

 어떤 고난도 겪을 준비가 돼 있다고 말하는 어린 그녀는 주체적이진 못하다. 상황들이, 또다른 공격이, 그녀가 선택할 새도 없이 몰아치기 때문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오로지 장애물을 피하기 위해서다. 치이고 또 치이면서, 걸어가고 헤엄치는 다른 사람들에게 밀리면서 그 작은 소녀는 여러 세상을 돈다. 감금과 폭력, 욕망 어린 남자들의 추파, 지금까지 만나지 못한 거대한 문명들은 이해할 수 없는 공격의 대상이 되고, 이따금 그에게 손을 내밀어 도와주는 행운을 발견하기도 한다. 인생의 굴곡이 있다면 출발점과 정상을 가로지를 '라일라'의 생은 한마디로 지옥이다. 지옥에서 달아나려고 하는 그녀의 몸부림은 안쓰럽다. 어떤 것에도 그녀의 선택은 없다. 다른 사람이 손길과 상황이 만들어낸 그녀의 삶은 완전하지 못하다. 그렇기에 그녀가 꿈꾸는 행복은 자유, 구속되지 않는 삶이다.

 

 

 정체성과 자유를 향한 갈망은 라일라에게 자칫하면 좌절할 수 있는 어두운 상황에도 한 걸음을 떼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고난과 역경들이 어디에서 왔든, 누군가에게는 넘을 수 없는 언덕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뛰어넘을 수 있는 무릎만치 자그마한 돌덩이가 되는데 라일라의 경우, 언덕이다. 하지만 넘을 수는 있었다. 그녀는 그 언덕에 깊은 구멍을 내가며 올라가고 내려온다. 그 과정은 생의 바깥에 서 있는 나도 참을 수 없게 고되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언덕을 넘어간다.

 

 

세상은 조용했다. 이제 두 귀가 모두 먼 것 같았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복도 끝에 있던 화장실에서 토했던 것 같다. 그리고 소리를 질러댔던 것 같다. 철문을 열고 터널 같은 통로 안에서 건물 꼭대기까지 울리도록 울부짖었다. 그러나 아무도 듣지 않았다. 환풍기의 모터가 하나씩 가동되면서 비행기의 진동음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 소리가 모든 소음을 덮어버렸다. 나는 시몬을 생각했다. 그녀를 보고 싶었고, 그녀가 음악의 한 소절을 반복하여 들려주는 동안 그 곁에 있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바로 그날 밤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194쪽) 

 

 

 역경이 있으면 행운도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역경이 있으면 얻는 것은 있다고 말할 순 있을 것 같다. 라일라의 숙원이자, 행복한 삶에 대한 물음이었던 것을 스스로 찾는 순간, 그리고 삶의 근원인 고향으로 돌아가는 순간, 그녀는 빛나는 물고기가 된다. 여전히 작디작은 물고기지만 어른이 되었다. 그녀에겐 또다시 역경이 징검다리처럼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겨낼 것이다.

 

 

 작은 존재라도 강하게 빛날 수 있는 특권은 그가 가진 '운'에만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어두운 심해를 불빛 없이 나아갈 수 있는 끈질긴 용기, 그리고 그 불빛을 스스로 만들어나갈 수 있는 선택. 나는 이 소설의 끝을 믿고 싶다.

 

 

 

Written by. 리니

프랑스 소설/ 성장 소설/ 노벨 문학상/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 

소장하고 있는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나는 후리야에게 부탁했다. "내게도 일자리를 찾아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네게 어울리지 않아. 너는 다른 걸 해야 해. 학교에 가야지." 그녀는 내게 프랑스어와 에스파냐어, 영어로 된 책과 공책을 사주었다. 타가디르도 그녀와 같은 생각이었다. "너는 우리처럼 돼서는 안 돼. 변호사나 의사 같은 뭔가 중요한 사람이 되어야지. 우리 같은 허드렛일이나 해서는 안 된단 말이야." 나는 그녀들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여하튼 내가 누군가와 결혼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은 그들이 처음이었다. 내게서 남편을 위해 부엌일이나 하는, 그저 하찮은 하녀와도 같은 존재가 아닌 다른 면을 보아준 사람은 그들이 처음이었다. 나는 눈물이 날 정도로 가슴이 벅찼다. 그녀들은 진실로 나의 착한 공주님들이었다. 나는 그들을 껴안았다. (72쪽)


"아무래도 미성년자인 것 같아. 집에 데려다주는 편이 낫겠어." 그가 여기저기에 전화를 거는 것 같더니 마침내 하킴과 연결이 되었다. 그렇게 하여 그는 자블로 거리에 있는 차고의 주소를 알아냈다. 그때 나는 세상이란 참으로 좁아서 실만 제대로 끌어당기면 모든 것이 끌려 온다는 것, 이를테면 누구든 어떤 일에 관련되면 서로 한 동아리를 이루게 되고,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게 되며, 노노와 나같이 그들과 무관한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몬의 남자 친구가 전화를 하는 동안 나는 내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 머릿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몹시 걱정스러워하는 기색이 담긴 시몬의 얼굴과 암소처럼 커다란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때 문득 나는 왜 그녀가 우리 둘이 서로 닮았으며 둘 다 자신의 육체를 가지지 못한 존재라고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뭔가 진정으로 원한 적이 없고 항상 타인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160쪽)

하킴은 나의 오빠였다. 나는 마리마였다. 나는 할아버지의 닳아서 반들반들한 손가락이 내 얼굴에 머물며 내 눈과 뺨과 입술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것을 느꼈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무엇인가가 내 속에서, 내 가슴속에서 부풀어올라 목구멍을 막았던 것이다. "그분은 내 할아버지였어. 정말이야. 그럼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더듬거렸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나는 숨이 막혔다. 하킴은 내가 울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눈물이 아니라 분노였다. 나는 건물 안의 모든 것을 파괴해버리고 싶었고, 할아버지의 시야를 가로막았던 불투명한 하늘에 구멍을 뚫어버리고 싶었고, 유리창과 블라인드를 깨버리고 싶었고, 열차의 차량과 버스의 차창과 철로, 그리고 세네갈의 강줄기와 팔레메 강변의 얌바 마을에 닿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배를 부숴버리고 싶었다. (184쪽)

이곳 사람들, 아사카, 나킬라, 알루굼, 울레드 아이사, 울레드 힐랄의 사람들, 그들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들은 서로 싸워 부상을 입고 사상자도 생긴다. 여인네들은 운다. 아이들은 사라진다. 그것이 현실이다. 그러니 우리가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곳이다. 이제 나는 확신한다. 하늘의 정점에서 쏟아져내리는 햇살에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보이고, 거리는 텅 비어 있다. 햇살에 눈이 부셔 눈물이 고인다. 뜨거운 바람이 벽을 타고 먼지를 날린다. 바람과 햇살을 견뎌내기 위해 나는 네모난 커다란 천을 사서 이곳 여인들처럼 온몸을 감싸고 틈을 만들어 눈만 내놓았다. (27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홍합
한창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읽고 나서

 

 여행이 주는 맛은 방방곡곡 아름다운 절경과 생소한 체험에 있다. 도시에서 태어나고 도시에서 자란 나에게 그 맛은 땅의 끝, 비릿하고 시원한 냄새가 나는 바다로 갈 때 더욱 진해진다. 산과 언덕에 다닥다닥 자리 잡은 작은 집들, 혹은 밤에도 빛나는 높은 건물과 바다의 오묘한 조화, 항구에 묶여 있는 어선들의 풍경이 생소하지만, 매혹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시적으로 보는 그런 풍경들 말고, 조금 더 깊이, 좁게 들어가면 강한 생명력을 가진 사람들이 보인다. 한적한 해변에 쭈그려 앉아 바닷물에 떠내려온 미역을 건지는 꼬마와 그의 엄마로 보이는 정다운 모습, 마치 너무나 익숙한 자동차를 몰듯 흔들리는 배의 키를 잡고 있는 햇볕에 탄 아저씨의 모습들. 여행할 틈이 생길 때마다 가능한 한 다시 그곳으로 향하고자 하는 마음은 바로 이 모습을 그리워함에서다.

 

 

 그리고 그곳의 냄새에 취해, 그곳에 매력에 빠져 허우적대는 나는 한창훈 작가의 책을 읽으며 대리만족을 한다. 뼛속까지 '바닷사람'인 그의 책들에는 바닷냄새가 물씬 풍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장편소설 『홍합』은 아름답고 혹독한 바다의 모습을 그리는 데 중점을 두진 않는다. 오히려 바다는 배경으로 존재한 채, 그보다 더 좁은, 구석구석의 '사람'들을 관찰한다. 좁은 장소로 선택한 곳은 '홍합 공장'이다. 차에서 실어온 수많은 홍합을 까고, 삶고, 깨끗이 씻어 얼려 포장하는 '삶의 현장' 속에서 작가는 땀 흘리는 그들의 노동을 본다.

 

 

새벽에 일어나 아이들을 먹여 학교 보내고 저는 도시락 하나 싸들고 공장에 나와 일을 하고 점심 땐 식은 밥을 두고 망연자실 먼 산이나 한동안 바라보다가 꾸역꾸역 뱃속에 집어넣고, 퇴근해서는 자꾸 가라앉으려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워 또 아이들 밥 먹여 재우고 천장이나 쳐다보다가 엉엉 우는 날들이었다. 그렇게 사는 것도 하는 것이라면 산다는 게 그런 것이었다. (274쪽) 

 

 세심한 수작업을 필요로 하는 일의 특성상, 홍합 공장에는 많은 아낙네가 모여든다. 자신의 이름 대신, 'ㅇㅇ네'와 같은 자식의 이름으로 불리는 그들의 삶은 사투리를 그대로 살려 적나라하게 표현된 수다와 우스갯소리 속에 녹아든다. 그 속을 보면 어느 하나 순탄한 인생들이 없다. 남편에게 손찌검을 당하고, 버림받고, 술과 노름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시어머니의 잔소리는 예삿일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 서럽고 서러운 인생사를 수다로 풀어낸다. 제각기 사연들을 가진 사람들 속에서 그 인생사를 구구절절 풀어내고, 분노하여 서로 욕을 뱉어주고, 복수 해주겠다며 소매 걷어붙인다는 이들의 수다는 '어찌 됐든 살아갈 힘'을 주는 것이겠다. 삶의 동력, 웃음 그리고 해학. 작가는 그들의 녹록지 않은 인생을 그저 구슬프게 읊지 않고, 마치 판소리처럼 신명 나고 능청스럽게 전해준다.

 

 

 홍합 공장 속 사람들의 인생 속에서 약간은 다른 분위기로 이야기되는 주인공의 사랑도, 그들을 보는 작가의 시선만큼이나 담백하다. "산다는 게 그런 것이었다."라는 철학은 사랑에도 어쩔 수 없이 적용되는 것일까. 자그맣게 피어나 설레고 두근거리기만 한 사랑도 삶의 무게와 저울질 되어 아스러지지만, 그들은 한탄하지 않는다. 그렇게 사는 것도 사는 것이라면 산다는 게 그런 것인 것처럼, 사랑도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렇게 지나가는 것이었으니까.

 

 

 소설 『홍합』은 분명 아름답게 빛나는 서정적인 언어들로 가득 찬 소설은 아니다. 작가가 소설 속 말한 바에 의하면 '촉촉하게 달궈진 닳은 굳은살' 같은 소설에 가깝다. 감정을 다독이기보다는, 퍽퍽 두드리거나 긁어 없애버리는 식이다. 하지만 이 거친 '굳은살' 같은 소설은 우리네 삶을 품고 있어 거칠고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다. 그래서 때로는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더군다나 그 모든 것을 표현한 작가의 글에 어찌 빠지지 않을 수 있으랴.

 

  

 

 

Written by. 리니

한국소설/ 제3회 한계레문학상 수상작 

소장하고 있는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하루에 네댓 번씩 저 사는 마을로 홍합을 실러 온 차라는 걸 뻔히 아는 터라 여자는 스스럼없이 안면을 붙여 왔다. 하긴 그게 한 세월 묵은 여인네들의 장기이기는 했다. 그네들에게 세월이란, 수줍음이 무늬가 되던 몸에서 독기가 새록새록 피어나오다가 끝내 몰염치의 아성으로 굳어지는, 그 독한 시간대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의 몸에는 부드러운 맨살도 있고 일에 혹독하게 달궈진 끝에 반들반들 닳은 굳은살이 있듯이 사람들 중에도 교양으로 제정신의 꽃을 피우는 부류와 이렇게 딱딱한 살로 차가운 바닥을 버텨내주는 부류가 있었다. (10쪽)

"입고(入庫) 다 됐소."

"이, 알았어."

냉동공장 황기사가 단추들을 눌러 냉동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시끄럽던 기계가 더 요란해졌다. 이제 냉동실은 영하 삼십오 도까지 온도가 떨어져 홍합을 얼릴 것이다. 어미 몸에서 뿔뿔이 뿜어져 나와 바닷물을 타고 흐르다가 아무 데고 저 몸 닿는 곳에 뿌리를 내리고 몸을 피웠다가 양식줄에 촘촘이 묶여 살을 키운 홍합은 현장에서 솥에 푹 삶겨 뜨거운 맛을 보고는 벌러덩 벌어져 흐물흐물 고물고물하다가 껍질과 떨어져 이렇듯 차가운 맛을 보게 된 것이다. 하루 종일 삶기고 씻긴 저것들은 밤새 꽁꽁 얼었다가 다음날 낱개로 떨어져 박스 포장이 된 다음 다시 냉장실로 옮겨지고는 훗날 컨테이너에 실려 멀리 유럽으로 갈 터였다. 이름만 들어본 먼 외국으로 가는 것도 그렇지만 새끼 두셋 낳아 반평생 뒷바라지로 허덕이는 인간들에 비하면 어쩌면 저 알아서 흘러가고 저 알아서 크는 이것은 훨씬 더 고급스러운 생물일지도 몰랐다. (19쪽)

풀과 나무에 물이 오르고 겨우내 겨울잠 자던 물이 몸 풀고 흘러내리는 봄이나 풀과 나무가 기운을 뿜어내다가 도가 지나쳐 얼굴이 붉어지고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가죽에 윤기가 도는 가을이면 시간은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손아귀로 움켜진 한줌 물처럼 절로 흘러가버리는 거였다. 그것은 인생에서 청춘과 같아 지금이 좋을 때구나 싶어지면 이미 화려한 시간대의 끝물이어서 사람의 생이란 게 언제나 시간보다는 한 호흡 뒤지는 물건일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란 무서운 것이었고 살아 있는 생물 같았다. (210쪽)

커피와 비스킷은 다과(茶菓)의 대명사이면서 한담(閑談)보다는 권태를 표현하는 것으로 위치가 격하되었다. 저 권태의 여대생들이 그렇게 한 사 년 살아보니 남는 것은 결혼하기에 적당한 나이가 되었다는 것말고는 없다고, 차라리 돈이나 벌고 사회 경험이나 하는 게 낫다고 노련하게 말할지라도 그 속에는 아무런 삶의 근력이 없게 마련이었다. 하여 저 솔로몬이 떠들었던, 모든 영화(榮華)가 다 부질없고 헛되도다,는 말처럼 부질없고 헛된 게 없었다. 넘치는 잔과 배부름의 여가(餘假)와 권태를 한번도 맛보지 못한 이들의 마음을 바늘 끝만큼도 짐작하지 못한 소리였다. 그 뇌까림은, 영화가 부질없음을 깨닫기 위해서는, 풍요가 넘실대는 그 강물에 빠져 허우적대 보기 전에는 수천 수만의 말씀이 다 걸레 조각이었다. 아프리카 원주민에게 어떻게 얼음의 맛을 설명할 수 있을까. 손을 담가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들투성인데, 그 말 외에 어떤 것이 삶을 설명할 수 있을까. (21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애도 일기
롤랑 바르트 지음, 김진영 옮김 / 이순(웅진)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애도일기』 롤랑 바르트 / 이순

슬픔이라 하기에도 모자란

 

 

 

 

  책을 읽고 나서

 

 사랑하는 사람을 한순간에 잃는 슬픔이란 어떠할까.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이 감정은 슬픔이라고 하기에도 모자라며, 세상의 수많은 감정 중에서도 가장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일 것 같다. 물론, 나는 그것을 아직 '상상할 수밖에 없는' 시점에 놓여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에서 죽음으로 떠난 적도 없거니와, 나와 직접 관계하던 이가 떠나간 적도 없다. 그리고 이전의 수많은 죽음 - 편찮으셔서 돌아가셨다는 외할아버지의 경우- 도 내가 아주 어릴 때 혹은 태어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러한 점에서는 행운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의 곁에 있는 사람들이 떠나가는 두려움은 너무나 크다. 이런 두려움은 절대 누구도 적응할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롤랑의 마망(엄마)이 그의 곁에서 떠나간 뒤 날짜와 함께 써 내려간 이 기록은 어떤 수정도 거치지 않은 아주 날 것의 글로 보인다. 제목에 붙여진 '일기'처럼 각각의 순간마다 떠오르는 기억의 편린들을 그대로 적어낸 글은 너무나 솔직해서 애달프다. 이 책, 『애도일기』를 중심으로, 롤랑은 다른 작품들에 애도와 스스로에 대한 위안을 쏟으며 글쓰기에 열중했다고 한다. 그에게 문학은, 책 속에서도 언급했듯, '단 하나뿐인 고결함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글쓰기에 관한 한, 어떤 효과가 있다고 깊게 믿고 있는 것 중 하나는 가장 순수하고, 손쉽게 할 수 있는 치료제라는 것이다. 헤세는 정신적 고통을 위해 수많은 소설에 자신을 투영하며 글을 썼고, 하루키는 상실의 아픔을 자신의 펜촉에 그대로 녹여놓았다. 그리고 수많은 작가의 자전적 작품에서도 이러한 것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롤랑은, 이 글쓰기로부터 치유를 얻을 수 있었을까 물어본다면, 확실히 대답할 수가 없다. 자신을 파괴하는 모든 것 중에서도, 사랑하던 사람의 죽음과 그것을 잊고 살아가야 한다는 부담감은 어떤 일보다 절절하고 애달픈 것이기 때문이다. (아, 갑자기 세월호가 떠오른다.)

 

 

 우리가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을 잃고 그 사람 없이도 잘 살아간다면,

 그건 우리가 그 사람을, 자기가 믿었던 것과는 달리, 그렇게 많이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까 ……? 

 

 슬픔의 정도에 대하여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며, 크나큰 슬픔을 잊으려는 몸부림이 어떤 의미라고 규정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풀어낸, 롤랑을 괴롭히던 생각들 - 좌절감, 허탈감, 무미건조함, 우울함, 그리고 마망의 죽음 후 자신의 위선적인 행동에 대한 회의감 - 은 결국 나에게 '사랑'이란 감정으로 치환되어 다가왔다. "내 슬픔은 사랑의 끈이 끊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이, 그리고 생생하고 집요한 '애도'의 기록이 결국 사랑의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에. 혹은, 그토록 간절한 사랑의 절규를 보는 이 마음은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힘든 나의 합리화일지도 모르겠다.

 

 

 

 

 

Written by. 리니

영미 에세이/ 애도 시/ 삶과 죽음, 그리고 슬픔 

소장하고 있는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은 아마도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다 (어쩐지 그런 것 같다). 나의 슬픔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하지만 한 사람이 직접 당한 슬픔의 타격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측정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이 우습고도 말도 안 되는 시도). (20쪽)

…… 그녀는 죽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완전하게 파괴되지 않은 채로 살아 있다. 이 사실은 무얼 말하는 걸까. 그건 내가 살기로 결심했다는 것, 미친 것처럼, 정신이 다 나가버릴 정도로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사라지지 않는 건, 그 불안으로부터 한 발짝도 비켜날 수 없는 건 바로 그 때문이리라. (31쪽)

나는 이제 가는 곳마다, 카페에서나, 거리에서나, 만나는 사람들 하나하나를 결국에는 죽을 수밖에 없음이라는 시선으로, 그러니까 그들 모두를 죽어야 하는 존재들로 바라본다. - 그런데 그 사실만큼이나 분명하게 나는 또한 알고 있다, 그들이 그 사실을 결코 알고 있지 못하다는 걸. (62쪽)

내가 너무도 사랑했었고 너무 사랑하고 있는 이들이, 내가 죽고 또 그들보다 오래 살았던 이들마저 죽고 난 뒤에는, 이 세상에서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말 거라면,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나는 죽어서도 계속 기억되어야 할 필요가 있고, 내가 살았던 흔적을 세상에 남겨둘 필요가 있을까? 마망에 대한 기억이 나와 그녀를 알았던 이들이 죽은 뒤에도 세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면, 내가 죽은 뒤에도 기억되어 차갑고도 위선적인 역사의 어딘가에서 계속 살아남게 된다는 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는 나 혼자서만 "기념비"가 되고 싶지는 않다. (204쪽)


그녀의 죽음 이후, 그 무언가를 새롭게 "꾸미고 만들어가는 일"이 싫다. 그런데 글쓰기는 예외다. 그건 왜일까? 문학, 그것은 내게 단 하나뿐인 고결함의 영역이다. (마망이 그랬던 것처럼). (23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존 버거 지음, 강수정 옮김 / 열화당 / 200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존 버거 / 열화당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기억창고 

 

 

 

 

  책을 읽고 나서

 우리가 거닐었던 모든 공간과 우리가 만지던 모든 사물은 깊이가 불분명한 기억의 항아리처럼 존재한다. 누군가의 기억이 켜켜이 쌓여있는 그곳에, 나의 기억도 살포시 얹어 놓고, 그 흔적들을 기록한다. 그리고 그것을 여는 순간, 다음에 거쳐 가는 사람들의 생에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나에게는 수많은 사람이 거쳐 가는 동네 거리가 그렇고,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사물들과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책들이 그렇다. 나는 실제로 중고 책에서 꽤 의미 있는, 누군가의 생의 기록을 발견한 적이 있다. 내게도 인생의 책이 돼버린 한국 작가의 소설 맨 앞 페이지에서, 누군가가 또 누군가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발견했던 것이었다. "사는 게 별거냐, 잘 먹고 잘 웃고 잘 살자."라는 메시지는 가볍게 던지는 말 한마디였지만, 꾹꾹 볼펜으로 눌러 쓴 글씨에 생의 가벼움과 무거움을 흠뻑 담고 있어, 그 책을 다시 누군가에게 선물한 지금의 나에게도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있다.

 

 리스본, 제네바, 크라쿠프…… 그리고 마드리드까지의 여정을 담은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은 기억과 흔적에 관한 책이다. 분야는 소설이지만 에세이로도 읽힌다. 중간에 뜬금없이 등장하는 '죽은 이들이 기억하는 과일들'이라는 한 묶음의 글은 지금 읽고 있는 책의 장르를 다시 확인하게 하고 앞표지를 왔다 갔다 하게 한다. 하지만 의심은 뒤로하고 그저 읽어본다. 작가는 소설 속에 투영되어 또 다른 ‘존’의 모습으로 길을 걷고, 서로 다른 매력을 뿜고 있는 도시의 장면들을 관찰하며,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한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스승, 까마득한 옛날에나 존재했을 선사시대의 사람들까지. 그리고 그 대화와 서술 속에 작가가 사랑하고 고민하는 것들이 한 꺼풀씩 드러난다.

 

 

, 인생이라는 건 본질적으로 선을 긋는 문제이고, 선을 어디에 그을 것인지는 각자가 정해야 해. 다른 사람의 선을 대신 그어줄 수는 없어. 물론 시도는 해 볼 수 있지만, 그래 봐야 소용없는 일이야. 다른 사람이 정해 놓은 규칙을 지키는 것과 삶을 존중하는 건 같지 않아. 그리고 삶을 존중하려면 선을 그어야 해.

그래서 시간은 중요하지 않고 장소는 그렇다는 거예요? 내가 다시 물었다.

, 이건 그냥 아무 장소가 아니라 만남의 장소란다. 이제 전차가 다니는 도시는 많지 않잖니. 여기서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어. 밤에 몇 시간만 빼고. (16)

 

 

 그들을 만나 ‘존’은 묻는다. 가장 사소한 질문부터, 다소 무거운 질문까지. 그들을 자신과 연결해주는 특별한 이 공간 속에서, ‘존’은 자신의 삶 속으로 스며드는 헤아릴 수 없는 생(生)들을 느낀다. 잊어버린 순수함, 소중한 기억, 누군가의 에피소드, 한 번쯤은 귀에 들어왔었던 익숙한 소리를.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에서 죽은 자들의 것이지만 숨을 쉬며 살아있는 것들을 통해, 어둠 속의 얇디얇은 희망을 배운다. 선을 긋는 인생의 문제, 수많은 사람의 얽히고 얽힌, 굵고 얇은 선들을 피해 나만의 색깔로 빛나는 한 획을 그어 나가기 위한 희망 말이다.

 또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한입 베어 물던 신선한 과일들을 떠올리게 하는 몇 토막의 글은 짧지만 강한 인상으로 남는다. 뒤이어 그 과일들은, 낡디낡은 어떤 사물이 되고, 기억 속에 존재하는 특별한 사건을 떠올리는 매개체가 된다. 나의 모든 오감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기억 창고가 된다. 소설의 끝, 누군가의 입을 빌려 "네가 찾아낸 것만을 쓰렴"이라고 답하는 장면까지의 여정은 분명 작가가 소유하는 기억이지만, 어떤 통로를 거쳐 나에게로 들어온다. 누군가의 인생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찌릿한 감정을 선물해준다는 생각과 함께.

 

 
 
 

 

Written by. 리니

영미 소설/ 기억과 공간, 흔적들

소장하고 있는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하얀 나비 두 마리가 어머니 머리 위를 맴돌았다. 이만한 높이의 수도교 위에는 나비가 꼬일 만한 게 별로 없으니 어머니를 따라 온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처음은 탄생이라 생각하지 않을까요? 내가 물었다.

그게 일반적인 오류지.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너도 그 함정에 빠졌구나!

그러니까 모든 게 죽음으로부터 시작됐다는 말씀이세요?

바로 그거야. 그리고 탄생이 뒤를 따랐어. 탄생이 일어난 건 - 그게 탄생이 있는 이유인데 - 더도 덜도 아닌 처음에, 그러니까 죽음이 있은 후에, 손상된 것들을 고칠 기회를 제공받았기 때문이야. 그게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란다. 존. 고치려고.

하지만 진짜로 여기에 계신 건 아니잖아요?

너는 어쩌면 그렇게 멍청할 수 있니? 우리 - 우리 말이야 - 우리는 모두 여기 있는 거야. 너나 살아 있는 다른 사람들이 여기 있는 것처럼. 너희와 우리, 우리는 망가진 것을 조금이라도 고치기 위해 여기 있는 거란다. 우리가 생겨난 이유는 바로 그거야.

생겨났다고요?

존재하게 됐다고.

아무도 뭔가를 선택할 수 없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뭐든 원하는 대로 선택하렴. 네가 할 수 없는 건 모든 것을 희망하는 거야. (59쪽)


책을 돌려줄 때면 그와 더 가까워진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그가 긴 인생을 살아오며 읽은 것을 그만큼 나도 더 알게 됐기 때문이었다. 책은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었다. 한 책이 다른 책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때도 많았다. 조지 오웰의 『파리와 런던에서의 밑바닥 생활』을 읽은 후엔 『카탈로니아 찬가』가 읽고 싶어졌다.

스페인 내전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려준 사람도 켄이었다. 아물지 않은 상처지. 그가 말했다. 그 상처를 지혈시킬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 `지혈`이라는 말을 직접 듣기로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술집에서 당구를 치던 중이었다. 당구봉에 초크 바르는 거 잊지마.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94쪽)

내가 글쓰기를 처음 배운 건 지금 마드리드 리츠 호텔 라운지에 앉아 파슬리로 장식한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 타일러 선생님의 녹색 오두막에서였다. 글자를 그리는 법은 유치원에서 이미 배운 후였다. A부터 Z까지 전부. 그 글자들은 사마귀나 모반이나 가짜 점처럼, 내가 좋아했던 릴리 선생님의 날렵하고 예쁘고 둥글둥글한 몸의 일부였다. 하지만 그린헛에 간 첫날 타일러 선생님이 지적했듯이, 글자를 그리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은 달랐다. 글쓰기에는 철자법, 직선, 띄어쓰기, 적당한 기울기, 여백, 크기, 가독성, 펜촉을 깔끔하게 다듬는 것, 잉크가 절대로 번지지 않게 하는 것, 그리고 연습장마다 예법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 등이 모두 포함된다. (150쪽)



우리를 한데 묶어준 건 뭐였을까? 피상적으로 볼 때는 호기심이었다. 우리는 나이를 포함한 거의 모든 것이 어떻게 감춰 볼 도리 없이 달랐다. 우리 사이에는 처음으로 하는 게 너무 많았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우리를 한데 묶어준 건 같은 슬픔에 대한 말 없는 이해였다. 자기 연민은 없었다. 내게서 그런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였다면 그녀는 그걸 뿌리채 뽑아 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앞에도 말했지만 나는 그녀의 확신을 사랑했고, 그것과 자기 연민은 양립할 수 없었다. 보름달을 보고 미친듯이 짖어대는 개의 울부짖음 같은 슬픔.

이유는 달랐지만 우리 둘은 희망을 품고 살기 위해선 스타일이 필요불가결하며, 사람이란 희망을 가지고 살거나 아니면 절망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중간이란 없었다.

스타일? 어떤 가벼움. 어떤 행동이나 반응을 배제시키는 부끄러움. 어떤 우아한 제안.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어떤 멜로디를 기대할 수 있으며, 때로는 찾을 수도 있으리라는 가정. 하지만 스타일은 희박하다. 그것은 안으로부터 나온다. 그것은 찾아 나선다고 손에 넣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스타일과 패션이 같은 꿈을 공유할 수는 있어도, 그 둘은 서로 다르게 창조된다. 스타일은 보이지 않는 약속이다. 그것이 인고의 기질과 세월을 대하는 무던한 자세를 요구하고 키우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스타일은 음악과 매우 흡사하다. (168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장 사소한 구원 - 70대 노교수와 30대 청춘이 주고받은 서른두 통의 편지
라종일.김현진 지음 / 알마 / 201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장 사소한 구원』 라종일, 김현진 / 알마

답 없는 청춘을 위한 가장 소중한 구원

 

 

 

 

  책을 읽고 나서

 간간이 친구와 얘기를 나눈다. "전화해도 돼?" 혹은 "나 고민이 있어"라는 말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대개 고민 상담이다. 청춘, 그리고 사회 초년생이라는 경계 안에서 나타날 수 있는 고민을 털어놓고, 우리는 서로 될 수 있는 한 좋은 방법으로 해결하기를 바라는 마음의 조언을 남긴다. 하지만 역시 명쾌한 답은 나오지 않는다. 비슷한 출발선에서 달려, 비슷한 거리에 머물러있는 우리는 서로에게 '원할 것 같은' 답을 내어줄 수밖에 없고, 선택 또한 자신의 몫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도 아직 선택의 끝을, 결과를 경험해보지 못한 우리는 바라던 정도의 위안을 얻고, 다시 집에 돌아가 같은 고민을 곱씹고 또 곱씹는다. 이럴 땐, 제대로 인생을 경험해본 누군가의 말 한마디라도 있었음 좋겠다. 답을 내려주진 않더라도, 약간의 힌트라도 누가 안겨줄 수 있는 사람이 없을까? '가장 사소한 구원'이라도 필요로 하는 애송이 같은 청춘에게 말이다.

꽤 여러 번이나 답답함을 맛보고 나니, 속마음을 진심으로 내보일 '인생 선배'가 있다면 정말 행복한 일이라는 생각이 부쩍 드는 요즘이다. 모든 것을 터놓을 만큼 가깝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직접 대면해서도 좋지만,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마음을 꾹꾹 눌러 담은 서신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여기, 나의 부러움을 한가득 담은 책 한 권이 있다. ‘70대 노교수와 30대 청춘이 주고받은 편지를 엮은 『가장 사소한 구원』이다.

궁지에 몰린 쥐가 도망칠 틈새를 찾아내듯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사소한 구원에 매달렸다. 그것이 선생님과의 서신 교환이었다. 뒤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선생님은 고통을 활자로 옮기라며 단호하게 이야기하셨다. "이야기된 고통은 더이상 고통이 아니다. 당신이 그 고통들을 글로 쓸 수 있을 때 당신은 비로소 낫게 될 것이다." (7쪽)

 돈도 빽도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이자 에세이스트 김현진이 보내는 ‘은밀한 연서’는 차근차근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라종일 교수에게 닿는다. 자기 비하와 한탄이 가득한 청춘의 편지에 답하는 노교수의 회신에는 "기다렸다."라는 따스한 말과 경험과 연륜에서 우러나온 조언이 함께한다. 그들은 이야기를 나눈다. 행복에 대해, 어른이 되는 것에 대해, 젊은이들의 미래에 대해, 세상에 대해…….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청춘이 "훌륭한 어른이 되기 위해 꼭 갖춰야 하는 게 뭘까요?"라고 물으면, 스승은 "왜 어른이 되려고 합니까?"라고 다시 묻는다. 청춘이 "우리 사회 청년들의 곁길이 너무 없는 것 같습니다."라고 조언을 구하면, 스승은 "에덴의 낙원 이후에 세상이 자기에게 친절하리라는 기대를 하면 안 된다."라는 따끔한 말을 던져주는 것이다. 질문이 질문을 부르고, 당연하게 답이 나와 있을 것 같은 물음에 또 다른 의문이 생기는 이 스릴 있는 서신 교환은 '어쩌면 우리들의 이야기'이기에 현실과 맞물려 뜨거운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저는 늘 당신 편입니다"하고 모든 이야기를 마음을 다해 들어주고, 투정 섞인 신세 한탄에 내가 보지 못한 이면을 가르쳐주는 누군가가 못내 부럽다는 생각이 들 때쯤, 편지의 수신자를 나에게로 돌려보기 시작한다. '어쩌면 우리들의 이야기'이고, '어쩌면 나의 이야기'이기에 허공에 질문을 던져보고, 스승의 따뜻한 말들을 되짚어 읽어본다. '가장 사소한 구원'이라 이름 붙인 그들의 서신이 나에게 닿아 '가장 소중한 구원'이 될 때까지.

 

Written by. 리니

한국 에세이/ 편지, 서간집 

소장하고 있는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선생님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여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요즘 그렇게 할 수 있는 청년들이 몇이나 될까요. 오히려 사회가 요구하는 규칙을 온몸을 다해 준수한 다음, 그것을 자신의 선택이라 생각하고 자긍심을 가지면서 경쟁이 극도로 격화된 사회에 적응해나가는 것이 젊은 세대의 생존법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 주류 사회의 길에서 벗어난, 혹은 낙오되어버린 저 같은 사람은 그저 그 광경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지만, 한때 그 안에 소속되어 있었던 사람으로서, 또 한사람의 (늙은?) 젊은이로서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자기 스스로 생각해 선택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많습니다. (71쪽)

그런데 얼마 전 "우리나라의 앞날은 십 년 후 필리핀처럼 될 것이다."라는 글을 봤습니다. 지금처럼 자기계발로 역량을 높여 어떻게든 위로 올라가려는 시대는 지금이 마지막이고, 결국 계급이 고착화될 것이라는 예상이었습니다. 그 글을 읽고 선생님께 질문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사실 저도 이제 우리나라의 `계급`은 완전히 고착화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사교육 문제도 그렇고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대는 이제 저물어버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첫 끗발이 개 끗발"이라는 좀 천한 소리까지 동원하자면,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대학을 가느냐가 그 사람 인생 절반 정도는 결정해버리는 것 같아요. (120쪽)

우리가 어려운 일들은 잘 헤쳐나왔으니 앞으로도 잘될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앞으로 닥쳐오는 문제들은 어쩌면 이제까지 당면했던 문제들보다 결코 쉽지 않은 것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이런 문제들을 불합리한 장애 없이 해결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 여건은 마련되어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공동의 공적인 사안에 관심을 갖고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사적인 존재에만 안주하지 말고 공적인 인간으로서 함께 참여하고 함께 노력할 준비를 갖춰야 합니다. (140쪽)

제가 너무 낙관적인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렇게 낙관적이지도 않고 더구나 우리나라가 훌륭하다는 생각도 않습니다. 제가 진보이고 발전이라고 생각하는 것 이면에는 구석구석 어려운 일들이 도사리고 있겠지요. 그뿐 아니라 우리 사회를 비판적인 안목으로 날카롭게 바라보고, 그 내부의 부정적인 면을 파헤치는 것도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세상이 조금씩이라도 좋아지겠지요. 적어도 "부러울 것이 없다"든지 "아름다운 것만 보라"는 것보다는 좋은 일입니다. 단지 여러 곳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보다 보면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이 바라는 대로 모든 것을 실현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이 자기가 갖고 있는 것, 가족, 친구들, 자기가 사는 세상 등을 우선 귀하게 여기고 부족한 것을 고쳐 나가는게 좋아 보입니다. 항상 현실에 비판적인 안목을 유지하면서 개혁과 개선을 추구하는 것만큼이나 이미 이뤄놓은 것을 평가하고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리라 여깁니다. 그러나 그런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요. (16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