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자들 창비청소년문학 76
김남중 지음 / 창비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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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는 이런 가상의 사회를 배경으로 한 디스토피아 소설을 줄곧 읽곤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흥미가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배경이나 전개 방향이나 갈등 양상 같은 것들이 더는 새롭게 느껴지지 않을 때였다. 재미있게 끝까지 읽지만 남는 게 없는 듯한 개운하지 않은 느낌이 뒤따라왔다. 그러니 이 책에 대한 기대감과 불안감은 50대 50이었다. 기대감은 의외로 청소년 소설이 사랑(성욕을 포함한) 이라는 소재로 엮였다는 점에서 왔다.

 『해방자들』에는 몇 가지 흥미로운 설정이 있다. 이는 소설의 배경이 여섯 국가로 되어 있고, 이 국가의 특장점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국가들은 가장 여유로운 삶을 사는 '렌막'이라는 국가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농업, 수산업, 공업 등의 기술들을 가진 각국의 시민은 자격시험을 통해 렌막의 영주권을 얻는다. 주인공인 '지니'에게도 렌막은 꿈의 도시다. 가난과 위험에 찌든 도시를 벗어나 엄마와는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그래서 밀입국을 시도하고, 그저 풍요롭게만 보였던 렌막이라는 국가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다. 바로, 사랑을 통제당한다는 것. 렌막의 시민들은 복합 예방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아 성욕을 억제당하고, 낳을 수 있는 아이의 수도 부富에 따라 제한된다. 그러한 렌막에 사는 '소우'라는 또 다른 주인공은 주삿바늘이 무서워 예방주사를 맞지 않았다가 곤혹스러운 경험을 한다. 그는 첫사랑에 실패하고, 우연히 '지니'를 만난다.


  한 평론가가 작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모두가 '설마 거기까지는'이라고 안심하고 있을 때, 기습적으로 경계를 넘는 작가"라고. 흥미로운 설정은 당연히 특이한 상황을 낳는다. 밀입국한 여성들을 모아 만든 유흥업소는, 돈이 어느 정도 있지만 아기를 자유롭게 낳을만한 정도는 아닌 남성들에게 '아기 돌보기 체험'을 제공한다. 하룻밤 아빠가 된 남성들은 아기에게 우유를 먹이고, 기저귀를 갈며 환희와도 같은 감정을 느낀다. 나는 이 장면에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일반적인 경계를 넘은 상상은 파격이었다.


 아니, 이 소설 자체가 파격일지 몰랐다. '지니'와 '소우' 의 사랑이 주가 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이는 산뜻하고 가볍게 표현된다. 대신에 '사랑'이라는 감정 대신, 그것을 뺏긴 사람들의 행동이 강렬하고 속도감 있게 진행된다. 자유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과, 이를 탄압하는 국가의 모습은 우리에게 어떤 장면이나 상황을 연상케한다. "그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190쪽)"라고 되묻는 모습은 성인인 나에게도 낯설지 않은 질문이었으며, 교훈은 노골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좋았다. 단,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소설이어선지, 분량과 이야기 면에서 아쉬운 점이 있었다. 유독 눈에 띄는 다양하고 독특한 설정, 재미난 인물들로 진행된 이 이야기가 이렇게 끝나기는 조금 서운한 마음이다.

 

 

52쪽,
지니가 분유를 타서 다미 아빠에게 건넸다. 다미 아빠가 아기를 안고 분유를 먹였다. 배가 고팠던 아기는 힘차게 젖병 꼭지를 빨았다. 꼴깍꼴깍 분유가 넘어갔다. 투명한 분유병을 통해 꼭지를 빠는 아기의 입이 동그랗게 보였다. 다미 아빠는 황홀한 눈으로 아기를 바라보았다. 지니는 그런 다미 아빠를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받은 돈을 차마 주머니에 넣을 수가 없었다.


123쪽,
"사실 고맙기도 했어. 이성 생각이 나면 더 힘들었을 테니까. 성욕이라는 건 엄청난 족쇄거든. 수염처럼 깎아도 깎아도 날마다 자라나지. 아침에 면도를 해도 잠시뿐이고 면도를 하지 않으면 하루 종일 개운하지 않지. 그렇지만 말이야, 우리가 놓친 게 있어. 성욕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사랑마저 포기하면 안 되는 거였어. 성욕이 다 사랑은 아니지만 사랑에는 성욕도 포함돼 있거든. 우리는 불필요한 성욕을 제거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꼭 필요한 사랑까지 국가에 내줘 버린거야."

190쪽,
소우의 얼굴을 본 순간 지니는 어떻게든 살고 싶었다. 소우와 오래오래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렇지만 소우의 뒤에는 진다이가 버티고 있었고 자신은 여전히 밀입국자 신분이었다. 소우를 따라간다는 것은 결국 진다이의 손으로 들어가 아빠가 누군지도 모를 아기를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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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7-02-24 0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ㅡ 잘 읽고 가요 . 가상세계 ㅡ 저도 그리 좋아는 않는데 ㅡ이 책은 몰입또 좋더라고요! ^^

시읽는리니 2017-03-04 02:05   좋아요 1 | URL
그장소님, 안녕하세요. ^^ 몰입이 좋아서 술술 읽히는 소설이었습니다!

[그장소] 2017-03-04 08:28   좋아요 0 | URL
네에~ 정말 재미있었어요 . 세계관도 흥미롭고요!^^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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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게 뭔 쓸모가 있어?" 딱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런 식의 말이었다. 가까운 사람에게 듣는 이 말은 살짝 충격이긴 했지만 내가 기분 나빠할까 봐 주저하는 어조가 느껴져서 뭐라 할 수가 없었다. 반박할 타이밍도 없었고, 반박할만한 것도 아니었다. 이미 언제든 예상했던 말이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나에 대해서 한 말이었다. 나는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닌, 남의 책을 읽고 수없이 끄적인다. 그렇다고 어떤 상을 받는 것도 아니고 좋아하는 것을 하는 취미에 불과하다. 이런 쓸모없어 (보이는) 일을 왜 하는지 나도 가끔은 답하기 힘들다. 어느 날 갑자기 강렬한 충동으로 찾아온 어떤 목적을 위해 읽게 될지도 모르고, 별것 아닌 이 행위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지만, 일단은 자연스럽게 내 생활의 일부가 돼버려 시간에 쫓길지언정 절대로 끊을 수는 없게 되었다.

 


 나는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들 때까지.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 뿐 아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 그런 식으로 나는 단 한 달 만에 2톤의 책을 압축한다. (10쪽)

 


 고작 몇 년 되지 않은 이 행위를 『너무 시끄러운 고독』 속의 '한탸'와 비교하면 나는 너무나 초라해진다. 삼십오 년 동안 폐지압축공으로 일해온 한탸는 어둡고 답답한 지하실에서 다양한 형태의 폐지를 압축한다. 그러나 매일 트럭에 실려 들어오는 꾸러미 속에는 빛나는 것들이 있다. "꾸러미마다 한복판에 『파우스트』나 『돈 카를로스』 같은 책이 활짝 펼쳐진 채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나뿐이다. (15쪽)" 그는 놀랍게 현존하는 '쓰레기 더미 속의 문학작품'을 정리하느라 쌓여버린 폐지 더미들에 소장에게 핀잔을 들으면서도 멈출 수 없다. 전쟁과 나치 시대, 비밀스럽게 들어온 책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오직 그뿐이다. 그 아름다운 세계를. 압축기에 눌려 존재를 잃게 될 문학들을 만나는 그의 행위는 너무나 숭고하다.

 


 조용하고 구석진 지하실의 고독을 선택한 한탸에게, 우연히 만난 책의 세상은 시끌벅적하다. 세상이 고독하다는 것을 알게 해준 압축기, 세상이 시끌벅적하지만 달콤하다는 것을 알게 해준 책은 그의 삶 그 자체다. 이 삶이 무너졌을 때의 순간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내용이 짧은 만큼 다른 시각으로 해석할 여지도 충분히 있는 책이지만, 나는 한탸의 삶(어쩌면 작가의 삶이었을)에 진한 연민을 보내며 그의 '러브스토리'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체코라는 나라와 전쟁 등 끝없는 억압 속에서, 꿋꿋이 체코어로 책을 써온 작가의 삶이 소설로 현현된 것이었을지도.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주인공의 삶에 매료될 것이다.

 "프로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 (근원으로의 전진)과 '레그레수스 아드 푸투룸 (미래로의 후퇴)", 행복이라는 불행, 너무 시끄러운 고독! 온갖 모순된 것들을 따져보기에 인생은 무지 짧다. 사라질 것들에 슬퍼하고, 비록 일상은 힘들지라도 소중한 것들에 기뻐하는 순간들이기를.

 

 

 

69쪽,
내가 보는 세상만사는 동시성을 띤 왕복운동으로 활기를 띤다. 일제히 전진하는가 싶다가도 느닷없이 후퇴한다. 대장간 풀무가 그렇고, 붉은색과 녹색 버튼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내 압축기가 그렇다. 만사는 절룩거리며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지는데, 그 덕분에 세상은 절름발이 신세를 면하게 된다.

80쪽,
그녀가 치맛자락에 빵 부스러기를 모아 담아 경건한 몸짓으로 불속에 던져 넣었다. 그러고 나면 우리는 불이 모두 꺼진 방안에 누워 천장에 눈길을 고정한 채 빛과 그림자가 춤추듯 일렁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 위에 놓인 맥주 단지를 집어들라치면 해초와 수중식물로 가득한 수족관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아니면 보름달 밤에 깊은 숲속에서 흔들리는 그림자들과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나는 맥주를 마시며 알몸의 집시 여자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흰자위가 반짝이는 눈으로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88쪽,
폐지 더미 속에서 희귀한 서적의 책등과 표지를 발견하는 그 놀라운 순간이 내게는 언제나 축제나 다름없었는데 말이다. 그 즉시 책을 집어들지는 않았다. 플란넬 헝겊을 집어들고 우선 내 압축기의 굴대를 닦은 뒤 내 힘을 다스리며 종이 더미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러고 나서야 그 멋진 책을 펼쳐 들면, 제대 앞에 선 신부新婦의 부케처럼 책이 내 손가락 사이에서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127쪽,
나는 이러고 있는 게 좋다. 저녁 시간에 레트나 대로를 걸어다니는 게 좋다. 공원 냄새, 싱그러운 풀과 나뭇잎 냄새가 강물에 실려와 이제 도로 위에 떠돈다. 나는 ‘부베니체크‘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맥주 한 잔을 시킨 뒤 멍하니 앉아 있다…… 2톤의 책이 잠든 내 머리를 위협하며 호시탐탐 나를 덮치려고 한다. 스스로 걸어놓은 다모클레스의 검이다. 나는 형편없는 성적표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다. 술잔 안의 거품이 도깨비불처럼 표면 위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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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개를 베다
윤성희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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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도 변함없이 어제와 같았던 것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어제와 달라진 것들을 생각한다. 시큰한 눈에 안경 대신 렌즈를 끼면서 시야가 맑아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 하는 것. 키보드 커버 속에 먼지가 어떻게 앉았는지 의아해하면서 어떻게 닦을지를 고민하는 것. 책장에 채워진 책을 눈대중으로 세면서 내가 이 책을 다 읽을 수 있는 날을 상상하는 것. 부드럽고 푹신한 베개를 접어서 목 뒤에 넣어 눕고 오늘 있었던 일과, 먹었던 반찬들과 나눴던 대화들과 감정들을 회상하는 것.

 이런 사소한 것들을 소재로 소설을 만들기란 어떨까. 공교롭게도 나는 최근에 평범한 소재로 평범한 일상을 이야기하는 소설을 두 권 읽었었는데, 윤성희의 『베개를 베다』를 읽고 나서 - 단순 취향일지도 모르지만 - 이야기와 작가의 역량으로 만들어진 한 끗 차이를 경험할 수 있었다.


 사실 내게 있던 편견은 소설이란 무엇인가 특별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건 독자의 입장이지만). 이야기든 컨셉이든 문장이든 무엇인가 독특한 연출이 필요한 것이라 여겼다. 그래야 재미가 있고 공감을 사며 독자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윤성희의 소설을 처음 만나는 느낌은 살짝 쇼크였다. 그것은 이 소설이 아주 특이한 것을 지니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평범하고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쉴 새 없이 내뱉는 이 이야기가 오히려 독특함을 자아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그렇게 흘러가는 평범한 일상들을 세밀하고 빽빽하게, 이를테면 엄마와 백숙을 먹으며 했던 말들 ('못생겼다고 말해줘')과 낮술을 먹고 잠에서 깨 창밖에 있는 아이들을 세는 모습들과 ('베개를 베다') 놀러 온 친구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인터넷으로 검색하는 ('모서리') 것들 같은, 도무지 특별하다고 볼 수 없는 아주 평범한 일상들을 소설은 그린다. 그것이 지루하지 않고 너무도 편안하고 아름답게 읽히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지만, 소설의 백미는 또 있다. 담담한 일상 속에 잔금처럼 그어져 있는 상처들이 감춰져 있다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쓸데없는 짓을 하면서 행복해하는지 알면 깜짝 놀랄 거예요." (87쪽, 휴가)

"난 김민수가 괴롭힐 때마다 스머프 엉덩이를 상상했어." (139쪽, 팔 길이만큼의 세계)

"새벽은 어제와 오늘이 겹쳐지는 시간. 그래서 그 시간에 술이 가장 맛있는 거야." (201쪽, 모서리)


 어떤 고통스러운 순간이 있어도 시간이 지나 잊어가며 살아가듯이, 그 순간들이 떠올라도 꾹꾹 참고 견디며 살아가듯이. 그저 남에게는 별일 없이 사는 사람처럼, 살아가는 모습들이 따뜻하게 다가왔다. 언니가 쓴 편지보다 형부가 쓴 편지가 더 많아진다든가 (50쪽, 못생겼다고 말해줘) 아빠가 처음부터 도망갈 생각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다거나 (166쪽, 낮술), 그것들이 죽음이나 상실, 그 어떤 부정적인 것들을 의미하더라도 소설은 아주 소소한 장면들로 살아갈 힘을 선물한다. 그리고 멋 부리지 않은 문장들 속에서 돋보이는 예쁜 말들이 위로가 된다.


 끝으로 너무나 공감이 되었던 해설 속 한 문장을 덧붙인다. 그의 소설을 앞으로도 계속 읽을 것을 약속하면서.

 "윤성희의 이야기는 여전히, '소설' '문학' 대신에 '소설적인 것' '문학적인 것'등을 상대할 필요는 없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소설이지 소설적인 것이 아니고 문학이지 문학적인 것이 아니다." (271쪽, 해설 - 최대 소설의 기도)

 

 

43쪽, 못생겼다고 말해줘
니가 못생겨서 그래. 언니는 말했다. 니가 더 못생겼어. 내가 말했다. 쌍둥이 자매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못생겼다고 싸우는 걸 형부는 재미있어했다. 그때마다 형부는 늙으면 더 못생겨질 텐데, 하고 놀렸다. 그건 세상의 곱지 않은 시선을 견디는 우리만의 주문이었다. 넌 너무 못생겼어. 넌 너무 못됐어. 넌 너무 뚱뚱해. 그렇게 둘이 서로에게 욕을 하면서 우리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62쪽, 날씨 이야기
남편은 늘 늦었고, 나는 밥을 물에 말아 김치랑 먹었다. 대부분 음식들은 먹기도 전에 유통기한이 지나버렸고 나는 미련없이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러곤 다시 장을 봐서 냉장고를 채웠다. 네번째로 자동차 키를 잃어버린 날, 나는 자동차 바퀴를 걷어차며 화풀이를 했다.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았는데 실패한 기분이 들었다. 실패를 한 적이 없어서 실패한 기분이 들었다.

122쪽, 베개를 베다
나는 장롱을 뒤져 베개를 찾았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굳이 말을 하자면 세제 냄새가 났다. 베갯잇을 벗겨보니 침으로 얼룩진 자국들이 보였다.그제야 내 베개라는 생각이 들었다. 베개를 베다. 내가 좋아하는 말이었다. 받아쓰기를 할 때 나는 아들에게 종종 그 문제를 내곤 했다. 아들은 꼭 베게를 베다, 라고 썼다. 나는 거실에 누워 베개를 베다, 라고 중얼거렸다. 그러면 잠이 왔다. 마법의 주문처럼.

200쪽, 모서리
내가 찍은 사진과 사촌형의 사진을 번갈아 보던 조가 물었다. 그런데 누구야? 나는 우리 집안에서 가장 똑똑했던 사람이라고 말해주었다. 몇 살인데? 스물일곱. 그러자 조가 우리랑 동갑이야? 하고 물었다. 바보. 흑백사진을 보고도 동갑이란 말이 나오다니. 아니. 스물일곱이었어. 이 사진을 찍었을 때. 그러자 조가 사진을 들고는 가로등 아래로 갔다. 가로등 아래에 서서 조는 사진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났다. 그리고 이유 없이 눈물이 나는 내가 창피해서 눈사람을 발로 걷어찼다. 얼었다 녹았다 다시 언 눈사람은 부서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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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기완을 만났다
조해진 지음 / 창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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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엔 그냥 문장 한 줄이었다. 한 시사 주간지에 L이 고백했다고 쓰인. 그것이 그녀를 브뤼쎌로 이끌었다.

  "브뤼쎌에 갈지도 모르겠어요. (…) 거기, 만나야 할 사람이 있을 것 같아요.(13쪽)."  확고한 결심도 아니고, 어쩔 수 없이 끌려들어 간다는 어투도 아닌, 어딘지 모르게 애매한 말로 그녀는 말했다. 그리곤 단지 마음속에서만 '그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고 결심했다.

 

 이니셜 L, 무국적자, 난민, 불법체류자, 탈북자, 이방인 혹은 외톨이…… 그것이 '로기완'이라는 사내에게 붙은 이름들이었다. 생존을 위해 북한 국경을 넘고, 어머니까지 잃어 그 목숨값을 들고 벨기에라는 생소한 나라에 밀입국했다. 자신의 존재도, 길거리의 풍경들도 확연히 다른 그곳을 거닐었다. 떠돌고 떠돌다가 어디론가 흘러갔다.

 정체 모를 연민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자에겐 과하도록 진한 감정이었다. 그녀에게 특히나 연민이란 별것 아닌 감정이었기에 이상했다. 그녀는 형편이 안 좋거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모습을 다큐멘터리로 찍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고통을 글로 전달하는 프로그램의 메인 작가였고, 연민은 습관처럼 흘러가는 감정이었다. 그런 그녀가, 로기완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프로그램에서 만나 남다른 인연을 맺은 '윤주'라는 소녀를 생각하며, 옛 연인과의 기억을 떠올리며, 로기완의 흔적을 밟기 위해 찾아간 곳에서 또 하나의 외로운 사람을 만나기도 하면서. 그녀는 어느새 L이 걷던 그 길을 걷고 있었다. 그 길을 걸으면서 L을 기억했다. 브뤼쎌에 와서 첫 끼를 먹던, 자신이 살고 있던 곳과는 확연히 다른 사람들의 모습과 시선들을 보던, 몸살을 앓고 자신을 괴롭히는 이들에게 저항하던, 울음 짓던, 처음으로 미소를 보이던 L을. 그를 의식하다 보니 어느새 자신의 모습도 보이기 시작했다.


 ​나와 타인의 인생 반경은 똑같을 수가 없기에, 그를 이해하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힘내"라는 말은 때로는 공감한다는 말보다 '너의 말을 잘 들었지만 해줄 말이 없어 미안해'라는 의미로도 쓰이기도 한다. 아파하는 타인의 모든 상황을 알고 있으면서도, 진짜 마음을 알지 못한다. 이해하지 못하니 쉽사리 연민하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의 인생으로 들어가 어떻게든 그를 이해하고 연민하고자 하는 노력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것은 『로기완을 만났다』 라는 이야기처럼 누군가의 인생을 추적하는 일일지도, 누군가가 남긴 일을 이어가는 일일지도, 아니면 그냥 깊은 대화를 하거나,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모습으로도 이야기될 수 있다. 위태롭고 유약하며 비틀거리는  『로기완을 만났다』 속의 사람들을 보고 연민을 느끼고, 어느새 주인공이 로기완을 보고 느꼈던 감정을 따라 하고 있는 내 모습도 아마도 그런 일의 연장선이 아닐까. 타인의 생生을 파고들기로 결심하는 것과 수많은 삶을 담은 문학을 읽는 것은 그 성격이 닮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한 정을 품고 있기에 나는 여전히 책을 읽는다.

 

 

 

13쪽,

고개를 들었다. 내 시선은 그의 피로하고 괴로운 듯한 얼굴을 벗어나 조금은 어두침침한 편집실 전체로 나아갔고, 이내 그 안에 깃들어 있던 우리의 친밀했던 숨소리와 목소리까지 담아냈다. 순간, 모든 것을 화면처럼 남게 하는 인간의 기억 구조가 싫어졌다. 그래서 잊고 싶지 않은 것도 잊고 싶은 것과 함께 드러날 수밖에 없는, 볼륨을 줄여놓아도 고스란히 소리까지 재생되고 마는 그 체계적인 기억의 구조가.

57쪽,

박이 빌려준 아파트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슈트케이스를 현관 앞에 세워두고는 그대로 거실 창가에 놓인 책상 앞에 앉는다. 가방에서 로의 일기를 꺼내 이번만큼은 행간의 의미, 단어와 단어 사이의 여백까지 꿰뚫는 독서를 해보겠다고 다짐한다. 섣불리 연민하지 않기 위하여, 텍스트 외부에서 서성이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내부로 스며들어가 스스로에 대한 가혹한 고통과 뒤섞인 진짜 연민이란 감정을 느껴보기 위해서.

91쪽,

로는 조금 걷다가 멈춰섰고 다시 걷다가 주저앉았다. 수없이 불운을 짐작해온 자의 어깨는 끊임없이 나를 슬프게 했다. 그러나 그 슬픔은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던 가상의 슬픔이었기에 마음의 밑바닥까지 닿지는 않았었다. 그 짐작이 현실이 되었을 때 좌절할 수밖에 없는 사람의 뒷모습은 어느새 구체적인 슬픔으로 바뀌어 내 가슴에 얹어진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로가 다급하게 어디론가 휘적휘적 걸어가고 있다.







113쪽,

파이프오르간 연주가 끝날 때까지 상상 속 로의 눈물은 닿을 듯 닿지 않는다. 너와 내가 타인인 이상 현재의 사간과 느낌을 오해와 오차 없이 나눠가질 수는 없다는 불변의 진리는 자주 나를 괴롭혔지만 가끔은 위안도 되었다. 나의 한계에 대해서 적어도 나만은 침묵할 자격이 있다는 믿음은 그러나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3년 전, 내가 앉아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어깨를 잔뜩 옹송그린 모습으로 온몸을 떨며 오열했을 로의 모습을 상상의 영역에 남겨둔 채, 나는 끝내 젖지 않은 내 메마른 얼굴을 한 손으로 거칠게 쓸어내린다.

166쪽,

존재 자체가 불법인 사람에게 미래는 선택할 수 있는 패가 아니다. 선택하지 않았는데도 선택되어버린 길을 가야 한다는 단순한 의무만이 있을 뿐이다. 매순간 불안해하면서, 사소한 기쁨은 포기하기도 하면서, 절대적으로 안전하지는 않으나 절대적으로 위험한 길보다는 무언가 하나라도 더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을 가고, 걷고, 결국엔 살아남아야 한다는 빈약하지만 회피할 수 없는 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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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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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82년생 김지영도 아닌, 그보다 더 나은(게 맞는지 줄곧 의심하지만) 시대에 태어난 '여자'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넘어갔던 일들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 일들을 회상했다.


 ​우리 엄마는 기가 막히는 시집살이를 했다. 창문에서 뛰어내리고 싶을 때도 있었다고 했다. 이 기가 막힌 시집살이는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분가를 하고, 늦둥이 아들을 낳자 놀랍게도 완화되었다. 가부장적인 제도에 익숙했던 우리 가족의 남자들은 엄마의 일들을 방관했다.

 내가 초등학생 때는 여자아이들의 목을 조르는 장난을 하는 남자아이가 있었고, 어떤 수업 시간에는 50대 남자 선생님이 얇은 막대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여학생들의 가슴 속으로 집어넣곤 했다. 그것을 넣어서 마음을 알아본다는 황당무계한 말을 지껄였다. 성희롱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사실도 몰랐던 아이들은 그를 학교에 찌르지 않았다.

 대학생이 되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할 때는 술 취한 할아버지가 며칠에 걸쳐 계산대에 와서 말을 걸어 경찰에 신고했더니, 찾아온 경찰은 "그냥 이야기를 받아주면 되잖아"라고 이야기했다. 손을 덜덜 떨며 전화를 걸었던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민망해졌다.

 그 밖에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구구절절 말할 필요 없이 한마디로 이야기하고 싶다. "나도 겪고, 보았다"고.

 

 『82년생 김지영』은 대한민국 사회의 여성 차별로 인해 미쳐버린 여자의 이야기를 르포 형식으로 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시절부터, '맘충'이라는 이야기를 듣기까지의 결혼 생활까지, '김지영'이라는 여자가 겪은 모든 이야기를 순서대로 해나간다. 그러다 보니 대한민국 여자들이 느낄 수 있는 차별이 모두 모였다. 믿을 수 없고, 소름 끼치고, 화나고 어이없는 일들의 연속이어서, 진짜 이 모든 것들을 겪은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책을 끝까지 읽으며 내가 모르고 당했던 차별의 장면들을 기억해내면서, 이 책의 목적은 우리나라의 여자들 모두가 '김지영' 씨 같은 우울한 삶을 살고 있다고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김지영 씨가 겪었던 수많은 차별의 일부, 혹은 단 한 가지라도 겪어보거나 목격한 사람들에게 이 부조리한 세상을 인지하게 해주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80년대, 산아 제한정책이 펼쳐지고 여아 낙태가 빈번했던 시대. 소설 속 주인공의 일부이고 전체였던 '김지영 씨들'은 많이도 울었을 것이고, 그나마 페미니즘이란 것이 조금씩 대두하기 시작한 지금도, 여전히 울고 있을 것이다. 소설의 끝, 화자이자 남자인 정신과 전문의는 김지영 씨의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하는 세상이 있다"고. 그러나 뒤이어 그는 자신의 병원에 있는 여직원에 대한 차별적인 발언을 내뱉는다. 결국, 자신과 관계없는 다른 여자들에게는 은연중에 폭력적인 시선을 보이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변화는 너무나 빠르고, 법과 제도가 바뀌어도 사람들의 가치관은 느린 걸음이다. 소설 속에서와, 현실에서, 이 차별을 인지하고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지만, 그것에만 희망을 걸기에는 이 사회가 많이 부족한 듯한 느낌이다. 여성을 바라보는 각자의 시선들이 조금 더 부드러워지기를 바란다.

 


 


25쪽,

할머니의 억양과 눈빛, 고개의 각도와 어깨의 높이, 내쉬고 들이쉬는 숨까지 모두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말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최대한 표현하자면, ‘감히‘ 귀한 내 손자 것에 욕심을 내? 하는 느낌이었다. 남동생과 남동생의 몫은 소중하고 귀해서 아무나 함부로 손대서는 안 되고, 김지영 씨는 그 ‘아무‘보다도 못한 존재인 듯했다. 언니도 비슷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68쪽,

어머니가 여자에게 연락해 택시비라도, 작은 선물이라도, 안 된다면 커피 한잔과 귤 한 봉지라도 전하고 싶다고 했지만 여자는 끝까지 거절했다. 김지영 씨가 직접 인사해야겠다 싶어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여자는 다행이라며 대뜸 학생 잘못이 아니에요, 했다. 세상에는 이상한 남자가 너무 많고, 자신도 많이 겪었다고, 이상한 그들이 문제지 학생은 잘못한 게 없다는 여자의 말을 듣는데 김지영 씨는 갑자기 눈물이 났다. 꺽꺽 울음을 삼키느라 아무 대답도 못하는 김지영 씨에게 전화기 너머의 여자가 덧붙였다.

"근데, 세상에는 좋은 남자가 더 많아요."

(…) 여자가 그렇게 말해 주지 않았다면 아마도 오랫동안 그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132쪽,

"아직은 아빠 성을 따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긴 하지. 엄마 성을 따랐다고 하면 무슨 특별한 사정이 있다고 생각하겠지. 설명하고 정정하고 확인해야 할 일도 많이 생기겠지."

김지영 씨의 말에 정대현 씨는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손으로 ‘아니요‘ 칸에 표시를 하는 김지영 씨의 마음이 왠지 헛헛했다.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 안의 소소한 규칙이나 약속이나 습관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마음가짐이 달라진다는 정대현 씨의 말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법이나 제도가 가치관을 바꾸는 것일까, 가치관이 법과 제도를 견인하는 것일까.

​165쪽,

"그 커피 1500원이었어. 그 사람들도 같은 커피 마셨으니까 얼만지 알았을 거야. 오빠, 나 1500원짜리 커피 한잔 마실 자격도 없어? 아니, 1500원 아니라 1500만 원이라도 그래. 내 남편이 번 돈으로 내가 뭘 사든 그건 우리 가족 일이잖아. 내가 오빠 돈을 훔친 것도 아니잖아. 죽을 만큼 아프면서 아이를 낳았고, 내 생활도, 일도, 꿈도, 내 인생, 나 자신을 전부 포기하고 아이를 키웠어. 그랬더니 벌레가 됐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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