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출처 : http://www.5netart.com http://www.ama.pe.kr
오딜롱 르동Odilon Redon (1840∼1916)
자화상
상징주의 회화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며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인물인 오딜롱 르동은
19세기 낭만주의와 20세기 초현실주의를 직접적으로 연결시킨 꿈의 화가이다.
그는 19세기 중반의 많은 유럽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동양 미술, 특히 일본 목판화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작품 세계는 꿈의 특성을 지니기도 하는 무정형의 유동하며 변하는 색채로부터 창조된 꿈의 세계였다.
그는 자주 자연을 연구함으로써 주제들을 찾았고,
때로는 현미경을 통해 자연 대상을 관찰하였는데 작업을 진행하면서
그것들은 아름답고 거대한 환상적인 것으로 변형시켰다.
르동은 그의 생애에 있어 일반 대중으로부터 얻은 명성은 높지 않았지만
젊은 동료들 사이에서는 그 명성은 계속 높아갔다.
회화에서 상징주의 운동 전체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진보적인 경향에
영향을 주었는데 거기에는 르동만큼 중심적인 인물은 없다
르동은 '무한대로 여행하는 이상한 풍선과 같은 눈' 이라는 색판화에 대해 "제목이란 모호하고 불확정적이고 혼란스럽고 애매할 때 비로소 정당화될 수 있다"고 하였다.
<에드가 알렌 포우에게 - 무한대로 여행하는 이상한 풍선과 같은 눈>
르동은 문학 작품과 관련된 작업을 하는데 대표적인 예가 1882년에 그린 [에드가 알렌 포우에게]라는 6점의 석판화이다. 이 작품은 이 6점 중의 하나이다.
미국 시인 포우는 이미 33년 전에 죽었으나, 그의 고뇌에 찬 생애와 "모든 확실성은 꿈에 있다"라고 이야기한 그의 악몽이나 환상적인 글은 당시 프랑스 문단에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눈이란 전통적으로 영혼을 반영하는 마음의 창으로 생각되어 왔고, 양심의 형태이기도 하다. 하늘에 둥실 떠있는 원구의 경우는 태양이나 광선, 생의 의미와 관련지어 해석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1880년대 주목받기 시작하였으며 거의 석판화, 에칭, 목판화였다.
사람얼굴을 한 곤충이나 꽃, 떠있는 눈, 잘려진 사람 얼굴, 꿈 혹은 환상에서나 볼 수 있는 형상이 등장하여 소위 '공상적 주관성'이라 칭해졌다.
1898년경부터 양식적 변화가 시작되었는데 흑백 대조가 밝은 색채로 대치되었으며, 파스텔, 수채화
등을 사용하고 신화와 종교적인 주제, 꽃 등 낙천적이고 즐거운 환상의 세계를 표현했다.
초현실주의의 시작을 르동으로 보는 이유는 "나의 독자성은 가능하다면 보이지 않은 것을 보이는
법칙에 적용시켜, 있을 수 없는 존재를 인간과 같이 살아있게 만드는 것이다."라는 그의 주장 때문이기도 하다. 르동의 환상적 세계는 뿌리없는 황당무계가 아니며 그의 환상의 씨앗은 면밀히 관찰된 현실에 있었다. 그는 무의식을 중시하였으며 환상적, 상징적 세계를 조형적으로 실현하였다.
그의 그림들
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은 무엇일까? 솜? 새의 깃털? 아기의 피부?
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은 사랑에 빠진 사람의 마음이다. 제아무리 목석 같은 사람이라도 사랑에 빠지면 그 마음이 그럴 수 없이 부드러워진다. 솜보다 포근하고, 새의 깃털보다 가벼우며, 아기의 피부보다 촉촉해진다.
19세기 상징주의 화가 오딜롱 르동(1840-1916)이 그린 <퀴클롭스>(1898)에서 우리는 그 부드러운 사랑의 마음결을 느낄 수 있다.
오딜롱 르동(1840-1916) <퀴클롭스>(1898)
퀴클롭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외눈박이 괴물이다. 몸집이 거대한 데다 힘이 아주 센 야만인 퀴클롭스. 르동은 그 중에서도 님프 갈라테이아를 사랑하게 된 폴뤼페모스라는 퀴클롭스를 그렸다.
그가 지금 산등성이 너머로 고개를 불쑥 내밀고 있다. 커다란 외눈으로 다정스레 바라보는 대상은 바로 아리따운 님프 갈라테이아. 괴물은 지금 이 님프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싶어 죽을 지경이다. 그 용기와 힘, 박력, 거친 태도는 다 어디다 놓고 왔는지 그저 설레는 마음에 무쇠 같은 심장이 바람에 흔들리는 민들레 홀씨보다 더 나긋나긋해져 있다.
폴뤼페모스의 표정을 보자. 행복과 두려움, 기쁨과 설레임, 소망과 불안이 교차하는 그 얼굴은 지금 거짓을 모른다. 자신의 속내를 결코 숨길 수 없다. 어쩌면 야수가 이리도 사근사근한 천사로 변할 수 있을까? 부드럽게 번지는 하늘의 푸른 색조도 그의 마음만큼이나 다정하고 다감하다. 괴물도 사랑에 빠지면 이렇듯 부드러워질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우리가 사랑에 늘 커다란 환상을 품는 근거가 된다.
신화라는 문학적인 소재를 택했으나 르동의 상징주의는 문학적이라기보다 회화적이다. 이야기 자체를 충실히 전달하는 데는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여러 회화적 장치를 통해 시각적 환상을 자극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그림으로 보아 우리는 그림의 소재가 폴뤼페모스 이야기이든 다른 어떤 괴물의 이야기이든 그것이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보다는 세계에 존재하는 어떤 야수적, 괴물적 성질이 무언가 달콤한 힘에 이끌려 '백화제방'의 화려하고 다채로운 시각적 환상을 창조해낸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마치 우리의 무의식, 저 깊은 심연으로부터 아름다운 시와 오색 찬란한 꿈을 피워내는 것 같은 모습이다.
이런 자신의 예술과 관련해 르동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나의 독창성은 있음직 하지 않은 존재에 인간적인 방식으로 생명을 입히고 가능성의 법칙에 따라 살아가게끔 하는 것이다. 비가시적인 것의 요구에 따라 가시적인 것의 논리를 활용하는 것이다."
문학을 중심으로 상징주의 일반이 세기말의 풍조에 따라 '데카당'한 당대 프랑스 지식인들을 사로잡았던 사실을 고려하면, 이 같은 '비가시적인 것의 가시화'는 불안한 무의식과 화려한 색채의 어우러짐으로 역시 당대 지식인들과 예술인들로부터 상당한 반향을 얻은 탁월한 접근법이었음을 알 수 있다. 화가 모리스 드니는 그래서 "르동은 우리의 말라르메"라고 예찬했다.
르동의 그림 가운데는 가끔 화려한 색채는 배제하고 상징주의적인 불안감을 보다 뚜렷이 강조한 작품들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걸작의 하나가 목탄 드로잉 <에드가 알렌 포우에게 - 무한대로 여행하는 이상한 풍선과 같은 눈>(1878)이다. 흑백의 이 그림에서 우리는 르동 특유의 화사한 컬러를 볼 수 없다. 그러나 색채의 배제를 통해 깊은 정서적 고뇌를 표출하고 있어 보다 섬쩍지근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르동은 눈동자나 잘린 머리를 즐겨 그렸다. 이는 그가 어릴 적 가족들과 떨어져 살아야 했던 경험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눈 풍선>이 무한한 하늘을 항해하고 그 눈동자가 위를 향해 있는 것은, 어려웠던 시절의 고통을 승화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를 나타낸다.
이 그림이 그려지기 전인 1870년 프러시아-프랑스 전쟁에서 고립에 처한 파리 사람들이 외부의 프랑스인들과 소통하기 위해 열기구를 띄우곤 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감안한다면, 고립으로부터의 탈출과 관련한 작가의 무의식적 욕망을 보다 뚜렷이 읽을 수 있다. 장성한 뒤에도 전위적인 예술가가 되어 늘 현실과 부대끼며 살아야 했던 그는 그런 '일탈의 욕망'을 늘 강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술가란 … 하나의 사고(accident)"라는 그의 관념은 바로 그런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The Raven
우는 거미
Head of a Marty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