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무엇이 될 진 몰라도
오래 조용히 가만히
내가 원하는 그 곳에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있어지기를
나와의 시간 이외는 없는 시간
나와의 공간 이외는 없는 공간
그 이외의 것은 견딜 것
모른 체로 익숙해 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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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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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들

 

우리가 살아가는 땅은 비좁다 해서 이루어지는 일이 적다

하지만 햇빛은 좁은 골목에서 가루가 될 줄 안다

궂은 날이 걷히면 은종이 위에다 빨래를 펴 널고

햇빛이 들이비치는 마당에 나가 반듯하게 누워도 좋으리라

담장 밖으론 밤낮없는 시선들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게 바쁘고

나는 개미들의 행렬을 따라 내 몇 평의 땅에 골짜기가 생기도록 뒤척인다

남의 이사에 관심을 가진 건 폐허를 돌보는 일처럼 고마운 희망일까

사람의 집에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일이 목메게 아름답다

적과 내가 한데 엉기어 층계가 되고 창문을 마주 낼 수 없듯이

좋은 사람을 만나 한 시절을 바라보는 일이란

따뜻한 숲에 갇혀 황홀하게 눈발을 지켜보는 일
(지금은 적잖이 열망을 식히면서 살 줄도 알지만

예전의 나는 사람들 안에 갇혀 지내기를 희망했다)

먼 훗날,기억한다 우리가 머문 곳은 사물이 박혀 지낸 자리가 아니라

한때 그들과 마주 잡았던 손자국 같은 것이라고

내가 물이고 싶었던 때와 마찬가지로 노을이 향기로운 기척을 데려오고 있다

날마다 세상 위로 땅이 내려앉듯 녹말기 짙은 바람이 불 것이다

 

이병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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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손짓하는 것이 보였어요. 당신은 서산 너머로

흘러갔을 뿐인데. 나는 아직도 산책을 하고 있었는데.지

상의 그늘들이 포개지는 저녁이 와도 내 산책은 저물지

못했는데. 나는 계속 덧나기만 했어요. 덧난 자리마다 부

끄러운 길을 만들고 그 길은 또 다른 길들로 무수히 갈라

졌어요. 갈라져서 돌아오지 못했어요. 이제 가느다란 가

지들로 남아 나는 아무 것도 붙잡을 수가 없어요. 내 산책은

당신을 붙잡을 수 없어요. 다만 이렇게 흔들리기 위

해 이렇게 오래 흩어졌던 거에요. 내 생이 이렇게 많은,

다른 가지들을 만들었던 거에요. 당신이 손짓하는 것이

보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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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 장 (罷場)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 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신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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