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랑이 길
논둑길이나 걷다보면 낫는다
속이 울음인 사람
다랑이 논둑길을 걸으면 낫는다
울음 밑이 시퍼런 우물인
웃음 밑이 떨리는 절벽인 사람
다랑이 논둑길
약(藥)으로 걸으면
가을 가 겨울
눈길 걸어
길 잃으면
낫는다
기억의 집기억을 끌어다 놓았으니 산이 되겠지바위산이 되겠지여름과 가을 사이그 산을 파내어 동굴을 만들고 기둥을 받쳐 깊숙한 움을 만들어기억에게 중얼중얼 말을 걸다 보면 시월과 십일월 사이누구나 여기 들어와 살면 누구나 귀신인 것처럼 아늑하겠지철새들은 동굴 입구를 지키고집이 하나로는 영 좁고 모자란 나는해가 밝으면 동굴을 파고 파고그러면 기억은 자꾸자꾸 몰려와 따뜻해지겠지그 집은 실뭉치 같기도 하고 모자 같기도 하며어쩌면 심장 속 같기도 하여서겁먹은 채로 손을 푹 하고 찔러 넣으면보드랍고 따스한 온기가 잡혀와 아찔해진 마음은곧 남이 되겠다고 남이 되겠다고 돌처럼 굳기도 하겠지그 집은 오래된 약속 같아들여다보고 살고도 싶은 여전히 저 건너일 것이므로비와 태양 사이저녁과 초저녁사이빛이 들어 마을이 되겠지그렇게 감옥에 갇혔으면 하고 생각한다감옥에 갇혀 사전을 끌어안고 살거나감옥에 갇혀 쓸데없는 이야기나 줄줄이 적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그러기 위해 기억하는 일 말고도무슨 죄를 더 지을 것인가를 생각한다성냥을 긋거나부정을 저지르거나거짓말이라도 해야 하는 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세상을 끊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그러기 위해서는 또 태어나야 할 거라고 생각한다이병률
열차는 해안선을 따라 달린다선로 위에서 몸살을 앓다엉거주춤 깨어 보는 새벽달너의 세계는 고즈넉하고 차갑게 빛난다바다는 가없다바다새는 날기를 포기한 채
파도에 실려 표류중이다
까마귀는 가스등 위에서
발열한 채 부서져 내리고 해안선은 그 자리에서 둥글게 이어진다하늘은 눈보라만큼 어둡기만 해서 나는 열차에서 내리지 못한다열차는 해안선을 따라 달리고못다 본 새벽달은 달고 따듯한 목소리로 떠있다
열차는 해안선을 따라 달린다선로 위에서 몸살을 앓다가엉거주춤 깨어 보는 새벽 달차고 고즈넉한 너의 세계는 어둡게 빛난다발열하는 까마귀가 앉은 가스등은차갑게 빛나며 길을 쫓는데눈보라를 기다리던 빨간 열매는추락하며 부서진다끝간데 없는 바다가갈매기를 실은 채 너울거리고못다 본 새벽 달은달고 따듯한 목소리로 떠있다열차는 해안선을 따라 달리고나는 열차에서 내리지 못한다
열매를 보고 네 이름을 떠올려 보지만너는 원하지 않음을 안다너의 세월네가 우러른 하늘네가 견딘 눈발네가 떨군 잎새그 모든 것이 열매에 들었다는나를나의 시선을 너는 거부한다네가 옳다나는 수만 가지 색의 조화로 아름다운 들판을 두고 한 가지 색으로 단조로울너를 보러 갈 것이다너는 무던히 늘 거기 있을 것이고무던하지 않은 나는
널 그리며 살아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