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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물을 부른다

밤이 밤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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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 때 거미를 사랑했다

거미는 내가 커피 마시는 테이블을 기어 내게로 왔다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거미를 덥썩 안아 집으로 데려 왔다

밤에도 보고 낮에도 보고 돋보기를 대고도 보고

그냥 눈으로도 보고

나는 정말이지 그 거미가 좋았다

거미가 보고 싶어 집으로 일찍 돌아오는 날도 있었다

가둬놓은 거미가 불쌍해서

숨구멍을 조금만 열어 준다는 것이

그가 도망 갈 구실이 되었다

거미는 아마 내 눈빛이 무척 뜨거웠을 것이다

그는 아마 어두운 책장 뒤로 도망 쳤을 것이다

봄부터 겨울 올 때 까지 열어 놓은 내 방 창문은

항상 방충망이 쳐져 있었으므로

나는 거미가 보고 싶었다

거미 도감을 보고 또 봐도 그 거미는 없었다

내가 이름 불러 줄 수도 없었던 거미

지금도 나는 밤이면  거미가 생각난다

침대 옆 벽면을 타고 그 거미가 내게로 올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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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12 09: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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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12 1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병률 <바람의 사생활> 창비 2006

 

이별의 유전자

 기어이 사랑하며 살아 보겠다 하는 마음과 이냥 헤어지고 죽어버리자 하는 마음이 번갈아 밀려왔다 밀려가며 파도를 만드는 것이다. 그 두 마음 중 어느 하나에 의지해 살 수도 있겠으나, 그 두 마음의 오고 감을 남 일처럼 들여다보며 살 수도 있는 것이다. 앞의 일보다는 뒤의 일이 더 아픈 일이다. 이병률의 일들이 그렇다. 이 사내의 내해를 드나드는 파도는 어찌 그리 심해파이기만 한 것이며, 그것들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길은 어찌 이리 먹먹한 먹빛인 것인가. 그럴 수도 있는가, 그렇게도 살아지긴 하는가, 내내 물어가며 그의 시를 읽었다. 그 맨 처음이 이러하였다.

 

지구와 달의 자리가 가까워 달이 커 보였던 때

일 년은 오백 일이었고 하루는 열 여섯 시간 이었을 때

당신은 나를 데리러 왔다

신과의 약속을 발설 할 것 같지 않던 당신은

지금 그 시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백스물 아흔 여든 두 살 쭈글쭈글한 얼굴로 돌아가자 말했다

하나 내가 지켜야 할 약속은

검고 고요한 저 소실점을 향해 가는 일

 

달과 지구의 자리가 멀어져 달이 작아 보일 때까지

일 년은 삼백육십오 일이고 하루는 스물네 시간일 때까지

 

-[봉인된 지도] 중에서

 

슬픔에도 스케일이 있다면 이것은 대규모다. 얼마나 속수무책이기에 '일년은 팔백 일이었고 하루는 열한 시간이었을 때'로 거슬러올라가 시작하는가. 지구는 달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어서 하루는 100만 년에 15초씩 길어지고 있다 했다. 그러니 사내는 지금 30억 년 전의 이야기, 첫 생명이 이 세상에 났던 때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내가 지켜야 할 약속'을 지켜왔다. 1년이 365일이고 하루가 24시간이 될 때까지. 그러니까 30억 년을 '검고 고요한 소실점'을 향해, 그러니까 죽음을 향해 가는 일이 그의 일이었다. 19억 년 전에 당신이 '나'를 설득한 적도 있었지만 끝내 마다했다. 마치 그것이 뭇 생명들의 대책 없는 마음이라는 듯, 그것이 우리 몸속에 '봉인된 지도'라는 듯, 우리에게는 이별의 유전자가 매복해 있다는 듯 말이다. 영원처럼 장구한 이별이고 한없이 느린 죽음이다. 이것은 압도적인 서시다. 덕분에 앞으로 이 시집을 끌고 갈 마음의 정체를 알겠다. 그 마음은 '검고 고요한' 자멸에 들린 마음이다. 내내 이별 쪽으로만 길을 잡아 30억 년을 살아온 지독한 마음이다.

 

독, 피 속의 독

 

 기어이 사랑하며 살아보겠다 하는 마음을 일러 에로스라 했고, 이냥 헤어지고 죽어버리자 하는 마음을 일러 타나토스라 했다. 그 두 마음의 왕래가 이를테면 밀려오고 밀려가는 파도와 같고, 묶였다가 풀리는 매듭과 같다고 했다. 그것이 생의 리듬이라는 것이다. 그 리듬이 끝내 온전하기만 하다면야 살아 있는 것들 모두 가까스로 제 생을 도모할 수 있겠다. 그러나 '생명의 수호자들도 원래는 죽음의 충실한 앞잡이'(프로이트)라 하질 않았던가. 에로스는 타나토스의 슬하에 있을 뿐이다. 밀려오는 파도 말고 밀려나가는 파도가 힘이 세고 매듭 묶이는 일보다 매듭 풀리는 일이 더 유혹이라서, 모든 살아 있는 것들 때로 휘청거리곤 하는 것이다. 그만 저를 놓아버리고 싶을 때, 그러다 그대와 함께 무너지고 싶을 때가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마음의 실력 행사를 사내는 '혈관 속을 흐르는 독'의 이미지로 사로잡는다. '좌심방과 우심실 사이에, 독 만드는 공장'[독만드는 공장의 공원들은]이 있다. 그 독 '슬퍼지는 데  쓰이기' 위해 피돌기하며 흐르다. 문득 당신의 몸속으로 이리 하릴 없이 건너가기도 하는 것이다.

 

피의 일

 

당신의 중심으로 돌았던

그 사랑의 경로들이

백 년을 죽을 것처럼 살고 다시 백년을 쉬었다가

문득 부닥친 한 목숨에게

뼈가 아프도록 검고 차가운 피를 채워넣는 일

 [피의 일] 중에서

 

독을 품고 있는 자의 만남이란 대개 이러하다. 혹독하고 길었던 사랑 때문에 순식간에 백 년을 살고 다시 백 년을 보낸 사내가 문득 한 목숨과 부닥친다. 독을 품고 있어 '검고 차간운 피'를 다른 목숨에게 부어준다. 그런데 이것이 만남인지 무너짐인지를 모르겠다. 이것이 자학인지 가학인지 알지 못하겠다. 그것이 '피의 일'이라는 것만 알겠다. 피의 일은 이렇게 종잡을 수 없는 역설이고, 여러 시들의 배후에서 이 피가 흐르고 있다.

 이를테면 '굳을 만하면 받치고 굳을 만하면 받치는 등 뒤의 일'[사랑의 역사])이 사랑이라는 일인데, 그 '사랑의 역사'를 노역처럼 겪어내면서 사랑의 일이란 도대체가 뜻대로 되지 않는 '등 뒤의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서도, 목덜미에서는 처음인듯 다시 '여름 냄새'가 생겨나 사랑의 방향 쪽으로 풀려나가는 것이다. 이 사태는 '피의 일'이다. 또 이를테면, 심야의 술집에서 홀로 술 마시는 일은 위험한 일인데, 옆 테이블의 누군가가 '절벽 갈래 바다 갈래[절벽갈래 바다갈래]) 하면, 그게 술집 이름이라는 것을 안다 해도, 문득 절벽이나 바다에서 허공으로 몸 던져보고 싶은 심사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 사태도 '피의 일'이다. 이 '검고 차가운 피'가 '검고 고요한 소실점'으로 사내를 이끌었던 것이다.  사내의 내해에서 울렁이는 파도는 이렇게 검은빛이다.

 

작별의 윤리

 

 그래서 이 '검은' 사내는 '헤어지다'의 주어다. 한사코 제 이름을 '이리'라고 하겠다질 않는가[관계의 사전] 그러나 헤어짐을 당하는 일과 헤어짐을 만드는 일이 또한 사뭇 다른 것이다. 제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헤어짐을 이별이라 하고, 제 힘으로 힘껏 갈라서는 헤어짐을 작별이라 한다. 이별은 '겪는'것이고 작별은 '하는' 것이다. 전자는 감상과 통속에 더러 곁을 내주곤 하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다. 작별은 인정이고 선택이고 결단이기 때문이다. 헤어짐을 '짓는'일이다. 작별의 안간힘과 준엄함을 노래할 때 그의 시는 가장 아름다워진다. 그는 헤어짐을 지으면서 시를 짓는다.

 사내는 두 가지 방식으로 작별한다. 엇갈림을 묵인할 때가 있고 만남을 밀어낼 때가 있다.('묵인'은 [묵인의 방향]에서 '밀어냄'은 [무늬들][아무것도 그 무엇으로도][점심]에서 가져온다) 예컨대 이렇게 묵인한다.누군가가 '나' 없는 동안 내 집에 다녀갔다. 나비처럼 내 집에서 겨울을 난 그이는 누구인가. 그가 누구이건, '누군가 빈집에서 머리를 풀어 초를 켜고 문고리에 얼굴을 기댔다'([나비의 겨울])라고 아름답게 쓰면서 사내는 묵인하는 것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깊은 밤 산사에서 옆방 수행자가 문득 산을 떠났다. '한 번 등을 보이면 다시는 돌이키지 못할 만경창파의 연이 있음' ([한 사람의 나무 그림자])을 그가 알았기 때문이다. 사내는 그의 빈방에 들어가 눕는다. 그로써 그의 출분을 묵인하는 것이다.

 혹은 이렇게 밀어낸다. '정말 미안하지만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라 청해오는 옆 방 남자에게 사내는 끝내 건너가지 않는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행여 내 마음의 자욱함마저 들켜버리면 '바깥에서 뒹굴고 있을 나뭇잎조차 구실이 없어'질까 해서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또 이런 식이다.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 했던 마당의 통을 사내는 모른척한다. 혹여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 통이 사내의 '깊은 불출의 골병을 아는 체하려 들 것'이기 때문이다.([통]) 더는 아프지 않기 위해서, 아프게 아픔을 밀어내는 것이다. 이 묵인과 밀어냄의 내막을 다음 문장들에서 엿본다.

 

 가능하다면 혹은 그것이 불가능할지라도

 여자는 가지 않고 나는 여자를 보내지 않고 나는 오래 건너편을 살피고 사내는 건너편이자 인디아인 이쪽을 봤으면 그것이 영원이었으면

                                -[인디언 섬머]중에서

 

 이를테면 내가 당신의 누구인지 모르는 것과

 내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것,

 알게 되면 그것을 잃는 일이므로 껴안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것

                               -[아무도 모른다] 중에서

 

 앞의 시에서 사내는 남자 있는 여자를 집에 들였다. 남자 때문에 병들어 내 쪽으로 날아온 그녀를 보살피기로 한다. 그녀를 찾아 남자는 오고, 사내의 집 건너편에서 이쪽을 응시한다. 이 대치를 사내는 수습하려 들지 않고 더 나아가지 않는다. 외려 그 상황이 '영원'이기를 바란다. 이 엇갈림이 그에게는 차라리 견딜만한 살림이었던 것이다. 뒤의 시에서 사내는 치매 노인의 방문을 받는다. '너 누구냐'하고 물으며 내 집을 드나드는 노인네가 사내는 차라리 반갑다. 더는 묻지 않고 굳이 대답하지 않는다. 당신에게 '나'는 누구이고, '나'는 또 '나'에게 누구인 것인지. 만나서 알게 되는 일은 자칫 '잃는 일'일 수 있어서 이렇게 껴안고만 있는 것이다. 따뜻한 묵인이고 아름다운 밀어냄이다. 그의 시에서 시적인 것들은 이런 순간에 고인다.

 이 묵인과 밀어냄이 다 사내의 작별이다. 이 작별들 뒤에 어떤 두려운 참혹이 있지 않았다면 그의 시는 얇아졌을 것이다. 타인의 눈부심 앞에서 제 안의 살얼음이 깨어질까, 혹은 타인의 참혹 앞에서 저 자신의 참혹도 얼결에 들고 일어날까, 사내는 두려웠던 것이다. '내가 나에게 뭐라 말을 거느라'([물의 말])사내가 제 안쪽을 들여다본 때는 그런 때였을 것이다. '잘못했으니 다 내 잘못이었으니, 산 늪에 몸을 들여 서러워지고 늪이 다 마르고 몸 갈라져도, 구더기 복받쳐나오는 내 심장을 벌려 얼굴을 묻은 채로 안 볼 터이니' ([탄식에게])라고 서럽게 울 때, 그는 저 자신을 단속하느라 필사적이다. 그동안 숱한 사내들의 필사적인 참혹을 읽었으나, 제 심장을 벌려 얼굴을 묻겠다 말하는 이를 본 적이 없다. 그의 작별이 그래서 필사적인 것임을 알겠다. 나는 내 안의 독을 다스리려 하니 너는 내게서 떨어져 부디 다치지 말거라. 이를 작별의 윤리라 부를 것이다.

 

바람처럼 여행처럼

 

 그러니 이와 같은 생의 이미지는 '바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의 형식은 '여행'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람은 머물러 있지 않아서 바람이다. 바람에게 미지와의 만남은 곧 기지와의 헤어짐이라서 만남과 헤어짐이 모두 한 찰나다. 긴 시간 동안 만남과 헤어짐을 거듭하는 한 목숨의 일생도 우주의 시계로는 고작 바람 불어와서 불어가는 한순간이겠다. 그러니 삶이 바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여행 역시 바람의 생리를 닮아 있다. 그것은 너를 만날 때부터 이미 헤어질 것을 염두에 두는 삶의 행사라서 잘 만나는 일보다 잘 헤어지는 일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다. 그러니 삶이 어찌 여행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 사내는 바람이 작별의 대가임을, 여행이 작별의 기예임을 안다.

 

 되돌아보면 그 바람을 받아먹고

 내 나무에 가지에 피를 돌게 하여

 무심히 당신 앞을 수천 년을 흘렀던 것이다

 그 바람이 아직 아직 찬란히 끝나지 않은 것이다

                     -[바람의 사생활]중에서

 

 혼자 죽을 수는 없어도 같이 죽을 수는 있겠노라고

 낯선 눈빛이 낯선 다른 눈빛에게 말을 건다

 (...)

 

 난 다시 태어날 거예요

 아니, 난 다시 태어나지 않으렵니다

 더이상 말도 눈빛도 교환해서는 안 되는 두 사람은

 오로지 죽자고 한 손을 묶고 있을 뿐

 뒤를 당부할 일 없으므로 이름도 모른다

                           - [황금포도 여인숙]중에서

 

사내는 저 자신 바람의 혈육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사내'라는 '서럽고도 차가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세상 모든 사내들이 죄다 바람의 핏줄이라 믿는 것이다. 사내라는 말이 처음 생겨난 그날 이후로 '수천년을' 바람이 생리로 살아왔던 것이다. 바람과 바람이 엇갈리는 일. 그 것이 사내의 여행이다. 그러니 '낯선 눈빛이 다른 눈빛에게' 말을 걸어 행여 만남을 만든다해도, 그것은 함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죽기 위해서여야 한다. 만남이려면, 화장터의 가마 속으로 함께 들어가는 두 시신의 만남쯤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람 사내의 여행기는 시종일관 작별의 논리를 따른다. 예컨대 그가 '동유럽 종단 기차'에서 베트남 사내를 만난다고 하자. 여느 여행기라면 이 만남이 행사에서 모종의 시를 도모하려 들것이다. 그러나 사내는 다만 엇갈림을 내버려둘뿐이다. '혼자인 것에 기대어 가고 있기에'([동유럽 종단 열차])그렇다. 혹은 그가 섬길 달리는 버스에서 쌍둥이 여인을 만난다고 하자. 그는 그네들의 셈을 듣고만 있을 뿐, 그 말길에 끼어들지 않는다. 다만 '두 여인네가 찾아 헤매는 시간 즈음에 한참을 있다 가고 싶어'([미행])삼거리에 내려보고는 하는 것이다. 루벤 곤잘레스를 찾아 쿠바로 떠나는 여행도 그러하다. '그의 손을 심장에 찔러 넣고 한 달쯤 울고 싶어([장미그늘])갔지만, 고인은 한평의 그늘로 남아 그를 어루만질 뿐인 것이다. 이 잦은 헤어짐의 풍경들에서 시적인 것들이 고인다. 바람이 쓰는 시다.

 

헤어지는 말들의 음악

 

사내의 시에는 언젠가는 당신을 떠나게 되리라는 예감이 있고, 그 예감을 스스로 불편해하는 불안이 있고, 그 불안이 당신에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기를 바라는 절박이 있고, 그 절박을 용서할 수 없어서 상처 받는 당신을 위해 우는 갸륵이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얄밉고 위험하며 약하고 슬픈 남자의 시다. 그러나 이 모든 생의 오작동을 수락하는 이의 현명한 평정이 있어서 그의 톤은 흐트러지는 법이 없다. 아니, 거의 음악에 육박한다고 해야 옳다. 그 음악은 제가 실어나르는 예감과 불안과 절박과 갸륵마저도 감미롭게 만들 만큼 매력적이지만, 그 매력은 얄팍한 인위의 소관이 아니다. 아이를 달래는 어미의 노래처럼, 고장나 부대끼는 한생이 '자신을 타이르는([여전히 남아 있는 야생의 습관]) 음악인 것을 알겠기 때문이다.

 

 이 계절 몇 사람이 온몸으로 헤어졌다고 하여 무덤을 차려야 하는 게 아니듯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찔렀다고 천막을 걷어치우고 끝내자는 것은 아닌데

 

 봄날은 간다

 

 만약 당신이 한 사람인 나를 잊는다 하여 불이 꺼질까 아슬아슬해할 것도, 피의 사발을 비우고 다 말라갈 일만도 아니다 별이 몇 떨어지고 떨어진 별은 순식간에 삭고 그러는 것과 무관하지 못하고 봄날은 간다

 

                                           -[당신이라는 제국] 중에서

 

이 아름다운 책에서 단 한 편의 노래만이 허락된다면 이것이어야겠다. 헤어짐이란 마음들이 서로를 아득히 밀어내는 일이지만, 말들도 그렇게 서로를 밀어내며 헤어질 수 있는 것이다. 사태를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을 법한 손쉬운 말들을 이 사내는 밀어낸다. 우회하고 또 우회하여 '천년을 넘긴 일'([잠시])처럼 되었을 때, 그제야 그 문장들을 수습하여 엮는다.

 인용한 시의 첫 연에서 'A가 아니듯 B는 아닌데'는 한 줄의 여백을 껴안은 다음 '봄날은 간다'와 만난다. A와 B는 서로 헐겁고, 이제는 거의 슬픈 주문처럼 들리는 '봄날은 간다'라는 말도 저 A, B와 각각 헐겁다. 누군가 온몸으로 헤어진 일, 누군가가 누군가를 찌르는 일,그리고 봄날이 가는 일들을 말하는 문장들이 어쩐지 삼거리에서 한 번 스쳤다가 각자의 길을 찾아 헤어지는 나그네들 같다. 시적인 것은 이 순간에 고인다. 세번째 연에서는 '그러는 것과 무관하지 못하고'가 첫연에서의 여백을 대신한다. 당신이 '나'를 잊는 일, 불이 꺼지는 일, 피가 마르는 일, 별이 삭는 일들이 서로 만날 듯 헤어진다. 그 찰나에 봄날은 가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당신이라는 제국' 안에서 일어나는 내 마음의 사소한 소요라고 사내는 거짓말처럼 노래한다. 헤어지는 일의 사소하지 않음을 말하기 위해 말들은 저렇게 모였다 헤어지면서 음악을 만드는 것이다. 헤어짐을 일삼는 사내의 성정이 저런 문장들을 낳았을 것이다. 이 사내의 시가 갖고 있는 특별한 아름다움의 비밀이 여기에 있다고 믿는다. 이 책의 곳곳에서 그 음악들이 흘러나온다. '달에게 보내는 별들의 종소리'([달에게 보내는 별들의 종소리])처럼 아련하고 저리다.

 

 이 사내는 헤어짐의 풍경, 공기, 기미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노래하는 바람이다. 다시 말하겠다. '아름다움에 패한'([무늬들])얼굴로 말하겠다. 그는 '헤어짐을 짓는' 사내다. 이를 일러 작별이라고 하고 혹은 작시라고도 한다. 지구가 달과 더 멀어져 하루가 수십시간이 되는 날까지 이 노래들 내내 아름다울 것이다. 이렇게 헤어짐을 짓는다.  

 

(아름다워 숨이 막힌다. 읽고 또 읽다가 기어이 옮겨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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