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리타 공항에 도착하자 마자 찍은 사진. 

여행의 설레임보다  

공항 리무진과 이코노미석에 시달려서 

당장 호텔로 가서 그저 눕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일단 짐부터 정리했다. 

예의 그 챙겨가기 습관은 여전해서  

이번에는 손톱깎이까지 다 가져갔다. 

그나마 뻘짓이 아니었구나 싶었던건 

호텔안에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는거. 

새로 지어서 깨끗하다는것 빼고는 정말 휑하니 아무것도 없었다. 



이번 여행의 테마는 '무계획' 이었다. 

그냥 가서 가고싶은 곳을 찍은다음 어떻게건 찾아간다가 내 계획이라면 계획이었다. 

덕분에 수십명의 일본인들에게 영어로 지하철 노선을 물어야 했다. 

그들이 친절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아무곳도 가지 못했을 것이다. 

일정은 그때그때 지하철로 이동할때 짰으나 

그마저도 잘 지키지 않고 내맘대로 돌아다녔다. 



나는 심장이 약해서 놀이기구를 못탄다. 

특히 롤러코스터 같은건 

타다가 심장마비로 갈 수도 있기 때문에 더더군다나.. 

그런데 지상으로 달리는 이 유리카모메는 

어찌나 커브길이 많은지 

제일 앞에 서서 내려다보니 

롤러코스터가 따로 없었다. 

안전하다는 믿음 때문인지 

사방이 다 막혀있는 차 안이어서인지 

아무튼 전혀 무섭지 않고 신났었다. 



첫 날의 마감은 맥주 한 잔. 

원래 불면증 때문에 수면제를 먹어도 잘 못 자는 내가 

이날은 맥주 한캔으로 정말 쉽게 잠이 들었다. 

역시 내 불면증의 원인은 '너무 꼼짝도 않고 앉아있다' 때문인가? 흠.. 



둘째날 아침.  

일찍 일어나겠다던 계획과 달리 9시에 눈을 떠서 

눈꼽도 떼지 않은 채 9시 30분이면 끝나는 아침식사를 먹으러 갔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너무 거지같이 하고 다니면 안되겠다 싶어서 

선글라스를 끼기로 마음먹었다. (지만 안보이면 괜찮다고 생각한다.) 

느긋하게 준비해야지 라며 준비를 했더니만 

11시가 넘어서야 나설 수 있었다. 

참 태평스런 관광객이 아닐 수 없다. 



일본에 가면 딱 두 가지를 하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살 것. (일어로 되어있어 읽을 수 있거나 말거나) 

한국에서 좀처럼 찾기 어려운 사쿠란보 티를 살 것. 

다행스럽게도 두 가지 다 이루고 왔다. 



시부야 109 백화점 맞은편에 있던 스타벅스 건물 (실제 건물 이름은 모름) 

커피를 마시러 갔는데 어찌나 줄이 길게 늘어서 있던지 

그만 질색해서 가려는 순간 5층에 레스토랑이 있다는 표시가 보였다. 

안그래도 다리아픈참에 잘 되었다며 

별로 식욕도 없었지만 감자튀김과 샐러드를 시켜서 먹었다.  

웃기는건 분명 식욕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먹으니 다 들어가더라는 것.

이번 일정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동네인 지우가오카에 있는 한 카페. 

집들 사이에 쏙 들어가 있어서 처음에는 보이지도 않다가 

불빛을 보고 찾아갔는데 아담하고 예쁜것이 꼭 그 동네를 닮은 카페였다. 

서빙하는 여자가 영어를 꽤 유창하게 해서 

지하철 노선과 택시비, 버스비등을 물었더니 친절하게 가르쳐줬다. 

마지막에 너무 고마워서 기념품을 주고 싶은데 

한국거라곤 천원짜리 달랑 한 장 뿐이었다. 

그래서 그걸 줬더니 굉장히 좋아했다. (절대 팁 아니었다. 수브니어 라고 확실하게 말했다.) 



첫날과 마찬가지로 역시 둘째 날의 마감도 맥주 한잔. 

약간 더 큰 캔을 사서 다 비우고 

역시 수면제 없이 쿨쿨 달게 잤다. 



마지막 일정은 우에노 공원. 

앉아서 내내 비둘기도 보고 

사서 먹지는 않고 들고 다니던 베이글도 뜯어먹고 

근처 시장도 가봤다. 

그리고 기념품에 목숨을 거는 약 3명의 지인들의 선물을 샀다. 

여행할때 누군가에게 선물을 사는건 

그냥 사고 싶을때 사야지 

사달라고 해서 사 주는건 정말이지 피곤한 일이다. 



돌아오는 길에는 겁나게 피곤할 것이라는 내 예상대로 

비지니스 클래스를 끊지 않았으면 울뻔했을듯. 

국내선은 비지니스를 타봤으나 

해외로 갈때는 처음 타보는지라 

촌년처럼 이것저것 만져가며 무척 좋아했다. 

그랬더니 내 옆에 앉은 외국인 아저씨가 내가 완전 앤줄 알고 

시계 불빛으로 비행기 내부 여기저기를 비추면서 장난을 쳤다. 

서른 다섯 먹었으니 이런 장난은 좀.. 이라 말하고 싶었지만 

아저씨도 매우 심심해보였으므로 그냥 참았다. 

비지니스는 좌석이 넒은것도 넓은거지만 

서비스가 끝내줬다. 

와인도 종류별로 4가지나 있고 (난 다 달라고 해서 마셨다. 덕분에 알딸딸한 기분으로 푹잤다.) 

기내식을 줄때는 무려 테이블보 까지 깔아줬다. (게다가 일일이 접시에 씌운 랩을 뜯어줬다.) 

담요마저 이코노미와는 비교도 안되게 두꺼운걸 보고는 생각했다. 

돈이 좋긴 좋구나. 

먼 곳으로 갈때는 너무 비싸서 비지니스를 타지 못하겠지만 

가까운 곳에 갈때는 한번 탈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 도착하자 마자 핸드폰을 켰는데 (내 핸드폰은 로밍이 안되어서 공항에서 임대폰을 받아야 한다고 해서 그냥 포기했다. 꼴난 3일 전화 안받는다고 끝장날 일도 없을테니까.) 

문자 메세지며 캐치콜이 줄줄이 들어왔다. 

아... 내가 살아있구나. 나는 사람들과 사는구나 하는걸 절실하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맨 위의 사진은 호텔 근처에서 구입한 사케. 병이 너무 예뻐서 샀다.  

 

현지에서 모은 온갖 기념품들. 기념품을 사는 것 보다 저런게 더 기념이 된다.  

상자안에 고이 넣어뒀다가

내가 거길 갔었나 싶게 까마득한 날 문득 열어보면 참 새롭다.

 

하루키의 책 두 권과 사쿠란보 티. 나를 위한 선물. 내 로망의 실현. 

 

여행내내 적었던 일정들. 2008년부터의 모든 여행이 이 노트에 적혀있다.

 

아주 가끔은 여행을 다녀야겠다. 

늘 누군가와 함께 가고 

늘 정해진 곳으로만 다녔었다. 

그런데 이렇게 아무곳에나 가고 

아무거나 하고 싶은대로 하는 여행. 

이게 내 체질에 딱 맞았다. 

그런데 몰랐었다. 

안해봤었으니까. 

이렇게 여행 조차도 내 타입을 알지 못하는데 

나는 얼마나 더 많이 나 자신을 모르고 사는걸까? 

그러니까 결론은 

안해보면 그냥 모르고 살수도 있다는거다. 평생.  

그래서 이제부터는 하고 싶은건 대충 해 가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돈을 모으는것도 좋고, 미래를 준비하는것도 좋고, 일도 좋지만

일단 나는 현재를 살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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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2-10 0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아무리 서툴다 하더라도 여행지에서는 꼭 현지어로만 말을 하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어요. 제가 달리 외국어를 잘해서가 아니라, 그 곳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단어를 나도 한 번 써보고, 듣고 싶은 욕망에. 제 여행은 소통입니다. 플라시보 님의 여행은 자기 자신인 듯 하군요.


그런데 왜 `사와'는 드셔보시지 않으셨나이까!

플라시보 2010-02-10 11:34   좋아요 0 | URL
음.. 그 말이 맞는것 같아요. 제 여행의 목적은 소통이라기 보다는 제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 그리고 나의 또다른 면을 보는것 뭐 그런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와가 뭔가요? 몰라서 못 먹은듯^^ (참 손톱깎이는 님이 챙겨간다고 해서 저도 챙겨갔더니만 너무 유용하게 썼답니다. 흐흐) 그나저나 현지어로만 말 하기. 정말 대단하신것 같아요. 으...전 도저히^^ (제가 뭣보다 싫어하는 공부를 해야하잖아요. 하하)

Mephistopheles 2010-02-10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사진으로 보면 완벽한 '시보사마'같습니다.

플라시보 2010-02-10 11:34   좋아요 0 | URL
시보사마는 지명 이름인가요? ^^ 아니면 다른 뜻이?

Mephistopheles 2010-02-10 13:01   좋아요 0 | URL
욘사마, 지우히메...플라시보+사마 혹은 히메.....
(아 단어 섞어보니까 시보히메가 맞겠군요..심히 썰렁.)

플라시보 2010-02-10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스스로를 히메라고 하기에는 심히 무안하지만 그래도 사마 보다는 히메가 더 맞겠어요. 그래도 여자잖아요. ㅋㅋㅋ 시보히메. 너무 감사해요. 깔깔^^

2010-02-11 0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라시보 2010-02-11 09:25   좋아요 0 | URL
네. 일단 여행을 간다는 것 자체가 참 힘든 일이죠. 저처럼 거의 놀고 먹는 인간은 시간은 있되 돈이 없고^^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은 시간을 빼서 여행을 할 여유가 없죠. 놀기 위해 먼 곳으로 간다는 일. 참 쉽지만은 않은것 같아요.

BRINY 2010-02-18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그래요. 불면증에 좋은 약은 하루종일 기분좋게 쏘다니는 거, 그리고 잠자기 전의 맥주 한잔.

플라시보 2010-02-19 08:21   좋아요 0 | URL
네. 그런것 같아요. 몸을 안쓰면 잠이 안오더라구요. 그리고 맥주 한잔. 흐흐.
 

20대 후반쯤 장거리 연애를 한 적이 있었다. 

그는 나의 이상형이었고, 내게 너무 완벽한 남자였다.  

항상 내게 예쁜 말들을 해 주었었는데  

그 중 최고는 아직 사귀기 전 함께 밤길을 산책하다가 불쑥 안길래 

엉거주춤하게 안겨서는 어떻게든 이상한 분위기를 연출하지 않으려고 그의 등을 토닥이는 내게 

'이 순간이 너무 소중해요' 라고 말 한 것이었다. 

너를 너무 안고 싶어도 아니고, 니가 좋아도 아닌 

이 순간이 너무 소중하다는 남자. 

나는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연애를 시작하고 

처음 얼마 동안은 말 그대로 구름 위의 산책이었다. 

그는 늘 내 두 다리를 땅에 붙어있지 않게 했고 

그를 제외한 세상 모든 것들은 페이드 아웃 되게 했다. 

하지만 그의 달콤한 말들은 점점 힘을 잃었다. 

자주 들어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그냥 말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닭살스런 말도 잘 못하는데다 애교마저 없는 나는 

처음에는 그의 달콤한 말들이 너무 좋았지만 

보고 싶다는 말을 그렇게 자주 하면서도 

그는 나를 보러 오지 않았다. 

늘 움직이는 것은 나였고 

늘 진짜로 보고싶어 하는 사람은 나였다.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은 그 였지만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은 나였다.  

왜냐면 사랑은 말로 하는게 아닌 행동으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그는 미국으로 촬영차 출장을 가게 되었다. 

한 달 일정의 비교적 긴 화보 작업이었다. 

해외로밍을 했었는지 어쨌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아무튼 그 한 달 동안 전화한통 없었다. 

나도 바쁜사람에게 전화하면 괜히 일에 방해가 될까봐 

그냥 가만히 기다렸었다. 

그가 한국에 온다고 연락이 올때까지. 

 

한 달이 넘고 다시 일주일이 지났다. 

나는 참지 못하고 전화를 했다. 

그는 한국 집에서 전화를 받았다. 

내가 왜 도착했는데 연락하지 않았냐고 하자 

그는 바빴다고 했다. 

그래, 바빴겠지. 그랬겠지. 

하지만. 

여자 친구에게 전화 한 통 할 시간도 없었을까? 

나는 그를 보기 위해 휴가를 앞으로 땡기느라 회사에서 온갖 눈치를 보고 

가서도 늘 피곤하다는 그 때문에 데이트 같은 데이트를 한지가 언젠지 기억도 안났다. 

순간. 나는 느꼈다. 

사랑이 끝난게 아니라 

사랑은 시작되지도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나 혼자 그를 사랑했고, 그를 사랑하는 내 모습을 사랑했던 것이다.  

그는. 그저 달콤한 말을 잘 하는 남자였다. 

명색이 포토그래퍼였으면서 내 사진 한 장 찍어주지 않았고 

전화를 하면 모델들과 술을 마시느라 정신이 없었다. 

 

왜 몰랐을까? 

그렇게 명확하게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음을 행동으로 표현하고 있었는데.. 

달콤한 말에, 예쁜 말에 나는 그만 눈을 감고 생각을 멈췄던 것이다. 

오직 귀 하나만 열어둔 채. 

 

헤어지고 난 다음 오래 슬프지는 않았다. 

그러나 같이 출장을 간 모델과 그렇고 그런 섬씽이 있었다는 말을 전해들으니 

정말이지 쫒아가서 한 대 패 주고 싶었다. 

니가 사랑하지 않는다 해서 

내 사랑을 우습게 볼 권리까지는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냥 있었다. 

그와 밤새 통화하느라 엄청나게 청구된 핸드폰 영수증을 보면서 

그리고 빨리 오라는 재촉에 비행기를 타고 다니느라 끊은 티켓들을 보면서 

내가 어리석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말 없는 남자보다 더 나쁜 남자는 말 뿐인 남자이다. 

말로는 하늘에 별도 달도 다 따다줄 것 같지만 

막상 실제로는 사과 한알 따 주지 않는 사람. 

그 후 나는 말이 많은 남자. 말을 예쁘게 하는 남자를 경계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입에 곰팡내나게 말 없는 남자를 좋아하진 않지만 

적어도 말만 하는 남자는 만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다행스럽게도 그 이후 나의 연애는 

줄곧 이런 식이었다. 

'말 좀 해. 그러다 말 잃어버리겠다' 

그래도 나는 그 말 뿐인 남자 보다 말 없는 그들이 좋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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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10-02-05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를 썼다가 지우고, 썼다가 지우고..

정리가 안되길래 추천만 누르고 갑니다. ^^;

플라시보 2010-02-10 01:33   좋아요 0 | URL
음... 어떤 생각을 썼다가 지우고 하셨는지 너무 궁금한데요? ㅎㅎ

비로그인 2010-02-05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가끔은, 그 말이 필요한 때가 있어요.

플라시보 2010-02-10 01:33   좋아요 0 | URL
물론이죠. 달콤한 말, 예쁜 말이 주는 힘이 얼마나 큰데요.^^
 

저지르고 말았다. 아마 TV 드라마 시리즈를 박스 세트로 산건 섹스 앤 더 시티 이후로 처음인것 같다. TV를 잘 보지 않는 나로서는 드라마에 반하는 일이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들이 사는 세상은 본방사수까지 했었다. 그것도 모자라 그에 대한 찬사를 칼럼으로 좔좔좔 늘어놨다가 데스크에게 빠꾸를 당하기도 했었다. (이유인즉 이 드라마에 너무 미쳐있다는 티가 난다나? 으하하) 

아무튼 나는 노희경 드라마를 거의 다 좋아하긴 하지만 '그세사'를 보면서 완전한 그녀의 팬이자 노예가 되어버렸다. 송혜교도 현빈도 내가 좋아하는 배우는 아니었지만. 노희경의 입에 짝짝 붙는 대사를 치니 그들마저도 사랑스럽게 느껴졌었다. 그리고 배종옥을 비롯한 뽀글머리 작가 김여진 (맞나?) 김갑수, 까칠한 PD (갑자기 이름 생각 안남) 등등 캐릭터 하나 하나가 다 사랑스럽고, 어쩐지 길에서 마주치면 안아주고 싶을 것 같았다.  

사랑에 대해, 참 여러가지의 시선이 있고 참 많은 해석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노희경이 그리는 사랑은 신선했다. 우리와 닿아있으면서도 결코 비루하지 않았고, 드라마니까 가능하지 같은건 별로 없었다. 그러니까 드라마같지는 않되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현실처럼 남루하지도 않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드라마를 사랑한다. 

얼마 전. 지인과 얘기를 나누다가 그녀 역시 그들이 사는 세상에 미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한 시간 가까이 서로가 생각하는 명장면과 명대사를 읊어대다가 안되겠다 이거 사야겠다 하고 결론을 내렸다. 결국 그녀보다 조금 더 큰 작업실을 갖고 있고 벽걸이 TV가 있는 내가 사기로 했다. 그런다음. DVD가 도착하면 절대 혼자 보지 말고 (이게 중요하다.) 꼭 자기를 불러서 첫 회 부터 같이 보자고 했다. 레슨은 어쩔꺼냐 수업은 어쩔꺼냐 했지만 그녀는 '모르겠고~' 라고 말했다. 나중에 그녀에게 그세사 메인 테마 악보를 구한 다음 바이올린으로 연주해달라고 하면 해 줄라나? 으흐  

방금 DVD가 오늘 도착한다고 문자가 왔다. 요즘 알라딘의 배송 시간은 거의 나를 감동시킨다. 주문하면 바로 다음날 도착이라니... 예전에는 끊임없이 배송 추적을 해 가며 언제 도착할지 달달거렸던 기억이 새롭다.  

DVD가 오면 친구를 불러야겠다. 팝콘도 튀겨놓고 맥주도 한잔씩 걸쳐가면서 매 장면 장면 환호하고 소리 지르고 박수 치면서 봐야지. 아줌마들처럼 감놔라 배놔라도 해 가면서...그들이 사는 세상도 좋지만. 이렇게 살 수 있는 내가 속한 세상도 뭐 나쁘지 않다. 아니 조금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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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10-02-03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리해야되는데, 송혜교 단발 머리로 할까봐요.
으흐흐흐~

플라시보 2010-02-03 12:38   좋아요 0 | URL
송혜교 단발 예쁘지요^^ 저도 너무 하고 싶은데 긴 머리만 어울려서 참고 있습니다. ㅎㅎ
 

나는 책을 좋아한다. 

책 안에 든 내용 뿐 아니라 책의 그 하드웨어적 이미지도 좋아하며 

내 집 안에 책이 조금씩 쌓여가는 것을 바라보는 것도 좋아한다. 

어떤 사람들은 책을 잘 빌려주기도 하고, 

때론 어떤 이들에게 자신이 읽은 책을 주기도 하지만 

솔직히 나는 책에 대한 물욕을 버릴 수 없기에 

빌려주는것도 주는일도 (사서 주긴 하지만 내 책을 주진 않는다.) 거의 없다. 

책을 워낙 빨리 읽는 편이라  

어릴때부터 내 방에 읽어야 할 책들이 쌓인적이 거의 없었다. 

매번 책은 내게 갈증을 느끼게 했고 

그 갈증이 궁극에 달할때 비로소 내게 찾아와 단비를 내려줬다. 

그래서 책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언제나 아쉬움 부족함 등의 단어가 거의 동시에 떠올랐다. 

고등학교 시절 

내 친구와 나의 꿈은 

산더미처럼 책을 쌓아두고 

그 옆에 앉아 맛있는 과자를 집어먹으며 

책을 야금야금 읽어대는 것이었다. 

정말 그런 날이 올까? 하며 친구와 나는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우리에게 책이란 

한 권을 읽어치우기가 바쁘게 또 한 권을 사야하는 것이었지 

몇 권을 사놓고 천천히 읽을 수 있는 형편은 되지 않았었다. 

나이가 들어 

책을 살 여유가 조금 더 생겼지만 

그래서 알라딘에서 가끔 꽤 많은 책을 구입하기도 했지만 

언제나 그것들은 너무 빨리 소모되었다. 

읽어도 읽어도 읽고 싶은 책은 끝이 없었고 

날마다 새로운 책들이 나를 유혹했다. 

책을 읽어서 딱히 뭘 하겠다든가 하는건 없었다. 

그저 책 읽는게 취미였다. 

몸을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게으른 내 성정에 

책은 딱 맞는 취미이자 놀이였던 것이다. 

그러나 요즘의 나는 많이 달라졌다. 

읽지 않은 책들이 책장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바닥에까지 쌓여있는 것이다. 

이 모든게 가능한 이유는 그만큼 내가 경제적인 여유를 갖춰서가 아니라 

5년 동안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책 소개를 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교보문고에서 협찬을 받다가 

얼마전부터 내가 직접 출판사에 전화해서 협찬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였다. 

교보문고를 통한 협찬은 

나 아닌 다른 누군가가 수고스러워야 하는 일이므로 

읽고싶은 책을 마음껏 고르지는 못했었다. 

그리고 신청한 책의 100%를 다 받지도 못했었다. 

그러나 내가 직접 그 일을 하게 되자 

일일이 전화를 거는 번거로움만 참는다면 

내가 원하는 책은 거의 모두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한 달에 한 번. 

협찬 책들이 도착하는 기간이 되면 

내 집 인터폰은 쉴새없이 울려댔다. 

그리고 각 출판사에서 보낸 책과, 담당자의 명함과 보도자료를 받아볼 수 있게 되었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지만 

가끔은 방송을 위해 책은 거의 읽지도 않고 

보도자료에 의존해서 원고를 쓰기도 한다. 

옛날 같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다. 

되도록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방송을 위해 내게 그다지 흥미롭지 않은 책을 선정해야 할 때면 

종종 그런일이 발생한다. 

그리고 나는 라디오에 나가서 말한다. 

마치 그 책을 읽은 사람처럼, 사람들에게 책을 권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세요. 라고.. 

지난달에 도착한 협찬 책들 중에 

반 이상은 아직 읽지 못했다. 

그런데 2월이 되어 나는 또 협찬 책을 고르고 출판사에 전화를 해서 협찬을 부탁한다. 

대체 쌓아둔 책들은 언제 보려고... 

거기에다 또 다른 새로운 책들을 추가하다니. 

언젠가는 다 읽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는 있지만 

그 언젠가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요즘의 나는 집에서 거의 책을 보지 못한다. 

늘 할 일들이 쌓여있고 

주로 잠들기전에 책을 보던 습관은 불면증으로 인해 사라져버렸다. 

(약을 먹고 책을 읽으면 도무지 무슨 얘기인지 다음날 까마득히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책을 읽는 속도가 놀랍도록 느려졌다.  

요즘에는 책을 읽기 위해서는 

부러 시간을 내서 카페에 간야한다. 

가서 커피를 시켜놓고 책을 읽는다. 

왜냐면 거기서는 책을 읽다말고 원고를 쓴다거나 빨래를 돌린다거나  

느닷없이 설거지를 하거나 카레를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한 권 한 권 돈을 주고 샀을 때 보다 

책의 좋은 내용들은 변하지 않았음에도 

책이 내게 가지는 가치는 조금 떨어져버렸다. 

여전히 책을 좋아하다못해 사랑하지만 

그 사랑이 어쩐지 오래된 연인의 사랑처럼 

조금은 무덤덤해져버린 기분이다.  

올해들어 내가 산 책은 딱 한권이었다. 

백년동안의 고독. 

그러나 아직 읽지 못했다. 

나의 책 욕심이 

처음으로 미워보이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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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3 15: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03 15: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처음 사랑을 시작할때 우리는 생각한다.  

이 사람이라면 뭐든 견디겠다고, 그리고 절대 이 사람을 아프게 하거나 힘들게 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는 자기 자신을 생각하게 된다. 

그 사람이 나를 좀 봐줬으면 좋겠고, 나를 힘들게 하거나 아프게 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시간이 좀 더 지나가면 

결국에는 나 밖에 보지 못한다. 

내가 상처받는 것이 두려운 만큼. 그 사람에게는 쉽게 상처를 주게 되고 

얼마나 아플지 생각하지 못한 채. 독한 말들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마지막까지 믿는 건 

이것이 사랑을 끝나게 하는 원인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별을 통보하는 연인에게 우리는 묻는다. 

도대체 왜. 

이유가 뭐냐고.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지친 사람에게 우리는 설명을 요구한다. 

그리고 우리가 납득할 수 없다면 

그 이별을 통보한 사람은 내 사랑을 배신한 나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사랑이 시작되는 것은 한 순간일 수 있지만 

사랑이 끝나는건 결코 한 순간이 아니다. 

아주 조금씩 

늘 청소를 해도 가구에 조용히 내려앉는 먼지들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알게 모르게 그렇게 쌓여서는 마침내 이별을 할 만큼의 무게가 된다.  

나와 같을 것이라고 

나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한 서로는 

결국 아무것도 같지 않고 아무것도 닮지 않은 다른 사람들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만나는 동안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얼마나 서로 같은 부분이 많은지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그래서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은 내가 느끼는 그대로 느낄 것이고,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다른 생각은 하지 않을 거라 

고.  

그 사람의 진심이나 사랑의 무게를 생각하는 순간 

어쩐지 손해보는 것 같은 기분. 

내가 더 많이 사랑하면 억울할 것 같은 기분. 

그런것 없이 

그 사람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건 말건 

내가 지금 이렇게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 

그것 하나만 볼 수 있어도 그 사랑은 축복을 받은 사랑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결국  

일방통행 만으로는 사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면 우린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은 욕심을 결코 포기할 수 없을 테니까.  

그리고 나보다 더 그 사람을 사랑할수는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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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0-02-02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개...도...잡....스....럽...지...않...습...니...다..

플라시보 2010-02-03 06:29   좋아요 0 | URL
흐흐.^^

2010-02-03 08: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03 08: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05 04: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05 04:3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