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구
김이환 지음 / 예담 / 2009년 8월
평점 :
품절




소설가 이외수 선생은 이 작품을 선정한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 하고 있다.

'기묘한 구성과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모처럼 만나는 역작이다. 한 뛰어난 이야기꾼의 탄생을 예감한다.'

나 역시 이 평가에 대해 백퍼센트 공감한다.

소설을 많이 읽는 사람들은

비교적 평범한 상황을,

혼자서만 무척 감수성 예민하게 받아들이며

자신의 내면에 대해 끊임없이 주절이지만,

한편으로는 또 쿨 하게 보이고 싶어서

막상 사건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그러면서도 뭔가 특이한듯 표현했지만

결코 특별하지 않은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은 매우 지겹다.

그런 소설들은 세상에 너무 넘쳐흐른다.

그렇다고 아예 SF나 판타지로 가 버리는 것도 그렇고

'요건 몰랐지롱?' 식의 반전이 있는 식스센스 류의 추리 소설도 그다지 흥미롭지 못하다.

 

우리에게 흥미로운, 그래서 오~ 좀 쓰시는데 하는 감탄사를 불러 일으키려면

기존의 것과는 전혀 다른,

그러나 이야기꾼으로서의 본질에 충실한

그러면서도 탄탄한 구성을 자랑하는 동시에

완성도 높은 작품이여야 한다.

어설픈 문체도 안되고

장황한 문체도 안된다.

시답잖은 사건 하나로 질질 끌어서도 안되고

주인공에 대한 감정 이입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분명 매력이 있어야 하며

결말이 깔끔해야 한다.

물론 흡입력이 있어서 한 번 잡으면 놓지 못하게 만드는 매력은 기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절망의 구는 매우 훌륭한 소설이다.

보통 1억원 고료를 타는 작품들이

왜 이 작품에 1억 씩이나 줘야하지 싶은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미실은 정말이지 그 중 최고봉이다. 절대 드라마 미실 정도의 완성도를 기대하면 금물이다.)

절망의 구는 1억을 받을 만 하다 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1억이 아깝지는 않다.

(지 돈도 아니면서 왜 아깝거나 한지는 알 수 없다.)

 

절망의 구는 말 그대로

절망이라고는 표현 할 수 밖에 없는 구(球) 의 출현으로 인해

그저 담배를 사러 밖으로 나갔을 뿐인 주인공과

사람들의 인생 전체를 바꾸어 놓는다.
  

단순한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능력이 수준급이다.

나로서는 처음 듣는 멀티 문학상이 뭔지는 잘 모르겠으나 (2009년에 처음 재정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이 작품이 멀티한 가능성, 즉 다른 매체에서의 활용도가 무지하게 높다는 것은 인정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주제 사라마구의 '눈 먼 자들의 도시'를 떠 올렸다.

비슷한 구석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재미면이나 이야기의 큰 메타포가 상당히 닮아 있다.

 
이런 소설을 만난 것은

비가 줄창 내려서 외출이 불가능한 이 봄에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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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배송 샤르망 36T 차별화된 다보공법 2자(600mm) 고급 책장 - 스프러스옹이

평점 :
절판


책장을 맞춰서 쓰다가 모자라서 합판으로 대충 만든 싸구려 책장을 3개 채우고 난 다음 좀 제대로 된 모양의 책장을 사고 싶었다. 그러다가 이 제품의 3자짜리 책장을 구입했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가격대비해서 매우 훌륭하다.  

보통 책장은 좀 얇아서 책을 많이 꽂아넣게 되면 휨 현상이 일어난다. 이건 합판들은 다 어쩔 수 없다. (내 맞춤 책장도 합판이었는데 약간씩 휘어 있으며 싸구려 합판으로 만들어진 기성품 책장은 더 말할것도 없다.) 그런데 이 책장은 두꺼워서 절대 휨 현상 같은건 일어나지 않는다. 돌덩어리를 얹어도 끄떡 없을 것 같다. 다만 두껍다보니 그만큼 책을 꽂을 실제의 공간은 줄어든다. 3자의 경우 세어보니 약 120권 정도가 수납되었다. (단 아랫칸의 잡지꽂이 제외) 물론 책의 두께에 따라 권수는 차이가 좀 나겠지만 말이다.  

색은 스프러스 옹이를 구입했다. 가장 무난한 색이라고 할 수 있겠다. 원래는 흰색을 구입하고 싶었지만 과연 내가 흰 색을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서 그냥 조금 진한색으로 구입했다. 색이 진해서 그런지 책장이 꽤나 고급스러워 보인다. (스프러스 옹이보다 한단계 더 진한색이 더 고급스러워보임)

마감 처리도 잘 되어 있고 표면의 색상 구현도 좋다. 적어도 이만한 가격에 이런 책장을 구입하기는 힘들것 같다. 다만 배송료가 붙어있다는것이 좀 문제인데 차라리 그걸 상품 가격에 포함했더라면 훨씬 더 좋지 않았을까? (현금으로 그 자리에서 지급하는 거라서 현금 영수증 처리도 안되니 말이다.)  

한꺼번에 여러개를 구입할 생각은 아니지만 당분간은 책장이 다 차면 이 책장을 계속 구입할 예정이다. 거실에는 이미 맞춤책장과 싸구려 합판 책장이 꽉 들어차 있어서 별 수 없이 좁은 작업실에다 놓았는데 현재 내 작업실이 소화할 수 있는 책장은 3자 하나와 지금 리뷰를 쓰고 있는 이 책장이 맥시멈이 될 것 같다. (가구를 옮기고 어쩌고 저쩌고 하면 지금 이 책장을 하나쯤 더 구입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만) 만약 더 넓은 집으로 이사가면 이 책장들을 하나로 붙이면 대단히 근사할것 같다. 그러나 따로 떨어뜨려 놓아도 어설프지 않다. 책장의 외관이 그만큼 훌륭하기 때문이다. 

한가지 불만이 있다면 책장과 책장 사이의 높이가 너무 많이 띄워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칸이 하나쯤 더 나올 수 있는데 각 층의 높이가 높다 보니 책을 놓으면 윗 부분이 조금 붕 뜨는것 같다. 그러나 잡지등을 비롯해서 제 아무리 큰 판형의 책도 충분하게 소화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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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저드 베이커리 - 제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창비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나는 성장 소설을 싫어한다. 이미 충분하게 성장했기 때문에 읽을필요 없음 때문은 아니고  다만 그냥 특유의 분위기 같은게 싫었다. 다 잘될거야. 뭐든 열심히 하면 되는거야 하는 뜬구름잡는 낙관적 파이팅.  넌 아직 어려서 그렇지 언젠가는 더 힘든 어른이 되어야만 하니 지금은 그냥 좀 참으렴 같은 훈계인지 협박인지 모를 미묘한 경계선의 어딘가쯤에 걸쳐있는 내용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애들은 창조한 인물이 어른이다보니 어쩔 수 없이 그리 되었겠지만 드라마에 나오는 애 어른 같은 애들 (그러나 겉으로는 문제아) 이 한결같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도 싫었다. 그리고 여기서 한껏 앞으로 나아간척, 그래서 '어때? 니들이 보기엔 꼰대에 불과한 어른인 내가 제법 니네 마음을 잘 알지 않니?' 하고 과시하는 듯한 허무심드렁주의적으로 나가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호밀밭의 파수꾼도 싫었고 완득이도 그저 그랬다.   

그런 내가 이 소설을 집어들게 된 것은 순전히 불면증 때문이다. 의사는 아무런 부작용이 없다고 호언장담을 했지만 언제부턴가 수면제를 보면 두려워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차라리 잠을 못자면 못잤지 쌩으로 버텨보자 싶어 며칠째 근간에 보기 드물게 책을 열심히 읽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구입했거나 혹은 읽고 싶었던 모든 책이 똑 떨어졌고 그때에 마침 협찬을 받은 이 책 한권만 남았다. 보자마자 생각했다. 완득이 작가? 오...성장 소설로 또 상을 타셨어? 정말 성장소설 좋아하시나보다. 이 생각은 적어도 프롤로그를 읽을 때 까지는 그랬다.   

내가 생각하기에 첫 장이 재미없는 책은 끝까지 재미없을 확률이 거의 95%이다. 왜냐면 쓰는 작가도 초장에 독자들을 휘어잡아야 한다는 것 쯤은 알고 썼을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흡입력이 없다는 것은 그 책이 원래 재미없는 책일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한 다섯 페이지 정도 넘겨도 더 이상 재미가 없을때는 과감하게 그 책을 접어버린다. 내가 그렇게 재미없는 책을 붙들고 씨름하기에는 세상에 재미진 책들이 너무 많으니 시간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저드 베이커리는 꽤 많이 봐준 셈이다. 약 14페이지 정도의 프롤로그를 읽으면서 생각했다. 이 작가. 이 책 왜 썼을까? 그게 너무 궁금해서 책의 뒷날개를 봤다. 그런데 거기에 적힌 이 책의 리뷰가 심상찮았다. 약콩이 익는 동안인지 끓는 동안인지 정확하게 기억이 잘 안나는 소설가 권여선의 리뷰는 같은 동종업 종사자끼리의 상부상조 정도로 본다 하더라도 김지운 감독의 리뷰는 심상치 않았다. 내가 뭐 딱히 아는 사람은 아니지만 어쩐지 이 사람은 부탁이나 인맥을 이유로 이런 리뷰를 써 주지는 않을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믿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끝까지 재미 없으면 권여선과 김지운과 방은진까지 싸잡아 미워해야지 하고 생각했다.  

이 책을 어떻게 얘기해야 할까? 누군가는 이 책을 보면서 '그래 우리도 헤리포터 못잖은 우리만의 독창적인 마법 판타지 소설을 구축해낸거야' 라고 생각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이거야말로 소설판 인생극장 (기억하는지 모르겠다만 빠밤빰 빠밤빰 하는 음악과 함께 이휘재와 이문세가 나왔던) 인거지' 하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냥 뭣보다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성장 소설이 아니라고. 뭐 성장기 청소년이 본다고 딱히 유해할 소설은 아니지만 어쩐지 그들만의 책으로 묶어두기에는 우리에게도 해당사항이 너무 많은 이야기라고 해야할까? 물론 주인공은 성장 소설답게 16살이다. 거기다 그 아이가 위저드 베이커리와 관련해서 겪는 일은 일면 유치하기도 하다. (이 나이쯤 되어서 아직까지 마법같은게 먹힌다면 순수한 인간으로 살 수 있었음을 신께 경배와 찬양으로 감사드리겠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그 외의 일들은 우리와 너무 가까이 닮아있다. 우리의 가장 추악한 부분들 어쩌면 그럴듯하고 고급스러운 어법들로 포장한 우리가 우리도 모르게 저지르고 있는 그 수많은 잘못들과 너무 닮아있다.  

책을 읽다가 중간에 뜬금없이 슬퍼졌다. 그것은 어쩌면 내가 이미 잊었고 극복했다고 믿었던 일들에 대한 기억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위저드 베이커리 점장에게 짠한 연민을 갖지만 외려 나는 인간에 대한 연민을 더 갖게 되었다. 인간들이 이렇게나 못났음에 또 이렇게나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받는 존재들이라는 것에 대해.  

책의 끝 부분은 마치 인터렉티브 영화처럼 독자에게 두 가지 결과를 선물한다. 어떤게 디렉터 컷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마도 후자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그 두 가지 결과는 참 많이 닮아있다. 마치 영화 나비효과처럼 어떤 선택을 하건간에 그 큰 맥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는 것 처럼 말이다. 물론 후자는 희망을 얘기하고 있긴 하지만 글쎄다. 적어도 낮부끄럽고 손발 오그라드는 희망은 아니다.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한권의 책을 집어들고 밤을 새서 다 읽어본 것이 말이다. 대게는 아무리 재미있어도 읽는동안 딴짓이 하고 싶어지는데 이 책 만큼은 적어도 그 정도의 힘은 충분하게 갖고 있다. 다만 프롤로그에서 '뭐야 이건?' 하고 생각하며 던지지 않고 조금만 더 인내심을 발휘한다면 말이다.

끝으로 이건 진짜 궁금해서 하는 말인데 성장소설은 뭘로 분류를 하는걸까? 주인공의 나이가 만18세 미만이면 성장소설인가? 나는 어째서 이 책이 성장소설이라는 장르속의 장르. 액자 속의 액자에 갖혀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또 하나 더 궁금한것은 작가가 이 모든 것을 상상했다면 그는 괴물일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이토록이나 리얼하고 디테일하게 현실의 공포를 조근조근 나열할 수 있다면 분명 그렇다. (오히려 마법사의 부분에 대한 상상력은 그저 그랬다. 차라리 작가가 그려낸 주인공의 현실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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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이 살아있다 2 - Night at the Museum: Battle of the Smithsonian
영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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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고나면 왜 박물관이 살아있지 않아야 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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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09-06-15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한번쯤 보고 싶어지는 40자평입니다~~

플라시보 2009-06-15 20:55   좋아요 0 | URL
히힛 BRINY님. 별점을 보고 선택하심이..^^

하하 2010-10-17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40자 평 재미있네요
 
마더 - Mothe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 주의 : 스포일러 만땅입니다. 영화를 보지 않으신분들은 읽지 않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엄마와 아들이 있다. 아들은 시쳇말로 좀 모자란다. 생긴건 예쁘장하지만 그 나이에 여자 한번 안아보지 못했을 정도로 멍청하고 바보스러운 아들이다. 엄마는 읍내 약재상에서 일을 한다. 그리고 틈틈이 야매로 침을 놓아서 생계에 보탠다. 이들의 삶은 궁핍 그 자체이다. 바보 아들은 일을 할 수 없으며 엄마의 벌이 또한 대단치않다. 엄마는 아들이라면 끔찍하다. 아들이 다칠것 같으면 작두로 자기 손을 썰어도, 거기서 나온 피가 자기 피라는 것도 자각하지 못할 정도이다. 저 정도면 정말이지 모성애라는 것의 정점에 엄마는 가 있는것만 같다.  

하지만 엄마가 아들을 그렇게나 끔찍하게 여기는 것은 죄의식 때문이다. 엄마는 아주 힘들었을때 아들에게 농약을 먹였다. 그리고 아마 정황상 아들은 그때부터 조금 바보가 되지 않았나 싶다. 김혜자는 고백한다. 마음이 약해서 더 강한 농약을 먹이지 못했다고. 그래서 이틀동안 설사하고 죽다 살아났다고.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말한다. 그때 이후로 좋다는건 다 구해다 먹였는데... 아마 이 다음 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반푼이가 되어버렸다는 것이겠지. 그런데 참 희한하게도 아들은 이 일을 기억한다. 다섯살때 일이고 그 날 이후로 바보가 되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이건 마치 말아톤의 초원이가 엄마에게 '그때 초원이 손 놨지' 라고 기억하는 것과 비슷하다. 아이들은 간혹 무척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인생을 뒤바꿔놓을 수 있는 큰 사건을 기억해서 어른들을 놀라게 한다.  

어느 날 이 바보 아들이 살인을 했다고 한다. 기껏 지 이름 석자를 쓴 골프공 하나가 증거물이라고 한다. 엄마는 인정할 수 없다. 아들은 풀벌레 한마리도 못 죽이는 위인이다. 그런데 살인을 했다니. 엄마는 아들 대신 아들의 무제를 자신이 직접 증명해내기로 결심한다. 그 과정에서 엄마는 죽은 여자아이의 비밀을 알게 되고, 어쩌면 아들이 아닌 그 여자아이의 비밀의 남자들 중 누군가가 살인을 했을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엄마는 아들에게 기억을 해 보라고 한다. 그때 혹시 누군가를 보지 않았냐고. 드디어 아들은 기억을 해 낸다. 엄마는 그를 찾아간다. 하지만 거기서 엄마가 들은 얘기는 아들이 살인을 했다는 사실이다.  

엄마는 바보 아들을 위해서 살인을 한다. 아들이 살인을 한 이유는 엄마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바보라고 하면 참지 말라는 것. 아들은 엄마가 시킨대로 한것 뿐이었다. 엄마가 살인을 하고 난 이후 형사가 찾아온다. 진범을 잡았다면서. 그런데 가서 보니 아들보다 대여섯배쯤은 더 모자라 보인다. 그녀는 묻는다. '엄마는? 엄마는 있니?' 그러면서 목놓아 운다. 그 아이에게도 자신과 같은 엄마가 있어야 살인죄를 뒤집어쓰지 않고 빠져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들과 엄마는 이제 비밀을 공유한 사이가 된다. 표면적으로 아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엄마가 살인당시 흘린 결정적 증거를 되돌려준다. 엄마는 짐짓 아무일도 없는듯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쉽지 않다. 그래서 자신만 아는 침자리에 침을 놓고 미친듯이 춤을 춘다. 아니 어쩌면 엄마는 정말로 미쳐버린건지도 모른다. 미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 엄청난 비밀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폭력의 승계 혹은 폭력의 최후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가난은 하나의 폭력이었다. 그 폭력은 엄마로 하여금 아들에게 농약을 먹이고 자신도 죽겠다는 결심을 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엄마에 비해 아들이 약자였으므로 그 피해는 고스란히 아들에게만 돌아갔다. 농약 때문에 바보가 된 아들. 그리고 그 아들은 또 다시 자신보다 더 약자인 여자아이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하필 아들이 죽인 여자아이 역시 그 동네에서 가장 약자의 입장이다. 늙은 할머니와 단 둘이 살며 친척들은 나몰라라 한다. 여자아이는 생계를 위해 할 수 없이 몸을 판다. 돈을 받고 더러는 쌀도 받으면서. 여자아이의 핸드폰이 담긴 쌀독은 그래서 끔찍하다. 엄마는 아들을 위해 또 다시 폭력을 행사한다. 이번에는 아들의 비밀을 알고 있는 힘없는 노인이다. 그리고 그 폭력은 다시 아들보다 더 모자라는 남자에게로 이어진다. 이제 이 사건의 최후 피해자는 누구일까?  

흔히 약자는 착하다고 생각한다. 표면적으로는 맞다. 약자는 늘 강자에게 당하니까. 하지만 약자도 살기 위해 또다시 누군가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그것은 당연하지만 그 약자보다 훨씬 더 약자에게 돌아간다. 영화에서 엄마와 아들은 모두 사회적 약자이다. 엄마는 아들의 친구에게조차 이용을 당해야 할 만큼 약자이다. 하지만 엄마와 아들은 그래도 살아남아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보다 훨씬 약자에게 또 다른 폭력을 행사한다.   

엄마는 아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어떤 행동을 해도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다 용서받을 수 있을까? 나 자신, 내 아이. 내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끔찍한일도 다 정당화 될 수 있는 문제일까? 피해는 돌고 돈다. 그래서 마침내 사회적으로 제일 약자에게 최종전달이 된다. 그리고 그 약자는 살기 위해 또 다른 피해자를 찾을 것이다. 자기보다 훨씬 약한 존재에게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자신에게 돌아온 폭력과 피해를 해소한다. 지금 내가 행하는 하나의 폭력은 결코 끝이 나질 않는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정답일 것이다. 그것은 형태를 다르게 해서 혹은 진화해서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마치 운동의 법칙과도 같다. 폭력을 행사하고 누군가가 피해를 입으면 그 곳에서 모든게 끝난다고 생각하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폭력의 흐름을 추적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폭력이 돌고 돌아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그 길에 어떤 힘없는 이들이 그 폭력으로 인해 쓰러지거나 혹은 자신도 폭력을 행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는지.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에 비해서 조금 덜 세련되어 보이긴 하지만 주제 의식은 가장 뚜렷한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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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1 1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01 14: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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