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 소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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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많이 왔는데 거긴 괜찮아, 엄마?

우리는 집에만 있는데 뭘. 넌 출근하는데 어렵지 않았어?

지난주 금요일에 방학식 해서 오늘은 집이야.

다행이네. 요즘에도 바쁘냐?

일이 끊이지 않네. 그래도 틈틈이 책 읽으며 쉬고 있어.

지난번에 아팠던 건?

많이 나아졌어. 이제는 아이스크림도 먹을 수 있어.

엊그제는 **이가 다녀갔어. 출장 왔다가 잠시 들른 거라고.

걔네도 빨리 이사해야 할 텐데. 거긴 워낙 집값이 비싸서.

둘이 살아도 화장실 하나면 불편한데 넷이서 얼마나 불편할까. 예전엔 푸세식 화장실 하나를 몇 집이서 어떻게 이용했나 몰라.

오늘처럼 비 많이 오면 넘칠 것처럼 출렁거렸잖아. ~~

부모님과 함께 지나온 가난은 예전에 보았던 영화 속 장면처럼 가볍게 주고받을 수 있는 이야기가 되었다.

 

어머님이 자장면을 싫다고 하신 건 아니었지만 어려서부터 우리 집은 가난했었다. 그래서 가난에 대한 문학 작품을 접할 때면 유난히 예민해졌다. 조금 더 기대하게 되거나 조금 더 실망하곤 했다. 이 책은 후자에 가까웠다. 가난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으니 아예 의미가 없던 건 아니었지만 소설 자체로는 나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부와 가난의 차이는 뭘까. 예전에 비해 물질적으로 훨씬 풍요로워진 지금, 소모하는 물질만을 따진다면 그리 많은 차이는 없다. 그렇다면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손안에 빵이 없는 건 같은데 안 사는 경우와 못 사는 경우의 차이.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과 하고 싶은데 못하는 것. 분명 다르다. 전자에는 여유가, 후자에는 박탈감이 흐른다. 생활의 많은 면에서 이런 경우의 수가 적용된다면 영혼이 잠식되어 빈곤감을 느끼게 될 소지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그게 어릴 적의 나에게는 매사 선뜻 나서지 못하는 소심한 성격으로 나타나곤 했다. 가능성의 수의 차이. 가난과 부의 결정적인 차이에 대한 나름의 결론이었다.

 

거지 소녀는 주인공 로즈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피카레스크식 구성으로 그려낸 소설이다. 10편의 단편들은 각각 독립적인 소주제를 지니면서 전체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된다. 가난을 무대로 다양한 상황들이 픽션과 다큐를 넘나들듯 펼쳐진다.

뒷면의 겉표지에 쏟아지는 각종 찬사의 글은 기대감을 품기에 충분했다. 더군다나 무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이라니! 한데 다 읽고 나니 힘이 빠졌다. 재미도 없었고 단편도 어미가 불분명한 말을 들은 듯 결말이 어정쩡했다. 장편으로 보았을 때도 도무지 어느 부분에서 감탄해야 하는지 난감했다.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이 생각났다. 남들 다 입었다고 외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달까. 나와는 맞지 않는 소설이라고 굳이 고상하게 포장한다.

가정폭력, 계모, 학교 내 성폭력, 성추행, 불륜. 분명 자극적이고 드라마틱한 요소가 넘치는 소재로 가득했건만. 상황을 담담하게 그려내는 작가의 문체 때문일까. 작가가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장마철에 사회면이 빽빽한 신문지를 씹어먹은 기분이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표제작 <거지 소녀>에 등장하는 번 존스의 <코페투아왕과 거지 소녀>라는 그림은 가난에 관한 많은 사유를 불러일으킨다. 가난에 잠긴 소녀는 왕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녀는 어디를 응시하는 걸까. 가난 밖에 있는 왕은 어느 정도까지 소녀를 이해할 수 있을까. 왕관을 버리고 사랑을 선택한 왕과 거지 소녀의 이야기. 해피엔딩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에필로그도 동화같이 그려질 수 있을까.

코페투아왕이나 소설 속 패트릭은 모두 가난 밖에 있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타인의 뜻에 따르고 자신을 갈고닦으며 세상의 호의를 얻어야 했던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었다. 부유하기 때문에 가능했다.(p145)’,‘누군가가 어떤 사람을 원하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 안에 무엇이 있어서인데(p147~148)’ 그들이 가난한 그녀들 안에서 발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다름에서 오는 호기심과는 무관한 감정이라 말할 수 있을까.

 

가난한 이는 물리량에 주눅이 든다. 물질 자체의 값어치보다 겉으로 드러나는 요인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어디를 가나 크기가 눈에 띄었고 특히 인상적인 것은 두께였다. 수건과 러그, 나이프와 포크 손잡이의 두께, 그리고 침묵의 두께.(p157)’,‘장소가 사람을 질식시킬 수 있다는 것을(p157)’ 소매가 짧아진 길이의 옷이라든지 코끝 시린 방 안의 온도라든지. 그 기억은 생각보다 오래가서 종종 울컥함과 함께 떠올랐다.

정규직으로 28년을 넘게 일해온 나는 엄청난 부는 아니지만 적어도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는 만큼은 되었다. ‘왜 자신은 항상 잘못된 자리에 있는 것 같은지 의문이 들었다.(p237)’,‘떠나온 삶과의 간극(p334)’이 커서 한동안은 남의 자리에 앉은 듯 어색했다. 지금은 편안하다. 가난으로부터 떠나왔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판단 지표를 나는 물리량에 대한 느낌에서 찾는다. 옷을 전혀 사지 않는 지금, 15년이 지나 목이 다소 늘어진 티셔츠를 입고 다녀도 전혀 서글프지 않다. 구멍 난 양말을 통해 드러나는 엄지발가락에서 수치스러움이 느껴지지 않던 순간, 나는 가난으로부터 빠져나왔음을 느꼈다.

 

가난을 다룬 소설을 읽을 때마다 어린 시절을 꺼내어본다. 소설 속 상황들이 비빌 번호라도 된 듯 자연스럽게 내가 겪었던 갈등, 눈물, 슬픔, 좌절, 선택의 봉인이 풀린다. 그런 순간들이 지금은 감사하다. 굳은살처럼 마음을 단단하게 해주었으니. 그 이전에는 상처가 있고 이는 아픔을 전제로 하니 굳이 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가난했던 시절이 생각났다. 10여 년 이어지던 아버지의 실직, 닥치는 대로 일을 하셨던 어머니, 대학교 1학년 때까지 살았던 단칸방, 방문을 열면 훅 들어오던 바깥 공기, 밖과 별반 온도 차이가 없던 방에서 얼어버린 걸레, 천장에서 떨어지던 빗물을 받기 위해 놓였던 방안의 그릇, 결혼하기 전까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나만의 방, 실업계 진학을 고민했던 중학교 3학년, 과외 아르바이트로 한 번도 제대로 쉬어보지 못했던 대학 때의 주말들을. 그 중심에 자리한 부모님을 떠올렸다. 어려운 시절을 함께 지나온 형제들에게 끈끈한 유대감을 품게 해주셨고, 물리량에 압도당하지 않는 유머 감각으로 자식들을 놓지 않으셨던 당신들로 인해 나는 웬만한 시련에는 비틀거리지 않고 가난의 비를 맞고 있는 이들의 심정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는 심장을 갖게 되었다. 나에게는 52년간 읽어온 나의 부모님이 가난에 관한 최고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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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0-07-31 09: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가 생각한 ‘가난‘소재의 줄거리가 아니어서 좀 실망했어요. 게다가 연작소설이라 시간과 배경이 그냥 휙휙 점프해버려서 곳곳의 구멍들이 되게 아쉽더라고요. 역시 저는 장편이 더 잘맞다는걸 또한번 느꼈습니다ㅎㅎ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과 하고 싶은데 못하는 것.‘ 이 말에 너무 공감합니다. 하나 더 붙이면 ‘하고 싶고 할수도 있는데 못하는 것‘이 저의 모습이랄까요. 뭘 선택하든 단가를 따져보게 되더라고요. 비용, 시간, 에너지, 리스크, 영양가, 이득 등등. 그러다보니 손해를 안보려고 선뜻 나서질 못해요. 포기하면서 나름의 타협을 한달까요. 어쩌면 저는 이런 내용들을 작품에 기대했었나 봅니다.

말씀하신 가난의 물리량이 참 흥미로워요. 낡은 옷만 걸쳐입어도 수치스럽지 않다는 건 스스로에게 당당하기 때문이라 보여집니다. 어릴때 늘 유행만 쫓는 친구들을 보면서 저는 너무 한심해했었거든요. 무조건 비싼 걸 사야 자신의 가치가 올라간다고 여기는 부류가 되고 싶지 않았어요. 개성도 전혀 없고요. 어린 나이에 저도 나비종님과 비슷한 생각을 가졌던거 같아요. 남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 이전에 내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믿었고, 그 믿음대로 행동하니 자존감이 생기더라고요. 제 인생에서 값진 교훈 중 하나였습니다. 그 덕분에 이렇게 책리뷰도 쓰고 나비종님과도 알게되어서 대화를 나누고 있네요 ^^

작품성으로는 나쁘지 않았지만 완성도면에서는 영 거시기했던 책이었는데 무사히 완독하셔서 축하드립니다. 다음에는 더 괜찮은 작품을 선정해볼게요! 7월도 이제 몇시간 안남았는데 마무리 잘 하시고 좀더 나은 8월을 맞이하시길 바랄게요! 고생하셨습니다^^

나비종 2020-07-31 10:45   좋아요 1 | URL
서술 방식의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같기도 해요. 제가 원한 건 하늘에서 땅까지 강하게 내리꽂는 소나기 내지는 가느다랗더라도 한 줄로 이어지는 빗줄기 같은 거였나 봅니다. 작가는 천천히 내리는 눈발처럼 하늘하늘 담담하게 글을 써내려갔는데 말이죠.
무언가를 하기까지는 한 사람의 온 에너지가 간절하게 모여야 된다고 생각해요. 하고 싶고 할 수도 있는데 못하는 것이 있다면 무의식적으로 하고 싶다는 마음이 덜해서가 아닐까요.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 그 정도로 사고 싶지는 않다, 뭐 이런^^

자존감. 살아가면서 매우 중요한 요소인 것 같아요.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고 존중해야 하는 사람은 바로 나여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그걸 깨닫기까지 참 오래도 걸리더라구요.^^

어떤 작품을 선정하셔도 최상의 의미를 끌어내는 능력의 소유자라 작품 선정은 필꽂히시는대로 하셔도 아~~~무 상관없습니다만ㅋㅋ
물감님도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맞이하시길~~^^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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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런 소설이 다 있나 싶다가, 분명 한글인데 도무지 의미가 들어오지 않는 글자 배열에 당황하다가, 한 번에 이해가 안 되는 문장들 앞에서 몇 번이나 도돌이표를 찍는 게 나만의 문제인가 소심해지다가, 주춤주춤 생소한 용어들을 일일이 어학 사전에서 찾는 시간에는 살짝 화도 나다가, 어느 순간 몰입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던 책. 드라마틱한 독서 과정을 지나온 책이었다.

가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심사위원들이 선호하는 목소리가 있다. 뻔하지 않은 분위기와 질감으로 뻔하지 않은 울림을 나타내는, 세상에 없던 목소리이다. 소설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철수나 영희도 할 수 있는 이야기라면 굳이 나여야만 하는 이유는 없는 거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작가 테드 창은 독보적이었다. ‘이기에 설 수 있는 우주 좌표계에서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며 오로지 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로 과거와 미래를 종횡무진하며 현재에 머무는 나의 머릿속을 헝클어뜨렸다.

 

은 표제작 <>을 포함하여 9편의 단편 소설로 이루어진 소설집이다. 주제도 다르고 등장인물도 다르지만, 각각의 소설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묘하게 닮아있다. 옴니버스식 이야기들을 보는 느낌이랄까. 작품들에서 내가 찾은 공통점은 과거, 미래 등의 시간, 그 안에서의 인간의 선택과 기억, 그 선택을 하는 자유의지이다.

선택이란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선택해야 할 상황도, 그 결과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도 담담하게 서술되어 있다. 작가의 문장을 따라 이야기 속 인물을 좇아가며 나를 돌아보게 된다.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무엇이 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당신이 무엇을 믿느냐(p95, <우리가 해야 할 일>)’라는 문장은 SF 소설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시사한다. ‘당신이 저를 위해 그것을 선택해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제가 저 스스로 그것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p393, <옴팔로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의 나를 바꾼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한 기억이 있다. 한데 막상 이런 일이 현실의 내게 가능해진다면? 많이 방황할 듯하다. 나는 무엇을 바꾸고 싶을까. 그것을 바꾼다고 현재의 내가 얼마나 달라질까.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욕심을 부리며 어디에도 선뜻 발을 내딛지 못할 수도 있겠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은 타임슬립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우주선을 타고 가는 대신 드라마 <도깨비>에 나오는 문처럼 커다란 원형의 문을 들락거리며 과거와 미래의 자신을 만난다. 특이한 점은 시점이 다른 자아들의 공존이다. 20년 뒤의 나이 든 내가 젊은 나를 만나 대화를 나눈다. 그게 과학적으로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은가는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이 소설에서 끌어올려야 하는 것은 자신의 의지로 한 선택의 결과를 직시하고 똑바로 자신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과거와 미래는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 어느 쪽도 바꿀 수 없고, 단지 더 잘 알 수 있을 뿐이다.(p56)’, ‘그 무엇도 과거를 지울 수는 없습니다. 다만 회개가 있고, 속죄가 있고, 용서가 있습니다. 단지 그뿐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합니다.(p58)’

 

8년 전쯤이었나. ‘5천만 년 후의 인간이라는 제목의 일러스트레이션을 인터넷에서 본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거대한 두뇌, 감각기, 생식기를 제외한 나머지 기관은 쇠퇴하여 공상과학영화 <ET> 주인공의 응용 버전처럼 생긴 모양새였다. 자신의 뇌를 해부하여 들여다보는 해부학자, 주기적으로 교체하여 장착하는 허파가 등장하는 <>. 도무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미래 인간의 모습이다.

나는 안이 밖으로 나온 인간이었다.(p73)’ 현미경으로 해부한 자신의 뇌를 들여다보는 디테일한 묘사, 기억의 원천을 탐구하려는 과학자로서의 집념이 묘사된 문장은 현실감이 넘친다. 머릿속으로 그려가면서도 내가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 걸까 자신은 없었지만, 상상력의 극치를 보는 기분에 감탄이 나왔다.

어떻게 생명력과 공기를 접목할 생각을 했을까. ‘공기는 사실상 우리의 사고가 각인되는 바로 그 매체였다.(p75)’,‘생명의 실제 원천은 기압 차이이다.(p78)’ 기압 차이로 바람이 불 듯 숨을 쉴 때 우리의 몸으로 들락거리는 공기 역시 기압 차이로 움직인다. 결국, 숨을 쉬며 생명이 유지되니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다. 내용이 다소 난해하여 작가가 의도한 주제에 얼마나 가까이 접근했을지 자신은 없다. 다만 신기한 점은 <>을 읽고 나서부터 숨 쉬는 패턴을 문득문득 의식하게 되었다는 거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존재일까.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은 진실과 기억에 관한 소설이다. 완벽하게 과거의 기억을 불러오는 검색 툴이 등장하면서 주인공들의 혼란은 시작된다. 진실이라고 믿고 있던 기억 속 이야기가 사실은 진실이 아니었던 거다. ‘한편으로는 사실에 입각한 진실, 다른 편으로는 작가의 감정에 입각한 진실이 존재한다. 이 두 가지의 진실이 일치하는 지점은 그 어떤 외부의 권위에 의해서도 미리 결정될 수 없다.(p299~300)’

명절에 가족들과 모여서 과거에 겪었던 이야기를 하다 보면 간혹 놀랄 때가 있다. 분명 같은 경험이었는데 구성원마다 전혀 다른 이야기로 기억하고 있음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수많은 이야기로 이루어진 존재이다. 기억이란 우리가 살아온 모든 순간들을 공평하게 축적해놓은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애써 선별한 순간들을 조합해 만들어낸 서사이다.(p301)’ 무의식적으로 과거의 기억이 자신을 중심으로 각색되는 소설 속 장면은 진실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1996년에 출시되어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켰던 다마고치라는 휴대용 디지털 애완동물이 있다. 휴대폰에서도 비슷한 메뉴가 등장하여 화면 속 강아지에게 밥을 주고, 재워주고, 놀아주고 했던 적도 있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디지언트라 불리는 미래의 디지털 애완동물에 관한 이야기이다. 숨을 쉬는 진짜 애완동물에서 노인과 같이 놀아주는 로봇 동물의 등장까지는 우리의 현실 버전인데 소설을 읽다 보면 조만간 미래에 일어날 일인 듯 공감 가는 상황이 펼쳐진다.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것은 그에 따른 책임을 동반한다. 인공지능 관련 얘기가 오갈 때도 항상 마침표는 윤리적 판단이었다. 생명 복제가 한창 이슈로 떠오를 때도 기술적인 문제와 함께 복제동물의 정체성 문제가 못지않은 존재감으로 드러났듯 과학의 마침표는 윤리 문제로 찍혀야 옳다. 그게 곧 기계와 인간의 차별점이고 인간 존재의 이유가 될 테니까.

그들이 원하는 것은 인간처럼 반응하지만 인간을 대할 때와 같은 책임은 질 필요가 없는 존재이며(p234)’라는 문장에서는 인간의 이기적인 심리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마르코를 존중하고 싶다면 그를 인간처럼 대해야 할까, 아니면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까?(p241)’ 나는 존재 자체를 그대로 인정하는 후자 쪽에 마음이 간다. 하지만 무엇이 옳은 걸까 판단하기는 어렵다.

 

나와 똑같은 내가 다른 세상에 존재한다면?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은 평행세계에 존재하는 평행자아에 관한 이야기이다. 평행세계에 존재하는 다수의 자아들은 프리즘이라는 장치를 통하여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던 결과로 살아가는 또 다른 자아의 모습을 거울 보듯 바라보며 대화를 나눈다.

소설에서 인상 깊었던 내용이 있다. 히틀러의 집권을 저지하려면 어린 히틀러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가 수태되기 한 달 전으로 돌아가 산소 분자 하나만 교란시키면 된다고. 그러면 수정되는 생식 세포 자체가 달라질테니 전혀 다른 생명체가 태어날 터이다. 나비 효과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했다. 작은 변화가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선택을 주제로 예전에 나왔던 예능 프로그램도 생각난다. 오른쪽을 선택했을 때 펼쳐질 결과와 왼쪽을 선택했을 때 펼쳐질 결과를 각각 보여주는 방식이다. 힘겨운 일에 부닥칠 때면 가끔 생각했다. 내가 다른 선택을 내렸더라면 나의 삶이 달라졌을까. 소설 속에는 무엇을 선택했든 삶이 별반 달라지지 않는 사람이 등장한다

비슷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판단하려면 그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를 면밀히 관찰하면 된다고. ‘선택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내리는 모든 결정은 당신 성격의 일부가 되고, 당신이라는 사람을 형성하니까요.(p476)’ 나는 어떤 선택을 내리며 살아왔던 걸까.

 

생각지도 않은 이야기와 마주쳤을 때 느껴지는 생경함이 있다. 오늘 산 이불을 덮고 자는 기분이랄까. 피부에 맞닿는 낯선 감촉, 다른 세상의 냄새로 인해 처음 몇 분간은 겉도는 김치찌개를 떠먹는 듯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다. 나의 체온과 이불의 온도가 같아질 만큼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내 세상은 이불을 품으며 그 부피만큼 확장이 된다. 도무지 적응될 것 같지 않던 책이 천천히 읽는 시간을 지나오면서 익숙한 온도가 되었나. 그만큼 상상의 폭도 넓어진 기분이다.

과거에 내가 했던 수많은 선택을 돌아보며 나를 중심으로 재배치되던 기억의 이기심을 반성하고 미래에 내가 할 많은 선택을 상상했다. 나무보다는 숲을 보게 만들어준 책이다. 책 속에서 무더기로 방출된 과학 지식의 빅뱅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건 빠르게 확장되어가는 시간의 흐름에 내 삶을 실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선택을 하는 것이었다. 내 삶은 나의 자유의지가 끊임없이 무언가를 선택하며 만들어낸 결과물이었고 그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은 지식의 책이 아니라 지혜의 책이었다. 

 

 

p106, 밑에서 6째줄: 에니매이터들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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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수업에서 나를 만나다 - 교사의 내면을 세우는 수업 성찰
김태현 지음 / 좋은교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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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는 전문직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찜찜했다. 아무리 돌아보아도 의사, 판사 등과 같은 전문성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내 수업은 뜻대로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다. 45분에 마음이 들뜨다가도 45분에 나머지 시간이 우울해진다. 하루하루가 롤러코스터의 연속이다. 수업 시작 전이면 매번 긴장한 상태로 교실의 앞문을 연다. 학부모님이나 학생들과의 대화 기술에만 다소 여유가 생겼을 뿐 생활 지도도, 진로지도도 어려운 건 마찬가지이다. 한데 이 책을 보니 생각이 달라진다. 저자와 같은 교육관으로 수업을 진행한다면 과연 전문직이라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류의 책을 즐겨 읽지는 않는다. 종일 요리만 하던 요리사가 집에서 요리를 하지 않는다거나 가수들이 사석에서는 노래하기를 꺼리는 것과 비슷한 심리일 거다. 수업하는 데 소모되는 에너지도 상당한데 굳이 시간을 내서 읽는 책에서까지 수업을 대면하고 싶지 않아서이다. 책꽂이 구석에 놓고 한동안 읽기를 미루다 독서 모임 날짜의 압박감으로 첫 장을 펼쳤다.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교과서적인 이야기, 공개수업 후 오고 가는 흔한 이야기들을 예상했다.

 

힘을 빼고 펼쳐서인지 책에 실린 내용은 생각보다 큰 파장으로 나를 흔들었다. 어려운 책이 아니었는데도 책장을 빨리 넘길 수가 없었다. 책을 읽는 기간 내내 교실에 들어서면 교사가 의도하고 있는 배움이 무엇이었는지(p41)’라는 문장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나는 이 수업에서 어떤 배움을 의도했지?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질문이었음을 깨달은 나는 당혹스러웠다.

낯선 느낌이었다. 이제야 학생들의 표정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업하다 고개를 돌렸을 때 우연히 학생의 얼굴이 눈에 띈 적은 있어도 의도적으로 학생들의 표정을 하나하나 살펴본 기억은 없다. 나는 누구를 바라보고 수업을 해왔던 걸까.

교단에 처음 서는 신규교사처럼 당황스러웠다. ‘‘수업을 왜 하는지(Why)’.‘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What)’보다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How)’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p73)’라는 문장을 읽는 순간 정곡을 찔린 듯했다. ‘, 무엇을은 내게 고민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교사이니까 수업을 하고, 교과서에 있는 것을 가르쳐야 하는 거지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라니! 저자의 말대로 나는 주로 어떻게에 방점을 두었던 거다. 28년 동안 학생들과 마주하며 내가 가르친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수업을 꽤 잘하는 교사라고 생각해왔다. 교생선생님이 와서 다른 과목 수업을 참관하고 싶다고 조심스럽게 문의해오면 언제든지 오라고 호방하게 말하곤 했다. 그만큼 자신이 있었고 그만큼 열심히 가르쳤으니까. 하지만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나는 열심히는 가르쳤을지 몰라도 학생들에게도 그만큼의 배움이 생겼을까. 그렇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한 번도 학생의 시선으로 가르치는 나를 바라본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썰렁한 농담으로 학생들을 웃겨주고 교과 지식을 쉽게 암기하는 노하우를 전수해주는 행위를 잘 가르치는 것으로 착각했던 거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시험 대비용 수업을 지향하고 있었다. 지식 암기의 기술은 배움과는 차원이 다른 것을.

배움과 입시의 공존이 가능할까. 늘 딜레마처럼 안고 있는 문제였다. ‘배움과 입시가 같이 갈 수 있고, 수업에서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배움이 있는 수업이다.(p80)’ 교사라면 누구나 안고 있을 고민을 이렇게 시원하게 터뜨려 주니 속이 후련했다. ‘진도를 나가야 하니까. 시험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무의식적으로 배움과 입시를 서로 다른 갈래 길에 세우고 있던 나는 학생들의 내신을 위한다는 그럴듯한 명목으로 배움 자체를 아예 수업에서 배제하고 있었던 거다. 내 수업이 기대고 있던 핑계가 허물어졌지만, 대신 저자의 문장을 통해 희망을 품게 되었다.

 

5년 전, 행성의 특징을 주제로 모둠별 공개수업을 한 적이 있다. 31명의 학급 학생보다 참관하는 교사 수가 더 많아 칠판 쪽을 제외한 교실의 세 면이 교사들로 포위된 채 진행되었던 수업이다. 심적으로 부담이 컸던 수업이라 아이디어란 아이디어는 다 끌어모아 겉에서 보기에는 찬란했던 수업이었다. 몇 번의 컨설팅 협의회로 내용도 보완해가며 몇 달 정도를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 모둠별 학생들은 행성별로 우주 뉴스, 가상 체험, 뮤직비디오 형식으로 사전에 UCC를 쵤영하여 수업 시간에 시연하고, 과학송을 만들어서 현장에서 발표하는 모둠도 있었다. 수업 후 이어진 강평회에서도 신선한 아이디어를 도입했다며 반응은 꽤 좋았다.

학생들은 주말에도 학교에 나와서 UCC를 촬영하며 미션을 수행하려는 열정을 보였고, 졸업 후 찾아와서도 모둠별로 준비했던 기억을 인상 깊게 기억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나는 중요한 요소를 빠뜨리고 수업을 했음을 깨닫는다. 어떻게 하면 다양한 활동 장면을 보여줄까에만 몰입을 한 나머지 학생의 입장에서 얼마나 많은 배움이 일어났는지 관심이 없었던 거다. 그때의 수업에서 의미 있는 배움이 생겼을까. 그렇다고 답할 자신이 없다.

 

내 수업에서 부족했던 것은 경계였다. 작년까지의 수업을 되돌아보면 일부 집중하지 못하는 학생들로 인해 간혹 소란해지는 분위기를 제대로 잡지 못했다. ‘‘경계가 있지만 존중이 있는 수업을 우리는 지향해야 한다.(p105)’ 겉으로는 학생들을 존중한다고 말하며 내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볼 때면 포기하고 좌절하는 마음을 숨기고 의도적으로 그들을 무시했다.

45분 내내 열심히 수업해서 뿌듯해했던 기억도 난다. 혼자만 신나서 떠들었던 내 모습이 학생에게는 어떻게 비추어졌을까. ‘수업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사의 모습보다는 학생의 모습을 담아야 한다.(p42)’,‘가르침과 배움은 결코 함께 가지 않는다.(p149)’는 문장 앞에서 마음이 편치 않다.

학생들에게 대화에 참여하기 위한 여백을 주었던가. 가끔 던지는 질문에서도 잠시를 못 참고 내가 먼저 냉큼 답을 말해버리기 일쑤였다. ‘우리가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이유가 학생의 생각을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가 가르칠 내용을 학생의 입을 통해서 전달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p159~160)’ 촌철살인의 문장에 세수도 안한 민낯을 들킨 이처럼 당혹스러웠다. 교사라서 알 수 있는 심리, 교사라서 할 수 있는 공감이었다. 학생의 시선에서 나는 어떤 교사였을까.

 

내가 생각하는 좋은 책은 읽기 전과 후의 나를 달라지게 하는 책이다. 남들이 아무리 좋다고 찬사를 보내도 내 행동의 변화를 끌어내지 못한다면 내 기준에서는 그저 그런 책으로 분류된다. 이런 이유로 교사, 수업에서 나를 만나다는 매우 좋은 책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수업에 들어갈 때마다 아이들의 눈동자를 좇았다. 그들의 반응과 표정을 살폈다.

좋은 수업은 무의미한 교과 지식에 이름을 붙여 의미 있는 지식으로 바꿔주는 수업이다.(p180)’,‘교과 지식은 삶 속에서 복원되어야 한다.(p185)’,‘‘내가 생각하는 좋은 수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자신만의 답을 해야 한다(p72)’는 문장 앞에서 한참을 머물며 좋은 수업을 생각했다. 좋은 수업도 좋은 책처럼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수업을 받은 후에 학생들의 행동이나 인지나 감성이 달라졌다면 배움이 일어났다는 증거일 테니.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당장 내일의 수업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난주 금요일에 기말고사가 끝나고 내일 할 수업을 구상한 것이 있는데 전부 다 바꿔보려 한다. ‘가르침에서 배움으로 기준을 바꾸니 무엇을 버려야 할지 판단하기가 훨씬 쉬워졌다. 지금이라도 달라지고 싶다. 수업에서 를 만나고 학생들과 대화를 하고 싶다. 좋은 수업을 상상하니 오랜만에 설렌다. 코끝이 찡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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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9 2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7-20 2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 제로 편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개정판)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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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여행을 하고 돌아오면 이런 기분일까. 정신없이 꿈을 꾸다 퍼뜩 눈을 떠보니 집이었다는 광고 속 장면도 떠올랐다. 동화 <파랑새>의 아이들이 깨달은 사실처럼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기 위한 여정이었다. 마지막 장을 덮으니 한 줄의 문장이 남았다. 그 순간의 뭉클함은 556쪽을 건너온 나의 시간에 주어진 선물이었고, 책 안에 담겨 138억년을 건너온 우주의 시간이 주는 감동이었다.

학창 시절에 교과서에서 보았으나 정확히는 몰랐던 용어들이 드문드문 있었고 생소한 내용도 많았다. 종교, 사상, 인물, 과학, 역사적인 사건들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복잡한 지식은 잠시 내게 머물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증발했지만, 결국 굵직한 느낌표 하나가 선명하게 새겨졌다. 제로 베이스에서 세상을 향해 출발하는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지, 어느 방향을 향해 첫걸음을 옮겨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작가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제로편은 지식보다는 지혜를 얻는 데 방점을 찍어야 하는 책이었다.

 

우주와 인류를 보여주는 1장과 2장에서 다중 우주를 건너올 때는 물속에 떨어뜨린 먹물 한 방울처럼 갑자기 마음이 확 넓어지는 듯했다. 거리에서 사람들을 볼 때면 각기 다른 우주들이 비눗방울처럼 둥둥 떠다니는 장면이 연상되었다. 4차원이 사유의 한계였던 나에게 0차원과 11차원은 등장부터가 충격이었다. 존재 가능성을 떠나 누군가는 그런 세상을 상상했음이 놀라웠다.

아이들이 각기 다른 우주라는 생각이 들자 많은 행동이 이해되었다. 자신만의 법칙으로 움직이는 다른 세상일 것이니 말이다. ‘담임교사라는 시도 지었다. ‘일찌기 만나지 못한/ 스물 여섯 개의/ 각기 다른 우주를/ 마주하는 일이다/ 이전에도 접한 적 없고/ 이후에도 접할 일 없는/ 단 한 번의 우주를// 내 작은 몸짓으로/ 비눗방울 우주가 탓/ 허물어질까/ 무심코 한 행동에/ 당구공 우주가 퉁/ 튕겨져나갈까// 그러므로/ 매번 설레는 일/ 매순간 긴장되는 일/ 블랙홀같은 우주에 훅/ 빛으로 뛰어드는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3장에서 7장까지는 베다, 도가, 불교 등의 동양 사상과 철학, 기독교 등의 서양 사상이 등장했다. 위대한 스승들은 한결같이 자아는 곧 세계라는 하나의 과녁을 가리켰다. ‘범아일여, 도덕일치, 일체유심조, 관념론, 내면의 신에 이르기까지 표현의 방식만 달랐을 뿐 의미하는 바는 같았다.

 

지나온 삶에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몇몇 장면들이 있다. 블랙홀 안에서 헤매듯 한 줄기 빛조차 느껴지지 않던 공간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의 중력으로 매일 당겨지던 시간들,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 다가온다 해도 전혀 아쉬운 마음이 생길 것 같지 않던 상황들, 수분 잃은 얼굴처럼 푸석거리던 감정들. 가까스로 버티며 지나왔던 길들이었다. 그렇게 된 것이 환경이나 다른 사람의 탓이라 생각했다. 상처가 아물고 흉터가 생길 무렵에는 내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지만 이마저도 정답은 아니었다.

당신이 세상을 보는 유일한 자이고, 세상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최후의 존재다.(p553)’ 닫아두고 있던 문들을 열고 깊이 들어가 보니 나의 세상을 슬픔으로 채우고 어둠으로 색칠하며 걸어온 건 나 자신이었다. 과거의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다른 세상이 가능할 수도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는 건 선택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세워놓은 자기합리화라는 방어막이었다. 복잡하게 흐트러져 있던 과거의 사진들이 앨범 속에서 깔끔하게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탁월한 통찰력으로 세상과 자아의 합일을 소개해준 작가는 그 세상으로 들어가는 구체적인 실천 방법까지 일러 주었다. 그의 친절함에 다시 한번 반했다.

첫째, 세상의 목소리를 의심할 것. 둘째, TV를 끄고 SNS를 닫고 나의 하루 중 버려지고 흩어진 시간을 모아 나의 시간을 만들 것. 셋째, 그 시간을 이용해 내면의 시간을 가질 것. 넷째, 자신과도 대화하지 않는 침묵의 순간을 경험할 것. 다섯째,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익숙해지고 그것이 나의 즐거움이 되면 이제는 현실로 나아갈 것.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생각을 경청하고 말을 줄이고 그 안에서 배우고 너그러워질 것. 여섯째, 남은 삶에 대한 거시적인 계획을 세울 것. 일곱째, 천천히 나아갈 것.

두 페이지에 걸쳐 에필로그에 나와 있는 문장들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다. 천천히 따라가는 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정갈해졌다. 마음을 청소하고 새로운 우주를 담고 싶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니 세상이 달라 보였다. 깨어있는 첫 공기를 들이마셨다. 나의 문을 열어 천천히 세상을 담았다. 이미 내 안에 있으니 담는다기보다는 선택해서 드러낸다는 표현이 적합할까. 찬란한 그림이 그려진 그림을 검은색 크레파스로 덧칠하고 조금씩 칼로 긁어내는 스크래치 기법처럼. 이 사람을 보고 저 소리를 듣고 이 물건을 만지고 저 향기를 맡고 이 음식을 음미하고. 선택하고 싶지 않으면 선택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내게 선택되지 못한 대상은 다른 세상에는 존재할지 몰라도 나의 세상에는 없는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 풍경들은 감각 기관을 통과하는 순간 내 안의 우주에서 유일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나만의 의미가 되었다.

세계를 본다는 것은 곧 나의 마음을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마음이 마음을 본다.(p244)’ 세상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었다. 날마다 나의 세상을 만들고 있는 건 나의 삶을 살아가는 단 한 사람이었다. 내가 만든 우주는 내 안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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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황 2020-06-30 19: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동하고 또 감동해요 멋져요~~~ 책을 읽는 맛을 더하기(+) 해주는 리뷰는 매번 만남을 기대하게하는 설레임입니다. ♥

나비종 2020-07-19 20:35   좋아요 0 | URL
감사해요, 언니^^ 그날 잠시 얼굴이라도 비추고 싶었는데 너무 어지러워서 병원도 겨우 갔거든요. 이번에는 체한 게 생각보다 오래 갔네요. 약도 몇 주치를 먹고 위가 많이 약해졌나봐요. 몸이 깔끔하게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이제 겨우 드문드문 책을 읽을 정도는 되어요. 중요한 시기에 아팠어서 여러 가지 일정이 꼬여버렸어요.ㅠㅠ
학교에서 하는 독서모임 책의 독후감을 방금 올렸어요. 이제 우리 책도 얼른 읽으려구요. 다음 주에 봬요~^^
 
베니스의 상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6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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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매력은 세월의 묵직함을 건너야 빛을 발하는 듯하다. 너무나 많이 알려진 이야기. 1파운드 살덩이의 난제를 핏방울 패러독스로 깔끔하게 해결하는 통쾌함. 동화를 읽던 10대에 접했던 <베니스의 상인>은 엄청 유명한 작가가 가볍게 던진 유쾌한 이야기 정도의 의미였다.

크로키로 묘사되었던 인물을 정밀묘사로 접한 기분이 이와 비슷할까. 생경하면서도 생생하게 다가오는 양감과 질감에 제목만 같은 전혀 다른 책을 읽은 것만 같아 당황스러웠다. 해설과 옮긴이의 말 등을 제외하면 불과 150여 쪽 되는 책이 남겨 놓은 건 혼란과 물음표였다.

 

금 상자, 은 상자, 납 상자. 극의 흐름상 금도끼와 은도끼 등 쌍도끼를 들고 나타난 산신령의 이야기처럼 정답이 이리라는 건 쉽게 예상되었다.

많은 이들이 열망하는 허울 좋은 가치. 이를 대변하는 금 상자를 마주한 등장인물의 어리석음은 쉽게 이해가 되었다.

문제는 은 상자였다. 몇 번을 읽어봐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당시 화폐로 이용되었다던 은을 사람과 사람 사이를 내왕하는 창백한 천역의 물건이여(p84)’라 묘사한 문장이 있다. 이게 연관이 있을까. 선택할 때 너무 심사숙고하기에 낭패를 본다고도 했다. ‘그림자에 입 맞추는 자들은 / 그림자의 축복만을 받는다.(p68)’는 문장도 있다. ‘얻기에 합당한 만큼의 것이라. 이 문구가 정확히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거기 잠깐 머물러 공평무사한 손으로 그대의 값어치를 달아보아라.(p59)’라는 문장도 있는데, 한 사람의 값어치를 정확하게 매기기는 어렵지 않은가. 이런 이유로 은 상자는 작가의 정답이 아니었던 걸까.

모든 것을 내놓고 모험을 해야 선택할 수 있다는 납 상자. 여기까지는 수긍이 가지만 무엇을 기약해주기보다는 위협하는 듯하지만, 그대의 소박함은 웅변 이상으로 나를 감동시킨다.(p84)’라는 선택의 이유는 다소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생각이다. 3종 세트를 끼워 맞추기 위한 선택지였다는 느낌이랄까.

나라면 납이 너무나 정답 스멜이 뻔해서 은과 납 사이에서 갈등했을 것 같다. 나는 최종적으로 어떤 선택을 했을까? 아직도 갈등하는 햄릿 버전이다. 쩜쩜쩜.

 

사소하게 지나칠 뻔했던 문장 몇 개가 마음에 남는다. ‘달빛이 밝을 때는 저 촛불이 보이지 않았어요.(p141)’,‘무엇이나 환경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덜 좋기도 하는 거야.(p141)’ 너의 눈을 믿지 말라며 색상 대비가 펼쳐진 장면이 떠오른다. 두 눈 부릅뜨고 바라봐도 여전히 다른 색상으로 보이는데 같은 색상이라는 날도둑 같은 현상은 배경의 중요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세상만사는 적당한 때와 장소가 조화를 이룰 때 행해져야 비로소 정당한 칭찬을 받으며 완벽을 기할 수 있는 것이다.(p141)’ 문학에 있어 적당한 때와 장소라는 건 시대상을 반영한 이슈가 녹아 들어있을 때일 터이다. 샤일록은 욕심 많은 악인이기만 한가? 앤토니오는 모든 면에서 선인이기만 한가? 기독교인과 유대인 간의 대립을 차치하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까? 두 인물 다 100% 의 양극에 세우지는 못하겠다. 사회적인 배경은 행위의 동기로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요인으로 자리하기 때문이다. 유대인을 적대시하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 작가의 과감함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게 바로 납 상자를 선택한 바싸니오의 모험 정신일까.

 

작가는 마지막까지 값어치에 대한 질문의 끈을 놓지 않는다. 친구 앤토니오의 목숨을 살려준 판사가 바싸니오에게 요구했던 반지는 사랑하는 포오셔가 준 것이다. 결국 바싸니오는 사랑의 증표와 우정 사이에서 망설이다 반지를 건넨다. 에피소드 느낌의 이 장면은 독자에게 가치 선택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물건과 사람 가운데 선택지는 당연히 사람이어야겠지만, 사람의 마음이 담긴 물건이라면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현실에서는 이로 인해 연인이 결별하는 일도 충분히 생길 만하다.

가치와 선택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책. 10대 이후로 몇십 년을 건너와 읽은 <베니스의 상인>은 이런 의미로 다가왔다. ‘금방 값지던 것이 또 금방 값없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p11)’ 가치에는 정답이 없으니 우리는 난감한 상황에 수시로 놓인다. 기준점이 흔들리니 상황에 적절한 포인트를 찾기가 만만치 않다.

예전에는 명백한 진리라든지 선과 악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잘 모르겠다. 배경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가치를 판단한다는 것이 점점 어려운 일이 되고 있다. 출렁이는 바닷속에 던져져 어정쩡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삶에 더해지는 가치를 부레처럼 매달고 공기를 뺐다 불어 넣으며 시시각각으로 떴다 가라앉는 물고기로 삶을 유영하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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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0-06-14 19: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분량이 짧아서 그런가, 금방 읽고 글 올리셨네요. 페스트에 비하면 아주 읽기 쉬웠던 책이었어요 ㅎㅎㅎ 나비종님은 ‘가치‘에 포커스를 잡으셨군요. 안토니오가 보증을 선 것도, 제시커가 아버지를 버리고 로렌조를 택한 것도, 란슬럿트가 바싸니오의 하인을 자청한 것도, 포오셔가 이제 막 사랑하게된 남자의 친구를 위해 빚을 갚아주려는 것도 다 가치있다고 생각되는 쪽으로 움직인 거겠죠. 다만 유대인이 선택한 가치는 좀 성격이 다르더라구요. 자신에게 유익하든지 무익하든지 아랑곳하지 않고 복수하기만을 원했으니까요. 이런건 전혀 신념도 없고 정의도 없는 자살특공대와 다를 바가 없지요. 그럼에도 납득이 가는 그의 분노가 참 짠하고 그랬어요 ^^;

어렸을때 이 책을 읽었다면 참 어머니를 가리는 솔로몬의 지혜 이야기 정도로 받아들였을 거 같아요. 제 꾀에 스스로 걸려 넘어진 자의 최후가 이렇구나~ 하고요. 지금의 제 감상이 훗날에는 또 새롭게 느껴지겠죠? 아무튼 짧아서 좋네요. 월말까지 기다리지 않고 책 얘기를 할 수 있어서요ㅎㅎㅎ 남은 6월 파이팅하세요!

나비종 2020-06-14 19:58   좋아요 1 | URL
읽은 건 금방 읽었는데 어떤 식으로 리뷰를 써야할지 난감하더군요.^^; 읽은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생각하게 한 작품이었습니다.
유대인이 선택한 최고의 가치가 복수였다면 그의 관점에서는 유익한 것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어요. 우리의 관점에서는 쓰잘 데 없는 것처럼 비춰지지만요. 이렇게 생각하면 다른 등장인물들의 가치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하여튼 물감님 말씀대로 신념도 없고 정의도 없고 막무가내인 요소인데 말이죠. 거기에 가치를 두려면 얼만큼의 분노게이지가 상승되어 눈이 뒤집히는 걸까요?ㅎㅎ

비유가 딱 이네요. 그 정도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가 막상 읽고 보니 다른 것들이 크게 보여 당황했거든요.
같은 책이라도 읽을 때마다 다른 장면이 들어온다는 점이 제가 느끼는 독서의 매력이예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고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요즘은 빨간 우체통이 자꾸 눈에 들어와요. 손편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언뜻언뜻 하곤 해요. 아파트 우체통에 고지서나 전단지가 아닌 누군가의 마음이 꽂혀있으면 참 좋겠다 하는 생각이요. 성격은 급한데 감성은 점점 아날로그화되어가는 것 같아요. 생각만 하지 말고 직접 써볼까 하다가도, 하지만 누구에게?에서 막힌답니다.^^;
월말에 또 필이 꽂혀서 물감님께 6월의 편지를 쓰게 된다면 짧게나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오겠죠?ㅎㅎ 잘 지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