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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의 미친 여자
샌드라 길버트.수전 구바 지음, 박오복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9월
평점 :
2 장 - 감염된 문장 (여성 작가와 작가가 된다는 것에 대한 불안)
이 장의 제목이 채택된 것은 에밀리 디킨슨의 시에서 인용된 문장이다.
페이지에 아무렇게나 떨어진 단어는
눈을 자극하겠지.
영원한 솔기 속에 접힌 채,
주름투성이 창조자가 누워 있을 때.
감염된 문장은 새끼를 친다.
우리는 절망을 들이마시겠지.
말라리아로부터
수세기 떨어진 곳에서-
-에밀리 디킨슨
에밀리 디킨슨의 시집을 몇 권 찾아 읽어보았는데, 그녀의 시는 재밌지만 어렵다. 읽어보시면 공감하게 되리라.
시를 읽기 시작했지만, 다 읽고 나면 무슨 수학 공식을 푸는 듯한 어리둥절함을 느끼게 된다는 시집의 번역가의 문구를 접하면서 아! 나만 느낀 어리둥절함이 아니었구나! 라고 위로받게 된다.
암튼 디킨슨의 시는 일단 나중에 다시 꺼내고,
디킨슨의 시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디킨슨은 ‘감염된 문장‘으로 쓰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어쩌면 ‘감염된 문장‘에 익숙해져 ‘감염되지 않은 문장‘이 낯설고 어려운 것이 아닐까?
여기서 ‘감염된 문장‘은 가부장적 권위에 푹 삶아진 문장인 듯 하다. (내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남성 작가들과 여성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가 주된 2 장의 이야기도 꽤나 흥미롭고, 그동안 느끼지 못한 ‘감염된 문장‘에 감탄하며 읽어 왔었고, ‘감염되지 않은 문장‘을 폄하하며 읽어 왔었던 지난 시간들을 조금 반성하는 계기도 되었다.
작가들은 글을 쓰면서 불안해 한다.
예나 지금이나 불안해 하며 글을 쓰고 있는 것은 다 비슷하다.
하지만 남성 작가와 여성 작가의 불안의 영역은 다르다.
남성 작가들의 불안은 ‘영향에 대한 불안‘ 이고,
여성 작가들의 불안은 ‘작가가 되는 것에 대한 불안‘이라고 한다.
이미 작가인데, 여성 작가들은 왜 작가가 되는 것에 대해 불안해 하는 것일까?
남성 작가들은 자신이 자신의 작품에서 창조자가 아닌 선배들의 작품이 이미 자신 위에 있는, 그래서 자신의 창조성이 선배들을 뛰어 넘을 수 없는 열등감과 선배들의 작품이 본질적으로 우월하다는 열패감에서 오는 불안에 시달린다고 해럴드 블룸은 이야기한다. 그래서 선배들의 작품에서 시달리는 창조성에 대한 기밀한 영향을 받아, 거기서 나온 불안감인 것인지?
암튼 ˝영향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여성 작가들의 불안감은 조금 다른 형질의 것이다.
예로부터 여성들은 펜을 들 수가 없었다는 것은 이제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어왔다. 그래서 블룸이 묘사한 근본적인 남성적인 문학사에서 여성 작가는 ‘들어맞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들어맞지 않고, 영역 테두리 밖에 있는 폄하되고 소외되어 온 여성의 문학을 이어 온 여성 작가들은 작가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여성 작가들은 늘 작가로 인정받지 못한, 작가가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있는 것이다.
오죽하면 조르주 상드, 조지 엘리엇, 브론테 자매들마저 지적인 진지함을 인정받기 위해 남자인척, 위장하거나, 숨어서 감추는 행위를 하였을까?
불안감은 결국 스스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신을 없애버리는 문장으로 감염되어 계속 새끼를 쳐 왔다는 그런 뜻으로 읽히는 위의 디킨슨의 시였던 것이다.
주름투성이 창조자는 여성 작가를 의미하는 듯하다.
페이지에 아무렇게나 떨어진 단어는 곧 감염된 문장을 만드는 단어였던 것인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19 세기 여성 작가들은 불안에 떨고만 있지 않았다. 이 지점이 눈여겨 볼만 했다.
여성 예술가들은 사회화의 영향(가부장적 사회)과 싸웠다. 여성 작가(예술가)들은 (남성)선배의 세계를 읽는 시각이 아니라 자신을 읽는 시각과 싸웠다. 그리하여 자신의 사회화 조건을 다시 정의해야 한다고 했는데 에이드리언 리치가 말했던 ‘수정- 되돌아보는 행위, 생생한 눈으로 보는 행위, 새로운 비평적 시각으로 과거의 텍스트에 들어가는 행위...살아남는 행위‘를 위한 투쟁이다.
여성 작가의 투쟁은 매번 여성 선배를 적극적으로 찾아내는 행위로만 시작할 수 있다.
여성 선배 작가는 부인하거나 죽여야 할 위협적인 힘이 아니라, 가부장적 문학의 권위에 저항할 수 있다는 본보기가 된다.(146쪽)
여성 작가는 남성 작가들처럼 선배를 뛰어넘는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 즉 권위에 대한 불안감이 아닌 일종의 연대 의식으로 바라보는 행위로 인해 창조자로 거듭나는 작가가 될 수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리하여 창조적인 여성 하위문화(상위의 반대가 아닌 듯하다. 수평관계이지만, 주류에 포함되지 않은 영역밖의 문화라고 읽힌다.)라고 고질적으로 퍼져 있던 작가 되기의 불평등한 불안 영역을 없앨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독립적인 하위 문화가 오히려 고무적인 원동력이 된셈이기도 하지만, 연대가 더 큰 답일지도 모르겠다.
19세기 여성 작가들인 제인 오스틴, 에밀리 디킨슨등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다시 재조명하여 읽히고, 읽어야 하는 이유는 여성의 ‘겸손함‘이나 남성 흉내를 벗어버리고, 여성의 관점에서 여성의 중요한 경험을 구체적으로 다루며, 남성적 문학사 입장에서 봤을 때, ‘이상한‘ 작품, ‘기이한‘ 작품, ‘기괴한‘ 작품(181~182쪽)이라고 무시하는 문화 속에서도 그것을 전복시켜 진정한 여성 문학의 권위에 도달하는 어려운 임무를 해냈기 때문일 것(183쪽)이다.
내용이 너무도 광범위하여 모두 다 아우를 수도 없고, 이해하기도 쉽지 않아, 늘 빈약하게 정리를 하곤 하지만,
19세기 여성 작가들의 글을 다시 들여다 보는 계기가 될 수 있고, 아울러 국내 여성 작가들의 글도 어쩌면 또 다른 눈으로 읽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 그래서 나름 얻는 것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