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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브루스 커밍스의 신작이 나왔다. 그의 책은 언제나 묵직한 내용과 묵직한 두께감을 자랑한다. 미국 패권의 역사도 미국적 패러다임이 어떻게 세계를 변화시키고 알음알음 잠식해 들어가는지를 보여준다. 번역기간도 1년정도의 기간을 둬서 나름 충실하게 한 것 같다.

 

 

‘미국을 알려면 뉴욕 맨해튼을 가보라’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맨해튼은 미국의 축도다. 미국인의 삶의 원형이 그곳에 있다. 같은 논리로 미국의 금융을 이해하려면 뉴욕의 월가를, 대학을 보려면 하버드대·예일대 등 명문대가 집중된 북동부 뉴잉글랜드를 찾아야 할 것이다. 미국인들의 자국 인식도 비슷하다. 그들에게 대서양과 연해있는 동부는 미국 문명을 탄생시킨 ‘어머니의 땅’이다. 그곳은 대서양 건너 유럽에 태반을 대고 있다. 미국인들이 내세우는 민주주의, 평등, 자유, 다자주의, 법치주의는 유럽의 가치다. 뉴잉글랜드, 뉴햄프셔, 로드 아일랜드 등의 지명은 미국의 뿌리가 유럽임을 상기시켜준다. 미국인들은 대서양과 유럽우선주의 시각에서 세계를 본다. 이 때문에 미국인들은 자국의 역사를 ‘신유럽의 역사’로 인식하곤 한다. 한데 미국의 대서양주의, 유럽중심주의는 오늘날에도 올바른 태도일까.

미국 시카고대 석좌교수인 저자 브루스 커밍스(68)의 대답은 “노(No)”이다. 지도를 보면 미국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향해 대등하게 열려 있는 대륙국가이다. 커밍스가 보기에, 미국문명을 탄생시킨 건 대서양이지만, 오늘의 미국을 끌어가는 건 태평양이다. 다만 미국문명 초창기에 “유럽에 눈길을 쏟다보니 ‘대서양주의’가 역사적으로 힘을 지니게 됐다”는 것이다.

이 책은 제목과 달리 미국의 영향력이나 지배력의 확대과정을 추적한 역사서가 아니다. 책의 메시지는 ‘대양에서 대양으로의 지배(Dominion from Sea to Sea)’라는 원제에 잘 드러난다. 저자는 기존 대서양 중심의 미국 역사에서 벗어나 태평양의 관점에서 미국의 세계사적인 역할과 위상을 해석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개척시기 미국인들에게 서부는 이상향이었다. 그들은 서부로 진출하면서 아르카디아(목가적 이상향)를 발견한다. 1630년대 매사추세츠로 설정됐던 미국인들의 이상향은 1820년대 오하이오, 1840년대 오리건, 1870년대 캔자스 등으로 시간이 경과하면서 서쪽으로 옮아간다. 서진(西進)이 이어지면서 아르카디아는 창조되고, 그렇게 만들어진 아르카디아는 그 자리에 도시가 세워지고 산업이 발달하면서 꿈으로 사라진다. 미국의 서부 개척을 다룬 책 가운데 ‘실락원’ ‘욕망의 풍경’ ‘약속의 땅’과 같은 어휘가 많이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당시 프런티어의 종착지라고 할 수 있는 캘리포니아는 아틀란티스, 에덴동산, 엘도라도, 예루살렘 등속의 이름으로 불렸다.

초기 개척자들의 서진은 인디언들에게는 재앙이었다. 1637년 코네티컷에서는 피쿼드족 인디언 800명이 산 채로 불태워져 죽음을 당했다. 앤드루 잭슨 대통령이 인디언추방법을 제정한 뒤 동부에서 살아남은 인디언은 1200명도 채 안됐다. 널리 알려진 ‘운디드니 전투’는 인디언들의 생존을 위한 최후의 저항이었다.

미국의 서부 진출은 19세기 중반 캘리포니아가 흡수되면서 일단락된다. 그러나 미국이 캘리포니아와 맞닿아 있는 태평양을 주목한 것은 근 한 세기가 지난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 때였다. 이후 연방정부는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군수산업을 대대적으로 육성하고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포틀랜드, 시애틀을 중심으로 태평양 연안 지역의 산업화가 대대적으로 이뤄진다.

이 책이 미국의 서부 개척사로 끝났다면 ‘서부를 향하여’라는 제목이 적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미국이 서쪽으로, 나아가 태평양으로 지배권을 확대하는 과정을 분석하면서 국내사와 세계사, 국제관계와 정치경제를 분석하고 있다. 예컨대 로스앤젤레스가 산업도시로 떠오르게 된 데에는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의 특수가 있었고, 1970년대 이후 미국이 세계 경제를 주도할 수 있었던 데는 일본, 한국, 대만, 중국 등 태평양 연안국들의 대약진이 뒷받침됐다는 게 그것이다.

미국 서부와 태평양에서 미국 헤게모니의 변화를 추적한 저자는 “세계 속의 미국의 위치는 태평양 연안 주들의 서로 얽혀 있는 권력과 드넓은 바다에 대한 미국의 지배를 이해하지 않고는 파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저자 커밍스가 미국 역사에 ‘태평양주의’라는 잣대를 들이댈 수 있었던 데에는 그가 동아시아 전문가라는 점과 무관치 않다. 결론적으로 이렇게 전개돼온 태평양 문명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긍정에 닿아 있다. “금세기의 태평양 문명은 최종적으로 인간의 열정적인 활동에서 분리돼 조용히 있던 대양에 마침표를 찍고, 무한정 다양한 교류가 일어나는 광대한 현장으로 변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태평양 문명의 형성은 대서양주의 전통에서 최고의 태평양을 향한 근본적인 방향 수정”을 요구한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그것은 집단안보, 합의를 도출해낸 국제법, 공개된 체제, 여러 다자간 기구들, 특히 대양을 둘러싼 수십억 사람들의 존엄성에 대한 존경의 확립을 의미한다.

2011.12.16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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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4년 1월1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발효된 이날,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에서 원주민들은 떨쳐 일어났다.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은 이날 멕시코 정부와 신자유주의에 경도된 자본주의에 전쟁을 선포했다. 그리고 외친다. “이제는 충분하다.”

사파티스타는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래, 원주민들에게 가해진 수백년에 걸친 억압과 착취를 거부했다. 그리고 토지와 정의,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선언했다. 혁명이 박제가 된 시대, 이들의 ‘창조적 반란’은 혁명을 꿈꾸는 이들에게 새 영감을 불어넣었다. 이들은 반자본주의 투쟁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

이들이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며 ‘봉기’한 지 15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전세계를 휩쓰는 지금, 사파티스타들은 누구였고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파티스타는 라틴아메리카 민족해방 운동을 계승한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유형의 정치를 예고하는 것인가? 구조적 불평등과 극심한 빈곤이 낳은 결과물인가, 동일성 정치의 표현인가? 혁명가들인가, 개량주의자들인가? 포스트모던 게릴라들인가, 아니면 무장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인가? 이들은 급진적 정치의 불꽃을 점화시켰지만, 급진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실패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사빠띠스따의 진화>는 ‘최초의 탈근대 혁명’이라 불리는 사파티스타 운동에 대한 기존의 평가에 비판적으로 접근하며, 새로운 이론화를 시도한다. 원제는 ‘사파티스타 반란과 급진정치에 대한 시사점’이다. 검은 스키마스크를 쓰고 파이프 담배를 문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부사령관 마르코스에 대한 낭만적 접근과는 차원이 다른 정치철학적 논의를 전개한다.  

“사파티스타의 ‘망각에 맞서는 전쟁’의 전개를 역사적으로 설명”하고, “급진적 정치운동과 활동들의 출현을 이해하기 위한 사회·역사적 작업 틀을 개발”하려 시도한다. 지은이에게 “우리의 투쟁은 민족 없는, 인종 없는 사회주의를 위한 것이며, 우리는 혁명을 위한 욕망으로 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사건’, 상황주의자들의 ‘상황 창조’, 카스토리아디스의 ‘자율 기획’, 안토니오 네그리의 ‘제헌권력’ 등의 개념이 분석과 이론화에 동원된다.

지은이는 사파티스타들이 “자율 기획과 그들이 만들어낸 사건적 상황 모두에 적합한 충실한 주체들이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 새로운 돌파구가 이 운동의 과거 실패를 뛰어넘어 멕시코 안에 강력한 반자본주의 전선을 건설할지, 자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가 말한 것처럼 멕시코 노동계급의 다양한 부문들을 통합할지 여부는 앞으로 지켜봐야 할 문제로 남아 있다.”

혁명적 민주주의 담론이 원주민 공동체에 스며들도록 해준 원주민 문화와 언어적 요소들에 대해 고찰할 필요성도 제기한다. 지은이가 2001년 사파티스타 자율지대를 아홉 달 동안 방문하면서 작성했던 현장노트가 녹아들어 있다. 사파티스타 운동에 대한 새로운 이론화를 통해 지은이는 희망한다. “더 많은 저항, 더 많은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단절들, 더 많은 혁명적 경로들이 열리기를.” 
 

2009.4.30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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