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의 관람차 살림 펀픽션 2
기노시타 한타 지음, 김소영 옮김 / 살림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60개의 각각의 관람차가 달려있는 거대한 대관람차 안에서 한 남자가 인질극을 벌인다. 자기 스스로도 인질과 함께 갇혀있는데 폭발물을 들고 협박을 한다. 저마다 사람들이 탄 관람차는 공중에 멈추고 방송국과 경찰이 몰려온 상태에서 남자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야쿠자 조직의 빚을 받아내는 일을 하는 건달이 무면허 의료행위를 하는 미인에게 데이트를 청한다. 대관람차 타기를. 그리고 둘은 18호 관람차를 탄다. 17호에는 고소공포증이 있는 아빠와 멍청해보이는 엄마, 그리고 남매가 타고 있다. 19호에는 전설의 소매치기와 소매치기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젊은이가 탔다. 20호에는 17호에 타고 있는 부부를 갈라서게 하라는 의뢰를 받은 이별청부업자가 탔다. 이들이 납치와 협박으로 멈춘 관람차 안에서 본색을 드러낸다. 

성형수술을 하던 중 의료사고를 낸 의사가 있다. 그 의료사고로 아내를 잃은 남편이 있다. 절망한 남편의 인질극에 잡힌 한 버스에 타고 있던 여선생님이 있다. 하지만 의사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잘못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 아버지의 뻔뻔함에 딸은 가출을 한다. 사건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든다. 왜 납치와 협박을 하게 됐는지 각각의 입장에서 회상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가슴 뭉클하게 만든다. 도미노처럼 한 사람의 잘못과 욕심으로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 희생되고 또 아무 인연이 없던 사람들이 만나게 되고 하는 과정이 인생사를 보여주는 것만 같다. 그러니까 악몽은 관람차를 타기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다. 

작품은 마술의 미스디렉션을 추리소설의 트릭으로 이용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읽어야만 알 수 있다. 그것이 마술과 추리소설의 공통점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독자를 다른 쪽으로 유도하는데 성공했다. 처음 읽을 때 하필이면 왜 대관람차를 이용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 이유가 마지막에 등장한다. 

간결하면서 짜임새있는 작품이다. 모든 상황이 아귀가 맞아 떨어지고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것처럼 잘 어울어진다. 단순한 이야기를 작가는 다른 작가들과는 다르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아주 간단하고 쉽게 보여주고 있다. 그 속에서 작가는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잘 담아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작가의 악몽 시리즈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전작 <악몽의 엘리베이터>가 유머러스한 면을 선사했다면 이 작품은 휴머니즘을 선사하고 있다. 물론 그의 유머는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다. 그러니까 유머와 휴머니즘이 결합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슬픈 작품이다. 산다는 게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닌데 잃은 다음에야 그것을 깨닫고 어떤 사람은 작은 행복마저도 지킬 수 없다. 악몽이란 멈춰 선 관람차 안에서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아니라 지킬 수 있을 때 지키지 못하고, 깨달을 수 있을 때 깨닫지 못하고, 행복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알아보지 못하고 다른 곳을 더듬는 것, 바로 그것이 아닐까 책을 덮은 후 생각이 들었다. 행복이란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기꺼이 고소공포증에도 불구하고 관람차를 한번 더 타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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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9-08-10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렇게 잡다한 사연들이 한꺼번에 관람차를 타기도 어렵겠어요. ㅎㅎ
유머와 휴머니즘의 혼합이라... 재밌을듯하네요. 요즘 서평단 도서에 파묻혀서 도대체가 재미난 추리소설 읽을 시간이 안나요. ㅠ.ㅠ

물만두 2009-08-10 14:38   좋아요 0 | URL
잡다한 사연은 아닙니다. 깔끔합니다.
저도 책이 째려보고 있습니다 ㅠ.ㅠ

paviana 2009-08-11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복만 지나면 안 덥겠지요?
어제 오늘 너무 덥네요.여름이니까 당연한거겠지만요.
쉬엄쉬엄 읽으세요.^^

물만두 2009-08-11 10:47   좋아요 0 | URL
쉬엄쉬엄 읽고 있어요. 힘들어서 이젠 못 버텨요 ㅠ.ㅠ
 
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
이시모치 아사미 지음, 박지현 옮김 / 살림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본격추리소설이자 <용의자 X의 헌신>과 마찬가지로 도서추리소설을 표방하는 작품이다. 도서추리소설이란 범인의 범죄를 보여주고 탐정이 범인을 어떻게 잡는지, 잡히지 않으려는 범인의 심리 묘사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그러니까 누가 범인인가는 이미 문제밖이 되는 것이다.
 
대학 동아리 선후배가 모처럼 졸업후 동창회를 갖는다. 동창회 장소는 친구 형이 휴관 중인 대저택을 잘 꾸민 고급 펜션이고 모이는 사람들은 일곱명이다. 이미 후스미는 후배 니이야마를 죽일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긴다. 동창들은 니이야마의 부재를 처음에는 비염약과 수면유도제를 먹고 깊이 잠이 든 탓으로 여기지만 그는 문을 잠그고 도어스토퍼까지 끼워놓은 상태라 확인이 불가능하다. 점점 동창들이 걱정을 하는 가운데 후시미는 어떻게든 문을 여는 시간을 늦추려고 애를 쓴다.
 
이 작품은 독특하게 탐정이 살인 사건이 일어난 현장을 보지 못하는 사이에 사건을 추리하고 범인과, 범인의 범행 동기를 모두 알아내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 탐정으로 후시미에게 차인 후시미가 머리 좋기로 인정한 유코가 등장한다. 유코는 차근차근 후시미와 공방전을 벌이며 사건을 해결한다. 문을 열지 못하게 막으려는 범인과 어떻게든 문을 열려고 애를 쓰는 탐정의 문 밖에서의 일진일퇴가 볼만 하다. 범인은 문을 열지 못하게 막는 이유는 무엇이고 그 문을 열려고 기를 쓰는 탐정이 주고 받는 대화 속에서 모든 단서를 밝히고 범인은 대화로 실수를 하고 막으려 하고 탐정은 그 대화로 모든 추리를 이어간다는 방식이 전형적인 본격추리소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작품은 빈틈없이 범인과 탐정의 두뇌싸움과 심리전을 보여주고 있다. 한정된 공간, 밀실로 만든 사건 현장, 도서추리소설로 스릴을 느끼게 하고 한정된 인물들과의 대화와 짧은 시간안에 그 모든 것을 파악하기 쉽게 단순하면서도 명쾌하게 보여주고 있다. 유코가 범인인 후시미에 대해 잘 알고 있고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모든 것은 추리가 가능하다. 또한 작가는 후시미가 저지른 실수도 등장시켜 후시미가 그것을 어떻게 빠져나가는지 독자로 하여금 조마조마하게 관찰하게 하고 있다. 이런 점을 생각해보면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에서 <용의자 X의 헌신>과 좋은 대결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유코가 등장하는 작품이 또 있다고 하니 그 작품이 나온다면 유코의 탐정으로서의 활약상이 어느 정도인지 더욱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진짜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읽고 난 뒤 동기가 밝혀진 뒤다. 범행동기가 마음에 걸렸다. 그런 이유라면 살인이 아니더라도 다른 방법을 취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물론 아주 이해못할 것도 없지만 해결방법이 살인만 있었던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약간의 회유나 협박정도로도 해결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마지막 한 장이 만약 후시미가 니이야마를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생각을 이해하게 만들려다 실패한 것으로 꾸며졌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정말 그런 이유로도 살인을 할 수 있겠다고 조금이나마 독자가 공감할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인간의 모든 이타적 행동도 이기심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 자기 만족이 없는 이타심은 없다는 것이다. 희생, 봉사, 사랑 등 모든 좋은 것들도 인간의 이기심에서 나온 이타적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런 것은 강요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때론 아주 절실해서 강요라도 하고 싶을 때가 누구라도 있다. 그렇다고 살인을 하는 것은 명백한 모순이다. 작가가 이 점을 먼저 생각했더라면 독자들에게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하더라도 이런 결론에 도달하지는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결점을 제외한다면 작품은 본격 추리소설에서 또 다른 시도를 보여준 작품으로 신선함을 느끼게 한다. 후시미의 심리 묘사와 동료들까지 이용하는 심리전은 볼만하다. 그 대담함과 헛점을 장점으로 바꾸는 능력도 돋보인다. 유코를 피하지 않고 잘 대처하는 면도 이 작품의 볼거리 가운데 하나다. 그들의 기싸움은 묘한 긴장감을 조성하기 때문이다. 정말 아직 문은 닫혀 있는데 문 밖에서 사건은 해결이 난다. 그 독특한 소재 선택에 박수를 보낸다. 그것만으로도 괜찮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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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zydevil 2009-07-31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특한 발상을 어떻게 풀어갔는지 궁금하네요.

물만두 2009-07-31 13:47   좋아요 0 | URL
읽어보세요.
 
잠자는 숲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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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 발레단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이름 모를 남자가 침입을 했다가 발레단원과 싸움 중 살해된 것이다. 가가형사는 정당방위인지를 알아본다. 이 신원 불명의 남자의 신원을 알아내는 것이 문젠데 신원 확인 결과 전혀 죄를 지을 만한 인물이 아니었고 발레단과의 어떤 접점도 찾을 수 없어 수사는 미진해지는데 갑자기 발레단의 안무가가 독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경찰은 발레단 자체가 수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발레단원 모두를 조사하기에 이른다. 

언젠가 하나에 미치지 않으면 최고가 될 수 없다는 말이 유행을 했다. 그건 아마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인생에 단 한가지만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위험한 것은 없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산다는 게 자기 마음대로, 마음 먹은데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닌 누군가의 강요에 의한 선택이라면 그것보다 더 난감해지는 일은 없다. 이 작품은 발레라는 춤 하나에 모든 것을 거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아주 위험하고 폐쇄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의 아름답지만 슬픈 이야기. 

이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독살 트릭은 작품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엘러리 퀸의 <X의 비극>에서 사용한 트릭을 차용한 점이다. 물론 그 방법 그대로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비슷하다. 일본 신본격 추리소설의 가치는 여기에 있다. 예전 외국 작품에서 사용한 트릭을 사용하더라도 그것을 그들만의 방식으로 좀 더 다르게 만들어 그들에게 어울리게 표현하고 그 트릭이 자연스러운 한 부분으로 남긴다는 점이다. 그로 인해 유사품이나 표절이 아닌 트릭의 업그레이드를 만들어낸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있게 어떤 작품에서 본 것 같은 독살이라고 쓸 수 있는 것이다. 

가가는 수사 중에 사랑에 빠진다. 아주 노골적으로 표시를 하고 다닌다. 역시 가가의 성격이 나타난다. 거기다가 학생때와 전혀 변하지 않은 아버지와의 소통 방법도 이어지고 있다. 그때는 쪽지였지만 이제 따로 사는 부자는 전화 메시지로 소통의 작은 끈을 연결하고 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가가는 언제나 아버지에게 조언을 구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 이들 부자 사이가 딱히 나빠보이지 않는다. 단지 습관의 문제가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든다.  

<잠자는 숲>이라는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발레단이 공연을 하는 것이 잠자는 숲속의 공주다. 그 숲은 폐쇄된 숲이다. 사건이 일어나는 곳도 발레 리허설 도중이라서 일종의 클로즈드 서클이라고 할 수 있다. 한정된 공간, 한정된 인원, 알리바이 공작은 잠자는 숲에서 누군가 꿈을 꾸는 가운데 일어난 일이다. 가가는 말한다. 자신이 교사를 그만 둔 이유를. 그 이유는 학생들에게 자신은 옳다고 생각되는 일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것이 학생들을 망치는 일이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누군가 옳다고 생각한 일이 누군가에게는 잘못된 일이 되기도 한다. 작품은 이런 이야기를 표현하고 있다. 

가가 시리즈는 본격 추리소설이다. 범인이 누구인가가 문제다. 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가 단순히 본격 추리소설만을 쓰는 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여러가지를 담아내고 있다. 트릭, 인간 관계, 사랑, 꿈, 인생의 선택 등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본격 추리소설을 보여주는 동시에 묘사하고 있다. 이 폐쇄적인 발레단의 모습은 가가의 생각처럼 잠자는 숲과 같다. 그리고 이 잠자는 숲은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이기도 하다. 한정된 공간이란 것은 이름만 바꾸면 어디에나 적용되는 것이니까. 마지막 가가의 사랑이 참 애틋하다. 결국 키스로 공주의 잠을 깨우는 왕자는 가가 형사려나. 그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한다. 다음에는 결혼한 가가의 모습을 보게 될지 아니면 다시 혼자 있는 가가의 모습을 보게 될지 그것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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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 2009-07-13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둘 중 누군가~] [내가 그를~] 2권을 읽었는데 발레리나 이야기는 코뺴기도 안 보여요. 그냥 가가 형사 혼자 묵묵히 범인을 쫓는...내심 발레리나의 뒷 이야기가 궁금했는데 아쉬웠어요.^^;

무해한모리군 2009-07-13 13:21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ㅎㅎㅎ

아 만두님 후기는 늘 읽어도 참좋아요~

물만두 2009-07-13 14:00   좋아요 0 | URL
아니 이럴수가...
히가시노 게이고에게 따져야겠군요 ㅜ.ㅜ

휘모리님 감사요^^ㅋㅋㅋ

비연 2009-07-13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발레리나와 가가형사의 뒷얘기가 궁금한데, 없어요..ㅜㅜ

물만두 2009-07-13 14:00   좋아요 0 | URL
말도 안됩니다.
작가가 시리즈의 정석을 파괴하다니 나쁘네요 ㅜ.ㅜ

울보 2009-07-13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분 책 또한권 구입해두었는데 얼른 읽어야지요,,,만두님 방가방가,,

물만두 2009-07-13 18:57   좋아요 0 | URL
울보님 이 작가 작품은 계속 나오네요.
방가방가요^^

soyo12 2009-07-15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가가형사 참 좋아요.^.~

물만두 2009-07-22 10:42   좋아요 0 | URL
미투요^^
 
리바이어던 살인
보리스 아쿠닌 지음, 이형숙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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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보리스 아쿠닌의 에라스트 판도린 시리즈 세번째 작품인 <리바이어던 살인>은 판도린을 마치 셜록 홈즈처럼 묘사하고 있다. 거기에 한정된 공간이라 할 수 있는 보슈 경감이 범인을 추적해서 탄 여객선은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 방식을 따르고 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아가사 크리스티의 구성 속에 등장한 셜록 홈즈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1878년 파리에서 유명한 수집가 리틀비 경의 집에서 기이한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그 집에 있던 모든 사람과 리틀비 경이 살해되고 그의 수집품이 도난당한다. 하지만 값비싼 도난품은 센 강에서 발견이 되고 결국 사라진 것은 그것을 가져갈때 쌌던 스카프뿐이다. 범인에 대한 단서는 리틀비 경을 살해할 때 떨어뜨린 리바이어던 1등실 승객에게만 주어지는 금색 배지뿐이었는데 고슈 경감은 범인이 리바이어던에 탄 1등실 승객 중 배지를 하지 않은 인물일 거라고 생각하고 배에 탄다. 그리고 배지가 없는 사람들을 추려 낸다. 그들은 의사 부부, 일본인 장교, 고고학 교수, 은행가의 젊은 임산부, 영국 귀족, 여행 중인 영국 여인, 그리고 주인공 판도린이다. 

작품은 이들이 각자의 목소리로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여기에서 다시 유람선에서 도난 사건과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그들이 자신들이 무언가 감추고 있는 것이 있음을 암시하게 만들어 고슈 경감과 판도린의 수사와는 별도로 독자들이 범인을 알아낼 기회를 준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고전 추리소설의 특징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여기에 이들이 묘사하는 각자의 눈에 비친 사람들의 모습은 그 시대의 전형적인 사람들의 시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각자의 생각속에서 19세기의 상류 사회의 풍경이 펼쳐지면서 한정된 공간인 바다 위의 유람선 안에서 지루할 틈을 주지 않고 있다. 

보슈 경감이 들려주는 여러 범죄 이야기를 듣는 재미도 한 몫한다. 물론 그 이야기들이 모두 작품과 연관이 있는 이야기다. 그중에서도 범죄를 저지르고 교묘히 법망을 빠져나가는 여성 마리 산폰의 이야기와 사라진 스카프에 얽힌 에메랄드 라자의 이야기는 당시 여성의 범죄에 대한 생각과 시대상을 반영하는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다. 또한 일본에 대한 이야기도 국제 정세 속에서 그들이 택한 것을 간단하고도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어서 19세기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일본을 작게나마 들여다보게 한다. 여기에 그들이 캐릭터를 잘 묘사하고 있어서 보는 재미를 더하고 있다. 

첫번째 작품 <아자젤의 음모> 이후 판도린이 어떻게 변했을지가 무척 궁금했는데 두번째 작품을 읽지 않아도 그가 잘 극복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으로 판도린은 더욱 추리 능력을 갈고 닦았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고 있는데 한마디로 어린 탐정 소년이 셜록 홈즈로 진화했음을 이 작품은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판도린은 여전히 말을 더듬고 수줍은 성격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러면서 결정적인 탐정이 추리 결과를 이야기할때는 전혀 더듬지 않고 이야기한다. 이 시리즈가 좀 더 나오면 좋겠다. 현대에 19세기 러시아 탐정을, 고전적 추리소설 속에서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니까. 일본의 신본격 작품과는 또 다른 재미를 주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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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인 소녀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6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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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을 읽고 나서 어떤 작품은 한번 더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또 읽을 기회란 좀처럼 갖기 힘들다. 너무 많은 책들이 나오고 그 책들을 한번 읽기에도 시간이 턱없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이 책은 아주 운 좋게 예전에 읽었었다. 읽고 나서 하라 료라는 작가, 사와자키 탐정에게 반하고 말았다. 이런 작품을 나오게 해준 레이먼드 챈들러와 필립 말로에게 감사했을 정도였다. 재미있다거나 대단하다는 것만으로 모자라는 대단한 작품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좋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명작이란 바로 이런 작품을 두고 하는 말이다. 

모든 하드보일드 탐정의 시작은 필립 말로부터고 레이먼드 챈들러가 추리문학에 끼친 영향은 그런 의미에서 대단하고 그가 높이 평가받는 이유다. 하지만 이 작품을 보면 하라 료가 레이먼드 챈들러에서 벗어나 대가가 되었음을, 사와자키 탐정이 필립 말로와 같이 시니컬하고 고독한 모습을 지니고 있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그만의 독특함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를 일본의 레이먼드 챈들러가 아닌 일본 하드보일드 미스터리의 거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작품은 제 102회 나오키 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나오키상을 수상한 작품 가운데 추리 소설을 발견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것은 권위 있는 문학상에서 추리 소설을 인정한다는 뜻으로 해석되어 우리와는 참 많이 다름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에 처음 등장한 사와자키 탐정이 두번째 등장하는 이 작품은 하라 료라는 작가, 사와자키라는 탐정의 이름을 독자에게 강렬하게 각인시키게 되는 작품이다. 전작보다 더 치밀함을 보이고 하드보일드와 본격 미스터리를 절묘하게 구성한 작가의 뛰어난 필력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일본에 한 획을 그은 걸작이기 때문이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각광받던 한 소녀, 마카베 사야카가 유괴된다. 공교롭게도 범인은 탐정 사와자키를 미끼로 이용을 한다. 그리고 그에게 돈을 운반하게 시키는데 사와자키는 돈을 운반하다가 두 명의 오토바이 폭주족같은 이들에게 맞고 쓰러져서 다음 운반 장소로 가지 못하게 된다. 설상가상 돈은 그때 누군가 훔친 뒤였다. 훔친 자가 범인인지 아닌지고 경찰은 판단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범인은 연락을 끊고 그것이 경찰에서 사와자키를 더욱 공범으로 의심하게 만들게 된다. 죄책감이 든 사와자키는 이 일로 사건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즈음 소녀의 외삼촌으로부터 자신의 아이들에 대한 알리바이 조사를 의뢰 받는다. 조사를 하던 중 또 다시 범인의 전화가 걸려 오고 그 장소에서 사와자키는 소녀의 시체를 발견하게 된다. 

동료 탐정이었던 전직 경찰 와타나베가 야쿠자의 돈과 경찰에게 넘길 각성제를 들고 도망간 이후 사와자키는 경찰과 야쿠자와 미묘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사와자키를 공범으로 봤던 것이다. 그 사건은 언제나 사와자키를 따라다니고 와타나베는 이따금 종이 비행기를 접어 그에게 근황을 알린다. 사와자키에 대해 알 수 있는 건 없다. 그가 독신이라는 것 말고는. 하지만 점점 이 독특한 탐정 사와자키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냉철한 모습 뒤에 감춰진 따뜻한 감성이 작가의 하드보일드에는 어울리지 않는 문장들과 함께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 공들인 문장, 세밀한 묘사가 이 작품을 더욱 빛나게 하고 작가의 느림의 미학을 느끼게 하고 있다.  

작품은 사와자키의 끈질긴 탐문 조사를 따르고 있다. 경찰이 헛다리를 짚는 동안 사와자키는 사건의 본질을 꾀뚫어보고 마지막에 탐정 특유의 권리인 모든 진상을 밝힌다. 이 작품은 1980년대 말에 발표된 작품이다. 하지만 모든 걸작이 그렇듯이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없다. 오히려 왜 독자들이 이 느리게 글을 쓰는 작가의 작품을 끈기있게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지를 알려준다. 그것이 바로 장편 단 4권으로 거장이 된 하라 료가 지닌 힘이다. 그나저나 와타나베는 언제까지 사와자키의 주변만을 맴돌건지, 언제쯤 사와자키는 와타나베의 그림자를 떨쳐 버릴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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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9-07-09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부터 헉 하게 만드네요 ^^

물만두 2009-07-09 11:36   좋아요 0 | URL
정말 헉하게 좋은 작품입니다^^

무해한모리군 2009-07-09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좋아너무좋아요
읽어야겠어요.

물만두 2009-07-09 11:37   좋아요 0 | URL
당근당근입니다.

카스피 2009-07-09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라 료의 작품은 읽는이를 즐겁게 하지만 4편밖에 없어서 좀 안타깝다고들 하더군요^^

물만두 2009-07-09 11:38   좋아요 0 | URL
네, 안타까운만큼 더 좋은 것 같아요.
단편집까지 몽땅 출판해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무해한모리군 2009-07-09 11:41   좋아요 0 | URL
아니 네편 밖에 없다구요!
아쉬워라..

물만두 2009-07-09 19:09   좋아요 0 | URL
계속 더 쓰시겠지요.
나온 것만 장편이 4권입니다.

Koni 2009-07-12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으면 제목이 더 짠해요. 1편 보고 꽤 쿨한 탐정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라 료의 장편이 4편뿐이라니 너무하군요! ㅠ_ㅠ 그거라도 빨리빨리 번역되면 좋겠어요.

물만두 2009-07-13 11:27   좋아요 0 | URL
쿨하면서 감성적인 탐정이죠.
3편은 나올겁니다. 내년쯤에 나오려나요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