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이즈 1
에릭 시걸 지음 / 김영사 / 199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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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을 타는 세 사람의 이야기다. 이 작품도 <닥터스>와 마찬가지로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을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천재 물리학자 이사벨, 유전공학자 샌디, 면역학자 애덤의 사랑과 인생을 그린 작품으로 어린 천재의 고통과 못생겨서 무시당한 사람의 분노와 젊은 나이에 알츠하이머에 걸려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의 절망을 느낄 수 있는 재미있는 작품이다. 그들은 그들의 고통의 대가로 노벨상을 받지만 노벨상의 단지 그들 인생의 작은 보상이다.

그들이 그들의 노력으로 받은 것은 사랑과 자신의 존재 가치의 확인, 그리고 꿈을 이룬 성취감이다. 학생들이 여름 방학을 통해 한번쯤 읽기를 권하고 싶은 작품이다. 젊은이여, 야망을 가져라 하고 백날 외치는 것보다 그 야망을 어떻게 갖고 어떻게 이루는 지를 보여주는 이런 작품을 읽어보게 하는 것이 훨씬 그들의 꿈에 도움이 될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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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란도
버지니아 울프 지음 / 창해 / 199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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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라는 시를 중학교 때 읽었다. 그 시 한 구절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간 숙녀..."라는 글 속의 버지니아 울프만을 기억한다. 이 책을 읽고 난 지금도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 작품 속에 만연한 정신병적인 집착을 발견하고 이 여자는 정상이 아니었겠어 생각을 했다. 하지만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일까. 나는 정상적으로 살고 있는가. 내가 알고있는 모든 사실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들인가를 생각하게 했다. 읽기에는 부담이 되는 작품이었다. 요즘 내가 즐겨 읽는 추리소설이나, SF소설과 비교하면 재미 면에서는 게임이 안 된다. 물론 대 작가인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을 이런 작품과 비교한다는 것이 교양 없는 짓이겠지만, 영화에서의 그 올란도의 무표정하고 창백한 얼굴이 뇌리에 자리잡지만 않았더라면 결코 손대지 않았을 작품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페미니스트 문학의 선구자적 작품으로 꼽히는 이 작품은 올란도라는 인간이 4세기 동안 남자와 여자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당연하겠지만 버지니아 울프는 올란도가 결국 여자로서의 삶을 선택하게 한다. 버지니아 울프 자신이 여자로서의 인생을 고통스럽게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의 선택을 여성으로 결정한 것은 놀랍다. 나도 어린 시절에는 여자보다는 남자의 삶이 더 가치 있고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여자의 삶이 더 가치 있고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올란도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가 4세기동안 간직한 '떡갈나무'라는 시의 의미는? 남성에서 여성으로, 결혼과 출산은 무엇이고, 여왕의 영접과 달은? 나는 올란도는 자연과 결혼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여성이나, 남성이라는 성을 떠나 자연 안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의 정체성의 확인과 그 과정 안에서 올란도는 사람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의식이라는 생각을 했다. 콘스탄티노블의 집시의 말처럼 자연 안에서 내가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했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말이다. 어렴풋하게 느껴진다.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버지니아 울프의 망막한 상념 하나가... 그러므로 내게는 올란도란 버지니아 울프의 분신이라는 생각만이 들뿐이다.

올란도처럼 극단적인 삶을, 남자로서의 삶과 여자로서의 삶을 살아보면 인간이 남자로서, 또는 여자로서 나뉘어 살아간다는 것이 무의미한 일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삶을 사는 것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아닐까...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페미니즘 문학이라기 보다는 자연주의 문학이라고 말하고 싶다. 자연 안에서 내가 많이 가졌다 해도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이 한 문장에 버지니아 울프의 생각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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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로버트 제임스 윌러 지음 / 시공사 / 199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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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루지 못한 사랑은 아름답다. 그 추억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은 더욱 아름답다. 비록 그들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했다고 해도... 사랑은 미친 정열의 산물이라 젊은 사람들의 전유물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나이가 들어 중년이 된 사람들도 그 정열의 물결에 휩쓸릴 때가 있다. 하지만 살아온 날이 있고, 가족이 있고, 세상의 이목에 신경이 쓰일 나이이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사랑만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랑을 희생하고 죽은 미래를 끌어안아 버린다.

과거와 현재라는 현실 때문에... 어떤 삶이 행복할까. 주변 사람들을 외면하고 자신만의 사랑을 선택하는 것과 자신의 선택을 버리고 주변 사람들을 평화를 지키는 것 중에... 그 어떤 것도 진정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는 사랑 없는 죽은 삶이고 나머지는 죄책감을 짊어진 반쪽의 삶일 테니까. 그래도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은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그 사랑의 감정만은 진실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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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로운 왕 - 지오노 선집 6
장 지오노 지음, 송지연 옮김 / 이학사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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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마을에서 연쇄 살인 발생한다. 사람들은 헌병대에 신고를 하고 랑글루아라는 대장이 범인을 잡기 위해 온다. 그가 온 후에도 몇 명이 더 살해당하고 목격자에 의해 범인이 이웃마을의 V씨로 밝혀진다. 그는 그를 체포하지 않고 처형하는 방법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살해한다. 아마도 그것은 그 V씨와 어떤 묵계가 있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후 마을을 떠났던 랑글루아는 늑대 사냥 대장이 되어 돌아온다. 이제 그는 늑대를 잡는다. V씨를 살해하던 방법으로. 그리고 이제 랑글루아는 결혼을 한다. 그는 다이너마이트를 시거처럼 피우면서 자살한다.

처음 작품을 읽었을 때는 연쇄 살인범을 잡는 추리 소설로 생각했다. 하지만 랑글루아는 V씨를 너무 쉽게 잡았고 V씨가 연쇄 살인을 한 이유도 나타나지 않는다. 다음 장면에서는 V씨로 상징되는 늑대를 추적해서 잡는 랑글루아의 모습이 보이고 마지막에서는 거위를 잡는 랑글루아가 나타난다. 


이 작품이 권태로운 왕이라는 제목을 단 이유는 무엇일까. 이 작품은 현대인을 잘 묘사하고 있다. 단순히 재미나 기분 전환을 위해 살인을 하는 인간의 모습과 종래에 기분 전환 거리가 떨어지자 자기 목숨까지 살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V씨는 권태로움을 탈피할 생각으로 마을 사람들을 살해했고, 랑글루아는 그런 V씨를 단순한 기분 전환의 목적으로 살해했다. 늑대도, 거위도 그의 마음속에 있던 아내에 대한 살의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에서 V가 불어로 Voisin이라는 이웃 사람이라는 것은 이 책의 모든 생각을 대변하는 것이고 느껴진다. 이 작품은 추리 소설도, 환상 소설도 아니다. 이것은 사실적인 심리 소설이다. 인간의 내면에 늘 존재하는 권태로움, 기분 전화이라는 심리에 대한...  

 

64쪽에 랑글루아의 심리가 잘 묘사되어 있다. 

 

'우리는 50미터를 사이에 두고 한동안 이렇게 마주 보고 있었다. 이윽고 랑글루아가 한 발 한 발 걸어가서, 남자로부터 3보 떨어진 곳까지 갔다. 거기서 그 남자와 랑글루아는, 다시 한번, 서로 무언의 합의를 보고 있는 듯 했다. 거기 그대로 있는 것이 정말이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지려는 순간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겁니까?'하고 외치려는 찰나에, 커다란 파열음과 함께 남자가 쓰러졌다. 랑글루아가 남자의 배에 권총을 두 발 쏜 것이었다. 양손으로, 동시에. '이건 사고다'하고 랑글루아가 말했다.'

 

우리는 정말 이런 V씨 같은 사람인가? 랑글루아같은 사람인가? 우리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V씨나 랑글루아는 권태로움 때문에 기분 전환으로 살인을 저지른다. 우리도 그런가? 우리가 하는 많은 일들은 단지 권태롭고 싶지 않은 단순한 이유 때문에 행해지는 것인가? 기분 전환으로 늑대를 사냥하고, 기분 전환으로 결혼을 하고, 기분 전환으로 거위의 목을 따고, 기분 전환으로 자살을 한다? 파스칼은 권태로운 왕은 불행으로 가득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불행으로 가득한 사람인가? 내가 지금 이 작품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것은 그것이 어쩌면 사실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어쩌면 사람들은 권태롭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것을 산다고 말하는 지도 모를 일이니까.  

 

마지막에 <그 누가 말했던 가? ‘권태로운 왕은 불행으로 가득한 사람이다’라고?>의 문장은 파스칼의 팡세에 나오는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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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인의 초상 미래사 한국대표시인 100인선 93
최승자 지음 / 미래사 / 199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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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 전 누군가 내게 슬쩍 보여줬던 시집 한 권에 나는 매료되었고, 더 이상 편지지에 쓰여 있는 사랑에 관한 시를 읽지 않게 되었다. 시를 좋아하고, 시인을 좋아하고, 어쩌면 내가 걸었던 길을 시인도 걸었을 지 모른다는 생각에 행복하던 스물 몇 살의 나를 돌아보니 우스운 생각도 들지만 어쩔 수 없이 그때가 생각나는 것은 따뜻한 봄 볕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 세계의 문법을 그는 매번 배우지만 / 매번 잊어버린다. / 세계가 마취된 것인가, / 자신의 두개골이 마취된 것인가, / 그는 매번 판정을 내리지 못한다. /그는 물질이 정신성으로, 정신이 물질성으로 / 이동해가는 통로를 너무나 잘 알고 / 때로는 너무나 까마득히 모른다.

시인의 시는 매력적이다. 가끔 나도 이런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쉬운 듯하면서도 통찰력을 보여주는, 미사여구를 전혀 쓰지 않고도 정곡을 찌르고, 슬프면서도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는 시를. 하지만 그녀의 시는 외롭다. 고독하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들수록 시에 매료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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