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강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기 - 박노자, 허동현의 지상격론
박노자, 허동현 지음 / 푸른역사 / 200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결론부터 말하자면 열강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으려면 줄을 잘 서고, 눈치를 잘 보고, 내 편을 만들고, 그리고 내적으로 힘을 키우는 것을 행해야 한다.

백여년전 우리 조상들은 지금과 같은 상황을 아무런 대비 없이 맞이했다. 그 나름대로 분석하고 정보를 수집했다고는 하나 우리가 식민 지배를 당한 것은 사실이고 황제가 무능하여 여기저기 눈치만 본 것도 사실이다. 백성을 보살피지 않고 자신들만의 안위를 생각한 것도 사실이다. 박노자가 말하듯이 그 당시 개혁세력이라든지 개혁저지 세력이라든지를 망라하고 그들은 모두 가진 자들, 이른바 양반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 시대는 어쩔 수 없이 열강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허동현은 그 나름대로는 애를 썼노라 말하지만 그 노고가 누구를 위한 노고인지는 뻔한 일이니 말하나 마나한 일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이 글을 읽는 이유는 지금이 그때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처럼 위로는 중국, 러시아가, 아래로는 일본과 미국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보다 강하다. 강한 적, 또는 겉으로 보이는 우방을 앞에 두고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한심하기 그지없다.

어쩌면 그 당시의 소위 배우고 잘 산다는 사람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지... 그때나 지금이나 국민을 생각하는 이는 없다. 부정부패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고, 수집해야할 정보를 수집하지 못하는 무능력도 마찬가지다. 그때보다 수교한 나라가 많고, 그때보다 더 잘 살고, 그때보다 배운 자들이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무엇이 우선하고 무엇을 중요시 생각해야 하는지를 모른다.

우리가 가장 잘하는 것이라면 눈치 보기일 것이다. 미국, 중국, 러시아 눈치 보기. 속으로 일본 눈치 보며 겉으로는 아닌 척하기. 국내에서 서로 못 잡아먹어서 난리나 부리지, 세계가 어찌 돌아가는 지, 우리가 지금 얼마나 위태로운 지경에 놓여있는지 자각하는 이가 없다. 국민이 자각할 일이 아니다. 정부가 자각할 일이다. 외교는 국민이 하는 게 아니라 정부가 하는 것 아닌가.

백 년 전 우리는 세상과 각국의 정세 파악, 그들이 가진 힘과 그들의 속내를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들을 알고 세계정세를 잘 파악하고 있는가...

지금 당장 나라가 망하고 안 망하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우리 손으로 우리나라를 지킬 힘을 지속적으로 기르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제대로 된 외교관 하나 없고, 제대로 된 정책 없이 우왕좌왕하는 국가의 모습에 국민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 혹자는 이것도 국민을 불안하게 하는 것이라고 할지 모른다.

그럼, 이들이 아닌 정부가 우리가 나아갈 바를 제대로 알려주기 바란다. 이들도 제대로 된 살아남는 비법을 아는 것 같지는 않으니 말이다. 읽고 나니 앞날이 더욱 깜깜하다. 우리는 언제까지 옆 나라 눈치만 보고 살아야 하는지... 그런 역사를 또 한번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싶은지...

참, 여기서 가장 마음에 드는 말은 박노자의 외국 유학파들이 득세하는 현실에 대한 지적이었다. 유학을 갔다 와야 한 자리 하는 나라, 자기 나라 대학은 육성할 생각도 안하고 그래서 국적 포기를 유학이라는 이름으로 당당하게 외쳐대는 실세들이 있는 한, 그리고 그들을 계속 반복해서 기용하는 정부가 있는 한 교육의 발전, 부의 분배, 나아가서 역사 바로 세우기와 그 모든 문제, 우리 안에서 곪을 때로 곪아버린 부패를 없애지 못할 것이다.

열강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기는커녕 우리 안에서 그대로 폭삭 주저앉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든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터라겐 2005-06-15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암튼 물만두님은 읽는 속도도 빠르지만 속시원하게 써주시네요.. 지도 지금 읽고 있는데 약이 바짝바짝 오르고 있어요.. 어쩜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게 많은건지...

물만두 2005-06-15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화통이 치밀어서 이런 책은 안 읽습니다. 옆으로 많이 세거든요 ㅠ.ㅠ;;;

하루(春) 2005-06-15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만순님? ㅎㅎ~ 정말 빠르군요. 그저께 받았는데...

물만두 2005-06-15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님 뭔 말씀을... 만순이는 아예 담 쌓고 사는 인간이라구요 ㅠ.ㅠ 저도 그저께 받았어요^^;;;
 
광장 / 구운몽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분단의 현실을 이 작품만큼 잘 표현한 작품이 또 있을까. 사상이 인간을 어떻게 가두는지 이념이 인간을 어떻게 옭아 메는지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참 답답하다. 우리 나라에서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더 없이 답답하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느낀다. 그러니 50년도 더 전에 흑과 백을 분명히 강요당하는 시대에서는 더욱 답답했을 것이다.    

 

북으로 간 아버지와 남에 남은 아들. 명준은 모진 고문을 당한다. 그가 저지르지 않은 아버지의 사상에 의해. 그건 부조리하고 말도 안 되는 잔인한 일이다. 사람의 생각을 고문으로 지배하려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낳게 했다. 그는 자신이 만든 밀실로 도망친다. 하지만 결국 월북을 선택한다. 북으로 간 명준은 그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그에게는 사상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들에게 명준은 부르조아였을 뿐이다. 밀실에서 넓은 광장으로 나왔지만 역시 새조차 날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제 3국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를 포기하는 행위였고 그래서 그는 바다에 뛰어들고 만다.   

 

우리는 주인공 명준을 통해 공산주의니, 자본주의니, 사회주의니 민주주의니 하는 이데올로기가 과연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고 행복하게 하는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명준은 어떤 이데올로기도 선택한 적 없었음에도 민주주의라는 나라에서 내몰리듯 공산주의 나라로 가게 되고 다시 공산주의 나라에서 제 3 세계라는 말도 안 되는 곳으로 내몰린다. 그가 진정 선택한 것은 자식에 대한 그리움뿐이었다.  

 

우리가 그의 등을 떠민 것이다. 사상은 권력을 가진 자의 인간을 다스리는 수단일 뿐이다. 그것이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마찬가지다. 개인이 스스로 생각하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다면,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어떤 이유로 고문당하는 세상이라면 그런 세상은 좋은 세상이 아니다. 그래서 인간의 세상은 좋은 세상일 수 없는 것 같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의 생각은 반드시 그를 수밖에 없다는 논리는 넓은 광장에서 줄맞춰 걸어야하는 병정인형을 연상시킨다. 그들에게 하늘이 보이는 광장이 무슨 소용일 까. 비둘기가 날지 못한다면. 배 위에서 제 나라를 떠나는 그 사람들은 갈매기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 까. 명준처럼 바다로 뛰어들고 싶지 않았을 까. 그들이 어떤 희망으로 이 땅을 떠났을 지는 모르겠지만 저 바다를 나는 갈매기보다 불행한 것은 확실하리라.   

 

누가 명준을 이렇게 만들었나. 인간을 행복하고 진정 자유롭게 할 수 없다면 인간에게 이데올로기는 필요 없다. 그것은 인간을 지배하려는 도구에 불과하니까. 다시 이 땅에 명준과 같은 피해자가 없도록 우리는 아직도 분단된 이 땅에서 이데올로기가 아닌 진정한 인간애로 조국을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주 2005-06-14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광장은 언제부터 읽어본다는 게 아직도 안 읽고 있었어요.

물만두 2005-06-14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아주 옛날에 읽었어요... 그리고 5년전에 한번 더 읽고 두번 읽었네요. 읽으면 읽을 수록 비애감만 커지지만요...
 
유년의 뜰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4
오정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아득한 벌판

죽음의 붉은 신호등 앞에

당신은 서 있었다.

건너가지마, 누군가

등 뒤에서 속삭였다.

결코 뒤돌아 봄 없이

당신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시간과 죽음 사이로

가랑이를 벌리고 앉아

운명의 난장판 혹은 고독의 牌(패)들을

쉬임없이 흩었다 다시 모으고

또다시 흩으면서

당신은 슬금슬금 웃는다.

당신의 전신이 조금씩 허물어지면서

진흙을 게워내기 시작한다.

 

아득한 벌판 앞에서

당신의 그림자가 먼저 지워진다.

두 다리와 몸통이 지워지고

머리가 지워지고

오직 귀신같은 눈빛만 남아

마지막으로 당신의 시야가

막막하게 흩어져 눕는다.

 

최승자 시인의 “솔리테어”라는 시다. 오정희의 “비어 있는 들”을 읽고서 라는 부제가 달려 있기도 하다. 이것보다 오정희의 작품을 잘 표현하는 내용이 또 있을 지 의문이다.

낚시하러 가는 남편을 따라나선 아내는 아이와 남편에게 반복적으로 시간을 묻는다. 지루하고 초조한 일상이 세월을 지나도 계속 반복되는 것이 오정희의 소설이다. 그의 소설을 읽다보면 삶이 너무나 건조해서 바짝 말린 명태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라야만 명태는 조각조각 찢겨진 채 아버지 술국으로 어울리듯이, 어쩌면 그런 메마른 일상의 연속기가 인간 삶의 참 맛을 알게 할 지도 모르겠다. 단편들 중에서 “저녁의 게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어느 날인가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오는 도중 문득 내 인생이 감옥 같은 일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오정희의 “저녁의 게임”에서 아버지와 화투치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래서인지 모르겠다. 내가 가끔 오정희의 소설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단어가 감옥인 것이... 한마디로 그의 작품을 표현하라면 감옥 같은 일상을 그린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백년이 지나도, 천년이 지나도 변치 않을, 인간이 날마다 이별하는 시간의 역사가 고스란히 이 책에 담겨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재미가 없다. 하지만 누구나 한번쯤은 읽어야하는 참 서글픈 우리의 소설이기도 하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루(春) 2005-06-09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저번부터 읽고 싶었는데... 꼭 읽을게요.

물만두 2005-06-10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있으신가요? 이거 벤트 방생 목록에 있습니다. 구판이지만요^^

하루(春) 2005-06-10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벤트에 꼭 참가해야 할텐데요... ^^

물만두 2005-06-10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셔야죠^^
 
책상은 책상이다
페터 빅셀 지음, 이용숙 옮김 / 예담 / 200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책상이 책상이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왜 책상을 책상이라고 부르는가. 변화를 바라는 노인은 책상을 책상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았다. 책상을 사진이라고 부르고 사진은 침대라고 부르고 침대는 의자라고 불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남들이 하는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침대에서 잤어."라고 누군가 말을 하면 그는 그것이 아주 우스웠다. 그에게는 "사진에서 잤어."라고 말하는 소리로 들렸기 때문이다. 더 안 좋은 일은 남들도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보편 타당한 것을 따르는 일은 중요하다. 그것은 사회에서 규칙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중요한 규칙이다. 그것은 개인에 의해 바뀔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변화를 원하고 변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고독하다.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떠든다는 것은 고통이고 치유되지 않는 병을 얻는 것과 같다. 하지만 가끔 우리는 생각을 한다. 책상이 꼭 책상이어야 하는 걸까. 그것이 침대가 되면 안돼는 걸까. 의자라고 불러도 상관없지 않을 까.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그것은 침묵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배우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속박하고 틀 안에 가둬서 가끔 몸부림을 치지만 결국 빠져나가지 못하게 옭아매는 지 모르겠다. 우리는 어찌할 수 없는 감옥에 살고 있다. 우리가 간수가 되어야만 하는 규칙의 감옥에...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그 간결한 내용 속에 들어있는 많은 함축적인 이야기에 놀랐다. 가벼운 동화책을 한 권 읽은 듯한 느낌을 주면서도 페터 빅셀은 나에게 끊임없이 생각을 요구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다 알았다는 듯 책장을 덮었지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그때는 고개를 갸우뚱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말았다. 아직도 나는 그럴 것이다 라고 추측할 뿐 그의 생각을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책꽂이라고 부르는 곳에 모셔져 있는 이 책은 내게 무지를 알리는 거울로 아직도 나를 주시하고 있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늘빵 2005-06-08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읽고 싶은데... 원래 찜해놓은건데 자꾸 미뤘죠.

물만두 2005-06-08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기 쉬운데 읽고 나면 무지 어려워요...

마냐 2005-06-08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시작은 쉬운듯 한데....여운은 어렵군여...ㅋㅋ

물만두 2005-06-08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이 머리속에서 뱅뱅@@ 돌아요^^;;;

stonehead 2005-06-09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상이 책상이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란 질문

흐음! 정말 쉽지 않은 질문이군요.

청맹과니가 당달봉사가 되기 위해 나불거리자면

첫째/책상을 진정으로 책상이게 해 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이데 대한 데카르트의 증명인식은 좋은 실례일듯.
-세계의 모든 것의 존재를 의심하더라도, 의심을 하는 자신의 존재만은 의심할 수가 없더라. 그리하여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둘째/ 당랑거철의 교훈에서 얻은 케세라 세라...ㅋㅋㅋ

이상으로 주절거렸습니다.

물만두 2005-06-09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방금 케세라 세라 하고 왔어요^^ 우와... 스톤해드님^^
 
백년 동안의 고독 청목정선세계문학 75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신동진 옮김 / 청목(청목사) / 1994년 5월
평점 :
절판


환상과 암시의 미로 속에서 우리를 거울에 비쳐 보았을 때...

이 책을 산 것은 우연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가브리엘 마르께스라는 사람을 알지 못했다. 단지 그 당시 내가 몹시 우울했고, 불안정했으며, 자신이 고독하다고 느꼈다는 사실을 알뿐이다. 그래서 고독이라는 단어가 들어갔다는 이유로 이 책을 읽었다. 작품은 난해했다. 무언가를 암시하는 것 같지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었고,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공감이 가지 않는 행동만을 했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끝도 없는 환상과 암시의 미로를 헤매 다녔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그들이 말하는 백년동안의 고독이라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업에 의한 것인가 생각을 하게 됐다. 마치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에서처럼 가문의 몰락이 예언에 의해 실현되고 있다.

고독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에 대한 애정의 결핍에서 나온 결과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애정은 무엇인가. 애정은 고독을 치유하는 약인가. 하지만 백년동안의 고독했던 한 가문의 끝은 근친상간에서 온 파멸이었다. 99년을 내내 애정결핍으로 고독하던 가문이 마지막 1년을 진실한 사랑으로 채워가려는 순간 그것이 부도덕한 근친간의 애정이었다는 이유로 신기루처럼 사라져야만 했던 것이다. 허무한 일이다.

인간들 하나 하나의 죄가 쌓여서 어쩔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몰락과 멸망이라는 파멸의 길로 스스로를 몰아 넣는 것이 고독의 끝이었고 또한 치유였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상처받은 영혼이었다. 단지 남보다 약은 사람이 아니었을 뿐이고, 남과 같기를 바라지 않았을 뿐이다. 시대에서 밀려나 주변을 서성이는 고독. 부모로부터 대대로 이어지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그것이 잘못이라고 어떻게 말 할 수 있는 가. 단지 스스로 깨닫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이 죄라면, 그래서 벌을 받아야한다면, 지금도 존재하는 많은 고독들 또한 그러한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가 되지 않을 까. 그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냥 방치하고 있어도 되는 것일 까. 우리가 그곳에 속하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그렇다면 그것은 또 다른 고독을 잉태하는 일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이것은 어느 한 가문의 슬픈 얘기만은 아니다. 역사 속에만 존재하는 얘기도 아니다. 지금도 벌어지는 일이고 크고, 작게 이어지는 일이고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유전병처럼 은밀하게 지속되는 일이다. 막을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 막지 못 하는 일이기도 하며 치유되는 가운데 보균자는 항상 존재한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우리가 속한 가정이. 사회가 국가가, 문명이 그렇지 않다고 당당하게 말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마지막 아이의 돼지꼬리를 그려본다. 그가 개미들에게 파묻힌 것을 보고도 아무 것도 하지 않던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를 기억한다. 예언에만 몰두하던... 그리고 멈추지 않고 아마란타 우르술라의 내부에서 흘러내려 사랑만을 원하고 죽음으로밖에 막을 수 없었던 시뻘건 피의 외침을 상기하려 노력한다. 그리고 그것은 옳고 그름의 세속의 잣대로 판단될 수 없는 것임을 잊지 않으려고 다짐을 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즈마리 2005-06-07 0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재밌으셨다면, 주제 사라마구의 <눈 먼 자들의 도시>도 읽어보세요. 벌써 보셨을라나? 제 생각에 만두님이 좋아하실듯 한데..^^ 저도 좋았구요. 물론!

물만두 2005-06-07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즈마리님 이 책 읽느라 저 죽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님이 말씀하신 책 함 보기는 합지요^^ 살펴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