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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두서의 초상화에 관련된 의문점이 풀렸다고 야단법석입니다.

이 기사를 접하면서 같은 길을 걷는 사람으로서 답답함을 금할길이 없습니다.

아랫글은 배혜경님의 서재에 이와 관련된 기사에 밑글을 단 내용입니다.

사족 한가지만 달자면...
미술사학계에서 불화나 초상화 등의 제작과정에 임해보신 분들이 없이 단순히 작품 가지고 연구를 했기에 일어나는 해프닝입니다.
아마도 불화나 초상화를 직접 제작하셨던 분이라면 이 문제에 이렇게 어렵게 답을 구하지 않게 될것입니다. 문제는 실제 불화나 초상화를 그리신분들이 정상적인 학문을 이행할수 없어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입지를 갖추지 않았기에 이 문제에 접할 수 있는 여지가 없어 방관하는 형태라는 점입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뛰어난 화가도 밑그림 없이 바로 원그림을 그리지 못합니다. 밑그림은 일단은 바탕이되는 한지나 명주 바탕에 유탄으로 그려지게 됩니다. 대충 그려지지만 초본이 되기까지 기본적인 윤곽을 잡게 되는 것이며 그 유탄으로 그린 초본을 바탕으로 정밀하게 밑그림을 그리며 그 밑그림을 초본(草本)이라고 하며 초본을 바닥에 놓고 다시 원그림의 형태를 본뜨게 됩니다(이렇게 하여 초본을 남기는 경우도 있고 초본에 바로 채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모 티비의 문화재 관련 프로그램에서 가끔 이러한 밑그림이 나오는 것을 보신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이런 밑그림은 원그림의 바탕이 되었으니 당연히 원그림과 거의 흡사하되 채색만 되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도 초상화나 불화를 분리하다보면 밑그림을 아래에 배접하고 윗그림을 그린 형태를 많이 보게 됩니다.


이러한 제작 과정을 사실은 미술사학자들이 잘 모르고 있기에 이번과 같은 일들이 발생을 하는 것입니다. 제작과정을 알면 밑그림에 당연히 귀와 옷깃이 그려졌으리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인데 말입니다.
이러한 문제로 갑론을박 하였던 자체도 학자로서는 창피하게 생각을 해야하는 일입니다. 갑론을박 이전에 제작과정을 알려고 노력하였더라면 답을 알수 있었을텐데 말입니다.


지금도 학자들은 불화를 그리거나 초상화를 그리는 분들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있으며 특히 불화나 단청에 대해서는 학문 자체로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경향이 강합니다. 말 그대로 기능인이라는 것이 이유겠지만 불화나 회화, 초상화에 있어 전반적으로 제작과정을알지 못하면 이번 윤두서 초상화 같은 웃지 못할 일들이 마치 새롭게 발견하는양 발표가 되는 것입니다.

한가지 안타까운것은...불화사나 초상화원들이 학문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기술을 익히느라 공부할 틈이 없어 학위는 물론, 제대로된 학문의 길로 접어들 기회가 없기에 이런 문제를 소명할 수 있음에도 그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학문을 먼저 한 다음에 불화나 초상화에 입문하여 체계를 갖추어 나가지만 이는 근래의 일로 이들이 나중에 학문의 중심권에 서게 되면 이러한 논쟁은 그 종지부를 고하게 될것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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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6-08-10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역시...

진권호 2007-09-18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
 

 1. 들어가는 말

  우리 나라에서의 고고학이나 미술사학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신라의 융성했던 1000년 고도인 경주의 발굴도 대부분이 일본인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순수하게 우리 나라 사람에 의하여 발굴된것은 1946년의 경주 호우총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일본인들에 의하여 발굴이 행해졌는데 호우총 발굴의 결정후에도 박물관의 업무인계를 위해 남아있던 아리마스라는 일본 학자의 풍부한 발굴 경험을 빌까도 생각을 했었지만 송석하 선생을 비롯하여 초대박물관장이던 김재원 선생등이 우리 손으로 발굴 할것을 주장하여 순수하게 우리 손으로 무덤을 파헤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발굴 현장에 가 보시면 아시겠지만 발굴 현장은 대통령이 어디 납시는때의 경호는 저리가라입니다. 출입은 고사하고 멀리서 망원렌즈로 현장을 촬영하는것 조차도 막을 정도로 무척 삼엄합니다. 물론, 지키는 사람이 있어 총이나 칼로 제지를 하는것은 아니지만 발굴 종사자의 대부분은 외부의 공개를 지극히도 꺼리는 입장입니다. 광복이후에 우리 손으로 발굴을 한다는 것은 한번도 발굴에 참여를 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덤벼드는 매우 위험한 일이겠지만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던가 봅니다. 이 때는 미 군정청이 존재했던지라 군정청의 허가를 득하고 발굴에 임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발굴조사라고 하지만 어떻게 보면 엄청난 무덤을 발굴 연습장으로 삼은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호우총으로 결정이 나기까지 경주지역의 어디를 파볼까? 라는 문제로 고민을 했을 정도로 계획된 발굴이 아니었었습니다. 호우총에서는 청동항아리에 16자의 명문이 새겨진것을 발견하고 이 청동항아리가 광개토대왕 사후 3년뒤에 만들어진 물건이라는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어 명문에 새겨진 호우(壺우:한자의 '우'가 없어 그냥 씁니다)즉 항아리라는 의미를 붙여 호우총이라고 이름 붙인 것입니다.

  재미있는것은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는 경우에는 발굴 유물중 대표적인 유물의 이름을 무덤에 붙여줍니다. 총(塚)이란 주인을 모르는 무덤을 칭하는 것인데 금관이 나오면 금관총, 천마그림이 나왔으니 천마총...스웨덴의 왕자가 왔다가서 그 방문을 기념해서 서봉총 등등 이름도 붙이기 나름인것 같습니다.

 하여간, 이렇게 중요한 무덤의 발굴 경험이 없었던 우리의 발굴단은 말 그대로 그저 상식이 통하는 선에서 발굴을 하게 되었는데 이 당시에 발굴에 임했던 분들이 나중에 우리 발굴에서의 중요한 선구자적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호우총 발굴은 '진단학회'회원이 주로 참여를 하였는데 이 때의 회원으로는 김재원, 임천(전 민속박물관장 임영주 부친), 이건중,서갑록, 이병도, 이상백, 이숭녕, 홍종인 씨 등등이었습니다.

 2. 공주 무녕왕릉의 발굴

 이렇게 진짜 무덤을 아무런 발굴 지식도 없이 파헤친 호우총 발굴단 이래 경주 감포의 감은사지등 사적과 유적지, 그리고 구석기 시대의 선사유적지 등등 제법 많은 유물들이 발굴을 통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발굴 작업을 해 나가면서 발굴의 노하우를 쌓았다고 봐야 할것입니다.

  그러던 중 1971년...공주의 송산리 무덤군에서 우기를 대비한 수로 보수작업을 하던 인부의 삽 끝에 뭍어나는 이상한 소리로 말미암아 그 유명한 무녕왕릉의 발굴이 시작됩니다. 첫 발견은 6월 29일인데 무덤과 무덤 사이에 물골을 고르던 인부의 삽끝에서 우연치 않게 무녕왕릉이 발견된 것입니다. 경주의 무덤이나 부여의 무덤 그 어느것 하나 도굴꾼의 손이 닿지 않은것이 거의 없었던 실정에서 1400여년전의 무덤이 고스란히 발견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엄청난 사실이었습니다. 그것도 무덤이라는 것을 인식하고는 당시의 공주박물관장 김영배는 상부에 보고도 하지 않고 발굴을 하려고 서둘렀는데 다행히 현장에 있던 문화재관리국 직원이 욕을 먹어가면서 현장을 사수하고 서울에서 발굴단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는데...이 일은 차라리 김영배 주도로 발굴이 되었더라면 서울에서 내려온 발굴단이 저지른 과오를 범하지 않았을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서울에서는 급하게 발굴단이 편성되었습니다. 김원룡 국립박물관장을 비롯하여 지건길, 한병삼, 장인기, 이호관 선생등이 조사단으로 공주로 급파 되었고 이런 엄청난 사실앞에서 흥분한 조사단은 철야발굴을 결정하고야 말았습니다.  당일은 비가 내리는 관계로 하룻밤을 더 보내고 다음날 아침부터 발굴이 시작되었는데 연도를 구성하고 있는 첫 벽돌을 들어내는 순간 허연 기체가 무덤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모두들 보았습니다. 어던 사람은 과학적인 원리를 설명하며 무덤속의 찬 공기가 바깥쪽의 더운공기와 닿아 생기는 서리 현상이라고도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무덤속에 있던 혼백이 나가는 모습이라고도 합니다.  어찌되었건 이 무덤의 주인공이 501년에 즉위한 무왕이라는 것이 지석을 통해 밝혀지게 되었고 기자들에게 공개를 하게 되었습니다. 부장품 수습 이전에 무덤의 규모를 실측하느라고 이곳 저곳에 줄자를 가지고 재며 다니는 발굴단원의 발밑에서는 1500여년을 견뎌온 유물들이 부숴지고 있었습니다.

  길게는 1년도 모자랄 발굴 작업은 대충 유물의 위치를 모눈종이에 기록하고는 쓰레기 줏어담듯 자루에 담았고 몰려드는 구경꾼과 사진기자로 인해 조속히 수습하여 일단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되겠다는 강박관념이 백제 무덤의 발굴에 천추의 한을 남겼음은 물론이고 우리 나라 발굴사에도 커다란 오점을 남기게 된것입니다. 무덤속은 이사가는 사람들이 깨끗이 치우듯이 그렇게 깨긋하게 정리를 하고 만 것입니다.

  무녕왕릉에서는 엄청난 유물이 나왔습니다. 가장 중요한것은 삼국유사의 기록과 무녕왕의 사망 기록이 일치하는 것이었는데 이를 증명하는 지석의 53자의 글자로 확인을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물에 관해서는 나중에 다시 한번 언급을 하겠지만 백제의 왕과 왕비(또는 여종)가 나란히 누워있는 무덤의 발굴은 이렇게 싱겁게 끝이나고 말았는데 발굴 조사단 모두는 이 일을 두고두고 후회를 합니다. 특히 삼불 김원룡 선생은 사망하는 날 까지도 무녕왕릉의 발굴 실수를 자책했다고 합니다. 이런 졸속 발굴은 무덤에 들어가면서 많은 유물의 손상을 가져왔는데 연도를 지키던 돌짐승의 다리를 부러뜨린일은 물론이고 금속공예품과 목제조각품을 이리 저리 넘나들며 실측을 하느라 와작거린일 등등 고고학자의 입장에서 평생 한번 만나기 힘든 엄청난 유물의 조사를 이렇게 망쳐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국립박물관장을 역임하셨던 고 한병삼 선생께서 들려주셨던 이야기를 잊을 수 없습니다. "왕릉을 비롯한 무덤은 함부로 파헤쳐서는 안돼..."

"얼마나 많은 일들이 벌어지는데....잠자리도 뒤숭숭하고 갑짜기 맑은 하늘에서 번개가 치고 소낙비가 내리질 않나...교통사고도 나고..."

"무덤을 파헤칠때는 혼령이 나가는것을 볼 수 있어...몸도 아프고 사람이 죽고..."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한병삼 선생은 말년에 몹씨 고생을 하시다가 돌아가셨다. 아직도 한참 활동하실 나이에 아깝게 타계하시고 말았는데...그것이 발굴과 관련이 되었는지는 모른다..

 3. 마치는 말

 후일 고 김원룡 선생은 무녕왕릉 발굴의 실수는 본인 자신의 실수나 아쉬움이 아니라 나라와 국민에 대한 큰 죄를 지은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당시의 발굴장비는 형편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록을 위한 촬영장비는 물론이고 어두운 무덤등을 대낮처럼 밝힐 변변한 전등 조차 없었던 때였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무덤속을 밝히게 될 전등의 조도나 밝기도 정확하게 측정하여 유물에 손상읠 입히는가에 대한 선행 조사도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엄청난 실수가 후학들의 발굴에 조금더 신경을 써야 한다는 커다란 교훈으로 남겨지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발굴 현장은 발굴이 끝나고 조사가 끝나게 되면 방치하고 있습니다. 서울 근교나 경기도의 일부 지역에서도 발굴 종료후 방치로 인하여 오히려 발굴을 안하니만도 못한 지역이 무수히 많이 있는데 이런것들은 제도적 모순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결과이기도 합니다. 발굴비용은 책정이 되어 있음에도 발굴후 정비사업이나 보존에 관한 예산은 책정이 되어있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발굴조사단이 파헤쳐 놓은 지역은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또 다른 모습의 폐허로 변하고 있습니다.

 서울 인근에서는 남양주에 위치한 조선 최대의 사찰인 회암사의 발굴이 아직도 진행중에 있습니다. 물론, 유물관도 있으나 현장 사무소에서 방문 목적을 설명하면 사진 촬영등을 제외하고는 발굴 지역을 안내받을 수도 있습니다. 엄청난 유물을 하룻밤 사이에 발굴했던 무지함을 교훈으로 일일히 붓끝에 물을 뭍혀 혹시라도 작은 유물에 상처를 줄까 조심해서 발굴에 임하는 모습...특히 전문인력의 부족으로 전공 학부의 학생들의 참여가 불가피하여 대부분의 발굴이 학생들이 방학중인 뜨거운 여름과 삭풍이 몰아치는 한겨울에 이루어지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나마 발굴에 대한 어느 정도의 경험과 자신이 있으니 다행이지 지금 발굴을 통한 조사가 긴요하지 않다면 우리 후대에 보존과학이 발달한 시대에 발굴을 한다고 해서 문제가 될것이 없습니다. 문화재의 보존에서 첫번째는 원형보존인데 땅속에 뭍혀있는것 만큼 원형이 잘 보존되는것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중에...나중에 완벽한 보존방법이 보편화 되었을 때 그들 후손의 뛰어난 기술을 빌수 있다면 우리의 문화 유산은 세세손손 후대에게 전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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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12-21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헤 바로 답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꾸벅.

사실 무녕왕릉 이야기는 조유전씨 책에서 보긴 봤는데,

좀 더 생동감있게 수수께끼님의 말씀으로 듣고 싶었어요.

에, 또, 좀 다른 얘기인데 서봉총은 이름 바꿀 계획이 없나요?

처음 서봉총의 이름 유래를 들었을 때 무척 황당하다 생각했는데,

아직도 서봉총이라고 불리는 거 같아서요.

그리고 주문 하나 더.

언제 기회되시면 미륵사지 석탑 복원 문제에 대한 님의 생각도 궁금해요.

수수께끼 2004-12-21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도 바로 답변 드립니다. 현재 동탑이 복원되어 떡 허니 버티고 있지만 아무리 동탑의 부재중 남은 부재를 사용했다고는 하지만 요즘 만든탑은 복원을 했다해도 요즘탑이지 백제 무왕때의 탑이 될 수 없습니다. 가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수십억을 드여서 복원했던 탑이 서탑이 주는 느낌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느끼실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현대의 과학이 아무리 발달을 한다해도 시공을 초월할 수는 없는 것이랍니다. 그 세월의 때를 어찌 입힐 수 있겠습니까?

서탑의 복원도 마찬가지로 봅니다. 일단 해체를 완료하였으니 어떤 방법으로든 복원을 하겠지만 지금 그 복원 문제로 조금은 시끌거립니다. 차라리 해체를 말던가....아니라면 예전과 같이 복원을 해야지...문제는 해체 이후의 부재로는 예전과 같은 복원이 어렵다는 점입니다. 복원을 하려면 어쩔 수 없이 보강재로 다른 석재를 사용해야 하는데 그럴경우 늙은이 얼굴에 어린아이 눈망울을 가져다 붙인다면 어색한것과 마찬가지로 매우 어려운 문제인 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조사지만 인근 마을의 댓돌이 탑의 면석같아보이는 것이 많은데...이는 아마도 동네의 옛 어른들이 미륵사지에서 떨어져 나온 돌중에서 쓸만한 석재를 집에 가져가서 댓돌이나 기타 용도로 사용하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인근 지역에 있는 유사한 석재에 대한 조사도 진행이 되었으면 합니다. 복원이란 원래의 것 그대로 만든다는 의미인데 증개축의 개념이나 완전히 신규로 만드는 행위라면 복원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일종의 다른 재료를 이용한 이식인 셈인데 이런 방법이 문화재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에 대해서는 무척 다양한 의견을 보이고 있습니다. 참고로 정영호 박사등을 비롯한 원로 학자들은 복원에 상당히 심각한 우려를 표하고 있으며, 동탑이 완벽한 컴퓨터 설계의 첨단 공법에 의하여 만들어졌음에도 탑의 무게가 안쏠림이 되지 못하여 조금씩 바깥쪽으로 하중이 이동되는 현상을 가져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의 미륵사지 석탑은 그나마 1천년 이상을 버텨왔지만 복원된 동탑은 한 세기를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일기도 합니다. 느낌도 전혀 다른 두 개의 석탑....그 속에서 복원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건립되는 구조물에 대하여 재삼 타당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수수께끼 2004-12-21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족을 단다면 무녕왕릉 발굴에 참여했던 분들의 이야기는 다소 조금씩 다릅니다. 그 당시 발굴조사단 인원중에 대부분은 벌써 세상을 떠나셨으며 지건길, 이호관, 조유전 선생등이 남아 있는 정도인데 무녕왕릉 발굴 당시에 관한 이야기들이 조금씩 다르답니다. 한편으로는 구수하게 이야기 처럼 전해드리고 싶고 또 제가 한병삼 선생께 들은 이야기가 있는지라 재미있게 말씀드리고 싶어도 자칫 발굴에 참여했던 분들께 누가 될수도 있어 간략하게만 열거를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리고 문화재에 관한 명칭 변경은 문화재위원회의 의결을 거쳐야 하는 문제인데 쉬운것은 아니랍니다. 워낙 이견이 많아서이며 또 한가지는 다르게 이름붙일 특별한 구실이 없다는 점도 서봉총이 그대로 남게된 배경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조선인 2004-12-21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정말 고맙습니다.

사실 전 미륵사지 석탑 복원에 대해 동탑은 도로 허물어버리고(가관이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꼭대기의 장식?이 기괴하게 여겨져요. -.-;;), 서탑은 가장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기단 부부만 터에 그대로 남긴 뒤 별도의 공간에 동탑과 서탑 '모형'을 따로 세웠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

반딧불,, 2004-12-21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륵사지 갈 때마다 참 아쉽습니다.

예전에 탑 앞에서 사진이라도 몇 장 찍어둘껄 싶어서요.

아이가 어리니..나중에 찍자 하면서 미루다가 어쩌면 정작 우리 아이가 보야 할 때에는 못 볼 듯 해서요..



미륵사지의 서탑 옆에 예전에 큰 나무 두 그루 있었던 것 기억하세요?

너무나 변해 버리는 모습에...아니 아예

그게 맞는 것인지도 모르게 변형될 모습에 벌써부터 걱정이 앞섭니다.



왕궁리 5층 석탑의 복원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아직도 참 많이 남았던데요.

참..반가워서 그냥 글 적었습니다.. 인사드립니다.

수수께끼 2004-12-21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님 반갑습니다. 미륵사지탑은 일본인들의 시멘트 덧칠이 무척 보기 싫었지만 그나마 그렇게 했기에 나머지라도 제대로 보존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미륵사지 석탑은 목탑을 본 뜬 탑으로 부재 자체가 석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조선인님의 말씀이 맞는 말씀일지도 모릅니다만, 어떤 전시의 기능을 고려해야 할것 같습니다. 동탑의 상륜부가 매우 어색해 보이는것은 사실이지만 탑의 비례로는 그런 크기가 나오는데 문제는 과연 그런 모습의 상륜부였나 하는 것입니다. 미륵사지 1차 발굴때부터 옆에서 지켜보았는데 삼국유사의 내용과 일치하는 연못이 있었던 사실이 발굴결과 밝혀졌었지요...저야 늘 찍는 사진인지라 사진을 많이 찍어 두었지만 나중에...라고 미루셨다면 지금은 영원히...로 변해버리고 말았군요...두 그루의 나무는 제 생각에는 버드나무로 기억이 됩니다. 당간지주 인근에도 버드 나무가 몇 그루 더 있었던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그리고 왕궁리 5층 석탑은 복원이 아니라 해체 수리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래전인 1965년에 황수영박사 주관으로 해체 수리를 하였으며 당시에는 사리함과 순금판에 금강반야바라밀경을 새긴것이 발굴 되었는데 당시 조립시의 부주의로 붕괴 위험에 처해서 지금은 해체 수리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인근에는 발굴 작업이 병행되어 한 동안 고려의 탑으로 알고 있는 이 탑의 편년을 재고해야할 백제의 기와가 발견이 되고 있어 앞으로 학계에서 왕궁리 5층탑이 백제계 탑이냐 또는 백제탑이냐에 대한 활발한 논의와 연구가 진행될 것으로 판단됩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백제의 탑을 본뜬 고려시대의 탑이라는데 동의하지 않고 있는 입장입니다. 일부 학계에서 그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해체 수리시 탑의 기단부 내부와 밑에서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기와무지가 발견되었기 때문인데 이 문제에 관해서는 조금 생각을 달리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해체 수리시에 인근에 있던 고려시대의 기와를 공간을 채우기 위하여 집어 넣었기 때문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 해체 수리하는데 요즘 시대의 기와를 기단부 내부나 터 다지는데 집어 넣었다면 후대 사람들이 이 탑을 해체하여 요즘 기와가 나왔다고 이 탑을 2000년대의 탑으로 본다면 얼마나 우스울까요? 양식이나 형태로 보아서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백제계 탑이 아니라 백제탑으로 보고 싶답니다....

조선인 2004-12-21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모아서 언제 책자로 내주세요? 네? 부탁이에요. ㅠ.ㅠ

반딧불,, 2004-12-22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나 말입니다.

정말 많이도 아쉽습니다.

그리고, 항상 생각합니다.

결국 관심의 문제이고,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좋다구요.



왕궁리 5층 석탑..자주 갑니다.

알아서 가면 더욱 좋겠지만, 몰라도 둘러보는 것만도 행복한 것이니까요.

많이도 아쉬운 미륵사지입니다...



해체 되기 전에 사진 찍어둘껄..하다가..

어쩌다보니 못 찍어서 얼마나 아쉬운지요..

모든 사람이 전문적인 수준일 필요는 없겠지요. 사랑하고..

그리고, 보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먼저겠지요.

느낄 수 있는 마음만 심어주는 것만도 성공이거니 합니다. 힘들겠지만요.

수수께끼 2004-12-22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적지를 둘러보게 되면 언제나 엄숙함에 젖어들고는 합니다. 그것은 사적지 속에 담긴 역사의 흔적을 느끼며 먼 과거로의 여행이기에 더욱 숙연해지는것이 아닌가 합니다. 안타까우시겠지만 미륵사지에서의 촬영은 영원히 불가능할것 같습니다. 그만큼 문화재는 한번 손상이 가게 되면 영원히 우리곁을 떠나 버린다는 나름대로의 경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왕궁리 5층 석탑에 자주 가신다니...그 쪽의 지명에 대해 한번 알아보시는것도 재미있는 일이 될것입니다. 왕궁리라는 명칭도 그렇지만 고도리(古都)라는 이름도 시사하는바가 큽니다. 현재는 마주보는 석불 두개만 달랑 서있는 이 지역이 왜 옛 도시라는 이름으로 남아있을지요....무언가 오래전부터 도시가 있었고..이제는 사라져 버렸기에 고도라는 명칭을 사용한것이 아닐까? 라는 의문에서 출발하신다면 의외의 재미있는 사실을 아시게 될것입니다. 시골의 지명이 왕궁리(王宮)라는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죠? 어딘지 왕궁이 있었기에 붙여진 지명이지 허허벌판을 왕궁리라고는 하지 않을것이 아니겠잖아요? 이런 저런 내용에 대한 궁금증의 해소가 바로 지적 호기심에서의 접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그 멋진 왕궁리 5층 석탑에 자주 가신다니 부럽기만 하답니다 ^&^~~

반딧불,, 2005-01-09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사는 곳이니까요.

어쨌든..그 쪽으로의 공부는 지난 여름에 실컷 찾았었지요.

스스로 정리가 안되고, 넷에서 찾은 자료들이라서 한정된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즐기는 편이긴 합니다.

계속 못 들어와서 이제사 답글 답니다. 죄송합니다.



제 주변부터 하나하나 알아가고, 정리하는 일을 해야 하는데 쉽지 않네요.

전번에 다녀온 감상 하나 썼는데,,서버가 불안해서 날아갔답니다.

무엇이든 아는만큼 보이겠지요. 그냥 저야 문외한이지만, 보고 느끼는 것만도 행복합니다.
 

 일본의 어느 사찰에 있던 고려불화가 도난을 당했고, 그 도난 물품은 우리 나라에서 도난 물품의 거래를 추진하다 덜미가 잡혀서 무속인과 몇 명이 구속되었습니다.  그리고 도난된 물건중 고려불화가 대구의 어느 암자에 있다는 것이 밝혀지며 원 소유자였던 일본의 사찰에서는 강력하게 반환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것은 절취했던 무속인은 절취 동기가 애국심이라는 엉뚱한 이유를 내세웠으며 일본의 사찰에서 반환을 요구하고 있지만 지금 이 고려불화를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대구지역 모 암자의 주지는 처음에는 공개할 수 없다고 했다가 지금은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합니다.

 애국심에 의한 절취라는 범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다소간의 문재가 있는데...그렇다면 진정 애국심으로 남의 나라에까지 가서 절취해 온 물건은 당연히 문화재청이나 관련기관에 신고를 해야함에도 암거래로 판매를 하려다 구속이 된것은 어떻게 설명을 할 수 있을지가 궁금합니다. 이유야 어떠하든 남이 소장하고 있는 물건을 가져간것은 분명 범죄행위에 해당이 된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라 할것입니다.

  고려불화는 우리 나라보다 일본에 더 많이 있는데 그 이유는 임진왜란 당시의 약탈과 일제 강점기하에서의 수탈...그리고 그 외에는 비공식 루트를 통한 일본으로의 유출에 의한 결과라고 보여지는데 그만큼 고려 불화는 불화로써의 가치가 높다는 점이겠습니다. 원래 일본의 효고(兵庫)현의 카쿠린지(鶴林寺)에 보관되어 있던 아미타삼존도는 1477년 일본으로 건너갔으며(이 시기는 임진왜란 이전으로 약탈과는 다소 거리가 있습니다) 카쿠린지는 589년에 일본으로 건너와 순교한 한반도의 스님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절이라는 것입니다.

  카쿠린지 주지는 대리인을 통해 "목숨을 걸고" 아미타 삼존상을 찾아오라는 특명을 내렸는데 그 이유는 선대로부터 가보처럼 물려받아 내려온 물건을 자기대에서 잃어버린것은 불명예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되찾아 가는 조건으로 우리 나라의 법률상 현재 보관중인 암자가 선의의 취득에 의한것이라면 취득 당시의 금액을 주고라도 찾아가겠다는 것이니 결국은 원래의 임자임에도 금전적 부담을 감수하고라도 반드시 되찾아 가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할 것입니다. 저도 신문에 난 사진을 통해서 보았지만 훔쳐온 '아미타삼존도'는 우리 나라에 있던 그림이라면 국가지정문화재로 충분히 등록 될 훌륭한 그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훔쳐온 이 그림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이 그림의 비중으로보아 돌려주기에는 무척 아까운 물건입니다. 그러니까 주무관청인 문화재청에서는 모르는척 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만  매년 20여건씩 1000여건의 도난 사고가 발생을 했지만 정작 되찾은 문화재는 아주 소수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도난당한 문화재는 몰래 해외로 빠져나가 해외에서 비싼 가격에 거래가 되기도 하는것입니다. 정부에서는 국제 공항마다 문화재감정관을 파견하여 반출 문화재에 대한 감정을 통해 우리 문화재의 해외 반출을 막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출국자의 짐을 일일히 확인하지 않는다면 밝힐수 없는 일이며 겨우 제보에 의하여 반출 직전에 수거하는 사례가 대부분입니다.

 몇 년전 중국의 고구려 고분에 있는 벽화가 송두리째 없어져서 난리가 난 적이 있었습니다. 중국 당국에서는 절도범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었었지만, 도난 사실이 밝혀질 때쯤 그 벽화는 우리 나라에 있다는 소문이 있었고 사실 알음알음으로 알아본 바로는 벽화가 우리 나라에 들어와 있는것은 거의 기정 사실인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외에서 이런 저런 사유로 우리 나라에 반입되는 문화재에 대해서는 소관부서인 문화재청이나 문화관광부쪽에서는 일절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만약, 언급이라도 하게 되면 이는 국가 차원에서의 문제로 비화 될 소지가 다분하고 또 훔쳐왔건 아니건 그 문화재가 국내에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팔이 안으로 굽듯 묵인해 주는 입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입니다.

 이번 아미타삼존도에 관해서도 문화재청에서는 일체 함구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몇 안되는 고려불화가 우리 나라에 남은 고려 불화인것을 감안하면 훔쳐온 불화 1점이 주는 문화재적 가치는 엄청나기 때문인데 훔쳐왔든 어쨋든 물건은 국내에 있으니 언젠가는 공개가 되리라는 판단이 앞서서일 것입니다.  언젠가는 소더비에 고려시대의 '수월관음도'가 경매에 붙여진 경우가 있었습니다. 외국인을 중계인으로 국내의 모 재벌이 사들인것으로 알고 있으나 명목상으로는 외국인이 낙찰받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결국은 한동안 떠들썩했던 소더비 경매의 '수월관음도'도 원래는 우리 나라에 있던것이 몰래 국외로 반출되어 거래가 된것이니 그만큼 문화재의 국외 반출에 커다란 구멍이 있음을 말한다고 하겠습니다.

  이번 '아미타삼존도'의 처리는 어떻게 될까요? 보관중이라는 대구의 사찰에서는 막말로 오리발입니다. 어디 숨겨두고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국내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검찰에서는 압수수색영장을 발부 받아서라도 삳삳이 뒤져서 찾아내겠지만 이번 사건 같은 경우는 경찰이나 검찰 모두가 바쁠것이 없는 일인 것입니다. 글쎄요...이런것이 애국인지는 모르겠지만 훔쳐온 물건을 제대로 찾아주지 않는다는것은 그 물건이 아무리 우리 나라에서 건너간 것이고 귀한 것이라고 해도 직무유기에 해당된다고 할것입니다.

 이 문화재에 대해서는 국가에서 문화재로 지정을 하게 되면 절대 우리 나라 땅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문화재보호법 제 21조에는 수출등 해외 반출에 대한 금지조항을 두어 국가에서 실시하는 반출 이외의 대부분의 경우는 해외 반출이 어렵게 되어 있으며 더군다나 판매를 목적으로 해외로 반출하는 것은 엄하게 다스리니 이 훔쳐온 '아미타삼존도'를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을 해 버리면 일본의 카쿠린지측에서 수억만금을 주고 되산다해도 일본으로 가져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으로는 문화재청에서 이 물건을 절대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을 하지 않을것이라는 점 입니다. 우선지정을 한다는 것은 오리발 내미는 대구의 암자와는 달리 공식적으로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며 이로 인한 국제간의 분쟁이 야기될 수 있다는점입니다.  우리 나라는 1972년에 제정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 및 자연유산 보호에 관한 협약"에 가입을 했기에 이 협약 제 5조의에 명시된 사항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며 아마도 문화재청에서는 '아미타삼존도'가 국내에 들어와 있고 언젠가는 공개가 될것이라는 생각에서 급하게 서두를 필요가 없는 것이며 다만 이 일로 인하여  문화재청으로 불똥이 튀는것에만 신경을 쓰고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국가간에 있어서의 절취라는 범법행위로 인한 문화재의 절도 행위는 매우 민감한 사안인것 같습니다. 돌려주자니 아깝고,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개입하자니 불똥이 튈까 두렵고.....그 고충은 이해하겠지만 남의 나라에 있는 물건을 훔쳐오는 일이 결코 정당화 되지 못함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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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녀 2004-11-12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식 문화재로 등록되지 않고 쉬쉬하며 보관하다가 혹시 훼손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수수께끼 2004-11-12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럴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귀한것일수록 더 꽁꽁~ 숨겨둔답니다. 그런데 실은 그렇게 숨겨두고 있으면서 가끔 꺼내보고 즐거워 하는것이 보존과학상은 별로 좋지 않습니다. 특히 그림등은 둘둘 말아서 보관을 해야 하는데 한번 폈다 감아두는것 자체가 바로 문화재의 훼손이라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니....문제겠죠?
 

 지난 두 차례에 걸친 금동반가사유상을 통하여 나름대로 미적 기준에 따른 감상을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가지 문화재에 대한 미적 감상기준이 있지만 반가사유상이 주는 미소는 정말로 오묘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반가사유상이 국내에는 지천에 널려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조각도 어찌나 잘 했는지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방금 땅속에서 꺼낸듯 온몸에는 황녹을 입고 나타난 금동반가사유상... 이게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미륵불은 지난번에 말씀드린대로 56억 7천만년후에 중생구제를 위해 나타날 미래불이며 메시아이고, 또 구세주입니다. 56억 7천만년이라는 개념이 머릿속에서 제대로 계산이 되지 않지만 하여간 먼 미래에 중생 구제를 위해 나타난다니 기독교나 불교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구제가 될 모양입니다. 하여간, 이러한 반가사유상은 법상종의 주불로서 주전인 미륵전이나 용화전에 모셔지는 불상으로 중국에서 다양한 크기의 반가사유상이 수입이 되고 있는것입니다.


 좌측의 반가사유상은 어느날 밤에 급작스러운 연락을 받고 혹시나...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확인을 하기 위해 먼길을 달려서 확인을 해야했던 반가사유상입니다.

  밤 10시경 청주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경주의 과수원에서 반가사유상이 출토가 되었는데 6억원에 거래를 하자는 연락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 연락을 받고 속으로는 가짜일꺼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약간은 기대도 되기도 하였습니다. 더구나 다른곳도 아닌 경주의 과수원에서 많은 비가 온 후에 땅밑에서 드러나는 바람에 발견이 되었다는 말은 "정말 또 다른 반가사유상이 아닐까?" 하는 기대감과 호기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서울에서 경주가 바로 이웃도 아닌데 지체할 시간이 없어 밤 11시경에 차를 몰았습니다. 청주 I/C에서 일행을 만나기로 하고 무조건 달리는 제 마음속에는 정말 진짜라면 세상이 떠들썩할것이라는 기대감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청주에서 일행과 합류하여 고속도로를 달려가는 동안 내내 "제발 진품이기만 해라..."라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경주까지는 너무 먼 거리라서 연락을 하여 칠곡휴게소에서 만나기로 하였습니다. 저는 왜관 톨게이트에서 차를 돌려 칠곡 휴게소로 향했습니다. 칠곡 휴게소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3시가 되어서였습니다. 경주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반가사유상을 봉고차의 뒤에 있는 짐칸에서 꺼내는 것이었는데 컴컴한 휴게소의 한 쪽에서 차에서 내려지는 반가사유상을 보며 기대감으로 가슴은 들 떠 있었습니다.

  가져간 손전등으로 요모조모를 살펴보니 이 불상은 가짜였습니다. 적어도 만들어서 3년 정도는 땅속에 뭍어두고 화학비료를 부어 녹을 입힌것이었습니다. 물론, 기대를 하기는 했지만 그 확율은 몇 십만분의 일 정도였습니다. 만약 진품이라면 금액을 정하기도 어렵거니와 최소 600억원대(balmas님의 말씀을 듣고 참고자료를 뒤져보니 가격이 엄청납니다. 그래서 100억원대로 했다가 다시 600억원대로 고쳤습니다) 가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진품이라고 밝혀지게 되는 경우에는 학계는 물론이고 정확한 발굴 위치를 알 수 있어 신라것인지 백제것인지의 논란에 확실한 종지부를 찍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좌측은 얼굴부분입니다. 물론 가짜의 얼굴부분인데 진품과 거의 구분이 힘들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졌습니다.머리에 쓴 삼산관이나 얼굴 표정도 진짜와 거의 다를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불상에는 몇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가사유상은 진품에서 보여주듯 겨우 손가락 하나가 얼굴에 점으로 닿아 있는데 이 불상은 세 개의 손가락이 얼굴에 닿아 있습니다. 지난번에 제가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진품 반가사유상과 같은 자세에서 손가락이 얼굴에 닿으려면 허리를 많이 구부리거나 손가락이 아주 길다거나, 또는 팔의 길이가 길지 않으면 진품 반가사유상과 같은 자세가 나오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진품 반가사유상처럼 한번 해 보시면 얼굴에 손가락 하나(검지)가 점으로 닿으려면 허리를 상당히 구부려야 하는데 실은 불상에서는 그리 많이 구부리고 있지 않습니다. 바로 이 점이 우리의 국보가 가진 아름다움입니다. 이 불상을 제작한 장인은 그 부자연스러운 구부림을 허리를 잘룩하게 함으로써 완벽하게 보상을 하고 있는 것이며 반가사유상은 허리 곡선만으로도 아름다운 선의 미학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국보로 지정된 반가사유상의 축소상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국보인 반가사유상은 한 때 잠시 우리나라를 떠난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한국미술 오천년展>이라는 전시회를 위한 해외 나들이였습니다. 그 때 진품을 정확하게 측정하여 축소상을 몇 개 만들어 관련국의 국가원수나 중요인사에게 선물을 한적이 있었는데 제가 운이 좋아서인지 그 중 하나를 소장하게 되었는데 책꽂이 앞에 놓여있는 30cm가 조금 넘는 반가사유상은 보면 볼수록 그 오묘한 미소가 신비스럽게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진품도 아닌 모조품으로 축소형이지만 원형 그대로를 축소한지라 원형을 보는 느낌과 크기만 다를뿐 똑 같은 느낌이 가슴속에 와 닿는 것이었습니다.  이 얼굴은 진품의 미소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녹을 뒤집어쓰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 국보가 보여주는 알듯 모를듯한 미소가 없습니다.

  저는 이 불상을 팔겠다고 가져온 사람을 추궁했습니다. 우선은 문화재보호법상에 명시되어 있는 문화재의 거래위반과 신고의무 불이행, 그리고 원형의 변경 등은 바로 형사범으로 처벌이 됨을 알려주었습니다. 가짜라는 말은 안하고 발견 동기부터 물어보니 큰 비가 온 뒤에 과수원에 가보니 뭔가 머리부분이 보여 파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런 불상이 나오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과수원은 누구의 것이냐고 물으니 1년전에 구입을 했다는 것입니다. 진짜 그 사람이 1년전에 구입을 했는지는 또는 이 전의 소유주가 뭍어두었던 것이 큰 비에 흙이 쓸려가면서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과수원은 사실 이런 금동불상이나 청동불상을 뭍어두고 녹을 입히기에 딱 좋은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과수의 종류가 어떻하든 매번 비료와 농약을 주니 이 약품이 당연히 밑의 흙으로 스며들게 될것이며 밑에 뭍어 둔 이런 불상은 자연스러운 화학반응에 의하여 녹이 슬게되니 점점 녹이 많이 슬면 파내고는 우연치 않게 발견한 불상이라고 하면 자칫 속아넘어가기 쉬운 것이지요. 제가 가짜임을 밝히고 솔직하게 말하라고 다그치니 정말 이 사람은 1년전에 구입을 했고 큰 비가 온 뒤에 발견하여 발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보니 그 사람의 봉고차에는 어머니와 아내를 비롯한 가족들도 동승을 하였었는데 아마도 우연치 않게 발견하게 되어 한 몫을 잡았다고 생각하여 같이 동행을 하였던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불상이 왜 가짜인지를 설명을 해 주고, 주변의 또 다른 상황도 알려달라고 했더니만 자기네 과수원에서 있었던 일을 대강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우연치 않게 발견이 되니 우선은 깜짝 놀랐고, 혹시 이 과수원 지역이 예전에 신라시대의 절 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래서 금속탐지기를 빌려와서 과수원 지역을 탐지해보니 이런 물체가 7개 정도가 더 있었답니다. 조금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이 있어 캐어보니 그것은 종이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결국 자신이 산 과수원을 황금밭으로 알게 되었는데 그 첫번째로 판매하고자 했던 불상이 가짜라고 판명되니 허탈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먼저 주인이나 그와 관련된 사람이 가짜를 진짜처럼 만들기 위해 뭍어두었던 것인데 큰 비로 인하여 밝혀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러한 가짜 불상을 무수히 많이 보았는데, 특이한것은 명문이 있는 불상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명문에 의하면 불상의 조성연대는 1700년대였습니다. 물론 이 명문도 일부러 양각한것으로 판단되지만 중국인들이 무엇때문에 우리의 국보를 공산품처럼 마구 찍어내는지는 궁금할 따름입니다. 그것도 동일한 크기가 아니라 작은 것에서부터 아주 큰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크기로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나중에 중국을 방문하여 제작 과정을 한 번 정도 살펴 볼 예정입니다만,  이러한 중국산 반가사유상은 미륵종의 본산인 법상종의 사찰에서는 쉽게 볼 수 있으며, 경기도 안성의 쌍미륵사에는 다양한 크기의 반가사유상을 중국에서 들여와 보관하고 있으니 가까운 곳에 계시다면 한 번 정도 들려보시기 바랍니다.

  반가사유상이 가짜임이 밝혀진 후에 오는 피로감은 내려갈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아침에 출근을 해야하는데 결국은 가짜를 보려고 야밤에 잠도 못자고 그 먼길을 다녀 온것인데, 만약 진품이었다면 아마도 피곤이라는 것은 전혀 느끼지 못했을 것이고, 설령 귀찮아서...또는 멀어서...라는 이유로 확인을 하지 않는다면 만에 하나일수도 있는 진품을 놓치게 되기에 제보가 들어오면 기를 쓰고 달려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청주의 제가 아는 지인에게 거래에 관한 정보가 들어갔기에 구매의사를 가졌던 사람은 가짜를 비싼 금액을 들여서 사지 않게 되었는데, 만약 진품으로 속고 샀어도 이런 불상은 쉽게 세상에 들어나지 않기에 산 사람이나 판 사람 모두가 자신들의 거래품이 진품으로 알기 쉽상이지만, 문화재는 우연히 발견을 하더라도 반드시 신고를 해야하며(모든 문화재는 국가가 주인이며 다만 소유자에게 위탁관리를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 소장품은 예외이며 만약 거래가 성사되어 소유주가 바뀌게 되면 반드시 문화재청에 신고토록 되어 있습니다)  종종 신문에 나듯 어부가 바닷속에 그물을 담궜다가 그물에 걸려 올라오는 난파선의 자기류도 모두 신고를 해야 합니다. 정부에서는 신고된 문화재에 대하여는 그 가치에 따라 적정 금액을 보상해 주고 있습니다.

  어디에 어떤류의 문화재가 새로 나왔다...라는 이야기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입니다. 그것이 정말 진품이라면 그 고귀한 진품을 세상에 빛보게 하는 보람을 느끼기에 말입니다. 그러기에 진품일 확율이 무척 낮은 반가사유상 같은 경우에도 먼길을 마다않고 달려가는것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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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7-22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짜가 그렇게 많군요 ...
진품이 100억을 넘는다면, 정말 가짜를 만들어파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겠군요.

수수께끼 2004-07-22 0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녜...금액은 얼마라고 정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해외전시회때의 보험금을 기준으로 개략의 금액을 추정하는데 지금까지는 신라금관과 반가사유상이 가장 비싼 보험에 들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수수께끼 2004-07-22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제가 자료를 찾아보니 금동반가사유상의 보험가는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문화교류전에 출품하기 위하여 5000만 달러의 보험에 들었으니 약 600억원의 가치를 갖는다고 봅니다. 그 다음이 금관총 출토 신라금관으로 400~500억, 또 다른 반가사유상이 300억, 청자상감운학문매병(흔히 말하는 상감청자)나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쉽게 말해 청자주전자)가 250억원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참고로 석굴암은 200억원이며 수원 화성은 크기는 크지만 113억원입니다. 이런 가격은 거래 가격이 아니라 보험가액인데, 만약 상호 교환 전시를 할때는 전시국가가 유물을 대여하여 오는지라 보험금을 지불하게 되는데 우리것에 대한 보험금을 상대 국가에 높게 책정해 달라고 요구하면 반대로 그 국가의 유물이 우리나라에서 전시되기 위하여 오는 경우에도 높은 보험료를 요구하기에 경우에 따라서는 정부가 보증하며 보험금을 낮추는 경우가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청자주전자는 관련자가 손잡이인 고리를 잘못 만지는 바람에 250억원의 손잡이가 떨어져 보수하였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했는지는 개인정보보호 차원에서 공개할수 없으니 양해하시기를~~

조선인 2004-07-22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차피 능력이 안 되니 저같은 사람은 화집으로 만족하며 사는 게 낫겠군요 ^^;;

수수께끼 2004-07-22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간단합니다....국립중앙박물관을 터세요....몇 개만 털어와도 평생(이 아니라 적어도 5대까지는) 팔자 고칠 수 있습니다~~~~^^,

마립간 2004-07-22 0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화재에 대한 수수께기님의 대단한 열의가 느껴집니다. 얼마전 예수님의 석관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가짜로 판명된 해프닝이 생각나네요. (그놈의 돈 때문에)

조선인 2004-07-22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수께끼님만 도와주신다면 털어보겠습니다. 불끈!
개인적으로 가장 가지고 싶은 건 석기시대의 '홍기'랑, 조선시대 백자 1점, 세한도, 용벼루, 꽃잠. 자, 이제 계획을 수립해주시지요. ㅎㅎㅎ

balmas 2004-07-22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수께끼님, 절도(계획)범 신고하면 포상금은 얼마인가요? ㅋㅋㅋㅋㅋ

조선인 2004-07-22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발마스님 미워.
ㅠ.ㅠ

수수께끼 2004-07-23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욕심만 내시고 털 방안에 대해서는 한 말씀도 안하셨는데...계획대로 시행해야 발마스님께 안들키고 성공합니다. 그런데 자(尺)는 어떤것을 말씀하시는지요??

조선인 2004-07-24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머멋, 계획은 당연히 수수께끼님이 내야죠. 제안자가 입안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리고... 수수께끼님. 문장부호를 제대로 보셔야죳!
갈수록 수수께끼님의 말장난 내공이 깊어만 가는군요. ^^
 

 금동반가사유상이 갖는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우선은 반가사유상이 나타나게 된 배경을 알아보는것이 중요하다 할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불교의 메시아"인 미륵보살은 56억 7천만년 후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래불인 셈입니다. 그리고 '사유'란 고뇌하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럼 반가사유상은 과연 어떤 고뇌에 빠져 있는것일까요? 사유상의 출현은 출가하기전의 태자의 신분이었던 '싯다르타'가 인간이 갖는 4가지 고뇌, 즉 生老病死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는 고뇌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4가지 고뇌속에서 번민하던 '싯다르타' 태자는 무엇을 느꼈기에 얼굴에 야릇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도 턱을 괸것도 아니고 손가락 하나가 얼굴과는 닿은듯 만듯 정말로 손가락 전체도 아닌 점으로써 뺨과 닿아있으며, 고개는 약간 숙인채 얼굴에 담고 있는 미소....한마디로 오묘하다고 표현되는 얼굴표현에는 나름대로의 중생 구제의 방법에 대해 수만가지의 말을 뱉어낼것만 같습니다. 즉, 오랜 고뇌의 기간을 거쳐 드디어 중생구제의 방편을 알아냈다는 미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왼 무릎위에는 한 쪽 발을 올려놓고 있는데 엄지 발가락에 잔뜩 힘을 주어 구부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분명 잔뜩 힘을 주고 있읍니다만, 미사려구를 구사하기 좋아하는 학자들은 이 모습이 달리 보이는지 발가락의 구부림이 너무나 자연스럽다고 합니다만, 자연스럽다는 말은 힘을 주지 않았다는 말이지만 그냥 힘을 주지 않고 오른 발을 왼 무릎에 올려놓으면 전혀 지금의 모습은 흉내도 낼 수 없습니다. 결국은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발가락에 잔뜩 힘을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눈은 자세히 보면 입가의 살포시 웃는 모습과 어울리게 지그시 내려깔고 중생을 굽어보듯 하는데 바로 미소와 더불어 이런 눈매가 미륵보살로서의 위엄을 한껏 갖추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반가사유상의 미소에 대해 최순우 선생은  "이 반가사유상의 아름다움은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아름다움을 초월한 것이며.......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한아(閑雅 :막을수 없는 아름다움)의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숨을 내쉬게조차 한다....서양인은 모나리자의 미소를 최고로 여겨 '영원한 미소'라고 예찬하는데 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나란히 놓는다면 모나리자의 미소 정도는 당장 안색을 잃을것임에 틀림없다" 고 하였습니다. 아주 점잖게 반가사유상의 미소를 치켜세웠지만 다른말로 이야기 하자면 모나리자도 반가사유상의 미소를 보면 울고 간다는 말 정도로 해석을 하면 될것입니다. 이 반가상의 머리에는 도교사상에서 나온 삼산관이 얹혀있어 간단하게 "삼관미륵"이라고도 불리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불상의 출처에 대해서 아직까지도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이 있는 것입니다.  처음 이 반가사유상이 세상에 나타나게 된 시기는 1912년 입니다. 당시 이왕가박물관(일본인이 1910년의 한일합방 이후에 대한제국의 황제칭호를 깔아뭉개기 위해 조선 임금의 가계를 <왕가(王家)>로 낮춰 부르게 되었습니다)이 이 반가사유상을 입수할때는 중계인이 '경주 근처의 폐사에서 가져왔다'고 하였기에 신라의 작품으로 알았었으나 한일합방 이전부터 우리 나라의 고적을 조사해온 일본인 학자 이네다(稻田)가 '1910년 충청도에서 올라왔다'고 하는 바람에 신라것이냐 백제것이냐를 놓고 헷갈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미술사>의 저자인 세키노(關野貞)는 "조산 삼국시대의 조각"에서 두 구의 미륵반가사유상을 고신라의 유물로 단정하여 '후치가미 사다스케가 총독부에 기증한 것으로 출처가 확실하지 않으나 경상도에서 발견한듯 하다'고 기록하여 경상도 출토설에 힘을 실어 주었다. 그후 1915년 바로 이네다의 충청도 출토설이 나오게 되는데 이 때는 그체적인 높이(2자9치7푼)가 제시되어 백제계의 반가사유상으로 인정하기에는 나름대로의 신빙성이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금동, 석불, 마애불 등 모두 32구의 반가사유상이 있지만 1945년 이후에 우리의 손으로 발굴된것 이외에는 반가사유상이 고구려의 것인지 또는 신라나 백제의 것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애석하게도 하나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불상이 고가에 거래되었지만 그 출처에 대한 추궁이나 법적 책임이 두려워 대부분은 오랜 동안을 숨겨 두었다가 내다 바는 악덕 골동품상(거의 일본인)들로 인하여 유물이 갖고 있는 족보가 멸실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이네다의 주장대로 이 반가사유상은 충청도 지역에서 올라온 백제계의 반가사유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돌아가신 김원룡, 최순우 두분은 이 불상이 백제의 작품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 있는 두 구의 불상이 어디것이냐 하는것에 대한 명확한 결론이 없고 갑론을박 하는데 엉뚱하게도 일본에서 더 애써 원산지를 찾는 작업을 추진하는 일이 발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일본의 국보 1호로 지정된 목조금동반가사유상 때문입니다. 이 불상은 비록 나무로 만들어졌지만 우리 국보 83호인 '삼관미륵'의 복제품이나 마찬가지로 쏙 빼닮았기 때문입니다. 이 불상은 일본의 고류지(광륭사)에 소장하고 있는데 우리 나라의 불상의 원적이 어디냐에 따라 이 불상의 원적도 덩달아 원적 변경이 불가피하기 때문입니다.그런데 일본에 있는 이 목조반가사유상에 대해서는 "한반도에서 전래된 것이다" 또는 "한반도 사람이 건너가서 만든 것이다", "일본에서 만들었다(대부분의 일본학자 주장)"는 등 여러가지 주장이 있는데 주로 우리 학자들은 위의 두 가지 학설을 추종하고 일본의 학자는 자존심 때문인지 자기네 조상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아래 그림은 목조반가사유상이 있는 고류지에 있는 또 다른 반가사유상입니다.


이 반가사유상은 국보 1호로 지정된 반가사유상보다 후대인 7세기 말엽부터 8세기 중반의 비조시대의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똑 같이 일본 국보로 지정이 되어 있지만 언뜻 보아도 똑같은 목제임에도 국보 1호보다 상당히 조형미가 떨어지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불상은 아마도 국보 1호를 본뜬 불상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조각 기법이나 제작기법이 국보 1호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것을 사진으로도 알 수 있을 정도 입니다. 그러다보니 이 불상은 당연히 한반도에서 전래되었다거나 한반도의 불상을 모방한 불상이라는 말 조차 꺼내지 못하고 일본의 비조시대의 제작품으로 인정을 하고 만것입니다.

 그런데, 국보 83호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이 백제계의 불상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한 학자가 동국대학교의 황수영 박사였습니다. 황수영 박사는 1959년 이 불상의 출처에 대해  원래 이 불상이 경상도 지방에서 출토되었다는 세키노의 발언을 주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불상이 이왕가박물관에 판매시 거래된 금액은 당시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던 2900원이었는데 중간의 악덕 상인들이 자신도 다른 사람으로 부터 구입을 했기에 원산지는 알 수 없는것 처럼 했기에 지금까지도 어디에서 출토가 되었는지 잘 모르게 되었지만, 최초에 이 불상에 대해 언급한 세키노의 말 처럼 "경상도"지방에서 출토되었다면 신라 땅 어디에선가 이 불상이 있던 자리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경상도 신라땅을 수소문하여 이 불상이 정말로 신라의 옛 절터에서 나왔는지를 찾아보기로 한것입니다.

 황수영 박사는 제자인 정영호박사(현 단국대 박물관장)와 더불어 경주지역에서 수소문한 결과 드디어 원래 이 불상이 있었던 절을 찾게 되었습니다. 국보 83호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은 옷칠이 된 위에 회분을 칠하였는데, 대부분의 목불이나 금동불은 칠을 하기전에 옷칠을 하는데 원 소유주는 옷칠 위에 다른 칠을 하지 않고 회분을 칠했던 것을 근거로 하여 수소문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 불상이 세간의 이목을 받게되자 경주 오릉 근처에 있던 불상이었다는 소문이 떠돌게 되었고 이소문을 접한 두 사람은 1964년 경주 남산의 산방谷에 있는 산방사라는 절의 할머니가 당시 4원(또는40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판매를 하였다는 사실과 원래 미륵반가사유상이 있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수차례 방문하여 노보살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하여 분명 신라의 불상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아직도 이 불상의 족보에 대한 논란이 계속될까요? 한동안은 <미술사학>에 이 문제에 관한 연구 논문이 게제되고 맞느니 틀리느니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원래 그 장소에 있는것을 본적도 없을뿐만 아니라 단지 노보살(이 노보살은 그후 사망하였음)의 증언에 의존한다는 것은 학문적으로 타당성을 입증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입장이었고,  불상의 양식이나 형식의 정확한 연구가 진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라계다 백제계다를 말한다는것 자체가 무리였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신라계라는 확신을 가진 황수영 박사, 정영호 박사측은 신라의 불상으로 보고 있으며, 김원룡박사, 최순우 선생 등의 계열은 백제계의 불상으로 보는 것이며 두 학설간에 뚜렷한 물증이 없기 때문에 위대한 모나리자의 미소가 울고가게 할만한 이 위대한 공예품은 그저 <삼국시대>의 작품으로 전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출처가 애매모호한 반가사유상에 대한 연구는 지지부진하고 이에 대한 연구 논문이나 발표논문은 찾기가 힘든 지경이 되어버리고 만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몇년 사이에 이 불상은 우리 나라에는 부지기수로 많아져서 미처 제대로된 연구가 나오기도 전에 온통 사찰에 범람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용화사상을 주로 하여 미륵불을 주존으로 모시는  법성종계열에서 중국으로부터 대량으로 미륵반가사유상을 수입을 해 왔기 때문인데, 우리의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는 매우 흡사하지만 전문가의 눈이 아니라면 쉽게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의 정교한 불상이 중국에서 대량으로 만들어져 우리 나라에 유입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땅 속에 묻어두고 거름을 주거나 화학 성분을 부어 1~2년을 묻었다가 마치도 오래된 금동불에 녹이 슬은 모습으로 수입이 되고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중국인들은 이런 모조품을 만들어 우리 나라에 수출할 생각을 다 하게 되었는지 기가막힐 따름이지만 이런 문제는 제가 직접 중국을 방문하여 확인을 해볼 요량이며, 그 불상이 단순하게 비슷하게 만든것이 아니라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졌음은 궁금한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다음에는 이런 불상에 대한 에피소드를 겻들인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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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07-08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수께끼님도 요새 바쁘신가봐요.
저도 요새 정신이 없어 어쩌다 댓글다는 정도밖에 서재를 드나들지 못하는 처지입니다.
하지만... 예고에 비해...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셨다구욧!
하여간 문외한인 저는 백제든 신라든 모나리자가 울고 갈 미소라는 것에 한표 던집니다요.
(실은 그 미소 때문에... 전 백제설을 믿는 경향이 있지요. ㅎㅎㅎ)

balmas 2004-07-08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하고 퍼 갑니다~~~ 감사^^

2009-01-14 15: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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