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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편에 이어 (2)편에서는 의문점을 제시하고 왜 그러한 것이 의문점으로 대두되는가를 하나하나 설명토록 하겠습니다.

  신륵사 다층석탑을 살펴보면 그 시대에 나타난 탑의 조성양식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선 탑을 구성하고 있는 석재가 일반적인 탑의 석재와는 달리 대리석을 이용하였다는 것이며 특히 일반형 석탑에서는 볼 수 없는 용과 구름, 파도 문양을 조각하였는데 왜 다른 탑과는 다를까? 라는 의문을 갖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이러한 의문 몇 가지를 정리하여 보면

 1. 석탑을 구성하는 석재는 왜 다른 탑과 달리 대리석을 이용하였을까?

 2. 탑의 몸돌은 1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매 층마다 받침이 모각(돌에 새겨진 형태)되어 있으나 유독 초층 탑신을 받치고 있는 상층 갑석에는 탑의 몸돌을 받치는 받침이 없을까?

 3. 탑의 기단석에는 용의 문양이 있는데 발톱이 다섯개로 이는 당시의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중국의 황제만이 다섯개의 발톱을 가진 용을 사용할 수 있는데 어떻게 발톱이 다섯개인 용을 문양으로 사용할 수 있었을까?

 4. 임진왜란을 겪으며 사찰이 전소되었을 때 이 석탑도 그 피해를 보았는데 탑신석은 불길이 닿은 흔적을 보이나 유독 용문양이 새겨진 기단석에서는 불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까?

 5. 기단의 귀퉁이에는 죽절형(竹節形)의 우주(隅柱)가 조각되어 있음에도 탑신에는 단순하고 간략하게 날카로운 칼로 판 것 같이  선으로 우주의 형태만을 나타내고 있을까?

 이상과 같은 다섯 가지의 의문점을 가지고 신륵사 다층석탑을 고찰해 보기로 했습니다.

 첫째는 왜? 대리석을 이용하여 탑을 조성하였을까? 라는 의문입니다. 신륵사 경내에는 또 다른 탑이 하나 더 있습니다. 보물 제 226호로 지정되어 있는 다층 전탑이 바로 그 탑입니다. 전탑은 주로 안동지방과 칠곡의 송림사 5층 전탑, 제천의 장락동에 있는 전탑과 같이 경상북도와 충청도 일부 지방에 건립되었었는데 경기도 땅인 여주에 조성된 이유는 분명하지 않으나 남한강의 지류를 타고 전래된 것이 아닐까 판단됩니다.  신륵사가 위치한 지형은 鳳尾山입니다. 뜻풀이를 하자면 봉황의 꼬리처럼 형성된 산입니다.그리고 이 산에는 바위라고 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뿐만아니라 신륵사 주변에서는 양질의 화강암을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로 석재를 구하기가 어려워 돌을 벽돌처럼 다듬은 전탑을 조성하게 된것이 아닐까 합니다. 특히 전탑의 기단부를 형성하고 있는 화강암은 그 입자가 굵고 풍화가 상당히 진행된 것으로 보아서는 신륵사 인근에서 양질의 화강암을 구하여 탑을 만드는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보여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리석이라는 석재를 그 재료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대리석은 우리나라 황해도 해주 인근에서 양질의 대리석이 생산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산량이 적은것은 물론이고 대리석의 크기 또한 대형이 아니어서 대리석을 이용하여 큰 탑을 조성하기는 불가능 하였고, 이에 따라 탑은 크기가 크지 않는 3m 내외로 조성할 수 밖에 없었다고 판단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의문은 매 탑신이 옥개석을 포함하여 하나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탑신 받침석이 모각되어 있으나 유독 상층 기단의 갑석 위에는초층 탑신을 받치는 받침석이 없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신륵사가 중창된 시기는 기록에 의하면 1467년입니다. 중창 당시 이 절은 세종 영릉의 資福寺로 중창된 절입니다.  만일 당시 왕실의 명령에 의하여 조성된 사찰의 탑이라면 과연 이렇게 부분이 결구된 형식의 탑으로 조성이 될 수 있었을까? 라는 의문입니다.  탑은 일반적인 조형물과는 달리 부처님을 대신하는 경배의 대상으로서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탑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많은 功力을 필요로함은 물론이고, 탑을 조성함에 있어서도 온 정성을 다함은 당연하다 할것인즉 탑의 기단석위에 있는 1층 몸돌 받침석을 빼먹고 조성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세번째의 의문은 문양에 관한 의문입니다. 조선은 明과 淸이라는 거대한 중국의 두 황제국으로부터 자유스럽지 못했었습니다. 매년 조공을 바쳐야하는 형제의 나라로서 중국 황실의 눈치를 봐야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용의 발톱이 5~7개인 것은 바로 명나라와 청나라의 두 황제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신륵사가 당시 아무리 임금의 원찰이었다 해도 황제를 상징하는 5개의 발톱을 가진 용을 문양으로 넣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발톱 5개를 가진 용의 문양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고종대를 전후해서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라 칭한 이후에나 도자기 등에 발톱이 5개인 용의 문양을 그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륵사 다층석탑에는  제가 (1)편에 올린 사진에서 보는것 처럼 용의 문양은 비교적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용의 문양에서 발톱이 5개로 표현된 경우는 드문 예로 이에 관해서는 보다 심도 깊은 조사와 연구를 통하여 밝혀내야 할 것입니다.

  네 번째 의문은 탑신석에서는 화재에 의한 그을음의 흔적을 볼 수 있으나 유독 아랫쪽인 기단석에서는 왜 그 흔적을 찾기 힘든 것일까? 하는 의문입니다. 임진왜란 당시에 신륵사는 완전히 잿더미로 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석재로 만들어진 탑은 그 와중에서도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석재라서 다른 목조건물 처럼 화재에 견딜 수 있었지만 화재의 피해를 입었으며 사찰을 복구할 때 이 탑도 손질을 했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 어떠한 방법으로든 탑을 닦아 내었을것인데 유독 용문양이 조각된 기단석 부분만 닦았을까요?  물론, 그럴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부처님을 대신하여 경배의 대상으로 삼는 불탑을 관리함에 있어 어느 한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닦고 다른 부분은 방치한다는 것은 불가의 속성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화재로 인한 석재의 그을음은 아무리 닦는다고 해도 열에 의한 피해로 석재의 재질이 변함으로 인하여 화재의 잔재를 완전히 없앤다는 것은 현대의 신기술로도 불가능한 일임을 비추어 볼 때, 화재 당시에 이 탑의 기단부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전혀 피해가 없었거나 또는 화재후 다른 대리석재로 바꾸었다는 등의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 섯번째의 의문은  기단석의 모퉁이 기둥 문양과 탑신석의 모퉁이 기둥의 문양이 너무 극단의 표현을 사용하였다는 점입니다. 아래 사진은 기단석의 모퉁이 기둥의 문양인데 영락형(목걸이형)의 장식으로 조성되어 있음에 비해 탑의 몸돌 모퉁이 기둥은 아무런 조각도 없이 단순하게 얕은 선으로 모각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단과 탑의 몸돌이 완전히 다른 형태를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단석에는 매우 섬세하고 공을 들여 용의 문양과 더불어 귀기둥에도 세심한 조각을 했음에 비해 탑의 몸돌에는 겨우 흔적만 알 수 있도록 모각을 한것에는 분명히 어떤 사연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는 단지 조각의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하였다는 이유로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다른 여타의 탑도 신륵사 탑과 같은 형태를 보이는 것은 없습니다.

  조선시대의 탑은 선대의 탑을 모방하여 제작된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신륵사 탑에서는 일반적인 조선시대의 석탑의 양식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탑을 조성하고 있는 석재는 대리석으로 일반 화강암과 같이 입자가 굵지 않아 조각하기에는 비교적 수월한 편임에도 일부에는 세심하게 공을 들이고 또 다른 부분은 간략하게 표현하였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제작 공정이라 궁금증을 갖게 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신륵사 다층석탑은 몇 가지의 의문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문점은 문헌기록이 있다면 자세히 풀어갈 수 있겠으나 현재로서는 이 의문점을 풀수 있는 단서가 없어 아쉬움을 남김니다. 조선시대의 이형석탑의 하나로, 대리석으로 조성된 이 탑은 그 제작 시기부터 재고할 필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현재는 초기의 조사 결과에 따라 중창 당시에 제작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견이 정설로 되어 있습니다만, 나옹선사가 입적한 절로서 고려시대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으며, 탑도 마찬가지로 대부분 절의 조성과 동시에 조성됨을 비추어 본다면 조선시대 이전의 이 절의 탄생과 관련지어 볼 필요가 있다 할것입니다.

 <에필로그>

  제 스승께서는 제가 제기한 다 섯 가지의 의문에 대하여 일단의 제자를 대동하고 신륵사 탑의 간략한 재조사에 임하셨었습니다.  주로 5가지의 의문 사항을 확인하는 조사였는데 대부분 제가 제시한 의문점에 동조를 하셨습니다. 한편으로는 30여년전 다리가 없어 강나루에서 신륵사로 건너가서 조사를 하였으며 당시 그런 깊이 있는 조사를 하지 못했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한가지 아쉬운점은 제가 제기한 5가지의 의문점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시면서도 편년(제작년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노 학자의 조사결과를 번복한다는 것은 힘든 결정이었기에 그러셨던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신륵사탑의 기단석은 처음부터 같은 탑의 부속 석재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외부(혹은 외국)에서 임진왜란 이후에 유입된 것으로 판단되고 있습니다. 문양으로 보아서는 임진왜란 이후에 중국에서 도입했을 가능성이 많아 보이는데 그 이유는 임진왜란 당시 신륵사에 발생한 화재로 인하여 기단부가 심각한 손상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며, 따라서 왕실의 원찰로서 기단부를 새롭게 조성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제 개인적인 생각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이 탑의 정확한 편년을 위해서는 중국으로부터 유입되엇을 것으로 판단되는 기단석으로 사용되었던 대리석과 원래의 탑의 석재였던 몸돌 대리석에 대한 재질 분석을 통하여 원산지를 확인하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할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조급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탑의 건립연대를 밝히기 위한 작업으로 지속적인 연구속에 추진되어야 할 것입니다.

                                                                               <如         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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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06-12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정말 다섯개의 발톱이 뚜렷하네요.
음...

두심이 2004-06-17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하네요..왜 그런지. 언젠가 또다른 문헌들이 세상의 빛을 보게되면 알수 있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4번째 의문이 제일 궁금합니다. 계속적인 연구 부탁드립니다.
잘 읽었습니다.
 

  여주의 남한강을 끼고 신륵사라는 고찰이 있습니다.  이 절을 처음 건립한 시기는 신라의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것을 뒷받침 할만한 유물이나 유적은 물론이고 문헌자료도 없습니다. 그러나 고려 우왕(禑王)2년인 1376년에 나옹(懶翁)선사가 이 절에서 입적하면서 절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조선조에 이르러서는 경기도 광주의 대모산(지금 남한산성의 송파쪽)에 있던 世宗의 묘를 여주로 이장하면서 왕실에서는 신륵사를 원찰(願刹)로 삼고 절 이름도 報恩寺로 바꾸고, 전각이나 건물을 새로 꾸몄습니다. 현재 신륵사 경내에는 고려말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조성된 많은 유물이 있으며 특히 이곳에서 입적한 보제존자(普濟尊者) 나옹선사의 부도를 비롯한 유물과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다층석탑이 있으며, 강변에는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세운 전탑등 다수의 유물이 남아 있습니다.  신륵사의 유물중 다층석탑의 건립연대에 대한 의문점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말씀을 드렸지만 학문에서 형성되는 학파라는 개념은 한 스승 밑에서 배우는 입장에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 탑은 30여년전에 필자의 스승이 조사를 하여 그 조사 결과가 오늘날까지 정설로 받아들여져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탑을 조사하면서 제 스승과는 다른 견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탑의 조성연대를 조선시대로 보고 있지만 저는 건립 시기가 조선시대 이전의 고려말, 또는 그 이전으로 보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건립된 탑은 우리 나라에 있는 1300여기의 탑중 20여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와는 달리조선은 억불정책으로 탑이 많이 조성되지 않은것이 이와 관련이 있거나 또는 기왕에 절간이 세워지면서 탑이 세워져 있었기에 새로운 탑의 건립을 염두에 두지 않아서 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륵사 석탑은 일반적으로 조선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제가 보는 조형수법과 탑을 구성하고 있는 재료, 그리고 탑에 장식된 문양에 나타나는 조각 형식등에 대한 의문점으로 이 탑에 대한 재 조사를 했던 것입니다.  스승의 조사 결과를 제자가 번복하는 일은 학파에 몸 담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대단한 모험을 하는 일이지만 몇 가지 이 탑이 갖는 의문점을 기준으로 그 의문에 대한 하나 하나의 조사로 이 탑에 접근을 하기 시작 했습니다.

    신륵사 다층석탑은 대리석으로 만든 탑으로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먼저 탑의 아랫부분인 기단부는 2층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여러 층의 탑신(탑 몸통돌)을 얹은 사각형의 석탑인데 세부 조형을 살펴보면 신라나 고려의 조형수법과는 다른 새로운 양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기단석에 비룡(飛龍)을 조각하는 경우는 매운 드문 경우로 이것은 신륵사의 창건과 관련된 설화의 내용을 담았는지 모르겠지만 조각 수법이 무척 세련되고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어 자칫 무겁게만 보일 수도 있는 탑의 무게를 조각이 덜어주고 있습니다.

 이 탑의 재료는 대리석인데 이 석재는 당시에는 구하기도 힘든 석재인데 왜 대리석으로 조성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며, 과연 이 탑이 보여주고 있는 양식으로 판단할 때 이미 알려진 대로 조선시대의 탑인지..아니라면 언제 조성된 탑인지를 정확하게 알아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 탑은 3m에 불과한 비교적 작은 석탑이지만 기단부 부터 탑의 몸돌인 탑신부에 이르기 까지 각 층의 돌은 모두 1개의 돌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작은 석탑의 각 부재를 1개의 돌로 만들게 된것은 대리석이라는 재료를 구하기가 어려워서 탑을 크게 만들 수 없는데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 탑은 일반적인 석탑의 전형을 그대로 따랐지만 각 부재에 있어서는 그 세부 감각을 전혀 달리하고 있는데 이 또한 재료가 대리석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단부는 지대석 윗면에 단엽으로 복련문양을 조각하고 그 위에 2층으로 된 기단으로 구성되었는데 아랫층 기단 갑석의 윗면과 윗층 기단 갑석 아랫면에도 연화문(蓮花紋)을 장식하였습니다.  위의 사진에 나타난 용의 문양이나 우측 사진인 기단에 나타난 문양의 조각은 매우 섬세하며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습니다.  .                                                          <신륵사 다층석탑의 상하층 기단>

탑의 몸돌인 탑신부는 현재는 8층 탑신부 까지 남아 있지만, 몇 군데 옥개석의 체감율이 맞지 않아 원래의 정확한 탑이 몇 층이었는지를 추정하기는 쉽지가 않으며 탑의 맨 윗부분인 상륜부는 현재는 철제로 된 찰주(刹柱)만 남아 있고 다른 부재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와같이 모든 점을 살펴보면 신륵사 다층석탑은 지대석 윗면에 연꽃문양을 조각하여 화사한 지대를 이루고 있는데,  기단부에 연화문을 장식한 예는 많지만 이 탑 처럼 지대석에 연화문을 장식한 경우는 흔한 일이 아닙니다.  기단부에 있어서는 면석의 각 우주(귀퉁이 돌)에 화문(花紋)을 모각한 것이라든가, 기단 상층 깁석을 기단 하층 갑석의 하반부형(下半部形)으로 만들어서 조금이라도 무거운 느낌을 줄이고자 하는 점은 이 탑에서 주목할만한 형식이라고 하겠습니다.

   특히 지대석에 용과 구름, 파도 문양을 조각한 수법은 주로 스님의 무덤인 부도(浮屠)에 조각되는 수법인데 특이하게도 이 탑에서는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에는 없던 문양의 특성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 (2)편에서는 이 탑이 갖는 5가지의 의문점을 제시하고, 그 의문점을 하나 하나 풀어가도록   

         하겠습니다.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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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6-11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비로그인 2004-06-11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족한 글이라 송구스러운데 balmas님께서 가져가시기 까지 하신다니 더 없는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퍼가시는 님들을 위해서라도 자세하게...그리고 정성껏 글을 써야 되겠습니다.

두심이 2004-06-11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기대됩니다. 제가 이렇게 좋은 자료들을 거져 읽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메시지 2004-06-11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저는 신륵사를 세종대왕을 떠올리는 매개로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문화재를 보는 시각을 좀더 깊게 갖고싶은데 쉬운 일이 아니네요. 님의 글이 도움이 됩니다.

비로그인 2004-06-11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심님...당연히 많이 읽어주신다면 더 없이 고맙겠습니다. 자주 들러서 보고 가시고 가끔은 흔적을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메시지님...자꾸 보며 하나씩 이해하려고 하신다면 어렵게만 느껴지던 우리 문화재도 아주 가까이 있었다는 것을 느끼시게 될것입니다. 고개만 끄덕이는것 보다는 찾아 볼 기회가 되신다면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신다면 그 순간부터는 전문가가 되시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 문화재를 대하면서 의문이 가는점이 많은 경우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학설을 따르기에는 무언가 조금 석연치 않는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문화재와 관련된 학설은 실증사료와 문헌사료가 일치 될 경우에는 그대로 누구나가 인정을 하는 편입니다만, 그렇지 않는 경우에는 학파(학파라고 해야 특별한 것이 아니고 출신 학교에 따라 약간의 특색이 나타나는데 이런 경향은 주로 스승의 주장을 대체로 수용하기 때문입니다)에 따라 다소 다른 의견을 내기도 합니다. "알쏭달쏭 문화재 이야기"에서는 기존의 정설로 알려진 학설에 대한 의문으로 출발하는 조금은 엉뚱한 접근 방법으로 접하는 문화재에 관한 이론(異論)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 첫번째가 '정림사 5층탑이 먼저냐? 미륵사지 탑이 먼저냐?' 입니다.  정림사지 5층탑은 국보 제 9호로 부여의 정림사지에 있는 탑으로 일반적으로 목탑에서 석탑으로 재료가 변한 첫 번째의 탑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미륵사지 석탑은 익산에 있는 탑으로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하는 과도기적 탑으로 알려져 있는 탑입니다. 이 두 탑을 두고 학자들의 의견은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돌을 나무처럼 다듬어서 만든 탑이 미륵사지 석탑이며, 정림사지 석탑은 이런 과정을 거쳐 확실하게 돌로 만들어진 탑이라는데 대체로 동의를 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저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의 건립년대는 사비성으로 백제가 천도를 하면서 왕사(王寺)에 지은 석탑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시기적으로 7세기 초반에 해당이 됩니다. 그러나 미륵사지 석탑은 무왕이 건립하였는데 무왕은 서동왕자의 전설을 낳은 왕이며 그의 아내인 선화공주와 이곳을 지나다가 나타난 미륵사존을 보고 공주가 절을 세울것을 간청하여 절을 세우고 조성한 탑으로써 시기적으로는 백제가 멸망하기 직전인 7세기 중반에 건립 되었습니다.  우선 건립 시기를 놓고 봐도 정림사지 5층 석탑은 미륵사지 석탑보다 조금 앞서는 시기 입니다.  또 정림사지 오층탑은 나당 연합군에 의하여 백제가 정벌당하기 전에 이미 존재했던 탑으로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이 탑에 백제를 평했다는 글(大唐平濟國碑銘)을 새겼기에 한동안은 이 탑이 백제를 멸망시킨 소정방이 세운 탑으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이미 건립된 탑에 명문만 새긴 것입니다.

  이 탑이 목탑에서 석탑으로의 번안한 첫 번째 탑이라는 주장은 우리 나라 미술사학의 태두라고 일컬어지는 又玄 高裕燮 선생의 연구에 의해서 입니다.  8.3m의 거대한 이 5층탑은 백제탑의 기본이 되는 탑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미륵사지 석탑은 국보 제 11호로 남아있는 층수는 6층인데 그 높이만 14.25m나 되는 우리 나라 최고의 탑입니다. 미륵사탑을 정림사지 석탑보다 앞 선 탑으로 보는 견해는 석재의 형태로 구분을 해서입니다. 미륵사지 석탑은 석재를 나무와 같은 판석으로 만들어 탑을 조성하였고, 정림사지 석탑은 완전한 석탑의 형태로 조성을 하였기에 당연히 양식적으로는 목탑---->나무판 처럼 다듬은 석재로 만든 석탑--->완전한 석재로 만든 석탑의 순서이기에 미륵사지 석탑이 앞선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비 천도와 동시에 만들어진 정림사지 석탑이 그 후에 만들어진 미륵사지 석탑보다 후대의 양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모순이 되는 셈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 부분에 의심을 가지면서도 뚜렷한 해답을 내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있어서는 제가 보기에는 양식적인 측면을 무시하여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분명, 정림사지 5층 석탑이 앞선 시기에 건립이 되었으면서도 양식적인 면에서 후대의 양식이라고 나중에 건립된 탑으로 보는것은 마땅치 않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는 견해는 두 탑은 그 용도에 따라 달리 만들어진것이지 결코 양식에 의해 건립시기를 따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은 단지 탑내에 사리만을 안치한 탑이라는 것이며, 미륵지사지 석탑은 분명 탑에 사람이 들어가거나 올라갈 수 있도록 조성되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미륵사지 석탑은 가운데 기둥으로 삼는 심주(芯柱)가 있으며 그 주변에는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이는 법주사의 팔상전 처럼 가운데 부처를 모신다거나 또는 상층으로 오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던 것입니다. 건립 시기가 앞서는 정림사 5층석탑은 분명 후대 양식인것이 분명함에도 먼저 만들어 졌고, 나무판처럼 석재를 다듬어 만든 미륵사지 석탑은 양식으로 보아서는 분명 정림사지5층 석탑보다 앞서는 양식임에도 건립 시기는 정림사지 5층석탑보다 나중에 만든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에 단지 양식만을 가지고 따질 수는 없다고 봅니다. 지금 미륵사터에는 기존에 서 있던 서탑의 반대편에 서탑을 모방한 동탑이 나무를 다듬은 것 처럼 석재를 다듬어서 최근에 건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세월이 흘러 1천년이 지난 후, 단지 양식적으로 앞선다고 해서 새로 지은 석탑이 통일신라의 석가탑보다 앞선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양식만을 따진다면 새로지은 동탑이 지금보다 1400여년전에 만들어진 탑으로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처음 정림사5층 석탑을 연구한 우현 선생의 연구결과에 너무 심취하여 자칫 건립 목적을 망각하여 양식에만 치우친 판단으로 시기적으로 앞 선 탑을 발전 양식이 아니라고 하여 후대의 탑이라고 하는것은 마땅치 않다고 보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이론은 정확한 문헌적 근거가 없는 정림사지의 건립연대에 의문을 가질수도 있지만 정림사지 5층석탑이 사비 천도와 동시에 건립되었다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를 하는 편이기에 두 탑의 건립 시기에 대해 왈가왈부 하지는 않지만 양식적으로만 학계에서는 정림사지 5층 석탑이 후대의 양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 더 많이 이루어져 정확한 건립 순서를 밝혀야 하겠지만, 선학이 연구한 결과를 생각없이 받아들여 현재까지도 그 이론에 대해 다소 의문이 있으면서도 제대로 된 이론을 펴지 못하는것은 아까 말씀드린 학파의 이해 관계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은 다소 엉뚱한것 같지만 용도에 따른 건립이라는 문제도 좀 더 깊이 있게 받아들여 연구를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외에도 익산의 왕궁리에 있는 5층탑은 고려시대에 백제탑을 모방하여 만든 탑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이 역시 일부에서는 백제탑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서로간의 이해 관계를 떠나 정확하게 학문적으로 판단을 해 볼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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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06-07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죄송한 마음에 선물 드립니다.



비로그인 2004-06-07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닙니다. 수수께끼가 빠지면 어때요? 정말...누구라도 이곳을 찾는 알라디너의 별명으로 그런 멋진 소설은 쓰지 못할것입니다. 사실...눈이 빠져라 "수수께끼"라는 4 글자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아 조금은 서운하고, 역시 알라딘의 찬밥(?)이구나...라며 자조하고 있었는데, *^^* 수수께끼는 끝까지 수수께끼여야 더 재미있고 좋은것 같더군요. 그리고 절대 섭섭한 마음은 없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마 자주 찾는 서재가 아니라면 당연히 존재도 쉽게 떠 오르지 않게 되는데 그런 경우에 해당이 된다고 봅니다. 저도 이곳의 수많은 서재를 다 돌아다니지는 못하거든요. 겨우 100여개만 알방구리 드나들듯 돌아다닐 따름이랍니다. 님의 멋진 "알라딘 이야기"....정말 많은 노력을 하신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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