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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는 조각에 신라인은 어떻게 미를 접목시켰나에 대해 말씀드렸고, 오늘은 신라 회화에 나타난 미의식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신라의 회화를 이해하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선은 현존하는 신라의 회화가 거의 전무하다는데 그 이유가 있답니다. 사실, 신라는 국가에서 채전(彩典)이라 하여 국가에서 관장하던 일종의 화원 양성소도 설치하였었고, 덕만공주(德曼公主)의 예에서 나타나듯 당시에 당나라와 빈번한 왕래를 통한 회화의 교류가 있었음을 판단하면 회화에 대한 신라인의 열의는 고구려나 백제 못지않게 활발하였을 것으로 여겨지며, 회화의 발전된 모습 또한 대단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남아 있는 신라의 회화라고 할 수 있는것은 경주의 천마총(天馬塚)과 98호 고분에서 출토된 공예품들 뿐입니다. 여기 말이 나왔으니 하고 싶은 말입니다만, 우리가 천마도라고 하는것은 지금은 천마라기 보다는 기린이라는 동물이 아닐까 하는 점이랍니다. 왜냐하면 천마와는 달리 기린은 서기(상서로운 기운)을 내 뿜는 상상의 동물인데 천마도는 일반적인 말이라고 보기 보다는 기린이라고 보는것이 합당한것 같습니다. 이런 천마도나 기마, 인물도, 서오도(瑞烏圖), 우마도 등 출토품의 수준은 고구려나 백제의 회화와 비교하면 상당히 그 수준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분에서 출토된 미술품을 단순하게 일반 미술품과 비교할 수 없다는 비교 방식의 차이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고분 출토품들은 고구려 고분 벽화와 같은 회화라기 보다는 공예품에 그려진 공예화로서 신라 회화의 본 모습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천마도를 살펴보면 고구려 벽화의 말 그림 처럼 강렬함이나 위풍당당한 기세가 없으며, 백제의 산수문전(山水文塼)처럼 부드러운 느낌을 받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천마도에서는 무엇인가 할말을 다 하지 않고 할 말을 담고 있는듯한 그림으로 우리는 고요와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는 한편, 의도적으로 통제되고 절제된 느낌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느낌은 반가사유상에서 느끼듯 "내재된 세계의 함축미"라고 논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신라인의 회화 작품으로 신라인의 미의식을 담고 있는 회화로는 유일하게 국보 제 196호로 지정된 "대방광불화엄경변상도(大方光佛華嚴經變相圖)"가 있는데 감지에 金銀泥로 그려졌으며 여기에서 나타나듯 화려하고 풍요로운 화풍은 신라 회화의 주류를 이루었을 것으로 판단할 수 있으며 특히 인체 표현에 나타난 부드러운 곡선과 후덕한 얼굴, 몸매의 유연한 자태, 호화로운 분위기 등은 신라 예술이 불교와 더불어 극도로 세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이 "대방광불화엄경변상도(大方光佛華嚴經變相圖)"는 현재 호암미술관에 소장중인데 변상도의 가운데 부분은 모두 녹아 없어지고 양쪽 갓쪽만 남아 있으나 이 부분에 나타나있는 회화만으로도 신라인의 회화적 솜씨가 상당하다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2회에 걸쳐 신라의 조각과 회화에 나타나는 신라인의 미의식을 살펴보았는데, 신라는 통일전인 삼국시대부터 당나라와 활발한 교역을 통하여 당나라의 문화를 수용하였으며, 특히 통일 이후에는 철저한 불교 신앙을 바탕으로 정치적인 안정 속에서 더욱 포근하고 풍요롭게 아름다운 미의식으로 활발한 문화활동을 했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신라 말기에 이르러서는 정치적 불안 속에서 조성된 작품들이 상당히 흔들리고 있음을 볼 때 신라인의 미의식 또한 정치적 불안과 더불어 많이 흔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라의 예술은 불교라는 교리를 바탕으로 불법을 이루려는 의지 아래 하나의 완성된 미의식으로 표현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라인의 예술적 감각은 단기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동안에 걸쳐 불교를 대상으로 신앙심의 절정에 이르면서 예술품 또한 절정의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신라의 예술은 불교의 정신적 바탕위에 이룩된 하나의 결정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불교를 받아 들여 정신적 지주로 삼으며 인간이 이루지 못하는 세상을 부처가 이루고, 인간의 고통과 속박에서 벗어난 부처로서의 승화된 형상을 담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 예술의 꾸준한 발전을 가져 왔으며, 그 발전의 결정체로 신라 예술은 절정의 꽃을 피우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신라인의 미의식은 불교와 더불어 그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며 지극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다양하고 풍부한 표현방법으로 정착하며 보다 세련된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라인의 미의식을 알아 볼 수 있는 작품의 수가 많지는 않지만 한정된 미술품이라도 충분한 연구를 통하여 조금 더 考察해야 하겠으며 앞으로는 상대적으로 고구려, 백제인의 미의식과 비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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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05-29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해박함에 날로 경탄을 금치 못합니다.
다만 천마가 아니라 '기린'이 아닐까 하는 학설에 대해서 전 의구심을 품고 있습니다.
이재중씨의 주장이 근거가 없는 건 아니지만,
예로부터 부장품에 저승세계에 가는 길잡이로서 '천마'가 즐겨 그려졌고,
더군다나 그려진 위치가 말장식이었음을 감안할 때
전 오히려 기존의 '천마설'이 상식적인 수준에서 받아들여집니다.

비로그인 2004-05-29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린설은 이재중씨 뿐만 아니라 장충식 교수등 일부 학자들도 조심스럽게 꺼내고 있습니다. 비록 마구에 사용된 그림이지만, 중국의 마구에서 우리 천마와 동일한 그림이 발견이 되었으며, 이것을 말이 아닌 기린으로 명문화 되었다는데서 이재중씨도 이론을 제기했던 것인데, 원래 상상의 동물의 시원은 우리 나라가 아니기에 그 시원을 따져 쫒는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으로 다수의 학자들이 기린설에 동조를 하는 입장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천마총은 그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정확히 모르는 무덤이나 무덤의 규모로 보았을 때 상당한 지위의 인물로 판단할 수 있으며, 따라서 사후 세계를 동경하는 입장에서의 염원으로 기린이라는 상상의 동물을 그렸다고 볼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에 대한 연구는 향후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중국과도 공동 연구가 추진된다면 밝혀질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중국에서 기린이 상상의 동물이 아닐것이라는 추측이 나오는데, 그 이유는 기린의 뼈로 추측되는 짐승의 머리 뼈가 발견 되었기 때문이랍니다. 조선인님의 반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조선인 2004-05-31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다 자세한 말씀에 대해 제가 더 감사드립니다.
 

 신라인의 미의식을 논하기 위해서는 우선 삼국시대의 신라 미술품과 통일 신라시대의 미술품을 접할 수 있어야 하나, 우리가 접하기에는 그 수가 너무 적다고 보겠습니다. 그러나 현존하는 신라인의 미술품으로도 당시 성행했던 신라인의 문화를 엿볼 수 있음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삼국 중 가장 늦게 불교를 받아들인 신라의 문화는 정치적 안정을 이루는 통일신라 이후에는 더욱 융성한 불교를 바탕으로 고구려, 백제의 문화를 융합하면서 발전을 해 왔으며, 특히 당나라 문화의 유입을 통하여 독창적인 신라인만의 문화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신라사람들에게 있어 의식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던 불교를 바탕으로 불교 문화는 여러 가지 교리적 해석과 더불어 다양하고 풍부한 표현방법과 더불어 세련된 기술에 의한 양식으로 발전하여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불상을 중심으로 한 조각 작품들은 아름다움에 관심을 두면서도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세련미를 갖추게 되었는데, 이런 발전을 통해 이루어진 신라의 예술에 담긴 신라인의 미의식을 간단하게나마 조각과 회화를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예술의 발전에 있어서 그 내용의 완전한 이해와 새로운 의식의 변화가 있어야 표현이나 기술적 발전에 의한 숙달된 기법이 발전을 하게 되는데, 신라는 불교라는 정신적 바탕위에 새로운 형태로서의 문화의 발전을 가져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불교를 국교로 숭배하며 일반 국민은 물론이고 지도층의 의식에 불교가 커다란 작용을 하였기에 일체가 되어 이룰 수 있었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가 하나의 숭배적인 종교로 정신적 지주의 형태를 갖게 되므로써 그에 따라 불상 등 불교 중심의 문화가 발전하는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즉, 불교라는 종교에 대한 열성이 고조되고 깊은 신앙심이 팽배함에 따라 이를 바탕으로 한 문화적 소산물로서 예술의 꽃을 피우게 되는것이 신라 문화의 특성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신라의 예술을 조각과 회화로 나누어 설명을 하겠습니다. 먼저 조각을 살펴보면 새로운 종교의 수용 초기에는 그 종교의 이념에 따른 철저한 수행이나 정신적, 탈속적(脫俗的)인 요소가 강조됨에 따라 종교로서의 대상은 상징적으로 예배되는 경향이 강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 본위의 구체적 형상으로 재현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러한것은 단기간에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얼마간의 시일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따라서 신앙심의 절정에 이르면 그 정신적 전통을 이어받아 예술은 가장 아름다움의 극치로 펼쳐진다고 할 것입니다. 신라의 조각은 바로 이러한 불교의 정신적인 바탕 위에 이룩된 하나의 결정체이며 신앙심이 깊어짐에 따라 불상 표현의 원칙이 세워지고 이러한 신라인의 불상 표현에 대한 미의식의 변화는 삼국시대 불상의 인간적인 표현에서 조금 더 위엄이 서리고 자비로운, 즉 인간과는 구별되는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조형의식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의 예로 경주 九黃洞의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순금製 "아미타여래좌상(阿彌陀如來座像)"은 현실 세계를 떠나서 사색의 경지에 몰입한 부처의 자비스러운 미소를 곁들임으로해서 신라인의 의식이 투영된 불상 표현이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불상 표현의 소재를 찾던 상징적인 단계에서 한 단계 올라 조금 더 형이상학적인 불교 교리의 본질적 문제에 접근하여 그 개념을 시각적인 조형물을 통하여 표현하고자 하는 의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특정적인 佛身 표현의 강조나 설명적인 묘사에서 벗어나 인체의 형상을 빌은 조형을 통하여 無量한 法門을 전달하려는 것이라고 하겠으며 이러한 사실적이면서도 이상화된 인체 표현을 빌어 깊은 사색과 法悅의 경지에 이르고 중생을 계도하는 표정에서 정신력의 실체를 모색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런것으로 판단하면 불교가 신라인의 의식에 깊게 잠재하여 조형물을 만드는 사람이나 그 만들어진 조형물에 예배하는 사람 모두가 공감하는 조형 예술의 세계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금동여래삼존판불(金銅如來三尊板佛)"이나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에서도 마찬가지로 균제(均濟)된 불신의 형태나 정교한 주조기술로 조각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으며, 이런 조각을 통하여 불법의 실체를 체험하고 구현하려는 신라인의 미의식이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러한 미의식은 신라인의 균제와 조화의 예술 표현이 순수한 종교성과 하나로 융합하여 조각 양식의 절정을 이루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석굴암의 본존불과 주변의 불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석굴암 본존불에 나타난 단순하면서도 정제(淨濟)된 불신의 표현과 형태는 중생이 갖는 고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무아의 경지에 이른 숭고한 얼굴 표정으로 존엄무비(尊嚴無比)한 종교 조각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조형예술은 단시간내에 이루어 진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연마된 조형기술의 뒷받침속에 신앙과 결부되어 이루어졌다 할 것입니다.

    *  다음글은 회화에 나타난 미의식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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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5월 8일...  어버이날을 맞아 청주에 있는 한국공예관 2층에서는 청주불교방송의 후원으로 조선 찻사발展이 열리고 있습니다. 이 전시는 특별전 형식으로 "오백년만의 귀향"이라는 주제를 달고 50여점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귀향(歸鄕)이라는 말은 고향을 찾아 왔다는 뜻인데 결국은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시대에 수탈해 갔던 찻사발중 일부가 되돌아와 전시회를 갖게 되었다는 것일겁니다. 50여점의 찻사발들은 나름대로 형태의 아름다움을 지녀 어떤것은 굽이 높다란것이 있는가 하면 어떤것은 아래와 위의 속지름이 같은것 등등 다양한 형태의 찻사발이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16세기 일본의 무장(武將)이었던 '다케다 신겐'이 사용했다는 찻사발도 있습니다.

2. 세계적으로 백자가 유명한 지역은 동서무역의 교량 역할을 했던 이스탄불 지역이었습니다. 토프카피 宮에는 이런 도자기가 상당수 진열이 되어 있는데, 우리의 정서와는 전혀 맞지 않는 고급스럽고 실용성이 배제된 형태로 루비, 사파이어, 에머랄드 등의 보석이 도자기에 박혀 있습니다. 주로 페르시안 도자기라고 알려진 도자기들은 우리 도자기와는 달리 오색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도자기가 갖는 기능보다는 우선 눈으로 감상할 수 있는 여지를 담아 둔 서양인의 감상기준을 만족시키기에 적합하도록 도자기가 만들어 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미적 기준이 내재된 심적 아름다움보다는 외재하고 있는 미적 아름다움에 우선하여 제작하였음을 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외적 치장에 상당한 노력을 해 온것이라 하겠습니다.

3. <찻사발>이라고 합니다만 실은 <막사발>이라는 용어가 더 어울리는것이 조선 백자로 만들어진 그릇들이 아닐까 합니다. 분명 조선백자가 분명함에도 아직도 그 용도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결론이 난것이 없습니다. 다만 일부에서는 차(茶)를 다리기 위해 만들어 사용하던 사발이라는 주장과 이와 달리 스님들의 탁발에 사용되던 밥그릇인 '발우'라는 주장도 있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일본에 있는 26점 모두가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귀하게 여기고 있음에 빗대어 우리 나라에서 개 밥을 담아주던 막그릇이 바로 <막사발>이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너무 터무니가 없는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렸을때 개나 소를 키우는 모습에서 보았듯이 깨어진 가마솥이나 찌그러진 냄비 등 더 이상 사람의 생활용기로 활용하지 못하게 된것을 개나 소의 먹이통으로 사용하였었고, 이러한 금속제의 생활 용기 이전의 여물통은 통나무를 파서 만든것에 여물을 담았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4. 일본인들은 이런 <막사발>을 오오사카 城(大阪 城)과도 바꾸지 않겠다고 하였고, 그 가격을 매길 수 없는 보물이라고 무가보(無價寶)의 위치에 우리의 <막사발>을 올려 놓았습니다. 심지어는 군주제도의 막부 시대에 상대방의 공격에 힘으로 버틸 수 없을 때 서로간의 유화를 목적으로 항복을 하며 가는 길에 소지했던 것이 바로 <막사발>이었고, 이 <막사발>을 받은 군주는 너그러이 용서를 해 주었었습니다. 일본에서 국보로 지정된 막사발을 구경을 하고자 하면 공개를 잘 안하는것은 물론이고 겨우 사정사정을 해서야  공개를 하게되면 그 소장자는 매우 번잡한 절차를 거쳐 공개를 합니다. 일본에서 국보로 지정된 조선의 막사발을 '이도자왕(井戶茶碗)'이라고 하는데 이 그릇들은 모두 오동나무 상자로 만들어진 보관함 속에 다시 금이나 은으로 함을 만들고 그 속에 조선의 <막사발>을 넣어 보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소위 우리가 <막사발>이라고 부르는 도자기 하나에 이렇게 엄청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며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는 것입니다.

5. 세계 도예의 대가인 Bernard Rich는 이런 <막사발>을 보고 "이 막사발처럼 없으면서 있는것 같은 색과 투박한 촉감을 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내 곁에 있다면 얼마나 편하고 남을 행복하게 할까?" 라면서 울부짖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럼 도대체 함부로라는 의미가 강한 <막>이라는 접두어가 들어간 사발 하나가 왜 이렇게 일본인들을 사로잡고 도예의 대가가 울부짖을 정도가 되었나가 궁금할 것입니다. 바로 그 점이 조선 <막사발>이 담고 있는 "내재적인 미"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검소하고 소박하면서도 도자기로서의 단아함을 잃지 않는 조선 백자 특유의 '멋' 때문일것입니다.

6. 조선의 백자는 서양의 백자처럼 시선을 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시골의 순박한 아낙네처럼 넓직한 낭군의 등 뒤에 숨어 다소곳이 지켜보는 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함부로 먼저 나서기를 하지 않으며 자신이 이루어 놓은 공도 모두 낭군의 공으로 돌리는 그런 서민적인 멋과 맛이 바로 조선 자기에 담긴 참 뜻 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조선 도기가 바로 서민적 표출로서 만들어진것을 의미하며 백자이면서도 서양의 도자기 처럼 우유빛 광채(乳白) 를 내지 않는 소박한 회백(灰白)으로 그렇게 눈부시게 희거나 화려하지 않은 백색을 담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막사발>의 모습을 보면 잘 만들려고 노력한 흔적은 어디에고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만들어지는 대로 만들고 싶은대로 만들다 보니 형태가 각양각색이 아닐 수 없으며, 유약도 일정하게 곱게 발라진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은 유약이 덩어리지고 또 어떤것은 그저 유약이 슬쩍 묻어만 간 흔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에 이 <막사발>을 만들던 도공들은 단순히 도자기의 거친 면만을 없애려는 노력으로 무엇보다 서양의 도자기처럼 눈으로 보는 도자기가 아닌 실용적인 도자기로 생각하여 제작에 임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지다보니 <막사발>은 그저 뒤꼍의 장독대에서 간장을 퍼도 되고, 시원한 열무 김치를 담는다던가, 구수한 된장국이 담기면 딱 어울릴 것 같은 그런 수수하고 꾸밈 없는 모습으로 탄생하게 된것이며,그나마 조금 고급스럽게 사용하는 경우라면 떨뜨름한 녹차잎 몇 개로 다려지는 녹찻잔으로 사용이 되었을 때 일 것입니다. 여기에는 일본인들의 얍삽함도 없으며 구태어 궁중의 임금님 수랏상에나 올라가려고 노력했던 관요(官窯)에서 제작했던 도자기의 화려함을 닮을 필요도 없었던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서민이 다루기에 어려울 정도의 거만함이 배어 있다거나 기생 오라비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기녀처럼 이쁘게 꾸미지도 않았습니다.

7.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이러한 <막사발>의 미는 제작자 보다는 사용자이며 약탈자인 일본에서 더 가슴깊이 담겨진 미를 먼저 읽고 간직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것은 우리의 짧은 심미안적 안목을 탓해야 하는 것인지...아니면 모조리 쓸어가 버린 일본인에 의해 미쳐 두고 두고 감상을 하며 그 심연에 담긴 아름다움을 논할 기회를 갖지 못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은 부끄럽게 여겨야 할 일인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돌아가신 간송 전형필 선생은 고려 자기에 심취하여 어디서 어렵고 비싸게 구입한 고려 자기 찻잔이라도 손에 들어오게 되면 가까운 지인들을 불러 고려 자기에 술을 따라 마시며 흥에 겨워 대취했다는 일화도 있는데 감히 조상의 얼이 담긴 소중한 유물에 어찌 술을 따라 마실 수 있겠느냐는 질책도 있겠지만, 일본인의 손에 있던 우리의 보물을 되찾았다는 안도감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에 흩어져 있던 조선의 <막사발>은 일본의 국보로 지정이 되어 소중히 보관되고 있으며, 그외 일부의 <막사발>은 우리 나라의 수집가에 의하여 다시 우리 손에 들어와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경북 예천과 지리산 자락에서 조선의 <막사발>을 재현하기 위한 도공의 끊임없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많은 우리 나라 사람들은 아직도 <막사발>이 주는 심적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말 그대로 <막사발>이기에 함부로 나뒹굴었던 사발로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엇보다도 이번 전시회 처럼 서민과 가까이 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에 그만큼 느낄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고보니 <막사발>이라는 용어는 아주 훌륭하게 이름 붙여진 용어인것 같습니다. 그 <막사발>이라는 용어에 담긴 의미야 말로 순수하고 꾸밈없는 우리네 서민적 심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번 주말경에는 7월 8일까지 계속되는 "5백년만의 귀향"을 반기는 의미로 가족과 함께 청주의 한국공예관을 찾아 <막사발>에 담긴 의미를 새겨보는것이 어떨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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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은 모택동 시절 <문화혁명>이라는 고통으로 한동안 무척 시끄러웠고 홍위병들은 지식인들의 소유물인 많은 책들을 불살라 버렸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무지함보다 먹고 살아야 할 식량이 더 급했고, 식량 한 톨이라도 생산해야하는데 그 잘나빠진 책 나부랭이가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으로 정말로 어이없는 일들을 별이고 말았던 것입니다.

2. 문화혁명의 소산물은 다양하고 각 방면에 걸쳐 무척 많지만 그 중에서도 한자가 사용하기에 불편하다는 이유로 簡字(간자)라는 신종 한자를 만들어 사용한것은 문화를 송두리째 바꾸는 대단한 모험이며 그로 인하여 정보화 사회를 맞게된 중국에서의 환호성과 동북공정 등 역사를 논하는 입장에서의 망연자실을 동시에 느끼는 사태를 맞게 되었던 것입니다. 토인비의 "기록을 하는 자는 멸망하지 않는다"는 말을 보더라도 문자를 가진 민족은 기록이 남아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다는 의미인데 최초의 상형문자 운운하며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로 그들의 긍지로 삼고 있던 한자를 멀리 하고야 말았습니다.

3. 그런데 이러한 일은 20세기 말에 급격하게 발달한 컴퓨터로 인한 중국 문화에는 커다란 기여를 하게 됩니다.  우리야 간단하게 자음과 모음으로 된 자판을 두들겨 의사를 소통하고 정보를 교환할 수 있지만 중국의 한자는 수많은 부수와 획으로 인하여 컴퓨터의 자판을 만들기에는 너무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게 되었는데 간자는 이러한 문제를 아주 간단하게 해결해 줄 수 있었습니다. 엄청난 잠재력의 중국은 이제는 세계 경제를 좌우하는 커다란 경제집단으로 변하게 되었고 중국은 이제는 더 이상의 미개국이 아닌, 경제 대국인 미국이 거꾸로 중국의 기침 한번에 몸살을 심하게 앓게 되는 일이 발생하게 되어버리고야 만것입니다. 중국의 인구는 비공식적으로는 17억에 이른다고 하는데 한 사람의 중국인이 1달러씩만 벌겠다고 마음먹으면 자그마치 17억 달러를 벌게 되는 것입니다.

4. <동북공정>....앞으로도 자주 이곳의 이야기 주제로 들먹거리게 되겠습니다만, 경제의 발전에 문화와 역사의 발전을 동일한 보조로 추진하려는 중국 정부의 야망이 이 <동북공정>에 담겨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것인데 이 사업에 제동을 거는 것은 의외로 지금까지 중국에서 써왔던 한자가 문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문화혁명 이전에는 누구나 한자를 다 알고 사용해 왔고, 어린이나 대학교수나 동일한 글자를 사용하여 왔었는데 쓰기 편하다는 간자를 쓰고 나서부터는 원래의 상형문자가 담고 있던 <뜻글>의 의미를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것입니다.

5. 이로 인한 문제는 중국 내부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사실 동북아시아의 3국인 우리 나라와 일본, 중국은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각자의 독창성을 되살렸다고는 하지만 그 바탕은 같다고 볼 수 있는데 중국이 간자를 택함으로써 문화적 공통성을 잃게되고 말았습니다. 중국내에서도 조금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 끼리는 같은 글자를 두고도 발음이 달라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뜻글>의 본고장인 중국에서는 이제는 한자는 전문인들이나 다루는 글자로 전락해버렸고 간자로 활용되는 원래의 한자는 잘 알지도 못하게까지 되고 말았습니다. <동북공정>은 중국의 야망이 담겨 있음에도 간자의 선택으로 동북 3국의 문화에 이질화를 추구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에따라 현재는 동일한 문화적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중국의 힘이라면 능히 3국을 하나로 묶을 수 있었음에도 말입니다.

6. 이제는 3국의 학자가 모이는 경우에도 한자로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정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필답으로 의사 소통을 하려해도 많은 문제가 되고 있으며 더구나 옛글로 전락해버린 한자는 이제는 중국에서는 고어가 되어버려 중국에서 지금 사용하는 중국어와 별개로 <한자>라는 독립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중국인들은 우리가 신라의 이두문자를 그저 있었던 글자로 취급하는것 처럼 말하듯 한자는 망해버린 역사속의 한나라의 언어쯤으로 알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동북공정>이 실제 중국의 대망에 발목을 잡게 되리라는 것은 그들도 미쳐 헤아리지 못했던 결과였고 <고구려>라는 국가를 중국 변방의 부족국가로 역사눕히기를 진행하는데도 많은 장애 요소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후에 <고구려>라는 고대 국가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지만 역사적으로 과거를 더듬는데 중국과는 앞으로 험난한 전쟁을 치뤄야 할 입장에서 중국의 문화혁명은 한동안은 우리가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을 벌게 해 주는것이 아닐까도 생각을 해 봅니다. 그들이 편리하게 쓰기 위해 만들었던 간자가 일면 편리함을 가져다 주기도 했지만, 그들의 과거를 꾸미는데는 간자는 커다란 장애가 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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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굼 2004-05-17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간자에 대해선 몰랐는데...그런 일이 있었군요. 어찌보면 중국고유의 것이라고 하는 것들을 한국이 좀 더 잘 갖고 있는 면이 많은 것 같아요.
 

1. 언제부터인가 우리 것에 대한 관심들이 무척 고조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21세기가 시작되면서 지식화, 정보화 사회라는 기치로 새 시대가 열려감에 따라 혹시 그 대열에 뒤쳐질까를 걱정하면서도 정확하게 정보화나 지식화의 개념이 무엇인지를 몰라 적지 않게 당황도 했습니다. 그러나 21세기가 열린지 수년이 지났음에도 특별하게 달라진것은 없어 보이는것이 현실입니다.

2. 제가 느끼는 정보화와 지식화에 대한 개념은 소위 인류학자들이 비잉~ 둘러서 말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개념입니다. 실제로 정보화나 지식화가 대두되게 된 배경은 저 멀리 산업 혁명때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될것 같습니다. 산업혁명 이전에는 1차 생산품인 농산품 위주로 사회가 꾸려져 갔었습니다. 내가 먹을것은 내가 생산하고 내가 사용할 도구도 내가 필요한 만큼만 만들어서 쓰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구의 증가와 교통의 발달, 도시의 발달로 인하여 점차적으로 분업적 사회로 사회 구조의 변화가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인간이 해야 할 역할도 나름대로 정해지게 된 것입니다. 복잡한 사회구조 속에서 농사를 지어 곡식을 생산하는 집단, 그리고 농사를 짓는 도구를 만드는 집단, 옷을 만드는 집단 등등 필요로 하는 공산품을 생산할 여러가지 시설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이러한 생산은 소규모 생산이 아닌 대량생산을 통한 공급으로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언제든지 구하여 사용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으며 이것이 바로 산업혁명을 이루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3. 산업혁명이란 바로 물질문명의 산물로 볼 수 있습니다. 남들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그 소유의 정도로 富의 정도를 가늠하며, 인간의 움직임이 귀찮아지고 이에 따라 인간의 움직임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작업들도 기계의 힘을 빌어 편리하게 생산을 하는 방향으로 노력을 하게 되고 각종 생활에 편리한 도구들을 발명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마라톤 벌판에서 승전 소식을 죽어라고 달려가서 알려야 했었지만, 지금은 침대에 편히 누워서도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생중계를 통하여 알 수 있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모든 시스템은 인간의 편리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설정이 되어 발달하였으며 이 덕에 우리는 정말로 편한 세상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4. 나이가 들어 돌아가시게 된 부모의 마지막 소원이 한 겨울에 딸기를 드시고 싶다는 이야기였고 효자인 자식은 그 딸기를 구할 수 없어 전전긍긍 하는데 자식의 효를 어여삐 여긴 산신령이 손에 딸기를 가득 들고 나타나서 돌아가시기 직전의 부모님께 딸기를 드시도록 했다는 이야기는 이제는 사시사철 제철을 모르고 출하되는 과일로 인하여 우리의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해 줄수 있는 옛날 이야기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린지 이미 오래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달을 보며 달나라에서는 계수나무 밑에서 옥토끼가 방아를 찧는다는 이야기도 인간이 달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는 우리에게서 멀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산업 혁명이후로 얻은것이많은 반면 우리 인간 내면에서 살아 숨쉬던 진실로 인간적인 것들이 모두 고갈되어가면서 생각할 수 있는 만물의 영장이 점차 사이보그화 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5.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인간들이 조금씩 느끼기 시작을 했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우리는 자연을 너무 가볍게 여겨왔고 길을 만든다고 산 허리를 자른다거나 공장을 짓는다고 초원을 뒤엎는등 자연 파괴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해 왔고 나도 모르게 저녁을 마치고 나면 바보 상자라고 불리우는 TV 앞에 앉아 즐기는 시간을 많이 갖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을 할라치면 자동차로 쌩~ 하니 달려가면 되었고, 배가 아프면 위 내시경이라는 기계로 몸 구석구석을 이잡듯이 살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삶의 편리함은 결국 <기계의 노예>로 인간을 전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외계인의 모습을 보면 워낙 기계에 의존을 하다보니 머리만 커지고 손과 발은 가늘어져 기계를 움직일 수 있는 리모컨만을 작동시킬 힘만 갖도록 변화된 모습으로 그려진것을 알수 있습니다.

6. 20세기 말엽부터 똑똑한 미래 학자와 인류학자들이 나타나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기계의 노예>로 변한 인간이 인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그동안 개발이라는 미명으로 무차별적으로 파괴해 왔던 자연이 신음을 하기 시작을 했고 세계 곳곳에서 그동안 참고 참았던 자연이 이제는 슬~슬~ 인간에게 복수를 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20세기 말에 인류학자들은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과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주장을 하게 되었고 이러한 경향은 "자연 친화적"이라는 말로 인간의 삶에 밀접하게 다가왔습니다. 아파트를 하나 지어도 "자연속의 아파트"라고 해야 제대로 분양이 되고 이제는 자연이 결코 우리와 떨어질 수 없는 공동의 운명임을 인식하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기계의 노예>로 부터 탈피하는 방향은 인간이 편리하게 사용하기 위해 개발한 기계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하고 원래의 목적에 맞게 사용하자는 의식이 싹트기 시작을 했는데 이러한것이 바로 "정보화""지식화"로 대별되어 나타나기 시작한것입니다.

7. 이러한 <인간 본연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은 산업혁명 이후의 "소유의 개념"에서 21세기를 맞아 "향유의 개념"으로의 전환을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27평 아파트보다는 60평 아파트에 살는 사람이 더 행복했다는 놀리가 성립이 되었지만 이제는 아파트의 평수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만큼의 문화를 향유하느냐?>가 바로 행복의 척도가 되는 시대로 돌입을 하게 된 것입니다. 21세기는 그만큼 다양한 문화속에서 생활을 하는 인간의 모습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가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시대로 바뀌고 있음을 의미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8. 문화란 한 시대의 생활양식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활양식의 생산물을 우리는 <문화재>라고 합니다. 이 페이퍼에서는 우리 주변에서 알게 모르게 넘어가버렸던 우리 문화와 문화재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공간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많은 부분은 공감을 하기도 하겠고 반면 다른 의견을 가지고 계실 수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 나라의 문화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추구하고자 하는것이 아니라 그동안 모르고 지내왔던 우리 문화에 대해 다시한번 되짚어 보자는 의미로 꾸며짐을 이해 하시기 바랍니다.

                             < 如       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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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5-12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모르고 지내왔던 우리 문화에 대한 이야기 계속 기대하겠습니다, 수수께끼님 ^^

비로그인 2004-05-12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대에 부응하는 이야기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항상 관심으로 들려 주심에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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