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금까지는 가만히 있는 중국이라는 나라에 들어가서 물을 흐려 놓은 의지의 한국인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디에고 양지가 있다면 반드시 응달도 있는법이니 이해를 하려고 합니다만, 나중을 생각한다면 조금 더 바람직한 상행위가 영위되어야 할것 같습니다. 중국에서도 언젠가는 한국의 퇴폐행위에 대해 날벼락이 떨어질것 같습니다. 왜?  얼마전에 일본인의 매춘 기생파티 때문에 중국이 한바탕 난리를 피운적이 있었잖습니까? 그와 유사한 일이 한국인에게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겠지요.

2. 그런데 이번에는 정말 자랑스러운 몇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며칠전에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렸던 국제가전제품전시회(CES)에서 한국의 전자제품이 일본 제품보다 인기가 훨씬 좋았다는 내용을 아시지요? 소니나 파나소닉제품보다도 더 비싸게 팔린다는 이야기는 우리의 어깨가 으쓱하도록 했습니다. 일본제품 베끼기에서 이제는 일본이 우리 제품을 베끼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로 한국의 가전제품에 대한 인기나 상품의 질에 대한 내용은 상당히 고급품으로 인식이 되고 있습니다. 중국에는 우리의 삼성이나 LG와 같은 전자회사로 HAIER라는 상표가 있었는데 종합가전제품 생산 회사입니다. 냉장고, 세탁기를 비롯한 각종 가전제품을 만드는데 중국인들은 이 회사의 제품보다 우리가 만드는 삼성이나 LG 제품을 더 선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인즉, 고장이 잘 나지 않고 제품의 디자인이나 성능이 훨씬 우수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비싸도 우리 제품을 사서 쓰려고 하고 중국의 중류층 이상은 대부분이 한국제품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3. 이런 현상은 비단 가전제품만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들렸던 유명한 식당의 수도꼭지나 변기까지도 우리의 제품이었습니다. 과거 한동안 우리나라의 고급호텔 등지에 미국이나 독일제 수도꼭지나 변기가 사용되던 때를 생각하면 이제는 우리 제품을 다른 나라에서 쓴다는 것에 대단한 긍지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실제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우리의 제품 생산수준이 높아졌고 그만큼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제품이 되었다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4. 중국교수가 제 핸드폰이 어디 제품이냐고 물어서 국내의 S사 제품이라고하며 공항 출발 때 전원을 끈 제 핸드폰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유독 제 핸드폰에 탐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사용한지 1년이 조금 넘은 제품인데 중국에서의 한국 휴대폰에 대한 인기는 말 그대로 최고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핸드폰이 얼마나 인기가 있는가 하면 중국에서도 거의 국내에서 팔리는 가격으로 판매가 된다는 것입니다. 보통 2500위안~3000위안이니 약 40만원에 거래가 되는 셈이고 국내의 경우와 비교하면 중국은 물가가 싼편인지라 엄청난 고가에 매매가 되고 있다는 이야기니 중국교수가 눈독을 들이는것도 당연했던것 같습니다. 이런 고가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사람들은 돈을 모아서 우리 나라 생산제품을 사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제 손안에 놓여있는 작은 물건이 얼마나 대견스러운지 몇번이고 쓰다듬어주었습니다.

5. 사족을 하나 달아야 하겠습니다. 중ㄱ구음식이 가격이 싼것에 비해 익숙치 않은 저로서는 먹기가 여간 고통스러운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바닷가라서 싱싱한 회를 먹을 수 있는것도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한국 식당에 들어가서 음식을 시키고 값을 치루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중국내의 한국식당(청도에는 많은 한국 식당이 있었습니다)이면 가격도 중국의 실정에 거의 비슷한 수준이 되어야함에도 갈비탕 한그릇이 국내 가격과 같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음식도 모두 국내의 가격을 위안화로 환산만 하였더군요. 글쎄말입니다. (1)편에서도 언급을 했지만 중국내 농산물이 대부분 우리의 1/10 이하의 수준인데 음식가격은 국내 가격과 똑같이 받는다는것이 이해가 쉽지 않더군요. 만약 그렇게 따진다면 국내에서도 중국음식중 뻬이찡 덕이니 냉채니 하는것이 우리음식보다 훨씬 싸야할것 같은데 그렇지 않으니...참 아이러니 입니다. 하여간 그 짠돌이라고 뙤놈소리를 듣는 중국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그렇게 악착같이 돈을 버는 한국 사람들이 존경스러웠습니다. 물론, 그들이 번 돈은 전부 우리나라로 들어온다는 가정하에 하는 말입니다.

   서안의 당나라 유적이며 <법문사의 비밀>,<부처의 진신사리>의 주요 무대인 法文寺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如      村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우리는 서해라고 합니다만 중국인들은 자기네 편에서 바라보니 동해라고 하더군요. 이 동해에 연하여 있는 도시들이 중국의 발전을 이끌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중국의 청도 땅은 온통 바위 투성이의 땅이었습니다.60년대 우리의 민둥생이 산을 연상하게 한다고나 할까요....그런데 온통 바위로 뒤덮인 산세를 보고는 뭔가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석질이 우리의 화강암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산의 화강암은 그 뿌리가 무척 깊고 단단하지만, 중국의 바위는 군데 군데 이격이 생겨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바위라는 것입니다. 옛부터 중국은 塼(벽돌)의 나라, 우리는 화강암의 나라, 일본은 木(나무)의 나라이며 그 문화가 나름대로 찬란하다고 했는데 역시 그만한 이유가 다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2. 중국의 시장에 가 보았습니다. 뭐...우리와 다를것이 없고 조선족이 많아서인지 온통 한국어 간판이 시장 속에 물결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다른것은 가격이었습니다. 우리의 1/10 정도라고 할까요? 북한 장백산에서 생산되는 각종 버섯, 그리고 상황버섯과 장뇌삼 등은 오히려 북한의 물가보다 훨씬 싸다고 일행중 북에 다녀오신 분이 말씀 하시더군요. 북에서는 주민들에게는 싸게...그리고 관광객에게는 비싸게 파는 이중가격제를 시행하고 있으니 이해가 갑니다만, 너무 싸다는 것입니다. 이 농산물을 구입하여 산지를 속여파는 일부 수입업자들....그리고 시장 상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중국에서 나는 농산물중에서도 좋은 것은 매우 질이 좋은데 수입업자들이 이득을 많이 남기려고 질 나쁜 농산물을 수입해서 한국산으로 둔갑을 시켜 팔다가 들통이 나는 바람에 자신들의 판로도 막힌다고 하소연 하더군요. 국내에서 버는 한달 급여로 중국에서 살아 간다면 아마도 생활비는 별로 안들것 같습니다.

3. 저녁에는 포장마차(실은 포장은 없는 좌판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에서 요기를 하였는데 4사람이 배가 터지도록 먹었는데 18원이라고 하여 오히려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3000원 가량으로 4사람의 끼니가 해결된것이니 당연히 놀랄만도 하죠?  숙소로 정한 아파트는 아주 깨끗했는데 우리와는 달리 주방이 차단되어 있습니다. 개방식 주방을 사용하는 우리와는 다른 모습이 아마도 기름을 위주로 요리되는 중국 식사의 그 지글지글~ 소리를 차단하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TV를 켜니 바로 우리 방송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韓流인지...아니면 워낙 한국인이 많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반 주택에까지 Skylife가 들어와 있다니 참..우리의 힘도 무척 강해졌지요??

4. 피곤하면 안마를 받으러 가지 않겠냐고 물어왔습니다. 중국의 발안마는 피로를 말끔히 물리치는 안마로 유명하기에 은근히 가고 싶다는 표현을 하였지요. 그런데 참 재미있더군요.

한국식 안마 138위안

태국식 안마 138위안

일본식 안마 118위안

발안마 88위안

기타 + 200위안 = 특별 서비스

참 재미있었습니다. 은근히 가고 싶었고 혹시나 이런 안마업소를 한국인이 운영하는것은 아닐까? 하는 궁금증도 들었기에 가보자고 했습니다. 가는 도중에 보니 한글로 된 찜질방도 있고, 안마업소가 한두군데가 아닌데 대부분이 한국인이 운영을 한다고 합니다. 업장에 들어서자마자 한국어로 '어서 오세요'라고 인사를 하는 종업원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니 연변이라고 하였습니다. 다행히도 조선족을 그들의 돈벌이 업체에 고용을 하여 비록 많은 월급은 아니더라도 조선족이 조금 벌 수 있도록 배려도 하고 한국 손님이 중국어를 몰라 당황하는 경우가 없도록 배려한것 같습니다.  대충 어떤것인가를 물어보니 한국의 퇴폐업소를 이야기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중국으로 진출하여 중국 사회에 조금씩 퍼져 나가고 있다는 것인데, 중국인들도 많이 찾는다고 합니다. 저는 발맛사지를 받고 나왔는데 시원하기는 커녕 발안마에 70분이라는 시간이나 소요하고도 별로 달라진게 없었던것 같았습니다. 생각같아서는 아는 사람도 없으니 객기로 400위안(우리 돈 6만원) 정도 투자를 해서 한국에서도 못해본 특별 써비스를 받아볼까도 했지만 일행 모두가 발안마만 받기로 한지라 아쉽게도 그냥 발길을 돌리고야 말았습니다.(이 부분은 사실입니다)

5. 비단 이뿐아니라 한중거리라는 곳에 있는 술집은 우리나라의 룸사롱과 같다고 합니다. 거기에 퇴폐까지 곁들였으니 어디 중국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한국인의 상술을 보는 중국인들의 눈이 결코 곱지만은 않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한국의 기술이 필요해서인데 스스로 일어 설 힘이 생기면 한국인을 다 내 쫒아버리겠다는 생각이며 그 동안은 자신의 나라가 조금 망가져도 참겠다는 중국인 특유의 만만디 정신을 발휘하는 것이었습니다. 글쎄요...이곳에서 장사를 하시는 분들.... 대충 돈벌고 나오셔야만 할 것 같습니다.

 다음은 전자제품에 관한 한국 제품의 위상과 중국 가전제품에 대하여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如      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중국에 다녀왔습니다. 오랜 기간이 아님에도 알라딘과 꽤나 멀어져 있었던것 같습니다. 이번 여행길은 인천ㅡ>청도ㅡ>서안 이었고 한국인이 가장 많이 들어가서 사업을 벌이고 있다는 청도를 첫번째 기착지로 삼았습니다. 중국의 공항이 대부분 다 그렇지만 청도 국제공항은 협소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국인이 이용하는 국내선이 더 크고 넓었습니다. 중국이 워낙 넓은 대륙이고 28개의 省을 자치구로 가지고 있다는데 한 개 성의 인구나 면적이 우리 나라보다 더 넓다니...... 넓기는 넓은 모양입니다. 당연히 국내에 이동인구가 많고 또 이동인구를 운송해야하는 공항시설중 국제선 청사보다는 국내이용시설을 더 크게 지을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 청도는 공항을 벗어나기도 무섭게 한국어 간판을 마주 대하게 됩니다. 심지어는 길바닥을 전부 우리 글로 된 간판들이 장식을 하고 있더군요...가히 한국기업이 많이 들어와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택시를 이용하였는데 독일제 Vox Wagen에서 제작한 SANTANA라는 차종인데,  그리 좋은 차는 아니었습니다. 좁고 차량 운행시 충격을 흡수하는 대쉬보디와 쇽업쇼바가 나빠서인지 충격이 그대로 엉덩이로 전달이 되어오는것은 물론이고 좌석의 스프링 형태까지 엉덩이에 전해질 정도였습니다.

3. 도착하자 마자 바로 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했습니다. 점심 메뉴야 여기서 말씀드릴수 없지만, 통역겸 안내를 맡은 여자분이 조선족으로 흑룡강성에서 왔다고 하더군요. 몇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청도 사람들이 동북 3성으로 돈벌이 하러 갔었다는데 지금은 반대라서 동북 3성의 조선족중 거의 60% 정도가 빠져 나갔다고 합니다. 물론, 그중의 많은 인원은 모두 우리 나라에서 불법 체류중이라고 하는군요. 또, 많은 조선족들이 돈벌겠다고 청도에 와서 중국어에 서투른 한국 기업가가 운영하는 회사에 취직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일도 일이지만 통역을 겸해야 하는 이유가 큰 이유랍니다. 대개 800위안에서 2000위안 정도이니 우리 돈으로 따진다면 12만원에서 30만원 정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4. 사실, 제가 중국에 가서 영어를 안써본것은 청도가 처음이었는데, 다행히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조선족이 있어서 국내에서나 마찬가지로 그냥 편하게 우리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와 같은 말을 쓰는 조선족을 통하여 무척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다른 분들도 모두 같은 생각이시겠지만, 저는 이들을 우리와 같은 피를 나눈 한 민족으로 인식을 하고 있었는데....전혀 그런것이 아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중국은 48개의 민족이 뒤섞여 사는 자치구이다 보니 그들은 자신들이 중국인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국에 대해 조금이라도 흉을 본다거나 섭섭한 이야기를 하면 발끈~ 한다는 것입니다.물론, 처음에는 참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면 역시 중국의 입장에서 대변하고 옹호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도 이해를 해야만 하는것은 그들은 중국에서 태어나고 중국에서 조선말과 중국어를 같이 쓰면서 자라 온 사람들이기에 어쩔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한 민족의 동질성을 갖고 있을것이라고 느껴왔던 저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5. 중국의 청도는 2008년에 북경과 같이 올림픽을 치루는 도시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인들이 지리적으로나 기후 등 우리와 같은 조건이고 저임금이기에 많은 기업을 이곳으로 옮겼고, 그로 말미암아 청도가 발전하게 된것을 그들은 인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계획도시답게 청도는 큰 도로를 중심으로 최신의 높은 빌딩이 가득 들어차 있었습니다. 차량도 열심히 달리고 있었지요. 이러한 것을 보고 '후진타오'는 중국의 미래를 밝게 보고 장황한 꿈을 밝혔는지 모르겠지만.....제가 보는 견해는 그와는 달랐습니다.

6.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것은 중국인의 교통문화입니다. 사실, 우리의 교통문화가 지금처럼 된것은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전후해서 완전 정착이 된것입니다. 그 전에 국가에서 죽어라고 외쳤던 교통질서는 아랑곳 하지 않고 광화문 대로도 당장 달려드는 차만 없으면 건너기 일수였으니까요. 그런데 청도가 그렇습니다. 길은 넓은데 횡단보도로 건너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일단 차가 안오면 유유자적하는 걸음으로 길을 건넙니다. 단 하루 청도에 머무는 동안 몇 건의 교통사고를 목격을 했는데, 이러한 목격은 우연이 아니라 중국이 안고 있는 교통문화 부재에 따른 일반적인 일이라는 것입니다.

7. 더 기가막힌것은 왕복 8차선의 도로에서 제가 탄 택시가 앞차가 천천히 간다고 중앙선을 넘어서 맞은 편에 차가 오는데도 달려 간다는 것입니다. 길바닥에는 대목을 노리는 교통경찰(公安)들이 즐비한데도 말입니다. 공안은 설이 다가오면서 한목 챙기느라고 정신없이 적발을 한다더군요.....  그리고 차가 오건 오지 안건...그들은 골목에서 나오면 그 넓은 길을 가로질러 유턴을 한다는 것입니다. 말이 유턴이지 실은 반대편 차로를 타고 달리다가 자기 차선으로 들어 간다는 것이지요.  일차선으로 달리다가 살짝 반대편으로 유턴하는 그런 경우가 아니라 이쪽 골목에서 나와서는 반대편 차선으로 무조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8. 제가 걱정을 할 일은 아니지만, 중국은 아까 말씀드린대로 최신 고층빌딩이 하늘을 찌를듯이 서 있습니다. 물론 우리 나라의 경우처럼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것이 아니라 충분한 조경 공간을 갖추고서 말입니다. 건물의 주변에는 그래도 여유가 있어 차량도 제법 세워져 있었는데, 놀라운 것은 지하 주차장을 갖춘곳이 많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차량도 적고하니 새로운 건물에 깊이 땅을 파고 지하 몇 층이나 되는 주차장을 만드는 것이 많은 추가적인 건축비의  지출을 불러온다고 볼 수 있지만, 앞으로 중국도 곧 차들로 붐빌텐데 그 때를 대비한 주차 정책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렸던 3가지의 문제는 앞으로 중국이 해결해야 할 교통문화에 대한 큰 고민거리라고 함께 하셨던 중국 교수분(이 분은 미국에서 학위를 마치신 분이신지라 외국의 자동차 문화에 대해서는 많이 느끼고 계셨습니다)이 말씀을 하시더군요. 외형은 달라질 수 있어도 정신문화의 변화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는데 저 역시 이 분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동감을 합니다. 그러면서 이 교수님은 적어도 한국을 따라가려면 30년을 지나야 할것이라고 하더군요...

   다음은 한국인의 손으로 이루어진 각종 위락시설.....발전인지, 毒인지....아니면 양화를 구축하는 악화인지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습니다.                                                                                                                                                                                                                                                   

                                                      <如      村>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립간 2004-01-14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 안 지나갔지만 반갑습니다. 여행을 잘 다녀오셨다니 제가 더욱 기쁘네요. 글의 제목을 보고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한동안 친구들과 남북통일에 대한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당연히 남북통일은 되야죠. 그런데, 통일후 남쪽 사람들이 북쪽에 가서 땅투기 하면 어쩌나, 북한 여성들을 데리고 룸싸롱이나 만들면 어쩌나, 휴전선의 생태계 몇 명산들이 개발로 파괴되는 것이 아닌가 걱정한 일이 있었습니다. 개발과 보전 어쩔 수 없는 딜레마인 것 같습니다.

비로그인 2004-01-14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립간님 덕분에 잘 다녀 왔습니다.마립간님 말씀처럼 개발과 보전의 양면적인 딜레머는 늘 상존하기에 우리 나라에서도 도시개발을 적극 추진하려하고 지역경제 활성화니 뭐니 하지요..저는 투기에 대해 잘 모르겠지만, 제 3자적 입장에서 바라본 형태는 참으로 씁쓸하더군요. 더구나 국내가 아닌 외국에서의 우리의 행태라고 생각하니... 돈은 잘 버는것 같습니다만 글쎄요...삶이 돈이 전부는 아니라는것을 그들은 잘 모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의 실명위기를 맞게된 병사를 생각하면서 그가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잘 받아들이지 않음을 보고 가슴이 답답했었고, 결국은 이틀이나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습니다. 제게는 눈에 관한 아주 아픈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 평생을 지고 가야할 멍에처럼 제 가슴속에 각인되었던 그 일이 지금의 제 부하를 보면서 반복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서서 안절부절 못하는것이 아닌가 합니다.

수 년전, 저와 근무하던 하사 1명이 눈에 이상이 있어서 제게 찾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지금의 경우와 달리 눈에 거미줄 같은것이 조금 깔려 있는것을 외부에서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눈을 떠도 눈앞에 보이는 부분중 일부가 거뭇거뭇하게 잘 안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통합병원으로 진료를 위하여 후송을 보낼수밖에 없었습니다.

며칠후 군의관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백내장인지 녹내장인지 당시의 병명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군의관의 설명인즉, 지금은 초기단계로 수술이 곤란하고 조금 더 진행이 되어야 수술이 용이하다는 것이었으며, 다음날 퇴원을 시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군의관은 이 증세에 대해 눈에 가는 거미줄이 몇가닥 있는데 몇가닥은 수술하기도 어렵고 조금더 가닥이 늘어 마치도 파래가 널려있는것 처럼 좀더 조밀해지면 수술을 해야 한다는 요지로 친절하게 알려 줬습니다.

다음날, 그 하사는 퇴원을 하여 돌아왔습니다. 저는 증세를 물었는데 처음과 같은 증세라는 답변을 하였기에 군의관의 설명을 전하면서 몸관리를 잘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제 설명을 다 들은 후 집에 다녀 올 시간을 줬으면 하기에 며칠간의 휴가를 줬습니다. 별것 아니라고 집에 가서 잘 쉬다 오라는 말과 함께 집이 충남 대천인 그 친구에게 휴가를 줬던 것입니다.

다음날 출근을 하고 막 업무를 시작할 쯤... 전화 한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대전의 경찰서인데 그 친구의 인적 사항을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슨일이냐는 반문에 여관에 투숙하여 자살을 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현장은 잘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가늘디 가는 군화꾼을 창문에 묶고 목을 맨 그 현장을 보며 이게 무슨일인가?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해야할지....왜 이런 방식의 일이 벌어졌는지....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수사기관에서 경위를 조사받으면서도 이게 현실인지 아닌지가 잘 판단이 되지 않았습니다. 유서 한 장 없이 세상을 버린 그가 무척 야속했고, 그렇게 쉽게 자신을 버릴만한 이유가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별로 낙담을 하는 표정도 아니었지만, 집에 가도록 휴가를 청했던 그가 왜 죽음을 택해야 했는가를 말입니다... 차라리 부대에 남겨두었더라면 상황은 달라지지나 않았을까? 라는 후회가 가슴속에 깊게 깊게 상처를 내고 있었습니다.

눈이 안보인다는것.....그 고통을 저는 아파보지 않았기에 잘 모릅니다. 당시 그 친구의 죽음을 접하고 단지 안보이는 고통이 엄청 심하다고만 느꼈을 따름이었지요. 정말 그런가요?  그 일이 있은지 3개월 후에 아버님이 약간의 당뇨증세로 백내장이 나타나 수정체 수술을 받으셨습니다. 지금의 나식이나 안과 수술과는 달리 수정체의 앞부분을 갈아 넣는 수술이었는데 수술 몇 시간이 경과후에 구멍이 숭숭 뚫린 알미늄 안대를 통해 어렴풋이 보인다는 말씀을 하셨었지요. 물론 지금도 아버님은 난시가 있는 저보다 훨씬 좋은 시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또 제 부하중 한명이 실명위기를 맞고 있는 것입니다.  10년 가까이 지난 가슴속 깊은곳에 넣어두었던 과거의 기억이 다시 돋아날 수 밖에 없습니다. 두 눈이 멀쩡할때의 행복밖에 모르기에 안보이는 사람들의 사정은 잘 모르지만, 차를 운전할때 앞에 성애라도 잔뜩 끼어있으면 앞이 안보이는것과 같을지요?  차라리 눈이 안보인다고 엄살이나 떤다면 훨씬 나을텐데 지금처럼 무슨 걱정이냐는듯 태연자약한 그 친구가 두렵기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하루에도 수도 없이 발생되는데 실명이 목숨을 잃는것에 비교할 수 있느냐는 반문도 있겠지만, 지금의 가장 큰 불행은 바로 눈앞에 닥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말.....중국으로 떠나기전에 그 친구를 찾아가야 할것 같습니다. 두번 다시 제 부하를 잃지 말아야 하니까요.......

                                                                <如     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며칠전 부하중 1명이 제게 면담을 신청해 왔습니다. 제 방에 앉아 무슨말을 하려는지 그 애의 맑은 눈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제 눈이 잘 안보입니다'

"???"

"제 오른쪽 눈이 이상하게 안보입니다"

"아니...지금 이 눈이 잘 안보인다구??"

"녜...물체의 형상만 알아볼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청년이 그렇듯이 눈망울이 커다란것이 까만 눈동자가 보석처럼 맑게만 보이는데 앞이 안보인다는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전혀 알수가 없는 상태라 대수롭지 않게 통합병원에서 진단을 받아볼수 있도록 하였는데, 의외로 입원 치료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어제 제가 통합병원에 찾아가서 상태가 어떤지를 확인을 하고 군의관과 면담을 했습니다.

시력저하의 원인을 군의관은 크게 3가지로 예를 들었습니다. 첫째는 외상(외부충격)에 의한 일시적 시력감퇴, 두번째는 감기처럼 바이러스 침투에 의한 증상, 그리고 마지막은 유전적 증상이라는데 앞의 두가지는 '스테로이드'를 투약하면 반응이 있다는데 3일간 투약을 했음에도 전혀 반응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마지막 한가지...유전적 증상인데 이를 위해 정밀 혈액검사중이라고 하더군요.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선진국도 안구 중심의 안과의학은 발전이 되어 있는데 시신경이나 뇌신경에 의한 시력감퇴에 대한 연구는 미진한 모양입니다. 결국 여기저기 연락을 하고 동창들에게 연락을 해서 겨우 분당 서울대병원에 시신경 전문가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진료를 약속을 해 두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것은 오른쪽 눈의 시력 회복은 여하한 경우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왼쪽눈의 현재의 시력이 0.5~0.6 정도인데 이나마라도 보존을 해야 한다는 것이고 안과에서는 왼쪽의 시력 보존을 위해 치료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두눈 모두 실명의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 아이는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대전에서 식당일을 하시는 아주 어려운 형편인데, 평시에도 그렇게 밝고 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커다랗고 맑은 눈이 정상인의 기능을 할 수 없다니...믿기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의병 전역을 하게 됩니다만,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저도 막막하기만 하고...그래서 어제 저녁도 못먹고 잠도 제대로 이룰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든 나머지 왼 눈의 시력만은 지켜야 하는데...정말 걱정이 아닐수 없습니다.

따지자면, 어디 이런 불행이 비단 제 부하 하나겠냐만 일단은 자신의 불행이 어느 무엇보다 큰 불행이라고 여길수밖에 없는 실정을 감안한다면 낙담과 좌절이 앞설텐데도 이 친구는 그저 덤덤하게 맑은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있었습니다. 사테의 심각함을 군의관을 통해 들었다고 하면서도 헤맑은 표정을 짓는 그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어른거립니다. 어쩌면 어린 마음에도 제가 걱정할것을 염려한 배려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철없다기 보다는 대견스러움을 느꼈습니다. 병원을 떠나오며 제가 떠날 때 자꾸 따라 나오길래 그만 들어가라했더니 큰 소리로 경례를 붙이는 그의 늠름한 모습을 저는 똑 바로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마치 제가 그를 그렇게 되도록 한것 같은 죄책감이 생겨서 말입니다.....

                                                <如     村>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립간 2004-01-07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어렸을 때 유행하던 노래중에 하나가 버들피리의 '눈이 큰 아이'였는데, 나중에 공부하면서 보니까 선천성 녹내장(congenital glaucoma) 경우가 눈이 크고 맑게 보인다고 합니다. 세상일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병사에게 위로의 말을 하고 싶은데 이야기가 너무 길어질 것 같아 '마이페이퍼'에 글을 올렸습니다. 염려는 되지만, 병사에게 힘내라고 전해주세요.

비로그인 2004-01-07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마립간님도 의사시니까....잘 아시겠지요. 군의관 이야기로는 뇌에서 눈으로 전달하는 신경이 쪼그라들었다는군요. 일반적으로 스테로이드 처방을 하면 반응이 온다는데 감감 무소식인것을 염려하는것 같습니다. 그래도 마립간님이 위로를 해 주시니 조금은 마음의 평안을 찾게 되는것 같습니다. 내일 다시 병원에 문병을 가는데 마립간님의 말씀을 꼭 전해 드리겠습니다..그럼에도...자꾸 그 친구의 맑은 눈이 뇌리에 떠오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