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열정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6월
평점 :
절판


  외출을 할 때면 습관적으로 책을 챙긴다. 혹, 약속 시간보다 이르게 도착했거나, 늦는 상대를 기다려야 할 상황이면 책보다 나은 친구는 없다. <단순한 열정>, (문학동네, 2001).  우선 이 책은 휴대용으로 안성마춤이다. 중편 정도 되는 분량이니, 잠깐 시간을 달래기에는 그만이다. 약속 시간에 도착해보니 삼십분이 남았는데 내심 즐거웠다. 언제부터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 미뤄온 책을 집어든다. 삼십분만 할애하면 되니까.

  이 책에서 말하는 에르노식 감정을 나는 20대 이후로는 잊어버렸다.(잃어버렸다, 가 맞을지도.) 따라서 그녀의 '단순한 열정'이 결코 사랑 이야기로 다가오지 않는다. 집착이자, 욕망이요, 무모함이자, 감정의 낭비로 비칠 뿐이다. 남녀간의 사랑에서 주체적 날개를 달지 못하고 스스로를 속박한 채, 한 남자의 그 무엇(혹은 모든 것이라고 쳐두자)을 기다리고 기대한다는 건 코미디라고 생각한다. 철든 이후 나는 이런 식의 사랑이야말로 가장 배제해야할 사랑의 방식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자동차가 문 앞에 와서 멈추는 소리, 자동차 문이 쇠를 내며 닫히는 소리, 문지방을 넘는 그 사람의 발소리가 들리는 순간이 오면 나는 항상 온 신경이 곤두서면서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 사람이 전화로 사나흘 쯤 후에 들르겠다고 알려와 그 사람을 만나기 전에 해야할 일들, 예를 들면 친구들과의 식사마저 짜증스럽기만 했다. 그 사람을 기다리는 일 외는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13쪽)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문지방을 넘는 그 사람의 발소리'와 '친구들과의 식사마저 짜증스러'울 정도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하지만 그걸 넘어서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상대가 유부남이라는 걸 인정하고 만나는 만남이라면 스스로 주체적인 통제력을 발휘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과도한 감정의 낭비보다는 집착도 없이, 무모함도 없이, 욕망의 부피를 스스로 주관하는 자기주도적 사랑 말이다.

  "그 사람이 내게 남겨놓은 정액을 하루라도 더 지니고 있기 위해 다음날까지 샤워를 하지 않,17쪽"을 권리는 에르노에게 있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라 유아적 집착일 뿐이다. 사랑에 대한 지나친 기대치나 미련이 없어서인지는 몰라도(너무 일찍 청춘의 열정이 사라졌나?) 영혼이 피폐해지도록 광적이고, 집착하고, 미련 갖는 사랑은 사양하고 싶다. 더 이상 (상대가 유부남이냐, 아니냐의 잣대 따위는 상관이 없다.) 에르노처럼 상대에게 편지질을 하거나, 처음 보는 망또를 걸치고 현관앞을 서성이는 우스꽝스런 짓거리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 급물살의 소용돌이에 허우적대는 것은 한 번 정도로 족하지 않을까.

  모든 에너지와 감정을 쏟아 부은 채 일상의 질서조차 조절할 수 없는 사랑이야말로 이런 글을 쓰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지극히 개인적 자기합리화에 지나지 않는. (소설이란 상표를 달고 발표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사랑에 빠진 여자의 황폐한 월 보고서 정도로 읽히는 걸 보니, 나도 시니컬을 너무 잦은 친구로 삼는가 보다. 집착하지 말라, 기다리지 말라, 다만 상황을 즐겨라. 그런 사랑의 보고서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모든 사랑은 당당하고, 담백하고, 쿨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덜 부끄럽고, 덜 죄책감에 시달리고, 덜 상처받는다.

  마치 일본 사소설류를 접할 때(정말이지 에쿠니 가오리나 요시모토 바나나나 적응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느끼는 거부감과 비슷한 감정이라고나 할까.  에르노처럼만 사랑하지 않으면 된다, 라는 것을 독자로서 재확인할 뿐이다. 거짓없이 자신이 경험한 것만 쓴다는 것에 매료되어 관심을 가졌지만, 이런 식의 경험에만 천착한다면 정중히 사절이다. 왠지 조금 읽다만 <칼같은 글쓰기>도 흥미를 잃을 것만 같다.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이라고 선언할 때 이런 책이 보편타당성을 갖게 되는 시대, 혹은 이런 책에 대한 독자층이 늘어나는 것에 대한 경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의 선언이 근대문학(거시적, 역사적 사회적 역할로서의 문학)에 대한 종언이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의 문학(미시적, 개별적, 개인적인 의미로서의 문학)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 후자도 문학적 개연성을 충분히 획득했다고 (그런 쪽으로 탁월한 작가들 또한 얼마나 많은가?) 믿고 있지만, 글쎄, <단순한 열정>류에는 내 너그러움이 동하지 않는다.

  마침, 책을 다 읽고나자 약속한 사람들이 왔고, 우리는 일을 했다. 그 두 시간 동안 속이 거북했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상대가, 단지 나이가 조금 많다는 이유로 반말을 천연덕스럽게(친밀한 반말과 계층을 구분지으려는 반말은 너무나 다르다. 도대체 나이로 계층을 구별하려는 이 유교적 관습을 나는 혐오한다.)해댔던 것이다. 이 책이 그 상황에서는 속거북함에 일조하지 않았을까. 그런데도 이 책을 패러디한 그녀의 또 다른 애인인 필립 빌랭이 쓴 <포옹>에도 눈길이 가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라고 쳐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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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0-01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셨군요. 저역시 한 번 읽었을 때에는 비슷한 생각을 했어요. 이렇게 낭비될 열정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러고는 두 번, 세 번 읽었을 때에 느낌이 또 달라졌더랬습니다. 두 번 세 번 읽었을 때에는 좀 험난한 사랑에 빠져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아주 묘하게 동일시를 햇으니까요. 그러나 마지막 문장은, 언제나 빛이 났습니다.
그런데 필립 빌랭의 포옹은, 읽자 마자 책을 집어던지고 싶은 기분이었어요. 상대의 유명세에 기대에 나도 한 번 떠보자, 하는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읽었어요. 이리 된다면, 유명해 지기 위해 유명 남자 배우와 사귀는 무명 여배우와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다크아이즈 2006-10-01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쥬드님 접수했어요.^^* 누구든 경험한 만큼 텍스트에서 본다, 라고나 할까요? 이십대 때 제가 이 책을 읽었다면 아마 님과 똑 같은 생각을 했을 거에요. 제 독해를 의심할 필요도, 쥬드님의 몰입을 방해할 그 어떤 이유도 없겠는걸요. 개운합니다.

크리스탈 2008-06-11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글 잘 읽었습니다!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조지 오웰 지음, 신창용 옮김 / 삼우반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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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별 망설임없이 책을 샀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살다보면 누군가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가 되기도 하고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고급 호텔 사장이 되기도 한다. 가끔 나도 이국적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을 부러워하곤 했다. 그 경험에 진정성만 배어있다면 중산층 평범한 일상이든, 하류층 곤고한 지옥이든 별 상관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다음에는 될 수 있으면 파리의 접시닦이가 한 번 되어봤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이국적 생활, 특히 파리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이 책을 산 첫 번째 이유라면 두 번째는 조지 오웰이 본 파리나 런던의 묘사력에 관한 호기심 때문이었으리라. 단언컨데,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는다. 단, 독자를 생각하지 않는 구성의 허술함 때문에 지루하게 읽히는 부분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그였다면 분량을 딱 반으로 줄이겠다. 르뽀 형식을 띄고 있지만 클라이막스가 없어 그 얘기가 그 얘기 같다.  등장 인물과 분량만 줄여도 흡인력 있는 읽을 거리가 되어 줄 텐데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

  파리나 런던에 가지 않더라도 밑바닥 생활을 쓰고 싶은 사람이라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생생한 묘사 때문에 파리의 X호텔 레스토랑에 가지 않고서도 그 지하 공간의 온갖 악취를 맡은 듯하고, 런던의 부랑아가 되어 보지 않고서도 강변 벤취를 지나는, 노숙자를 깨우는 기차소리를 듣는 듯하다.  보라, 냉소의 경지를 넘어선 이 적나라한 묘사를.

   주방의 불결함은 더 심했다. 프랑스 요리사는 수프에 침을 뱉는다고 하는 말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단지 사실을 진술한 것뿐이다. 물론 요리사 자신이 먹는 수프가 아닌 경우이다. 요리사는 예술가이지만, 그의 예술은 청결에 있지 않다. 그는 예술가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더럽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음식이 세련되게 보이려면 더러운 처리를 해야하기 때문이다. (고기를 만지는 수석 요리사들의) 손가락은 모두 이날 아침에 백 번은 빨았던 그 손가락들이다. 이번엔 웨이터가 또 자신의 손가락을 그 고깃국물에 담근다. (중략) 대체적으로 음식 값을 비싸게 치를수록 그 음식과 함께 먹는 땀과 침도 많아진다. (104 ~105p 부분)

  강변 둑길에선 뭐니뭐니해고 일찌감치 잠드는 게 상책이지. 여덟 시까진 벤치를 차지해야 돼. 벤치가 그리 많지도 않고 또 다 차 있을 때도 가끔 있거든. 그리곤 곧장 잠이 들어야 돼. 열 두시가 넘으면 너무 추워 잠이 잘 안 오고 새벽 네 시만 되면 경찰이 내쫓거든. 근데 잠드는 게 쉽진 않아. 염병할 시가전차는 번번이 머리 옆을 날아다니지. 강 건너 옥상 광고 조명은 켜졌다 꺼졌다 해서 눈이 부셔. 추위도 매섭지. 거기서 자는 이들은 대개 신문지로 몸을 마는데, 그게 그리 도움은 안 돼. 세 시간 잤다면 억세게 운 좋은 거야. (278~279p)

   비루한 인간들을 관찰하는 끈덕진 시선은 동물농장과 1984년 같은 작품의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비천한 계급도 중산층 사람들과 똑같은 욕망을 가지고 똑 같은 사회 구성원이 되기를 갈망하고 있으나 언제나 지나친 자기 연민이 문제이다. 일반 여성은 언감 생심 꿈도 못 꾼다.  매춘부를 보고 입 안에 침이 고이는 부랑자들을 포착해내는 작가의 그 통찰이라니.  

  자기연민은 그의 성격을 이해하는 실마리였다. 한순간도 불운에 대한 생각이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듯했다. 그는 긴 침묵을 깨고는 난데없이 '옷가지를 전당 잡히기 시작하면 지옥이지, 응?"하거나 '그 부랑자 구호소의 홍차는 홍차가 아니라 오줌이야.' 하면서 설명했고, 이것 말고는 이 세상에 생각할 것이 없다는 듯했다. 그리고 그는 더 잘 사는 사람들, 즉 그의 사회적 지평을 넘어서는 부자들은 아니고 일자리가 있는 사람들을 벌레처럼 비천하게 질투했다. 그는 화가가 유명해지기를 갈망하듯 일을 갈망했다.  (중략)  그는 동경과 증오가 뒤섞인 채로 여자들을 바라보았다. 젊고 예쁜 여자들은 그에게 너무나 분에 넘쳐서 생각도 안 했지만, 매춘부를 보면 그의 입안에 침이 고였다. (200 ~201 부분)

    책('소설'이 타당하겠다)을 읽을 때, 설명에 밑줄을 긋지 말고 풍경에 밑줄을 그어라, 고 누군가가 말했다. 아마 장정일의 독서일기에서 읽은 듯한데 그 말은 이 책에서도 유효하다. 설명 이전에 풍경으로 그려지는 그림을 활자에서 맛보는 것이야말로 책 읽기의 묘미이기도 하다. 이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별이 네 개 밖에 안 뜨는 것은 불필요한 분량과 구성의 지리멸렬에서 오는 지겨움 때문이다. 군데 군데 숨은 보석이 있으니 그것을 찾는 재미로 한 번쯤은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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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0-01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날벌레가 추락사 했다고 해서 없는 돈 다 짜내어 산 우유를 버리다니, 그래도 믿을 구석이 있는 궁핍함은 그런가 보다, 생각하기도 했어요.

다크아이즈 2006-10-01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아마 완벽한 경험담이라기보단 취재력이 가미된 소설이기 때문에 그런 허술함(?)이 있었지 않을까요?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은 파리 빠진 우유도 없어서 못 먹잖아요.
 

 

  영화는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다 - 적어도 이 말은 내겐 현재 진행형이고 유효하다.  쓰는 데 관심이 많은 부류이다 보니 영화를 영화로만 이해하지 않고 자꾸 텍스트로 들여다보려는 무례를 범하곤 한다.   갑자기 이왕주의 책(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을 읽다가 이 글이 쓰고 싶어졌다. 시작했으니 말이지 이왕주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오랜 옛날부터 그의 팬이다, 라고 말하기엔 왠지 자신이 없다. 왜냐면 철학교수이자 집필가인 그가 제법 많은 책을 냈을 텐데, 위에 언급한 책 말고는 '쾌락의 옹호'가 가진 전부이니 왕팬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으나 어쨌건 나홀로 팬이다, 라고 자부한다.  

  그가 한 지방지에 간단한 에세이를 연재한 적이 있는데, 그의 문체는 신선하고, 구체적이었다. 무엇보다 누구나 다 겪는 일상에서 아무나 할 수 없는 이야기거리를 이끌어내는 발군의 솜씨가 부러웠다. 그래서 프로필만 보고 냅다 전화를 걸었다. 그의 모든 저서가 갖고 싶었던 것이다.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였으니, 알라딘에서 검색같은 건 생각지도 못했다.  아마는 그의 연구실에서 전화를 받았을 것이다.  내 얼토당토 않은 왕팬 고백에 그가 남아있는 모든 자신의 책을 보내줄 수도 있다고 말했지만, 나는 정중히(실은 부끄럽고, 민망해서) 거절했다.  몇 권의 책을 소개받은 것 같은데, 아마는 자신의 철학 전공과 관계 있었던 것일 게다.  내 호기심을 자극하는 책이었다면 지금도 기억할텐데,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 절실하게 필요한 책은 아니었던가 보다. 

  어쨌든 영화를 철학으로 풀어 쓴 이 책을 읽으면서 유난히 파인딩 포레스터가 기억에 남는다.  프로이트의 이디퍼스 컴플렉스를 엮어 독자를 설득한 그 살뜰함 때문인가?  아니다, 아니다... 그의 글빨로만 설명하기엔 뭔가 부족하고, 맞다. 지금 생각해보니 은둔 작가에 대한 소회 때문이다. 요즘 다시 읽고 있는 '앵무새 죽이기'(화장실 갈 때마다 그 무거운 책만 들고 가게 된다.  그것은  두 가지 의미이다. 심오한 읽을 거리가 아니라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얻을 게 있다는  그 거부할 수 없는 느낌) 와 매치가 됐던 것이다. 

  파인딩 포레스터에서는 의심할 여지없이 j.d 샐린저가 떠오른다.  앵무새죽이기의 하퍼 리나 호밀밭의 파수꾼의 샐린저는 단 한 권의 장편만 히트시키고 은둔형 작가가 되어버렸다.  그들의 속내와 상관없이 나는 그들이 이해된다.  그들이 천재인가, 아닌가는 별 관심이 없다. 설사 천재라 해도 인간적 고뇌에서 완전하게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다음 작품이 생산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운동 선수로 치자면 이년 차의 부진 징크스도 경험할 새 없이 조용히, 스스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굳이 말해야 한다면, 내 생각에 그들은 결코 천재가 아니다.(영화에서는 나레이션 상황으로 볼 때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다만 지극히 인간적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호밀밭의 파수꾼이 왜 문제작, 혹은 스테디 셀러가 되고 있는지 아직도 이해 못하긴 한다.  읽을 때마다 저 멋진 제목 말고는 누군가의 필독서가 되어야 할 자격은 없는데, 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인딩 포레스터는 영화로서는 매력적인 작품에 틀림없다. 긴가 민가 할 정도로 기억이 흐리긴 하지만 이왕주의 또 다른 영화 해석인 '일 포스티노'를 풀이한 것처럼 변증법적 흉내를 내보자면, 자말(정)은 포레스터(반)를 만나 또 다른 자말(합)이 되나니... 끊임없는 정반합의 계단을 오르다 보면, 그 꼭지점에 한 생애가 우뚝 걸려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모든 영화가, 아니 우리의 삶이 이런 공식의 수순을 밟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물론, 삐그덕 거리는 나무 계단을 만날 때가 더 많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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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fdf 2009-05-15 1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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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연찮게 알라딘 서핑을 하다가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서른살의 다이어리.  알리사 발데스 로드리게즈의 데뷔작이란다. 제목만 보면 삼류 대중소설 필이 확 느껴진다.  하지만 별 망설임 없이 보관함에다 담았다. 누군가 옮겨놓은 도입부의  솔직한 화법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장담컨대 작가가 대중소설을 지향하고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문장만은 결코 대중성에 머물러 있지 않을 것 같다. 빨리 읽어 봐야겠다.

  <나는 후진 인생을 살아왔다. 후진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후진 것을 겪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내 직장생활에서는 후지지 않은 것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앞에 말한 모든 후진 것들이 계속 되돌아오는 거다. 나를 후진 년 취급하는 잘 생기고 말 잘 하는 사내새끼들의 형태로 말이다>

  <나는 기자로서는 꽤 유능하지만, 라틴계 여자로서는 별로다. 적어도 그들이 기대하는 라틴계는 아니다. 오늘 오후에 부장이 내 책상으로 와서는 자기 아들의 생일 파티에 쓸 멕시코 튐콩을 어디서 살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내가 설사 멕시코계 미국인이라 해도 그런 이상한 것을 알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프리다 칼로의 송충이 일자눈썹을 볼 때마다 왕창 뽑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사람이다.>

  적어도 도입부부터 이런 솔직하고, 감각적인 문체를 구사할 수 있다면 독자층 확보 때문에 고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 두 번째 인용 단락의 마지막 문장 때문에 거의 눈물이 날 뻔했다. 근래에 프리다 칼로에 대해서 읽고 있었다. 그녀의 천재적 예술성과 치열한 삶을 의심없이 인정하려는데, 뭔가 2% 부족한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그 원인을 찾기는 했다. 남편 디에고 리베라에 대한 융통성 없는 신뢰가 안타깝고 못미더웠던 것이다.  그래도 뭔가 1% 더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한데, 오늘 이 문구를 발견하고 10년 묵은 체증을 확 덜어낼 수 있었다. <프리다 칼로의 송충이 일자눈썹을 볼 때마다 왕창 뽑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사람이다.> - 헉, 나도 이런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문장이 되어 나오지는 않았던 것이다. 적어도 쓰거나 읽는 사람이라면 자신 안에 숨어있는 거칠 것 없는 감각을 잘 벼릴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 백 날 벼리기만 하면 뭐하노?  살이 되고, 뼈가 되도록 완성해나가야지. 

  이제 보니 프리다 칼로의 눈썹을 질투하고 있었는지도?  그녀의 갈매기 눈썹을, 강렬한 검은 눈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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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 13세기에서 21세기까지 그림을 통해 읽는 독서의 역사
슈테판 볼만 지음, 조이한.김정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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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 없었다면 여성들의 삶이 어떠했을까?  인간사 이래로 여성 삶의 진일보를 담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독서의 힘이 아니었을까. 그런 가정을 의심할 수 없게 만드는 책 한 권이 있다.

  독일 작가 슈테판 볼만은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고 선언한다. 작가는 한 때 여성의 독서가 지극히 위태로운 것으로 취급받던 시대가 있었음을 고찰하고 있다. 근대 이전의 유럽 여성들이 처한 상황이 그랬다. 여성들이 세상에 대한 대범한 호기심을 갖는 것이 불온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고급한 사회는 남성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작가는 유럽의 명화 속에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책 읽는 여자들을 불러낸다. 동시대 밖으로 나온 여성은 하녀이거나 안주인이거나 후작부인이거나 아주 가끔은 왕비이기도 하다. 그들은 신분에 관계없이 불온한 여자의 혐의가 짙었다. 그림 속의 여자들은 한결같이 책을 읽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불온한 자유주의자들은 가슴 속에 화약고 한 짐씩을 안고 살았을 것이다. 남성의 거울로 비추어볼 때 그 시대 여성의 독서는 백해무익한 것이었다. 세상을 지배하고 호령하는 것은 남성 고유의 영역인데, 더 많은 것을 여성과 공유하는 것은 피곤한 일에 속했다.

  이것을 눈치 챈 여성들은 그들만의 독서 장소를 물색할 수밖에 없었다. 집주인이 먼 길을 떠나기를 바라고, 읽을 거리만 있다면 전장에 나간 남편이 돌아오지 않아도 좋았다. 그녀가 하녀라면 볕 잘 드는 다락방이 제격일 것이다. 읽다만 중세시대의 로맨스의 뒷장을 위해 그녀는 어서 빨리 주인이 집을 비우고 먼 길을 떠나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주인의 실내화도, 씻어야 할 물주전자도 읽어야 할 책보다 우선일 수는 없었다. 불온한 독서의 자유야말로 달콤한 휴식의 절정이 아니었던가.

  그녀가 만일 높은 신분의 여자였다면 침실이 그녀의 독서실이 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높은 신분과 관계없이 여전히 여성에게 세속적이고도 낭만적인 내용의 책 읽기는 허용되지 않았다. 방해꾼 없는 자신만의 공간에서 근육을 한껏 이완시킨 채 그녀들은 독서가 주는 자유로운 광풍 속으로 빠져들 수 있었다. 공간적 은밀함이야말로 책 읽기의 독자적 상상을 보장해주었던 것이다.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언제나 소수 엘리트들이었다. 엄격하게 말하면, 수천 년 동안 인류는 소수 엘리트 남성들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불과 백여 년 전만 해도 이런 생각은 팽배했다. 종교서적을 제외하고는 여자가 독서를 한다는 것은 '천성'을 거스르는 행위였다. 동서양을 가릴 필요도 없다. 자신만의 규방으로 내몰린 여성들은 책의 향연에 정식으로 초대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초대받지 못했는지 알 겨를도 없이 여성들은 다락으로 침실로 창고로 내몰렸던 것이다. 그곳에서 세상을 읽고, 낭만적 유희를 꿈꿨다. 남성들이 볼 때 그것은 불온한 자각이었고, 음탕한 유희였다. 근본적으로 그들은 그 정보들을 여성들과 공유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여성에게도 새로운 세상에 대한 욕구와 드넓은 우주 질서에 대한 갈증이 있다는 것을 왜 인정하지 않았을까.  억누를수록 여성들은 유쾌한 고립 행위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남성이 전하는 말씀이 아니라, 독서야말로 세상과 소통하는 멋진 통풍구라는 것을 안 이상 물러설 수는 없지 않은가. 숨어서 책 읽는 여자들이야 말로 페미니스트의 원조가 아니었을까.

  이제 여성에게 독서는 더 이상 위험한 것이 아닌 시대가 되었다. 오히려 책 권하는 사회가 되었다. 책 때문에 불온해진만큼이나 세상을 보는 눈이 커진다면 그 보다 나은 독서의 진가가 어디 있겠는가. 덜 불온한 여성일수록 더 상처받는다. 상처 많은 사람들이 이 한 권의 책에서 힘을 얻는다면 이 또한 독서의 효용이 아니겠는가. 과감하고 은밀한 독서일수록 그 파장은 크다.  이 환한 봄날 과도한 휴머니즘이나, 교훈서, 미담 수준에서 벗어난 독서광이 되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상처입은 영혼들이여, 주저없이 유쾌한 고립의 여정을 떠나자. 책 읽는 여성은 불온하니까. 그리하여 종내엔 매혹에 이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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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8-28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수 앨리트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 그래서 욕은 대부분 여성비하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도 많다지요. 80%가 그렇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요즈음 유행하는 **녀도 그렇지 않나요? 그런 의미에서는 신조어도 일종의 욕의 매개체인지도 몰라요.
책 권하는 사회, 라지만 실제 제가 읽는 책들을 본 몇몇 남자들은 저를 약간 무서운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럴 때면 친절한 금자씨처럼 웃으며 말하고 싶기도 했어요. '나,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에요.'후훗.

다크아이즈 2006-08-29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섭게' 본 남자들은 Jude님을 잘못 본 것일테고, 제 생각에는 많이 읽을수록 '불온'해지는 것은 맞다고 봐요. 네, 당연히 불온해져야죠. <친절한 금자씨처럼 웃으며> 호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