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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열정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6월
평점 :
절판
외출을 할 때면 습관적으로 책을 챙긴다. 혹, 약속 시간보다 이르게 도착했거나, 늦는 상대를 기다려야 할 상황이면 책보다 나은 친구는 없다. <단순한 열정>, (문학동네, 2001). 우선 이 책은 휴대용으로 안성마춤이다. 중편 정도 되는 분량이니, 잠깐 시간을 달래기에는 그만이다. 약속 시간에 도착해보니 삼십분이 남았는데 내심 즐거웠다. 언제부터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 미뤄온 책을 집어든다. 삼십분만 할애하면 되니까.
이 책에서 말하는 에르노식 감정을 나는 20대 이후로는 잊어버렸다.(잃어버렸다, 가 맞을지도.) 따라서 그녀의 '단순한 열정'이 결코 사랑 이야기로 다가오지 않는다. 집착이자, 욕망이요, 무모함이자, 감정의 낭비로 비칠 뿐이다. 남녀간의 사랑에서 주체적 날개를 달지 못하고 스스로를 속박한 채, 한 남자의 그 무엇(혹은 모든 것이라고 쳐두자)을 기다리고 기대한다는 건 코미디라고 생각한다. 철든 이후 나는 이런 식의 사랑이야말로 가장 배제해야할 사랑의 방식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자동차가 문 앞에 와서 멈추는 소리, 자동차 문이 쇠를 내며 닫히는 소리, 문지방을 넘는 그 사람의 발소리가 들리는 순간이 오면 나는 항상 온 신경이 곤두서면서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 사람이 전화로 사나흘 쯤 후에 들르겠다고 알려와 그 사람을 만나기 전에 해야할 일들, 예를 들면 친구들과의 식사마저 짜증스럽기만 했다. 그 사람을 기다리는 일 외는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13쪽)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문지방을 넘는 그 사람의 발소리'와 '친구들과의 식사마저 짜증스러'울 정도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하지만 그걸 넘어서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상대가 유부남이라는 걸 인정하고 만나는 만남이라면 스스로 주체적인 통제력을 발휘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과도한 감정의 낭비보다는 집착도 없이, 무모함도 없이, 욕망의 부피를 스스로 주관하는 자기주도적 사랑 말이다.
"그 사람이 내게 남겨놓은 정액을 하루라도 더 지니고 있기 위해 다음날까지 샤워를 하지 않,17쪽"을 권리는 에르노에게 있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라 유아적 집착일 뿐이다. 사랑에 대한 지나친 기대치나 미련이 없어서인지는 몰라도(너무 일찍 청춘의 열정이 사라졌나?) 영혼이 피폐해지도록 광적이고, 집착하고, 미련 갖는 사랑은 사양하고 싶다. 더 이상 (상대가 유부남이냐, 아니냐의 잣대 따위는 상관이 없다.) 에르노처럼 상대에게 편지질을 하거나, 처음 보는 망또를 걸치고 현관앞을 서성이는 우스꽝스런 짓거리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 급물살의 소용돌이에 허우적대는 것은 한 번 정도로 족하지 않을까.
모든 에너지와 감정을 쏟아 부은 채 일상의 질서조차 조절할 수 없는 사랑이야말로 이런 글을 쓰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지극히 개인적 자기합리화에 지나지 않는. (소설이란 상표를 달고 발표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사랑에 빠진 여자의 황폐한 월 보고서 정도로 읽히는 걸 보니, 나도 시니컬을 너무 잦은 친구로 삼는가 보다. 집착하지 말라, 기다리지 말라, 다만 상황을 즐겨라. 그런 사랑의 보고서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모든 사랑은 당당하고, 담백하고, 쿨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덜 부끄럽고, 덜 죄책감에 시달리고, 덜 상처받는다.
마치 일본 사소설류를 접할 때(정말이지 에쿠니 가오리나 요시모토 바나나나 적응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느끼는 거부감과 비슷한 감정이라고나 할까. 에르노처럼만 사랑하지 않으면 된다, 라는 것을 독자로서 재확인할 뿐이다. 거짓없이 자신이 경험한 것만 쓴다는 것에 매료되어 관심을 가졌지만, 이런 식의 경험에만 천착한다면 정중히 사절이다. 왠지 조금 읽다만 <칼같은 글쓰기>도 흥미를 잃을 것만 같다.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이라고 선언할 때 이런 책이 보편타당성을 갖게 되는 시대, 혹은 이런 책에 대한 독자층이 늘어나는 것에 대한 경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의 선언이 근대문학(거시적, 역사적 사회적 역할로서의 문학)에 대한 종언이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의 문학(미시적, 개별적, 개인적인 의미로서의 문학)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 후자도 문학적 개연성을 충분히 획득했다고 (그런 쪽으로 탁월한 작가들 또한 얼마나 많은가?) 믿고 있지만, 글쎄, <단순한 열정>류에는 내 너그러움이 동하지 않는다.
마침, 책을 다 읽고나자 약속한 사람들이 왔고, 우리는 일을 했다. 그 두 시간 동안 속이 거북했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상대가, 단지 나이가 조금 많다는 이유로 반말을 천연덕스럽게(친밀한 반말과 계층을 구분지으려는 반말은 너무나 다르다. 도대체 나이로 계층을 구별하려는 이 유교적 관습을 나는 혐오한다.)해댔던 것이다. 이 책이 그 상황에서는 속거북함에 일조하지 않았을까. 그런데도 이 책을 패러디한 그녀의 또 다른 애인인 필립 빌랭이 쓴 <포옹>에도 눈길이 가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라고 쳐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