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나리가 피었다.  산수유 열매도 아직 지지 않았다.

일주일 전 쯤 아파트 꽃밭에 오질없이(?) 핀 개나리를 보고 여고시절 생각이 났다.

그 때도 개나리는 계절 감각이 없었다.  고1이던가 기말고사 수학 시험을 망치고

(한 35점 쯤,  그 때 평균이 40점 쯤 되었을 거다.)

망연자실 화단을 쳐다보는데 지랄할 개나리가 화들짝 피어있었던 것이었던 것이다!!  12월 한 겨울이었다.

그 때 알았다.  계절에 상관없이 개나리는 날씨와 온도만 맞으면 마구마구 피어댄다는 것을.

내 마음도 몰라주고, 그 겨울 샛노랗게 발랄하던 개나리만 보면 그 해 성적표 수학과목  평어 '양'이 자꾸 떠오른다. (내 생애에 '양'이와 친구가 된 적은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100미터를 22초에 주파해주시는 놀라운 '나무뎌'과이지만 체육과목조차 '양'이와 친구한 적은 없었다. 흑흑...)

그 때 결심했다. 개나리 같은 줏대없는 꽃일랑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아, 아직도 유효한 결심이다.)

 

 

봄이면 개나리 못지않게 일찍 샛노랗게 피는 꽃이 산수유다.  봄이면 이곳 주변 산은 온통 산수유 꽃으로 샛노랗다. (걔들은 꼭 이른 봄에만 피어주는 센스를 잊지 않는다.  그 줏대, 고마우셔라!)  늦가을이면 타원형의 붉은 열매를 맺는데 그것이 아직도 아파트 화단에 매달려있다. 

다른 곳에는 폭설 난무하다는데, 좀 전 꽃밭에 내려가 보았더니 개나리와 산수유 열매 모두 무사하시다.  오늘 제법 매서운 날인데도.... 며칠 추위가 더하면 개나리 얼어 붙으려나?   개날아, 네 오질없음을 이 한 장의 사진으로 용서하련다!

산수유 열매에 내려앉는 눈꽃도 볼만한 터인데 이곳에서는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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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별짓기 -상 -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21세기총서 3
피에르 부르디외 지음, 최종철 옮김 / 새물결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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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술문제집 제시문 중 하나로 이 책의 일부가 인용된 걸 보았다.  이 책을 제대로 읽은 학생들이 있을까 싶다. 아니, 이 책을 제대로 읽은 논술 선생들이 있을까 싶다. 설사 누군가 필독서 목록에 올려놓은 걸 보고 읽기를 시도했더라도 중도 포기하지 않았을까 싶다.  학생들이 이해하기엔 너무 난해하고, 선생들이 읽기엔 어처구니 없이 생뚱맞다.  이유?  오로지 오역 또는 무성의한 번역에 있다고 본다.

 

  일개 평범한 독자에 지나지 않아서 불어원본이나 영역본을 들이밀며 논리정연하게 질의할 수 없는 게 안타깝지만 적어도 고등학생용 논술 제시문으로 활용할 정도의 번역서는 아니라고 본다.  따라서 내 힘없는 분노는 번역자를 겨냥한 것 못지않게, 제시문으로 활용한 문제 제출자를 겨냥한 것이기도 하다.  전공자나 인문학자를 위한 번역이라면 그들은 적어도 원본 또는 영역본 정도는 끼고 텍스트를 대할 것이기에 오역이나 비문이 나와도 그러려니 할 것이다. 우리의 번역 풍토를 잘 아는 고급 독자들이 번역자들에게 거는 기대가 때로는 포기 상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문화의 다양성과 거기서 야기되는 제 문제점에 관한  논술문 쓰기인데  <문명의 충돌>, <문화의 패턴>등의 책을 인용한 다른 제시문은 고등학생이 독해하는데 그리 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였다. 한데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를 세심하게 보살피지 않고 제시문으로 활용한 것은 넌센스다. 꼭 따와야 했다면 그래도 덜 오역되거나 비문이 덜한 부분을 택해(그런 부분이 있을까?)  학생들이 명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니겠나, 이 말이다.

 

  개인의 문화적 취향과 사회적 위치(계급)와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한 부분을 인용한 것 같은데, 문자 자체에 대한 번역에 내몰린 탓에 깔끔하지 않다. 이런 부주의한 제시문을 고등학생들이 단 몇 분만에 읽고 이해하고, 자신의 견해까지 선명하게(!) 쓰기를 바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번역자여, 이해하시라. 정말이지 이 글은 제시문으로 활용한 문제 제출자에 대한 분노가 더 크다!) 이어령이 말했던가? 각 대학에서 뿌린 모의 논술 문제를 보고 글쓰기 전문가인 자신도 손대지  못할 정도였다고.

 

  실제로 현실이나 허구와 관계를 맺는 다양한 방식, 그리고 허구와 이들 허구가 빚어내는 현실을 믿게 되는 다양한 방식은 각 방식의 전제조건을 이루는 경제적- 사회적 조건을 매개로 사회 공간에서 각 요소들이 차지하는 여러 위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따라서 각 계급과 계급분파마다 특이하게 나타나는 성향의 체계(아비투스)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취향은 구분하고, 분류하는 자를 분류한다. (중략, 페이지 생략)

  양과 질, 화려하게 꾸민 식사와 격의없는 식사, 실내용물과 형식간의 대립은 필수품에 대한 기호, 즉 가장 '영양가가 많으며' 가장 경제적인(즉 값이 싼) 식품을 선호하기 마련인 기호와 자유소비재 또는 사치품에 대한 기호 즉 매너(요리를 내놓는 방식, 서비스 방식, 식사법 등)를 강조하고 기능을 부정하고 양식화된 형식을 선화하는 취향 간의 대립과 상응하며, 생활필수품으로부터의 다양한 거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페이지 생략)

 

  두 어 단락만 옮겨보았다.  '취향은 구분하고, 분류하는 자를 분류한다'니? 원문없인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 ... 기능을 부정하고 양식화된 형식을 선호하는 취향간의 대립과 상응하며, 생필품으로부터의 다양한 거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니!  이런 불분명한 어휘 구조를 어떻게 순수한 학생들더러 이해하라는 것인지?  물론, 조금 깊이 생각하면 단락 간의 의미 연결을 통해 주제문을 유추해낼 수는 있다.  하지만 고문 수준의 제시문을 통해 학생들의 인내심을 단련하는 것이 논술 시험이 아니라면 이런 것은 마땅히 피해야 하지 않을까.

 

  번역의 질에 상관없이 저자의 유명세만 보고 제시문으로 따오는 일, 생각만 해도 화가 치민다. 이것이 일개 연습 문제니까 덜 하지만, 실제 시험 현장에서도 없다고는 단정짓지 못할 것이다.  불분명한 제시문(오역 또는 무성의한 번역으로 인한)을 접하고서도 자신의 독해력을 탓하지, 출제자의 무성의를 탓하지는 않을 순진한 학생들 보면 괜히 내가 미안해진다.

 

  제발 논술 출제자 여러분,  번역서에서 제시문 활용할 때 선명하고 오해없는 텍스트를 활용해주소서. 그리고 자신들 교양에 잣대를 맞추지 말고 평균적 고등학생 교양을 갖춘 학생들이 해독할 수 있는 텍스트를 선정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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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몹시 춥다.  동해안 쪽으로는 폭설까지 겹쳐 이중고를 겪고 있다 한다.   이곳은 눈은 오지 않았지만 찬바람까지 비껴갈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누군가에게 자료를 건네받기로 되어 있어 외출을 했다. 추위를 심하기 타기 때문에 중무장을 했다. 토끼털 외투에 캐시미어 목도리까지 휘감았는데도 등짝이 시렸다.  약속인을 위해 제과점에 들러 맛깔스런 만쥬를 포장하고, 마트에 들러 비타민 음료를 챙길 때까지는 룰루랄라였다. 

 주차 공간이 마땅찮아 대로변 갓길과 맛닿은 차선에 비스듬히 차를 세웠다. 그야말로 자료만 건네받으면 되니까 잠깐 동안 실례한들 어쩌랴 싶었다.  시동도 일부러 끄지 않았다. 차가워진 차를 다시 데우는(?) 게 끔찍했던 것이다. 히터를 약하게 틀어둔 채 비상깜박이를 켜두고 차에서 내렸다. 숄더백도 차 안에 그대로 두었다.  평소 내 가방은 보통 여성들 것보다 좀 더 무거워 쇼핑백과 더불어 들기엔 무리가 있겠다 싶었다. 

  자료를 건네받고 돌아서 나오는 시간, 십 여분도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추위에 덜덜 떨면서 차 문을 열었다. 손잡이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뿔사!  내릴 때 차문을 잠가버렸던 것이다. 보조 열쇠조차 가방 안, 지갑에 있었으므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차선에 비스듬히 걸친 채, 눈치없이 비상깜박이만 똑딱거리는 고물차가 그토록 한심하게 보인 적은 일찍이 없었다. 

  우리집 아저씨에게 sos를 청할 수밖에 없었다.  내 보조열쇠를 열쇠꾸러미에 달고 다니기 때문이다.

  " (동정심 유발하는 목소리로) 내, 일  또 저질렀다.  시동 켜놓고 문 잠갔뿟다! "

  "벌써 몇 번째고? 어디고?

  "## 초등학교 앞인데, 빨리 와서 열어줘."

  "내, 열 한시부터 회의라서 못 간다."

  시계를 보니 그 때가 10시 25분 경이었다. 바람같이 달려오면 십 오분 정도 걸릴 거리였다.  저렇게 말해도 달려올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느긋이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근처 편의점에 들렀다.

  "진짜 춥네, 따뜻한 캔 커피 하나..."

  이렇게 말하려다 말고 얼른 말을 집어삼켰다. 수중에 지갑도 없는데 웬 캔커피?  아침부터 남의 사정 줄줄이 들어주고 물건부터 냅다 줄 사업주가 어디있겠나 싶어 그냥 밖으로 나왔다.  편의점 앞 야외용 플라스틱 벤치에 앉아 기다리니 우리집 아저씨가 도착했다. 열쇠꾸러미를 건네는  눈길이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본 터키산 칼날보다 매섭다. 우쒸, 그래서 어쩌라는 건데? 겁먹을 내가 아니다. 누군 실수하고 싶어서 하냐고?  시계를 보니 열시 45분. 빛의 속도로 달려가면 회의 시간에 늦지는 않을 것 같았다. 따뜻한 커피라도 건네주고 싶었는데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저만치 달려가버린다.

  차 열쇠와 관련된 내 건망증은 추위와 관계가 깊다. 이를테면 상습범이다.  추위를 피해야지, 하는 단순한 생각에 시동을 켜둔채 내린 뒤, 수동으로 차문을 잠가버린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다.  한 번은 내리막길에 주차해둔 차를 시동도 켜지 않은 채 핸드브레이크를 내린 채 운전대를 돌리다 구석에 처박을 뻔도 했다.  (이 때도 겨울이었고 너무 추운 나머지 시동켜는 걸 깜박하고 그딴 무모한 짓을 했다!) 그 때마다 우리집 아저씨를 불러내야했다. 남들은 보험회사에 전화한다지만 번거로운 절차도 싫고 해결 속도도 우리집 아저씨보다 빠를 것 같지 않아 그렇게 해본 적은 없다.  싸한 눈길 한 번만 참으면 내가 편한데 싶어 그간 애꿎은 우리집 아저씨를 괴롭혔다. 

  앞으론 절대! 라고 외치지만 이 몹쓸 병,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아이고, 내 팔자야!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은 나이탓이려니 한다.  비슷한 처지의 다른이들은  출산 탓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차마 인정하지 못하겠다. 안 그래도 출산율 저하 때문에 심각한 이 땅,  아리따운 젊은 여성들 자극하는 그런 망발을 할 수는 없고... 젊은 날엔 건망증 때문에 고생한 적은 없었으니 나이탓이 아닐까 짐작해보는 것이다.

  오, 신이시여! 이 겨울 가기 전 다시는 이 병 도지지 않게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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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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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도 출근 시간이 있다. 월급을 받는 직장이 있는 것도,  그렇다고 내세울만한 직업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스스로가 정한 출근 시간을 지키려고 애쓴다. 남편과 아이들이 각각 직장과 학교로 떠난 집안을 후다닥 정리하면 아홉시. 보무도 당당히 컴퓨터가 있는 나만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우리집 방 중 가장 큰 면적을 자랑한다.) 말하자면 나만의 출근인 셈이다.

  근무처(?)에서 내가 해야할 가장 중요한 업무는 당연 글쓰기이다. 대가들(박완서나 김원일이나 오르한 파묵 등)처럼 하루에 원고지 열 장 내지 스무 장씩 정해놓고 써야지, 하고 다짐을 한 적도 있다. 그렇게 하다보면 직장인의 업무처럼 글쓰기도 자연스레 내 생활의 중요한 부분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누가 강요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하는 일이라 의지대로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모니터 앞에만 앉으면 미숙한 업무처리로 질책을 앞둔 직장인처럼 안절부절못한다.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지끈거린다. 대가들을 벤치마킹하겠다던 불타던 의지는 온데간데 없다. 고백컨대, 정해진 원고 매수를 채우겠다는 그 약속은 지키는 날보다 지키지 못하는 날이 더 많다. 책상에 앉으면 곧바로 글쓰기 작업 파일을 클릭해야 하는 것이 순서일텐데 박약한 의지력은 언제나 인터넷에 먼저 접속하고야 한다. 이런저런 세상사, 간접 경험이라도 해야 쓸거리가 주어진다는 변명을 준비한 채...  움직이는 걸 지독히도 싫어하는 나에게 '간접경험'이라는 핑계는 더할나위 없는 방어벽이 되어준다.

  그러니 자연스레 의문 하나가 생긴다. 체험과 쓰는 것 사이에는 도대체 어떤 함수관계가 있나?  가만 생각하면 요즘 작가들은 90년대 이전의 작가들에 비해 체험의 리얼리티가  - 비록 시대적, 상황적 요청이 전제되긴 했지만 -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바꾸어 말하면 체험의 현장성이 문학적 소재의 우위를 점하던 시대가 끝났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 세기가 바뀐 만큼 다양한 문학적 시선들이 창작의 여러 경계를 무너뜨리기에 이르렀다.

  일례로 독자들에게 여전히 어필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인 김연수에 대해서 들어보자.  <나는 유령입니다>라는 작품집에서 일관되게 작가가 주장하는 것은 '체험의 직접성'이 아니라 '자료의 재구성력' 내지는 '자료의 작가적 해석'이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실크로드든 히말라야든 꼭 그 현장성을 획득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각종 텍스트나 미디어 등 일련의 정보가 제공해주는 간접 자료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작품집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중요한 것은 체험이 아니라 글쓰기 자체의 순도純度이다.

  이러한 주장을 증거라도 하듯 한 문학지와의 인터뷰에서 작가는 스스로 '대필작가'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작가가 하고 싶은 모든 말은 이미 과거에 있었거나 현재에 있는 것들이다. 작가란 주어진 자료를 자기 식으로 재구성하는 순수한 욕망의 대필자일 뿐이다. 결국 체험의 직접성이 문제가 아니라 자료의 해석을 밑바탕한 나름의 세계관이야말로 한 작가의 존재감을 말해준다. 작가의 직접 체험이 문학적 도구로 활용된다해도 그 자체가 소설이나 문학이 될 수는 없다. 거짓의 옷을 입은 진실, 즉 픽션이라는 가공을 거치지 않고서야 차라리 르포나, 수기를 쓰는 것이 낫지 않을까.

  굳이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의 진본은 언제나 동굴 밖에 있고, 우리는 그 안에서 그림자를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하루에도 몇 번씩 깨닫는다. 따라서 진본을 찾는 끝없는 여정이 글쓰기의 숙명이라면 그것이 직접 체험이든, 간접 체험이든 그리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소설 쓰기의 돌이킬 수 없는  매력 중 하나는 허구의 합법적 담보에 있다. 소설 쓰기의 고통은 체험의 현장성 유무가 아니라 자신의 세계관을 드러내기 위해 어떤 방식을 택할 것인가의 고민에 지나지 않는다. 숱하게 제공되는 날것의 자료들로 진실한 거짓을 재구성하는 것. 그것이 살아있는 창작의 과정이라고 김연수는(아니,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경험의 깊이와 폭이 다양할수록 좋은 글이 나오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이제 그것이 직접 체험인지 간접 체험인지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문제는 게으름 때문에 그 중 어느 것도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부끄러움이 있을 뿐.

  글이 써지지 않아 원고지를 붙잡고 울 수밖에 없는 것은 체험의 종류나 순도 때문이 아니라, 게으름 탓이라는 게 자명해지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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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12-17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저자 서명본 책 읽다가 문장이 지겨워서 중단했거든요.
예전에는 이 작가의 옛 글 산책 같은 걸 참 좋아했는데..
이 책은 진도 안나가 죽을뻔했어요. 결국 지금도 손이 선뜻 안가는 책인데
대단하세요!

다크아이즈 2006-12-17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뿌넝숴, 다시 한달을 가고~ 등은 문학적 성과와 상관없이 지겹긴해요. 잘 써야겠다는 강박 때문인지, 부러 순우리말의 향연을 펼친 노고가 그 지겨움에 일조한듯도 해요.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단독자로 살아가기를 꿈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종일 사람과 부대낀 자든, 혼자만의 무료한 시간에 진저리를 친 자든 실상은 혼자일 때 가장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단절된 공간 속 자신만의 오롯한 섬 하나를 갖게 되었을 때의 그 희열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다수의 무관심이라는 횡포 속에 방치된 자아를 설명한 것이 '군중 속의 고독'이라면 반대로 대중의 관심 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발적 수인(囚人) 증세를 나름대로 '군중으로부터의 탈출'이라 명명해본다. 피치 못할 무리 속에 섞인 단독자의 자아는 끊임없이 덜컹거리고 욱신거린다.

  미술관을 자주 갈 일은 없지만 아트 선재미술관에서 본 그림 한 덤은 이러한 인간 존재의 의문과 갈등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독일작가 요르그 임멘도르프의 '친구들과의 저녁식사' (Dinner with friends)가 그것이다. 여러 전시품 속에서 스쳐지나가듯 본 그림일뿐인데도 그 첫인상은 너무나 강렬했다. 한 편의 그림이 이토록 집요하고 은유적으로 인간의 부조리를 말할 수 있다니!

  어두운 초록빛 배경 속, 식탁을 가운데 두고 친구들이 모였다. 협잡꾼, 정치가, 사업가 등의 타이틀을 단 친구들 맨 끝에 화가의 자화상도 등장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모임인지라 면면이 화려하기 그지없다. 한데 왠지 그들의 만찬자리가 그리 편하지만은 않아 보인다. 불편한 시선을 감추느라 한 사람은 테이블 아래를 주시하고, 어떤이는 애꿎은 물컵만 만지작거리고, 또 다른이는 무의식적으로 구두코를 또각거린다. 혹, 동상이몽이란 동양의 사자성어를 배운 임멘도르프가 회화적 기법으로 그것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도 모두들 딴전이다.

  화가는 희망을 얘기하고 싶었을까? 아니, 희망 없는 현대인의 '낭만적 관계' 부재를 초록빛 밀실로 표현했는지도 모른다. 정치인 친구의 속절없는 야심을 보면서 영원한 라이벌인 사업가 친구는 속이 뒤틀린다. 특유의 허풍과 위선으로 살아온 고급 룸펜은 이러한 정치인 친구에게 맞장구를 친다. 친구들과의 저녁 식탁은 하염없이 겉돌 뿐이다. 맨끝에 앉아있던 화가는 무심한 시선으로 이 상황을 스케치한다.

  이 만찬의 처음과 끝을 이미 알고 있는 화가는 열 손가락에 낀 형형색색의 반지와 우스꽝스런 귀걸이로 퍼포먼스를 벌인다. 이 피로한 만찬에 초대된 인간 군상에 대한 비틀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친구이염서도 겉도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보니 정작 포크와 나이프는 어디에 있는지, 포도주 맛은 신지 쓴지조차 가늠할 길이 없다. 모두들 눈동자 굴리기에 바쁘자. 그림 속에서 화가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관계는 피로하다고. 손가락에 낀 반지보다도 오늘 밤, 내게 당신들의 존재는 성가실 뿐이라고. 그걸 알면서도 우리는 친구들과의 저녁 식사에 동참해야 한다. 그것이 부조리하기만 한 인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발적이지 않은 모든 만남은 부지불식 간에 견고한 성을 쌓는다. 누구나 원하든, 그렇지 않든 사회적 관계 속에서는 저녁 식사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임멘도르프의 그림은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 피로에 대한 메시지로 읽힌다.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인 관계가 부담스럽게 느껴진다면 그 약속을 취소할 수 있는 배짱조차 필요하다고 임멘도르프는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원하지 않는 친구와의 저녁 식사 테이블에 앉아 있는 그대가 보인다. 그대는 무료한 나머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거나 진주귀걸이가 달린 귓밥을 문질러댈지도 모른다. 부러 반지 열 개를  낀 채 위악을 떠는 임멘도르프를 닮을 수 없을 방[는 차라리 저녁 식사 약속을 차지 않는 용기도 필요하리라. 거짓 만남은 죄악이다, 라고 이미 화가는 에둘러 가르쳐주고 있지 않은가.

  피곤한 사람살이에 지친 날, 그런 날이면 임멘도르프를 만나러 한적한 미술관 모퉁이를 휘돌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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