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에 영화다운 영화를 본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그럼, 영화답지 않은 영화도 있었던가? 여기서 말하는 '영화다운 영화'는 극장용 영화를 말한다. 아주 어릴 때, 시골 강변에 설치된 가설극장에서 본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라는 영화가 실은 내가 본 최초의 영화이다. 가수 이용복에 관한 영화 같았는데, 언덕에서 굴러떨어져 실명하는 장면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하도 어릴 적 얘기라  그것이 진짜 이용복에 관한 것인지조차 자신이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가설극장에 들어갈 용돈조차 없어(보리쌀 한줌만 퍼갔어도 됐는데, 그나마 융통성이 없었다. 마을 최고의 부잣집 딸이!) 친구 몇몇과 몰래 천막을 들추고 잠입했다는 사실이다. 

  극장도 아니고, 제 돈 주고 본 것도 아니니 가설극장 영화를 제외하고 나면, 내가 본 최초의 영화는 단연 중학교 1학년 때 본 '데미트리아스'이다. 그 당시 기말고사가 끝나면 '문화교실'이라고 해서 학교에서 단체로 영화관에 갔었는데 그 때 본 영화가 내 생애 첫 극장용 영화가 되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는 능력은 좀 처지는 편이다. 제목도 아삼삼한 그 영화는 예수의 피묻은 '성의'에 관한 진실찾기(?) 비슷한 내용인 것 같았는데 내용과는 무관하게 어린 나는 심히 충격을 받았다. 저토록 드넓은 극장에서 이토록  큰 스크린에 담긴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게 마냥 신기하고도 경이로웠던 것이다. 

   한데, 그 신기와 경이가 식상해질 즈음 새로운 오감이 내 전신을 후둘거리게 했으니 그 영화가 중 3때 본 '야시'(밤시장)였다. 범생이다 못해 쑥맥인 우리 일당이 '문화교실'로 지정된 것도 아닌 성인영화 보기에 도전해서 성공한 것이었다. 미도극장, 그 극장은 시내를 향해 우리학교에서 일이십분 걸어가면 있었다. 재개봉관인데다,  두 개의 영화를 연이어 보여주는 동시상영관이었다. ('동시상영관' 세대인 나는 이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데 딸내미 왈 '어떻게 동시에 영화 두 편을 볼 수 있느냐' 의문을 제기해 한참 웃은 적이 있다.) 삼류극장에서 학생신분으로 성인 영화보기는 식은죽먹기만큼 쉬웠다. 그들도 먹고 살아야 했으니까. 삼류극장의 지지부진한 매출과 지리멸렬한 시간을 보상해주는 유일한 고객은 호기심 어린 학생들이었다. 

   갓 스물이 된 장미희와 중년으로 보이는 윤일봉이 파트너로 나왔는데, 그 어리고, 어어쁜 처자가 담배는 얼마나 잘 피우며 술은 또 어찌나 대담하게 퍼마시는지. 어린 마음에 스무살만 되면 여자는 대학교를 중퇴해도 되고, 원하기만 하면 담배나 술을 맘대로 피우고 마셔도 되는줄 알았다. 그 무엇보다 내 오감을 들썩이게 한 것이 '나를 가지세요'라는 장미희의 도발적 대사였다. (혹 고은정이 장미희를 대신해주었더라도,  여전히 내겐 장미희의 울림으로 남아있다는 게 중요하다.) 흰 잠자리 잠옷을 입은 장미희는 자주 흐트러진 자세로 윤일봉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를 가지세요.' 

  하지만 절대지존 점잖은 신사였던 윤일봉은 결코 장미희를 가지지  않았다.  흐트러진 잠옷 매무새를 돌려놓으며 이러면 안 돼, 넌 아직 어려. 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그 상황을 지켜보면서 나는 윤일봉이 멋있다, 라거나, 장미희가 앙큼하다던가,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로지 '나를 가지세요'라고 애원하는, 장미희의 입에서 나오는 그 여섯음절의 선서가 경이롭고도  충격적으로 다가올 뿐이었다. 세상에, 나를 가지라고, 애원하는 여자도 있구나... 요즘 잣대로 보면 신파도 그런 신파가 없겠지만  당시 영화 시나리오치고는  제법 고심한 대사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요즘에야 '나를 가지'라고 애원하는 대사가 필요한 영화는 절대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 대사가 그토록 내게 강인하게 아로새겨진 것은 포르노그래피, 혹은 섹슈얼리티에 관한 내 생애 최초의 선명하고도 감각적인 체험이 바로 그 여섯음절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 영화를 본 뒤로 나는 두려웠다.  내가 스물이 되었을 때 장미희처럼 '나를 가지세요'라고 말하는 상황들을 만들게 되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  불행하게도(?) 인생 전반에 걸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여전히 잘 지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런 결론에 이르자 괜히 장미희에게 속은 기분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생각한 것인데,  그런 찜찜한 기분은 즉각 보상받아야 한다.  곤히 자고 있는 우리집 아저씨를 깨워 말 건네봐야겠다. - 아저씨, 나를 가지세요.   

 

 * *    나를 가지세요, 가 환청처럼 따라다녔으므로 

         동시상영했던 다음 영화는 제목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 너를 가지마>였던가,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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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 2007-06-18 0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 참 재미있게 보았읍니다^^*
장미희였던가요? 윤정희가 아니구요?!
어쨌든 잠시 귀하의 글에 이 새벽에 잠시 즐거웠읍니다.
 

  행사가 있어서 조금 늦게 들어왔다.  픽업하러 온 우리집 아저씨, 운동하고 와서 피곤한 나머지 한숨 자느라 밥도 못 먹고 있었단다. 국밥을 퍼주고 있는데 손전화기가 울린다. 얼마전 알게 된 J선생이다. 영어책을 선물하겠단다. 방금 산 따끈따끈한 책을 들고 오는 중이란다. 그녀와 나는 한 동네에 산다. 어느 소박한 강의에서 나와 J선생은 강사와 수강생으로 만났다.  한 동네에 사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다며, 그녀가 전화를 걸어와 친분을 쌓게 되었다.  몇 번의 통화와 또 몇 번의 만남이 있었는데 그 때마다 참 열심히 사는 분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알고 보니 내 딸아이가 졸업한 학교의 선생님이었는데, 딸아이는 아, 그 선생님, 무척 성실한 분이셨어, 라고 기억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대단히 열정적인 사람이다. 우선 공부 욕심이 많다. 욕심이 많다 못해 공부가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단다. 해서 근무하랴, 아이 키우랴, 집안 일 하랴, 무척 바빴을텐데도 끝내 원하던 공부를 마치고야 말았단다.  아니, '공부를 마쳤다'고  표현하는 것은 그녀에 대한 모욕이다.  박사 학위까지 받았지만 그녀는 아직도 더할 공부가 남았다고, 이것저것 재도약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공부에 대해서는 재미있다거나, 지긋지긋하다거나 따위의 별 정서적 반응이 없다.  그저 학생이니 공부하고, 졸업하니 고것 참 시원하구나, 정도의 싱거운 감응이 있을 뿐이다.  다만,  대학 이학년이 되었을 때 공부가 하기 싫은 적은 있었다.  불어불문학이 전공이었는데, 그 멋진 학문이 나로서는 도무지 적성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어려웠다는 게 솔직한 고백이다. 교양과목 위주였던 일학년 때는 성적이 매우 우수했다. 왜냐면 교양과목 대부분은 시험지를 우리말로 채우는 것이었다.  이데올로기 비판이니, 고대사나, 철학개론이니, 불문학개론이니 등은 재미가 있었기 때문에 강의 열심히 듣고, 교재 몇 번만 더 읽으면 시험지를 메워나갈 자신이 있었다.

  한데, 이학년부터 본격적인 전공 공부가 시작되자 자신이 없어졌다. 회화는 어려웠고, 문법은 인내를 요했으며,  단어와 어휘는 게으름 때문에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우리말로 시험지를 메우는 것이 아니라, 외래어도 아닌, 내게는 외계어로 보이는 불어가 들어간 답안지를 작성한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안겨 주었다. 고종석은 그가 쓴 에세이에서  대학교 때, 불어로 된 작품을 읽고 토론하는 써클 활동을 했는데  유익했었노라고 회상했다. 나로서는 무척 신기하고 부러웠다. 영어도 아니고 불어를 그렇게 재미있게 공부할 수있다니. 전공 공부를 싫어했던 내가  나쁘지 않은 성적으로 그나마 졸업까지 한 것은 그 외에 달리 방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공부가 미치도록 하고 싶지도 또 반대로 환장하도록 하기 싫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냥 시간만 보낸 것이다.

  한데, 이제와서 슬슬 공부란 게 하고 싶어진다. 특히 영어 공부, 이 글로벌한 시대에 영어를 제대로 씨부리지(?) 못하니 심히 쪽 팔린다. 이런 얘기를 J선생과 나눴는데, 그녀는 글쎄,  진작부터 열심히 영어 공부를 하고 있단다. 개인 과외도 해봤고, EBS도 열심히 듣는단다. 그러더니만 덜컥, 책을 사주겠다고 했다. 아휴, 그냥 추천만 해줘요, 했더니 남이 사주면 책임감 때문에 열심히 하게 된다나. J선생이 사들고 온 책은 회화책 한 권과 문형 외우기 교재 한 권이다. 마음씀씀이가 고마워 나도 그녀의 아들에게 줄 책을 세 권 준비했다. 그녀의 선물은 유익해보인다. (아직 시도를 하지 않았으니 이렇게 밖에 표현 못하겠다.) 우리집 아저씨가 수강권을 끊어준 인터넷 토익이랑, 이 두 권의 책으로 올 가을부턴 영어 공부를 한 번 해볼까나 싶다. 작심삼일이라도 상관없다. 자신의 불타는 향학열을 J선생은 몸소 내게 이전시켜주고 싶어하는데 그에 대한 보답으로 열심히 해야할텐데 글쎄, 잘 할 수 있으려나?  그리하여 이제는 패키지 여행이 아니라, 배낭 메고 당당하게 저 먼 땅을 꼭꼭 밟고 싶다.

  J선생 고마워. 하지만 나 영어 공부 제대로 안 한다고 실망하지는 마. 그렇게 안 봤다고 말하지만, 실은 내가 좀 게으른 데가 있거든.

  각설하고, 진짜로 영어공부 제대로 하는 법, 누가 좀 가르쳐주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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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10-15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공부든 잘 하는 비법은 두 가지인 거 같습니다. 연애하는 마음이든가 복수심이든가. 영어(공부)와 한동안 연애를 하시거나(내 사랑, 영어!) 영어에 복수를 해주시면 되지 않을까요(영어, 네가 그렇게 잘 났냐?)...

다크아이즈 2006-10-15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로쟈님 이렇게 확실한 비법을? 사실 영어는 쉬운데 공부하는 방법이 어렵잖아요.(말 된다.) 그 방법 잘 모르면 여쭤볼테니 살짝살짝 가르쳐주세요.

로쟈 2006-10-15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제대로 된 '연애'나 '복수'를 해본 적은 없어서(^^;)...
 
마시멜로 이야기 마시멜로 이야기 1
호아킴 데 포사다 외 지음, 정지영 외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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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글날이 엊그제였고, 소박하나마 한 때 한글 전용 운동을 한 전력이 있던 내가 이런 품위 없는 제목을 가져온 것에 대해 용서하시길. 출판계에 때 아닌 대리번역 의혹 바람이 부는 것을 보고 급하게 달려오느라 더 나은 제목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다.

 

  백만 권 이상의 판매부수를 자랑하던 책 한 권이, 알려진 바와 다른 정보로 파문이 일고 있다. 한 일간지 칼럼의 의혹이 단서가 되어 시작된 이번 사태는 관련 당사자들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독자들에게는 적잖은 당혹감을 안겨주었다. 출판사 측에서 해명자료를 내놓았지만 독자들로서는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논란이 된 책은 내 책꽂이에도 얌전히 꽂혀있다. 아이들 책읽기 교재로 활용한 것이기에 남들보다는 많이 산 기억이 있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데 일조를 한 셈이니 뒷맛이 씁쓸하기도 하다. 교훈과 감동이라는 어린이 독서의 목적에 비추어 볼 때 이 책은 비교적 유익한 편에 속한다. 하지만 그것이 꼭 베스트셀러가 돼야 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내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권하고 싶지 않은 책의 목록에 이 책도 끼워두었다. 실제로, 누군가 어떤 책을 읽을까 물어오면, 이런 책만 피하면 된다고 말해버릴 정도였다. 

 

  나는 은근히 가르치려들고, 이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우회적으로 동의를 구하는 책들을 부담스러워한다. 그런 책들이 자기 계발서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는 것도 의아했고, 어느 샌가 베스트셀러 상위를 달리는 것도 달갑지 않았다. 숫제, 베스트셀러를 넘어 스테디셀로로 정착할 조짐까지 보이니 내 독서관에 대해 잠시 흔들리기까지 한다. 독자로서 새삼, 나는 까다로운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백만 권 판매 신화의 주역은 마케팅이었는데, 그 매뉴얼은 유명인을 내세워 독자를 깨치는 것이었다. '제가 직접 번역했답니다. 당신의 교양을 높여주고, 삶의 방향을 제시해줄 것입니다. 꼭 한 번 읽어보세요.' 우아하고 지적이며 세련되기까지 한 유명 아나운서를 번역자로 내세운 이런 방식은 분명 판매부수에 획기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대리번역이 아니라면 이 자체가 지탄받을 일은 아니다. 오히려 책 안 읽기로는 세계에서 거꾸로 순번을 세는 게 빠른, 야만적인 독서율을 자랑하는 우리네 독서시장에 이러한 기법은 불쏘시개 역할을 했으니, 문화를 사랑하는 시민의 이름으로 출판사측에 감사패를 줘도 모자랄 일이다. 출판업이 자선사업도 아니데 상업적 이득을 도모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한데 실은 전문 번역가에 의한 대리번역이었고(출판사측에서는 이중번역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실제 번역가로 알려진 유명 아나운서는 홍보대사 역할을 했다니 번역자의 이미지나 명성만 믿고 책을 산 독자들로서는 얼마나 배신감을 느낄 것인가. 번역의 노고를 생각하며 역자 사인회(이 또한 해괴하다. 필자도 아닌 역자가 사인회를 여는 곳도 있는지.)에 참석해서 책을 산 사람들의 실망감은 어찌 또 보상할 것인가.

 

  하오나,

  이 사태를 보는 내 생각은 출판사나 번역 당사자들 못지 않게 독자들의 잘못도 크다도 본다.  대리번역을 일삼는 출판사의 행태도, 허영심에 물든 거짓 번역가의 소행도 결국은 독자가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참에 베스트셀러가 좋은 책이 아니라 좋은 책(좋은 말을 쓴 책이 아님을 강조한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는 물론 독자에게 달려있다. 좋은 책을 보는 눈이 커지면 허욕에 물든 출판 환경 때문에 분노할 독자는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세상에 좋은 책이 많아 즐겁고, 잘 쓰는 사람들이 많아 나날이 절망한다. 저마다 즐기는 책이 다양하고, 사람마다 절망하는 작가가 다른 사회일수록 어느 한 책이 몰표로 밀리언셀러가 되는 일은 드물어지지 않겠는가. 대부분의 베스트셀러가 이유 있는 것이긴 하지만, 모든 베스트셀러가 최고인 것은 아니다. 일찍이 '의심하고 있는 나 자신은 의심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데카르트 선생의 '삐딱선'미학을 신봉하는 의심많은 한 독자,  미심쩍게 등장하는 베스트셀러를 바라볼 때마다 이런 생각에 빠지곤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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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듯이 일기를 쓴 적이 있다.  아주 젊었을 적 이야기다. 늦게 일어나 밥 먹고, 음악 듣고, 책을 읽어도 남아 도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어 주야장천으로 일기만 쓴 적이 있었다. 아니다, 시간만 남아 돌았다면 그렇게 써대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돈도 없고, 남자도 없었기 때문에 괴로워서 일기만 썼다. 돈 있고, 남자가 있었다면 쇼핑을 하거나 산책을 했겠지. 더할나위 없이 화창한 젊은 날, 죽은 듯이 골방에 엎어져 쓰는 일기는 염세와 비관과 절망과 그리고 가난의 노래였다.

어느날부터 일기를 쓰지 않아도 되는 날들이 시작되었다. 남자를 만났고,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는 동안 일기를 쓸 일이 없어졌다. 친정 다락방에 남아 있던 열 댓권의 일기장을 뒷마당에서 불태우면서 나는 웃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청춘들아, 아듀. 홀가분했다. 결혼 생활. 가끔씩 삐그덕 거렸지만 행복했고, 조금 빈궁했으나 견딜만한 것이었으며, 아주 많이 게을러졌지만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다.  청춘의 지난한 비망록을 쓸 때에 비하면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졌고, 여유로웠다.  일기장은 이제 쉰 내 나는 행주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평생 일기 같은 건 쓰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다시 일기를 쓰려고 한다. 불특정 다수에게 오픈된 일기니까 완벽하게 솔직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청춘의 광기와 살기 서린 일기문을 기억하는 나로서는 차라리 잘 됐다고 위안한다. 자기기만까지를 포함하는 수준이되, 품위를 잃지 않을 것. 착한 척 하지 않되 연민도 버리지 않을 것. 위선보다는 차라리 위악적 허세가 스민 유머일 것. 이 신새벽 일기장을 열면서 스스로 다짐해본다.

몇 십 년 만에 쓰는 일기.  될 수 있는 한 솔직해질 것이다. 왜냐면 청춘의 일기처럼 이곳엔 염세도 비관도 절망도 가난도 없이 온전하게 자유롭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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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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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란스럽다.

   책 읽는 자로서 나는  별종에다 까탈스러운가?  써야할 리뷰 대상이 된 책에 대해서는 될 수 있으면 타인의 리뷰를 미리 들춰보지 않는다는 게 그간의 내 소신이었다.  혹여 타인의 생각을 훔쳐보는데서 생길지도 모를 선입견이나 영향력을 우려하는 것이다.  한데, 이번에는 예외이다. 리뷰를 올린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도대체, 왜 어떤 이유로 사람들은 이 책을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렸는가? 정말로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 리뷰들을 읽고 나서도 진정한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혼란스럽다.

  내가 잘못 읽고 있는가? 읽히는 소설이긴 하지만 열광할만한 근거는 찾지 못하겠다.  딴지는 아니고, 타인의 취향을 존중하면서도  소수의 취향에 해당하는  나같은 인간은 깊은 의문에 쌓인다. 소설을 읽을 때(책을 읽을 때) 내가 지향해온 소박한 철학(철칙이라 해두자)을 이제 거두어 들일 때가 되었나, 하는 의문이 생긴다. 

   프로 작가가 쓴 모든 읽을 거리는 될 수 있으면(될 수 있으면에 방점이다) 완벽한 문장을 지향해야 한다는 게 독자로서의 내  생각이다.  어떤 시인이 말했다.  시는 은유이기 때문에 말이 좀 안 되고, 비문을 써도 용서가 된다고. 나는 그렇게 말하는 시인을 마음 속 깊이 신뢰하지는 않는다.  어디선가 읽은 이런 말이 떠오른다.  '어떤 시인이 진정 시인인가, 아닌가는 그가 쓴 산문으로 판가름 난다. 산문이 되지 않는 시인은 더 이상 시인이 아니다.'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호흡 긴 문장을 감당할 수 없는,  자신의 헐거운 문장력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를 쓰는 행위를 경계하는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 시든 소설이든, 모든 활자화된 것의 기본 예의는 문장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너무 과민한 걸까?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푸른숲, 2005)을 읽는 동안 유쾌했고, 동시에 짜증이 났다. 남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읽었다는데 원래 냉혈한 기질이 있는지 눈물은 나지 않았다. 우선, 유쾌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구성은 빼어났고, 스토리라인은 선명했다.  작가는 목 좋은 자리를 선점해 단골을 유치한 포장마차 주인처럼 민첩하고 유연한 방식(호기심을 자아내는 구성과 적당히 신파가 섞인 서사)으로 대중성 확보에 성공한 듯 보인다.   이것이 작가 공지영의 힘이다.   쉽고 감성적인 언어로 작가와 독자가 동시에 원하는 목표점인 자연스런 감동과 정서적 공감을 이끌어낸 것은 분명 장점이다. 부럽고 본받을 일이긴 하다.  이것이 곧 대중소설의 존재 이유가 아니겠냐고 누군가가 목놓아 외친다면  이 리뷰를 쓰는 의미는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다는 아니다. 작가는 프로이고 프로는 책임있는 문장들을 뱉어낼 의무가 있다. 물론 모든 작가들이 김훈이나 천운영처럼 미려하면서도 적확하고, 섬뜩하면서도 정교한 문장을 구사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위에 방점 찍은 것처럼 될, 수, 있, 으, 면,  제대로 된 문장을 쓰려고 노력해야 한다. 감동과 공감만이 목적이라면 굳이 소설에서 그것을 찾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학이 예술의 고매한 범주 중 하나라고  볼 때, 그 예술성은 독자에게 전달되는 정서적 감동 외에 감동을 전달하는 문체적 특성에서도 발견되어야만 한다. 

  공지영 소설이  대중적, 외연적 확장을 하면 할수록 그 문체적(더 확실하게는 문장력) 결함의 아킬레스 건이 도드라져 보일 것이라는 우려는 나만의 생각일까.  나는 공지영 작가를 존경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다.  다만, 좋은 문장을 만나기 위한 독자로서의 신경증적 강박이 있다는 것은 고백해야겠다. 물론, 독자로서 문학이 예술이 아니라 그저 오락이나 휴식에만 머물러도 좋다고 생각하는 날이 오면  이 강박은 자연스레 없어질 것이다.

  읽기에 껄끄러웠던 첫 도입부의 몇 개 문장만 인용해본다.

 

   비는 저 불빛들 속에서만 내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둠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젖게 하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도무지 모를 테니까. (9쪽)

   이 겨울비처럼 어두워져 보이지 않는 것들이 세상에는 많이도 있었다. 그를 만난 후 나는 그것을 알았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10쪽)

 --- 도입부의 문장 일부이다. 어둠 속 비오는 장면을 묘사한 것인데, 도무지 나로서는  '어둠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젖게 하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를' 이유가 없다.  사족이다.  뒤쪽의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듯이 어둠 속에서 우리를 젖게 하는 것의 정체가 비라는 것쯤은 비를 맞아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지 않겠는가. '불빛들 속에서만 내리고' 있는 비의 선명한 이미지를 묘사하다 보니,  '어둠 속'의 비의 정체를 모호하게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엷은 운무처럼 뿌연 빗속에서 달리던 차들 위로 태양처럼 붉은 신호등이 켜졌다. (10쪽)

--- 딱히 비문은 아니지만 이런 앞뒤 문맥상 불분명한 비유를 왜 써야하나? '뿌연 빗속'에  '태양'이라...

 

  어머니는 왜 자신의 친구였던 고모를 미워했을까. 그러니 나도 어머니를 미워한 것이 먼저였을까, 아니면 고모를 닮아버리겠다고 결심한 것이 먼저였을까. (14쪽) 

  그러나 그것은 미개지에 들어선 점령군이 부르는 승전가 같은 종류의 감정은 아니었다. 그것은 이를테면 건드리기만 하면 피를 흘릴 준비가 되어 있는 오래되고 내밀한 상처였으며 설사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언제나 피를 흘리는 그런 종류의 아픔이이고 했다.  말하자면 그것은 반역에 실패한 패잔병들이 부르는 악에 받친 풍자가 같은 것이기도 했을 것이다.  아니다, 다른 점도 물론 많다. 고모는 나보다 우리 집안사람들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하고, 그들이 제공하는 어떤 물질적 향응도 자신을 위해 쓴 적이 없었다. (15쪽)

  나는 나 자신을 파괴하는 것을 원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온 은하계가 나를 중심으로 돌아야만 성이 차던 존재, 술에 취한 날이면, 닫힌 문들을 발길로 차면서 나는 진실로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고 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게 발음해본 적은 없지만 그 때 누군가 내 심장에 청진기를 가져다 대었다면 아마도 이런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15쪽)

  나는 위스키에 치사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시도했다가 발견된, (21쪽)

---앞 뒤 연결이 생뚱맞고, 대구가 맞지 않아 부자연스러운 문장들.  도대체 왜 작가는 이런 부주의함들을  도처에 깔아놓아야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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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1-29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글 하나 제대로 써보지도, 책 하나 제대로 내지도 못한 독자입니다만, 책 한 권이 있으면 열심히 읽는 독자로서 말하고 싶어요. 종종 공지영같은 수준미달을 보면 그의 책을 위해 베어지는 나무들이 아깝다고. `고등어' 이후에는 같은 말을 하고 또 하고, 되풀이해 하는 반복 재생 녹음기 같아요.

marine 2006-12-04 0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체 문제, 저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공지영에 대해서는 읽은 책이 별로 없어 왈가왈부 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쨌든 문체는 작가의 기본적인 자질이라고 생각합니다

다크아이즈 2006-12-04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드님, 블루마린님 동지를 만난 것 같기는 한데 작가에게는 좀 미안하네요. 부주의한 문장들, 예민한 독자들은 자꾸 신경 쓰이는 것 맞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