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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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를 부탁해




  과히 신드롬이다. 아니,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창비, 2008)는 이제 신화가 되었다. 언제나 불황이라는 출판업계의 투정을 가벼이 웃어넘기듯 백만부 판매라는 빅뉴스를 독자들에게 보너스로 주기까지 한다.

  올해 이 도시의 원북 역시 ‘엄마를 부탁해’이다. 원북 행사란 전국 몇몇 공공도서관에서 시행하는 범시민 책읽기 운동의 일종이다. 시민들이 접수한 후보 도서 중 한 권을 각계에서 위촉된 원북 심사위원들이 토론으로 선정하고 도서관측은 그 책을 올해의 원북으로 선포한다. 한마디로 ‘책을 가까이 하는 시민’이 원북 행사의 취지이다. 따라서 보다 많은 시민들이 원북을 읽을 수 있도록 도서관측에서는 도서대출 및 교환, 원북 작가와의 행사 그 외 공개토론회 등을 마련해 적극적인 홍보를 하고 있다. 

  ‘엄마를 부탁해’가 올해의 원북 도서로 정해진 도시는 서너 곳이 된다고 한다. 백만부가 팔리기까지 이러한 원북 운동도 일조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많은 독자의 마음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책 그 자체가 주는 감동 때문이라는 건 의심할 필요가 없다.

  원북 행사의 일환으로 지난주에 공개독서토론회가 있었다. 나를 포함한 시립도서관  주부독서회팀이 주축이 되어 시민들과 자유로운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우선 출간된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독자들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을 수밖에 없는 이 책의 미덕은 무엇인가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역시 신경숙 소설의 문체미학과 감성미학이 빠질 수 없었다. ‘부엌 살강에 엎어진 밥그릇’이나 ‘흙담 밑에서 뻗어가는 호박넝쿨’도 놓치지 않는 작가의 미시적 눈썰미와 ‘엄마를 잃은 게 아니라 잊었다’는 감성적 성찰이 그미 소설의 특장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 외 시점 변화의 독창성과 다소 신파인 곰소 아저씨와의 로맨스 등이 충분한 공감과 대중성을 획득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다음은 엄마의 희생은 과연 온당한가, 라는 의견을 나눴다. ‘엄마는 멀리서 생각하면 눈물 나고, 가까이서 보면 화가 난다’는 작가의 말은 무엇을 말하는가? ‘처음부터 (희생만 하는)엄마로 태어난 게 아’니라 애초에 엄마는 여자였다, 라는 것을 강조하는 반어법일 것이다. 엄마의 희생이 전제되어야만 온전한 가정이 지탱될 수 있었던 시절에 대한 회한의 기록은 그대로 엄마에 대한 헌사가 되어버렸다. 이것은 많은 독자를 울린 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려이기도 하다. 혹여, 이러한 모성의 희생이 가부장적 혐의가 짙은 이들에 의해 현재진행형의 미덕으로 칭송되거나 강요되지나 않을까 하는.

  맏아들로 살아간다는 것의 힘겨움과 나머지 아들들의 정체성 혼란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의견도 의미 있었다. 장자인 형철이 밖으로 도는 아버지를 대신하는 동안 나머지 두 아들은 둘째놈, 또는 아우라는 보통명사로만 존재한다. 아버지가 쓰던 밥그릇을 큰아들이 물려받고, 장독에 숨겨둔 ‘귀한’ 라면을 큰아들만 먹고, 고구마 캐는 노동에서 맏아들이 면제될 때 나머지 아들들은 절규한다. ‘형만 장땡이냐’고. 남은 두 아들들을 보듬는다고 너희들도 장땡이다, 라고 엄마가 말한들 남겨진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릴 적 상처는 성장한 뒤의 트라우마가 되니까.

 가족애란 이름으로 한량이었던 아버지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은 타당한 것인가, 라는 주제도 패널과 방청객 모두를 몰입하게 했다. 신경숙 가족소설에는 빈번하게 ‘아버지의 부재’가 나온다. 그미의 책을 읽다보면 그 부분은 의도적이라기보다 경험적, 실체적 진실에 가깝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젊은 여자 때문이든, 역맛살이 낀 팔자 때문이든 집 나간 아버지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든든히 집안을 지키고 있는 아내 품으로 돌아온다. 그 어떤 아내의 힐난도, 이렇다 할 자식들의 반항도 없이... 집안에 아버지는 부재중이지만 언제나 그 아버지는 면죄부를 받는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그래서 감히 부탁해본다. 책 속에서 아버지가 맏딸에게 엄마를 부탁하고, 맏딸이 성베드로 성당의 피에타상에게 엄마를 부탁하듯 이제 아버지를 부탁해본다. 아니, 아버지께 부탁한다. 이 세상 아버지(남성)들아, 이 책을 읽고 싱겁다거나 뻔한 얘기라고 옆으로 밀어놓는 일만은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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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탄생 - 한 아이의 유년기를 통해 보는 한국 남자의 정체성 형성 과정
전인권 지음 / 푸른숲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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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씩 헛갈릴 때가 있다. 가족제도 안에서의 여성에 대한 내 연민의 근원이 제 게으름을 합리화하기 위한 구실 때문인지, 저 깊은 곳에서 꿈틀대는 여성성에 대한 강한 자의식 때문인지.

  지난 주말에 친정 엄마의 팔순모임이 있었다. 이런 행사가 있을 때마다 나는 즐거움에 앞선 약간의 스트레스를 받는다. 행사의 행동요원(?)격에 해당하는 여성들의 불합리한 상황과 그것에 대한 내 연민 때문이다. 우리집 여성 요원들의 간략한 행태를 소개해보자. 자유분방한 큰올케가 대안 없이 뒤로 빠지는 동안, 전통적 가부장질서에 충실한 둘째올케의 가없는 효부정신이 발휘된다. 좋은 게 좋은 셋째올케와 멀리 사는 언니는 묵묵히 대세를 따른다.  전 여성행동요원의 정신적, 노동적 민주화를 꿈꾸는 나는 나름 합리적 대안을 제시한다. 집안이 아닌 밖에서 모여, 여성들도 우아하게 즐기자는 내 의견은 효 문화의 온당한 기치 앞에서 막내라는 이유만으로 웃자란 신인류의 감성쯤으로 내몰리기 십상이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집안 어른들의 행동요원에 대한 평가가 이어진다. 유교적 가풍의 끄나풀을 놓을 맘이 전혀 없는 그들은 더 야무진 도리를 하는 요원에게 찬사의 입말을 아끼지 않는다. 뒷전에서 그 찬사를, 자신에 대한 비난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쪽에서는 가시방석이 따로 없다. 겉으로 보기에 행사는 무사히 치러진다. 하지만 뭔지 모를 미묘한 앙금이 남는다. 관심과 노동과 시간을 많이 할애한 쪽에서는 본인이 아무리 부정한다 해도 제 맘을 다 보상받지 못한데 대한 서운함이 생기고, 그렇지 못한 쪽에서는 행사의 주체적 실체가 되지 못한데 대한 자격지심과 소외감 때문에 피해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다. 모두를 만족시킬만한 합리적 대안은 애초에 있지도 않다. 또한 그 과정을 도출하는데 대한 위험부담 때문에 이런 갈등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일 뿐이다. 중요한 건 이 모든 과정에서 남자는 제외된다는 사실이다. (여성들 스스로가 남성에게 면죄부를 준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런 미묘한 감정의 혼선에 있는 여성 행동대원들을 위해 (실은 나를 위해) 나는 기어이 잔다르크가 되기를 자청한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 모든 식구들이 함께 즐기자는 내 요구가 받아들여져 우아한 잔칫상을 마주한 뒤에라도 그놈의 ‘도리’의 끝자락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봐도 여성(특히 며느리 입장)에게 집안 행사는 즐기는 자로서의 여유보다는 도리로서의 의무감을 요구하고 있다. 남자들이 여성에게 강요한 적도 없고, 심지어 그들은 이런 감정에 무신경하기조차 한데, 여성들만이 감지하는 이 부조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 이유에 대한 답은 타계한 정치학자 전인권이 쓴 ‘남자의 탄생’(푸른숲, 2003)에서 얻을 수 있다. 그의 관찰에 의하면 유년시절부터 학습된 우리의 가족제도는 한국형 남성을 확대 재생산하는 데 주력해왔다는 것이다. 권위주의와 가부장적 질서는 남성적 삶을 위한 제도적 기반이었으며 이는 기본적으로 ‘동굴 속 황제’ 라는 인간형을 만드는데 기여했다. 여성에 대해 편협하고 왜곡된 정보를 전제하는 이러한 권위는 충격적이게도 여자 특히, 한 집안의 어머니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작가는 분명히 말하고 있다. 한마디로, 한국적 가정에서의 남자의 권위는 아버지가 만드는 게 아니라 어머니가 주도한다는 사실이다. 어머니가 차린 동굴 속 황제를 위한 밥상에 아버지가 숟갈을 들면서 가부장질서가 고착되고 그 과정에서 모성의 희생과 여성의 도리라는 개념이 고착되어 왔다는 것이다. 별 비판 없이 여성들이 이러한 학습과정의 동굴에 머무르는 동안 남성들은 또 다른 자신들만의 동굴 속 황제로 안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백적, 반성적 회고를 통해 작가는 말한다. ‘내 안의 남성을 죽여라’고. 이미 남성들 스스로 그 부담스런 ‘남성적 권위’를 반납하는 사회 구조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군림하려 하지 않고, 제 안의 부조리한 남성을 죽여 가며 고백하는 남성들 앞에서 여자들 스스로 통렬한 성찰을 할 수 있다면 이보다 나은 독서는 없을 것이다.

  여성적 의무 이데올로기라는 동굴을 벗어나려는 최적임자는 누구인가? 명쾌한 답이 여기 있다. 그 답이야말로 여성 스스로라는 것을 역설적이게도 이 책은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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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1 - 개정판
김형경 지음 / 푸른숲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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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독서 치료 프로그램 추천 도서 목록을 찾고 있었는데 이 책이 대부분 추천 목록에 들어가 있다. 그 프로그램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는 책이었다.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김형경 작가에 대한 애정(? 또는 관심)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이야기는 그의 또 다른 장편인 <세월>에서 약간 밝힌 바가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도서관에 들를 때마다 눈에 잘 띄는 곳에 제목도 긴 이 책이 얌전하고도 깨끗한 상태로 놓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언제나 다른 책에 우선 순위가 밀리곤 했다. 두 권으로 분권되어 있는 게 독자로서는 조금 부담이 됐을 수도 있겠다.  

  긴 제목만큼이나 사랑에 대해서 그만큼 할 말이 많아서 두 권으로 되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한데, 그것도 잠시 그건 작가의 스타일이라는 것을 알겠다. 세월,을 읽을 때도 그랬고, 이 책도 그렇고 근본적으로 작가는 길게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다 읽고 나면 굳이 두 권짜리로 쓸 필요가 있을까 싶게 동어반복에 중언부언하는 면이 없지 않다. (예를 들어서 그렇지만 깔끔하게 접근하는 김훈이나, 천운영 스타일이라면 이렇게 글이 늘어지게 놔두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래도 별 불만없이 읽히는 건 글을 조직해가는 작가의 내공에 미더움이 가기 때문이다.  

  얼핏 제목만 보면 연애 소설인가 싶은데 그것보다는 이 땅에서 여성적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들의 자기 정체성 찾기를 그리는 심리소설이라 할 수 있다. 삼십대 중반, 현재는 싱글인 세진과 인혜가 소설의 중심 인물이다. 우리에게 덧씌인 사랑에 대한 환상을 걷어내고, 삶의 겉치레인 휴머니즘의 장막을 벗어나면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권력이라는 통찰에 깊이 공감한다. 부지불식간에 우리는 권력 지향, 혹은 그 위계질서에 의해 조종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가 있다. 인간 관계의 모든 뼈대는 욕망이고, 그 욕망이 주체적 삶이 되게 하는 건 자신에게 달렸다는 것을 성찰하게도 하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사랑이란 말이 들어간 제목이지만 사랑의 실체는 환상이나 로맨스가 아니라 욕망에 가깝다는 그의 해석이 흥미롭다. 소설 전개 방식은 물론 일반 소설과는 다르다. 상처 많은 삼십대 여성의 심리치료 과정을 소설 기법으로 차용하고 있는데, 유능한 건축사 세진은 누가 뭐래도 작가의 분신이다. 정신 분석 내용을 토대로 여성들의 성과 가치관, 타인과의 관계 등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면담자인 의사와 세진의 정신분석 과정은 경직되어 있지 않고, 현실감있게  묘사 된다. 세진의 여러 문제, 예를 들면 어린 시절의 부모의 이혼과 이십대의 성폭행 에피소드 등은 여성들에게 충분한 공감대를 얻어내고 있다. 작가가 의도한 것은 세진의 일부나마 독자들에게 투사되어 심리적 위안을 받기를 바라는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세진의 심리치료 필요 조건은 유아기 이래의 상처와 결핍에 기인한다.  그녀로선 부모의 이혼이 가장 큰 트라우마가 되겠다. 언제나 인간 결핍의 원천은 자신에게 있는 게 아니라 주변인ㅡ특히, 부모라는 걸 확인시켜 준다. 심리치료책을 읽기 전에는 절대 알 수 없었던 이런 공공연한 비밀을 깨칠 때마다 마음밭이 환해지는 걸 느낀다. 절대적 관계자들과의 상충 과정에서 자신의 콤플렉스가 형성되고 , 그것이 또 다른 욕망의 출발선이 된다는 점은 매우 공감이 간다. 예를 들면, 아버지 같은 무심한 사람을 만나지 않겠다는 남성관이나, 엄마처럼 희생적인 길을 걷지 않겠다는 내면화 과정도 콤플렉스의 산물이라는 게 작가의 관점(아니, 심리학자들의 관점)이다.  

  이혼 경험이 있는 인혜는 단순하고, 관계지향적인 반면, 독신녀인 세진은 완벽주의자이며 자주적, 독립적인 캐릭터이다. 내가 볼 때 이 둘은 작가의 이중분신에 다름 아니다. 작가 자신이 체험한 것을 글로 썼기 때문에 상당한 리얼리티를 확보한 것이 느껴지지만 그 과정이 다소 동어반복되어 지루한 감도 없지 않다. 해서 책을 읽다 보면 몰입되어 공감할 때도 많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굳이 비판적 책 읽기를 한다면 세진과 인혜라는 인물에 완전히 공감하기는 힘들었다. 작가의 실제적 자아와 많이 닮은 세진과 그 대척점에 있는 또 다른 인물인 인혜는 경험의 다양성 측면에서 볼 때, 독자 역시 별개의 존재자이므로 완전히 공감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지나치게 완벽주의자이자 타인의 시선에 대한 장악력마저 지닌 세진이 그토록 자신이 겪은 상처를 동어반복으로 변주하는 것도 약간 지겨웠고, 세진에 비해 단순하고 온정주의자이자 남성 포용주의자(?)이기도 한 인혜가 세진의 입김에 좌지우지 되는 걸 보면서 현실감각을 놓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뭍 여성들이 등장하는 이 소설에서 제목처럼 여성들이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은 있다. 두 주인공이 활동하는 모임인 '오늘의 여성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란 오여사 클럽을 통해 여성들의 사랑에 대한 자의식을 건너다 보자. 어떤 이는 사랑을 <권력욕이라 하고, 어떤 이는 생존 본능, 어떤 이는 미적 체험, 또 다른 이는 인간 사이의 소통...>등등으로 다양한 사랑에 대한 견해를 피력한다. 한데, 흥미로운 것은 심리치료를 받고 있는 주인공 세진이 명쾌하게 사랑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 결국 사랑은 노이로제나 광기이며, 자기 콤플렉스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예를 들면 가난을 상처로 가진 사람은 부자를 찾고, 학력에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은 고학력자를, 스스로 약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권력자를 선망한다는 것이다. 사랑에 대한 각자의 정의가 곧 자신의 상처나 콤플렉스가 된다는 작가의 그 말에 밑줄을 그었도다! 

  심리치료 전문가들이 권하는 책인만큼 마음의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이 책을 읽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부모의 이혼, 성폭행에 관한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과정을 작가는 밤송이에 비유하고 있다. <밤송이 하나를 받아들고, 그것이 인생이라 여기며 쩔쩔매게 됩니다. 손바닥 뿐 아니라 온몸을 찔러대는 그것을 버릴 수도, 감싸쥘 수도 없는 상태에서 심리치료라는 과정을 통해>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간다. 삶은 반복되는 시행착오의 부산물이다. 문제는 그 경험들을 통해 무엇을 배우는가 하는 일이다. 그 일련의 과정 자체의 기록이 독자들에게는 또 다른 방식의 소설 읽기를 경험하게 하고, 내면의 공감을 자아내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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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잔은 환갑이 넘은 영어 선생님이다. 한국에 온 지 만 이 년이 채 되지 않았을 것이다. 대학 교수인 아들의 초청으로 같은 대학에서 영어강사로 일하고 있다. 초등학교 선생님 출신답게 다정다감하고 이해심이 있으며 시원한 성격이다.

  한데, 어제 공부 멤버 중 한 명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수잔의 교수법에 대해 우리들의 의견을 내놓을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게 요지였다. 그미 앞에서는 대세를 따르겠다고 말했지만 나는 지금 고민하고 있다.

  수잔에 대해서 말할 것 같으면 첫 강의를 맡은 학기에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고급반 학생들의 요구와 수잔의 교수법이 달라 종강 무렵엔 많은 이탈자가 생겼다고 들었다. 그 다음에 우리를 맡게 되었는데 수강생들이 초보자들이라서 그런지 별 무리 없이 한 학기를 마쳤다. 얼마 전 개설한 가을 학기에 10명이 재수강할 정도로 출발은 산뜻하다. 한데 2학기 수업을 서 너 번 들은 상태에서 재수강생 사이에서 몇 의견이 나오는 모양이다.

  발표하는 사람만 한다.  질문을 하라는데 초보자가 쉽게 질문을 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수잔이 번호대로 질문하고 그들이 대답하는 형식을 취하면 골고루 수잔의 입김을 맛보지 않겠는가, 하는 게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의 입장이다.

  수잔의 가르치는 방식이 여물지는 못한 게 사실이다. 나이가 있다보니 테이프나, 디브이디 조작도 서툴고 , 수업 리듬을 놓치면 잠시의 공백이 생기기도 한다.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그 정적이 곧 수잔의 카리스마에 흠이 될 수도 있음을 사람들은 감지하는 것이다. 두 시간 동안 다채로운 방식을 활용하지 못하고 단조롭게 진행하니 흥미를 못 느끼는 경우도 있다.

  한마디로 수업자체를 장악하지 못해서 어수선할 때가 많다. 이런 불만들을 멤버 몇몇이 수잔과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 얘기해보자 하는데, 내 개인적 심정은 별로 그러고 싶지가 않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수잔에게는 수잔의 방식이 있고, 그 방식을 따라가냐, 마냐는 학생이 선택할 문제이다. 수 십년 동안 해온 교수법을 수강생들이 요구한다고 하루 아침에 바뀌는 것도 아니고, 요구한 만큼 수강생들의 태도가 진전될 것 지도 않다. 두 번째는 수잔에게 상처를 주기 싫다. 좋게 얘기한다고 해도 안 좋은 경험이 있는 수잔은 자신의 교수법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마음 아파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콩글리쉬를 할지라도 질문이 많은 나같은 사람이 앞장서서 수잔을 대면해주길 바라는데 고민이다. 멤버들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수잔에게 별 불만이 없는 내가 앞장 설 수도 없고. 특히,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나는 우루루 몰려 다니면서 패를 만드는 모양새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메일을 보내든지, 타협을 하는 게 맞다고 본다. 일단은 대세를 따르겠다고 말했는데 글쎄 대세가 무엇인지는 낼 수업을 가봐야 알겠다.

  어떤 식의 결론이든 수잔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쉽게 상처받을 영혼은 아니겠지만. 수잔, 호기심 많고, 욕심 많은 수강생들 입장도 생각해 줘. 그리고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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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개월 동안 잘 놀았다. 서재 관리 따윈 관심도 없었다. 더러 책을 샀고, 가끔은 읽었으나 별 진전은 없었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니 이유가 있긴 하다. 모두가  '나의 영어 선생님' 때문이다. 책을 멀리 하는 동안 영어를 가까이 했나?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엄밀히 말하면 영어 선생님을 가까이 했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몇 개월 새 내게 영어 선생님이 두 분 생겼다. 수잔과 에밀리.

  수잔에게 나는 유료 회원이고, 에밀리에게 나는 무료 회원이다. 수잔은 뉴욕주 출신이고, 에밀리는 필리피노이다. 수잔은 시원하고 에밀리는 발랄하다. 수잔은 늙었고 에밀리는 젊었다. 수잔은 초등학교 선생님 출신이고, 에밀리는 대학강사(?) 출신이다. 수잔은 발음이 좋고 에밀리는 본토 발음과는 거리가 있다. 수잔은 어린이 눈높이에서 가르치고 에밀리는 학구적으로 가르친다. 수잔은 점잖고 에밀리는 수다스럽다. 수잔은... 에밀리는....

  비교하자면 밑도 끝도 없다. 중요한 것은 나는 그 둘 중 누구를 더 좋아하거나 덜 좋아하지 않는다. 둘 다 소중하다.  둘의 가장 큰 공통점은 여자라는 것 외에 낙천적이라는 점이다. 몇 개월 간 그들을 관찰하면서 얻은 결론? 낙천적인 사람은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들의 낙천성이 나로 하여금 이런 일기를 쓰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들의 긍적적인 사고 방식을 배우는 것 만으로도 내 영어 공부는 성공적이라고 생각한다. 영어 공부에 관한 것보다 영어 선생님에 관해 쓸 수 있다는 건 행운인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에밀리와 만났다. 나는 영어 초보자이기 때문에 영어에 관한 얘기는 별로 할 게 없다. 다만, 나의 영어 선생님에 관해 얘기하고 싶다. 그들은 내 모국어를 잘(에밀리 경우) 또는 전혀(수잔 경우) 모르는데다 내가 알라딘에 블로그를 가지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를 테니까.  

  에밀리는  몇몇의 나 같은 이를 위해 자청해서 영어를 가르쳐준다. 천성이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고,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데서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오해마시라. 왕초보자도 영어로 누군가를 가르쳐 본 사람 앞에서는 이 정도의 독해력은 따라 준다. 처음엔 무척 신기했다.)

  오늘은 네 명이 에밀리와 만났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고, 화제는 당연히 비에 관한 것이었다. showery에 관한 설명을 꽤 오래 했다. 소나기 쯤 되겠다. 한마디로 on and off로 오는 비가 showery한 비라고 설명해 주었다. 에밀리가 물었을 때 누군가는 비오는 날을 좋아한다고 했고, 누군가는 싫어한다고 했다. 나는 비가 오든 오지 않든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다만, 오늘처럼 비오는 날이면 누군가에게 전화를 기어코 하고야 만다고 말해주었다.  있지도 않은 오래된 남자 친구를 급조해내어  그에게 전화를 건다고 말했다. 물론 거짓이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꼭 오래 알고 지낸 남자인 적은 없었다. 잠재의식 속에 숨어 있던 욕망이 영어라는 울타리를 만나면서 표출된 것이다. 이를테면 의식하지 않은 거짓말이 튀어 나왔다.

  모국어보다 영어로 얘기할 때 좀 더 내면의 솔직성이 뿜어져 나온다. 영어 배우려고 모인 멤버들이 유창하지 않으니 막연한 보호막이  되겠거니 하는 믿음 때문이리라. plastic surgery(성형수술)에 관한 얘기를 할 때 나는 쌍거풀 수술을 했음을 고백했다. 에밀리는 웃으면서 really?를 연발했다. 이십 대 때의 일이었고, 그간 남편에게도 말하지 않은 이야긴데도 술술 잘도 나왔다. 에밀리는 필리핀에는 게이들이 많다고 얘기했다. 대학에서 강의할 때 스무 명 남짓한 멤버 중에 반 정도가 게이 흉내를 내고 있어서 충격이었노라고 말해주었다. 정말로 우리 넷은 really?를 남발하고야 말았다. 에밀리의 의견에 따르자면 우리나라는 전통적인 사고의 지배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필리핀은 아무래도 미국적 사고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그렇단다. 커밍아웃이 환영받는 날이 오면 우리나라도 필리핀이나 태국 못지 않을 것이라나? 믿거나 말거나.

 보컬보다는 연주 음악을 즐겨 듣는다는 그녀는 트럼펫 악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고전이나 재즈 가리지 않는다고 했다. dvd도 많이 가지고 있다니 아마도 비오는 날 모짜르트의 유일한 트럼펫 협주곡 연주 실황을 들여다 보며 향수를 달랠지도 모르겠다. 비오는 날 음악 틀어 놓고 커피 마시며 청승 떠는 것은 세계 공통 관습인가 보다. 무슨 노래를 좋아하느냐고 에밀리가 물었을 때 나는 요즘은 노래를 부르지도 듣지도 않는다고 했다. 다만, 어제 알라딘에서 책 주문하면서 클레이 에이킨의 세 번째 앨범을 같이 주문했기에 올드 팝인 without you에 대해서 얘기했다. 오리지널은 배드핑거가 작곡하고 불렀고, 해리 닐슨이 리바이벌 해서 히트쳤고, 머라이어 캐리가 확대 재생산했으며 최근에는 클레이 에이킨까지 합세했노라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나는 해리 닐슨의 보컬이 내 정서에 가장 와닿는다고 말했다. 내 청춘이 그의 노래가 유행하던 시절이었으므로... 배드핑거의 멤버 중 두 멤버가 자살에 이르렀다고 말했을 때 에밀리는 확실하게 짚어주었다. suicide는 commit suicide와 합쳐졌을 때 완벽한 의미전달이 된다는 것을.

  에밀리는 미국에서 교육받은 인텔리이자 인텔리 남편을 두었다. 미국 유학 중에 만났다는 그녀의 남편은 한국인 치과 의사이다. 비교적 유복한 생활을 해서인지 대가 없이 영어를 가르쳐주면서도 신이 났다. 자청해서 영어를 가르쳐주겠다는 그녀의 선의가 처음엔 무척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제야 알 것 같다. '토킨어바웃'을 좋아하는 그녀가 이국에서의 외로움과 갑갑함을 견디기 위한 방편으로 가르치는 것을 선택한 것임을. 그녀는 선생님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 친구가 필요한 것이다. 이런 누이 좋고 매부 좋고가 어디 있을까?

  바라건대, 에밀리가 지겨워하지 않고 나의, 아니 우리의 영어 선생님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그럴려면 내 영어 실력을 업그레이드해야 하는데... 맨날 김치 담글 줄 아니, 남편 어떻게 만났어, 한국의 시댁 문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그딴 것만 물을 수는 없지 않은가?  영어에 입문하면서 영어 자체도 중요하지만 다양한 분야의 학습이 전제되어야 맥 끊기지 않는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걸 절감했다. 초보자를 면할 순 없겠지만 에밀리를 만난 건 내 인생의 행운임에는 틀림없다. 에밀리가 너무 일찍 우리 그룹(대 여섯 명)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일은 수잔을 만나는 날이다. 수잔 얘기는 내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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