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은 아이들 동문선 문예신서 2002
니콜 파브르 지음, 김주경 옮김 / 동문선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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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첫 아르바이트




  수능 시험을 마친 고3들, 요즘 자유 시간을 주체할 수 없다. 막바지 대입 전략으로 마음 부담은 크겠지만, 물리적으로 주어진 시간이 많다 보니 괜한 고민들을 한다. 내 딸아이와 친구들도 그런 상황이다. 각자 운전을 배운다, 헬스클럽을 다닌다, 영어 학원을 다닌다 해도 늦은 밤까지 공부하던 때에 비하면 여유만만이다.    



  성정이 재바른 친구들은 벌써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기도 했단다. 주로 패스트푸드점이나 삼겹살집, 치킨집에서 서빙을 한단다. 호기심이 생긴 딸아이도 물어온다. 동네 치킨집에서 아르바이트생 구한다는데……. 말끝을 흐리는 품새가 자신도 아르바이트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완곡한 표현일 게다. 작년에 이런 과정을 먼저 겪은 친구가 생각나 나는 속으로 웃었다. 호텔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던 친구딸은 사흘을 견디지 못했다. 난생 처음 신어보는 하이힐에다 정장차림으로 대여섯 시간동안 고객을 상대한다는 건 어려운 경험 없던 열아홉에겐 무리였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시작한 아르바이트 치고는 혹독한 대가를 치른 셈이었다.   
 


  한참을 거슬러 내 시절은 어떠했는가? 입시를 마친 그 겨울, 한 옷가게에서 생애 첫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 때만 해도 학생이라면 대개 용돈이 궁할 시절이었다. 그런 딸을 위해 오지랖 넓은 엄마가 손수 아르바이트 자리를 주선해주었다. 궁해서 시작한 아르바이트였지만 그래도 일말의 낭만 같은 걸 기대했던 나는 첫날부터 그런 생각을 접어야했다. 사회는 냉혹했고,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아르바이트생인 나 말고 정식 여직원이 둘 있었다. 그 둘은 미묘한 경쟁 관계였다. 아니, 한쪽이 일방적으로 사장의 전폭적인 신뢰를 얻고 있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신상품 가격을 책정하고, 할인율을 정할 때 사장만큼 입김을 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 하루 매출 장부를 기입 검토한다는데 대한 특권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활기차고 당찰수록 상대적으로 일의 주도권을 갖지 못한 나머지 여직원은 주눅이 들었다. 덩달아 감정이입이 된 나도 침체되어 있었다. 흐트러진 옷가지를 제 때 개켜놓지 못해서 눈치 봐야 했고, 그 많은 종류의 옷에 붙인, 암호로 새겨진 일본식 가격표를 해독하지 못해 맘 졸여야 했다. 매출이 신통찮아도, 재고 현황 아귀가 맞지 않아도 사장을 대신한 그녀는 주눅녀에게 짜증을 냈다. 곁에 있는 나는 덩달아 그 분노를 감내해야 했다. 어쩌다 그건 아니고, 라는 반발이 주눅녀에게서 나오면 그녀는 항상 이렇게 되받아쳤다. - 너, 아버지 없다고 나 무시하니? 아무도 의식하지 않는 제 아버지의 부재를 타인에게 각인시킴으로써 위기를 모면하고자 했다. 인정받지 못한 스물아홉의 주눅녀와 사회를 미처 알지 못한 열아홉의 나는 그런 말을 하는 그녀도 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공감하곤 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그토록 힘들었으면서 왜 쉽게 일을 그만두지 못했을까? 그건 절실함의 문제였다. 나남할 것 없이 풍족하던 시절이 아니었기에 한 번 시작한 아르바이트를 그만 둔다는 생각을 쉽게 하지 못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 상황을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어 달 남짓한 아르바이트가 끝났을 때까지도 신뢰녀의 행동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훨씬 뒤 나는 그 답을 니콜 파브르의 ‘상처받은 아이들’(동문선, 2003)에서 어렴풋하게나마 얻을 수 있었다. ‘죽은 나무들은 버려야지. 살아 있는 나무만 필요해. 살아 있는 나무들로 모든 사람을 꼼짝 못하게 가둘 거예요.’(87쪽). 아버지 얼굴을 못보고 자랐다는 그녀도 책 속의 파스칼처럼 아버지 같은 무가치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처음부터 자신을 단련시켰던 것이다. 오직 자신의 기준으로 싹수가 노란 모든 것들은 가지치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말끝마다 내뱉던 아버지 부재에 대한 절규는 강해야 살아남는다는 왜곡된 정서의 발현이 아니었을까.  



 처음으로 돌아가서, 나는 딸아이의 아르바이트에 관한 낭만적 호기심은 잠시 미루는 게 좋겠다고 말할 참이다. 절실해도 상처받기 쉬운 욕망은 절실하지 않을 때 실패를 담보하기 쉬우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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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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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잉과 고립 사이




  사람 사이는 적당해야 오래 간다. 넘치면 오해가 잦아지고, 모자라면 우울이 깊어진다. 오해가 잦으면 피곤해지고, 우울이 깊으면 자괴감에 휩싸인다. 오해의 상처를 건너지 않고, 우울의 진저리를 맛보지 않기. 누구나 그런 관계를 꿈꾼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과잉과 고립 사이 그 ‘적당함’의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 사이는 쉽고도 어렵다.   



  나들이할 때 내 차에 동승하는 지인이 있다. 오늘, 차에 오르자마자 그녀는 손에 들고 온 우유 한 팩을 급하게 마셨다. 약속 시간에 늦은 터라 식사대용으로 가져 온 것 같았다. 너나 할 것 없이 바쁜 아침, 분주했을 그녀의 외출 준비 상황이 떠올라 마음이 짠했다. 한데 그런 연민도 잠시, 나는 당황했다. 우유를 다 마신 그녀는 빈 팩을 꾹 눌러 접더니 차 안을 두리번거렸다. 설마 이 좁은 차안에서 우유팩 버릴 곳을 찾는 건 아니겠지, 그런 내 생각이 오해이기를 바랐다. 
 


  볼일을 본 뒤 그녀를 내려주고 친구를 만나러 갔다. 친구의 리모델링한 사무실을 구경하러 가는 중이었다. 자주 만나는 사이는 아니지만 나는 그 친구를 좋아하고 존경했다. 자신의 일에 자긍심을 가지고 있고, 열정적인데다 성실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친구에게 선물할 빨간 하트 모양 화분을 사서 조수석에 싣던 나는 살짝 기분이 상했다. 보조석 바닥에 꼭 눌려 접힌 우유팩이 나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불쾌한 감정보다는 설마 했던 내 생각이 맞았다는 것에 황당함이 밀려왔다. 어째서 쓰레기를 차 안에 두고 내릴 생각을 했을까? 내리면 곧장 휴지통이 있다는 걸 알면서 그걸 들고 내리는 수고가 그리 컸을까? 어쩌면 사소한 일일수도 있겠지만 그녀의 무신경이 마음에 걸렸다. 


  마침 멋지게 변한 친구의 사무실 내부를 감상하노라니 눈과 마음이 정화되어 갔다. 깨끗한 사무실에 앉아 좋은 사람과 나누는 담소는 정겨웠다. 친구의 그 어떤 말도 미덥고, 그 어떤 충고도 달갑기만 했다. 두어 시간의 수다를 떨면서도 지겹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깟 차 안의 쓰레기 따위는 잊어버렸다. 일에 대한 친구의 열정과 비전을 들으며 나름의 각오를 새기기까지 했다. 적극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사람들의 긍정적인 마인드를 벤치마킹해야지, 하는 맘으로 충만하기만 했다. 
 

 

  그런데, 차 바닥의 구겨진 우유팩을 들고 집으로 돌아올 때 다시금 바늘 끝 같은 마음이 돋았다. 하지만 우유팩을 씻어 쓰레기 분리함에 넣으면서 곰곰 생각했다. 차안에서 버릴 곳을 찾아 두리번거릴 때, 그냥 두고 내리라고 먼저 말할 걸. 그랬다면 내 맘이 편했을 걸. 그럴 리도 없겠지만, 하트 화분의 그 친구가 그런 상황이었다면 내가 그처럼 황당해했을까? 아닐 것이다. 단순한 실수로 넘기고 스스로 친구를 위한 변명거리를 찾았을 것이다.  



  무릇 사람 관계는 장점보다는 사소한 것에서 단점이 부각되기 마련이다. 적당한 거리가 필요한 건 그 단점을 커버할 만큼의 거리를 말한다. 타인을 충분히 좋아할 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 그게 보장되지 않을 때 우리는 타인이 불편하거나 불쾌해진다. 하지만, 그건 상대의 잘못이 아니다. 타인에게 할애할 애정보다 내 마음 보따리가 작아서일 뿐이니까. 결국 모든 건 내 맘에 달렸다. 아직 수양의 길은 멀기만 하다. 그걸 알면서도 알랭 드 보통의 철학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청미래, 2007)에서 위안을 얻고 싶어지는 왜일까? <다른 사람들과 누리는 행복은 두 가지 종류의 지나침에 의해 제한되는 것 같다. 하나는 질식이고, 또 하나는 외로움이다. 사랑의 경계에는 두 가지 요소가 도사리고 있는 것 같다. 늘 전자가 더 큰 위험이라고 생각했다.(146쪽)>  



 질식도 외로움도 과잉이면 곤란하지만, 더 위험한 것은 질식이란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 사이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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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12-30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웃, 기웃 하다가 `내가 읽은 책이로세!'하며 반가움에 댓글 남깁니다.(리뷰와 무관한 잡동사니 댓글이지요)
전 이 책 읽고 이런 남자와 연애한다면 참 좋겠다, 생각하다가 말았습니다. 관계를 명징하게 해석하고 하나의 기호에 시기적절하게 대처하는 남자인데, 연애에 있어서 저는 늘 그 부분에서 길을 잃거든요. 나의 기호와 저 사람의 사인이 불일치하는 시점, 저는 이 시점의 연애를 즐기는데 알랭 드 보통은 이 부분을 괴로워 하는 남자 같이 보였어요.

적당한 거리, 에 동감입니다. 거리가 없는 관계는 발전할 수 없어요.

다크아이즈 2009-12-30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배려가 깊어 소심틱하게(?) 보이는 이 남자가 걱정됐어요. 굳이 고르라면 연애 상대보다는 변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결혼 상대자 감으로는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리뷰와 무관한 글이 리뷰와 접목될 수 있다면 더 좋은 얘기라 생각하기에 전 더할나위 없는데요. ㅋㅋ
리뷰를 빙자한 일상에 관한 글을 모처에 연재하고 있는데 그걸 여기다 옮겨놓다 보니 알라딘 다시 들락거리게 됐어요. 아기 잘 크고 있죠?
 
천년의 왕국
김경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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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 좋아하세요?




  책에 대한 호불호는 읽는 이의 취향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별로라고 한, 어떤 책을 빌렸다가 돌려주며 지인이 말했다. 이 책을 왜 안 좋아해요? 그럼 어떤 책을 좋아해요? 당황한 나는 잠시 침묵으로 변명할 시간을 벌어야했다. 나는 이 책이 좋은데, 그럼 댁은 대체 어떤 책을 좋아하냐는, 도발과 힐난의 뉘앙스가 묻어 있는 그 질문을 곱씹으며 내 독서 취향을 점검해본다. 나는 어떤 책에 몰입하는가?  

 

  요즘 김경욱 작가의 매력에 빠져 있다. 그의 '천년의 왕국'(문학과 지성사, 2007)은 아무리 봐도 혼자 읽기에 아깝다. 주관적이기만 한 ‘혼자 읽기에 아깝다’는 생각은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지 못한데 대한 독자로서의 안타까움의 표현이기도 하다. 우리에겐 박연으로 알려진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의 조선 생활 접수기를 소설화한 작품인데 첫 페이지부터 독자를 압도한다.  

 

  개인적으로 조선 효종 때 조선을 다녀간 네덜란드인 하멜에 관한 관심이 많았다. 하멜 관련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벨테브레까지 연결이 된다. 벨테브레 일행은 하멜 일행보다 약 삼십 년 먼저 우리땅을 밟은 네덜란드인들이다. 17세기 조선에 표착했다 일본을 거쳐 다시 네덜란드로 돌아간 하멜의 ‘하멜 표류기’에 기록된 한 줄 역사가 소설의 모티프다. 그것을 소설적 상상력으로 접수한 작가의 재능이 부럽기만 하다.  

 

  소설의 시작은 하멜과 벨테브레의 우연한 만남이지만 주요 내용은 벨테브레를 비롯한 일행 셋의 조선생활 기록기라 할 수 있다. 이방인이 본 조선 후기 사회학은 오리엔탈리즘이란 프리즘을 통과해 재구성된다. 조선을 ‘시의 나라’로 읽고, 조선인을 슬픔과 울음과 호기심이 많은 이방인으로 보는 벨테브레의 시선에서 그것을 읽을 수 있다. 당시 서구 사회는 중상주의, 종교개혁, 과학발달 등으로 이미 문명 세계라 자처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런 시각이 가능했을 것이다.  

 

  서구인이 본 이방인 조선에 대한 고찰로도 훌륭한 소설이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두 가지 면에 눈길이 갔다. 인간 보편성과 문장이 그것이다. 세상에 잘 쓰는 작가는 많다. 그 작가들 때문에 희망과 절망을 오가는 나날이지만 책 읽는 즐거움이 뭔지를 알게 해주는 이런 작품들을 만나면 마지막 책장 넘길 때까지 설레기 일쑤다.  

 

  벨테브레 일행의 개별성과, 조선조정이란 집단 사이의 긴장과 갈등은 시공간의 경계를 허무는 인간 본연의 문제이기도 하다. 과거를 이야기하지만 그 안에서 인간의 보편성에 대한 현실을 만난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소설이다. 그 때문에 김경욱 작가가 매력적으로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그가 조직하는 문장은 가멸차기 이를 데 없다. 끊임없는 직설과 대구, 조각조각 분해되어 이어지는 단문의 현란함에 아찔하기만 했다. 짧은 문장으로 승부하는 글이 이토록 강열할 수 있다는 것은 김훈 작가 이래 다시 맛보는 짜릿함이었다. 시대적 배경이 비슷한 김훈의 ‘남한산성’이 감각적이라면 김경욱의 문체는 지적이란 느낌이 들었다.    

 

 <이교도들은 세계의 끝에서 세상의 중심을 숭배했다. 우리의 육체와 영혼을 자신들의 심연 속에 가둘 것이었다. 이 은둔의 왕국을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은 바람과 구름과 새뿐이었다. 새로 만나는 이교도가 늘수록 나의 불안은 붉게 달궈졌다. 달궈진 불안은 내 영혼과 심장을 갉아먹었다. 이교도의 초대를 받으면 나는 전날부터 굶었다. 나는 이 은둔의 땅에서 배부른 광대로 죽을 것이다.>  

 


  맛보기 밑줄 그은 문장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돌아가자. 나와 독서 취향이 다른 지인이 묻는다. 그럼, 어떤 책을 좋아하세요? 삼초 간 호흡을 가다듬은 나는 대답한다. 시대를 초월하는 인간 보편성을 노래하는데다, 흡인력 있는 문장이 받쳐준다면 절로 빠져 들게 되지요.  

 

  빼어난 책이라도 독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있다. 천년의 왕국, 이야말로 그런 책 중의 하나이다. 훌륭한 책이 반드시 베스트셀러가 되라는 법은 없지만 ‘천년의 왕국’이 묻히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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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귀 맞은 영혼 - 마음의 상처에서 벗어나는 방법
배르벨 바르데츠키 지음, 장현숙 옮김 / 궁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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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상함’에서 벗어나기




  한 여자 여기 있다. 붉은 벽을 배경으로, 검고 긴 어깨머리를 한 여자. 황소 눈망울을 한 여자의 시선은 오른쪽이다. 오른 뺨을 어루만지는 그녀의 손길은 가늘고, 얼굴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황량하다. 짐짓 생각에 잠긴 듯한 여자, 실은 상처받았다. 그녀는 따귀 맞은 제 영혼을 그렇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 여자는 배르벨 바르데츠키가 쓴 ‘따귀 맞은 영혼’(궁리,2002)의 표지 인물이다. 원 그림 제목은 ‘생각에 잠긴 여인’이라지만 어쩌면 그녀도 제 깊은 상처 때문에 생각에 잠겼을지도 모른다. 영혼이 따귀 맞았으니 얼마나 아플까? 놀란 여자의 눈망울과 황망한 표정이 절묘하리만치 이해가 된다. 
 


  누군가 나를 거부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  자존감 다친 그 부위에 생채기가 난다. 불안정, 무력감, 분노감에 이어 자기불신에까지 이른다. 이렇게 마음 상한 상태에서 우리는 상대에게 완강히 고개 돌려버린다. 이 책은 그 아픈 마음을 다독여주고 위로해주는 치유서이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마음의 상처를 주고받는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은 따귀를 맞는다. ‘마음상함’으로 번역된 이 주제는 ‘과거’의 심리 상태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과거에 해결되지 않은 욕구나 감정, 상처 등이 현재와 부딪치는 순간,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깊은 상처를 남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 상함’은 누구나 겪는데, 가까운 사람일 때 그 상처가 크고 깊다는 사실에 공감이 간다.  
 

 

  이 책에서 나는 두 가지 사실에 매우 흥미를 느꼈다. 마음상함의 원인을 남 탓으로 돌리는 ‘투사’라는 개념과, 자기 안에 남의 말을 그대로 담아 내 탓으로 돌리는 ‘내사’라는 개념에 관해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생긴 자기반성이 이 리뷰를 쓰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영화의 필름과 화면은 다르다. 필름이 실체라면 화면은 필름이 만들어낸 현상 즉, 투사일 뿐이다. 예를 들자. 오랜만에 만난 친구, 얼굴이 굳어 있고 하품까지 한다. 단지 먼 길 오느라 피곤했을 뿐인데, 우리는 친구가 화가 났거나 나를 거부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일은 그 현상을 친구 탓으로 돌리는 일이다. 내사 또한 마찬가지다. 네 노래는 들어줄 수가 없어. 정색하고 던진 노래 잘 하는 친구의 한마디에 우리는 노래방,이라는 간판만 봐도 알레르기가 생긴다. 그게 굳어져 어느새 자신은 노래 못하는 인간이란 굴레를 스스로 씌워 버린다. 사소한 오해가 투사를 거치면서 커다란 갈등이 되고, 작은 말 한마디가 내사를 만들어 심각한 자기연민에 이르게 한다.  



  이처럼 남 탓과 내 탓만 극복해도 마음상함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다. 투사와 내사는 실체가 아니라 허상일 뿐이다. 다른 사람이 주는 자극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다면 상처를 쉽게 피해갈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마음상함에서 벗어나는 작가의 충고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마음 상한 타인과의 관계를 끊기보다 마음이 상했다는 것을 타인에게 고백하는 것이 우선이란다. 이때의 고백은 상대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경우라야 성공할 확률이 높다. 대부분의 경우 그런 줄 몰랐다고 딴전을 피우거나 상대를 재공격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 다음 상대와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다. 섣불리 예전처럼 돌아가겠다고 서두르다 보면 관계 회복에 실패하기 쉽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감정과 직접 대면하는 연습을 한다. 다시 말하면 투사와 내사를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과 사물에 대해 과거와 다른 시각을 가져 보는 것이다.  



  자연스레 모든 문제는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마음상함의 해결점 또한 내 마음 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유를 가지고 마음 한 자락 열어 놓을 때 여러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상처로 온밤을 지새운 경험이 있는 이들에게 권할 만한 책이다. 마음상함은 결국 내 안에서 시작해 내 안에서 끝난다는 것을 알게 해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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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그네 오늘의 일본문학 2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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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함도 다정으로




  내가 그미를 알게 된 것은 오래지 않다. 책 읽는 모임에 친구 소개로 나타난 그녀는 한마디로 멀티패셔니스트였다. 작은 두상에 어울리는 시원한 망사 두건, 눈썹에 닿을 것처럼 날아오른 인조눈썹, 옷 색깔에 맞춰 단 귀걸이, 길고 가지런하게 손질된 손톱 등,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녀는 완벽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엣지있는 그녀의 멀티 패션은 예쁜 얼굴과 날렵한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우리 독서팀의 독보적인 인기인이 되어버렸다. 독서 토론 후, 점심을 겸한 친목 자리에서 이어진 그녀의 패션 강좌(?)는 책 읽는 즐거움을 앞질렀다. 귀걸이는 윗옷 색깔에 맞춰 달아 보세요. 머플러는 매는 방법에 따라 그 느낌이 달라요. 패션의 완성은 신발과 가방이니 소홀하면 안 돼요. 그녀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다 보면 몇 술 뜨지 않았는데도 배부른 느낌이었다. 패션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얘기인데도 그녀의 한마디는 사람을 몰입하게 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그녀에겐 사람을 끄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녀를 매혹으로 이끈 건 그녀의 패션 감각이 아니라 그녀 자체였던 것이다.  

 

  그녀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밝았다. 바둑, 에어로빅, 노래교실, 종교 활동, 산악모임 등 그녀의 활동 반경이 넓은 만큼 그녀의 매혹 또한 커보였다. 그녀의 긍정적인 인품을 높이 산 우리는 급기야 독서회 부설 산악모임까지 결성해 그녀를 등반대장으로 임명해버렸다. 리더가 된 그녀는 최선을 다했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산행, 초보자들을 배려한 장소를 물색하고, 자세한 산행코스를 설명해주고, 운전까지 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번거로운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찌푸린 적 없고, 진심으로 멤버들을 챙겼다. 그녀 덕분에 우리는 몇 달 동안 경주 용장골에서 양학산, 도움산, 봉좌산을 거쳐 동대산 정상까지 오르는 희열을 맛보았다.  

 

  산행 중 담소를 나누며 찍은 사진에서, 일행의 시선은 하나같이 그녀를 향해 있다. 그녀를 향한 무한한 신뢰의 눈빛들, 그것은 그녀 긍정의 리더십을 증명하고도 남았다. 상대를 편하게 해주는 아량, 그 어떤 불편함도 만들지 않는 천성적 관용이 그녀에겐 습관이 되어 있었다. 마음이 태산인 사람에겐 까칠함도 다정이요, 마음이 지하 감옥인 사람은 다정도 까칠함이 되기 쉽다. 그녀를 보며 마음의 감옥을 생각한다. 내 좁은 식견에서 오는 강박과 욕망을 질책하고 반성한다.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공중그네’(은행나무, 2005)는 강박이나 욕망에 사로잡힌 현대인의 초상을 보여준다. 세상 범부들 대개, 욕망은 높으나 노력은 제자리걸음이다. 그 와중에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커져가고, 그 두려움은 크고 작은 강박이 되어 자신을 괴롭힌다. 이런 현대인의 슬픈 자화상을 두고 작가의 처방은 명쾌하기만 하다. 사람들아, 인생은 길고 욕망은 순간이란다. 그 인생 즐기려면 단순하고 낙천적이 되어라. 정신과의사 이라부를 등장시켜 무거운 삶을 가볍게 메친다. 쓸 데 없이 집착하고, 고민하고, 아파하지 않기. 내 영혼이 피폐해지는 건 과욕에서 오는 강박 때문이다.  

 

  단순하게 살고 싶은 독자들은 기꺼이 이라부가 주는 유쾌한 비타민 주사 한 방을 맞는다. 제 안에 갇힌, 검붉고 탁한 욕망의 핏줄 밀어내고, 맑고 푸른 낙천의 비타민 온몸으로 휘돌게 하고 싶은 것이다. 때론 공중그네 같은 삶의 곡예에서, 맨바닥에 나뒹굴더라도 그건 파트너의 잘못이 아니다. 내 손목을 놓친 것은 상대가 아니라 내 안의 내가 스스로를 놓아버린 것임을 알자.  

 

  무시로 흔들리는 삶, 원한다면 비타민 주사 처방을 위해 책속의 이라부에게까지 달려갈 필요도 없다. 곁 돌아보면 패션리더이자 인생리더이기도 한 숱한 그녀들이 담백한 인생 처방전을 들고 손 흔들 터이니. 그들이 내미는 처방 또한 정신과의사 이라부와 다르지 않다. - 무거운 게 삶이니 가볍게 건너라고. 까칠함도 다정이니 타인에게 제 맘 덜어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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