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피아니스트

 나는 잠이 많다. 이제껏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면 '너무 많은 잠' 때문이라고 자가진단을 내릴 정도로.   그래도 가끔씩 새벽녘이면 선잠 때문에 뒤척일 때가 있다.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기에는 애매하고, 그렇다고 어둠 속, 눈 멀뚱거리며 천장의 야광별 찾기 게임을 하는 것도 머쓱한 시간.  그럴 때 다시 잠들기용 수면제로 활용하는 것이 영화채널이다. 펼쳐지는 영상이 내 취향인지 아닌지에 상관없이 대개 삼십분 정도가 지나면 다시 깊은 잠에 빠지게 되니 이보다 더 좋은 수면제가 어디 있겠는가.

  프랑스 영화 <라 피아니스트>도 처음엔 수면용이었다. 홀로코스트를 고발하는 헐리웃 영화 '피아니스트'와 제목은 같지만 전혀 별개의 영화이다. 강렬하고 충격적인 영상은 새벽 수면제로 활용하려 했던 내 의도를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원하지 않아도 절로 주인공 에리카에게 빨려들고 만다.


   

 

 

 

 

겉으로 드러나는 에리카는 건조하고 냉정한 피아노 선생이다. 하지만 숨겨진 그녀의 욕망은 변태적이고, 대담하며 자기파괴적이기까지 하다. 뭇 남성들의 시선에 무심한듯한 그녀 내면은 정작 욕망으로 끓어넘친다. 성인 영화관을 전전하는 포르노 광에다가, 연인들의 카섹스를 훔쳐보는 관음증이 있으며, 자신의 신체를 칼로 자해하는 파괴적 성향까지 있다.

  그녀의 이러한 뒤틀린 성적 판타지는 평범하지 않은 모녀 관계에서 출발한다. 엄마는 이미 중년에 접어든 딸 에리카의 삶을 쥐락펴락한다.  딸의 일상을 체크하고, 옷차림을 간섭하며, 심지어 같은 침대를 사용하기를 강요한다. 엄마에게 딸은 신이자 악마이다. 에리카는 이러한 비정상적인 엄마표 애정의 굴레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쓴다. 그녀에게 집은 엄마라는 스토커와 동거해야 하는 성가시고 불편한 암흑일 뿐이다.

                                      

  불편부당한 것을 감내해야 하는 에리카에게 출구는 있는가. 젊고, 잘 생기고, 진중한 제자 클래머의 등장으로 관객은 한시름 놓는다. 그래, 바로 저거야. 정석대로라면 클래머의 역할은 에리카의 상처와 혼돈을 감싸 안는 것이어야 하리라. 하지만 영화는 보기좋게 순진한 관객의 희망을 묵살한다. 평범한 연인들의 낭만적인 행보를 기대한 클래머에게 자기 파괴적인 고립자인 에리카는 너무 벅찬 상대이다. 외적으로 언제나 정돈되어 있고, 위압적이며, 고고한 그녀에게 클래머는 서서히 지쳐간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해석하는 에리카를 감당하기엔 클래머의 영혼은 너무 젊고 설익었다.

  '사슬에 묶으라구, 내 몸을 쓰러뜨려. 때리고 밟고, 채찍질하라구!' 억압된 그녀 내면의 반어법을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 연인 클래머는 혐오감과 모멸감에 치를 떤다. 그녀에게 벗어나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새디스트가 된다. 슬픔으로 어룽진 폭행을 하며 클래머는 절규한다. '이게 바로 네가 원했던 거야?'  클래머는 결코 그녀만의 존재 방식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밝음 보다는 어두움, 친근 보다는 혐오, 편함 보다는 불편함이 앞서는 이 영화에 '잠'을 헌납하고서라도 몰입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노벨문학상을 탄 소설을 영화한 것이라서?   영화로 나온 것이 노벨문학상을 탄 것보다는 훨씬 먼저니까 그런 선입견과는 무관하다. 아마 에리카로 상징되는, 사회적 여성성의 욕망이 어떻게 이지러지고,  왜곡되고, 분출될 수밖에 없는가를 명배우 이자벨 위뻬르가 잘 대변해주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실망스럽게도 에리카의 종착역은 새롭지도 충격적이지도 않다. 엄마와 클래머와 세상과 불화하던 에리카가 선택한 것은 소극적 자해라는 파국이었다. 억압의 본질인 세상을 향해 칼을 들이대도 시원찮을 판에 연약한 자신의 어깨를 선택한 것이다. 물살 세던 그녀 내면의 욕망과는 한참 거리가 먼 선택이다.

  연주회를 마친 뒤 칼로 찌른 어깨를 감싸 쥐고, 에리카는 꼿꼿하게 거리를 나선다. 어디로? 그렇게도 벗어나고자 했던 엄마가 살고 있는 '집'으로!   그 암울하고 심연 같은 집의 구멍으로 들어가는 에리카를 그리면서 미카엘 하네케 감독과 작가 옐리네크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까? 어찌할 수 없고, 모호하고 실망스러운 선택이야말로 결핍된 한살이를 사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라고.  라 피아니스트를 떠올리는 새벽이면 통증처럼 따라붙는 불면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

 


        *  사진 위에서 차례로  배우 이자벨 위뻬르,  책 피아노 치는 여자,  라 피아니스트 포스터,  감독 미카엘 하네케,  원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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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그렉 버렌트 외 지음, 공경희 옮김 / 해냄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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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프라 윈프리의 게스트 하우스

 

 호기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좋은 글을 쓸 확률이 높다. 비단 글쓰기 뿐이겠는가. 미술이든 음악이든 무릇 세상사와 밀접하지 않은 예술은 그 진정성에 의심이 간다. 해서 뭔가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은 체험을 중요시한다.

 

 한데 진정한 글쟁이는 엉덩이가 질겨야 한다는 작가들의 충고를 추앙이라도 하듯,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나는 하루 종일 의자나 소파에(더 진실하게는 침대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때가 많다. 직접 경험을 하기 위해 투사처럼 현장으로 나서지 않는 제 게으름을 탓하는 대신,  간접 경험도 경험이다, 는 배짱으로 케이블 티브 체널을 여기저기 돌려 보는 것이다.  왼종일 뮝기적거리면서(?) 얻은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야 말로 간접 경험의 오롯한 소산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이름하여 오프라 윈프리 쇼의 한 장면이다. 

 

  결혼을 앞두거나 남자를 사귀고 있는 고민녀들을 초대해 전문가가 상담을 해주는 장면이 눈에 띈다. 마침, 남자를 대하는 여성의 다양한 심리에 대해서 매우 궁금했으므로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되었다. 이보다 더한 간접 체험은 없다. 쇼에 출연한 상담가는 꽤 현실감과 균형감이 있어 보인다.

 

  고뇌에 찬 여성 출연자들을 상담해주는 이는 의외로 남성이다.  한참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섹스 앤시티의 공동 작가 중 유일한 남자인 그렉 버렌트란다. 결혼 생활에 자신 없다고 말하는 마자, 언제나 할 일이 많은 남자, 이런 상대남을 만나는 여성들엑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 이 책을 쓴 그렉 버튼의 속시원한 충고를 지켜보면서 나는, 바로 이거다 하고 박수를 쳤다. 비록 헐리웃 문화에 익숙한 충경이긴 하지만 우리의 남녀 문화를 바라보는 시선에 적용시켜도 전혀 무리가 없다.  그날 밤 당장 책을 주문했다.

 

  주변에서도 이런 흔한 얘기들을 들을 수 있지 않은가. 갑이라는 여자 왈, 남편 될 사람과 공동명의로 신혼집을 등기하겠다고 했더니 시댁에서 파혼을 선언했어요.  남자 하나만 보면 나무랄 데 없는데, 남자는 부모를 설득할 자신이 없나봐요. 끝내자네요. 어떡하면 좋아요?  을이라는 여자 왈, 제  약혼남은 진국이에요, 그야말로 진국!   절 잘 챙겨줄뿐더러, 뭐든지 솔선수범하죠. 일 처리도 깔끔하구요. 한데 술만 먹으면 폭력을 일삼아요. 그것 하나만 고치면 더 바랄 게 없는데, 어떡하면 좋아요?

 

  만약, 두 고민녀 앞에 그렉 버렌트가 있었다면?  주저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고.

 

  상대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줄도 모르고 여자는 환상을 가진다. 나이에 상관없이 주도권을 빼앗긴 쪽에서는 마음을 다친다.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한 이 솔직대담한 카운슬러는 허구에 가득찬 여자들의 환상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별 볼일 없는 상대에게 매달리는 헛똑똑이  여자들에게, 안절부절하며 헛된 희망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는 바보 애인들에게 그렉 버렌트는 말한다. 여성들이여, 본질을 깨달아라. 제발 헛된 시간의 장난에 눈물 흘리지 말아라.  우리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며, 나아가 얼마나 사랑하고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들인가를 깨치라고 충고한다.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이 명쾌한 대답을 얻기까지 여자들은(때론 남자들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고 불편부당한 시간들을 견뎌냈을 것인가. 아픔이 진행되는 동안엔 어떠한 충고도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에 더한 괴로움만 따를 뿐이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그렉 버튼의 충고를 눈치챈다.  사랑이 떠난 뒤에야 그 모든 사실을 알게 되지만 그 땐 이미 너무 늦었다.

 

  당당하고 멋진 삶을 꾸릴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이 있는 여성들이여, 하잘 것 없는 상대 때문에 괴로워하거나, 타인이 이끌어가는 삶에 이리저리 휘둘린 적은 없는가. 이런 우리의 연약한 인간성에 유쾌한 상담자 그렉 버튼은 다시금 호소한다.  -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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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탈 2008-06-11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사고, 잡지 뒤에 실릴 글정도라고 생각했는데, 별을 5개나 주셨네요 ~ ㅎ
 
에곤 실레 시공아트 12
프랭크 휘트포드 지음, 김미정 옮김 / 시공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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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15층짜리 아파트의 맨 위층에 산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이웃이 말한다. 자신은 바깥 출입을 자주 하는 편이 아닌데, 엘리베이터를 타려면 항상 15층에 멈춤 표시가 있더란다.  ' 그 집에 손님이 많이 오는 모양이죠?' 라고 말하는 이웃의 얼굴엔 불편한 끼가 역력하다. 당황스러웠다. 찔리는 게 없지 않았지만(논술 공부를 하러 몇몇이 드나들기는 한다.) 면전에서 무안을 당하니 마땅히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 문제에 대해서 실은 나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9층에 살 때 이런 문제로 시비거는 이웃이 없었으니 15층인들 무에 그리 다를까 싶었던 것이다. 소심한 나는 상처를 입었지만 그렇게 말하는 이웃도 나름의 사정은 있을 것이다.

 
이중 자화상

  가만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이웃아주머니가 기왕에 나를 알고 있었다면 그렇게 무안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런 이웃의 불편을 헤아려 최대한 배려를 하려 애썼을 것이다. 어린왕자에서 여우가 말한 '길들임'에 관한 단상이 떠오른다. 저번 동네에서는 서로의 존재가 용인되고 인정되는 '길들여짐'의 단계에 있었지만, 새로운 동네에서 그들에게 나는 낯선 국외자일 뿐이다. 서로 길들인 적 없는 관계에서 서로 상냥하게 배려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이게 바쁜 현대인의 자화상인지도 모르겠다.  맨 위층에 살면서 엘리베이이터를 남보다 자주 사용하는 새 입주자라면 터줏대감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관계에서는 1층이나 3층은 몰라도, 타인의 아까운 시간을 축내는 15층에서 자주 엘리베이터를 사용하는 것은 용서가 안 되는 게 인간의 마음이기도 한 것이다. 

 

  생각하면 인간만큼 단순하면서도 복잡미묘한 동물도 없다. 서로 길들여지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일단 길들여진 사이는 얼마만큼의 인간적, 사회적 모순이 있어도 그 관계는 매끄럽게 유지된다. 그러한 현상을 나는 인간 본능의 이중성에서 찾는다. 그날 저녁 에곤 실레의 '이중 자화상'이라는 작품을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표현주의 화가 중 뭉크나 클림트만큼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그의 그림 세계는 여타 작가들 못지 않게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 중 인간이 부딪힐 수 있는 한계상황을 포착한 이중자화상을 들여다보면 인생 전반에 대한 그의 혜안이 돋보인다.

 

  그림 속 실레는 두 개의 얼굴로 관객을 내려다본다. 경계와 호기심의 두 얼굴이 아래 위로 뺨을 맞대고 있다. 연필에다 약간의 수채화를 덧칠한 그의 이중자화상은 섬뜩하리만큼 이중적 인간 정서를  대변하는 하나의 코드로 읽힌다. 위쪽의 자화상은 호기심과 연민이 서린 눈빛이고, 아래쪽의 눈은 분노와 욕구불만이 가득한 표정이다. 한 발   물러서는 경계와 두 발 다가서는 호기심의 눈을 가진 게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부지불식간에 분열된 화가의 자아는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는 관객들을 우롱하는 것만 같다. 두 개의 얼굴은 이 세상은 약간의 이완과 아주 많은 긴장이 필요한, 요지경 같은 곳이라 일깨워준다.  즉, 경계 없이 이완한 눈빛과 긴장하고 위태한 적의의 눈빛이 공존하는 게 인생이라고 말해준다.

 

  아울러 모든 관계의 갈등은 서운함에서 온다는 것을 그 눈빛은 가르쳐주고 있다. '나는 이렇게 해줬는데 상대는 왜 이렇게 밖에 안 해줄까' ,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저이는 왜 저렇게 생각할까', 사람마다 다르고, 그 다른 것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잠시 잠깐의 실수로 겉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도 치달을 수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이 서운함의 정서를 극복하게 해주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 실레의 이중 자화상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이중자화상을 제대로 깨치는 것만으로도 평화로운 일상이 보장될 수도 있으니까.  내 안에 숨 쉬는 이중 자화상을 잘 갈무리하고 있는 것처럼 뵈는 어떤 사람이 가르쳐준 시 한 편이 떠오른다.

 

  산이라 해서 다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 다 험하고 가파른 것은 아니다 / 어떤 산은 험하고 가파른 산자락에서 / 슬그머니 빠져 동네까지 내려와 / 부러운 듯 사람 사는 꼴을 구경하고 섰다 /  산이라 해서 모두 크고 높은 산은 아니다  (신경림, 산에 대하여)

  '슬그머니 빠져' 나온 산은 이제 고민하리라. 그 이웃에게 어떤 자화상을 그릴 것인가. 세상을 향한 경계와 호기심의 눈이 잘 조화된 그림이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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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딱히 드러낼만한 취미가 없으니 그나마 책이라도 가까이 한다는데 위안을 삼을 때가 있다. 정기구독하는 잡지를 빼고서라도 한 달에 몇 권씩 책을 사다보니 책은 쌓여만 간다. 찾던 책이 어디에 꽂혀 있는지를 몰라 허둥댈 때의 그 낭패감이란!   책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스스로를 책망하는데 그치지 않고 죄없는 책에게 화풀이까지 한다.

  굳은 맘먹고 '책 정리 잘 하는 법'이란 인터넷 검색을 시도한다. 가나다순 정렬법, 작가별 정리법, 장르별 분류법.... 별의별 방법이 다 있지만 내 눈에 띄는 것은 신간 위주 분류법이다. 그 경험자의 충고에 의하면 가장 최근에 산 책이 꽂히는 위치만 지정해주면 된다나. 그렇게 하면 미리 산 책은 자연스레 한 칸씩 밀려나니까 그 책을 산 계기나 시점을 생각해보면 쉽게 책을 찾을 수 있을 거란다. 한데 그 방법도 썩 만족할만한 것은 못 된다. 바지런하지 못하니 금세 책장은 흐트러진다.

  책을 정리하는 가장 나은 방법은 무엇일까? 책을 놓아주는 것이다. 불필요한 책 순서대로 과감하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책이 쌓이는 이유는 너무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알라딘에 접속만 하면 클릭 하나만으로도 책에 대한 기본 정보를 얻을 수 있고, 할인까지 해주니 별 고민없이 책을 고른다. 발품을 팔던 시절에 비해 손쉬운 방법이다 보니 도서관에서 빌려 봐도 될 책까지 굳이 사게 된다.

  책은 왜 주인에게 머물러있는가?  읽히기 위해서다. 세로로 박힌 겉표지 제목만 사랑받기 위해서 책꽂이에 매달려있는 게 아니다. 주인이 어루만져주고, 달래주거나, 반대로 자신 때문에 주인이 웃거나 울기를 원한다. 따뜻한 손길 한 번 안 주면서 흐뭇한 눈길만으로도 만족하라고?   책은 장식품 인형이 되기를 결코 원하지 않는다. 책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조건 쟁여놓는 것은 책에 대한 무례라고 생각한다.

  거창할 것도 없다. 사랑할 자신이 없는 책은 놓아주면 그 뿐이다. 제 발로 움직일 수 없는 그들은 진정 사랑받기를 원한다. 그럴 자신이 없으면 기꺼이 그들에게 자유를 줘야한다.  그것이야말로 책에 대한 예의이다.

  책꽂이를 둘러보면 평생 손길 한 번 가지 않을 책들도 제법이다. 삶의 양식이 가득한 책꽂이를 보면 잠시 뿌듯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 다시 꺼내 보게 될 책은 가진 책의 절반도 되지 않을 것이라는 걸 경험으로 알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이사를 할 때마다 과감하게 책을 떠나보낸다. 내 품에서 홀대받던 책들은 더러는 파지로 실려나가 재생종이로 환생하거나  또 가끔은  나보다 훨씬 나은 이웃을 만나는 행운도 누릴 것이다. 껴안는 불편함보다는 내보내는 합리가 되려 책도 살리고 나도 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더러 아끼던 책을 떠나보낸 뒤, 후회한 적도 있다. 누군가가 빌려간 형식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은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와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가 그랬고, 조카가 빼앗가간 김승희의 에세이 '33세의 팡세'도 그러했다. (김승희의 에세이는 절판되는 바람에 안타까웠는데 최근에 다시 나온 것을 보고 재깍 사들였다.) 그러나 이런 경운 극히 드물다.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구하기 어려운 책을 함부로 처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니 이것은 논외로 하자.)   장정일의 말처럼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 순서대로 책을 놓아주는 것이 가장 덜 위험한 방법이라는데 동의한다. 이런 책은 꼭 필요하면 언제든지 다시 구할 수 있으니까. 

  내게 온 책이 딱딱한 손님처럼 앉아있거나, 홀대받는 천덕꾸러기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책에 대해 집착하지 않고 헐거운 마음이다보니 나는 책을 좀 더럽게 보는 편이다. 속지에는 나도 알 수 없는 메모들이 지렁이처럼 기어다니고, 밑줄과 동그라미가 갈피갈피마다 질펀한 것도 있으며, (그러고 보니 내게 사랑받는 책일수록 이런 현상이 심하다. 책에게 미안하다!) 심지어 싸구려 커피자국으로 낙관을 찍은 것들도 있다. 책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다. 소유하려고 하면 집착하게 되고 집착하게 되면 관리하려들고 관리하려들면 피곤해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가끔씩 십원짜리 동전이 든 돼지저금통을 보면 주인에게 사랑받지 못해 방랑하는 책이 연상될 때가 있다. 동전을 열심히 모으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과감하게 이를 은행으로 가져가는 이는 드물다. 가자니 귀찮고,  남주자니 그래도 돈이라 아까워 그대로 방치한다. 꼭꼭 숨은 집안의 동전을 보면서도 새 동전 발행 비용이 수월찮게 든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제 것에 대한 애착 유무와는 상관없이 발상의 전환 문제이다. 꼭 필요치 않은 것이라면 파지상에도 내놓고, 헌 책방에도 팔고, 이웃에게도 선물하며, 친구들과 교환도 하자.  이 모든 이야기는 책수집가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런 분들은 그 분야의 전문가이기 때문에 나같은 사람을 위해서도  더 열심히 책을 모아야 한다.  물론 손때 묻고, 사연 서러있고, 힘들게 모은 책들은 끝까지 사수하라.

  단순히 내 것이라는 연민 때문에, 책을 함부로 버릴 수  없다는 사명감 때문이라면 책의 소유에서 자유로워져도 되지 않을까. 진정한 요리사는 주방기구를 나열하지 않고, 속 깊은 화가는 붓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기에.  내게 왔다고 다 내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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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10-17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버리는 일, 책을 소유하는 일. 둘 다 난젭니다.
활자에 집착하는 병에 기인한거지요^^

다크아이즈 2006-10-17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 맞아요. 활자에 집착하는 병... 분명 이것도 질환으로 의심해도 되지요?
 
세계의 교양을 읽는다 1 - 개정판, 종합편, 바칼로레아 논술고사의 예리한 질문과 놀라운 답변들 휴머니스트 교양을 읽는다 3
최병권.이정옥 엮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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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대입 수험생들이 철인삼종경기 출전자들에 비유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수험생들은 내신을 관리하고 수능을 준비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논, 구술의 부담까지 떠안는 삼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웬만한 대학들의 입학사정에 맞추다보니 어느 것 하나 소홀할 수가 없다.

  특히, 논술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은 학부모들을 사교육의 장으로 내모는데 일조를 한다. 정규과목에 편성되지 않아 그 실체가 모호한데다, 광범위하고도, 다양한 사고의 집적물을 글이나 말로써 표현해야  한다니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실제로 당사자인 학생들보다는 논술교육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세대인 학부모들이 느끼는 불안감은 더할 수밖에 없다. 해서 아이들은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논술학원에 드나든다.

  짬짬이 글쓰기를 가르친다는 것을 아는 지인들이 묻는다. 논술을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학원에 보내야겠지요? 두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을 갖고 있지 않은 나로서는 우물쭈물할 수밖에 없다. 그저 열심히 읽고, 열심히 쓰고, 열심히 말하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조심스레 말할 뿐이다.  고작해야 '연습'이라는 말에 힘을 주면서, 여건 상 혼자 할 수 없다면 학원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고 말해줄 수 있을 뿐이다.

  전혀 도움 될 것 같지 않은, 상식적이고도 모범적인 답안을 내놓고, 마음 한 구석엔 분노와 부러움과 자괴가 동시에 인다. 그것은 우리의 제도권 커리큘럼에는 전무한 논술교육에 대한 분노요, 교양인을 길러내는 선진국들의 논술 교육에 대한 부러움이요, 제대로 논술을 가르칠 줄 모른다는 것에 대한 스스로의 부끄러움이다.  학생들도 부담을 느끼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어렸을 때부터 충분한 연습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창의적 사고의 확장을 기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이다. 

  프랑스 대입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에서 논술 시험을 소개한 이 책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부러움이 절로 인다. 그들이 말하는 평균적 교양은 우리가 보기에 지성인들의 철학적 경지를 말하는 것 같다. 도무지 고등학생으로서는 감히 탐색하지 못할 것 같은 주제들을 다양하게 접근한다. 관용의 정신에도 비관용이 내포되는가, 노동은 욕구충족의 수단에 불과한가,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것에도 가치가 존재하는가, 등의 질문이 입시문제라는 것도 신선한 충격이고, 그것에 대한 다양하고 놀라운 답변들이 제시된다는 것도 더한 충격이다. 폭넓은 독서와 교양 교육이 바탕이 되어서인지 추상적이고 철학적이며 난해하기까지한 답변들이 즐비하다.

  그들에게 논술이나 철학은 학문이 아니라 교양적 차원의 논의이다. 생각하고 토론하고 논술하는 이러한 방식의 교육은 이미 나폴레옹시대부터 이어져왔다. 그러한 전통이 모여 프랑스인들을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의 세계로 이끈 것은 아닌지.  그에 비해 따로 논술이나, 철학, 나아가 토론식 수업 한 번 제대로 접해보지 못한 우리의 교육 현장에서 외피만 빌려입은 논술교육이 제대로 자리잡을 것인지는 의문이다.  부족한 연습으로는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 모두 옹골찬 알맹이에서는 한참 멀 수밖에 없다.   

  이제라도 늦지 않다. 논술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은 인정하는 분위기이니, 언젠가는 앞선 그들처럼 우리네 교실 풍경에도 토론과 에세이가 난무하게 되는 걸 지켜보게 되지 않을까.  단지, 입시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평균적인 교양을 지탱해주는 수단으로서 논술이 대접받는 그 시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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