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讀書記錄 161006
≪친일파의 한국 현대사≫ 서평 별점 ; ★★★★ 도서관 대출
내가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와 일제 식민지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아마 이야기의 시작이 을사오적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을 것이다. 내 주장은 나라를 팔아먹으라고 협박을 해도 목숨을 걸고 응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렇게 저항하다가 죽임을 당한다면 ... 죽어야지. 어머니께서는 몇 사람이 그렇게 죽어도 다른 사람이 그 일을 맡을 테고, 그 사람이 나라를 팔았을 것이라고 하셨다. 나는 그 일을 맡는 사람이 또 다시 협박을 당한다면, 그 사람이 역시 죽어야지. 우리 민족 모두가 한 사람도 남김 없지 죽을 때까지. 어머니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세상 일이 그렇게 네 생각과 같지 않아”라고만 하셨고 이야기는 중단되었다.
아마 우리나라가 ‘일제 식민지’라는 역사를 겪지 않았다면, 나는 철학에 대해 흥미를 가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한일 합방을 겪지 않게 할 철학, 논리, 이론은 무엇인가, 꽤 궁금했었다. 또 다른 감정, 놀라움은 생각 외로 변절자가 많았다는 것이다. 아마 내 가치관으로 ‘플라톤-노자주의’, ‘디오게네스-양주주의’, 다음으로 ‘아리스토텔레스-장자주의’를 위치시킨 것의 한 가지 이유이기도 하다.
뱀발 ; 나는 페미니즘이 철학의 사상 寫像이라고 생각한다. ‘일제 식민지 친일 논쟁’ 역시 철학의 사상이다.
* 밑줄 긋기
p44 그러나 결론부터 말해 윤치호는 조선(한국)의 잠재역량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 데다 식민지라는 ‘상황논리’에 빠지 나머지 결국 일제와 타협하고 말았다.
p45 대세순응주의
p51 (일제하) 조선인은 좋든지 싫든지 일본인이었습니다. ... 그렇기 때문에 일본 속국의 상태에서 그가 한 일로 누군가를 비난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질 않습니다.
p59 예술을 위한 친일인가, 친일을 위한 예술인가/p60 무용학자 정병호 교수는 최승희의 친일 행적으로 인정하면서도 “그의 예술적 목적을 위해 친일을 했을 뿐”이라며 그의 예술적 업적에 비중을 둔다. 반면 김종욱 선생은 “최승희는 도일 직후부터 본명 대신 일본식 이름 사이 쇼코로 활동한 열성 친일파”라며 친일의 본질에 초점을 두고 비판 대열에 섰다.
p72 모든 지식인들에게 지조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p80 ‘을사조약(늑약)’으로 불리는 이 조약의 체결에 찬성한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 등 5명을 ‘을사오적 乙巳伍賊’이라고 부른다.
p82 이근택은 처음부터 친일파는 아니었다. 대한제국 초창기 때까지만 해도 친러파였다.
p84 이 완벽한 친일파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 어떤 생각을 하기는 민중을 개, 돼지로 생각했겠지.
p85 ‘뼛속까지 친일파’
p86 수년전 이근택의 증손자들이 세간에 논란이 됐던 적이 있다. 큰 증손자인 이상우는 당시 국립 공주대의 현직 총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그의 동생 이춘우 역시 공주대 물리학과 교수를 지냈다. 경위야 어째됐건 간에 을사오적의 직계 후손이 국립대 총장으로 있다는 것은 민족감정에 맞지 않다는 지적이었다. ; 나는 이 문제가 가장 핵심적인 딜레마라고 생각한다. 조상의 연좌제를 어디까지 고려해야 하나.
p94 일제에 버림받아도 일제에 매달린 굴종의 생존전략 ; 이 전략이 가끔은 효과적이다.
p103 친일파 가운데는 지식을 팔아 일제에 아부한 집단이 있는가 하면, 경제적 기반을 제공한 대가로 기득권을 보전하고 일제와 유착관계를 형성한 부류도 있다. 박춘금은 이도 저도 없는 자였다. 그는 수하에 거느리고 있던 폭력 조직, 즉 ‘정치 깡패’ 집단이 유일한 자산이었다.
p122 ‘상징적 독립투사’의 비밀과 거짓말 ; 나는 ‘독립’뿐만 아니라 ‘민주화-민중운동’, ‘페미니즘’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p127 성공 비결은 매우 간단하다. 탐관오리와 전형적인 투기꾼의 양태가 그 답이다. ; 이것 역시 한국에서 21세기인 지금까지도 효과적인 전술이다.
p135 친일파 중에는 초창기에 민족 진영에서 활동하다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진 일제 말기에 친일로 변절한 사람이 상당수 있다.
p139 최남선은 양자택일의 기로에서 학문을 위해 학문을 위해 지조를 버렸다. 이런 선택을 두고 그는 ‘변절’이 아니라 ‘방향전환’이라고 했다. 명색이 학자를 자처한 그가 지조와 학식은 별개라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 나는 ‘변절’로의 방향전환이라고 생각한다. 지조와 학식은 별개가 아닐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조와 학문을 구분하는 편이다. 학자가 있고 지식인이 있다.
p144 을사늑약과 한일병탄에 앞장선 민병석/p145 일제 때 판사를, 박정희 정권 하에서 대법원장을 지낸 민복기
p178 일제하에서 고관대작을 지냈거나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한, 이른바 ‘친일파’로 불리는 사람들 중에서 더러는 자신의 친일 전력을 참회했다. 민족대표 33인 중 1인으로 나중에 변절한 최린은 반민특위 재판에서 법정을 온통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민족의 이름으로 이 최린을 광화문 네거리에서 처단해주십시오.”
p182 “고등관 이상의 관리는 모두 친일파”/p183 당시 군수라면 이 같은 일을 수행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이에 대해 그는 “그 같은 직무를 수행하는 군수 자리를 직업을 택했다는 자체가 ‘친일’입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항간에는 일제 말기에 군수 노릇 몇 년 한 사람을 ‘친일파’로 보는 것은 지나치다는 주장도 있다.
p323 친미에서 친러로, 친러에서 친일로 이완용/p331 시대의 흐름을 읽고 재빨리 친일로